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광복절, 육영수 여사 피격 선명히 포착한 유일한 사진기자
⊙ “연설 마친 후 바닥에서 여사의 가방과 신발 집어 올리던 박정희 대통령 모습 지금도 생각나”
⊙ “앉아 있던 의자엔 끔찍할 정도로 많은 피… 살아남을 수 없을 거란 생각 들어”
⊙ 86세 나이에 지금도 현역… 박정희부터 윤석열까지 7명의 대통령 역사적 순간들 기록
⊙ “陸 여사의 마지막 모습은 커튼으로 가려 주길”
任熙淳
1939년생.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 前 《조선일보》 사진부 기자, 포항제철 사장실, AFP통신 서울 특파원, 《한겨레》 편집위원, 《문화일보》 부국장, AP통신 사진기자, 하나통신 대표 / 한국신문상 수상(1974)
⊙ “연설 마친 후 바닥에서 여사의 가방과 신발 집어 올리던 박정희 대통령 모습 지금도 생각나”
⊙ “앉아 있던 의자엔 끔찍할 정도로 많은 피… 살아남을 수 없을 거란 생각 들어”
⊙ 86세 나이에 지금도 현역… 박정희부터 윤석열까지 7명의 대통령 역사적 순간들 기록
⊙ “陸 여사의 마지막 모습은 커튼으로 가려 주길”
任熙淳
1939년생.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 前 《조선일보》 사진부 기자, 포항제철 사장실, AFP통신 서울 특파원, 《한겨레》 편집위원, 《문화일보》 부국장, AP통신 사진기자, 하나통신 대표 / 한국신문상 수상(1974)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식이 시작됐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입술을 굳게 다문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입장하고, 한복 차림의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뒤따른다. 박 대통령이 경축사를 시작한다.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팡, 팡, 팡, 팡.”
어디선가 들려온 총탄 소리, 객석에서 들리는 아우성…. 연설은 중단됐다. 방송 중계도 멈췄다. 그때 그곳엔 사진기자가 있었다. 임희순(任熙淳) 당시 조선일보 기자다. 사진기자의 본능으로 역사의 한 순간을 선명하게 포착해 냈다.
피격 현장 유일하게 촬영
그 덕분에 그날의 일은 우리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박상범 당시 경호관이 단상에서 객석 쪽을 향해 정면으로 권총을 겨누고 있고, 몸이 오른쪽으로 젖혀진 채 누워 있는 육영수 여사가 보이는 그 장면이다. 삶과 죽음이 한 프레임(frame) 안에 공존하고 있다. 박 대통령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그 시대를 살았든 아니든, 누구라도 그 사진을 보면 순간 숨을 멈추게 된다. 그만큼 흡인력이 센 사진이다.
그 사진을 찍은 임희순의 삶 역시 역사다. 《조선일보》에서 포항제철(포스코), AFP통신을 거쳐 《한겨레》와 《문화일보》 창간에 참여했다. 1995년 미국으로 이민해 그곳에서 제2의 취재 인생을 걸어왔다. ‘하나통신’이라는 통신사를 설립해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한국에 사진을 보내 주고, AP통신 프리랜서 기자로도 활약했다. 내외신을 오가며 이렇게 여러 언론사와 일한 이는 아마 한국 언론사(史)에서 그가 거의 유일할 것 같다. 한국 언론사(社)에서 마지막으로 맡은 직책은 《문화일보》 부국장, 편집위원인데, 어쩐지 ‘임 기자’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여든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현역이어서다.
임 기자는 요즘도 미국 의회를 출입하며 사진을 촬영한다. 2023년 4월 27일 윤석열 대통령이 처음으로 미국 의회를 찾아 연설을 하는 순간도, 2025년 1월 3일 한국계 최초로 미국 연방 상원에 입성한 앤디 김 민주당 상원의원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은 이도 그다. 지난 2월 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임희순 기자를 만났다.
그날 다른 기자들은 지하철 개통식으로
그를 만나자마자 51년 전 광복절 얘기를 꺼냈다.
― 어떻게 그 장면을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었습니까?
“그날따라 이상할 정도로 보안 검색이 허술했어요. 공교롭게도 광복절 행사 직후에 다른 행사가 잡혀 있었거든요. 서울지하철이 그날 개통되지 않았습니까. 청량리역에서 개통식 끝나면 기자들이 다 같이 지하철을 시승하기로 돼있었어요.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먼저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청량리역으로 다 떠난 참이었어요. 사진기자들도 광복절 기념식이 시작될 때 사진을 찍고 마감하느라 다들 회사로 들어간 상황이었지요.”
바로 지하철 1호선 얘기다. 당시 ‘종로선’이라 불린 지하철 1호선은 착공(1971년 4월 12일) 3년여 만에 완공돼, 이날 광복절 오전 11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청량리역에서 개통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 왜 같이 회사로 복귀하지 않고 현장에 남았나요?
“그때는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만 조간이고 나머지 신문은 모두 석간이었어요. 그러니 다른 기자들은 곧 나올 석간신문 마감하느라 복귀한 거죠. 《한국일보》 사진기자는 그때 안 왔던 것 같아요. 기자가 나 혼자 남아 있으니 경호원들이 가만 놔두겠어요? 사진 다 찍었으니 이제 나가라고 난리였지요. 다른 기자들 다 청량리역으로 갔으니 빨리 가라는 거죠.”
“박 대통령 연설 들으려 미적대다 특종”
― 왜 다른 기자들과 청량리역으로 안 갔나요?
“3·1절과 광복절엔 대통령이 연설로 대북(對北) 메시지를 내놔요. 어떤 대북 메시지가 나오는지 듣고 가려고 안 나가고 미적거리고 있었어요. 나는 《조선일보》에 입사하고 얼마 후부터 판문점 취재를 나갔습니다. 《조선일보》에게 판문점은 각별한 곳이었거든요.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停戰)협정 조인식이 열릴 때, 남한 정부 어떤 인사도 참석하지 못한 그때 그 현장에 조선일보 기자가 참석했어요. 관찰기를 써서 1면에 대서특필을 했지요.”
그 기사가 바로 1953년 7월 29일자 《조선일보》 1면에 실린 〈기이한 전투의 정지〉다.
〈백주몽(白晝夢)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다. 너무나 우리에게는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 학교 강당보다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 측 기자단만 해도 약 100명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명을 넘는데, 휴전 회담에 한국을 공식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명문으로 회자(膾炙)된 이 기사를 쓴 최병우 기자는 1958년 중국의 대만 진먼다오(金門島) 포격을 취재하러 가던 중 순직(殉職)했다. 다시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으로 돌아가자.
“처음엔 폭탄 터진 줄”
“경호원들에게 떠밀려 나가려는 참인데 ‘팡 팡’ 소리가 나. 처음엔 폭탄 터진 줄 알았어요. 문세광(文世光)이 첫 발을 쏜 곳이 사진기자석 바로 앞쪽이었거든. 그다음부터 총소리가 여러 번 났어요. 두 가지 소리였지. 총소리가 들리고, ‘샥~ 샥~’ 하는 소리가 나요. 경호원들 총에는 소음(消音) 장치가 돼있는 거야. 두 소리가 완전히 구별됐어요. 경호원들의 맞사격이라는 걸 소리로 알았지요.”
청와대 경호실은 그날을 이렇게 기록했다(〈8·15 사례연구 결과보고〉, 1998년).
〈극장 내부로 들어온 범인은 맨 뒷줄 빈 좌석이 있어 그 자리로 들어가 앉았고, 그때 단상의 대통령은 연대(演臺)에서 광복절 경축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10여 분 좌석에 앉아 있던 문세광은 연대의 대통령을 저격하기로 결심하고 허리춤의 권총을 뽑기 쉽도록 앞쪽으로 옮기다 오발을 하여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게 되며 이때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를 따라 나오며 연단의 연설 중인 대통령을 향해 저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 2탄은 대통령 방탄 연대 중앙에 명중하였고 제3탄은 다행히 불발되었으며 제4탄은 단상 테이블 앞에 단아하게 앉아 계시던 육영수 여사의 두부(頭部)에 명중되었습니다. 범인은 제4탄 발사에 대해, 3탄 불발 후 당황하여 단상을 보니 대통령은 방탄 연대 뒤로 몸을 감추어 보이지 않자 당황하여 여사님을 조준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참석자의 발에 걸려 넘어지며 격발된 마지막 실탄은 단상 전면에 게양된 태극기에 맞습니다. 범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20여 초 동안 통로에 비치된 20여 명의 경호 근무자의 방치 아래 20m 정도를 이동하며 발에 걸려 넘어질 때까지 아무런 제재 없이 4발의 실탄을 발사하였습니다.〉
쓰러진 육 여사에게 다가간 여성
문세광과 대통령 경호팀 간 총격전 중 합창단의 여학생 한 명이 총을 맞고 끝내 숨졌다.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 여사도 이날 저녁 운명한다. 청량리역 개통식은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대통령 내외 대신 정일권 국무총리 주재로 진행됐다. 개통식 이외의 행사는 모두 취소됐다.
― 피격 직후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총소리 후 한동안 전부 숨어 있었어요. 단상엔 쓰러진 육 여사 혼자였지요. 대통령과 경호원들은 연대 뒤에 웅크리고 있고, 방청객들은 의자 밑으로 들어갔어요. 그런 채 몇 분인지 시간이 흘렀어요. 그때 하얀 한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 단상으로 뛰어올라 갔어요. 국모(國母)가 쓰러져 있으니 부축하러 간 거지. 역시 독립유공자 가족이라 용감했던 거죠. 그 후에 김정렴 비서실장, 양택식 서울시장이 육 여사에게 다가갔어요.”
당시 객석에는 독립유공자 유족들이 앉아 있었다. 항일운동을 한 독립유공자 박해근씨의 부인 탁금선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합창단 바로 뒤에 앉아 있던 탁씨는 단상 위로 뛰어올라 육 여사를 부축했다. 병원으로 실려 가는 육 여사의 옆을 지키며 총상에 손수건을 대고 한복 옷고름을 뜯어 지혈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동여매도 지혈이 안 되자 경호원 넥타이까지 끌러 지혈했다. “상처를 눌러도 피가 계속 흘렀고, 육 여사는 말 한마디 못 하고 가쁜 숨만 내쉬었다”고 당시 탁씨는 증언했다.
육 여사의 국민장(國民葬)이 끝난 뒤 박정희 대통령은 탁금선 여사와 딸 박경숙씨를 청와대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박경숙씨가 은행에 취직할 수 있게 해줬다고 한다. 탁씨는 지난 2009년 별세했다. 탁씨가 당시 입었던 한복은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장에서 육 여사 죽음 직감”
장내가 정리된 후 박정희 대통령이 연대 뒤에 다시 섰다. 보리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경축사를 이어 갔다.
“… 여러분들, 하던 얘기 계속하겠습니다.”
― 연설을 계속 했다는 것도 참 대단하네요.
“대통령이 나타나자 의자 밑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나와서 만세를 불렀어요. 대통령이 살았으니까요. 어찌나 흥분이 되는지 땀이 줄줄 흘렀어요.”
그날의 박 대통령은 간발의 차이로 암살을 모면하고 “싸우자(Fight!)”고 외친 2024년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후보보다 더한 정신력을 보여 준 게 아닐까. 임희순 기자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대통령이 살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연대 뒤에 쪼그려 있는 대통령의 발을 봤거든.”
― 박 대통령도 육 여사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봤겠군요.
“그렇지요. 안 봤겠어요? 육 여사가 이송된 후 육 여사의 하얀 핸드백과 고무신 한 짝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박 대통령이 연설을 마치고 그걸 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어요. 그 장면이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어요. 그것도 사진으로 담았지요.”
― 육영수 여사는 수술 끝에 숨을 거뒀죠.
“언론에는 육 여사가 그날 10시 23분경 피격당하고 저녁 7시에 운명한 걸로 나와요. 나는 현장에서 이미 돌아가실 거라는 걸 알았어요. 육 여사가 앉아 있던 의자에 끔찍할 정도로 많은 피가 있었어요. 이미 피가 굳어 있었어요. 앉은 자리에서 피를 그만큼 흘렸는데 살아남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병원으로 옮겨질 때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어요.”
― 그날의 현장이 무섭지 않았나요?
“무서웠지요. 얼마나 무서웠겠어. 그런데도 기자라는 직업이 뭔지… 행사 끝나자마자 무대로 뛰어올라 갔어요. 총알이 어디에 맞은 건가… 연대를 살펴보니 정확히 가운데를 맞힌 거야. 연대가 진한 초콜릿색인데 그곳만 구리색이더군요. 나는 그때까지도 그게 방탄 연대인 줄 몰랐어요. 안에 동판을 깔고 껍질만 나무로 씌워 놔서, 총알이 맞은 곳만 약간 파인 거예요. 그곳을 손으로 눌러 봤어요.”
“사진 안 찍혔을까 걱정”
이제 무사히 필름을 갖고 회사로 가는 일만 남았다.
“국립극장 바깥을 보니 장갑차에 군인들이 쫙 깔렸어요. 겁이 나더군요. ‘여길 어떻게 뚫고 나가나?’ 카메라에서 일단 필름을 빼서 감췄어요. 카메라 안엔 다른 필름을 넣어 놨지요. 만약 현장에서 필름을 뺏기거나 납치될 위기를 만나면 ‘아예 필름을 못쓰게 만들겠다’며 그 자리에서 카메라 필름 덮개를 열어 버릴 심산이었어요. 그렇게 나오다가 영국 대사관의 외교관을 만났는데, 당시에 그 외교관의 부인에게 내가 영어를 배우고 있었어요. 그 필름을 그 사람에게 맡겼어요. 그러고서 나도 무사히 신문사에 복귀했지요.”
임희순 기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헐레벌떡 신문사로 뛰어 들어갔다. 들어오니 편집국장 자리에 방우영 사장이 앉아 있었다. 빨리 방 사장 앞으로 가라며 사람들이 박수 치고 난리다. 타사 기자들까지 와서 박수를 쳐줬다.
“후배에게 필름을 건네는데, 겁이 너무 났어요. ‘사진이 안 찍혔으면 어떡하지?’ 그도 그럴 것이, 촬영 당시 너무 힘들었고, 너무 흥분됐고 무서웠어요. 총소리가 들리고 주위가 난리가 났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카메라에 땀이 뚝뚝 떨어지더군요.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몸이 흔들리며 떨렸어요. 그러니 쓸 수 있는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됐어요.”
― 사진이 안 나오기도 하나요?.
“사진기자들이 갖고 있는 공포 같은 거예요. 그 시절엔 디지털이 아니고 필름 카메라였잖아요. 어떨 때는 필름이 안 돌아가기도 했으니 말이에요. 후배 이병훈 기자에게 현상하라고 필름을 건넸어요. 쓸만한 사진이 있는지 알려달라고 귀띔을 했지요.”
“그런 사진은 운이 따라야”
훗날 《조선일보》 사진부장과 편집국 부국장, 한국영상자료원장을 지내는 이병훈 기자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광복절 행사를 생중계 방송으로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방송이 끊겼어요. 다들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죠. 나중에 임 선배가 현장을 포착했다는 걸 알고 다들 기다렸어요. 필름을 건네받아 암실(暗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현상했지요. 현상한 필름을 확대기로 보니 잘 찍혔더라고. 마치 자동 연사(連寫)로 찍은 것처럼 현장이 생생히 담겨 있었어요.”
당시 현장엔 뉴스위크 도쿄 특파원도 있었다. 그도 사진을 찍었지만 불행히도 빛 부족으로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
기자로서 일생에 한 번 포착할까 말까 한 대특종이었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런 사진은 운이 따라야 해요. 그 시절 《조선일보》는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데다, 나는 고참 기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단(單)렌즈 카메라 한 대만 가지고 다녔어요. 그런데 그날은 200mm 망원렌즈를 갖고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그런 게 운이에요.”
운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청소년기 이래 한평생 신문 곁에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땐 전쟁통에 신문 배달을 했고, 서울공고에 진학해선 인쇄술을 배웠다. 대학을 졸업한 후 196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다 그는 막상 《조선일보》 지면에는 실리지 않은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
“1973년 일본에서 납치당했다 돌아온 DJ(김대중 전 대통령)를 취재하러 동교동에 갔어요. 당시 DJ 담당이 동명의 김대중 기자(前 《조선일보》 주필)였어요. 함께 갔지요. DJ의 동교동 자택이 그리 크지 않아요. 그런데 기자들이 다 몰려갔으니 어땠겠어요. 겨우 촬영을 마치고 회사로 가려고 현관에 가니 신발이 산더미예요. 다 구두인데 가만 보니 베이지색 운동화가 있는 겁니다.”
― 눈에 띄었겠네요.
“일본 학생들이 신는 운동화인데, 앞에 고무줄이 달려 있어요. 우리도 일제강점기 시절에 신었어요. 그 운동화의 고무줄을 잘랐더라고요. 딱 감이 왔어요.”
DJ의 운동화 사진
― DJ의 신발이었나요?
“기자들이 잔뜩 있는 실내에서 겨우 나왔는데, 확인하러 다시 들어갔어요. DJ 뒤쪽으로 가서 귀에다 대고 물었어요. ‘구두 안 신고 오셨죠? 베이지색 운동화 신고 오셨죠?’ 맞다고 해요. ‘고무줄 자른 운동화지요?’ 다시 물었더니 맞다는 거예요. 그 길로 운동화를 들고 신문사로 들어갔어요. 사진을 찍고, 이걸 내자고 했더니 당시 야간국장이 ‘못 내겠다’고 하는 겁니다.”
― 왜 그랬나요?
“글쎄, 그런 시절이었어요. 근데 그 사진을 《마이니치신문》 특파원이 본 겁니다. 《마이니치신문》 서울지사가 조선일보 건물에 있으니, 그날 DJ 사진 한 장 얻으러 《조선일보》 편집국에 온 길이었던 거예요. ‘이게 누구 신발이냐?’고 묻기에 DJ 거라고 하니까 바로 요청해서 가져갔어요. 그 사진이 《마이니치신문》에 크게 실렸지요. 그때 그 특파원은 후에 마이니치 사장까지 지냈어요.”
다른 신문에라도 사진이 실린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그 후에 시작됐다. 중앙정보부에서 난리가 난 것이다. 일본에서 납치됐다 막 풀려난 요주의 인사의, 존재조차 몰랐던 신발의 사진이 일본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으니 말이다.
“그 사진을 누가 찍었냐는 것부터 시작해, 책임 추궁이 시작됐어요. 조선일보에서 보관하고 있던 DJ의 신발을 중앙정보부에 내주고 무마됐어요.”
조선투위
1970년대는 박정희 정권의 명(明)과 암(暗)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론사에 정보기관 원이 출입했고, 정부가 신문기사를 사전검열하기도 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 자유 수호를 외쳤다. 그 과정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조선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 32명)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113명)를 만들었다. 조선투위 명단에는 임희순도 끼어 있었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진 특종으로 한국신문상을 수상한 이듬해 1975년 그는 첫 회사 《조선일보》를 떠나야 했다.
조선투위와 동아투위 기자들 중 여럿은 해직 후 출판사를 세웠다. 전예원, 두레, 정우사, 아침 같은 출판사다. 한길사 역시 동아투위 출신 김언호 대표가 세웠다. 조선투위 기자들은 동아투위 권근술 기자와 함께 청람출판사를 만들었다. 그의 설명이다.
“한국 출판문화를 바꿔보자며 청람출판사를 세웠어요. 그때까지 책 번역이 엉망이었어요. 특히 외신부(국제부) 기자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 출판계 번역 문화를 완전히 바꾸어 놨다고 생각합니다.”
‘박태준과 포철’ 9년을 홀로 사진에 담아
뜻은 좋았지만 출판사로 여러 사람이 생계를 꾸리는 데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는 1976년 포항제철(지금의 포스코) 사장실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박태준(朴泰俊)이라는 철인(鐵人)을 만난다. ‘제철보국(製鐵報國)’ ‘우향우(右向右) 정신’으로 포항제철을 성공시킨 그 박태준과 포철의 역사를 그때부터 1984년까지 9년간 사진에 담았다. 단독 취재였던 셈이다.
“그 시절 박태준 회장의 사진은 다 내가 찍은 겁니다. 포항제철뿐 아니라 광양제철 현장 사진도 찍었지요.”
1978년 포항제철은 《사진으로 본 포항제철 10년사》를 발간한다. 임희순 기자가 여기에 빛나는 아이디어를 더했다. 《10년사》에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揮毫)를 요청한 것이다.
“휘호가 왔는데, 아주 작품인 거예요.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쓴 거라 희소가치도 있고, 무엇보다 글씨가 참 좋아요. 글쎄 그게 중간에 없어졌는데 포스코가 인사동에서 찾아서 다시 사들였다고 하더라고요.”
― 사진집에 박 대통령 휘호를 실을 생각은 어떻게 떠올랐나요?
“신문사에서 신문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기획하는 게 뭡니까. 신년호와 창간기념호잖아요. 그때마다 대통령 휘호가 꼭 들어갔어요. 그래서 우리도 아이디어를 낸 거죠. 요새는 어떻게 된 게 대통령들이 휘호도 못 쓰고….”
박태준을 울린 박정희 휘호
그러고 보니 역대 대통령들이 신년 휘호를 쓰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난 2016년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신년 휘호 ‘총화전진(總和前進)’ 원본을 미술품 시장에서 구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 때까지 이어 오던 신년 휘호 전통은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딱 끊겼다. 시대가 변했다고 이해해야 할까. 임 기자의 설명이 이어졌다.
“휘호를 서울사무소에서 팩스로 보내왔어요. 벽에 쭉 붙인 다음 박태준 회장에게 보여 드렸지요. ‘鐵鋼은 國力(철강은 국력).’ 그랬더니 그분 얼굴이 빨개지는 겁니다. 울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 자신에겐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보내 준 휘호였으니까요.”
임 기자는 “언젠가 박태준 회장의 사진과 그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다”고 말했다.
“2028년이 포스코 설립 60주년입니다. 10년사 사진집에 썼던 사진들로 책을 만들어 헌정하고 싶어요. 돈만 많으면 내가 만들어 우리 포항제철 직원들에게 한 권씩 나눠 줄 텐데 말입니다.”
퓰리처상 후보 추천되기도
포항에서 9년을 보낸 후 그는 다시 보도 현장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AFP 서울 특파원이었다. 그는 특히 민주화 시위 촬영에 강했다.
“1987년 6월항쟁이 끝날 때 《뉴욕타임스》 1면에 내가 찍은 사진이 나가기도 했어요. AFP에 5년 있으면서 6월항쟁 보도를 마무리했지요.”
AFP는 그해 그의 사진을 퓰리처상 후보로 추천했다. AFP에 있으면서 파격적인 월급을 받았다. 타사 사진기자들이 안 믿을 정도였단다.
“한 달에 3000달러를 받았어요. 환율이 크게 변동하던 시절이라 갑자기 월급이 3배가 오르기도 했어요. 당시 AP 서울지국에서 나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어요. 그때 얘기했지요. ‘사실 내가 AFP에서 한 달에 3000달러를 받고 있다.’ 그랬더니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받고 있나 알아봤더니, 한참 못 미치더라고요. 못 믿는 게 이해가 되더군요.”
1985년 조선투위는 10주년을 맞아 새로운 언론사를 만들기로 한다. 조선투위와 동아투위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1988년 《한겨레신문》을 창간한다. 그 역시 창간 멤버였다. 그해 꿈에 그리던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렸다.
“올림픽 보도는 세계 5대 통신사가 주관했어요. AP, AFP, 로이터, UPI, 그리고 예전엔 타스통신(옛 소련)도 들어갔어요. 통신사 기자들은 몇백 명씩 올림픽 취재에 참여했어요. 하필 서울올림픽은 AFP가 주관하는 올림픽이었어요. 그래서 올림픽까지 치르고 나서 《한겨레》에 합류했지요.”
한 달에 3000달러라는 고액 월급을 뒤로 하고 ‘신문쟁이’로 돌아왔다.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준비하는데, 처음엔 10만 부만 찍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돈이 없으니까요. 창간을 이끈 정태기(후에 사장) 기자가 반대했어요. ‘아니다, 이건 창간호다. 역사적인 제호기 때문에 지금은 안 팔리더라도 골동품으로라도 팔릴 거다. 50만 부 찍자.’ 근데 그 50만 부가 그날로 다 팔려 버린 겁니다.”
《한겨레》에 있다 1991년 《문화일보》 창간에 참여했다.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데 한 달 안에 신문을 발간해야 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통신사와의 계약이 무척 중요했어요. 통신사에서 일했던지라 연합통신에 각 신문들이 얼마를 내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었거든요. 그때는 각 신문사마다 다른 금액을 연합통신에 주고 있었어요. 어떤 곳은 400만원도 안 내고, 다른 곳은 1억씩 내기도 하고요. 내가 AFP에 있었으니 통신사와 일하는 시스템을 알잖아요. 그러니 사진기자가 할 일은 아닌데 《한겨레》 창간, 《문화일보》 창간 때마다 통신사와 협상을 도맡아 했지요.”
판문점 취재 16년
임희순은 199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내 오정자씨가 미8군 인사처에서 30년 근속한 덕에 영주권이 나왔다. 그는 요즘도 신문에 둘러싸여 산다.
“오래전부터 신문 스크랩을 해왔어요. 스크랩 파일을 이민 올 때도 들고 왔어요. 지금도 나는 집을 사무실로 생각합니다. 집에 온통 신문 스크랩이에요.”
― 어떤 기사를 모으나요?
“요즘엔 한국인 이민사를 모읍니다. 2003년이 미국 이민 100주년이었어요. 그때 하와이에 가서 취재하고 기록해 놨어요. 2005년은 멕시코 이민 100주년이었어요. 멕시코로 가신 분들은 정말 고생했어요. 판문점에 대한 기사는 오래전부터 모아 왔고요.”
― 왜 판문점인가요?
“판문점은 한국전쟁과 곧 연결되는 곳입니다. 많은 일이 그곳에서 일어났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중요한 장소예요.”
그는 전쟁을 정면으로 겪은 세대다. 기자 생활 내내 맴돈 곳도 판문점이다.
“내가 입사한 직후엔 판문점 취재 관련해서는 《한국일보》가 발군이었어요. 그때 이 신문은 《한국일보》 《일간스포츠》 《서울경제》 《코리아타임스》 등 4개 매체를 내고 있었어요. 그러니 판문점에 기자가 네다섯 명이 와있을 수 있어요. 그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자리를 지킬 수 있잖아요. 다른 신문은 벌써 인원수에서 게임이 안 되는 거예요.”
― 그랬겠네요. 혼자 취재를 하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당시 판문점에서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겨울이면 창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지키고 있어야 했어요. 얼마나 춥겠어요? 기자실에 가면 따뜻한 커피와 도너츠가 있는데도 그림의 떡이에요. 거길 못 가는 거야.”
― 왜요?
“가면 좋은 자리 뺏기니까. 그때 판문점과 서울을 오가는 버스를 ‘쌕뻐스’라고 했어요, 이걸 조중훈 회장이 설립한 한진에서 운행했어요. 버스 하차장에서 판문점 회담장까지 거리가 150~200m 떨어져 있어요. 버스에서 내려 누가 먼저 회담장 창문 자리 차지하느냐 경쟁이 붙어요. 내리자마자 달리는 거지.”
북한 기자가 개성 인삼 주기도
AFP 시절에도 여전히 달려야 했다.
“당시에 외신들 사이에도 경쟁이 심했어요. 도쿄 가는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게 필름을 옮기느라 애썼죠. AP와 AFP가 경쟁했어요. 지금은 사진 전송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었거든요. 판문점에서 김포공항까지 필름을 날라야 해요. 도쿄로 보내는 거죠. 도쿄에서는 미국으로 바로 보낼 수 있었거든요. 미국 종군기자 막스 데스퍼가 찍은 그 유명한 평양 대동강철교 사진도 그런 식으로 미국에 건너간 거예요.”
《한겨레》에서 사진부장을 하면서도 그는 판문점을 취재했다.
“1990년 《한겨레》에 있을 때 남북고위급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어요. 강영훈 총리가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데 나도 동행했어요. 판문점에 군사분계선이 있잖아요. 트럼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넘어간 그 턱이요. 평양 취재 후 내려오면서 그곳에 꽃을 가져다 놨어요. 그걸 사진으로 남겼지요.”
그렇게 판문점을 들락날락한 세월이 도합 16년이다. 판문점 취재를 하며 북한 기자와 친해지기도 했다.
“‘부인이 딸을 낳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니 팔뚝만 한 말린 개성 인삼을 가져다 주더군요. 혹시 해서 당시엔 안 먹고 나중에 먹었어요.”
미국에서도 시위 취재
미국에 건너간 후에도 임희순 기자는 현장을 찾아다녔다. 2000년 4월 워싱턴에서 IMF(국제통화기금)와 세계은행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1만여 명이 모였다. 그는 이 현장을 취재하다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당시 미국 언론이 보도한 기사 내용이다.
〈AP의 프리랜서 사진기자인 임희순씨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 난 깊은 상처와 그 옆에 있던 엄청난 핏자국이 당시 상황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병원에 가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뉴욕데일리뉴스(New York Daily News)》의 프리랜서 사진기자 제임스 케이봄(James Keivom)은 임희순이 경찰관을 촬영하고 있을 때 한 경찰관이 곤봉으로 그를 밀쳐 넘어뜨리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시위대 약 열두 명이 경찰의 강경 진압에 저항했고 일부는 체포되어 끌려갔다. 그러나 도로 곳곳에 임희순의 피가 튀어 있는 것을 본 대다수의 시위대는 물러섰다. 젊은 시위대 중 일부는 울었고, 다른 이들은 “수치스럽다(Shame, shame)” “우리는 폭력적이지 않다, 너희는 어떤가?(We’re not violent, how about you?)”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한가운데로 들어갔다가 사달이 났다. 한국에서 민주화항쟁 촬영할 때 버릇이 미국에서도 나온 것이었다.
2001년 9·11테러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언론이 9·11테러를 회고할 때 꼭 싣는 사진이 있다. 비행기가 내리꽂혀 연기가 뿌연 펜타곤(美 국방부) 위에 헬기 한 대가 위태롭게 떠있는 사진이다. 그 사진 촬영자가 바로 ‘Yim Heesoon(임희순)’. 펜타곤에 비행기가 떨어지자 사람들이 도망 나오는데 그는 오히려 사건 현장을 향해 달려 들어가면서 촬영했다.
“비행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펜타곤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울면서 뛰어나오더군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두 번 수상한 강형원 사진기자(前 로이터, AP, LA타임스)는 임 기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끈기 있는 사진기자입니다. 제가 AP에 있을 때 임 선배에게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귀환 같은 취재를 맡기곤 했어요. 클린턴 대통령은 보통 백악관에 늦은 시각에 돌아왔거든요. 임 선배는 새벽까지 대통령을 기다리는 유일한 사진기자였어요. 육 여사 피살 사건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일 겁니다. 보도사진은 지나간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일어나는 순간을 기다려 놓치지 않는 예술입니다.”
7명의 한국 대통령 촬영
기자 임희순은 지금도 미국 의회와 펜타곤을 출입한다. 지난 1월 29일 워싱턴 상공에서 미국 여객기와 미 육군의 블랙호크 헬기가 충돌해 포토맥강에 추락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도 달려가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잠도 없다. 밤에 2시간 정도만 잔다고 한다. 대신 낮에 중간중간 토막잠을 잔다.
“DJ 선거 따라다닐 때 배운 습관이에요. 유세 할 때 기자들과 같이 다니잖아요. DJ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요. 다음 유세지로 이동할 때까지 꼭 잤어요. 도착하면 쌩쌩해져서 연설해요.”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지금까지 7명의 한국 대통령을 촬영했다.
“포항제철에 있을 때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을 촬영했어요. AFP에 있을 땐 노태우 대통령이 광양제철 고로(高爐)에 처음 화입(火入)하는 걸 찍었어요. AP 기자로는 김대중·이명박·박근혜·윤석열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통령이 누군지 묻자 그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지요. 내 삼촌이 6·25 때 인민군에 들어갔어요.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혔는데 이 대통령이 반공 포로들을 풀어 줬잖아요. 그때 석방됐어요. 반공 포로 환영대회가 서울 여의도 샛강 건너에 있던 당산국민학교에서 열렸어요. 삼촌을 만나러 갔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거기 온 거예요. 그때 깊은 인상을 받았지요. 기자가 된 것도 어쩌면 그 기억 때문일지 몰라요.”
“보도사진은 진실해야”
― 좋은 보도사진이란 어떤 걸까요?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사진이 있어요. 네이팜탄을 피해 나체로 도망가는 소녀를 촬영한 사진이요. 얼마 전에 논란이 일었잖아요. 촬영자를 바꿔치기했다는 주장이 나왔어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좋은 보도사진은, 좋은 보도사진 기자는 일단 진실해야 합니다.”
문제의 사진은 AP통신 사이공(현 호찌민시) 지국에서 일하던 당시 스물한 살의 베트남인 기자 닉 웃이 찍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는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러나 올해 초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스트링어(Stringer)〉는 닉 웃이 아니라 미국 NBC방송과 AP통신에 필름을 제공하고 건당 수수료를 받던 베트남인 프리랜서 사진기자 응우옌 타인 응에(86)가 진짜 촬영자라고 주장했다. 물론 닉 웃과 AP통신은 반박했다.
진실한 자세가 세월을 정정당당하게 겪어 내면 무엇이 될까? 이해, 애도, 사랑 같은 게 되는 건 아닐까. 그의 말이다.
“육 여사 사진에 커튼을”
“작년 8월 15일이 육영수 여사 50주기였어요. 10월 26일은 박정희 대통령 45주기 되는 날이었고요. 11월에 한국에 들어갔어요. 꽃다발을 들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서 하나는 박태준 회장 묘소에, 다른 하나는 박 대통령·육 여사 묘소에 놨습니다.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왔어요. 그 모습을 조선투위 동료들이 봤으면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자식들에게 해둔 말이 있어요. ‘만약 (내가 찍은) 육 여사의 마지막 사진이 어디에선가 전시된다면, 육 여사가 쓰러져 있는 부분만은 커튼으로 가려 줘라. 전체 사진을 보고 싶은 사람들은 커튼 뒤로 가서 보게 해줘라.’”
― 왜요?
“국모로 불렸던 분이 그렇게 쓰러져 있는 모습이… 너무 처참하잖아요. 요즘도 인터넷에 그 사진이 떠다니는데, 내가 공개한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어요. 보도관제 때문에 당시엔 공개 안 됐던 사진까지 돌아다니더군요.”
― 돌아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과거의 사람을 두고 어느 한쪽에 편향적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80살이 넘었으면 작은 걸 갖고 따질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해요.”
권위주의 시대와 민주화를 건너온 한국 사회는 현재 극도의 진영 대립이라는 늪을 건너고 있다. 언론마저 함께 허우적대고 있는 게 아닐까. 정파주의적인 보도가 당연한 걸로 여겨지는 이상한 시대에, 반세기 이상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의 술회를 듣고 있으려니 늪에서 탈출할 수 있는 실마리를 포착한 것 같은 희망이 들었다. 결국 관건은 끝까지 현장을 지키는 끈기, 그리고 ‘진실성’ 아닐까.⊙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팡, 팡, 팡, 팡.”
어디선가 들려온 총탄 소리, 객석에서 들리는 아우성…. 연설은 중단됐다. 방송 중계도 멈췄다. 그때 그곳엔 사진기자가 있었다. 임희순(任熙淳) 당시 조선일보 기자다. 사진기자의 본능으로 역사의 한 순간을 선명하게 포착해 냈다.
피격 현장 유일하게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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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격된 순간을 포착한 임희순 기자의 특종 사진. 사진=조선DB |
그 사진을 찍은 임희순의 삶 역시 역사다. 《조선일보》에서 포항제철(포스코), AFP통신을 거쳐 《한겨레》와 《문화일보》 창간에 참여했다. 1995년 미국으로 이민해 그곳에서 제2의 취재 인생을 걸어왔다. ‘하나통신’이라는 통신사를 설립해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한국에 사진을 보내 주고, AP통신 프리랜서 기자로도 활약했다. 내외신을 오가며 이렇게 여러 언론사와 일한 이는 아마 한국 언론사(史)에서 그가 거의 유일할 것 같다. 한국 언론사(社)에서 마지막으로 맡은 직책은 《문화일보》 부국장, 편집위원인데, 어쩐지 ‘임 기자’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여든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현역이어서다.
임 기자는 요즘도 미국 의회를 출입하며 사진을 촬영한다. 2023년 4월 27일 윤석열 대통령이 처음으로 미국 의회를 찾아 연설을 하는 순간도, 2025년 1월 3일 한국계 최초로 미국 연방 상원에 입성한 앤디 김 민주당 상원의원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앞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은 이도 그다. 지난 2월 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임희순 기자를 만났다.
그날 다른 기자들은 지하철 개통식으로
그를 만나자마자 51년 전 광복절 얘기를 꺼냈다.
― 어떻게 그 장면을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었습니까?
“그날따라 이상할 정도로 보안 검색이 허술했어요. 공교롭게도 광복절 행사 직후에 다른 행사가 잡혀 있었거든요. 서울지하철이 그날 개통되지 않았습니까. 청량리역에서 개통식 끝나면 기자들이 다 같이 지하철을 시승하기로 돼있었어요.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먼저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청량리역으로 다 떠난 참이었어요. 사진기자들도 광복절 기념식이 시작될 때 사진을 찍고 마감하느라 다들 회사로 들어간 상황이었지요.”
바로 지하철 1호선 얘기다. 당시 ‘종로선’이라 불린 지하철 1호선은 착공(1971년 4월 12일) 3년여 만에 완공돼, 이날 광복절 오전 11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청량리역에서 개통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 왜 같이 회사로 복귀하지 않고 현장에 남았나요?
“그때는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만 조간이고 나머지 신문은 모두 석간이었어요. 그러니 다른 기자들은 곧 나올 석간신문 마감하느라 복귀한 거죠. 《한국일보》 사진기자는 그때 안 왔던 것 같아요. 기자가 나 혼자 남아 있으니 경호원들이 가만 놔두겠어요? 사진 다 찍었으니 이제 나가라고 난리였지요. 다른 기자들 다 청량리역으로 갔으니 빨리 가라는 거죠.”
“박 대통령 연설 들으려 미적대다 특종”
― 왜 다른 기자들과 청량리역으로 안 갔나요?
“3·1절과 광복절엔 대통령이 연설로 대북(對北) 메시지를 내놔요. 어떤 대북 메시지가 나오는지 듣고 가려고 안 나가고 미적거리고 있었어요. 나는 《조선일보》에 입사하고 얼마 후부터 판문점 취재를 나갔습니다. 《조선일보》에게 판문점은 각별한 곳이었거든요.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停戰)협정 조인식이 열릴 때, 남한 정부 어떤 인사도 참석하지 못한 그때 그 현장에 조선일보 기자가 참석했어요. 관찰기를 써서 1면에 대서특필을 했지요.”
그 기사가 바로 1953년 7월 29일자 《조선일보》 1면에 실린 〈기이한 전투의 정지〉다.
〈백주몽(白晝夢)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다. 너무나 우리에게는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 학교 강당보다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 측 기자단만 해도 약 100명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명을 넘는데, 휴전 회담에 한국을 공식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명문으로 회자(膾炙)된 이 기사를 쓴 최병우 기자는 1958년 중국의 대만 진먼다오(金門島) 포격을 취재하러 가던 중 순직(殉職)했다. 다시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으로 돌아가자.
“처음엔 폭탄 터진 줄”
“경호원들에게 떠밀려 나가려는 참인데 ‘팡 팡’ 소리가 나. 처음엔 폭탄 터진 줄 알았어요. 문세광(文世光)이 첫 발을 쏜 곳이 사진기자석 바로 앞쪽이었거든. 그다음부터 총소리가 여러 번 났어요. 두 가지 소리였지. 총소리가 들리고, ‘샥~ 샥~’ 하는 소리가 나요. 경호원들 총에는 소음(消音) 장치가 돼있는 거야. 두 소리가 완전히 구별됐어요. 경호원들의 맞사격이라는 걸 소리로 알았지요.”
청와대 경호실은 그날을 이렇게 기록했다(〈8·15 사례연구 결과보고〉, 1998년).
〈극장 내부로 들어온 범인은 맨 뒷줄 빈 좌석이 있어 그 자리로 들어가 앉았고, 그때 단상의 대통령은 연대(演臺)에서 광복절 경축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10여 분 좌석에 앉아 있던 문세광은 연대의 대통령을 저격하기로 결심하고 허리춤의 권총을 뽑기 쉽도록 앞쪽으로 옮기다 오발을 하여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게 되며 이때 당황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를 따라 나오며 연단의 연설 중인 대통령을 향해 저격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 2탄은 대통령 방탄 연대 중앙에 명중하였고 제3탄은 다행히 불발되었으며 제4탄은 단상 테이블 앞에 단아하게 앉아 계시던 육영수 여사의 두부(頭部)에 명중되었습니다. 범인은 제4탄 발사에 대해, 3탄 불발 후 당황하여 단상을 보니 대통령은 방탄 연대 뒤로 몸을 감추어 보이지 않자 당황하여 여사님을 조준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참석자의 발에 걸려 넘어지며 격발된 마지막 실탄은 단상 전면에 게양된 태극기에 맞습니다. 범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20여 초 동안 통로에 비치된 20여 명의 경호 근무자의 방치 아래 20m 정도를 이동하며 발에 걸려 넘어질 때까지 아무런 제재 없이 4발의 실탄을 발사하였습니다.〉
쓰러진 육 여사에게 다가간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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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격 직후의 육영수 여사. 독립운동가 부인 탁금선(오른쪽)씨가 육영수 여사를 돕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왔다. |
― 피격 직후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총소리 후 한동안 전부 숨어 있었어요. 단상엔 쓰러진 육 여사 혼자였지요. 대통령과 경호원들은 연대 뒤에 웅크리고 있고, 방청객들은 의자 밑으로 들어갔어요. 그런 채 몇 분인지 시간이 흘렀어요. 그때 하얀 한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 단상으로 뛰어올라 갔어요. 국모(國母)가 쓰러져 있으니 부축하러 간 거지. 역시 독립유공자 가족이라 용감했던 거죠. 그 후에 김정렴 비서실장, 양택식 서울시장이 육 여사에게 다가갔어요.”
당시 객석에는 독립유공자 유족들이 앉아 있었다. 항일운동을 한 독립유공자 박해근씨의 부인 탁금선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합창단 바로 뒤에 앉아 있던 탁씨는 단상 위로 뛰어올라 육 여사를 부축했다. 병원으로 실려 가는 육 여사의 옆을 지키며 총상에 손수건을 대고 한복 옷고름을 뜯어 지혈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동여매도 지혈이 안 되자 경호원 넥타이까지 끌러 지혈했다. “상처를 눌러도 피가 계속 흘렀고, 육 여사는 말 한마디 못 하고 가쁜 숨만 내쉬었다”고 당시 탁씨는 증언했다.
육 여사의 국민장(國民葬)이 끝난 뒤 박정희 대통령은 탁금선 여사와 딸 박경숙씨를 청와대로 불렀다. 박 대통령은 박경숙씨가 은행에 취직할 수 있게 해줬다고 한다. 탁씨는 지난 2009년 별세했다. 탁씨가 당시 입었던 한복은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장에서 육 여사 죽음 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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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호원들이 육영수 여사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후였다. |
“… 여러분들, 하던 얘기 계속하겠습니다.”
― 연설을 계속 했다는 것도 참 대단하네요.
“대통령이 나타나자 의자 밑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나와서 만세를 불렀어요. 대통령이 살았으니까요. 어찌나 흥분이 되는지 땀이 줄줄 흘렀어요.”
그날의 박 대통령은 간발의 차이로 암살을 모면하고 “싸우자(Fight!)”고 외친 2024년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후보보다 더한 정신력을 보여 준 게 아닐까. 임희순 기자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대통령이 살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연대 뒤에 쪼그려 있는 대통령의 발을 봤거든.”
― 박 대통령도 육 여사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봤겠군요.
“그렇지요. 안 봤겠어요? 육 여사가 이송된 후 육 여사의 하얀 핸드백과 고무신 한 짝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박 대통령이 연설을 마치고 그걸 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어요. 그 장면이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어요. 그것도 사진으로 담았지요.”
― 육영수 여사는 수술 끝에 숨을 거뒀죠.
“언론에는 육 여사가 그날 10시 23분경 피격당하고 저녁 7시에 운명한 걸로 나와요. 나는 현장에서 이미 돌아가실 거라는 걸 알았어요. 육 여사가 앉아 있던 의자에 끔찍할 정도로 많은 피가 있었어요. 이미 피가 굳어 있었어요. 앉은 자리에서 피를 그만큼 흘렸는데 살아남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병원으로 옮겨질 때도 전혀 움직임이 없었어요.”
― 그날의 현장이 무섭지 않았나요?
“무서웠지요. 얼마나 무서웠겠어. 그런데도 기자라는 직업이 뭔지… 행사 끝나자마자 무대로 뛰어올라 갔어요. 총알이 어디에 맞은 건가… 연대를 살펴보니 정확히 가운데를 맞힌 거야. 연대가 진한 초콜릿색인데 그곳만 구리색이더군요. 나는 그때까지도 그게 방탄 연대인 줄 몰랐어요. 안에 동판을 깔고 껍질만 나무로 씌워 놔서, 총알이 맞은 곳만 약간 파인 거예요. 그곳을 손으로 눌러 봤어요.”
“사진 안 찍혔을까 걱정”
이제 무사히 필름을 갖고 회사로 가는 일만 남았다.
“국립극장 바깥을 보니 장갑차에 군인들이 쫙 깔렸어요. 겁이 나더군요. ‘여길 어떻게 뚫고 나가나?’ 카메라에서 일단 필름을 빼서 감췄어요. 카메라 안엔 다른 필름을 넣어 놨지요. 만약 현장에서 필름을 뺏기거나 납치될 위기를 만나면 ‘아예 필름을 못쓰게 만들겠다’며 그 자리에서 카메라 필름 덮개를 열어 버릴 심산이었어요. 그렇게 나오다가 영국 대사관의 외교관을 만났는데, 당시에 그 외교관의 부인에게 내가 영어를 배우고 있었어요. 그 필름을 그 사람에게 맡겼어요. 그러고서 나도 무사히 신문사에 복귀했지요.”
임희순 기자는 땀을 뻘뻘 흘리며 헐레벌떡 신문사로 뛰어 들어갔다. 들어오니 편집국장 자리에 방우영 사장이 앉아 있었다. 빨리 방 사장 앞으로 가라며 사람들이 박수 치고 난리다. 타사 기자들까지 와서 박수를 쳐줬다.
“후배에게 필름을 건네는데, 겁이 너무 났어요. ‘사진이 안 찍혔으면 어떡하지?’ 그도 그럴 것이, 촬영 당시 너무 힘들었고, 너무 흥분됐고 무서웠어요. 총소리가 들리고 주위가 난리가 났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카메라에 땀이 뚝뚝 떨어지더군요.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몸이 흔들리며 떨렸어요. 그러니 쓸 수 있는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됐어요.”
― 사진이 안 나오기도 하나요?.
“사진기자들이 갖고 있는 공포 같은 거예요. 그 시절엔 디지털이 아니고 필름 카메라였잖아요. 어떨 때는 필름이 안 돌아가기도 했으니 말이에요. 후배 이병훈 기자에게 현상하라고 필름을 건넸어요. 쓸만한 사진이 있는지 알려달라고 귀띔을 했지요.”
“그런 사진은 운이 따라야”
훗날 《조선일보》 사진부장과 편집국 부국장, 한국영상자료원장을 지내는 이병훈 기자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광복절 행사를 생중계 방송으로 보고 있는데 갑자기 방송이 끊겼어요. 다들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죠. 나중에 임 선배가 현장을 포착했다는 걸 알고 다들 기다렸어요. 필름을 건네받아 암실(暗室)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현상했지요. 현상한 필름을 확대기로 보니 잘 찍혔더라고. 마치 자동 연사(連寫)로 찍은 것처럼 현장이 생생히 담겨 있었어요.”
당시 현장엔 뉴스위크 도쿄 특파원도 있었다. 그도 사진을 찍었지만 불행히도 빛 부족으로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
기자로서 일생에 한 번 포착할까 말까 한 대특종이었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런 사진은 운이 따라야 해요. 그 시절 《조선일보》는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데다, 나는 고참 기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단(單)렌즈 카메라 한 대만 가지고 다녔어요. 그런데 그날은 200mm 망원렌즈를 갖고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그런 게 운이에요.”
운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청소년기 이래 한평생 신문 곁에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땐 전쟁통에 신문 배달을 했고, 서울공고에 진학해선 인쇄술을 배웠다. 대학을 졸업한 후 1968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다 그는 막상 《조선일보》 지면에는 실리지 않은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
“1973년 일본에서 납치당했다 돌아온 DJ(김대중 전 대통령)를 취재하러 동교동에 갔어요. 당시 DJ 담당이 동명의 김대중 기자(前 《조선일보》 주필)였어요. 함께 갔지요. DJ의 동교동 자택이 그리 크지 않아요. 그런데 기자들이 다 몰려갔으니 어땠겠어요. 겨우 촬영을 마치고 회사로 가려고 현관에 가니 신발이 산더미예요. 다 구두인데 가만 보니 베이지색 운동화가 있는 겁니다.”
― 눈에 띄었겠네요.
“일본 학생들이 신는 운동화인데, 앞에 고무줄이 달려 있어요. 우리도 일제강점기 시절에 신었어요. 그 운동화의 고무줄을 잘랐더라고요. 딱 감이 왔어요.”
DJ의 운동화 사진
― DJ의 신발이었나요?
“기자들이 잔뜩 있는 실내에서 겨우 나왔는데, 확인하러 다시 들어갔어요. DJ 뒤쪽으로 가서 귀에다 대고 물었어요. ‘구두 안 신고 오셨죠? 베이지색 운동화 신고 오셨죠?’ 맞다고 해요. ‘고무줄 자른 운동화지요?’ 다시 물었더니 맞다는 거예요. 그 길로 운동화를 들고 신문사로 들어갔어요. 사진을 찍고, 이걸 내자고 했더니 당시 야간국장이 ‘못 내겠다’고 하는 겁니다.”
― 왜 그랬나요?
“글쎄, 그런 시절이었어요. 근데 그 사진을 《마이니치신문》 특파원이 본 겁니다. 《마이니치신문》 서울지사가 조선일보 건물에 있으니, 그날 DJ 사진 한 장 얻으러 《조선일보》 편집국에 온 길이었던 거예요. ‘이게 누구 신발이냐?’고 묻기에 DJ 거라고 하니까 바로 요청해서 가져갔어요. 그 사진이 《마이니치신문》에 크게 실렸지요. 그때 그 특파원은 후에 마이니치 사장까지 지냈어요.”
다른 신문에라도 사진이 실린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그 후에 시작됐다. 중앙정보부에서 난리가 난 것이다. 일본에서 납치됐다 막 풀려난 요주의 인사의, 존재조차 몰랐던 신발의 사진이 일본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으니 말이다.
“그 사진을 누가 찍었냐는 것부터 시작해, 책임 추궁이 시작됐어요. 조선일보에서 보관하고 있던 DJ의 신발을 중앙정보부에 내주고 무마됐어요.”
조선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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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하고 농성 중인 조선일보 기자들. 맨 아랫줄 중앙에 임희순 기자가 보인다. 사진=김연수 사진가 |
조선투위와 동아투위 기자들 중 여럿은 해직 후 출판사를 세웠다. 전예원, 두레, 정우사, 아침 같은 출판사다. 한길사 역시 동아투위 출신 김언호 대표가 세웠다. 조선투위 기자들은 동아투위 권근술 기자와 함께 청람출판사를 만들었다. 그의 설명이다.
“한국 출판문화를 바꿔보자며 청람출판사를 세웠어요. 그때까지 책 번역이 엉망이었어요. 특히 외신부(국제부) 기자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 출판계 번역 문화를 완전히 바꾸어 놨다고 생각합니다.”
‘박태준과 포철’ 9년을 홀로 사진에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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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12월 8일 포철 3기(제3고로)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박태준 회장(오른쪽) 사진=포스코홀딩스 |
“그 시절 박태준 회장의 사진은 다 내가 찍은 겁니다. 포항제철뿐 아니라 광양제철 현장 사진도 찍었지요.”
1978년 포항제철은 《사진으로 본 포항제철 10년사》를 발간한다. 임희순 기자가 여기에 빛나는 아이디어를 더했다. 《10년사》에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揮毫)를 요청한 것이다.
“휘호가 왔는데, 아주 작품인 거예요.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쓴 거라 희소가치도 있고, 무엇보다 글씨가 참 좋아요. 글쎄 그게 중간에 없어졌는데 포스코가 인사동에서 찾아서 다시 사들였다고 하더라고요.”
― 사진집에 박 대통령 휘호를 실을 생각은 어떻게 떠올랐나요?
“신문사에서 신문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기획하는 게 뭡니까. 신년호와 창간기념호잖아요. 그때마다 대통령 휘호가 꼭 들어갔어요. 그래서 우리도 아이디어를 낸 거죠. 요새는 어떻게 된 게 대통령들이 휘호도 못 쓰고….”
박태준을 울린 박정희 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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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제철 10주년을 맞아 박정희 대통령이 쓴 휘호. 사진=포스코홀딩스 |
“휘호를 서울사무소에서 팩스로 보내왔어요. 벽에 쭉 붙인 다음 박태준 회장에게 보여 드렸지요. ‘鐵鋼은 國力(철강은 국력).’ 그랬더니 그분 얼굴이 빨개지는 겁니다. 울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 자신에겐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보내 준 휘호였으니까요.”
임 기자는 “언젠가 박태준 회장의 사진과 그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다”고 말했다.
“2028년이 포스코 설립 60주년입니다. 10년사 사진집에 썼던 사진들로 책을 만들어 헌정하고 싶어요. 돈만 많으면 내가 만들어 우리 포항제철 직원들에게 한 권씩 나눠 줄 텐데 말입니다.”
퓰리처상 후보 추천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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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FP 서울 특파원 시절의 임희순. 사진=고명진 사진기자 |
“1987년 6월항쟁이 끝날 때 《뉴욕타임스》 1면에 내가 찍은 사진이 나가기도 했어요. AFP에 5년 있으면서 6월항쟁 보도를 마무리했지요.”
AFP는 그해 그의 사진을 퓰리처상 후보로 추천했다. AFP에 있으면서 파격적인 월급을 받았다. 타사 사진기자들이 안 믿을 정도였단다.
“한 달에 3000달러를 받았어요. 환율이 크게 변동하던 시절이라 갑자기 월급이 3배가 오르기도 했어요. 당시 AP 서울지국에서 나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어요. 그때 얘기했지요. ‘사실 내가 AFP에서 한 달에 3000달러를 받고 있다.’ 그랬더니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받고 있나 알아봤더니, 한참 못 미치더라고요. 못 믿는 게 이해가 되더군요.”
1985년 조선투위는 10주년을 맞아 새로운 언론사를 만들기로 한다. 조선투위와 동아투위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1988년 《한겨레신문》을 창간한다. 그 역시 창간 멤버였다. 그해 꿈에 그리던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렸다.
“올림픽 보도는 세계 5대 통신사가 주관했어요. AP, AFP, 로이터, UPI, 그리고 예전엔 타스통신(옛 소련)도 들어갔어요. 통신사 기자들은 몇백 명씩 올림픽 취재에 참여했어요. 하필 서울올림픽은 AFP가 주관하는 올림픽이었어요. 그래서 올림픽까지 치르고 나서 《한겨레》에 합류했지요.”
한 달에 3000달러라는 고액 월급을 뒤로 하고 ‘신문쟁이’로 돌아왔다.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준비하는데, 처음엔 10만 부만 찍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돈이 없으니까요. 창간을 이끈 정태기(후에 사장) 기자가 반대했어요. ‘아니다, 이건 창간호다. 역사적인 제호기 때문에 지금은 안 팔리더라도 골동품으로라도 팔릴 거다. 50만 부 찍자.’ 근데 그 50만 부가 그날로 다 팔려 버린 겁니다.”
《한겨레》에 있다 1991년 《문화일보》 창간에 참여했다.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데 한 달 안에 신문을 발간해야 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통신사와의 계약이 무척 중요했어요. 통신사에서 일했던지라 연합통신에 각 신문들이 얼마를 내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었거든요. 그때는 각 신문사마다 다른 금액을 연합통신에 주고 있었어요. 어떤 곳은 400만원도 안 내고, 다른 곳은 1억씩 내기도 하고요. 내가 AFP에 있었으니 통신사와 일하는 시스템을 알잖아요. 그러니 사진기자가 할 일은 아닌데 《한겨레》 창간, 《문화일보》 창간 때마다 통신사와 협상을 도맡아 했지요.”
판문점 취재 16년
임희순은 199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내 오정자씨가 미8군 인사처에서 30년 근속한 덕에 영주권이 나왔다. 그는 요즘도 신문에 둘러싸여 산다.
“오래전부터 신문 스크랩을 해왔어요. 스크랩 파일을 이민 올 때도 들고 왔어요. 지금도 나는 집을 사무실로 생각합니다. 집에 온통 신문 스크랩이에요.”
― 어떤 기사를 모으나요?
“요즘엔 한국인 이민사를 모읍니다. 2003년이 미국 이민 100주년이었어요. 그때 하와이에 가서 취재하고 기록해 놨어요. 2005년은 멕시코 이민 100주년이었어요. 멕시코로 가신 분들은 정말 고생했어요. 판문점에 대한 기사는 오래전부터 모아 왔고요.”
― 왜 판문점인가요?
“판문점은 한국전쟁과 곧 연결되는 곳입니다. 많은 일이 그곳에서 일어났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중요한 장소예요.”
그는 전쟁을 정면으로 겪은 세대다. 기자 생활 내내 맴돈 곳도 판문점이다.
“내가 입사한 직후엔 판문점 취재 관련해서는 《한국일보》가 발군이었어요. 그때 이 신문은 《한국일보》 《일간스포츠》 《서울경제》 《코리아타임스》 등 4개 매체를 내고 있었어요. 그러니 판문점에 기자가 네다섯 명이 와있을 수 있어요. 그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자리를 지킬 수 있잖아요. 다른 신문은 벌써 인원수에서 게임이 안 되는 거예요.”
― 그랬겠네요. 혼자 취재를 하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당시 판문점에서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어요. 겨울이면 창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지키고 있어야 했어요. 얼마나 춥겠어요? 기자실에 가면 따뜻한 커피와 도너츠가 있는데도 그림의 떡이에요. 거길 못 가는 거야.”
― 왜요?
“가면 좋은 자리 뺏기니까. 그때 판문점과 서울을 오가는 버스를 ‘쌕뻐스’라고 했어요, 이걸 조중훈 회장이 설립한 한진에서 운행했어요. 버스 하차장에서 판문점 회담장까지 거리가 150~200m 떨어져 있어요. 버스에서 내려 누가 먼저 회담장 창문 자리 차지하느냐 경쟁이 붙어요. 내리자마자 달리는 거지.”
북한 기자가 개성 인삼 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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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평양 취재를 다녀오는 길에 판문점 내 군사분계선에 꽃을 놓았다. 사진=임희순 |
“당시에 외신들 사이에도 경쟁이 심했어요. 도쿄 가는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게 필름을 옮기느라 애썼죠. AP와 AFP가 경쟁했어요. 지금은 사진 전송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었거든요. 판문점에서 김포공항까지 필름을 날라야 해요. 도쿄로 보내는 거죠. 도쿄에서는 미국으로 바로 보낼 수 있었거든요. 미국 종군기자 막스 데스퍼가 찍은 그 유명한 평양 대동강철교 사진도 그런 식으로 미국에 건너간 거예요.”
《한겨레》에서 사진부장을 하면서도 그는 판문점을 취재했다.
“1990년 《한겨레》에 있을 때 남북고위급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어요. 강영훈 총리가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데 나도 동행했어요. 판문점에 군사분계선이 있잖아요. 트럼프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넘어간 그 턱이요. 평양 취재 후 내려오면서 그곳에 꽃을 가져다 놨어요. 그걸 사진으로 남겼지요.”
그렇게 판문점을 들락날락한 세월이 도합 16년이다. 판문점 취재를 하며 북한 기자와 친해지기도 했다.
“‘부인이 딸을 낳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니 팔뚝만 한 말린 개성 인삼을 가져다 주더군요. 혹시 해서 당시엔 안 먹고 나중에 먹었어요.”
미국에서도 시위 취재
미국에 건너간 후에도 임희순 기자는 현장을 찾아다녔다. 2000년 4월 워싱턴에서 IMF(국제통화기금)와 세계은행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1만여 명이 모였다. 그는 이 현장을 취재하다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당시 미국 언론이 보도한 기사 내용이다.
〈AP의 프리랜서 사진기자인 임희순씨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 난 깊은 상처와 그 옆에 있던 엄청난 핏자국이 당시 상황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병원에 가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뉴욕데일리뉴스(New York Daily News)》의 프리랜서 사진기자 제임스 케이봄(James Keivom)은 임희순이 경찰관을 촬영하고 있을 때 한 경찰관이 곤봉으로 그를 밀쳐 넘어뜨리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시위대 약 열두 명이 경찰의 강경 진압에 저항했고 일부는 체포되어 끌려갔다. 그러나 도로 곳곳에 임희순의 피가 튀어 있는 것을 본 대다수의 시위대는 물러섰다. 젊은 시위대 중 일부는 울었고, 다른 이들은 “수치스럽다(Shame, shame)” “우리는 폭력적이지 않다, 너희는 어떤가?(We’re not violent, how about you?)”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한가운데로 들어갔다가 사달이 났다. 한국에서 민주화항쟁 촬영할 때 버릇이 미국에서도 나온 것이었다.
2001년 9·11테러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언론이 9·11테러를 회고할 때 꼭 싣는 사진이 있다. 비행기가 내리꽂혀 연기가 뿌연 펜타곤(美 국방부) 위에 헬기 한 대가 위태롭게 떠있는 사진이다. 그 사진 촬영자가 바로 ‘Yim Heesoon(임희순)’. 펜타곤에 비행기가 떨어지자 사람들이 도망 나오는데 그는 오히려 사건 현장을 향해 달려 들어가면서 촬영했다.
“비행기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펜타곤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울면서 뛰어나오더군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두 번 수상한 강형원 사진기자(前 로이터, AP, LA타임스)는 임 기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끈기 있는 사진기자입니다. 제가 AP에 있을 때 임 선배에게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귀환 같은 취재를 맡기곤 했어요. 클린턴 대통령은 보통 백악관에 늦은 시각에 돌아왔거든요. 임 선배는 새벽까지 대통령을 기다리는 유일한 사진기자였어요. 육 여사 피살 사건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일 겁니다. 보도사진은 지나간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일어나는 순간을 기다려 놓치지 않는 예술입니다.”
7명의 한국 대통령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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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의회에서 사진을 전송하고 있는 임희순을 모르는 사이의 사진기자가 가만히 촬영한 다음 보내 준 사진. 사진=임희순 |
“DJ 선거 따라다닐 때 배운 습관이에요. 유세 할 때 기자들과 같이 다니잖아요. DJ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요. 다음 유세지로 이동할 때까지 꼭 잤어요. 도착하면 쌩쌩해져서 연설해요.”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지금까지 7명의 한국 대통령을 촬영했다.
“포항제철에 있을 때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을 촬영했어요. AFP에 있을 땐 노태우 대통령이 광양제철 고로(高爐)에 처음 화입(火入)하는 걸 찍었어요. AP 기자로는 김대중·이명박·박근혜·윤석열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통령이 누군지 묻자 그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지요. 내 삼촌이 6·25 때 인민군에 들어갔어요.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혔는데 이 대통령이 반공 포로들을 풀어 줬잖아요. 그때 석방됐어요. 반공 포로 환영대회가 서울 여의도 샛강 건너에 있던 당산국민학교에서 열렸어요. 삼촌을 만나러 갔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거기 온 거예요. 그때 깊은 인상을 받았지요. 기자가 된 것도 어쩌면 그 기억 때문일지 몰라요.”
“보도사진은 진실해야”
― 좋은 보도사진이란 어떤 걸까요?
“베트남 전쟁을 상징하는 사진이 있어요. 네이팜탄을 피해 나체로 도망가는 소녀를 촬영한 사진이요. 얼마 전에 논란이 일었잖아요. 촬영자를 바꿔치기했다는 주장이 나왔어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좋은 보도사진은, 좋은 보도사진 기자는 일단 진실해야 합니다.”
문제의 사진은 AP통신 사이공(현 호찌민시) 지국에서 일하던 당시 스물한 살의 베트남인 기자 닉 웃이 찍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는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러나 올해 초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스트링어(Stringer)〉는 닉 웃이 아니라 미국 NBC방송과 AP통신에 필름을 제공하고 건당 수수료를 받던 베트남인 프리랜서 사진기자 응우옌 타인 응에(86)가 진짜 촬영자라고 주장했다. 물론 닉 웃과 AP통신은 반박했다.
진실한 자세가 세월을 정정당당하게 겪어 내면 무엇이 될까? 이해, 애도, 사랑 같은 게 되는 건 아닐까. 그의 말이다.
“육 여사 사진에 커튼을”
“작년 8월 15일이 육영수 여사 50주기였어요. 10월 26일은 박정희 대통령 45주기 되는 날이었고요. 11월에 한국에 들어갔어요. 꽃다발을 들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서 하나는 박태준 회장 묘소에, 다른 하나는 박 대통령·육 여사 묘소에 놨습니다.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왔어요. 그 모습을 조선투위 동료들이 봤으면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자식들에게 해둔 말이 있어요. ‘만약 (내가 찍은) 육 여사의 마지막 사진이 어디에선가 전시된다면, 육 여사가 쓰러져 있는 부분만은 커튼으로 가려 줘라. 전체 사진을 보고 싶은 사람들은 커튼 뒤로 가서 보게 해줘라.’”
― 왜요?
“국모로 불렸던 분이 그렇게 쓰러져 있는 모습이… 너무 처참하잖아요. 요즘도 인터넷에 그 사진이 떠다니는데, 내가 공개한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어요. 보도관제 때문에 당시엔 공개 안 됐던 사진까지 돌아다니더군요.”
― 돌아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과거의 사람을 두고 어느 한쪽에 편향적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80살이 넘었으면 작은 걸 갖고 따질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해요.”
권위주의 시대와 민주화를 건너온 한국 사회는 현재 극도의 진영 대립이라는 늪을 건너고 있다. 언론마저 함께 허우적대고 있는 게 아닐까. 정파주의적인 보도가 당연한 걸로 여겨지는 이상한 시대에, 반세기 이상을 현장에서 보낸 언론인의 술회를 듣고 있으려니 늪에서 탈출할 수 있는 실마리를 포착한 것 같은 희망이 들었다. 결국 관건은 끝까지 현장을 지키는 끈기, 그리고 ‘진실성’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