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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일류 보훈 동행’ 감사패 받은 ‘국민가수’ 이미자

“대한민국의 영웅들을 위한 ‘노래의 다큐멘터리’ 만들었죠”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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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조선 〈이미자 특별 감사콘서트〉… 파독 광부와 간호사, 참전용사 보훈 공연
⊙ “내 노래 인생의 마지막을 뜻있게 장식했구나 생각”
⊙ 2013년 파독 50주년 기념 독일 공연… 베트남전 당시 5년간 한국군 위문공연
⊙ 베트남 붕따우서 자동차 사고로 부상… 티우 대통령, 베트남 최고문화훈장 수여
⊙ 2002년 평양공연 때 모란봉초대소 숙박… 한국 가수 최초로 단독공연 펼쳐
⊙ 박정희, 청와대 후쿠다 총리 만찬 때 금지곡 ‘동백 아가씨’ 불러달라 요청
⊙ 1990년 최다곡 발표 《기네스북》 등재… ‘트로트’보다 ‘전통가요’라 불러야
사진=이신영 씨영상미디어 기자
  지난해 12월 1일 방송된 TV조선의 〈이미자 특별 감사콘서트—오랫동안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의 마지막 장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李美子·82)씨가 앙코르곡 ‘섬마을 선생님’을 부르며 무대 아래 방청석으로 내려왔다. 이씨는 앞줄에 앉아 있던 파독 간호사와 파독 광부, 6·25와 베트남전 참전용사, 제2연평해전 참전용사, 천안함 피격사건 전사자 유족의 손을 꼭 잡았다. 특히 2015년 DMZ(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의 목함지뢰 공격으로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29) 예비역 중사를 힘차게 끌어안을 땐, 스튜디오를 가득 메운 방청객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해가 바뀌어 지난 1월 5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이미자씨와 마주 앉았다. 이씨는 “가수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진정한 영웅들께 감사드리고 싶었다”며 “이번 콘서트는 파독 광부 150명과 백마고지 전투 등에 참여한 6·25 참전용사, 월남 파병 장병, 제2연평해전 참전용사, 천안함 유족, 목함지뢰 전상 군인 등을 초청해 국민들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마련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미자는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뒤 ‘동백 아가씨’(1964), ‘흑산도 아가씨’(1965), ‘섬마을 선생님’(1966), ‘아씨’(1970)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동백 아가씨’는 무려 35주 동안 가요 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2600여 곡, 560여 장 음반을 발표, 여성 가수 최초로 음반 100만 장 판매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1990년 한국 최다 앨범과 노래 발표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고, ‘엘레지의 여왕’ ‘국민 가수’ 등의 타이틀로 불리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전통가요의 ‘역사’다.
 
 
  ‘내 노래 인생의 마지막을 참으로 뜻있게 장식’
 
가수 이미자씨가 북한의 목함지뢰에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 예비역 중사를 안아주고 있다. 사진=TV조선 화면 캡처
  지난해 12월 19일 국가보훈처는 이미자씨에게 국가유공자 예우 분위기 조성에 기여한 공로로 ‘일류 보훈 동행’ 감사패를 전달했다. 국가보훈처는 이씨가 파독 간호사·광부, 참전용사 등을 위한 ‘특별 감사공연’을 개최한 것, 60년 넘게 가수로 활동하며 베트남 전쟁 당시 첫 국군 위문공연, 파독 광부·간호사 파견 50주년 독일 현지 위문공연 등 역사의 굴곡을 함께한 것이 시상 이유라고 밝혔다.
 
  — 앙코르곡 부르면서 무대 아래로 내려가 목함지뢰 폭발로 다친 하재헌씨를 안아주신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천안함 침몰로 자식을 잃은 부모님, DMZ에서 지뢰를 밟은 청년… 너무나 가슴 아픈 일들이잖아요. 무대 위에서 그분들 얼굴을 뵈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앙코르곡 부르다 간주 때 내려가서 손 잡아드리고, 엄마의 심정으로 하 중사를 안아주었지요.”
 
  — 파독 광부와 간호사, 참전용사 등의 당시 모습과 현재 인터뷰를 담은 VCR을 보여주면서 이 선생님의 노래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꾸미셨더군요. 콘서트는 언제부터 준비하신 건가요.
 
  “KBS 출신 방송작가 등과 합심해 6개월 이상 걸려 자료를 모았어요. 국가기록원 같은 곳에서 자료 조사를 엄청나게 했죠. 잠 못 자고 새벽을 맞이할 때도 있었어요. 오죽하면 기와집을 일흔 번 헐고 또 새로 짓는 느낌이라고 얘기했을까요. 흐뭇한 게, 프로그램 내용도 고급스럽고, 네티즌들이 TV조선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많이 했대요. ‘내 노래 인생의 마지막을 참으로 뜻있게 장식했구나’ 생각했어요.”
 
 
  행사용 수세미 2000장 손수 제작
 
TV조선 창사 특집 〈이미자 특별 감사콘서트〉에서 이미자씨가 MC 임성훈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TV조선
  — 이번 콘서트는 대한민국 현대사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한다면서 ‘쇼’라고 명칭을 붙이지 말아달라고 하셨다지요.
 
  “왜냐하면 이건 ‘쇼’가 아니에요. 가수 한 사람의 히트곡을 듣기 위한 특집 프로가 아니라 하나의 다큐멘터리다, ‘노래의 다큐멘터리’라 생각해달라고 했어요. ‘쇼’라는 말은 벌써 분위기가 다르잖아요? 이 프로그램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분들의 땀과 눈물, 희생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선사하는 자리였으니까요.”
 
  — 출연료와 자동응답시스템(ARS)을 통해 모금된 수익금 전액을 국가유공자 복지를 위해 기부하셨다면서요.
 
  “이번에 제가 TV조선에서 받은 출연료 3000만원과 ARS 수입은 국가보훈처에 기부했고요, 국가유공자들을 위한 기금의 ‘종잣돈’이 될 거랍니다. 국가보훈처에서도 이번 TV조선의 감사콘서트와 같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더라고요.”
 

  — 의상도 모두 자비로 준비하시고, 코로나19 기간 손수 뜬 수세미 2000장도 모두 기부했다고요.
 
  “수세미 2000장을 판매해 기부했는데, 무척 인기가 좋았어요. 코로나19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 않으니까 취미로 수세미를 손수 떴습니다. 막연하게 연말에 좋은 일에 쓰자면서. 그러다가 연말에 감사콘서트라는 좋은 일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뜨개질을 했죠.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혼자 6개월 동안 떴습니다. 공연을 보고 돌아가시면서 수세미를 한 장당 1000원이든 1만 원이든 내고 가져가셨다고 해요.”
 
  — 이번 보훈공연을 계기로 국가유공자 예우 분위기가 탄력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민족은 분단의 세월 동안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았어요. 저도 서울 한남동 유엔빌리지 근처 ‘빈양모탱이’ 마을에서 태어나 1·4 후퇴 때 꽁꽁 언 한강을 건너 피란길에 나섰던 쓰라린 기억이 있습니다. 피란살이를 하면서 양조장에서 술지게미를 얻어먹고 얼굴이 벌게진 적도 있어요. 우리 대한민국을 일군 분들을 우리가 기억해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이번 콘서트를 죽기 아니면 살기로 준비했습니다.”
 
 
  ‘구텐 탁, 동백 아가씨’
 
1965년 5월 31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파월장병 위문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연예인들을 접견하는 모습. 오른쪽부터 위키리, 곽규석, 구봉서, 박재란, 이미자씨. 사진=국가기록원 정부기록사진집
  — 파독 광부·간호사 독일 위문공연도 다녀오셨다면서요.
 
  “2013년에 다녀왔어요. 그해 10월 26일 프랑크푸르트에서 MBC가 파독 50주년 기념공연 ‘이미자의 구텐 탁, 동백 아가씨’ 공연을 열었어요. 저녁 시간이라 공연 이름도 ‘구텐 탁(Guten Tag)’이라고 했던 것 같죠?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개막공연에 축하 영상메시지를 보내주셨고, 저를 비롯해 조영남(趙英男)씨, 그리고 케이팝 그룹 2PM이 공연장(야르훈더르트할레) 무대에 올라 2400여 명의 관객들과 감동의 공연을 펼쳤어요.
 
  독일 공연 전날,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에센의 광산 지역엘 갔어요. 파독 광부로 현지에 정착한 교민이 안내해주셔서 탄을 캐던 곳을 둘러봤죠. 탄광 지주(支柱)에 붙여놓은 트랜지스터에서 ‘동백 아가씨’가 흘러나오면 따라 부르다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 1973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위문공연을 다녀오셨죠.
 
  “베트남전이 본격화하기 전인 1965년부터 위문공연을 시작했어요. 베트남전 최초의 위문공연이었죠. 1965년 여름 어느 날, 청와대에서 뜻밖의 연락이 왔어요. 당시 월남에 파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데, 최초의 주월 한국군 부대인 비둘기부대[주월한국군사원조단, 1965년 3월 의무·공병·태권도 교관 2000명을 파병한 민사(民事)작전 부대]로 연예인들이 위문공연을 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 아무리 위문공연이라지만, 여자의 몸으로 전쟁터에 가는 건 겁나지 않던가요.
 
  “겁은 났지만 가야지요. ‘가기만 하면 다 죽는다’는 소문이 나돌던 무렵이었는데…. ‘동백 아가씨’가 한창 유행할 때니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연예인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셨대요. 저를 포함해 위키리·유주용(劉宙鏞)·이금희,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가수가 있었고, 코미디언은 곽규석(郭圭錫)·구봉서(具鳳書)씨 등 스무 명쯤 됐던 것 같아요.”
 
 
  비둘기부대의 사단가는 ‘동백 아가씨’
 
  — 청와대로 가서 출발 신고를 하셨다고요.
 
  “네, 우리는 청와대로 가서 박 대통령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환송 만찬을 했죠. 매스컴에선 대서특필했고요. 청와대 비서관이 공연단을 인솔해 비행기에 탔어요. 저는 그때 비행기를 처음 타는 거였죠. 출국 경험은 전혀 없었고요. 그때 탔던 비행기는 외국 항공사인데, 이름은 기억은 안 나요. 여의도에서 이륙해 홍콩으로 가서 어느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비행기로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내려 트레일러 하우스에서 1박을 하고 2박 3일 만에 베트남 수도 사이공(하노이)에 도착했죠.”
 
  — 사이공에 도착해보니 상황이 어떻던가요.
 
  “일행이 비둘기부대에 도착하자 군 장병들이 뜨겁게 환영했어요. 뜨거운 햇살 탓에 국군 아저씨들은 피부가 모두 검게 그을려 있었어요. 그 이글거리는 눈망울과 눈가에 눈물이 맺힌 모습은 제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그때 제 노래 ‘동백 아가씨’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어요. 글쎄, 비둘기부대의 사단가였다니까요(웃음). 비둘기부대 최초의 사단장은 조문환(曺文煥) 준장(국방차관 역임)이었는데, 그분은 ‘동백 아가씨’의 열렬한 팬이었어요.”
 
 
  붕따우 군 병원 자동차 사고
 
  — 또 다른 부대 공연을 했나요.
 
  “비둘기부대에서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는 다음 공연을 위해 헬리콥터에 탔어요. 다음 장소는 붕따우 지역인데, 주월 한국군 부상병들이 있는 군 병원이었어요. 그곳에 있던 부상병들과 군의관, 간호사들을 위문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전 이곳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했어요.”
 
  — 저런, 큰 부상이었나요.
 
  “환영 행사장으로 가기 위해 차를 탔죠. 다른 차들은 전부 지프였는데, 저를 대우해주느라 그랬는지 장교용 승용차에 태우는 거예요. 나는 운전석 옆, 그러니까 조수석에 앉았죠. 얼마쯤 갔을까, 운전사가 급브레이크를 밟더라고요. 나중에 들었는데, 활주로용 구멍이 뚫린 철판(PSP) 모서리에 타이어가 걸렸다고 해요. 순간 앞으로 몸이 쏠리면서 유리창에 머리를 ‘꽝’ 하고 부딪치고 말았어요.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금세 피가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어요.”
 
  — 갑작스러운 사고에 일행도 깜짝 놀랐겠는데요.
 
  “앞뒤로 가던 일행 차들은 우리 차가 베트콩에게 저격당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어 우왕좌왕했대요. 이때 후라이보이 곽규석씨와 위키리(이한필)씨가 뛰어와 저를 안았던 기억이 나요. 다행히 병원이 가까이 있어 응급실로 금세 옮겨 치료를 받을 수 있었어요.”
 
  — 사고 상황을 기억하십니까.
 
  “그 와중에도 전 정신을 잃지 않았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피를 아주 많이 흘렸다고 해요. 얼굴에 유리 파편이 많이 박혔던 거죠. 정수리 부근과 눈 주위의 상처가 특히 심해 병원장이 직접 제 얼굴에 박힌 유리 파편을 하나하나 제거해 겨우 병실로 옮길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 공연을 하지 못하고 귀국해야 하는 상황인데요.
 
  “저녁 공연시각은 점점 다가오는데 병실에 누워 있자니 무척 안타까웠어요. 기대가 컸던 군인들은 막상 내가 누워 있으니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어요. 공연시각이 마침내 다가오니 정신이 말짱해지는 거예요. 일어나 앉아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 담당 장교와 군의관에게 ‘노래는 못 부르더라도 무대에 올라가 인사말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떼를 썼어요. 담당 군의관이 마지못해 공연장에 가는 것을 허락했어요.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아 마침내 무대 뒤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눈앞에 둥근 원이 보이더니 점점 좁아지는 거예요. ‘아,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하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티우 대통령에게 베트남 훈장 받아
 
가수 이미자씨가 백마부대 파병용사 위문공연을 하는 모습. 사진=조선DB
  — 무리하는 바람에 큰일 날 뻔했군요.
 
  “한참 있다가 어렴풋이 ‘미자야, 미자야…’ 하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어요. 주변에 있던 분들이 ‘이제야 정신이 들었네’ 하면서 저를 계속 부르는데, 그때 앰뷸런스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내 몸이 들것에 실려 미끄러져 들어갔어요. 앰뷸런스가 쌩쌩 달리는 것을 느끼며 ‘이제 나는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그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어요.”
 
  — 십년감수하셨군요. 곧바로 귀국길에 오르셨나요.
 
  “우리 일행은 예정대로 공연 다음 날 하루를 쉬고 귀국길에 올랐어요. 그때 병원 관계자들은 제가 일행과 함께 떠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 혼자만 그곳에 남을 순 없잖아요. 가다가 죽더라도 같이 가겠다며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어요. 결국 병원에서 상처에 바를 약과 상비약을 준비해주고 영양제를 놓아주었어요. 박 대통령께 귀국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첫 공연을 마쳤는데, 박 대통령이 보고를 받으셨는지, ‘괜찮으시냐’며 걱정스럽게 물어보셨어요. 지금도 그때의 사고 흉터가 얼굴에 살짝 남아 있어요.”
 
  — 그 뒤로 베트남 쪽은 쳐다보지도 않으셨겠는데요.
 
  “웬걸요, 이듬해 1966년부터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정식으로 창설하면서 저는 매년 월남 위문공연을 갔어요. 9월 25일 사령부 기념일에 맞춰 꼭 그곳에 갔죠.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전투 현장인 소대·중대 막사까지 헬기로 이동해 기타 반주 하나로 노래하고 기념사진도 함께 찍었습니다. 베트남 정부도 저에게 훈장을 주더라고요.”
 
  — 베트남 정부로부터 서훈한 사실은 몰랐네요.
 
  “1973년 베트남 응우옌 반 티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어요. 그때 몇 분 장성에게 국가훈장을 주는 훈장 수여식이 있었는데, 연예인인 제가 유일하게 홍일점(紅一點)으로 최고문화훈장 수훈자 명단에 올랐더라고요. 제가 5년 동안 파월 장병 위문공연을 한 공로를 인정했대요. 지금도 제 서재에는 그때 베트남 대통령에게 받은 훈장과 베트남 전쟁 기간에 받은 훈장과 포장 등이 있습니다.”
 
 
  이미자 공연장에 나타나지 않은 金正日
 
  — 평양 특별공연에서 한국 가수 최초로 단독 공연을 하셨군요.
 
  “김대중(金大中) 정부 말기 남북화해 물결이 거셀 때죠. 북한 김정일이 ‘추석 전후로 남측의 이미자 선생님을 초청하고 싶다’고 해서 통일부가 급하게 공연을 기획했다고 들었어요. 2002년 9월 27일 첫날 동평양대극장에서 ‘평양 동백 아가씨’란 제목으로 제 단독무대가 펼쳐졌습니다. 둘째 날은 테너 임웅균(任雄均), 가수 최진희(崔辰姬) 그리고 북측 공훈배우와 인민배우가 함께하는 ‘오 통일코리아’ 공연이 이어졌죠.”
 
  — 북한에서 예우를 해주던가요.
 
  “앞서 평양을 방문했던 가수들이 중국을 거쳐 북한엘 갔는데, 전 직항(直航)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MBC가 대한항공 전세기에 300명의 공연단을 태우고 평양 순안공항에 내렸습니다. 다른 분들은 고려호텔로 가는데, 책임자가 ‘이미자씨와 바깥분은 초대소로 모시겠다’고 그래요. 대동강변 부벽루(浮碧樓)가 보이는 곳, 이후락(李厚洛) 전 중앙정보부장이 묵었다는 ‘모란봉초대소’로 갔어요. 김중배(金重培) MBC 사장, 그리고 이종석(李鍾奭)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차장도 같은 모란봉초대소에서 묵었더라고요. 저희 부부에게 벤츠 600, 매니저와 코디에게도 벤츠 600을 제공했고, 각 차마다 경호원 한 사람씩 배정했고요. 저희 부부가 탄 차에는 국장급 여성경호원이 앞자리에 탔는데, ‘남쪽에서 오신 굉장한 분’이라면서 칙사 대접을 해주더라고요.”
 
  — 공연 프로그램 조율하실 때, 북측이 이래라저래라 딱딱거리지 않던가요.
 
  “그분들 억양도 딱딱하지만, 노래 곡목까지 얼마나 따지는지 몰라요. 그래도 남한 제일가는 가수인데 그쪽 의사대로 휘둘리면 자존심 문제잖아요?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이런 거는 다 불렀어요. 그쪽에서 안 좋아하는 노래는 굳이 부를 필요가 없잖아요. 북한 관객들을 위해 ‘성불사의 밤’ ‘압록강 칠백리’ ‘선죽교’ ‘두만강’ 같은 곡을 불렀습니다. 양념으로 북에서 애창되는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로 시작하는 ‘몽금포 타령’을 불렀더니 참 좋아했어요.”
 
  — 김정일도 이 선생님의 팬이라던데, 공연장에서 만나셨나요.
 
  “그래서 북한에 가게 된 거죠. 근데 김영남(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나 김용순(아태평화위원회 위원장) 같은 높은 사람들은 만났는데, 정작 김정일은 못 만났어요. 단독공연이 끝나고 김용순이 분장실로 찾아와서 ‘위원장님이 지방 일정 때문에 참석을 못 하셨다’면서 ‘공연을 하루 연장해달라’고 했어요. 이쪽 스케줄도 있고 해서 MBC 사장이 들어줄 수 없다고 했지요. 다음 날 오후 4시에 우리를 싣고 갈 전세 비행기가 순안비행장에 도착할 예정이었거든요. 김정일이 괜한 자존심 세우다가 남 좋은 일만 한 셈이지요. 2019년에도 방북 공연 초청을 받았는데, 시대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 거절했습니다.”
 
 
  발표곡 가사 전부 못 외워
 
  이미자는 서울 문성여고 3학년이던 1958년 HLKZ(KBS의 전신)가 주최한 가요 경연 프로그램 〈예능로터리〉에서 나애심(羅愛心)의 ‘언제까지나’를 불러 1등을 하고, 그 이듬해인 1959년 ‘열아홉 순정’을 부르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한국 대중가요사의 살아 있는 전설인 그는 1990년에 통산 560장의 음반과 총 2069곡을 발표한 다작 가수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 2600여 곡 가사를 다 외우시나요.
 
  “아뇨. 무대에서 자주 부르는 대표곡들은 알지만…. 외국 나들이 갔을 때, 식당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오기에 가만 들어보니 제 노래더라고요. 제목도 모르겠고, 그 정도로 많이 불러서….”
 
  초창기 그의 가수 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싸구려 출연료에 지방 무대를 돌아다니며 선배들 양말을 빨고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지방공연에서 여관방이 너무 추워 몰래 도망쳤다가 현인(玄仁) 가수분과위원회 회장에게 “가수분과에서 제명해버린다”고 호되게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다. 이미자는 1964년 초까지 스카라극장 인근의 다방들을 드나들며 일거리를 찾았다.
 
  그런데 이미자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동백 아가씨〉 주제가를 녹음하자는 의뢰를 받은 것이다. 사실 ‘동백 아가씨’를 녹음하기로 내정된 가수는 ‘개나리 처녀’를 부른 최숙자(崔淑子)였다. 하지만 신생 음반사인 지구레코드는 인기 가수의 높은 비용이 부담스러워 작곡가 백영호(白映湖)의 추천을 받아 저렴한 비용으로 이미자를 대타로 선택한 것이었다.
 
  — ‘동백 아가씨’ 녹음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면서요.
 
  “1964년 여름, 스카라극장 앞 목욕탕 건물 2층 녹음실에서 녹음했어요. 낡은 선풍기 한 대가 있었는데 소음으로 틀 수 없고, 대신 큰 양동이에 얼음을 갖다 놓고 수건을 축여 더위를 식히면서 녹음을 끝냈어요. ‘동백 아가씨’ 덕분에 집 사고, 전화 놓고, 지프 자동차도 샀어요(웃음). 말도 되지 않는 스케줄을 소화했던 그때 그 젊음이 그리워요.”
 
 
  박춘석, 이미자, 패티김
 
2005년 3월 16일 전국 순회 ‘빅3 콘서트’를 앞두고 기자회견장에 나온 조영남, 이미자, 패티김(왼쪽부터). 사진=조선DB
  — ‘가수 이미자’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세 분의 작곡가가 있습니다.
 
  “‘열아홉 순정’을 주신 나화랑(羅花郞) 선생님, ‘동백 아가씨’의 작곡가 백영호 선생님, ‘흑산도 아가씨’ 등 700곡 이상을 주신 박춘석 선생님입니다. 전 이분들을 가족 이상으로 각별하게 생각했어요. 백 선생님은 아버지처럼 믿음직스러웠어요. 박 선생님은 무대에서 지휘까지 해주시면서 신경 써주셨는데, 오빠 같은 분입니다.”
 
  — ‘박춘석-이미자 콤비’는 어떻게 탄생한 겁니까.
 
  “1965년으로 기억해요. 박춘석 선생님이 제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해오셨어요. 몹시 흥분해 박 선생님을 찾아가니 ‘진도 아리랑’ 악보를 제 앞에 내놓으시며 ‘잘 부탁해요’라고 하세요. 박 선생님과의 인연의 시작이었어요. 며칠 후 ‘진도 아리랑’이 라디오 전파를 탔고, 박 선생님과 전 똑같이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전 박 선생님 곡을 계속 받고 싶었죠. 그런데 박 선생님은 당시 최대 레코드사인 오아시스레코드 소속이셨고, 전 지구레코드 전속 가수여서 곡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어요. 박 선생님은 휘하에 기라성 같은 가수들을 떠나 계약 조건을 양보하시면서 전속회사를 지구레코드로 옮기셨죠. 그야말로 파격적 결정이었어요. 1965년부터 1996년까지 30년간 이어진 ‘박춘석-이미자 콤비’의 탄생이었죠.”
 
  — 이미자와 패티김 두 분은 박춘석 작곡가가 발굴했습니다. 패티김은 그 후에도 꾸준히 스탠더드 팝 성향의 곡으로 활동하며 이 선생님과는 다른 장르였는데.
 
  “저하고 장르는 조금 다르지만, 압도적인 성량으로 분위기 있게 노래하는 훌륭한 가수죠. 세련되고 무대 매너도 좋은 패티김에 자극받아 한때 저도 노래 풍을 바꿔보려 했었지요. 근데 바쁘게 살다 보니 ‘아, 이것이 나의 숙명이구나’ 싶어 ‘전통가요 지킴이’로 남게 됐습니다.”
 
  2010년 3월 14일 박춘석이 별세했을 때, 박춘석이 키운 대표적인 여가수 패티김(84)과 이미자가 그해 3월 18일 SBS TV 〈박춘석 추모특집 ‘패티김, 이미자의 못다 한 이야기’〉에 출연해 고인을 회고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이미자는 “선생님이 쓰러지신 후 처음 4년간은 찾아뵈었다. 그런데 본인이 아픈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으셨던지 제가 가면 싫어하셨다”며 “아픈 분을 더 괴롭게 해드리는 게 아닌가 싶어 그다음에는 찾아가지 않았는데 지금 그게 너무 후회된다”며 울먹였다. 패티김은 “선생님이 싫다고 하셔도 계속 찾아갔다. 선생님께 노래를 불러드리면 지긋이 감상하셨다”고 말했다. 이에 이미자는 “나도 언니처럼 싫다고 하셔도 끝까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미자의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됐을까
 
  — 이 선생님의 3대 히트곡 ‘동백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가 왜색(倭色) 등을 이유로 줄줄이 금지곡이 됐지요.
 
  “‘동백 아가씨’는 1964년 나오자마자 크게 히트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곡이 방송 금지곡이 되었다며 부르지 말라는 통지가 왔어요. 1967년 ‘섬마을 선생님’ 역시 크게 히트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금지곡이 됐어요. 1969년 ‘기러기 아빠’도 크게 히트했지만, 그 노래 역시 금지곡으로 묶였죠. 이후 준히트곡들까지 줄줄이 금지곡이 됐어요. ‘동백 아가씨’는 왜색, ‘섬마을 선생님’은 표절, ‘기러기 아빠’는 비탄조라는 거였어요. 방송 차트에서 제 노래가 1~10위까지 들어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어요. 너무나 기가 막혔고, 목숨 줄을 끊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 베트남 위문공연도 열심히 하셨는데, 금지곡 지정은 너무하네요.
 
  “기막힌 건 ‘윗분’들은 제 곡이 금지곡인지조차 모르고 계셨어요.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이 주관하는 청와대 귀빈만찬 연회에 갔었어요. 당시 저는 만찬이나 연회 출연 제의를 받고 영빈관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어요. 1970년대 초반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일본의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수상 내외가 방한해 만찬이 열렸어요. 박 대통령이 제게 ‘동백 아가씨’를 꼭 불러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전 ‘동백 아가씨’를 열창했어요. 그곳에 계신 귀빈들은 제게 큰 박수를 보내주셨어요. 그렇다면 그곳에 계신 분들은 ‘동백 아가씨’가 금지곡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싶어 참으로 어이가 없었어요.”
 

  — 그럼 누가 이 선생님의 곡들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단 말이죠?
 
  “그 당시 방송사 방송위원들이 있었는데, 그분들 입김이 보통 센 게 아니었어요. 결국 경쟁 레코드사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다 보니 제 노래를 금지곡으로 만든 것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 1987년 6·29선언과 동시에 해금됐는데, 그때 기분은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어요. 마치 잃어버렸던 자식을 다시 찾았을 때의 기분이랄까.”
 
 
  ‘수준 낮은 고무신짝들’ 소리에 분개
 
1989년 10월 1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이미자 노래 30년 쇼를 관람한 여야 4당 대표와 이미자씨가 로비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DB
  —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어디였습니까.
 
  “1989년 데뷔 30주년 기념공연입니다. 30주년 기념공연은, 우리 전통가요를 푸대접하는 벽을 넘어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었잖아요. 공연을 앞두고 제가 당시 여야 4당 총재님들을 일일이 당사로 찾아가서 다 초대했어요. 민정당 쪽은 총재가 노태우 대통령이어서 박준규 대표께서 참석해주셨고, 김영삼·김대중·김종필 총재 내외분 모두 오셔서 제 노래를 들어주셨습니다.”
 
  — 데뷔 30주년 기념공연 대관 신청을 했다가 ‘명예의 전당이 고무신짝들의 판으로 하루아침에 전락한다’며 거절당했을 때, 크게 실망하셨지요?
 
  “거절당한 것도 원통하고 기막힌 일인데, 고명하신 모대학 교수님께서 ‘수준 낮은 고무신짝들’이라고 욕하는 것에 더 분개했죠. 그렇다면 나를 좋아하는 국민들은 다 촌스러운 사람들이란 말인가요? 전 포기하지 않고 남편(金昌洙 당시 KBS 방송국장)과 의논해 서울시청에 근무하는 남편 친구분의 주선으로 고건 시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어요. 며칠 후 장소 허락 소식이 왔는데, 전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어요. 게다가 《조선일보》에서 30주년 공연 주관사 제의까지 해주셔서 두 손 모아 감사하며 공연 준비에 몰입했던 기억이 납니다.”
 
  — 매스컴에 ‘나는 트로트의 여왕이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인지요.
 
  “우리나라 대중가요 역사는 1920년을 기점으로 한다면 10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소개할 때면 대체로 ‘트로트 가수’ ‘트로트의 여왕 이미자’라고들 해요. 전 그렇게 불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왜 내가 부르는 노래가 트로트(trot, foxtrot-舞曲의 일본식 발음)일까? 트로트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없는 단어예요. 가까운 일본엔 엔카(演歌), 프랑스엔 샹송, 이탈리아엔 칸초네 같은 각국 전통이 깃든 이름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트로트라는 이름을 붙이니 속이 상하죠.”
 
 
  “트로트가 아니라 전통가요”
 
  —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제 노래만큼은 우리나라 전통가요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갈망해요. 제가 부르는 노래야말로 우리 민족의 정서와 한(恨)을 가장 잘 표현한 한국적 노래라고 자부하고, 또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요. 1920년대 윤심덕(尹心悳)이 부른 ‘사의 찬미(번안가요)’라는 곡에서부터 ‘이 풍진 세상’ ‘고향설’ ‘나그네 설움’ ‘눈물 젖은 두만강’ ‘목포의 눈물’ 등 그야말로 한 맺히고 설움이 서린 곡들이 우리나라 전통가요입니다.”
 
  — 요즘 TV조선의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하는 가수들을 보면 발라드풍의 노래까지 자유자재로 부르더군요.
 
  “〈미스터트롯〉 참가자들이 우리 전통가요의 맥을 계승하고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격상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케이팝 흉내를 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제 나름대로의 철칙(鐵則)이 있어요. 이미자는 패티김의 노래도 이미자의 노래로 소화해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원곡자의 곡을 아무리 잘 불러도 2등에 불과해요. 결국 가수는 내 히트곡을 만들어야 합니다. TV조선이 코로나19 기간 동안 전통가요의 이미지를 세련되게 업그레이드시켜주셔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BTS가 빌보드 1위를 한 것처럼, 우리 가요도 우물 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후배들이 갖게 해줬어요.”
 
  — 30여 년 전, 전후 일본 국민의 영혼을 달래준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雲雀·1937~1989년)가 별세했을 때 일본 신문들은 부음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습니다. 생전의 미소라 히바리와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만난 적은 없어요. 그분은 제가 제일 존경하는 선배, 나이가 저보다 서너 살 위였어요. 그래도 그분은 새 음반을 내면 사인을 해서 제게 부쳐주면서 ‘언젠가 공연(共演)을 한 번 하자’는 뜻을 전하기도 했어요. 박춘석 선생님이 1978년 12월, 미소라 히바리에게 ‘바람주점(かぜさかば)’이란 곡을 써주셨고, 미소라 히바리가 일본말로, 저는 우리말로 동시에 레코드를 냈거든요.”
 
  이미자씨는 “교토에 있는 ‘미소라 히바리 기념관’을 찾아간 적이 있다”며 “무대에서 입던 의상, 분장실을 그대로 옮겨놓고, 화장대, 액세서리까지 다 전시해두었더라. 마지막 공연을 도쿄돔에서 했는데, 그때 찍은 필름을 기념관에서 항상 틀어놓고 있다”고 했다.
 
 
  “가수가 국민들 관심에서 사라지면 그게 은퇴”
 
사진=이신영 씨영상미디어 기자
  — 노래할 때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순수한 그대로를 노래해야 오래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는데, 참 새겨들을 만합니다.
 
  “제 인생관이 노래도 인생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살자입니다. 쑥스럽지만 저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생각해요. 딸들 결혼해서 잘살고 있고, 아들도 대학에서 학생들 잘 가르치고 있고요. 지난해 9월 남편과 함께 영국 유니버시티컬리지런던(UCL)에 진학하는 큰손녀를 데려다주고 왔어요(웃음). 노래도 기교를 부리지 말자고 다짐해요. 내가 순수하게 부르면 진실되게 들릴 것이란 믿음이죠. 요새 가수들 화려한 몸짓에 박자도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굴리고, 제치고, 꺾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노래가 천해져요.”
 
  박종문(朴鍾文) 전 대구가톨릭대 작곡과 교수는 《낭만음악》이라는 계간 음악잡지 1993년 겨울호 ‘대중가수 이미자를 생각한다’는 논문에서 이미자의 목소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미자가 부르는 뽕짝, 즉 트로트 가요는 그냥 유행가로 들어 넘길 수 없다. 목소리가 애잔하면서도 뭔가를 전달해주는 결코 수월하지 않은 단단함을 갖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우선 가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 가늘음은 날카로움이나 폭 좁음으로 연결되는 가늘음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끈끈함과 윤기 있는 폭 넓음으로 이어지는 가늘음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가치는 화려한 경력보다는 서민의 애환과 정서를 어루만지며 대중과 소통한 가수라는 점에서 더욱 빛난다.’
 
  — 1941년생으로 올해 63년째 노래하고 계십니다. 언제까지 노래하실 생각이신지.
 
  “가수가 국민들 관심에서 사라지면 그게 은퇴지요, 요란하게 은퇴 선언하고 떠날 필요 있나요. 이번 TV조선의 〈이미자 특별 감사콘서트〉는 가수로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어서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요즘 혼자 있을 때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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