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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峯 등반체험기

죽음 앞에서도 꿈을 저버리지 않는 등반가들

글 : 한필석  월간산 편집장  ps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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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박영석, 한왕용 등 한국을 대표하는 고산 등반가들과 북미 최고봉 데날리(6194m)를 등반하며 빙하 위 텐트 속에서 ‘원대한’ 꿈을 함께 그렸다. 엘브루즈, 킬리만자로, 아콩카구아, 칼스텐즈, 빈슨매시프 그리고 에베레스트로 이어지는 7대륙 최고봉을 등정하겠다고…. 강준호는 7개 목표 가운데 네 번째 봉인 아콩카구아에서 꿈을 접고 세상을 떠났다. 박영석은 히말라야 14개 고봉 완등, 3극점 도보탐험으로 이어지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인류 최초로 달성하고 2011년 가을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사라졌다. 14좌 완등을 세 번째로 달성한 한왕용은 이후 등반세계를 떠났다. 生死를 떠나 목표를 향해 포기하지 않는 산악인들의 ‘작은’ 꿈은 그래서 숭고하다

⊙ 墜落死한 준호 형의 마지막 말 한마디, “필석아, 頂上에 올라 보니 별 볼 일 없더라”
⊙ 무전기를 통해 들려온 박영석 대장의 다급한 목소리, “희준인 찾았어! 현조는…”
⊙ 에베레스트 캠프4에서 만난 후배, “…형, 성호가 안 일어나요”
  히말라야. 고대 산스크리트어(語)의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의 두 단어를 결합한 복합어다.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히말라야 산맥(山脈)은 동서(東西) 길이가 2400km에 달하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품고 있다.
 
  히말라야. 설연(雪煙) 휘날리는 설봉, 보석처럼 반짝이는 침봉과 설벽(雪壁)은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때문에 설산의 정상(頂上)에 올라서는 히말라야 등반을 일생의 버킷리스트(The Bucket List·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로 삼는 산악인이 많다.
 
 
  ‘죽음의 지대’에서 生還은 거의 불가능
 
  그러나 설산(雪山)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눈사태나 크레바스(crevasse·빙하나 눈 골짜기에 형성된 깊은 틈새)와 같은 자연적 위협뿐만 아니라 등반자 스스로 적응에 실패해 극심한 고소증세에 시달리거나 앞이 보이지 않는 설맹(雪盲) 증세, 추락사고 등으로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적 같은 스토리를 만들어 내며 생환하거나 구조된 산악인이 있기는 하지만 극히 드물다. 특히 ‘죽음의 지대’로 일컬어지는 해발 8000m 위에서 ‘생환’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 죽음의 지대에서 위급한 상황에 빠진 후배들의 구조에 나섰다가 사고사(事故死)한 영화 〈히말라야〉 속 주인공은 백준호다. 2004년 5월 18일 계명대 원정대 부대장 백준호는, 후배 박무택과 장민이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길 해발 8750m 높이에서 심한 설맹 증세로 꼼짝을 못하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캠프에서 홀로 정상을 향했다. 해발 8600m와 8700m 대에서 바위절벽 두 곳을 올라서야 하는 험난한 등반로였다. 그런 난관을 극복하고 백준호는 마침내 박무택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체력이 바닥난 백준호가 탈진에 동상까지 걸려 반죽음 상태인 후배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끝내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산에서, 특히 하나의 팀으로 등반하는 히말라야에서 동료를 잃는 슬픔은 산악인들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슬픔이자 아픔이다. 도와줄 수도 없는 상황, 해결할 수도 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 무기력한 자기 자신에 대한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현직 산악 전문기자로서 6000m 이상의 고봉(高峯)을 10여 차례 등반한 적이 있는 필자는 이런 상황을 여러 차례 겪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적도 없지 않다. 남미대륙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에서 혈육 같은 선배의 실종으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고, 에베레스트에서는 2007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가까이 지내던 세 후배의 주검을 보며 슬퍼했다. 그때마다 산이 그렇게 밉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픈 기억을 꺼내는 일은 가슴에 비수(匕首)를 다시 꽂는 것과 같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도 꿈을 저버리지 않는 ‘진정한’ 등반가들의 위대함을 조금이나마 알리고자 펜을 들었다.
 
 
  “물 만들고 있을게 천천히 내려와”
 
해발 5300m에 위치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캠프1(6000m)로 오르는 관문인 아이스폴 지대가 보인다. 각종 물품을 공수하거나 환자를 후송하는 헬리콥터가 종종 베이스캠프를 찾아온다.
  1997년 1월 2일. 기자는 아콩카구아를 오르다 정상 200m 아래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고소증세에 의한 하체무기력증으로 한 발짝을 떼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에 몰려 달러 환율이 사상 최고치인 1달러당 2000원에 육박한 날 출국했기에 꼭 정상에 올라서겠다는 각오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산은 저질체력을 허락하지 않았다.
 
  함께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세 명의 선후배는 이미 정상에 올랐다가 한 명씩 하산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내려선 후배 이태순은 “형님, 거의 다 왔습니다. 힘내세요”라는 말로 격려하며 캠프로 내려갔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 만난 것이 강준호 형이었다.
 
  “필석아, 정상에 올라가 보니까 별 볼 일 없더라. 같이 내려가자.”
 
  정상이 눈앞에 보여 조금만 도와주면 올라설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하산을 권유하자 선배에 대한 마음은 섭섭함을 넘어 야속함으로 변했다. 그러나 혼자서 더 이상 오를 힘도, 혼자 올랐다가 하산할 자신도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정상을 뒤로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퇴석지대인 카날레타(해발 6600 ~6700m) 구간에서 겨우겨우 내려서고 있는데 준호 형을 다시 만났다. 형은 한술 더 떴다.
 
  “먼저 내려가서 물 만들고 있을게 천천히 내려와.”
 
  “지친 놈을 홀로 놔두고 내려갈 거면 그냥 정상에 오르게 놔둘 것이지.”
 
  이렇게 투덜대며 형을 뒤따라 계속해서 내려갔다.
 
  강준호 형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고, 안전지대인 윈디 트래버스(Windy Traverse)상의 촛대바위(해발 약 6400m)를 지나 능선 뒤로 넘어가면서 형은 모습을 감추었다. 기자가 윈디 트래버스에 접어들었을 때 세 번째 등정자인 이상배씨가 등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잠시 함께 걸었다. 그러곤 능선 너머 캠프3가 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그 역시 “물 만들어 놓고 기다리겠다”며 먼저 내려가 버렸다.
 
  이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사방은 어둠 속에 묻혀 버렸고 하늘엔 별이 총총했다. 북면 캠프3로 향해 내려간다는 게 엉뚱한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자는 고소증세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무작정 내려가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산에서 죽는가 보다’ 하는 절망감이 온몸을 휘어잡았다. 어머니, 아내, 딸들 모습이 떠올랐다. 포기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두려움을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정상을 향해 다시 오르면 적어도 산을 오르는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 섰다.
 
  처질 대로 처진 몸을 이끌고 정상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얼마 동안을 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였다. 위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의 가이드와 세 명의 손님 대원으로 구성된 일본 등반대였다. 알고 보니 그들도 길을 잃은 처지였다. 일본 가이드는 아콩카구아를 이미 대여섯 번 등정한 베테랑 산악인이었다. 그런 사람조차 길을 잃을 정도였으니 아콩카구아는 잠시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사지(死地)를 헤매는 곳이었다. 아무튼 그들에겐 불행스런 일이었지만 나에게 천우신조였다. 여러 명과 함께 실종됐다는 것은 구조될 가능성이 몇 배 이상 높기 때문이다.
 
 
  고소증에 의한 체력저하로 사망한 강준호
 
  마침내 실종신고를 받은 아콩카구아 레인저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캠프3로 돌아왔다. 정상을 향하기 전 “반드시 등정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화기애애했던 텐트 안에는 이태순 홀로 실신한 듯 잠에 빠져 있었다. 식수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겠다던 강준호 형과 이상배씨는 보이지 않았다. 먼저 내려갔을 것이라 생각했다.
 
  기자는 목구멍이 달라붙을 정도로 수분이 고갈된 상태였다. 물 달란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눈 녹일 버너 연료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이태순이 옆 캠프의 외국인들에게서 얻어온 물 반 컵으로 갈증을 겨우 달랜 후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아침, 캠프 철수를 위해 짐을 싸던 중 준호 형의 침낭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치솟았다.
 
  “자기 짐도 안 가지고 내려가다니….”
 
  침낭 두 개에 텐트와 취사구를 집어넣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 넓은 능선상에 설치된 캠프2로 내려섰다. 강준호, 이상배 두 사람이 여기서 기다릴 것이라 기대하고 텐트 안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곳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아니, 베이스캠프로 먼저 내려간 거야?”
 
  이런 생각이 들자 화가 더욱 치솟았다. 하지만 베이스캠프 도착 즈음 마중 나온 이상배씨의 표정을 보는 순간 섬뜩해졌다.
 
  “준호 형이 아직 안 내려왔는데 못 만났어요?”
 
  이후 1주일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 하루 거리인 산기슭 숙소에서 아콩카구아를 바라보며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밤이면 등반로 반대편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준호형 모습이 꿈에 나타나곤 했다.
 
  칠레의 공군 헬기를 대여해 이틀간 수색했다. 6000m 높이의 하늘에서 바라보이는 것은 아콩카구아에 추락해 부서진 헬기 잔해뿐이었다(1998년 1월까지 아콩카구아에 헬기 11대가 추락했다). 더 이상의 수색이 무의미하다고 판단되자 헬기 대여를 알선한 칠레 브로커는 “산을 좋아하는 산 사나이가 산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것은 성전(聖殿)에서 잠든 것이나 다름없다”며 위로하며 헬기 대여료로 하루치만 받았다. 6000달러가 넘는 큰돈을 깎아 준 것이었다. 죽음 앞에서 동서양인은 다르지 않았다. 같이 슬퍼하고 위로해 줬다.
 
  준호 형의 시신은 촛대바위 아래 해발 약 6300m 높이 급경사 너덜지대에서 아르헨티나 산악인에 의해 발견됐다. 머리가 심하게 찢어진 상태에서 과다출혈이 사망원인이었다. 준호 형을 등정길에서 만났을 때 그는 고소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그로 인해 평범한 산길에서 추락사(墜落死)하고 말았던 것이다.
 
 
  눈앞에 나타난 死線
 
지진 직후의 모습처럼 수없이 갈라진 크레바스를 건너는 클라이머들. 크레바스에 설치된 사다리 위로 균형을 잡고 건너기란 쉽지 않다. 한국 여성산악인 전푸르나 대원이 건너고 있다.
  2007년 봄, 기자는 한국산악회와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한 ‘실버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했다. 타이틀은 취재기자였지만 실제론 박영석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에 속한 남동릉 루트를 통한 세계 최고봉 등정이 목표인대원이었다.
 
  초반 고소적응 과정에서 제대로 이겨내지 못할 때면 박영석 대장한테 ‘야단맞는’ 게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소에 적응하면서 세계 최고봉과 그 옆에 솟은 제4위 고봉 로체(8516m)와 눕체(7855m)가 점점 눈에 들어왔다. 등정에 대한 욕구가 솟구쳐 올라왔다.
 
  베이스캠프와 캠프1 사이의 아이스폴(해발 5400~6000m 빙하 구간) 등반로 주변에는 수많은 거대한 빙탑들이 곧추서 있었다. 발 아래에는 언제 꺼질지 모를 크레바스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서릉과 로체, 눕체 능선에 둘러싸여 거대한 분지를 이룬 웨스턴쿰은 웅장하고 위압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실버팀 대원들은 한두 명을 제외하곤 대부분 주눅이 든 상황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때 외에는 각자의 텐트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내가 최고’라며 대단한 체력을 가진 노익장들이었지만 고산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5월 13일, 드디어 세계 최고봉 등정을 목표로 베이스캠프를 나섰다. 당시 기자는 부담이 컸지만 세계 최고봉 정상을 향한다는 벅찬 마음으로 등반에 임했다. 같이 나선 이들은 한국도로공사 에베레스트-로체 원정대의 김홍빈, 김창호, 김미곤 등 베테랑 산악인들이었다.
 
  오전 8시경 해가 눕체 능선 위로 솟아오르자 아이스폴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크레바스를 건너고 사다리가 놓인 거대한 빙탑을 오르는 클라이머들도 아름다운 풍경 속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흔히 사진이나 영상 속의 산악 등반은 대부분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현실은 목숨을 건 ‘오름’이다.
 
  에베레스트 최고봉 등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등반 시작 초반부터 위험천만한 일을 당했다. 갑자기 발 아래가 흔들리며 뭔가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발 아래가 부르르 떨렸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눈앞 설원이 갑자기 푹 꺼진 것이다. 내려앉은 설원 가장자리에서 기자가 서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불과 20m 남짓 했다. 설원 경계선 너머에 서 있었다면 필경 깊이를 알 수 없는 크레바스 속에 빠져들었거나 거대한 얼음벽에 몸이 끼여 진작에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주저앉은 설원으로 내려선 다음 다시 3~4m 높이의 턱을 올라섰다. 그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아이스폴이 끝나는 설원에 세운 캠프1(6000m)을 거쳐 캠프2(6500m)로 향했다.
 
 
  “형님, 걱정 마세요. 아콩카구아도 올랐잖아요”
 
카약, 사이클, 트레킹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을 극복하고 에베레스트 캠프3를 향해 오르는 ‘FROM 0 TO 8848’ 원정대의 서성호 대원. 세계 최고봉 무산소 등정이라는 꿈은 이루었으나 사우스콜 캠프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튿날 어둠 속에서 캠프3로 향했다. 캠프3는 세계 제4위 고봉인 로체 서벽 해발 7300m 높이의 가파른 설사면에 구축돼 있었다. 용변 보러 나갔다가 추락사하는 사고도 빈번한 위험한 캠프였다.
 
  5월 15일 오후 2시경, 어렵사리 마지막 캠프인 사우스콜(South Col· 7925m) 캠프에 도착했다. 에베레스트와 로체 사이의 거대한 안부(鞍部)인 사우스콜은 평지에 비해 공기 중 산소 비율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는 고지대였다. 텐트 수십 동이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셰르파들은 이날 저녁 시도할 정상 공격에 대비해 산소통과 산소호흡기를 확인하느라 텐트 밖에 나와 있었지만, 대원들은 대부분 산소마스크를 착용한 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텐트 안에 누워 있었다.
 
  먼저 도착한 도로공사팀의 김홍빈, 김주형 두 대원은 수분을 보충하기 위해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어젯밤 캠프3에 함께 있다가 발코니(8500m)~남봉(8750m) 구간에 고정로프를 설치하기 위해 먼저 출발한 김창호, 김미곤 대원도 임무를 완수하고 캠프에서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모두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기자는 체력 저하 상황에 빠졌다. 고심 끝에 하룻밤 더 묵고 다음 날 등정을 시도하기로 했다. 김창호 또한 기자를 돕기 위해 등정 날짜를 바꿨다.
 
해발 8500m 고도의 발코니를 올라서는 외국 클라이머와 셰르파(뒤). 왼쪽으로 세계 4위 고봉 ‘로체’가 위압적인 모습으로 솟구쳐 있고, 그 오른쪽 뒤로 쿰부 히말의 명봉들이 여명에 꿈틀거리고 있다.
  마지막 캠프인 사우스콜에서 비몽사몽 상태에 있으면서 먼저 정상을 공격하러 떠난 원정대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그날 밤 자정 무렵이었다. 지직거리는 무전기의 잡음 속에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희준인 찾았어! 현조는…. 끝까지 찾으란 말야!”
 
  베이스캠프에서 공격조를 지휘하고 있는 박영석 대장의 다급하고 흥분된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려왔다.
 
  사고가 난 것이다. 오희준이 또 다른 후배 이현조와 함께 에베레스트 남서벽 해발 7950m 높이 캠프에서 눈사태에 6500m 빙하지대로 떨어졌다. 제주 산악인 희준(오희준)은 기자의 막내아들을 업고 한라산을 올랐을 만큼 친한 후배였다. 등반 도중 기자가 힘들어할 때면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준 ‘멘토’이기도 했다. 캠프2를 출발할 당시 그에게 “가능할까?” 묻자 희준이는 “형님, 걱정 마세요. 옆 텐트의 외국 클라이머에 비하면 훨씬 나아요. 아콩카구아도 올랐잖아요”라며 힘을 북돋아 줬다. 그런 후배가 사고를 당하다니….
 
 
  火木 위에 20시간 타오른 아름다운 영혼 희준이와 현조
 
캠프에서의 즐거운 식사 시간(가운데 필자). 頂上과 가까워질 때면 추위와 배고픔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인간의 인내를 시험하는 과정이다.
  서너 시간 뒤인 이튿날 새벽 실버팀 부단장에게서 무전이 왔다.
 
  “박영석 대장이 패닉 상태야. 누군가 옆에서 있어 줘야 할 텐데…. 한필석 기자밖에 없는 것 같아. 내 입으로 하산하란 말은 못하겠지만 말야.”
 
  순간 산악인으로서의 욕망이 밀려 왔다.
 
  “이제 네댓 시간 뒤면 정상을 향해 출발하는데, 지금 내려가면 여기를 다시 올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후배들이 죽었는데, 이제 마주 볼 수 없는 저 세상 사람이 됐는데, 에베레스트 정상을 욕심내다니….”
 
  정상을 뒤로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옆에 있던 후배 산악인 김창호에게 “혼자 가라. 난 하산하겠다”고 했다.
 
  “아니요, 저도 함께 내려가겠습니다.”
 
  김창호는 사고를 당한 두 사람의 산악계 선배이기도 했다.
 
  기자는 실버팀 대원 세 명이 사우스콜 캠프에 올라서는 모습을 보고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얼마 후 캠프2에 도착했다. 그들과 함께 지낸 커다란 텐트는 설동(雪棟)에 들어선 듯 냉기로 가득했다. 이튿날 어둠 속에서 캠프2를 떠나 캠프1에 도착할 즈음 동이 트기 시작했다. 아이스폴은 언제나 그랬듯이 아침 햇살이 스며들자마자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보석 속에 빨간 물체 두 개가 보였다. 오희준, 이현조 두 후배의 시신이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앞을 가렸다. 깊은 뱃속에서 올라온 울음소리가 목구멍을 거쳐 세상에서 찢어졌다. 냉동인간처럼 딱딱히 굳은 두 후배를 껴안았다. 미동(微動)도 하지 않았다. 이토록 가슴 저린 아픔에 기자는 한동안 헤어나지를 못했다.
 
  닷새쯤 지났을까. 베이스캠프에서 헬기에 실려 카트만두로 옮겨진 두 후배는 사원(寺院) 화장터에서 이 세상과 마지막 이별을 했다. 두껍게 쌓인 화목 위에 올려진 채 20시간 가까이 타올랐다.
 
  “희준아, 집에 가자. 엄마가 계시는 집에 가자.”
 
  장작불 위에 ‘타닥’ 소리를 내며 타 들어가는 동생의 시신을 바라보며 울부짖던 오희준 형(오희삼)의 목소리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귓전을 울리는 듯하다.
 
 
  사우스콜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서성호
 
캠프2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 정상. ‘FROM 0 TO 8848’ 원정대의 김창호 대장이 정상을 뒤로한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두 후배의 사고 2년 뒤인 2013년 봄 기자는 에베레스트에 다시 도전했다. 박영석 일행의 사고로 받은 충격과 슬픔은 망각 뒤편으로 넘어간 뒤였다. 참가비로 4만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비용이 드는 원정이었지만 세계 최고봉을 오르기 위해 회사에 휴직계까지 냈다.
 
  막상 현장에서 등반을 시작한 이후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힘들 때면 ‘미친놈’ ‘정신 나간 놈’ ‘그 돈을 집에 갖다 줘 봐라 임금님 소리 듣지’라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 갈등을 뿌리치고 등정에 나선 것이다. 이제 와서 힘들어 포기하겠다는 얘기를 꺼낼 처지도 못 됐다.
 
  캠프2에서 요로결석에 의한 허리 통증이 왔을 때는 고통을 호소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그냥 내려설 순 없었다. 캠프3를 오르고 또 힘겹게 캠프4에 올랐다. 옐로밴드와 제네바스퍼(7850m)를 거쳐 도착한 사우스콜은 6년 전에 비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새벽녘 캠프3에서 많은 클라이머와 셰르파들이 올랐건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우스콜에 도착한 클라이머나 셰르파들이나 모두 텐트 안에 들어가 산소마스크를 입에 댄 채 가만히 드러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소통이나 쓰레기봉투였다. 역시 해발 7925m라는 높이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텐트에 들어가자마자 드러누웠다. 서너 시간 지났을까, “이제 정상을 출발해야 할 시간”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리를 펴는 게 힘들 만큼 지쳐 있었다. 굼벵이처럼 느린 속도로 아이젠을 차고 일어섰다. 휘청거렸다. 멀미를 심하게 하는 기분이었다. 다리도 후들거렸다. 기자는 정상을 향해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난 내일 출발할게.”
 
  친구인 석상명은 컨디션이 좋아 그대로 강행했다. 베이스캠프 도착 이후 같은 루트로 등반해 같은 날 사우스콜에 오른 김창호 원정대도 출발했다. 잠자다 눈이 뜨이면 텐트 밖을 내다보았다. 정상 근처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헤드랜턴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상명이와 창호 팀이 저기쯤 가겠지.”
 
  이런 생각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면 두세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산소 부족 때문에 정신을 가다듬는데 시간이 적잖게 걸렸다. 다시 깨어나 ‘내일 혼자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다 다시 잠에 들었다. 8000m 가까운 곳에서 하루를 지내는 사이 정신은 점점 멍해져 갔다.
 
 
  “350m만 더 오르면 세계 최고봉 頂上인데…”
 
해발 8500m 높이의 발코니에서 ‘로체’를 등지고 서 있는 필자. 등정의 유혹에 고심하다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밤이 가고 날이 밝았다. 오후 1시를 넘어서면서 석상명 그리고 김창호 원정대 대원들이 한 명 한 명 캠프로 내려왔다. 하지만 김창호와 함께 인공산소의 도움 없이 정상에 올랐던 서성호는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로체 마지막 캠프에 있던 오영훈은 서성호의 상태를 무전을 통해 듣자마자 자신의 등반을 포기하고 서성호 구조에 나섰다.
 
  기자의 정신도 깜박거렸다.
 
  “성호가 잘 내려오고 있을까? 만약 못 내려오고 도중에 머물러 있다면…. 내가 과연 그를 도울 수 있을까.”
 
  그렇게 걱정을 하다가 어둠이 몰려온 오후 6시 반쯤 캠프4를 출발, 등정길에 나섰다. 하루 전에 비하면 컨디션이 좋았다.
 
  캠프4를 출발해 30분쯤 지났을까. 서성호를 부축하며 하산하는 오영훈의 모습이 보였다.
 
  “성호야, 괜찮니?”
 
  “네, 괜찮아요. 형님만 남았네요. 잘 다녀오세요.”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로(登路)는 절벽처럼 가파른 능선이었다. 다른 외국 클라이머에 비해 빨리 출발했지만 출발 2시간쯤 지나자 기자 뒤로 랜턴 불빛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동행한 셰르파는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쳤다. 따듯한 물 한 모금 마실 시간조차 없이 오르고 또 올랐다.
 
  하지만 내 한계는 해발 8500m 발코니까지였다. 350m만 더 오르면 세계 최고봉 정상이었지만 리스크가 너무 컸다. 이미 장갑과 양말은 젖은 상태였다. 동상(凍傷)이 우려됐다. 손가락을 자르면 등산잡지 기자로서의 생명이 끝날 것이요, 발가락을 자른다면 ‘산쟁이’로서의 운명이 막을 내릴 것 같았다. 그런 몸으로 가족 얼굴을 어찌 볼 수 있을까.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로체, 마칼루(8463m), 그리고 멀리 구름바다에 솟구친 섬 같은 캉첸중가(8586m)를 마주하는 것으로 꿈을 접어야 했다. 하산하기로 했다.
 
  남동릉을 내려서면서 바라보이는 캠프4는 유난히 쓸쓸하고 썰렁했다. 친구도 후배들도 모두 철수했을 것이고, 홀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맥이 빠졌다.
 
  캠프4에 도착하자마자 텐트를 찾았다. 냉장고 안처럼 차갑겠지만 그래도 잠시 쉬었다 하산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처절한 휴식이었다. 그런데 텐트 입구로 누군가 머리를 밀어넣었다.
 
  “형, 벌써 돌아오셨어요. 성공하신 거죠?”
 
  “아니…. 왜 아직 안 내려간 거야?”
 
  “…형. 성호가 안 일어나요.”
 
  “안 일어나? 죽었단 말야?”
 
  “….”
 
  서성호는 C4에서 잠을 자다가 잠시 일어나 텐트에 기댄 채 조용히 죽어 갔다. 서성호는 이미 여러 해 전 에베레스트를 오른 바 있고, 14좌 중 이미 12좌를 등정한 산악인이었다. K2(8611m)와 브로드피크(8047m) 2개봉만 남겨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14좌 완등보다는 선배인 김창호처럼 인공산소의 도움 없이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오르겠다는 고산 등반가로서의 꿈이 더욱 컸다. 그는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는 꿈을 이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추억 속의 인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이튿날 셰르파들에 의해 로체 서벽 아래까지 운구된 다음 헬기에 의해 카트만두로 옮겨졌다. 그리고 오희준, 이현조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모습을 감추었듯이 화목 위에 올려져 불길과 함께 사라졌다.
 
 
  포기하지 않는 산악인들의 숭고한 꿈
 
  1994년 5월 기자는 박영석, 한왕용 등 한국을 대표하는 고산 등반가들과 북미 최고봉 데날리(매킨리·6194m)를 등반하며 빙하 위에 세운 텐트 속에서 ‘원대한’ 꿈을 함께 그렸다. 데날리를 시작으로 엘브루즈(5642m·유럽), 킬리만자로(5895m·아프리카), 아콩카구아, 칼스텐즈(4885m·오세아니아), 빈슨매시프(4897m·남극) 그리고 에베레스트로 이어지는 7대륙 최고봉을 등정하겠다고…. 강준호 형은 7개 목표 가운데 네 번째 봉인 아콩카구아에서 꿈을 접고 세상을 떠났다. 박영석은 그 꿈에 이어 히말라야 14개 고봉 완등, 3극점 도보탐험으로 이어지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인류 최초로 달성했다. 그 역시 2011년 가을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사라졌다. 한국 산악인 가운데 14좌 완등을 세 번째로 달성한 한왕용은 이후 등반세계를 떠났다. 그는 지금 살아 있다. 생사(生死)를 떠나 목표를 향해 포기하지 않는 산악인들의 ‘작은’ 꿈은 그래서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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