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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현장을 가다 (2) 華容道에 關羽는 없었다

허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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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野의 劉備 거소 자리에는 소학교 들어서
⊙ 장비가 조조군 물리친 창반차오(長坂橋)는 다리도, 하천도 사라져
⊙ 장비는 조조 집안과 인척, 손권과 조조도 사돈지간
⊙ 화룽다오의 曹公祠에는 관세음보살상과 관우상이 자리 차지

許又範
⊙ 1962년 인천 출생.
⊙ 인하大 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석사.
⊙ 인하大 홍보팀장, 인하大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역임.
⊙ 저서: <삼국지기행> <역사의 향기는 바람처럼 날리고>.
당양 시내에 있는 조자룡상.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에게 의지한 유비(劉備)는 형주(荊州ㆍ징저우) 북쪽의 신야(新野ㆍ신예)현에서 7년을 지냈다. 신야는 조조(曹操)와 대립하는 최전선이지만 유비가 머문 이때는 조조가 원소(袁紹)의 잔당을 격퇴하기에 바쁜 시기였다. 그 덕분에 유비는 이곳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을 하며 군세(軍勢)를 가다듬는다. 아들 유선(劉禪)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무렵 유비에게는 무엇보다도 전략적 참모가 필요했다. 일당백(一當百)의 장수들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전쟁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적의 전략을 꿰뚫고 승리하는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책사(策士)가 더없이 절실했다.
 
  유비는 수경(水鏡)선생의 조언을 받아들여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룽중(隆中)의 제갈량(諸葛亮)을 만난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경영의 계책을 말한다. 바로 유명한 ‘융중대책(隆中對策)’이다. 융중대책의 요점은 중원(中原) 진출에 유리한 징저우와, 장강을 이용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 이저우(益州)를 차지하고,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조조에 대항한다는 것이다. 천하의 등뼈와 같은 형주를 얻으면 동남(東南)을 아우를 수가 있고, 동남을 얻고 나면 서북(西北)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공명의 계략은 지정학(地政學)에 근거한 전략이었다.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는 것은 유비가 자립(自立)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군사(軍師)로 영입하고 천하경영의 웅지를 펴기 위해 전열을 재정비했다.
 
 
  유비의 처소에 들어선 초등학교
 
제갈량이 10년간 머물며 천하경영의 웅지를 완성한 구룽중(古隆中) 입구.
  유비가 신예에서 보낸 7년은 소멸해 가던 유비집단이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시간이자, 도약의 발판을 다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유비에게 신예 시절이 없었다면 후일 촉(蜀)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쉬창(許昌)에서 여독을 달래고 신예로 향했다. 지난번 여행 때에는 일정의 촉박함 때문에 둘러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한껏 여유가 있다. 쉬창에서 신예까지는 231㎞로 중국에서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다. 신예는 난양(南陽) 분지의 남부에 있는데 후한(後漢) 말기에는 유표가 다스리던 징저우에 속해 있었다.
 
  한산한 시골거리를 연상케 하는 신예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한쌍성학교(漢桑城學校)였다. 이곳에 유비가 기거했다는 한쌍성(漢桑城)이 있다. 학교에 들어서니 수업이 시작되는지 운동장에서 뛰놀던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교실로 들어간다. 그중 몇몇 아이들은 운동장 가운데에 있는 한쌍성을 보고 있는 우리를 신기한 듯 바라본다. 한쌍성은 높이가 3m도 채 안되어 보이고 둘레도 장정(壯丁) 예닐곱 명이 팔을 벌리면 감싸안을 수 있는, 그야말로 아주 작은 성(城)이다. 아마 옛날에는 더 컸었겠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지금의 크기로 축소된 듯싶었다. 바로 성 안에 있는 성인 셈인데, 관우가 손수 심었다는 뽕나무 한 그루가 성을 다 차지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니?
 
  “네, 유비 할아버지가 한(漢)나라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에요.”
 
  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든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1800여 년을 지내며 부서지고 흩어진 유적이 셀 수 없이 많지만 유비를 생각하는 이곳 신예사람들은 한쌍성에 학교를 세웠다. 아이들은 고목(古木)에 피는 새싹을 보며 고단한 처지에서 몸을 일으켜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시대의 영웅이 됐던 유비의 정신을 배우고 있었다.
 
 
  창반차오에서 조조군이 물러난 이유는?
 
신예의 한쌍성학교 안에 있는 한쌍성(漢桑城).
  서기 208년. 원소를 무찌른 조조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南下)를 시작한다. 징저우는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유표의 뒤를 이은 어린 유장(劉璋)이 항복하는 바람에 조조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징저우를 차지한다. 조조는 병가필쟁(兵家必爭)의 요충지인 징저우를 얻자 너무도 기뻤다.
 
  조조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였고 유비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유비는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이참에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유비를 반드시 척결(剔抉)하고 싶었다. 그는 정예기병 5000명을 앞세워 밤낮으로 유비를 추격했다. 사태는 급박해지고 유비의 장수들은 몸이 달았다.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당양(當陽)에 이르렀을 때 유비군은 조조군과 부닥쳤다. 2000명의 군사로 어찌 기세등등한 조조군을 막을 수 있겠는가. 허겁지겁 달아나는 사이 유비는 가족과 백성을 잃었다.
 
  ‘상산(常山)의 호랑이’ 조자룡(趙子龍)이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신묘(神妙)한 무예솜씨로 유비의 아들인 아두(阿斗)를 구해내고, 장비(張飛)는 창반차오(長坂橋)에서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뒤쫓아 온 조조군을 무찌른다. 조조군이 주춤하는 사이 유비는 한수이(漢水) 방면으로 달아날 수 있었고, 관우가 이끌고 온 수군과 합류하여 지금의 후베이성 어저우(鄂州) 서북쪽인 판커우(樊口)로 피할 수 있었다.
 
  조조군이 창반차오에서 물러난 것은 장비의 대갈일성과 유비군이 매복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5000명의 정예기병이 어찌 장비의 목소리에 모두가 하나같이 주눅들 수 있겠는가. 무리한 추격에 따른 피로감과 적진 깊숙이 침투한 선발대의 위험성, 점령지 샹양(襄陽)에 대한 대책마련 등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두를 배려해도 추격군이 도망자를 쫓고도 싸움 한 번 없이 되레 물러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다. 정녕 이유가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장비의 처(妻)와 관련이 있다.
 
 
  장비와 조조는 姻戚관계
 
제갈량의 초려 앞에 선 필자.
  장비의 처는 하후패(夏侯覇)의 사촌여동생이다. 건안(建安) 5년(200년)에 땔감을 구하던 열서너 살의 처녀를 장비가 욕보였는데 양가집 규수임을 알고는 처로 삼았다. 하후패는 조조의 친척이자 심복인 하후연(夏侯淵)의 차남이다. 어찌되었거나 장비는 하후연의 당질녀와 결혼하였으니 그 또한 5촌인 셈이다.
 
  조조의 부친인 조숭(曹嵩)은 대환관인 조등(曹騰)의 양자인데 본가가 하후씨(夏侯氏)였다. 조숭은 하후씨의 아들이고 하후돈(夏侯惇)의 숙부였다. 조조는 하후돈과 사촌형제 사이이고, 하후연과도 가까운 사이인 셈이다.
 
  아무리 전쟁터라 하여도 가까운 친인척이 사생결단으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창반차오까지 추적해 온 조조군의 장수는 하후돈, 하후연, 조인(曹仁) 등이었다. 따지고 보면 장비와는 외척인 장수들이다. 장비의 무예가 출중한 것도 있지만 이러한 친척 사이의 정의(情誼)가 작용했기 때문에 창반차오에서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관중(羅貫中)은 이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간략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도 한 편의 장황한 이야기를 만들던 그가 장비가 조조 집안과 인척 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왜 침묵을 지켰을까. 그 이유는 ‘촉한정통론’에 있다. 유비 집단이 주인공이고 조조 집단은 쳐부수어야 할 적인데 유비의 심복인 장비가 이러한 악인(惡人) 집단과 가까운 인척관계라는 것을 밝힐 수는 없었던 것이다.
 
 
  창반차오 자리엔 비석만 남아
 
조자룡과 장비의 활약상을 모아놓은 창반포 공원 입구.
  장비의 호쾌한 무용담이 서린 창반차오는 당양에서 북동쪽으로 4㎞ 지점인 바링촌(覇陵村)에 있다. 창반차오는 원래 바링차오(覇陵橋)라고 불렀다. 당양의 관리들을 이곳에서 영접하거나 배웅했기 때문에 관교(官橋)라고도 했는데, 창반포(長坂坡)와 가깝기에 창반차오라고 부른 것이다.
 
  바링촌은 산을 등지고 있는 아담한 마을로 앞에는 넓은 평지로 논들이 펼쳐져 있다. 마치 우리의 시골풍경을 보는 듯하다. 논에서 서쪽 끄트머리인 삼거리에는 ‘장익덕횡모처(張翼德橫矛處)’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이곳이 장비가 조조군을 무찌르며 영웅의 기개를 드높였던 창반차오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이곳에는 물의 흐름을 조절하는 봇둑과 다리가 있었으며, 창반포의 두 영웅인 장비와 조자룡을 제사 지내는 장자오쓰(張趙祀)라는 사당도 있었다고 한다. 다리 이름이 원래 바링차오인 것도 바로 ‘봇둑(覇)’과 ‘사당(陵)’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도 사당도 없다. 흐르던 물길도 사라졌다. 창반차오 밑을 흐르던 쥐허(沮河)의 흐름이 남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직 ‘장익덕횡모처’라는 비석만이 당시의 치열했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의 쥐허는 당양 시내 북쪽으로 흐른다. 그곳에는 길이 500m의 현대식 당양교가 있는데 양쪽 난간에는 장판포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조자룡과 장비의 이야기가 조각되어 있다.
 

 
  손권의 전략가 노숙
 
후난성(湖南省) 웨양(岳陽)에 있는 노숙묘(魯肅墓).
  당양에서 조조에게 패한 유비는 갈 곳이 없었다. 오직 하나 있다면, 손권과 동맹을 맺어 조조에게 대항하는 방법뿐이었다. 이러한 때 노숙(魯肅)이 구세주처럼 유비 진영에 나타난다. 하지만 노숙도 손권에게 동오판 융중대책인 ‘천하양분지계(天下兩分之計)’를 설파하였기에 징저우의 사태가 급변하자 이를 직접 확인하고 유비와 동맹을 맺어 노숙판 융중대책를 시행하고자 했다. 제갈량과 노숙이 서로의 속셈은 달랐지만 뜻은 같았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의 노숙은 성실하고 온순하다. 아니 무골호인(無骨好人) 같아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그려졌다. 노숙이 주창한 천하양분지계도 제갈량의 융중대책에 가려 빛을 잃는다. 그리고 노숙은 제갈량의 영원한 우군이 되어 그의 추종자로 변신한다.
 
  하지만 노숙의 진면목은 그렇지 않다. 호탕하고 의협심이 강한 성격에 사람들에게서도 두루 신망을 얻었다. 유복한 지주 출신이어서 베풀기도 잘했다. 일찍이 주유(周瑜)가 노숙에게 군량미를 빌린 적이 있었다. 이때 노숙은 두말없이 곡식창고를 열어 주유에게 주었다. 분연히 출자하여 친구를 돕는다는 ‘지균상증(指?相贈)’의 고사도 노숙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노숙은 주유, 장소(張昭)와 함께 손권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였다. 하지만 노숙의 영향력은 이들 중에서도 최고였다. 노숙이야말로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식견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조의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저항할 것을 주장했고, 징저우라는 요충지를 유비에게 빌려주면서까지 더욱 큰 비전을 성취하려고 했다. 이런 노숙과 통한 이는 제갈량이었다. 그래서 둘이 있을 때 촉오(蜀吳)동맹은 견고했다. 어렵고 변화무쌍한 난국에서도 비범한 배짱과 유연한 전략을 구사하며 이를 타개해 나가는 인물, 그가 곧 노숙이었다.
 
  한편, 유비의 생사존망(生死存亡)은 손권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손권은 조조와 유비를 놓고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참모들도 주화파(主和派)와 주전파(主戰派)로 나뉘었는데, 주화파 쪽이 강했다.
 
  주화파의 요지는 대세로도 조조를 대적할 수 없고, 조조에게 항복하면 전쟁 없이 강남(江南)을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때 제갈량이 등장하여 동오(東吳) 참모들과의 설전(舌戰)에서 보기 좋게 승리함으로써 주전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손권은 유비와 동맹을 맺고 조조에 대항하기로 결심한다.
 
 
  손권과 조조는 사돈지간
 
삼국지 최대 격전장이었던 적벽대전이 벌어졌던 우린(烏林)에 들어선 마을.
  제갈량이 동오의 참모들과 벌인 설전군유(舌戰群儒)는 외교적 능력이 뛰어난 제갈량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손권은 조조와의 일전 여부를 앞두고 참모인 노숙과 주유의 진언을 받아들여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다만,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징저우 지역을 대표하여 온 제갈량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었을 뿐이었다.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 장군께서는 강동에서 군대를 일으키셨고, 우리 유 장군께서는 한남에서 힘을 모으셨으니, 조조와 함께 천하를 다툴 것입니다.”
 
  제갈량의 간단한 이 말은 유비와 손권을 동일한 위치에 놓으면서 한편이 되게 하고, 조조와는 적대적인 자리에 있으며 천하삼분을 이야기하는 고도의 화술(話術)이다. 이때 손권의 생각을 확고하게 해주는 사건이 발생한다. 조조가 손권에게 편지를 한 통 보냈는데, 요약하자면 “항복하라. 그러지 않으면 80만 수군을 이끌고 가서 오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자못 불쾌한 내용이었다.
 
  손권은 조조와 사돈지간이다. 동생 손광(孫匡)이 조조의 조카딸과 혼인했고, 손권의 조카딸은 조조의 아들인 조창(曹彰)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권은 유비를 택했다. 동등한 사돈지간은 가능할지언정 사돈에게 항복하여 복종하기엔 손권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조조를 도와 유비를 없애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처럼 다음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도 알았으리라. 유비와 손을 잡고 조조에 대항하는 것은 손권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제갈량이 유비 집단의 이익을 위해 동맹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손권도 자신의 정치적 득실이 철저하게 고려된 결과였다. 그러나 손유동맹(孫劉同盟)의 최대 수혜자는 유비다. 조조에게 미움 받은 유비는 항복할 수 없었다. 항복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아는 유비인지라 필사의 탈출을 시도하여 손권과의 동맹에 성공했고 이를 통해 구사일생할 수 있었다.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은 조조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창장(長江)을 거슬러 올라 싼장커우(三江口)에 진을 친다. 연합군은 동오의 도독(都督) 주유가 지휘를 맡는다.
 
 
  삼국지연의 120회 중 8회를 적벽대전에 할애
 
적벽대전 당시 조조군의 군영이 있었던 곳인 차오차오완(曹操灣).
  조조는 적벽대전을 앞두고 탐색전에서 동오의 감녕(甘寧)에게 패한다. 북방에서 온 칭저우(靑州)와 쉬저우(徐州)군사들이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조조는 장윤(張允)과 채모(蔡瑁)로 하여금 수군훈련을 시키도록 한다. 장윤과 채모는 징저우 사람인데 조조에게 항복한 자들로 수전에 익숙한 장수들이다.
 
  이들에 의해 실시되는 수군훈련은 절묘하고 깊이가 있었다. 또한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위세를 드높이고 있었다. 주유가 이를 걱정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동문수학한 친구 장간(蔣幹)이 조조의 세객(說客)이 되어 오자 주유는 이것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임을 알았다. 주유는 장간을 통해 장윤과 채모가 동오와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이에 속아 넘어간 조조는 장윤과 채모를 죽였다.
 
  적벽대전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전쟁이었다. 그러한 만큼 그 전투장소가 어딘가에 대한 논쟁이 심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푸치(蒲圻)시에 있는 츠비(赤壁·적벽)가 적벽대전의 장소임에 의심하지 않는다. 푸치시는 후베이성 우한(武漢)에서 남서쪽으로 140㎞ 지점에 있는데, 전쟁이 벌어진 적벽산은 이곳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40㎞ 떨어진 창장변에 있다.
 
  나관중은 총 120회의 삼국지연의 중에서 적벽대전 부분을 장장 8회에 걸쳐 썼다. 그만큼 적벽대전 이야기는 삼국지연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징저우(荊州)에서 세 시간 넘게 달려 훙후(洪湖)에 도착했다.
 
  훙후에는 우린(烏林)이 있는데 이곳은 조조군이 적벽대전을 앞두고 대군영(大軍營)을 세운 곳이다. 우린은 육지뿐 아니라 강가에 있는 대군도 북으로 통하는 길목이어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아울러 조조군이 보급품 조달을 위해 군량 비축장소로 사용한 곳이다.
 
 
  쓰레기더미 뒤지자 나온 조조의 흔적
 
  우린의 중요성은 삼국지연의에서도 잘 나타난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주유가 내린 첫 번째 군령이 감녕으로 하여금 조조군으로 위장하여 우린을 급습하라는 것이었다. 제갈량 또한 파이펑타이(排風臺)에서 주유의 계략을 벗어나 유비군의 근거지인 샤커우(夏口)로 돌아오자마자 조자룡에게 가장 먼저 내린 명령도 이곳 우린을 장악하라는 것이었다.
 
  “적벽대전 당시에 이곳은 나무가 울창한 숲이었지요. 그런데 그 전쟁으로 인해 잿더미가 됐어요.”
 
  적벽대전 현장을 안내하는 가이드는 마치 그날의 참화를 직접 목격한 듯 확신에 찬 말투로 설명한다. 갈대라면 모를까 수시로 물이 불어나는 강변에 어떻게 숲이 무성할까. 내심 의아해 하며 조조군이 화공(火攻)에 전멸(全滅)한 ‘오림삼국고전장(烏林三國古戰場)’을 찾았다. 이곳의 지명은 지금도 후베이성 훙후시(洪湖市) 우린진(烏林鎭)이다.
 
  우린은 그야말로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먼저 적벽대전 당시 조조의 대군영이 있던 곳인 차오차오완(曹操灣) 푯말을 찾으려고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길은 좁고 온통 진창인데 유채만이 빼곡하다. 알고 보니 콩, 깨, 유채가 이곳의 특산물이라고 한다.
 
  유채로 둘러싸인 마을 어귀에는 곳곳에 작은 연못이 많다. 양어장이다. 양어장 주변 논에는 오리와 거위, 닭들이 사이좋게 먹이를 찾고 그 옆에는 물소가 한가롭다.
 
  마을 사람 여럿에게 물어도 차오차오완이 어딘지 모른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아저씨가 일러준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은 다름 아닌 동네의 쓰레기장이다. 한여름 제철을 만난 풀들까지 무성하다.
 
  ‘이곳이 차오차오완이라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단은 푯말을 찾아보기로 했다. 무성한 풀을 헤치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자 작고 허름한 푯말이 나타난다. 쓰레기와 풀더미 속에 있었으니 누군들 차오차오완을 알 수 있겠는가. 무상한 역사의 애잔함만 푯말에 켜켜이 묻어 있는 것이 중국인들의 조조에 대한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관세음보살과 관우상이 들어선 曹公祠
 
우린진(烏林鎭) 입구에 허름한 채 스러져가는 조공사(曹公祠).
  10여 분을 걸어서 마을 입구로 나오니 옛날 지명을 알려주는 우린자이(烏林寨)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이 근처에 조공사(曹公祠)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어디에 있나요?”
 
  “모르겠는데요. 그런 것은 처음 들어요.”
 
  주민들은 조조 유적을 하나같이 모른다고 한다. 할아버지께 물어보았더니 아예 없어졌단다. ‘역시 조조의 유적이라 파괴되었구나’ 생각하며 공터를 지나오는데 공터 옆에 낡고 부서진 건물이 하나 있다.
 
  ‘저 건물은 무얼까?’
 
  궁금해서 확인해 보니 내가 찾던 조공사가 아닌가. 바로 옆에 두고도 모른다고 하고 없어졌다고 하니 저들의 심보는 무엇인가. 조공사를 세운 까닭은 이곳에서 패한 조조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것일 터인데, 지금의 사람들은 아예 조조라는 이름조차도 부르기 싫은 것인가.
 
  그러고 보니 조공사 안에는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과 관성제군상(關聖帝君像)이 있다. 낡고 부서진 건물의 외양이 말해 주듯 조조의 사당은 이미 오래전에 잊혔고, 이제는 마을사람들의 기복신앙 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니 어찌 조공사를 알 수 있겠는가.
 
  “츠비를 가려면 여기서 배를 타고 건너야 합니다.”
 
  창장은 며칠 전에 내린 폭우로 아예 바다가 됐다. 바다 같은 창장에 배는 보이지 않고 나무 한 그루 없는 선착장은 쏟아지는 뙤약볕으로 온통 한증탕이 됐다. 한 시간이 지날 즈음, 우리를 태울 배가 도착했다.
 
  커피색 짙은 강물을 헤집고 적벽고전장(赤壁古戰場)을 찾아가는 마음은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삼국지 최대의 전장(戰場)인 적벽은 누구나가 보고 싶은 필수코스이기 때문이다. 저 멀리 ‘적벽’이라 쓰인 바위절벽이 보이고 강물은 바로 그 밑까지 출렁인다. 정말 비가 많이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츠비산의 주유상
 
츠비산 정상에 있는 주유상(周瑜像).
  츠비의 옛 지명은 푸치(蒲圻)였는데, 1998년부터 지금의 츠비시가 됐다. 적벽고전장에는 세 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그리 높지 않은 산이 있다. 각각 진롼산(金鸞山), 난빙산(南幷山), 츠비산(赤壁山)이라 불리는데 통칭(統稱)하여 츠비산이라 부른다.
 
  츠비산에 오르니 제일 먼저 적벽대전 승리의 주역인 주유상이 보인다. 산등성이를 일궈 만든 평지에 세워진 주유상은 커다란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갑옷과 투구로 치장한 주유의 모습이 웅장하게 조각됐다.
 
  그러나 조각상은 창장을 향하고 있지 않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냥 역사적인 자리에다 세워만 놓은 것일까. 역사적 기념물은 그 의미가 역사와 부합되어야 더욱 빛이 난다. 자세한 고증 없이 대충대충 세워지는 것은 관광 상품용이라는 방증이 아닐까.
 
  난빙산에는 제갈량을 모시는 우허우궁(武侯宮)이 있다. 이곳은 제갈량이 제단을 쌓고 동남풍을 빈 곳이기도 해서 바이펑타이(拜風臺)라고도 하는데, 제갈량이 무향후(武鄕侯)라는 작위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고 있다.
 
  바이펑타이 남쪽에는 적벽대전 문물전시실(文物展示室)이 있다. 이곳에는 수십 년 동안 츠비산 일대에서 출토된 화살촉, 칼, 창 등 각종 전쟁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방통(龐統)이 머물렀다는 펑추안(鳳雛庵)은 진롼산 중턱에 있는데, 검은색 기와에 흰색 건물이 수령(樹齡) 1000년도 넘는 은행나무 아래 고풍스럽다. 그 앞에는 등나무가 있는데 방통은 이 등나무를 보고 연환계(連環計)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후세에 지어낸 이야기다. 삼국지 유적은 중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모두 삼국시대의 유적은 아니다. 소설에 의해 후대에 만들어진 문학적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칠실삼허(七實三虛)의 이야기가 만든 삼실칠허(三實七虛)의 유적지를 찾는다. 그리고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병사들의 핏물로 물든 赤壁
 
제갈량이 동남풍을 빌었다는 바이펑타이(拜風臺).
  서기 208년 10월. 조조는 창장 연안을 따라 배치한 영채들을 시찰하고 군사들의 위세에 만족했다. 승리는 이미 결정된 것인 듯 자신만만했다.
 
  교교한 달빛이 창장을 비추고 창장은 마치 흰 비단을 깔아놓은 것 같았다. 난빙산의 경치가 그림 같았다. 동쪽으로 차이쌍(柴桑)의 경계지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샤커우(夏口)의 강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판산(樊山)을 바라보고, 북쪽으로 우린(烏林)을 바라보아도 어느 한 곳 막힌 곳 없이 탁 트였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 조조를 눈멀게 했을까. 조조는 창장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그리하여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동풍이 불어주지 않는구나.’
 
  주유는 제갈량이 자신의 병의 근원을 알려주자 깜짝 놀랐다. 삼경이 됐다. 주유가 막사를 나와 깃발을 보니 깃발은 서북쪽을 향해 힘차게 나부꼈다. 진짜 동남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주유는 전군에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군사를 풀어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제갈량의 수급(首級)을 베어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자룡으로 하여금 미리 대기시킨 쾌속선을 타고 주유군의 추격을 따돌렸다. 주유가 ‘자신을 세상에 내고 어찌 제갈량을 또 보내셨느냐’고 토로하였듯이 어찌 신묘한 제갈량을 대적할 수 있단 말인가. 분함에 땅을 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적벽대전의 시작은 항복을 가장한 황개(黃蓋)의 돌격대가 개시했다. 황개의 불타는 쾌속선이 화살처럼 조조군의 영채를 공격하자 불은 바람을 타고 서로 연결된 전선(戰船)을 거침없이 태웠다.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고 하늘과 땅은 온통 시뻘겋게 물들었다. 조조의 천하통일 야심은 불길에 산산조각이 나고 남쪽 강가의 바위절벽으로 흩어졌다. 저녁노을이 이를 더욱 붉게 하였고 수많은 병사의 핏물이 절벽에 부딪치며 몸서리를 쳤다. 스터우관(石頭關)이라는 본래의 이름이 사라지고 츠비(赤壁)라고 불린 것도 이때부터다.
 
  적벽대전 최고의 영웅인 주유는 손권의 형인 손책(孫策)과 의리로 뭉친 친구였다. 그는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손책이 죽자 주유는 솔선하여 동생인 손권을 지지하고 장소와 함께 손권의 좌우 핵심이 됐다. 손권에게 있어서 주유는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는 것과 같았다.
 

 
  풍토병에 패한 조조군
 
  주유는 조조의 실상을 정확히 판단하고 전쟁에 임했다. 그는 먼저 조조의 80만 대군은 위협을 가하려는 수치임을 간파했다. 그리고 조조군의 병사는 15만~16만명이지만 매우 지쳐 있고, 새로 편입된 유표의 부하들이 7만~8만명이지만 의심하며 관망하는 상태임을 알았다. 그는 휘하 장병들에게 “피로에 지친 병사, 의심으로 관망하는 병사는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오합지졸이기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주지시킨다. 그는 조조군은 본거지가 불안함에도 무턱대고 쳐들어온 것, 자신들의 장점인 기병을 버리고 단점인 함선을 사용한 것, 계절이 말에게 먹일 풀도 없고 겨울이 닥치면 병사들의 보급물자도 넉넉지 못할 것,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은 곳에 대군이 원정했으니 반드시 질병이 발생할 것임을 확신한다.
 
  주유가 예상했던 대로 조조군은 남쪽의 날씨와 환경에 익숙하지 못해 치명적인 주혈흡충병(住血吸蟲病)에 걸린다. 이 병은 익혀 먹지 않은 음식물을 통해 장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병원체들이 모공을 통해 인체에 들어가 장점막과 간장, 혈액 등을 파괴하는 급성감염이다. 이 병에 걸리면 발열, 복통, 설사 등이 뒤따르고 심할 경우에는 내장에 물이 괴고 복부파열로 이어져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병증은 오랜 세월 풍토병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이는 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편지내용에 “적벽에서의 전투는 전염병이 생겨 내가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물러난 것인데 뜻하지 않게 주유가 명예를 얻었다”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후난성 창사(長沙)에서 발굴된 한나라 때의 무덤인 마왕두이(馬王堆) 1호묘와 후베이성 장링현(江陵縣)에서 발굴된 한나라 무덤의 남녀 시신을 해부한 결과 이러한 풍토병의 존재가 사실로 입증됐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본다면, 적벽대전은 강남의 풍토병에 걸린 조조군이 초기 전투에 패배하고 강의 북쪽인 우린으로 물러났다가 손권군이 화공(火攻)을 가해 오자 감당하지 못하고 퇴각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주유가 남겼다는 ‘적벽’ 글자의 진실
 
  삼국지연의는 제갈량을 신출귀몰한 전략가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 최대의 피해자가 주유였다. 주유는 손권 진영이 조조군의 위세에 눌려 주화론으로 기울었을 때 분위기를 바꿔 손유(孫劉)동맹을 이끌어냈고, 직접 전쟁을 지휘해 조조군을 격퇴한 적벽대전의 주역이었다. 주유가 아니었다면 천하는 일찍이 조조의 것이 되었을 것이고, <삼국지연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벽대전이 벌어진 츠비산 절벽에는 붉은색으로 커다랗게 ‘적벽(赤壁)’이라고 쓰인 글자가 있다. 이는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주유가 축하연을 열어 모든 병사를 위로하고 승전(勝戰)을 기념하여 새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적벽’이라는 글씨는 해서체다. 해서체는 당(唐)나라 때의 서풍(書風)으로 삼국시대에는 예서체를 많이 썼다. 그러므로 이 글씨가 진짜 주유가 쓴 것인지는 미심쩍다. 오히려 그 위에 초서체로 새겨진 ‘란(鸞)’이 더욱 의미 있는 글자로 보인다. 이 글자는 ‘천자가 타는 수레’라는 의미가 있다. 조조의 야망을 꺾은 손권이 천하를 호령하기를 희망하며 썼다면 그럴듯하지 않을까. 손권의 흐뭇함이 글자 속에 배어있는 듯하다.
 
  츠비의 벼랑에는 역대의 문인(文人)과 묵객(墨客)들이 지은 시문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희미하여 알아볼 수 없다. 절벽 위에는 이장팅(翼江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주유가 화소적벽(火燒赤壁)을 지휘한 곳이라고 한다. 육각의 정자에 올라 북쪽 강변을 보니, 도도한 창장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야말로 최고의 전투지휘소였으리라. 주유의 석상 옆에는 망장팅(望江亭)이라는 정자도 있다. 이곳은 황개가 조조의 수군 영채를 정찰했던 장소라고 한다. 조조의 수군이 모두 연결된 것을 보고 거짓 투항과 화공을 제안했던 곳이다.
 
  츠비에서 창장의 하류로 4㎞ 떨어진 곳에는 루커우(陸口)가 있는데 창장 남쪽 내륙을 흐르는 루수이(陸水)가 합류되는 장소이다. 이곳은 강동을 지키는 요지여서 이곳을 잃으면 강동이 위태로워진다. 이를 잘 아는 손권과 주유가 전략적 요충지의 확보를 위해 신속히 츠비까지 나아가 방어를 한 것이다. 만약 조조의 대군이 츠비를 먼저 차지했다면 손권은 루커우에 방어망을 구축했을 것이고, 조조는 루수이의 흐름을 타고 순조롭게 항진(航進)하여 손권을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하게 했을 것이다.
 
적벽고전장이 있는 츠비산 마애석각.
 
  화룽다오에 관우는 없었다
 
  천하통일을 꿈꾸며 자신만만했던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달아나기 바빴다. 조조는 달아나면서도 주유와 제갈량의 지략이 모자람을 비웃는다. 그러나 그때마다 제갈량의 군령(軍令)을 받은 조자룡과 장비가 나타나 조조의 웃음을 일거에 깨뜨린다. 조조는 강릉으로 후퇴하는 길인 화룽다오(華容道)로 접어들며 또다시 주유와 제갈량의 식견 부족을 비웃다가 관우와 부닥친다. 군사는 지쳤고 수적으로도 불리했다. 게다가 관우의 모습을 본 조조의 군사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싸울 기력조차 없었다. 조조는 신의(信義)를 중시하는 관우에게 지난날 자기가 베풀었던 은혜를 상기시키고 위기를 벗어난다.
 
  관우가 화룽다오에서 조조를 의로써 풀어주었다는 ‘관운장 의석조조(關雲長義釋曹操)’는 나관중이 만든 이야기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무제기(武帝紀) 배송지주(裵松之註)에 의하면,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후 화룽다오를 통하여 강릉으로 되돌아왔는데, 늪지대와 비바람을 만나 군사를 많이 잃고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조조는 “유비는 나와 동등한 무리이지만 계책을 세우는 것은 나보다 한 수 아래다. 그가 만약 일찍이 불을 놓았더라면 우리는 전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쫓아온 유비가 불을 놓았지만 이미 조조는 빠져나간 뒤였다. 조조의 말대로 유비가 한 수 아래였던 것이다. 그러니 복병을 만나 공격을 받은 적도 없다. 그야말로 안전한 탈출을 한 셈이다.
 
  촉한정통론에 입각한 삼국지연의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각색한다. 신출귀몰한 제갈량의 전략으로 후퇴하는 조조를 세 번씩이나 쳐부순다. 그리고 관우를 화룽다오에 배치하여 조조에게 신세진 빚을 갚게 함으로써 관우를 한껏 띄운다. 나관중이 줄곧 견지해 왔던 제갈량과 관우의 초인적 활약상은 적벽대전에서 가장 극적인 효과를 얻는다.
 
 
  華容古道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가 후퇴한 길인 화룽구다오(華容古道).

  조조가 패주(敗走)했던 화룽다오는 어디일까. 지금의 후베이성 젠리현(監利縣) 볜허향(卞河鄕) 차오차오촌(曹橋村)에서부터 마오스진(毛市鎭)까지 약 10㎞의 좁은 길을 말한다. 젠리현은 창장의 북쪽 강변에 있다. 남쪽 강변에도 화룽현(華容縣)이라는 곳이 있지만 이곳은 옛날의 화룽다오가 아니다. 왜냐하면 한나라 때 이곳은 잔능현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남안현이라 불렸기 때문이다. 젠리현은 한고조 때부터 화룽현이라 불렸는데 손권이 황제를 칭하고 나서 화룽현의 일부를 젠리현으로 분리했다. 그 후에 화룽현을 젠리현에 편입시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조가 세 번 웃었다는 곳은 양린산(陽林山), 후루커우(葫蘆口), 팡차오포(放曹坡)이다. 양린산은 젠리현의 경계인데 산세가 그리 높지는 않아 보인다. 이 산은 조조군이 창장에서 패하고 육지로 탈출할 때, 손유동맹군의 지략부족을 비웃다가 조자룡의 매복공격에 혼이 난 곳이라고 하는데 역시 소설의 영향이 크다.
 
  이곳 사람들은 조자룡의 공적을 기려 양린산을 쯔룽강(子龍崗)이라고 부른다. 양린산에서 남서쪽으로 18㎞ 정도 떨어진 곳에 스쯔산(獅子山)이 있다. 이 산 속에 후루커우라는 언덕이 있는데 지형이 험하여 낮에도 어둡다. 그러나 이곳은 화룽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기에 조조는 이곳을 거쳐 갈 수밖에 없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는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두 번째로 웃다가 장비의 공격을 받고 갑옷도 입지 못하고 도망친 것으로 되어 있다.
 
  후루커우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는 길이 곧 옛날의 화룽다오이다. 두 번씩이나 혼쭐이 난 조조군은 사기는 물론 기력과 체력까지도 바닥이 났다. 굶주림에 비까지 퍼부어대니 산송장이나 다름이 없었으리라. 이러한 때 주변에 무를 심어놓은 밭이 보였다. 무로 허기를 채우는 군사들에게 조조는 너무 많이는 먹지 말라고 한다. 무를 심은 농민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곳을 주차오톈(救曹田)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2㎞ 정도를 가면 조조가 하늘에 탄식하고 늪지대를 건넜다는 곳에 이르는데, 그곳에 ‘화룽구다오(華容古道)’라는 표지석이 있다.
 
  마을 어귀에 도착해서 화룽구다오를 찾아보기로 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주위의 이정표와 대조하며 가늠을 해도 좀체 찾을 수가 없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역시 아는 사람이 없다. 샛길은 여러 갈래인데 길마다 들어가서 찾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진창길 끝에서 발견한 ‘화룽구다오’푯말
 
관우가 신의를 지켜 조조를 놓아주었다는 팡차오포(放曹坡).
  비안허향사무소로 전화를 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전화통화가 안된다. 알고 보니 전화요금이 체납되어 전화가 끊긴 것이다.
 
  “공공기관이 전화요금을 안 냈다니 거참 믿기지가 않네요”라고 말하자, 안내자는 “종종 있는 일”이라며 웃는다. 중국은 참으로 재미있는 나라다.
 
  이곳 주민들에게 화룽다오를 묻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주민 대다수는 이곳이 조조와 관련된 장소임에도 조조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유비 삼형제의 영웅담과 제갈량의 신출귀몰한 지략은 사실여부를 떠나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이 누구와 관련된 곳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야말로 그들이 좋아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즐겨 말하는 이야기만 길가에 생생하다.
 
  마을의 큰길을 몇 번 왕래했을까. 대부분의 사람이 우리 차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때쯤, “조조비를 찾나?”하는 어떤 할아버지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조조비라…’그럴 수 있겠다 싶어 길을 물었다.
 
  이미 화룽다오는 아무도 모르는 터에 할아버지가 말하는 곳이라도 찾아보고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샛길은 더욱 험했다. 마치 우리나라 1960년대의 시골길을 가는 듯 진창길마다 물이 넘쳐난다. 한참을 나아가니 좁다란 삼거리 길 옆으로 검은색 푯말이 하나 보인다. 콘크리트로 만든 푯말에 ‘삼국유적화용고도(三國遺跡華容古道)’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아! 이제야 찾았구나’ 탄성이 절로 나온다.
 
  조조가 많은 병사를 잃어 가며 지났다는 늪지대는 지금 널따란 논으로 변했다. 그리고 닭들이 한가로운 나들이를 겸한 먹이사냥으로 한창이다. 화룽구다오를 걸으니 마치 카펫을 밟는 것처럼 푹신푹신하다. 장맛비라도 내리면 예전의 늪지대로 변할 것만 같다.
 
 
  유비, 징저우를 차지하다
 
  화룽구다오가 끝나는 지점인 마오스진 근처에는 수목이 우거진 언덕이 있다. 이곳이 팡차오포인데, 조조가 세 번째로 웃다가 관우의 매복에 걸려 목숨을 구걸하여 달아난 곳이다. 지명 이름에서조차도 신의의 화신인 관우를 존경하는 중국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반면 조조는 어떠한가. 유비와 제갈량보다 한 수 빨리 계략을 구사하며 탈출했지만 나관중은 조조로 하여금 세 번의 공격을 받아 커다란 타격을 받은 것처럼 꾸몄다. 조조에게 있어서 역사적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로지 ‘최고의 악인’이라는 이미지 표현에 모든 것이 집중될 뿐이다. 그리고 나관중은 ‘역사’라는 재료에 ‘문학’이라는 양념을 넣고 비벼 탁월하게 목적을 달성했다.
 
  적벽대전 이후 징저우의 반을 차지한 유비는 이제 제갈량이 초려(草廬)에서 제안한 융중대책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유비는 징저우를 온전하게 차지하기 위해 손권에게 압력을 가하는 한편 이저우(益州ㆍ촉)를 차지하기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손권은 유비가 징저우를 차지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유비를 공격할 수도 없었다. 북쪽에 있는 조조가 권토중래(捲土重來)하며 언제 다시 공격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노숙의 말처럼 유비와 동맹을 맺어 아군으로 삼고 조조에게 대항하는 것이 필요했다. 유비도 제갈량이 누차 강조한 손권과의 동맹관계 유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유비는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유 덕분에 징저우를 차지했다. 이제 유비는 그 옛날의 떠돌이가 아니었다. 그는 ‘유황숙(劉皇叔)’이란 이름을 내세워 ‘한황실의 부흥’이란 기치를 높이 들었다. 제갈량이 제안한 ‘천하’가 바로 손에 잡힐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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