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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탄생 120주년 시인 백기만의 생애

시집 한 권 없이 잊힌 抗日 민족시인

글 : 박상봉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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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학 초창기 《금성》(1923) 창간… 不逞鮮人의 저항시인
⊙ 경북영화협회(1945)·경북문학협회(1956) 창립… 신문사 주필, 사회당 경북도당위원장 활동

박상봉
1958년생. 1981년 동인지 《국시》 활동, 1990년 현암사가 발간한 《오늘의 시》 선정 / 시집으로 《카페 물땡땡》 《불탄 나무의 속삭임》. 현재 문화산업 기획자이자 중소기업 성장 컨설턴트로 활동 중
백기만 시인. 사진=박상봉 제공
  [편집자 註]
 
  《조선일보》 1969년 8월 20일 자 1면 ‘만물상’ 코너에 목우(牧牛) 백기만(白基萬)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이 짧게 실렸다. “씨는 시인보다도 차라리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서의 기골로 그 면목이 더 그리운 고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시계를 되돌려 《조선일보》 1925년 4월 20일 자 3면에 백기만의 시 ‘갈매기 날던 저녁 하늘이’, 같은 해 5월 21일 자 3면에 시 ‘갈매기’가 실렸다. 소네트 형식의 시를 소개하면 이렇다. ‘바다를 그리는 것은/ 갈매기!/ 당신을 그리는 것은/ 나의 맘// 오- 님이여 나는/ 당신의 바다 같은 가슴이 그리워/ 애달프게 떠돌며 감돌아드는/ 이름 없는 한 마리의 갈매기외다.’
 
  《조선일보》 1934년 7월 11일 자 7면에 실린 당대 문인들의 〈한글 철자법 시비에 관한 성명서〉에 김동인·이광수·채만식·염상섭·이은상·임화·백철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 77명의 이름과 함께 백기만의 이름도 확인된다.
 
  백기만은 대구 3·1만세운동을 주도한 항일 민족지사이자 초창기 한국 근대문학을 일군 개척자였다. 한국 근대문학의 요람인 《금성(金星)》(1923)을 창간했고, 당대 이상화(李相和·1901~1943년), 현진건(玄鎭健·1900~1943년), 이상백(李相佰·1904~1966년) 등과 교유하며 프린트판 동인집을 펴내기도 했다. 이상화가 죽은 뒤에는 대구 달성공원 내 상화시비 건립을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해방 후 대구 지역 언론사 주필, 논설위원으로 활약했고 4·19 후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뒤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1969년 8월 7일 세상을 떠났다.
 
  백기만 탄생 120주년을 앞두고 김용락·박상봉 시인 등이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마음시회)을 펴내는 등 한국문화분권연구소를 중심으로 시인 백기만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대구 지역에서 백기만 시인의 재조명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최근 발간한 《백기만과 씨뿌린 사람들》(마음시회 간).
  1902년 대구 남산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백기만은 대구고보(大邱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대구고보 시절 이상화·현진건·이상백 등과 교우관계를 가지면서 그들과 함께 문예 동인지 《거화(炬火)》(1917)를 발간하는 등 일찍부터 시적 재능을 드러냈다.
 
  그런가 하면 3·1운동 당시 이상화·이곤희(李崑熙)·허범(許範)·하윤실(河允實)·김수천(金洙千) 등과 함께 대구지방 만세시위를 모의·주동하여 항일 민족시인으로서의 실천적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백기만은 《상화와 고월》(청구출판사·1951)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 역사적 대사건을 대구에서는 2일 저녁에야 알게 되었다. (중략) 3일 아침 일찍이 상화를 찾았다. 나는 ‘파리 만국회의에서 민족자결이 결정된 까닭에 서울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데 대구에서도 호응하여 성세(聲勢)를 올려야 하지 않겠나’ 하고 걱정하였다. 상화는 ‘호응해야지 호기를 놓쳐서야 될 말인가. 그러나 독립운동은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인데 학생들이 일어나지 않고는 가능성이 없는 일일세’ 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 생각하다가 ‘자네가 고보학생의 동원을 책임지겠다면 계성은 내가 연락할 수 있겠는데’ 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상화한테서 기대하였던 말이 나오는 것이 반가워서 감격한 어조로 ‘책임지지! 고마우네’ 하고는 덥석 상화의 손을 잡아 부서져라 힘껏 쥐었다.〉(146~149쪽)
 
 
  대구 3·1만세운동 이야기
 
대구고보 시절의 백기만. 그는 대구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렇게 해서 백기만은 4학년 허범을 찾아가 동의를 얻어내고는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연락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2학년의 하윤실(河允實)과 1학년의 김수천(金洙千)에게도 상의하여 동참할 것을 약속받았다.
 
  그런 중에 6일 오후 이만집(李萬集) 목사가 상화의 사랑으로 사람을 보내어 8일이 큰 장날이니 그날 오후 1시 정각에 큰 장 복판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시위행진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문의해왔고 상화 등이 이에 찬성하였다. 7일에는 상화가 선전문의 등사를 혼자 맡아서 하였고 백기만은 이곤희·허범·하윤실·김수천 등과 함께 300매의 태극기를 박아내었다. 이때 만든 태극기를 백기만은 8일 아침 보자기에 싸서 등교하였다. 그러곤 4학년 교단 밑에 숨겨두었다가 나눠줄 생각이었다는데 그날의 거사를 짐작한 학교 당국의 감시 때문에 끄집어낼 기회가 없어 시위장소로 출발할 때에는 그대로 버려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훗날 확인한 ‘3·1운동 판결문’을 보면 백기만은 당시 대구고보 3년생으로 1년 징역을 선고받았다가 2심(복심법원)에서 3년 집행유예로 출소(5월 31일)하게 되었다. 전도가 창창한 18세 학생이라는 점이 참작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출소는 하였으나 그는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행동에 심한 제약이 따랐다. 그래서 1919년 8월 상경하여 한때 백운산(白雲山)으로 이름을 바꾸어 행동하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쟁쟁한 명사들을 사귀게 되어 이돈화(李敦化)·정우영(鄭又影)·현진건·권애라(權愛羅) 등과 함께 웅변회를 조직하고 웅변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에 입학하여 불문학을 지망하였다. 여기서 양주동(梁柱東)·손진태(孫晋泰)·유엽(柳葉) 등과 어울려 등사판의 회람잡지 《알》을 펴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곧이어 우리 근대문학사에 나타난 최초의 본격적 시 전문지였던 《금성》을 창간하는 준비작업인 셈이었다.
 
  1923년 11월 10일자로 동인지 《금성》이 창간되자 문단은 이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비록 대학 예과 과정 또는 학부 저학년에 재적 중이기는 했으나 《금성》 동인들에게는 선구적인 위치에서 문학을 전공 중이라는 생각이 빚어낸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부심은 그들에게 선행(先行)한 유파, 집단보다 그들이 우위에 서 있다는 긍지와 함께 자신들이 진행하는 일들이 탁월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정열·의욕 등을 낳게 했다. 말하자면 이런 점에서 한때 기세를 떨친 《백조(白潮)》 동인의 물결이 퇴조한 직후 정체된 문단 일각에 환기를 불어넣을 수가 있었다.
 
 
  선행한 유파보다 우위에 있다는 긍지
 
  《금성》 동인들은 아주 개성적인 활동을 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금성》 이전의 문예 동인지들을 보면 그 구성원들 사이에 적지 않은 교류 및 이동 현상이 나타난 데 비해 《금성》 동인의 경우 독자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통권 3호가 간행되는 동안 비교적 수준이 고른 작품들을 수록하였다.
 
  《금성》 창간호에 백기만은 ‘꿈의 예찬(禮讚)’ ‘새사람’이라는 시와 전래동화를 작품화한 동요시 ‘청개고리’를 수록하는 한편 타고르의 시를 번역, 소개하였다.
 
  모든 물체와 모든 현상을 있게 하신 창조자여!
  나는 지금 인생의 환이고 또 꿈에서 깨어 그 꿈을 그리며
  내 인명을 받은 후 처음 경호한 마음으로 당신을 대합니다.
  그리고 내 영은 끝도 모르고 한도 없는 그의 춤추는 놀이터로
  고요히 격동치는 한밤의 그윽한 곡조를 따라 눈물에 흘러갑니다.
 
  -백기만의 ‘꿈의 예찬’ 중 일부

 

  시의 행간은 비애에 깊이 젖어 있다. 이때 비애는 일제 치하에서의 피압박 민족이 겪는 당시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현실을 떠나 이상의 세계로 가려는 낭만주의적인 정신을 보이고 있지만, 그 낭만주의적인 주조 속에는 유토피아적 세계로의 탈출을 꿈꾸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다.
 
  창간호는 50쪽에 불과했지만 110쪽으로 늘어나 발행된 《금성》 제2호는 다음 해 정월달에 나왔다. 백기만은 ‘구름과 물결’ ‘적고 큰 사람’이라는 창작시와 타고르의 ‘신월에서’라는 번역 시를 수록하였다.
 
  백기만의 번역 시는 나중에 김억(金億)의 번역과 비교되어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번역이 어색한 직역투였다는 점에서의 난점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금성》 동인의 해외 시 수입, 소개의 태도는 원문에 충실하고 이중번역, 삼중번역이 아니라는 나름의 자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국내 최초의 시인 選集 발간
 
백기만 시인이 펴낸 여러 간행도서.
  《금성》 동인으로 참가해오던 백기만은 1923년 서울 통신중학관에서 《조선통신 중학강의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압박받는 민족에게 긍지를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후진들의 교육에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산촌모경’(1924), ‘은행나무 그늘’(1925) 등을 발표하였고 월간지 《여명》(주간 김승묵)의 문예부를 담당(1925)하는 한편 《조선시인선집》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조선시인선집》(1926)은 신시 운동의 기점이 되는 1919년 이래로 활동한 국내 시인 28인의 작품을 수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인선집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시인은 이광수·김억·주요한·황석우·오상순·남궁벽·조영희·변영로·홍사용·노자영·박종화·양주동·이일·백기만·오천석·김형원·박영희·이상화·이장희·김동환·김명순·김기진·유춘섭·이은상·김여수·박팔양·손진태·윤도순·조운 등이었다.
 
  3·1운동의 주모자로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이후로 줄곧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일경(日警)의 감시를 받았던 그는 걸핏하면 가택수색을 당하였고 하는 일마다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반듯한 직장 하나 제대로 마련할 수조차 없었던 그에게 경북 김천에 ‘금릉학원(金陵學院)’이 설립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금릉학원’은 김천 일원에서 민족주의자로 덕망을 얻고 있던 고덕환(高德煥) 선생이 설립한 학교로 백기만과 같은 항일정신이 투철하고 민족적 긍지를 지닌 사람을 교사로 초빙하여 쓰고자 하였다.
 
 
  백기만 交遊錄
 
만주 시절의 백기만 시인(가운데). 사진=박상봉 제공
  ‘금릉학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백기만은 동료 교사 부인의 중매로 결혼도 하게 되었고 안정된 생활을 마련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을 뿐 일제는 민족주의 교육을 하는 등 불온하다는 이유를 들어 ‘금릉학원’을 폐쇄(1928)해버렸다.
 
  ‘금릉학원’이 폐쇄된 직후 향리인 대구에 내려와 지내던 그는 그해 여름 이장희(李章熙·1900~1929년)의 음독자살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의 놀라움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충격을 달래기 위해 그는 1929년 10월 이상화·오상순·서동진을 비롯한 여러 향우와 대구 조양회관(朝陽會館)에서 3일간 ‘고월(古月) 이장희 유고시화전’을 열었다. 전람회의 마지막 날에는 같은 장소에서 추모회를 하여 유족과 참석한 이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백기만은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각별하였다. 이상화·현진건·이장희 등과 자주 어울렸고 서울에서 하숙할 때는 이장희 등이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 오곤 하였다.
 
  그는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 이상화·박종화·김기진 등과 어울려 종로 뒷골목 다방골 홍등가를 헤맨 일이 한두 번 정도는 있었으나 술에 약했기 때문에 되도록 그런 자리는 피하려 하였다. 그의 성격은 청렴 담백하였고 항시 용모를 깔끔하게 하였다. 양복을 입을 때엔 나비넥타이를 즐겨 매었다고 한다. 절친했던 향우 이장희를 잃은 후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공백기를 가졌는데 이 기간에는 작품 발표도 전혀 없으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였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한때 만주로 가서 농장을 경영하며 그곳에 이주해 사는 농민들을 위해 야학에서 가르치고 운동기구 등을 보급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 문화·예술 및 정치적인 활동
 
《조선일보》 5월 21일 자 3면에 실린 백기만의 시 ‘갈매기’.
  1945년 마침내 해방되어 그는 비로소 젊은 시절에 꿈꾸었던 포부를 펼치고자 하였다. 장인환(張仁煥)·최화수(崔華秀)·김용상(金容尙)·이원식(李元式)·김해생(金海生) 등과 ‘경북영화협회(慶北映畫協會)’를 창립(1945)하는 한편 근로인민당 경북도당위원장(1947)이 되어 문화·예술 및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사회적인 혼란은 끊이지 않는 민족의 수난사와 함께 그의 개인적인 고뇌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그런 중에도 작고 시인의 회고록 《상화와 고월》을 출간(1951)하는 한편 《대구시보(大邱時報)》 출판국장 및 논설위원, 《대구일보》 상무이사, 《영남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예술 행정에서도 역량을 발휘하였는데, 자생적인 단체 ‘경북문학협회’를 창립(1956), 관료적인 일에는 소극적이기 마련인 문학적 풍토를 쇄신하고 예술행사를 위해 섭외를 하는 일에 앞장서 대부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예컨대 ‘8·15 기념문학의 밤’(1945.8.19), ‘경북출신작고예술가추도회’(1957.12.21), 《문학계》(경북문학협회 기관지 제1집) 발간(1958), 《씨뿌린 사람들》(경북작고예술가평전) 편찬(1959), ‘시민교양강좌’ 개최, ‘8·15기념문화제전’(1959) 등을 꼽을 수 있다.
 
  백기만은 인생 여정이 파란만장하였던 만큼 다재다능한 천재성을 나타낸 사람이었다. 그와 어울렸던 사람들이 모두 타고난 인물들이었으니, 현진건·이상화·이장희·이육사 등이 그러하고 《금성》 동인이었던 양주동·김동환 등과 박종화·오상순 등이 또한 그러하다. “천재는 천재가 알아보고 천재와 어울린다”는 말에 근거를 두고 얘기하자면 그 또한 천재가 아닌가.
 
 
  우울한 천재… 흔한 ‘문화상’ 하나 수상하지 못해
 
1963년 10월 백기만 시인이 ‘대구시민문화상’을 수상하며 오열하고 있다.
  그는 1960년 4·19 후 사회대중당의 공천으로 참의원에 출마(1960)하였다가 낙선한 이후로는 사회당 경북도당위원장(1961)으로 잠시 지냈을 뿐 병고에 시달리며 우울한 여생을 보냈다. 5·16 후 혁신계열이라 하여 혁명재판에 회부된 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뇌졸중으로 두문불출하였다.
 
  전 생애를 문화·예술에 바쳐 살아온 그가 그 흔한 문화상 하나 수상하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를 존경하는 후배 시인들이 모여 ‘금성 동인 회고 시화전’을 대구 동설로 은다방에서 열었던 적이 있었다(1961년 10월 11~25일). 시화전이 끝난 25일 오후 7시 시화 판매 이익금으로 “연차적 행사인 경북문화상마저 외면당한 시집 한 권 없는 항일 민족시인 목우에게”라고 적힌 금메달과 백미 한 가마를 전달했다고 한다. 이것이 세칭 ‘대구시민문화상’ 시상식이었다.
 
  그는 중풍으로 5년 동안 고생하다가 1969년 8월 7일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사후 53년에 이르는 오늘날까지도 유고 시집 한 권조차 엮이지 않고 있으며, 그가 남긴 위대한 업적과 헌신에 관해 본격적인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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