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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어제오늘내일

민경우 대안연대 대표

“그때는 심장이 북한에 가 있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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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전술핵을 사용하겠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 “586운동은 1970~80년대 이슬람권의 復古的·反動的 민족주의와 유사”
⊙ “문재인 정권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정권”
⊙ “문재인은 이렇다 할 운동 경력이 없는데, 운동권 이념을 과잉 投射한 경우… 운동권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 더 운동권스럽다”
⊙ “北,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로 생각하고 下待… 文 정부에 거의 관심 없었을 것”
⊙ “대안연대는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일관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민단체 될 것”
⊙ “2000년대의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는 1980년대 사회주의의 계승”

민경우
1965년생.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現 민경우수학연구소장, 대안연대 상임대표
사진=대안연대 제공
  2016~2017년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탄핵 사태의 와중에서 우파(右派) 시민사회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일부 언론은 이명박(李明博)-박근혜 정권 시절 청와대와 전경련, 국가정보원, 우파 시민단체들 간의 커넥션(?)을 공격했다. 많은 우파 시민운동가들이 망신을 망했고, 해당 업무를 수행했던 이들 중에는 사법(司法) 처리된 사람도 있었다. 많은 우파 시민단체들이 간판을 내리거나 숨을 죽였다. 시민단체가 권력이나 재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 적절한 일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정권을 잡기 전부터 우파 시민단체들을 때려잡은 결과 문재인(文在寅) 정권은 시민단체의 비판으로부터 한동안 자유로울 수 있었다. 거리를 누비던 ‘태극기 부대’는 ‘극우(極右)’로 몰려 고립되었고, 좌파 시민단체들은 비(非·Non)정부단체가 아니라 친(親·Near)정부단체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시민단체들이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계기는 2019년 9월의 조국(曺國) 사태였다. 문재인 정권의 위선(僞善)과 독선(獨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사건을 계기로 종래 보수(保守) 혹은 우파 시민단체와는 결을 달리하는 시민단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미래대안행동(미대행)도 그중 하나였다. 면면이 화려했다. 민경우 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사무처장, 오세라비 작가, 김경율 전 참여연대 공동집행위원장, 유재일 정치평론가, 유선주 전 공정거래위원회 심판관리관,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대부분이 이른바 ‘진보 진영’이라는 쪽에서 활동해온 인사들이었다.
 
 
  국정원 院訓石 철거 주장
 
민경우 대표(오른쪽)는 4월 5일 국정원 앞에서 정광민 전 10·16부마항쟁연구소장과 함께 신영복 글씨체 원훈석 철거 요구 시위를 벌였다.
  특히 눈길을 끈 사람은 민경우 공동대표였다. 이름이 귀에 익었다. 1995년 중후반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으로 해마다 8월이 되면 매스컴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끄는 미대행이 조국 사태, 윤미향 파문, 라임 사태, LH공사, 코로나19 방역(防疫) 실패, 탈(脫)원전, 대장동 의혹 등 문재인 정권의 비정(秕政)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곳에 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과 연결되는 문재인 정권의 평화철도 사업이나 차이나타운 조성 사업에 반대하고 미국 중심의 반중(反中) 동맹인 쿼드 가입을 촉구하기도 했다. 지난 4월에는 신영복 글씨체로 되어 있는 국정원 원훈석(院訓石) 철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과 1인 시위를 벌였다.
 
  6·25 참전용사인 윌리엄 웨버 예비역 미(美) 육군 대령이 타계(他界)한 직후인 4월 27일 민경우 대표는 인터넷 매체 ‘넥스테이지(www.nextage.co.kr)’에 ‘UN day를 회고하며’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그는 “북핵, 미중 대치, 우크라이나 사태 등에서 한국은 자유와 개방의 가치 아래 여러 우방국과 연대해야 하는 중차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면서 “그러하다면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건립과 한국전쟁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던 UN을 되살리는 것은 80~90년대 민주화 시기 우리가 잃어버렸던 자유의 가치를 되살리는 길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생각 바뀌기 시작”
 
민경우 대표(중앙 왼쪽)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차례 구속되어 4년 2개월간 복역했다. 2005년 출소하는 모습. 사진=조선DB
  이쯤 되면 안보와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전통적 우파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것이 민경우 대표 인터뷰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다. 사실 기자는 민경우 대표가 작년 10월 펴낸 《86세대 민주주의》를 읽은 이후 줄곧 언젠가 그를 인터뷰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다.
 
  ― 국정원 원훈석 교체, 유엔 데이 복원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을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생각이 완전히 바뀐 것 같습니다.
 
  “원래 1990년대 중반부터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 2008년쯤에는 생각이 거의 바뀌었고, 2012년에는 운동 현장을 떠났어요. 사상과 역사관은 그렇게 바뀌었지만 조국·윤미향 사태가 없었으면, 적극적인 활동을 하려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조국·윤미향 사태는 일종의 도덕적 충격 같은 것이었습니다.”
 
  ― 1990년대 중반이면 한창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인데, 그때부터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고요.
 
  “범민련의 이념 노선은 한국이 봉건적·농업적 사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저는 그러한 인식과 충돌하는 현상들을 많이 경험했어요. 1990년대 중반의 한국 사회는 매우 도시적이고 자본주의적이었으니까요. 대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칵테일 사랑’ 같은 노래를 듣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볍고 감미로운 가사, 발랄한 대학생들…. ‘저런 노래가 만들어진 시대와 통일운동이 맞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반대 투쟁 때 도심에 나가서 쌀 개방에 반대하는 선전전(宣傳戰)을 벌였지만, 시민들은 거의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주사파(主思派)와 범민련의 이념 노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뜻밖이었다. 해마다 ‘통일축전’을 하겠다면서 불법적으로 북한 측 인사들과 접촉하고 그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차례 구속되어 4년 2개월간 복역했던 골수 주사파가 그 시절에 그렇게 흔들리고 있었다니….
 
 
  SERI 보고서가 준 충격
 
  1990년대 중반 대학가의 발랄한 문화가 그에게 감성적 충격을 주었다면, 지적(知的) 충격도 있었다.
 
  “2006년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이 펴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읽었어요. 당초에는 그걸 비판하기 위해 읽기 시작했는데 ‘수출지향적 공업화’와 ‘내포적(內包的) 공업화’를 딱 구별하면서, 한국 경제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보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미FTA 반대투쟁 당시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 정책팀장으로 일하면서 여러 가지 보고서를 봤는데, 특히 삼성경제연구소(SERI) 보고서의 한국 경제에 대한 진단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갖고 있던 역사관·세계관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됐고, 그 반성은 다시 그렇게 산업화된 한국을 만들어낸 뿌리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 1990년대 중반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면서 왜 그 이후로도 10여 년이 넘도록 운동권에서 떠나지 못한 겁니까.
 
  “경로의존성(經路依存性)이라고 해야 하나? 한번 들어선 길에서 쉽게 돌아설 수 없는…. 저는 원래 신념과 의리 같은 걸 중시하는 편이었어요. 한번 믿은 신념이 있으면 그 신념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지요. 그 신념과 다른 삶을 산다는 걸 저는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NL 기질
 
  ― 기질적으로 NL(민족해방) 주사파였네요.
 
  “그렇습니다.”
 
  ― PD(민중민주·마르크스레닌주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까.
 
  “PD와 NL이 조금 달라요. PD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중심이고, NL은 역사학이 중심이었어요. 저는 원래 역사를 좋아하고 국사학과이기도 했던 데다가, 《해전사(해방전후사의 인식)》에 나타난 NL의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틀이 그때는 나름 저를 당겼던 것 같아요. 결정적인 것은 ‘애플’이라고 했던 서울대 서클 한국사회과학연구회 선배들이 좋아서였고요.”
 
  그와 연배가 비슷한 586정치인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에 정치권으로 진입, 지금은 중진 정치인이 되어 있다. 김민석, 이인영, 송영길, 우상호, 정청래, 안희정, 이광재, 임종석 등등.
 
  ― 꽤 오랫동안 운동 현장에 있었는데, 정치권으로 진입할 기회는 없었습니까.
 
  “간간이 제안이 있었어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당시 서울대 인문대학생회장이어서 정치권 사람들과 일을 같이했었는데, 그때 알게 된 분들이 제안을 해오기도 했고 2000년대 초중반에 민주노동당 쪽에서도 제안이 있었지요.”
 
  ― 만약에 정치하게 되었다면 그 연배 운동권 출신 중에서 누구와 비슷한 모습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민노당 내 NL 의원들과는 잘 안 맞았을 거예요. 저는 이론적이고 지적인 측면이 강한데 그들은 좀 우격다짐인 데가 있고…. 민주당 내 NL 의원들도 이론보다는 의기투합, 동료 간의 연대(連帶)를 강조해서 잘 안 맞았을 것 같아요. 아마 고(故) 김근태(金槿泰) 의원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범민련 남측본부
 
  ― 범민련 일은 어떻게 하게 됐습니까.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운동권이 여러 가지로 분화(分化)되는 가운데 NL의 절대다수는 민족해방이라는 과제는 유효(有效)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범민련에 대한 당국의 탄압이 심해서 관계자들이 연례적(年例的)으로 구속되는 상황이었고 범민련 일을 할 수 있는 청년 일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어요. 범민련 정도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신념을 가진 이가 거의 없는 상황이어서 노선도 그쪽이었던 제가 일을 맡게 된 것이죠.”
 
  ― 범민련 초기부터 참여했나요.
 
  “1기 문익환 의장 때는 참여하지 않았고, 2기 강희남 의장 때부터 참여했습니다. 처음에는 범민련이 그래도 상당히 대중성이 있다가 1993~94년부터 완전히 고립되기 시작하는데 그 시점이었습니다. 사무처장을 맡게 된 것은 1995년, 그만둔 것이 2005년이니 꼭 10년 동안 사무처장으로 일했지요.”
 
  ― 사무처장을 하면서 범민련 북측본부가 노동당 통일전선부(통전부) 산하 기구였다는 것을 몰랐습니까.
 
  “처음 1~2년 정도는 범민련 북측본부를 남한의 전대협이나 한총련처럼 실체(實體)가 있는 조직으로 착각했어요. 그러다가 조금 더 범민련에 대해 알게 되고 북한 측과 문서 교환을 하고 그러면서 통전부의 한 부서라는 것을 깨닫고 ‘아차’ 싶었습니다.”
 
  ― 범민련 시절 자신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한때의 사상적(思想的) 열병(熱病) 같은 거였다고 생각합니다. 직선제(直選制)가 되고 사회주의가 몰락했으면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럴 수 있는 역량, 풍토가 안 됐습니다. 과도하게 급진적 이념을 지속함으로써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최근까지 그 유제(遺制)가 남아 있는 것이 상당히 우려스럽습니다.”
 
 
  《진보의 재구성》과 청년유니온
 
  ― PD 운동권 출신들은 그래도 자신들의 준거점(準據點)이었던 소련이 붕괴하면서 생각을 바꾼 경우가 많았지만, NL 운동권 출신들은 그러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뭐라고 봅니까.
 
  “북한의 존재가 결정적이죠.”
 
  ―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2009년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썼는데, 누구의 말에 따르면 전혀 영향을 못 미쳤다고 하더군요. 청년유니온이라고 들어보았습니까?”
 
  ― 들어보기는 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요.
 
  “2008~2010년 NL 후배들 중에서 연세대나 전문대에서 운동하던 친구들을 설득해서 종래의 과격 노선에서 벗어나 등록금이나 청년실업 같은 경제적 운동으로 방향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게 청년유니온인데 2010~2011년경 벽에 부딪혔어요.”
 
  ― 그런 노력에 대한 운동권 내부의 반응은 어땠나요.
 
  “저는 NL 안에서 이론적 영향력은 상당히 있었지만, 조직적인 영향력은 없었어요. 느슨하게 공감한 사람들은 꽤 있었지만, 느슨했기 때문에 힘이 없었죠. 그래서인지 저쪽에서도 저를 배신자로까지 몰지는 않았어요. 다만 ‘민경우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말아라’는 정도의 지시는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NL에서는 잘나가는 강연자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강연 요청이 끊기더군요.”
 
  ― 이명박 정권 때까지 운동 현장에 있었는데, 광우병(狂牛病) 사태는 범(汎)운동권의 기획이었습니까, 우발적인 것이었습니까.
 
  “기획이 일부 있었고 그게 군중심리에 의해 대중에게 확산된 것이라고 봅니다. 기획에 의한 부분이 30%, 아주머니나 여고생들을 중심으로 확 커져버린 게 70% 정도…. 운동을 추진했던 사람들이 엄격한 자기 검열을 하고 도덕성을 가지고 컨트롤해줘야 하는데 그걸 안 했어요.”
 
  ―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광우병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으면 제동을 걸고, 확산되더라도 대중에게 ‘이것은 틀릴 수 있으니 조심해달라’고 얘기를 해야 했는데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어요.”
 
  ― 원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운동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으면 선전선동하고 확산시키는 것이 운동권 아닙니까.
 
  “저는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운동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약간 광기(狂氣)라고 할까, 옳고 그름을 떠나서 건수 하나 잡으면 확 그냥 일을 만들어가는 게 있었어요.”
 
 
  “586운동은 復古的·反動的 운동”
 
1990년 7월 26일 임진각 다리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범민족대회 북측대표환영단. 그들의 구호가 복고적 민족주의를 잘 보여준다. 사진=조선DB
  ― 1980년대 586운동의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그게 진짜 민주화운동이었다고 봅니까, 아니면 민주화의 외피(外皮)를 쓴 사회주의 내지 북한식 공산주의 운동이었다고 봅니까.
 
  “민주화운동의 바탕에는 민주화에 대한 학생들의 헌신과 열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저도 이런 생각을 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586들의 운동은 결국은 복고적(復古的)인 운동이었다고 봅니다.”
 
  ―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강철’ 김영환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지만, 호메이니로 대표되는 1960~70년대 이슬람권의 복고적 민족주의와 유사한 것 같아요. 도시화·자본주의화된 1980년대 중후반의 상황에서 직선제 개헌 이후 얼마든지 현대적인 민주주의를 향해 나갈 수 있었는데, 반동적(反動的) 민족주의로 나간 거죠. 김구(金九)를 존경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사회주의 북한과 연결되었고요.”
 
  ― 대선(大選) 이후 586운동권 퇴진론이 나오고 있고, 실제로 김영춘 전 민주당 의원은 ‘586의 역사적 소임은 끝났다’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연한 얘기인데, 너무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 무슨 의미입니까.
 
  “586 퇴진의 시대적 당위성(當爲性)은 있는데 그것을 뒷받침할 이념과 이론은 약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대체할 세력도 있어야 하는데, 지금 청년들의 행보 같은 걸 보면 586을 대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品性論은 鄕村 규약 같은 것”
 
  ‘586 정권’이라고 불렸던 문재인 정권을 상징하는 말은 ‘내로남불’이었다. 딸의 입시 문제로 국민들을 분노케 만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성(性)폭력으로 낙마한 안희정 전 충남지사, 대장동 의혹의 몸통으로 지목받고 있는 이재명(李在明) 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등이 모두 586세대이다. 5월 12일 보좌관 성추행으로 더불어민주당에서 제명된 박완주 의원도 성균관대 부총학생회장을 지낸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 NL이 중심이 된 전대협은 ‘품성론(品性論)’을 무척 강조했는데, 586 정치인들의 품성은 왜 저 모양이죠.
 
  “품성론은 현대적인 예의규범·도덕규율이라기보다는 농촌공동체의 향촌(鄕村) 규약 같은 거예요. NL의 지도자론에서 말하는 지도자도 현대적 리더라기보다는 전통사회에서의 리더 같은 느낌을 많이 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법률시스템, 도덕시스템에 대한 인식이 전혀 안 되어 있어요.
 
  예를 들어 향촌 사회에서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법이 아니라 평판에 의해서 처리하잖아요. 주사파들에게는 ‘법에 의한 규율’이라는 관념이 없어요. 그러니 무슨 일을 저지르고서도 ‘내가 뭘 잘못했어?’ 하는 식으로 나오고, 자기들끼리 덮어주려고 하는 것이죠.”
 
 
  “文 정권은 한국 역사상 最惡의 정권”
 
오세라비 미대행 공동대표가 2020년 8월 26일 정의연 수요집회 규탄시위에서 발언하고 있다.
  ― 문재인 정권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한국 역사상 최악(最惡)의 정권이죠.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정권도 다소 부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시대적 소명(召命)에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정권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갖고 있던 부정적 맹아(萌芽)들을 극대화(極大化)해서 그것의 위험성과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봅니다.”
 
  ―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를 들어 탈(脫)원전 같은 건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임대차 3법, 검경(檢警)수사권 조정 같은 것도 그렇고. 보기에 따라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남북 관계에서도 친중화(親中化) 측면은 위험한 일이죠.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강한 이념성을 갖고 있는데, 제가 볼 때는 유사(類似) 주사파 같아요. 주사파의 뿌리에는 농업공동체나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나오는 원시(原始) 상태 같은 것을 높이 평가하는 사고(思考)가 자리하고 있는데, 문재인 정권은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현실에서 밀어붙인 것 같아요.”
 
  ― 왜 그랬을까요.
 
  “저는 문재인 전 대통령 개인의 캐릭터도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봐요. 이렇다 할 운동 경력이 없는데, 어떤 시기에 운동권 이념을 과잉 투사(投射)한 경우죠. 근래에 보면 운동권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 더 운동권스러워요. 그게 제일 문제죠.”
 
  ― 민주당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에 저렇게 매달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권력관계라는 차원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 이재명 전 후보가 검찰수사를 받을 수 있다는 실제적 문제입니다. 또 하나, 이 사람들은 판타지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검찰개혁’이라는 판타지
 

  ― 판타지요?
 
  “현실의 권력관계에도 있지만, 그 세계를 감싸고 있는 판타지가 있잖아요. 이를테면 마음의 불안 같은 것…. 저는 ‘검찰개혁’은 적어도 2000년대 초부터 형성되어왔던, 문재인 지지 그룹의 성역화(聖域化)된 판타지라고 생각합니다. 대선에서는 패했지만, 그 판타지를 어떻게든 관철하고 싶어서 ‘검수완박’을 밀어붙이고 있는 거죠.”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시죠.
 
  “1980년대 후반 운동권은 사회주의를 추구했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같은 것으로 갈아탔습니다. 이는 대의제(代議制)나 민주주의의 제도를 부인하고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사회주의의 변형이었습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2002년 미선이·효순이 사건, 2004년 노무현 탄핵 촛불 시위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에 대한 운동권의 비정상적 지지 같은 것이 사실은 사회주의 이념의 2000년대 버전인 거죠. 그때 형성된 정치질서와 문화가 지금까지 오는 것이죠. 좌익 포퓰리즘이죠.”
 
  ― 그런 흐름이 ‘검찰개혁’이라는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인가요.
 
  “‘검찰개혁’의 레토릭을 보면, 검찰은 이렇고, 경찰은 이렇고, 법원은 이렇고 하는 식으로 논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검찰은 원래 친일(親日) 잔재이고, 기득권 세력의 복마전(伏魔殿)이라는 식으로 몰고 가잖아요. 기본적으로 ‘검찰개혁’은 권력구조나 정치, 법률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세계관의 문제인 것이죠.”
 
  ― 그걸 판타지라고 표현한 것인가요.
 
  “그렇죠.”
 
  ― 대안연대는 미래대안행동 시절부터 대장동 의혹에 대한 수사를 촉구해왔습니다. 하지만 새 정부가 이에 대해 수사할 경우 야당이 된 민주당은 ‘정치보복’ 프레임을 씌우려 들 텐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수록 윤석열 정부가 유능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고, 2024년 총선 때쯤이면 새로운 리더십을 세울 수 있겠지요,”
 
  ― 그게 잘 될까요.
 
  “걱정스럽지요. 이재명·문재인 지지 그룹이 대선 결과에 승복할 정신상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좌파) 친구들을 봐도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사물을 보는 패러다임이 전혀 바뀌지 않았어요. 저런 상태로는 타협하고 화합하기 어렵습니다.
 
  또 이번에 검수완박 사태를 보니, 윤석열 정부나 국민의힘이 생각보다 취약하고 국민을 통합할 만한 역량이 부족한 것 같아요. 시대적 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근본적인 대안을 만들어낼 역량도 없어 보입니다. 앞으로도 상당한 혼란을 겪을 것 같습니다.”
 
 
  “對北화해 정책은 근본적으로 틀린 정책”
 
북한은 4월 30일 열병식에서 신형 SLBM, 극초음속 미사일 등을 선보이면서 核武力을 과시했다. 사진=뉴스1
  ― 과거 주사파 운동권, 범민련 출신으로서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 노무현·문재인 정권의 대북(對北)유화 정책을 어떻게 봅니까.
 
  “이 경우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평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은은 4월 25일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주년 열병식(閱兵式)을 하면서 ‘국가의 근본이익을 침탈하려 할 경우’ 핵무력(核武力)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어요. 전술핵(戰術核)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건데, 이런 상황을 막지 못한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의 대북화해 정책은 근본적으로 틀린 정책입니다.”
 
  ― 북한이 정말 전술핵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굉장히 오랜 기간 북한과 뭔가를 같이 했던 감각으로 보건대,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전술핵을 사용하겠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전술핵이 서울이나 인천에 떨어진다면, 이건 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죠.”
 
  ― 주사파는 북한이 한창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을 때에 ‘북한은 핵개발을 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고 주장했잖아요.
 
  “그게, 하, 정말, 이를테면…. 그때는 심장이 어디 있었나 하면 북한에 가 있었어요. 어떤 생각을 할 때에 북한의 입장에서 생각한 거죠. 2000년대 초 이후 주사파는 ‘북한이 핵을 가지기는 하겠지만 같은 민족인 남한에 쓸 마음은 없다’고 주장해왔지만, 그건 선전선동용으로 하는 소리였습니다. 웃기는 얘기죠. 북한은 올해 들어서 남한을 향해 전술핵을 쓰겠다는 주장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는데, 주사파는 이를 모른 척하고 있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韓美 동맹 강화”
 
  ― 주사파, 정말 골치 아픕니다.
 
  “제가 볼 때 남쪽의 여론 지형에서 주사파는 워낙 소수화(少數化)되어 있어서 별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은연중 주사파의 세례를 받아 민족 담론(談論)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를 정리하고 설득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데, 굉장히 오래 걸릴 것 같아요.”
 
  ― 어느 사이엔가 대북(對北) 정책·통일 정책은 좌파의 전유물(專有物)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보수는 어떤 정책을 펴야 할까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한미 동맹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한미 동맹이 느슨해지면 북한이 언제라도 남한을 향해서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거나 그것을 가지고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한미 동맹 강화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한미 동맹이 공고하면 다른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정권 교체로 한미 동맹 강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봅니다.”
 
  ― 문재인 정권은 임기 내내 종전(終戰)선언에 매달렸는데, 범민련을 했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이 종전선언에 관심이 있었다고 봅니까.
 
  “북한은 문재인 정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을 걸로 봅니다. 제가 과거 북한과 접촉했을 때 느낀 것인데, 북한은 남한을 하대(下待)합니다.”
 

  ― 하대요?
 
  “북한에는 자기들은 승전국, 혁명 세력이고,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라는 굉장히 뿌리 깊은 인식이 있어요. 거기서 남쪽 사람들을 하대하고, ‘너희는 우리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풍토가 나옵니다.”
 
  ― 그게 피부로 느껴지던가요.
 
  “범민련은 친북(親北) 단체니까 그나마 예의 바르게 잘해준다고 하는 데도 그런 게 느껴졌어요. 그런 태도가 문재인 전 대통령을 대하는 데서도 나타난 것이죠. 문재인 전 대통령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고 봐야 해요.”
 
  ―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우선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군이 몰리는 것을 보면서 군대까지도 자유주의 세계의 시스템이 우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하나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30년간 유지되어온 세계 질서가 변화하게 됐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그 변화는 우리에게 긍정적일까요, 부정적일까요.
 
  “저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더욱 견고해지고 확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유라시아 대륙에서 중국·러시아·북한의 입지는 좁아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긍정적인 일이죠.”
 
 
  호남과 40, 50대
 
  ― 이번 대선에서 지역감정이 좀 덜해지려나 싶었는데 여전한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은 ‘호남과 수도권 40, 50대의 연합’입니다. 5·18에 뿌리를 둔 호남 지역 정치와 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둔 40, 50대가 연합했고, 여기에 20대 여성들이 가세한 것이죠. 특히 호남의 친위대(親衛隊) 역할은 매우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 무슨 의미입니까.
 
  “2020년 추미애-윤석열 갈등 이후 약진한 호남 출신 검찰 간부들, 국회의원 등 호남 엘리트들이 친위대를 구축(構築)해서 권력을 옹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은 매우 우려할 만한, 비극적인 일이죠. 그건 어용(御用)이잖아요. 민주화의 성지(聖地)라는 호남 엘리트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호남이 민주화 세력으로서의 역사적 소임(所任)을 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 대선 유세 당시 광주(光州)에 복합쇼핑몰 하나 없다는 사실이 충격을 주었죠.
 
  “옛날부터 호남에 갈 때마다 너무 낙후(落後)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민주화의 상징 도시로서 문화적·역사적 자원이 당연히 패기 있고 활기 있는 경제와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와 배치(背馳)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우울했습니다.”
 
  ―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호남과 40, 50대 중에서 더 위험한 세력은 40, 50대라고 봅니다. 수학 선생으로 호남 출신 애들도 많이 가르쳐 봤는데, 그들은 ‘민주화의 상징인 호남 출신’이라는 정체성(正體性)보다는 ‘첨단 한국의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이 훨씬 더 강해요. 지역감정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고 봅니다. 위험한 것은 40, 50대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운동 끝난 후에 민주화운동가가 훨씬 많다”
 
미래대안행동은 2021년 5월 강원도청 앞에서 중국의 一帶一路 사업과 연결되는 평화철도 사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 50대는 그렇다고 쳐도, 5·18 광주나 전두환(全斗煥) 시대를 직접 겪지도 않은 40대는 왜 그렇게 꼴통일까요.
 
  “사물을 보는 해석틀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가 우스갯소리로 ‘민주화운동 시절보다 민주화운동이 끝난 후에 민주화운동가가 훨씬 많다’고 하더군요. 독립운동이 끝난 후에 독립운동가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나왔던 것처럼 말이죠. 유튜브를 보면 30, 40대가 민주화에 대해 매우 장황하고 비장하게 얘기를 하는데 그 친구들은 실제로 민주화운동을 겪은 세대가 아닙니다.”
 
  ― 역시 전교조의 영향일까요.
 
  “민주화 담론이 한번 주류(主流)를 형성하고 나니 그에 따라서 경험하지 않은 아랫세대로 파급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 이걸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야죠. 제가 유엔 데이 얘기를 꺼낸 것도 그래서입니다. 뇌과학에 의하면, 사람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패러다임에 맞춰서 세상을 본다고 합니다. 유엔 데이를 다시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을 자유와 국제주의의 관점에서 보도록 하면 민족주의 관점에서 봤던 역사를 자연스럽게 성찰(省察)하게 될 것입니다.”
 
 
  “전두환·노태우, 功過 있다”
 
  ― 4·19의 역사적 의의(意義)에 대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었지만, 5·18에 대해서는 여전히 뜨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민 대표는 약간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어떤 맥락에서 그렇다는 거죠.”
 
  ― 이를테면 5·18 가짜 유공자 시비 같은 걸 두고 ‘그들만의 리그’ 아니냐는 시각이 있죠.
 
  “저는 5·18도 4·19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좌우 모두 민주화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공적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기념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라도 너무 과도하게 5·18을 기념하거나 유공자들을 예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오히려 5·18의 정신을 갉아먹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작년 말 한 달 사이에 노태우(盧泰愚)·전두환 전 대통령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만감이 교차했어요. 저는 젊은 시절 전체를 ‘5·18 진상 규명’ ‘전두환·노태우 구속’을 외치면서 보냈어요. 1997년에 저는 두 사람과 같은 감옥에 같이 있었어요. 두 사람이 사면(赦免)을 받아 출소(出所)할 때 저는 샤우팅(shouting)을 했어요.
 
  두 사람 모두 공과(功過)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이 사실 그런 거죠. 5·18은 그들의 과(過)이지만 전두환 정권의 고도성장, 노태우 정권의 사회복지 및 시스템의 정비, 남북 관계 정비 등은 공(功)입니다. 그들의 공적도 올바로 재평가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을 한 방향으로만 몰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래대안행동에서 대안연대로
 
미래대안행동은 택배 대리점주의 죽음을 부른 택배노조와 민주노총 규탄집회를 여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조국 사태 이후인 2020년 2월 창립된 미래대안행동은 초기에는 주로 옵티머스, 라임 사모펀드 비리 등에 대해 비판해왔다. 이후 페미니즘과 탈원전, 코로나19 방역 등과 같은 정책 실패, 윤미향과 정의연 문제 같은 좌파 진영의 내로남불 행태, 세무사 시험 논란 등 불공정·부패 문제, 그리고 중국의 팽창과 내정 간섭적 행태, 쿼드 가입 문제와 같은 외교·안보 문제 등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지난 4월 7일 미래대안행동은 운영위원회를 열어 명칭을 대안연대로 바꾸고 조직 체계를 개편했다. 공동대표를 맡았던 오세라비 작가와 김봉수 성신여대 교수는 공동대표직을 내려놓고 고문으로 물러났다. 대신 미래대안행동의 주요 사업인 ‘세금기생충박멸단’ 단장으로 활동해온 서민 단국대 교수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민경우 대표는 계속 상임대표직을 맡기로 했다.
 
  ― 미대행의 명칭을 대안연대로 바꾸고 조직 체계를 개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미대행은 조국 사태에 대한 도덕적 분노에서 출발, 정권 교체를 중심으로 모인 단체였습니다. 저는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양심적이고 시민적인 이해관계를 올곧게 대변하는 시민단체, 누구에게나 공명정대하고 일관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민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정권 교체 후에 새 출발을 하자고 제안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서 이름과 체계를 개편하게 된 것입니다.”
 
  배석했던 김달현 사무처장이 첨언했다.
 
  “원래 1기 미대행은 정권 교체를 위해 많은 분이 모였기 때문에 스펙트럼이 넓었어요. 대선 후 정권 교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분은 자기 갈 길을 가시고, 건전한 시민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대안연대로 남게 된 것입니다.”
 
 
  “2000년대 한국 정치, 주사파에 뿌리”
 
  ― 대안행동이 건전한 시민단체로서 지속가능성이 있다고 봅니까.
 
  “노선에 있어서 민주당에 반대하면서도 국민의힘에는 참여하기 어려운 보수 우파의 양심적인 시민 풀(pool)이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기반으로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물적 기반이 좀 필요한데 유튜브 등을 통해서 시민후원 같은 것들이 꽤 들어오더군요.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에 3~4년 안에 대안연대가 상당히 공신력(公信力) 있는 시민단체로 부상(浮上)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참여하고 있는 분들을 보면 대개 전에 좌파였던 분인 것 같더군요. 보수적인 분들은 없나요.
 
  이때 김달현 사무처장이 말했다.
 
  “저는 원래 보수 쪽에서 시민운동을 하다가 합류했습니다. 간사들도 색채가 원래 보수 우파 성향인 분들입니다.”
 
  ― 《86세대 민주주의》를 보니 민주화운동사연구소를 만들고, 2000년대 이후의 운동사도 정리하겠다고 했더군요.
 
  “작년 하반기에 성찰과미래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1990년대까지의 주사파 연구는 김영환씨나 구해우씨에 의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의 주사파 연구가 2000년대의 운동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안 되어 있습니다. 2000년대의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는 1980년대 사회주의, 인민민주주의의 계승입니다. 2000년대 한국 정치 상황은 사실은 1980, 90년대 주사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그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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