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삼국지 현장을 가다(1) 후라오관에서 관도까지 曹操의 발자취를 찾아서

허우범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옥수수밭·콩밭이 된 제후연합군과 여포의 결전장 후라오관(虎牢關)
⊙ 曹操의 고향 쉬창에는 地下隱兵道 남아 있어
⊙ 찾는 이 없어 폐허가 된 관도 전쟁터 기념관

許又範
⊙ 1962년 인천 출생.
⊙ 인하大 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석사.
⊙ 인하大 홍보팀장, 인하大 물류전문대학원 행정실장 역임.
⊙ 저서: <삼국지기행> <역사의 향기는 바람처럼 날리고>.
녹슨 채 방치되고 있는 중머우 관도교촌 입구의 관도 전투 기념 조형물.
  베이징(北京)을 떠나 허난성(河南省) 정저우(鄭州)로 향한 비행기가 강풍 때문에 공항 상공을 세 번이나 선회한다. 긴장감 속에 착륙했지만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어선지 날씨마저 낯설지가 않다. 기다리고 있는 징(荊) 사장과 반갑게 만나서 곧장 후라오관(虎牢關)으로 향했다. 후라오관은 <삼국지연의>(역사서 <삼국지>와 구분하기 위해 소설을 <연의>로 약칭함) 초기의 군웅쟁패(群雄爭覇)를 보여주는 주요 유적지다.
 
  한(漢)나라 말기, 외척의 전횡과 환관의 득세로 정권은 부패하고 천재지변까지 겹쳐 민심은 흉흉했다. 급기야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너도나도 황건적(黃巾賊)이 됐다. 어차피 죽는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십상시(十常侍·황제 측근의 환관 10명)의 난으로 조정이 혼란하자 서량자사(西凉刺史·서량은 지금의 간쑤성) 동탁이 패권을 장악했다. 동탁은 당대 최고의 무장(武將)인 여포를 양아들로 삼고 폭정을 일삼았다.
 
  이에 조조의 격문에 중원(中原) 곳곳의 제후들이 분연히 일어섰다. 원소를 맹주로 18제후의 연합군이 뤄양(洛陽)으로 진격하자 동탁은 화웅으로 하여금 뤄양의 관문격인 후라오관을 지키게 했다. 동탁군의 매서운 반격으로 기세등등하던 연합군이 꼬리를 내릴 즈음, 유비 휘하의 관우가 화웅을 처단했다. 그러자 여포가 변화무쌍한 무예로 연합군을 휘저었다.
 
  처음 정저우에 간 것은 3년 전이다. 후라오관을 보기 위해 갔건만 이곳에서 10년 넘게 가이드를 했다는 안내자는 유적은커녕 흔적도 없다고 했다. “강물에 잠겼을지언정 그 자리는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지만 허사였다. 비는 퍼붓고 소화해야 할 일정은 많았기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나치는 도로변에 ‘후라오관춘(虎牢關村)’이라는 표지판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이제 다시 후라오관을 찾아가는 것이다. 마치 병가필쟁(兵家必爭)의 장소인 후라오관을 점령하지 못하면 삼국지를 통달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유비 삼형제와 여포가 싸운 후라오관
 
워후산에서 내려다본 후라오관.
  후라오관은 정저우에서 뤄양 방면으로 53㎞ 떨어진 싱양(滎陽)시 니수이진(泥水鎭)에 있다. 후라오관은 중원 땅에서 서쪽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황허(黃河)와 첩첩산들이 길을 막아 다른 선택이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한 명의 병사가 만 명의 병사를 대적할 수 있는 곳’이기에 시대에 상관없이 대업(大業)을 꿈꾸는 자들이 전략적으로 선점해야 할 요충지였다.
 
  진(秦)나라 멸망 후 유방과 항우가 이 지역에서 쟁탈전을 벌였고, 당(唐) 태종 이세민이 3000명의 병사로 십만 명의 농민군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후라오관에 도착하니 황톳길과 마을들이 마치 우리의 1970년대를 보는 듯 다정하게 느껴진다. 마을 입구 삼거리에 주차하는데 동네 꼬마들이 먼저 반긴다. 이런 시골에 번쩍이는 스타렉스가 들어오니 그럴 만도 하다.
 
  넓은 마당 입구에 ‘虎牢關(후라오관)’이라고 쓰인 해서체 비석이 먼지 속에 덩그렇다. 장엄했을 후라오관은 흔적 없고 과거를 되새기는 비석만이 고고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청(淸)나라 옹정 9년(1731년)에 세워진 것이다. 비석 뒤편에는 삼의묘(三義廟)가 있다. 내가 보잘것없는 비석에 이어 다 무너져 가는 건물을 보며 연방 사진을 찍어대자 동네 아저씨들이 다가왔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 네. 일본 사람들은 종종 다녀갔는데 한국에서 오신 분은 아주 드뭅니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더욱 반가워한다. 이곳의 삼의묘는 유비·관우·장비가 의형제를 맺은 도원(桃園)결의를 기념하고, 후라오관 전투에서 여포를 무찌르며 동탁을 토벌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세 사람을 숭배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러나 사당 안에는 나무로 만든 관우상만 있다. 삼의묘라고 쓰인 현판은 구석 한편에 놓여 있는데 그나마 삼(三)은 누가 집어갔는지 없다. 몇 개의 비석은 깨져서 나뒹굴며 머리가 잘린 돌부처상과 함께 아이들의 놀이터가 됐다. 사당을 세울 때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다른 것인가. 오직 관우를 재물신(財物神)으로 모시고 부자 되기를 염원하며 피웠던 향불 찌꺼기만 수북하다.
 
  후라오관 전쟁터가 보고 싶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역사를 알 턱이 있나. 내가 안내해 주지.”
 
 
  옥수수밭·콩밭으로 변한 전쟁터
 
  연장자인 듯한 노인 옆에서 꽁초를 줍던 할아버지가 일어선다. ‘아, 드디어 후라오관 유적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구나! 실로 얼마나 고대했던가’하는 안도감에 젖을 때, 안내를 자청했던 할아버지가 담배 한 갑을 요구한다. 혼자서 모르는 언덕을 둘러보는 것보다는 백배는 낫겠다 싶어 흔쾌히 수락했다.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갑자기 씩씩해졌다.
 
  후라오관 비석을 지나 집들이 절벽을 등진 채 옹기종기 모인 마을로 들어섰다. 이곳 마을 이름이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관제묘굉촌이라고 한다. 마을 입구에 있는 관제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마을 이름까지 결정지었다고 생각하니, 관우신에 대한 중국인들의 믿음은 가히 종교를 능가하고도 남는 것 같다.
 
  삼의묘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워후산(臥虎山)의 기슭이 나온다. 오랜 기간 동안 산을 깎아서 만들어진 터널이 있는데, 이를 지나면 그 옛날 후라오관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장이다.
 
  “콩밭 위쪽의 저 언덕이 여포가 진을 쳤던 여포성이고, 건너편 저쪽 갈대가 있는 산등성이가 연합군 진지가 있었던 곳이라오.”
 
  황허가 뿌리고 간 황토가 쌓여서 형성된 이 지역은 지반이 약하다. 비라도 퍼부으면 금방 침식작용을 일으킨다. 그래서인지 여포가 열병(閱兵)을 했다는 점장대에 올라 보니 온통 붉은색을 띤 황토절벽이 발 아래로 까마득하다.
 
  풀밭 위에는 바람만 거셀 뿐 유적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건만 할아버지의 설명은 유창하다. 요충지 후라오관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이곳밖에는 달리 싸울 곳이 없을 터이니 할아버지의 자신에 찬 설명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싸움터가 어디 산기슭뿐이겠는가. 지금은 옥수수밭, 콩밭인 산비탈과 인적 없는 계곡 모두가 당시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이곳 후라오관에서만 100여 차례의 커다란 전쟁이 있었다고 하니, 그때마다 전장에 동원된 병사들의 피는 산하를 가득 메웠으리라.
 
  후라오관에서 패배한 동탁은 뤄양을 불태우고 천자(天子)를 모시고 창안(長安)으로 천도했다. 동탁 정권에 반대하는 반(反)동탁 연합군의 형성은 이후 군웅할거의 시대를 여는 기반이 되었으며, 결국 위(魏)·촉(蜀)·오(吳)의 세 나라로 정립(鼎立)된다.
 
 
  조조의 집은 元나라 때 없어져
 
조조의 지하은병도 유적.
  조조의 고향인 안후이성(安徽省) 하오저우(毫州)는 성(省)의 서북부에 있다. 상(商)나라 성탕이 도읍을 정한 때부터 35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다. 시내 중심부에는 화이허(淮河)의 지류인 워허(渦河)가 흐르고 있다.
 
  조조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고향을 자주 찾았다. 조조가 살았던 집은 하오저우에만 세 곳이 있다. 모두 워허 강변에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 것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집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흔적은 남아 있을 법하여 조조가 태어난 곳인 사투지(沙土集)를 찾아보기로 했다. 사투지는 조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인데, 시내에서 동쪽으로 15㎞ 정도 떨어져 있다.
 
  사투지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온통 황토뿐인 길은 짧은 거리임에도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노인에게 조조의 집터를 물었다. 그는 “이곳에 조조가 살았다는 것은 들었지만 집터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다시 하오저우 시내로 돌아와 워허로 향했다. 자료를 찾아보면 동쪽으로 흐르는 워허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곳에 또 다른 조조의 저택이 있었다고 한다. 조조는 이곳에서 조비와 조식의 생모(生母)인 변씨를 소실(小室)로 맞았다.
 
  워허는 잡목 사이로 쓰레기더미만 떠 강변을 등지고 무심하게 흘러간다. 여기저기 모래채취선이 파 놓은 구덩이가 워허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어디쯤이었을까. 강변에 서서 조비 조식 형제가 깔깔거리며 뛰놀았을 장소를 그려 본다. 대업을 이룬 조조이건만 어찌하여 그의 고향에는 생가(生家)가 없을까. 아마도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에 길들여진 중국인들이 악인(惡人) 조조의 집을 보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이미 원(元)나라 시대에 군사들이 조조의 집을 부숴 성을 쌓는 데 사용했다고 하니, 워허 강변의 대저택도 그렇게 파괴됐을지도 모른다.
 
  조조의 생가는 흔적이 없지만 조조의 뛰어난 용병술을 보여주는 지하은병도(地下隱兵道)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모습 그대로였다. 지하은병도는 조조가 지하로 땅굴을 뚫어 성의 안팎을 오가며 적은 수의 병사로 많은 적을 무찌른 유적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길이만도 총 2㎞가 넘는데, 한 사람의 군인이 지나갈 정도의 길이 방사선 형태로 뻗어 있다.
 
  그 옛날 조조의 부하가 된 심정으로 지하은병도를 들어갔다. 중간중간에 전등을 달아 동굴 속을 다닐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후텁지근한 공기에 숨이 막힐 듯하다. 몇백m를 걸어가니 넓은 공간이 있다. 휴식공간이거나 무기고였음직한데, 살펴보니 사방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당시의 군사들은 군복에 무기 등을 지니고 이 통로를 지났을 터. 얼마나 비좁고 숨 막혔겠는가. 이러한 공간은 병사들에게 유용한 장소였을 것이다.
 
  10여 분을 걸어서 출구로 나왔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살펴보니 시가 중심지를 가로지르는 대로와 시장 밑을 지나왔다. 18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렇게 완벽하게 보존된 것이 놀랍다.
 
  조조는 자신의 집과 고향을 후방기지의 하나로 활용하기 위해 이곳 하오저우에 많은 공을 들였다. 특히 대규모의 군사 훈련소와 식량공급 기지를 만들었는데, 시 동쪽 외곽에 있는 ‘동관가대(東觀稼臺)’ 유적은 서쪽 외곽의 ‘서관가대’와 함께 둔전제(屯田制) 시행으로 거둬들인 곡식의 출납을 관리했던 곳이다. 당시는 위세가 대단했겠지만 지금은 주택가 한 귀퉁이에 벽돌 부스러기로 남아 있다.
 
 
  롤러스케이트장 한구석에 남아 있는 射臺
 
여포를 기념한 사극대 비각.
  여포의 유적을 보기 위해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시의 페이현(沛縣)으로 향했다. 페이현은 쉬저우IC에서 100㎞를 더 가야 한다. 이곳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작은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활기가 넘친다.
 
  건안 원년(元年)인 서기 196년 원술은 천자의 옥새를 주워 기세가 등등해지자 먼저 소패의 유비를 공격하려 했다. 유비가 여포에게 도움을 청하자 정의감 넘친 여포는 아우 유비를 돕고 자신의 위신도 세울 겸 하나의 제안을 한다.
 
  “여기부터 원문까지는 150보 정도 떨어져 있소. 내가 화살을 쏘아 화극 날을 맞힌다면 양쪽 모두 싸움을 그치고, 만일 못 맞히면 각자 영채로 돌아가 원하는 대로 싸우시오.”
 
  여포의 화살은 정확히 화극 날을 맞혔다. 유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포가 화살로 창을 맞힌 것을 기념하는 사극대(射戟臺)가 페이현문화원에 있다고 했는데, 좁은 시내를 서너 번 돌아도 보이질 않는다.
 
  어렵게 찾은 문화원은 입구부터 음악소리가 요란한 것이 전혀 낯선 분위기다. 그것도 노래방에서나 들어봄직한 곡조다. 문화원 안에 웬 노래방이 있나? 궁금해 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눈앞은 롤러스케이트장이다. 음악에 맞춰 스케이트를 타느라 남녀노소 모두가 분주하다. 분명 입구는 문화원이건만 내부는 놀이터다. 사극대는 한쪽 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덮여 있었다.
 
  여포의 노력으로 전쟁의 화를 면한 소패 사람들이 여포의 공훈을 기념해 사극대를 세웠다는데, 이제는 그런 뜻도 잊힌 지 오래인 듯 낡고 볼품없는 작은 비각(碑閣)이 고적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 홀대받는 작은 비각 하나를 보려고 만 리 길을 달려왔나 생각하니 씁쓸하기만 하다.
 
  여포의 유적이 아니고 유방이나 유비의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이렇게 버려두었을까. 청 건륭 때 세워진 비각은 세월의 풍상에 지치고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질린 듯 풀이 죽었다. 정자에는 여포가 화살로 화극을 맞히던 장면을 묘사한 대련(對聯)만이 당시의 분위기를 알려준다.
 
  ‘한 발 쏜 화살이 화극 날을 울리니, 10만 병사가 갑옷을 벗는구나.’
 
  여포가 화극 날을 맞힌 지 2년 후, 하비를 점거하고 있던 여포는 조조의 공격을 받아 죽음을 당한다. 여포가 마지막으로 점거한 하비성도 지진과 홍수로 여포와 함께 흔적 없이 사라지고, 후세 사람들이 여포를 기리며 세운 사극대마저 넘쳐나는 음악소리와 롤러스케이트에 짓눌려 조만간 사라질 것 같다.
 
 
  조조와 유비가 영웅을 논한 靑梅亭
 
  조조는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자신의 근거지인 쉬두(許都)로 맞아들여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천자를 모시고 제후에게 명령을 내리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종이 황제에 불과한 헌제는 날마다 실의에 잠긴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아저씨뻘인 유비를 만나자 힘이 솟았다. 든든한 보호자를 얻었다고 생각한 헌제는 유비에게 좌장군 의성정후의 벼슬을 내렸다. 그리하여 유비는 이때부터 자타가 인정하는 유황숙(劉皇叔)이 되었다.
 
  유비의 대두를 경계한 조조는 어느날 유비를 청매정(靑梅亭)으로 초치했다. 이 자리에서 조조는 유비에게 “지금 천하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유비는 원소와 원술, 유표와 손책 등을 거론하며 조조의 질문을 비켜 나갔다.
 
  그러자 조조가 “지금 천하의 영웅은 나와 당신뿐”이라며 정곡을 찔렀다. 유비는 깜짝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이와 동시에 천둥이 쳤다. 유비는 천둥소리에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처럼 둘러대 그 상황을 모면했다.
 
  허난성의 중부에 위치한 쉬창(許昌)은 정저우에서 남쪽으로 약 80km 떨어져 있다. 쉬창은 동한 시대 말기에 수도가 되어 쉬두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쉬창은 중국 북방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기간은 길지 않았다. 불과 25년 만에 아들 조비가 황제로 등극해 뤄양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이다.
 
  쉬창에 도착하니 높다란 문봉탑이 제일 먼저 반긴다. 이른 아침이어선지 출근하는 사람들로 도로가 붐빈다. 그러나 한쪽에선 아침햇살을 받으며 태극권과 칼춤을 추는 사람들로 광장이 붐빈다. 중국은 인구도 세계 최고이지만, 과거의 문화와 전통이 오늘에 살아 숨쉬는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쉬창에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관공사조처(關公辭曺處). 입구에 이르자 근대 중국의 유명한 역사가이자 시인인 궈머뤄(郭沫若)가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조조가 유비를 앞에 놓고 당대 천하의 영웅들에 대해 논한 청매정은 삼국시대에 쉬창에서 매우 유명한 정자였다. 원래의 청매정은 쉬창 시내에서 19㎞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지금의 쉬창시 웨이두구(魏都區) 주취가(九曲街) 제8중학 부근이다. 청매정은 조조가 완성을 차지한 후 병사들의 노고를 기념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관공사조처는 파릉교 명승지역으로 불리는데, 조조와 유비, 조조와 관우 등 조조와 관련된 삼국지 이야기를 모아 놓은 곳이다. 이곳 입구에 작은 연못과 조화를 이룬 청매정이 새로 만들어져 있다. 정자 안에는 조조와 유비가 천하의 영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화려한 대리석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쉬창에 울려 퍼진 ‘아!대한민국'
 
쉬창 춘추루에서 필자를 안내해 준 관장과 함께(오른쪽이 필자).
  원소와 조조는 청년시절부터 서로가 적당히 비웃고 낄낄거리며 유협놀이를 즐겼던 잘 아는 사이였다. 하지만 둘은 출신성분이 달랐다. 원소는 4대에 걸쳐 삼공(三公·신하로서 최고의 자리인 사도, 태위, 사공을 지낸 명문가)의 귀공자였다. 반면에 조조는 환관의 양자 자손에 불과했다.
 
  출신 콤플렉스를 떨치고픈 젊은 간웅(奸雄) 조조는 원소를 이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부터 조조는 원소의 성격과 책략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원소가 유비와 손잡고 조조를 침공하려 하자 조조는 서주에 있는 유비부터 공격했다.
 
  조조의 공격에 유비 삼형제는 뿔뿔이 흩어졌다. 그 와중에 관우가 조조군의 포위망에 갇혔다. 조조는 관우의 무예와 인품을 사랑해 부하로 삼고 싶었다. 장요의 설득에 관우는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워 항복했다. 조조는 이를 수락하고 관우를 극진하게 예우했다. 유비가 관우에게 했던 것보다 더 융숭하게 대우해 주면 관우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관도전투에서 초반에 승기를 잡고자 관우로 하여금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베어 공을 세울 기회를 주었다. 참모 순욱이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면 떠나지 않을 것이니 기회를 주지 말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토록 관우를 수하에 두려고 했는데 어째서 기회를 주었을까. 한 주인만을 섬기며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는 관우의 진정한 호걸다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쉬창 시내의 중심부에 있는 춘추루를 찾았다. 아침 일찍이어선지 한창 청소 중이다. 춘추루는 원나라 때 만든 것으로 청나라 강희 연간에 중건된 것이다.
 
  춘추루 앞에는 작은 비석이 두 개 있는데, 왼쪽에는 관우가 유비에게 대나무 그림으로 편지를 보낸 시죽도(詩竹圖), 오른쪽엔 말 위에서 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늠름한 관우의 모습으로 당나라의 유명한 화가인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것이다.
 
  춘추루를 돌아 들어가면 33m의 웅장한 관성전이 있다. 독특한 건축기법 때문에 관광객에게는 공개하지 않는다. 나는 이곳 관장의 특별한 배려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관성전에 올라 아침안개 희뿌연 춘추루 전경과 광장을 조망하고 있는데, 갑자기 귀에 익은 음악이 들린다. 중국어로 노래하고 있지만 곡조는 분명 ‘아! 대한민국’이다. 경쾌하고 발랄한 곡조에 미래지향의 가사가 맘에 들었던가. 필요한 부분을 고쳐서 이른 아침 광장이 떠나갈 듯 울리고 있었다. 중국을 여러 번 여행했지만 우리의 노래가 이른 아침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는 찬가로 빛나고 있을 줄이야.
 
  “아아,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나도 박자에 맞춰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관우는 조조의 편에 서서 원소군을 무찌른 공적으로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해진다. 그러나 관우는 유비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자 봉직과 그동안 받은 각종 금은보화를 버리고 조조를 떠난다. 관우가 감부인과 미부인을 수레에 태우고 유비를 찾아 떠나자 조조가 성 밖에까지 나와 관우를 전송했다. 그곳이 바로 파릉교다.
 
 
  관제묘
 
쉬창 춘추루 관성전에 있는 관우상.
  파릉교의 원래 명칭은 팔리교(八里橋)였다. 쉬창성에서 서쪽으로 8리 떨어진 스리앙허(石梁河)에 있다 해서 그렇게 불렀다. 그러던 것이 장안의 파릉교가 한(漢)·당(唐) 시절, 버들가지를 꺾어 이별하는 곳으로 유명해지자 조조와 관우의 이별 장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파릉교로 바꿨다.
 
  원나라와 명(明)·청대에 흔적이 남아 있었던 파릉교는 1962년 홍수로 다리가 소실됐다. 지금은 그 당시 남은 돌들을 모아 자그마한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1993년에 지금과 같은 아치형 다리를 만들고 파릉교 공원이라 부르고 있다.
 
  공원 입구를 들어서니 제일 먼저 황토색 커다란 부조가 눈에 들어온다. 조조와 관우가 파릉교에서 이별하는 장면을 새겨 놓았는데 그 내용이 사뭇 소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파릉교 앞에는 창을 높이 쳐든 관우의 석상이 있는데,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 만든 다리에 연의의 내용을 포장해서 관광상품화한 냄새가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소설의 내용을 따다 만들어 놓은 곳을 지나치는데, 꽤나 오래되었음직한 관제묘(關帝廟)가 보인다. 청 강희 때 지은 것인데, 관우의 목상(木像)을 모신 곳이다.
 
  관제묘는 중국 각지에 널려 있다. 그리고 저마다 자랑거리가 있다. 낙양은 관우의 머리가, 당양은 유체(遺體)가, 운성은 관우의 옷이 있다고 자랑한다. 그게 아니면 관우가 살았던 곳이라 그의 혼이 있어서 관제묘를 세웠다는 곳도 있다. 그렇다면 이곳의 관제묘에는 무슨 자랑거리가 있을까.
 
  “우리 파릉교의 관제묘는 관우의 공(功)을 모시고 있습니다.”
 
  조조와 관련하여 관우가 공을 세운 이야기는 이곳이 최고라는 의미일 것이다. 중국인의 관우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이처럼 자신의 도시에 세워진 관제묘의 의미 부여에서도 넘쳐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조와 원소의 결전장 관도
 
  서기 200년 관도. 원술과 여포 그리고 유비를 무찌르고 하남 지역을 장악한 조조와 공손찬을 쳐부수고 하북 지역을 장악한 원소가 천하의 패권을 놓고 숙명적인 대결을 벌였다. 바로 중원 통일전쟁인 ‘관도대전’이다.
 
  연의에서는 원소군이 70만, 조조군은 7만이라 했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다. 각각 10만과 2만을 넘지 않았다.
 
  전세는 조조에게 불리했다. 조조는 본거지인 쉬두로 후퇴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욱이 막았다. 조조는 순욱의 간언을 믿고 수비에 주력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일진일퇴의 전투는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았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병사들은 지쳤다.
 
  조조는 군량이 바닥나자 급히 순욱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채 30리도 못 가 원소의 모사인 허유의 손에 들어갔다. 허유는 원소에게 군사를 나누어 쉬두를 기습하는 한편 양쪽에서 공격할 것을 건의했으나 원소는 듣지 않았다.
 
  이에 허유는 옛 벗인 조조에게로 투항했다. 허유의 투항은 조조에게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조조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맨발로 뛰어나가 허유를 맞고 그의 제안을 의심 없이 믿었다. 그리고 원소의 군량과 군수물자가 있는 오소를 화공(火攻)으로 파괴했다. 전세는 역전되고 결국 조조가 승리했다.
 
  원소의 선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병력과 물자면에서 원소가 훨씬 우세했다. 그러나 결과는 원소의 참패로 끝났다. 그 원인은 원소의 결단력 부족에 있었다. 책사(策士)들의 주장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했으며, 우유부단한 성격에 친인척의 무분별한 중용, 참모들의 충언(忠言)을 무시하고 의심하는 성격 등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조조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참모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정확한 판단력과 신속한 결정을 내린 것에 있었으니, 두 인물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
 
  옛날의 관도는 지금의 허난성 중머우(中牟)로 당시에는 황허(黃河)가 흐르는 화북(華北)평원의 요충지였다. 쉬창의 북쪽 대문이기도 한 이곳은 서쪽의 뤄양과 동쪽의 카이펑(開封)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장소다.
 
  정저우 시내에서 8차선으로 넓게 뚫린 도로를 40여 분 달려 중머우에 도착했다. 2004년 여름에도 이곳에 왔었다. 그때는 길이 좋지 않아 두 시간이나 걸렸는데 3년 만에 상전벽해가 됐다.
 
 
  폐허가 된 관도전쟁기념관
 
마늘밭 한가운데 있는 조조가 식수용으로 팠다는 우물.
  마을 입구에 거창하게 세워진 관도전투지의 조형물은 그새 녹이 슬고 부서져 고철이 됐다. 널따란 도로와 함께 로터리가 만들어졌는데 그 중심에는 조조가 말을 타고 호령하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다. 관도전투에서 조조가 원소군을 대파한 곳에 세워진 조공대(曹公臺)의 모양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관도고전장(官渡古戰場)은 중머우현에서 북동쪽으로 2.5㎞ 가량 떨어진 지점으로, 그 옛날 관도전투의 주요 싸움터였다. 이곳은 관두교촌이라 불리는데, 예전에 관두수이가 이곳으로 흘러 다리를 놓았던 것에서 유래되었으나, 명나라 때 이미 물이 말라버렸다. 지금은 비옥한 평야만이 드넓다.
 
  여름에는 온통 옥수수밭이었는데 겨울에 찾아오니 총총한 비닐하우스마다 야채를 키우고 있고, 평야는 온통 마늘싹으로 초록융단을 깔았다. 마늘은 이곳의 특산물로 전체 생산량의 40%를 우리나라에 수출한다고 한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70년대의 우리가 그랬듯이 저마다 경제적 가치 창출에 몰두하고 있었다. 현지인 하나가 필자에게 말을 걸었다.
 
  ―백성들이 중국 황제를 받들 때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시죠?
 
  “만세(萬世) 만세(萬世) 만만세(萬萬歲)지요.”
 
  ―네, 그런데 한자를 다르게 쓰는 것은 모르지요?
 
  “어떻게 쓰나요?”
 
  ―완스(萬世) 완수이(萬稅) 완완수이(萬萬睡)라고 씁니다.
 
  중국 황제시대의 역사는 위정자를 위한 것이었다. 배고픈 민초(民草)들은 그들의 창고를 채워 주고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백성들은 발음이 비슷한 단어로 자신들의 고단한 처지를 표현했으니 멋진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축록영이라는 마을의 마늘밭 가에는 ‘조조정(曹操井)’이라는 오래된 우물이 있는데, 조조가 식수용으로 판 것이라고 한다. 우물은 지금도 수량이 많으나 식수로는 사용하지 않고 농업용수로만 사용된다.
 
  축록영이라는 이름은 조조와 원소가 이곳에서 천하(사슴)를 얻기 위해 다투었던 곳이라는 뜻이다. 조조정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조조가 말을 타고 진군 명령을 내리는 모습의 조공대가 있는데, 조조군이 원소군을 대파한 곳이다. 이곳에 조조상(曹操像)을 세움으로써 천하를 얻은 승리자 조조의 기개를 그대로 표현해 놓았다.
 
  관도교촌 마을 끝에는 관도전투 당시의 군영을 보는 듯한 커다란 건축물이 있다. 바로 ‘관도고전장예술관(官渡古戰場藝術館)’이다. 하지만 대문이 굳게 잠긴 채 오래전에 폐쇄됐다.
 
  그래도 궁금하여 보기를 청했더니, 일꾼 중 감독인 듯한 자가 빨리 보고 나가라며 안내를 한다. 군영 장막을 연이어 놓은 것처럼 만든 건물 안에는 관도대전의 전 과정을 그림과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는데 인형들이 망가진 채로 버려진 것이 오래됐다.
 
  시(市) 차원에서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삼국지 관광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놓았으나 마케팅이 부족했는지 찾아오는 관광객이 점차 줄더니 이제는 나처럼 일부러 찾아다니는 나그네 외엔 찾는 이가 없다고 한다. 전기마저도 끊겨 어두컴컴한 통로엔 먼지만이 뽀얗고, 그 속에 엉켜 뒹구는 밀랍인형들을 보니 마치 관도전투가 끝난 전쟁터를 걷는 것 같아 기분이 으스스했다.
 
 
  조조, 갈석산에 오르다
 
찾는 이가 없어 퇴락한 채 방치되어 있는 관도고전장예술관.
  원소는 조조와의 관도대전에서 패한 뒤 봉기의 모함에 빠져 충직한 참모인 전풍을 죽였다. 군중에서 저수를 죽이고 감옥에 있던 전풍마저 죽였으니 두 팔을 잃은 원소의 패망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원소는 아들들과 사위의 병사들로 전열을 가다듬어 조조에게 대항했지만 정욱의 십면매복 계책에 빠져 창정전투에서 또다시 대패했다. 청년시절, 호협 친구로서 조조와 함께 산천을 호령했던 원소는 권력 쟁탈전에서 한 수 아래로 여겨 왔던 조조에게 연이어 패배함으로써 회생불능이 됐다. 대대로 내려온 명문가의 위상도, 화북 4개 주의 주인으로서 원소의 운명도 다한 것이다.
 
  서기 203년 봄. 조조는 여세를 몰아 원소의 근거지인 업성을 공략한다. 병상에 있던 원소가 다시 갑옷을 입었다. “4대 연속 삼공의 벼슬을 한 명문가 출신인 내가 하찮은 환관의 양아들 놈에게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강한 복수심 때문이다. 그러나 원소의 이러한 마음도 아들 원상의 성급하고 독단적인 행동으로 무산되고 급기야 증오의 피를 쏟으며 죽는다.
 
  서기 207년. 조조는 화북 평정에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알고 원씨 형제와 잔당에 대한 공격을 더욱 거세게 펼쳤다. 이때 그가 총애하던 모사 곽가가 풍토병으로 죽으면서 한 통의 편지를 남겼다.
 
  조조는 몹시 슬퍼하며 그가 유언으로 남긴 계책을 따라 요동태수 공손강에게 의탁하러 간 원씨 형제를 뒤쫓지 않았다. 원씨 일가가 요동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공손씨와 숙적관계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공손씨로 하여금 원씨 형제들을 처단하게 한 것이다. 조조는 원씨 세력을 제거하고 북방 유목민인 오환을 정벌하여 중원과 북방의 최후 승자가 됐다.
 
  관도대전, 창정전투, 그리고 유성전투마저 승리로 이끌며 조조는 드디어 화북을 평정했다. 특히 유성에서의 승리는 오환군을 조조의 정예 기마병으로 편입시키는 계기가 됐다. 오환군은 이후 청주병(靑州兵·항복한 황건적 병사들로 구성된 조조의 정예부대)과 함께 조조군의 주력군이 됐다.
 
  중원과 북방을 차지한 조조는 민심을 안정시킨 후 쉬두로 오기 위해 지금의 발해만으로 회군했다. 빠른 길이기도 했지만 조조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갈석산(碣石山)에 오르는 것이었다. 갈석산은 중국의 위대한 황제들이 모두 오른 산이었다. 조조는 갈석산에 올라 ‘관창해(觀滄海)’라는 시를 지어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자신의 권세를 뽐냈다.
 
 
  창해를 굽어보는 갈석산
 
조조 등 중국 역대 제왕들이 오른 갈석산.
  조조가 오환을 물리친 유성은 현재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朝陽)시다. 조조가 발해만 쪽으로 내려오다 올랐다는 갈석산은 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시 창리현(昌黎縣) 북서부에 있다.
 
  갈석산은 695m의 높지 않은 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역대 제왕들이 갈석신악(碣石神岳)이라며 중시한 것은 산둥(山東)의 타이산(泰山)이 그러하듯 발해만을 굽어보는 평야지대에 불쑥 솟아 있는 것이 마치 천하에 위압감을 주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리라.
 
  갈석산에서의 조조의 활동상을 알아보기 위해 친황다오시로 향했다. 중국 최대명절인 춘절이 지난 지 일주일이 되었지만, 베이징을 벗어나자 거의 모든 상점의 문이 닫혀 있었다. 기차는 세 시간을 달려 베이다이허(北戴河)역에 도착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식사를 하려 했으나 보이는 식당은 모두 휴업이다. 겨우 찾은 식당도 메뉴는 한 가지뿐이다. 요기만하고 창리현으로 향했다. 친황다오시에서 서북쪽으로 30㎞ 떨어진 창리현에 도착하니 악산(嶽山)이라는 이름에 맞게 바위로 둘러쳐진 갈석산이 보인다.
 
  중국의 유명한 산이 모두 그렇듯이 이곳도 돌계단으로 조성되어 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다. 조조가 보았던 창해(滄海)는 이곳에서 15㎞ 떨어진 곳인데, 흐려서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바위에 새겨진 조조의 시 ‘관창해’ 가 조조의 웅혼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듯하다.
 
  갈석산은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과 흉노를 몰아내고 한제국을 부흥시킨 한무제가 먼저 올랐다. 이 두 제왕이 셴양(咸陽·지금의 시안 인근)에서 먼 길을 왔던 것을 생각하면, 조조로서는 오환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갈석산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후일 수양제와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길에 오르는 도중 갈석산에 올랐다. 하지만 수양제는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여파로 망했고,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얼마나 처절하게 패배했으면 그랬겠는가.
 
  사마의는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러 가는 길에 갈석산에 올랐다. 그는 공손연 토벌에 성공했는데, 이는 사마의와 연합한 고구려 기마병이 공손연의 후미를 쳤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갈석산에 오르니 감개가 무량했다. ‘고구려’로 인해 이곳에서 울고 웃던 중국 제왕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려했던 三臺는 사라지고
 
금호대 일부만 남아 있는 업성유지.
  조조는 원소의 근거지인 업성을 점령하고 이곳을 북쪽의 도읍으로 삼았다. 그리고 서기 210년 겨울. 엄청난 경제력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다. 삼대(三臺), 즉 동작대·금호대·빙정대를 짓고 세 누각을 아치형 다리로 연결했다. 조조는 이곳을 정치·군사 및 문학적 활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뛰어난 시인인 조조가 그의 아들인 조비·조식과 함께 ‘건안문학’을 태동시킨 곳이 이곳이다.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업성을 찾아 나섰다. 업성은 허베이성 한단시(邯鄲市) 린장(臨?)현에서 남서쪽으로 20㎞ 지점에 있다.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렸다’는 좌사의<삼도부(三都賦)>의 하나인 ‘위도부(魏都賦)’가 탄생된 업성을 찾아가는 길은 2월임에도 황사 같은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殷墟(은허) 유적지로 유명한 안양을 출발한 지 약 두 시간이 되어 업성에 도착했다.
 
  업성은 장허(?河)의 남쪽 연안에 위치하며 동서 7리, 남북 5리로 장방형을 이루고 외성에 7개, 내성에 4개의 문이 있었다고 전한다. 조조가 궁전과 함께 신경 쓴 것은 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삼대의 건설이었다. 높이가 10장(丈)인 동작대를 중심으로 북의 빙정대와 남의 금호대에 각각 8장의 높이와 140여 칸의 집을 지었다. ‘삼대가 우뚝 솟아 그 높이가 산과 같다’는 말처럼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인공 요새였던 것이다.
 
  마을 입구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삼대(三臺)’라고 표기해 놓았는데 영락없이 궁벽한 시골 마을이다. 마을의 공터로 들어서자 화려했던 업성은 보이지 않고 조금 높다란 언덕을 끼고 건물 한 채가 쓸쓸히 서 있다. 바로 그 옛날 삼대가 있었던 곳으로 금호대의 기초 부분과 동작대의 구석 일부분이다.
 
  폐허나 다름없는 업성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와 시문을 새긴 비석만이 고적한 길손을 맞는다. 회랑에는 일렬로 세워 놓은 목 잘린 불상들만 귀신처럼 괴괴하다. 회랑을 돌아 돌계단을 오르니 금호대 정상이다.
 
  보이는 것은 온통 너른 들판뿐이다. 그 옛날의 요새는 무너져 흔적 없고 그 자리엔 봄을 준비하는 농부들의 손길만 분주하다. 황성 옛터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중원과 화북 지역을 모두 장악한 조조는 이제 겁날 것이 없었다. 천하가 모두 그의 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제 조조는 한나라의 일개 신하가 아니었다. 그의 가슴에는 자신의 나라를 건설해야겠다는 야망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 조조의 무덤이 발견되다
 
  2009년도 며칠 안 남은 12월 27일, 삼국시대 최고의 영웅인 조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장소는 허난(河南)성 안양(安陽)시 안양현 안펑(安豊)향 시가오쉐(西高穴)촌이다. 이곳은 서쪽의 타이항(太行)산맥, 북쪽의 장허(?河), 남쪽의 난링(南)산, 동쪽의 화베이(華北)평야를 품은 풍수지리적 명당으로 동한(東漢)시대와 북조(北朝)시대의 묘군(墓群)이 산적한 곳이다.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무찌르고 동작대를 지은 업성(?城)이 동쪽으로 14㎞ 이내에 있다.
 
  조조는 낙양에서 붕어(崩御)했는데 죽기 직전,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고, 시신은 평상복을 사용하며, 금은보화 등 보물은 넣지 말라”고 유언했다. 묘는 업성의 서쪽에 마련했는데 고릉(高陵)이라 했다. 오랜 세월에 장허의 물줄기가 바뀌어 지금은 업성유지(?城遺址)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지만, 조조 생전의 업성은 장허의 북쪽에 건설된 웅장한 요새(要塞)였다.
 
  조조 무덤 발굴과 관련하여 진위여하 논란이 뜨겁다. 하지만 필자는 이번에 발굴된 무덤이 조조의 무덤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조조가 평상시에 사용했던 창과 돌베개, 위패 등의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수차례 도굴 흔적도 있지만 유언처럼 일세를 풍미한 영웅의 묘 치곤 소박하며, “업성의 서쪽에 묻고 수시로 나의 능을 돌아보라”는 말과도 그 위치가 일치한다.
 
  진위의 핵심은 ‘조조는 간사하여 72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에 있는 것 같은데, 이는 후세 사람들이 조조악인론을 꾸미기 위해 만든 말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108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정기구독 이벤트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