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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석의 山이야기

南美대륙 최고봉 아콩카구아

아콩카구아 頂上에서 먼저 보낸 준호 형을 생각하다

글 : 한필석  전 《월간산》 편집장  pshan@chosun.com

사진 : 김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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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등반 때 “캠프에 내려가서 얼음 녹여 식수 만들어놓고 기다리겠다”던 강준호 형 잃어… 死因은 심한 고소증에 의한 폐부종
⊙ 세 번째 도전 끝에 아콩카구아 정상 등정, ‘이깟 정상에 올라서려고 준호 형이 목숨을 잃었나’ 하는 생각에 한동안 허망
⊙ 하산길에 만난 60대 외국인, “아콩카구아는 너무 아름답다. 이번이 네 번째 도전이다”
남미대륙 최고봉 아콩카구아 정상에서 등정의 기쁨을 나누는 석상명씨와 필자(왼쪽). 석상명씨는 두 번째, 필자는 세 번째 도전 끝에 이룬 성공이기에 기쁨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강준호 형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허망해졌다.
  아콩카구아(Aconcagua·6959m)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안데스산맥(약 7000km) 최고봉(最高峰)이자 남미(南美)대륙 최고봉이다. 정상(頂上)은 아르헨티나 멘도사주(州)에 솟아 있고, 산자락은 칠레 수도 산티아고 북서쪽 해안까지 뻗어 있다. 특히 7대륙 최고봉에 도전하는 아마추어 산악인들에게 인기 있는 등반 대상이다. 무엇보다 특별한 등반 기술 없이 정상 등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1997년과 1998년에 이어 2006년, 세 번째 도전 끝에 오른 산이었다. 더욱이 친형 같은 선배 산악인은 그 산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20여 년 전인 1998년 1월 5일. 슬픈 날이었다. 모래바람이 몰아치고 사막처럼 황량한 분위기의 오르코네스(Horcones)계곡에서 얼마나 눈물을 쏟았던가. 며칠 전까지 두 눈을 마주하고 얘기 나누던 선배였는데 이제 볼 수 없다니….
 
  “볼 만한 게 없더라, 그냥 내려가지….”
 
  나흘 전인 1월 2일 오후 4시30분경, 북면 루트 상의 카날레타(Canaleta·해발 6600~6700m대의 급경사 구간)를 올려치고 벼랑 밑에서 쉬고 있을 때 만난 고(故) 강준호(당시 45세) 형은 정상에 올랐다 하산(下山)하는 길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대다가 내게 하산을 권했다. 필자 홀로 정상에 올랐다가 제2캠프(Berlin Camp·5930m)로 내려서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고, 컨디션도 좋지 않아 보인다는 판단에서였다.
 
 
  ‘내가 이렇게 사라지는 건가…’
 
제1캠프로 향하는 일행. 완만해 보이지만 해발 4500m가 넘는 고도로 첫 번째 등반 때에는 다리가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속에서 불이 났다. 어떻게 온 산인데 그냥 내려가라니…. 당시 외환위기(IMF)사태 때문에 어렵게 나선 원정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두 사람이 굳게 맺은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 1993년 엘브루즈(5642m)를 오를 때도, 1994년 매킨리(6194m)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등반 도중 정상에 먼저 올랐다가 하산하는 사람을 만나면 함께 내려서기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정상 쪽을 바라보며 고민하다가 함께 하산한 지 30분이나 지났을까? 강준호 형은 “베를린 캠프에 내려가서 얼음을 녹여 식수를 만들어놓고 기다리겠다”며 먼저 내려갔다. 그러곤 한참 지나 깨알만 한 크기가 되어 윈디트래버스(Windy Traverse·6500~6600m대 허리길) 중간 즈음에 솟구친 촛대바위 안부를 넘어섰다. 그게 준호 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촛대바위에 이어 인디펜덴시아 비박지(Ref. Independencia·6400m)에 내려설 즈음 정상에서 내려오는 이상배씨를 만났다. 그와 함께 베를린 캠프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내려섰을 때(오후 7시경) 이상배씨 역시 “먼저 내려가 물을 끓여놓겠다”며 나섰다.
 
  이후 극심한 고소증(高所症)에 시달리며 하산하다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한동안 무의식 상태로 터덜터덜 걸어서 내려간 것이다. 내 위치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능선이었다.
 
  ‘제기랄, 내가 이렇게 사라지는 건가…’
 
  가족 얼굴이 떠올랐다. 홀어머니, 아내, 두 딸, 막내아들, 누나, 여동생들….
 
 
  8년 사이 변해버린 베이스캠프
 
북면 노멀루트 등반 시 제2캠프로 삼는 베를린 캠프. 한낮에는 햇살이 스며들고 조망도 좋아 지낼 만하지만 해가 넘어가면 냉동고 안에 들어서 있는 듯 추운 곳이다.
  2006년 12월 28일. 세월은 빨리 흘러갔다. 준호 형의 사고 이후 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북면(北面) 노멀루트 접근로인 오르코네스계곡은 여전히 황량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평원처럼 널찍한 골짜기 양옆에는 웅장한 산들이 줄지어 솟구쳐 있고, 붉은빛과 검은빛, 그리고 간간이 푸른빛이 섞인 산사면(山斜面)은 독특한 풍광 그대로였다.
 
  거대한 불덩이 형상의 아콩카구아는 엄청나게 덩치가 큰 산이었다. 공원 관리소에서 오르코네스계곡으로 들어설 때 정면으로 보이는 하얀 거벽이 수직고 3000여m 높이 남벽이고, 캐러밴 첫날 머무르는 콘플루엔시아 캠프(Confluencia Camp·3350m)에서 도보로 8시간 거리인 플라자데뮬라스(Plaza de Mulas·4400m) 베이스캠프로 들어설 때까지 오른쪽으로 끼고 가는 산이 다 아콩카구아다.
 
  정오를 조금 지나 도착한 북면 베이스캠프는 1998년 12월 말 두 번째 아콩카구아 원정 때에 비해 많이 변해 있었다. 널찍한 베이스캠프에는 잉카(Inka), 안데스포츠(Andesports) 같은 등반대행사들이 설치해놓은 식당용 대형텐트와 손님용 텐트들이 꽉 들어차 있었고, 등반객과 현지 스태프로 시끌벅적했다. 우리나라 산악인 12명 가운데 수원팀의 최오순(1993년 에베레스트 등정)·김순주(1993년 에베레스트 등정)씨는 제1캠프(Nido de Condores·5600m)에서 정상공격을 앞두고 있었다.
 
  1999년 12월 말 두 번째 도전 때에는 등정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고 대신 사고처리반 역할을 해야 했다. 당시 석상명·한왕용(8000m 14좌 완등자)·필자, 세 사람은 동벽 등반을 시도하다가 여의치 않아 산허리를 횡단해 북면 노멀루트로 시도했지만 예상치 못한 깊은 눈과 폭풍설을 만나 등반을 포기해야 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 북면 플라자데뮬라스 베이스캠프로 내려섰을 때 한국팀 사고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팀은 베를린 캠프의 대기조와 등정조 간의 무전(無電)교신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 한 팀은 하루 전 등정길에 나선 대원 중 한 명의 소식이 끊긴 상황이었다.
 
  무전교신이 되지 않은 팀의 공격조 두 명 중 한 명은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하던 중 위급 상황을 맞기도 했으나 다행히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캠프로 귀환했다. 하지만 또 다른 팀의 실종자는 행적이 확인되지 않자 베이스캠프에 경찰이 올라와 사고경위서를 작성하는 등 우울하면서도 복잡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 한 해 전 첫 번째 도전 때에는 준호 형 사고를 겪고, 두 번째 원정에서는 아콩카구아에 대해 남들보다 좀 더 안다는 ‘죄 아닌 죄’로 사고수습을 떠맡게 되어 며칠 동안 어수선한 분위기로 지내야 했다. 결국 재도전은 시도하지도 못한 채 1월 5일 오르코네스계곡을 빠져나올 즈음 실종자가 정상 부근의 바위지대에서 탈진(脫盡), 동사(凍死)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비보(悲報)가 들려왔다.
 
 
  ‘선파워’ 김창호
 
베이스캠프 위쪽 빙하지대. 상어 이빨을 연상케 하는 작은 빙탑들이 빼곡이 솟아 있다.
  “어휴 엉덩이야. 망할 놈의 뮬라 같으니라고.”
 
  2006년 12월 말 세 번째 원정 때는 페루 안데스에서 와이와시 트레킹을 통해 고소적응 기간을 가졌다. 그렇게 4박 5일 동안 트레킹을 하는 사이 해발 4700m대 고개를 세 번이나 넘었건만 4400m 높이의 베이스캠프에 올라서자 잠시 어찔어찔했다. 후배 이영석씨는 텐트 치는 일을 거들다가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자 멍하니 서 있곤 했다. 그러곤 텐트가 완성되자마자 들어가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든 채 엎드려 꼼짝 않았다. 6시간 넘게 뮬라(Mula·남미 고산 지대에서 활동이 가능한 노새)를 탄 ‘대가’였다. 이영석씨가 탄 뮬라는 툭하면 뻗대고 서 있든지 엉뚱한 방향으로 내빼는 바람에 애를 먹였다. 안장까지 시원찮아 엉덩이와 허벅지 안쪽에 타박상을 입었다.
 
  “상명이 형! 상명이 형!”
 
  석상명씨와 함께 텐트 두 동을 치고 짐을 정리하고 1시간이나 지났을까? 아침나절 오르코네스계곡 입구 공원사무소에서 헤어진 김창호(8000m 14좌 무산소 완등자, 2018년 10월 구르자히말 원정 중 사망)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 전날 새벽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합류해 곧바로 아콩카구아로 왔기에 고소적응을 위해 걸어오기로 했는데, 이틀 거리를 9시간도 안 돼 올라온 것이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고소증세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인데 배가 고파 부지런히 올라왔다니 역시 ‘선파워’였다.
 
  그해 봄 시즌 에베레스트 원정을 앞둔 김창호씨는 대학 시절 카라코룸산맥의 대암탑(大岩塔) 트랑고타워(Trango Tower·6239m) 등반에 성공했고, 2005년 낭가파르밧(8125m) 루팔~디아미르벽 횡단등반과 2006년 가셔브룸 2봉(8035m)・1봉(8068m)을 연속등정해 고산등반력을 인정받은 산악인이었다.
 
 
  “아니, 이런 델 왜 오자고 한 거예요!”
 
인디펜덴시아 비박지. 강풍에 산막이 많이 떨어져 나간 상태다. 필자와 이영석(오른쪽)씨가 바람을 피해 잠시 쉬고 있다.
  우리 팀에 앞서 베이스캠프에 머물고 있는 티엔씨(TNC) 원정대는 60대 세 명, 50대 네 명, 그리고 30대 후반의 인솔자로 이루어진 순수 아마추어팀이었다. 고산등반은 제대로 해본 적 없지만 자신감에 관한 한 어지간한 경험자보다 낫게 느껴졌다. 외국 산악인들 또한 대부분 아마추어지만 순간순간을 즐기려는 듯했다. 반면 한국 산악인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이튿날 고소적응에 나설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일행은 이튿날 쉬고 12월 30일부터 캠프에 짐을 올리면서 고소적응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네 명 모두 컨디션이 좋다는 판단에 29일 밤 야간산행으로 제1캠프까지 올라가고, 다음 날 오전에 쉬다가 낮에 2캠프인 베를린 캠프까지 오르기로 했다.
 
  “밤중에는 안 되겠어. 너무 추워서 컨디션이 뚝 떨어져요.”
 
  캠프로 처음 짐을 옮길 때 고생을 많이 했다. 한낮의 뙤약볕을 피하고 시간도 아껴보자는 생각으로 밤 10시가 넘어 출발했는데, 해발 5000m를 넘어서자 우모복을 입어도 추울 만큼 기온이 뚝 떨어졌고 매서운 바람까지 불어댔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이영석씨는 “아니, 이런 델 왜 오자고 했느냐!”며 투덜댔다. 그는 니도데콘도레스 캠프에 비해 고도가 200m쯤 낮은 텐트사이트에 설치한 텐트로 들어가 바로 잠들었다가 깨어나선 “다들 어디 갔느냐?”고 묻는다. 잠깐 사이 꾼 꿈에 불안감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카날레타를 지나 돌길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산악인들. 여기서 정상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대부분 고소증에 시달리며 느릿한 걸음으로 오른다.
  아콩카구아 제1캠프는 5000m대 알래스카캠프와 5600m대 니도데콘도레스라 불리는 능선 캠프를 주로 이용한다. 1997년 첫 등반 때는 니도데콘도레스를 캠프로 사용했는데 강풍과 추위에 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베이스캠프와 고도차가 너무 커 하루에 올려치기에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니도데콘도레스에 비해 200m 아래 캠프지를 택한 것이다. 바람도 불지 않고 아직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시간대여서인지 2~3인용 좁은 텐트에 네 명이 얼기설기 누웠는데도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정력제가 고소에 좋긴 좋은가 보네요.”
 
  베를린 캠프에 머물 때는 머리가 아프다며 힘겨워하던 이영석씨는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심혈관확장제 한 알을 먹고 나더니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등 멀쩡해졌다.
 
 
  새해 첫날 점심
 
2007년 첫날 베이스캠프에서 30분 거리인 플라자데뮬라스 산장에 모여 기념촬영한 한국 산악인들.
  베이스캠프에 내려선 이튿날인 2007년 새해 첫날 점심 때는 한국 산악인 모두 빙하 건너편의 플라자데뮬라스 산장에서 스테이크 특식을 맛있게 먹었다. 와인도 주문했으나 이미 등반을 마친 최오순·김순주 등 몇몇 사람을 제외하곤 다들 잔을 들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정상공격을 앞두고 컨디션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새해 계획에 희망과 꿈이 넘쳐야 할 1월 1일은 이렇게 멋없이 지나가고 말았다.
 
  1월 2일, 두 번째 제1캠프 진출 때는 모두 컨디션이 좋았다. 첫 번째 등반 때에 비해 2시간이나 빨리 도착했고, 고소증세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초반에는 힘겨웠다. 특히 이영석씨는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무릇 원정이란 게 이런 식이다. 처음 계획 세울 때는 꿈에 부풀어 즐겁다가 준비에 들어가면 정신이 없고 짜증스러울 적도 있다. 그러다 출발하면 다시 들뜨고 산 밑으로 다가서는 사이 용기도 생기지만, 막상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고도를 높이다 보면 고소증세가 점점 심해지면서 이런 미친 짓을 왜 하나 싶어진다.
 
  이튿날 마지막 캠프인 베를린 캠프에 올라설 때도 몸이 가벼웠다. 니도데콘도레스 캠프부터 운행을 함께한 수원팀 대원 두 명은 우리보다 일주일 먼저 산행을 시작했으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아콩카구아 국립공원에서는 등반객의 안전을 위해 콘플루엔시아 캠프와 베이스캠프에서 간단한 건강검진을 실시한다. 그런데 수원팀은 콘플루엔시아에서 대원 한 명의 혈압이 높게 나오는 바람에 정상 컨디션을 되찾을 때까지 사흘을 기다려야 했다. 또 다른 대원은 베이스캠프에서 혈중산소포화도가 낮게 나와서 다시 이틀간 묶여야 했다. 그 때문에 건강상태가 정상인 최오순·김순주씨가 먼저 등반하고, 두 사람은 우리 팀과 같은 일정으로 등반하게 되었다. 최오순·김순주씨는 선배들을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베를린 캠프까지 동행한 것이다.
 
  가파른 사면을 따라 하산하는 산악인들이 보였다. 가벼운 배낭을 멘 사람은 짐을 올리거나 고소적응을 위해 위로 올랐다 내려서는 것이고, 커다란 배낭에 짐이 잔뜩 담긴 이들은 정상에 올랐거나 포기하고 철수하는 것이다. 표정이 거의 다 무겁다. 고소증에 시달린 탓일 게다.
 
  니도데콘도레스에서 베를린 캠프까지는 첫 번째 등반 때에 비해 1시간 이상 앞당겼다. 잠시 후 올라온 티엔씨팀은 베를린 캠프에서 뚝 떨어진 능선 너머 안부를 캠프로 삼았다. 흔들림 없이 제2캠프로 향하는 티엔씨팀의 60대 중반 노익장들을 보며 석상명·이영석, 두 사람은 “나도 저 나이에 저렇게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부러워한다.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순 없다’
 
윈디트래버스 구간으로 접어드는 한국 산악인들. 고소증에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고 있다.
  1월 4일, 예정대로 새벽 3시에 일어나 배낭 안에 넣어둔 예비용 장갑과 양말, 간식, 비상식을 확인하고 끓인 물을 담은 수통도 넣었다. 건조미를 끓여 배도 적당히 불렸다. 등반대장이자 막내 대원인 김창호씨는 얼음을 녹여 끓인 물을 만들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잠을 제대로 못 잔 상태였다.
 
  새벽 4시, 출발이다. 석상명씨는 두 번째, 나는 세 번째 도전이다. 최오순·김순주씨의 격려를 받으며 정상을 향하는 수원팀 역시 두 번째다. 간간이 빙판이 형성된 급사면에 접어들자 바람이 몰아쳤다. 추위가 매서웠다. 내복에 바지를 입고 덧바지까지 껴입었는데도 엉덩이가 얼어오고, 손가락은 얼어 터져 나가는 듯했다.
 
  날이 희뿌옇게 밝아온 오전 7시. 예정대로 인디펜덴시아 비박지에 도착했다. 서너 명 공간의 나무 산막이 있으나 강풍에 문은 사라져 버리고 여기저기 깨져 있었다. 김창호씨가 보온병 물을 따라서 우리 팀과 수원팀 대원들에게 건네주었다. 따뜻한 물 한 모금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곧바로 언덕을 올려친 다음 윈디트래버스에 접어들었다. 순간 벽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백풍(白風·Viento blanco)’이라 불리는 강풍이었다. 등반이 가능할지 잠시 망설였으나 멈출 순 없었다. 일정상 딱 한 번의 기회, 또 그냥 내려서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순 없다 싶어 밀어붙였다. 다행히 바람이 가라앉았다.
 
 
  일본팀 찾아나선 구조대에게 발견
 
  잠시 숨을 가다듬는 사이, 1998년 1월 2일의 일이 기억났다. 베를린 캠프가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내려서다 제정신을 차린 뒤 한동안 멈췄다. 살아날 방법을 고민했다. 이대로 내려가면 분명 베를린 캠프도 북면 오르코네스계곡 베이스캠프도 나올 리 없고, 오히려 동면 아래 바카스계곡(R. de las Vacas)으로 내려설 확률이 높다 싶었다. 다시 올라가자, 그러면 어느 순간 정상을 오르는 클라이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어느 순간 불빛이 보였다. 나처럼 길을 잘못 든 일본팀이었다. 캠프 이동 중 만난 일본팀 가이드는 “이번이 여섯 번째 아콩카구아 등반”이라 했는데, 나처럼 길을 잃은 것이다. ‘나를 살리기 위한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비박 준비를 했는데, 나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비박용 판초가 벽에 기대앉은 그들 다섯 명을 겨우 감쌀 크기였다.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몇 차례 사정한 끝에 같이 덮을 수 있었는데 몸의 반쪽밖에 가려지지 않았다. 이후 1시간쯤 지나 캠프로 돌아오지 않는 일본팀을 찾아나선 구조대에 의해 자정 너머 베를린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베를린 캠프에 준호 형과 이상배씨는 보이지 않았다. 맨 먼저 하산한 이태순씨만 거의 실신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입술과 목구멍이 달라붙을 만큼 갈증이 심했으나 물도 얼음을 녹일 연료도 바닥난 상태였다. 숨을 못 쉴 정도로 갈증이 심해졌다. 옆 텐트로 다가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외국인을 깨워 물 한 모금 얻어 마시고 난 뒤에야 ‘살았다’ 싶었다. 잠에 빠져들면서도 괘씸했다. ‘물 끓여놓고 기다리겠다던 사람들이 이렇게 조난까지 당한 나를 팽개쳐놓고 베이스캠프로 내려가 버리다니.’
 
  이튿날 아침 짐을 싸면서 ‘이상하다’ 싶었다. ‘준호 형이 왜 침낭을 그대로 놔두고 하산한 거지?’ 제1캠프로 내려서서 한동안 두리번댔다. 눈에 띄기만 하면 “어떻게 후배를 버리고 먼저 내려갈 수 있냐!”고 화부터 낼 작정이었다. 보이지 않았다. 베이스캠프에 다가설수록 불안감에 혼란스러워졌다. 베이스캠프에 내려서자 어제 제1캠프에서 자고 아침 일찍 하산한 이상배씨가 마중을 나왔다.
 
  “준호 형 같이 내려온 거 아니에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실종이었다.
 
 
  폭풍설에 등반 포기
 
  촛대바위를 지나자 가파르고 험해졌다. 1999년 1월 3일, 이 구간에 접어드는 순간 석상명·한왕용·필자, 세 사람 모두 당황했다. 동면 베이스캠프에서 레인저에게 확인했을 때 북면 루트에 눈이 전혀 없다는 정보를 얻었다. 때문에 아이젠과 피켈, 로프 등 등반장비를 포함해 필요 없는 짐을 뮬라에 실어 산 아래 숙소가 있는 페니텐테(Los Penitentes·2580m)로 철수시키고 베를린 캠프로 넘어섰다. 그런데 이튿날 인디펜덴시아를 지나 촛대바위 턱을 올려치는 순간 북면은 온통 깊은 눈에 덮여 있고 눈보라까지 몰아쳤다.
 
  카날레타에 접어든 이후 확보를 위해 세 사람을 연결한 로프가 점점 성가시게 느껴졌다. 맨 뒤에서 속도를 맞추지 못하자 앞선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었다. 앞에 가는 외국 클라이머들도 힘겹게 올랐다. 밟은 눈이 밀릴 때마다 낭떠러지나 다름없는 설사면 아래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눈 속에 꽂힌 등산용 폴 한 자루가 눈에 띄었다. 전날 정상을 향해 오른 한국인들의 폴이었다. 또 얼마나 올랐을까? 위쪽에서 한 사람이 미끄러지고 굴러 떨어지며 우리 쪽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할 만큼 가까워졌을 때 보니 한국인이었다. 하루 전날 동료 두 명과 함께 정상으로 향하다가 고소증에 힘겨워하는 대원들과 헤어진 뒤 폭풍설을 무릅쓰고 강행해 이튿날 새벽 1시20분경 정상에 올라섰으나 바로 하산하지 못해 정상 아래에서 비박한 후 이날 오전 11시20분경부터 베를린 캠프로 하산 중인 한국인이었다.
 
  그에게 조심하라 말하고 헤어진 지 1시간이나 지났을까? 밟은 눈이 밀릴 때마다 균형을 잃자 동료들에게 포기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두 사람 모두 함께 내려가겠다며 등반을 접었다. 미안한 마음 그지없지만, 정상은 보이지도 않고 폭풍설이 점점 강하게 불어대 정상을 욕심낸다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드디어 정상 정복, 그러나?
 
석상명씨가 남미대륙 최고봉 아콩카구아 정상에 올라서고 있다.
  그랬던 북면 일원이 세 번째 도전 때에는 온통 흙사면이다. 베를린 캠프를 출발한 지 5시간쯤 지나 카날레타 구간에 들어설 때 위쪽 절벽 아래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그는 팬터마임하는 광대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절벽에 다가설 때까지 30~40분 동안 10m도 안 움직였다. 커다란 배낭에 매트리스까지 매달린 것을 보면, 오늘 출발한 게 아니었다.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힐끗 쳐다보는 순간 눈이 마주친 그는 씩 웃었다. 웃음 속에는 비장한 각오와 함께 그만의 카타르시스가 엿보였다.
 
  카날레타가 끝나면 정상이 얼마 안 남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커다란 바위들이 서로 엎치고 덮쳐 위태로운 너덜을 형성한 급사면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그래도 정상이다 싶은 암봉이 보일 때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오전 11시, 석상명씨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다 왔다, 조금만 더 가면 끝이다.’ 바위 벼랑길로 들어선 다음 왼쪽으로 틀다가 턱을 올려치자 비스듬하면서도 널찍한 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십자가 하나가 외롭게 정상을 지키고 있었다. 이탈리아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세계 최난(最難) 거벽 중 하나라 일컬은 남벽과 날카로운 리지를 형성한 남봉이 빤히 바라보였다. 수많은 봉우리가 모두 발 아래 있었다. 정상이었다.
 
  지구를 반 바퀴 도는 여정을 세 차례나 하고 나서야 올라선 정상이었다. 정상에 서면 기쁨에 환호성을 지를 줄 알았다. 아니었다. 오히려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깟 정상에 올라서려고 준호 형이 목숨을 잃었나’ 하는 생각에 한동안 허망하기만 했다.
 
 
  준호 형의 죽음
 
아콩카구아 들머리에 자리한 산악인 묘지. 세 번째 원정에서 등정에 성공한 뒤, 9년 전 사고를 당한 고 강준호 형의 추모비를 찾았다. 함께 산을 얘기하던 그가 보고 싶어졌다.
  하산길. 정상에서 10분쯤 내려섰을 때 밑에서 누군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김창호였다. 그의 대학 선배인 이영석이 카날레타 직전 고소증에 힘들어하자 자청해서 안전지대인 인디펜덴시아까지 동행한 다음 다시 정상을 향했다. 그런데도 다른 외국 산악인들을 모두 추월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김창호 덕분에 다시 아콩카구아 정상에 올라서고, 당일 2회 등정이라는 멋쩍은 기록까지 남기고 하산길에 들어섰다. 카날레타를 내려서는데 9년 전 일이 떠올랐다.
 
  베이스캠프에서 이틀간 기다리다가 캐러밴 기점 마을인 페니텐테로 철수했고, 칠레 공군의 협조(당시 아르헨티나 최남단에 있는 아르헨티나 헬기는 아콩카구아까지 오려면 여러 날이 걸려 이용할 수 없었다)를 받아 헬기 수색을 벌일 때까지도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준호 형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실종 일주일 뒤 촛대바위 아래 돌 사면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목격자인 아르헨티나 산악인은 “발견 당시 머리가 5cm 넘게 찢어져 있었고, 주변 돌밭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사인(死因)은 심한 고소증에 의한 폐부종.
 
  촛대바위를 지나칠 때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준호 형 모습이 그려졌다. 가슴이 아팠다. 주저앉아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인디펜덴시아에 이르자 하산 중인 티엔씨팀 대원들이 보였다.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못할 만큼 두 사람 다 지쳐 있었다. 정상엔 오르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한 이들이었다.
 
  베를린 캠프로 내려서자 한 외국인이 다가와 “정상 가는 길이 어떠했느냐” “혹시 가스 남은 게 없느냐”고 물어 왔다. 아마추어 복장인데다 고산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이다 싶었다. 9년 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헤매다 구사일생으로 베를린 캠프에 내려서고, 목구멍이 달라붙을 만큼 심한 갈증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에서 잠자는 외국 클라이머를 깨워 “물 좀 달라”고 애원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1월 6일, 모든 캠프를 철수하고 오르코네스계곡을 빠져나가는 사이 많은 산악인이 베이스캠프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그중 60대 외국인은 “아콩카구아는 너무 아름답다. 이번이 네 번째 도전이다”며 미소지었다. 그에게 아콩카구아는 ‘목숨 건 등정 대상’이 아닌 ‘즐거운 도전 대상’이었다. 그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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