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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④ 맛과 멋, K-푸드

“한식의 특성은 생성의 美學, 융합의 味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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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지 드셨나요?’ 인사하는 민족… 동남아 국가도 ‘식사 인사’
⊙ ‘먹는다’는 시대의 문화와 사랑 담아… ‘한 골 먹었다’ ‘살맛 난다’ ‘죽을 맛’ ‘싱거운 놈’
⊙ 동물과 구별된 인간의 속성… ‘함께 사는 것’ ‘함께 밥을 나눠 먹는 것’(conviviality)
⊙ “화합과 함께 살아가는 우주적 메시지를 담은 음식이 탕평채(蕩平菜)”
⊙ “한국 음식은 대개 삭히고 끓이고 무치고 섞는 방법으로 요리”

李御寧
1933년생. 서울대 국문학과·同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경기고 교사, 이화여대 교수,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논설위원,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사색에 잠긴 이어령 선생. 사진=김용호 작가
  연초 이어령(李御寧)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를 만나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감이 가득한 짐보따리 하나씩을 풀어냈다. 잊었던 옛 시문(詩文)에서 만나듯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우리는 지난 1월 7일과 10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만났다. 선생은 육체적 난항(難航)을 헤쳐나가며 혼신을 다해 영적(靈的)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말 마디마디는 기울기의 변곡점처럼 살아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식구(食口)라는 말은 가족을 뜻합니다. 직역하면 먹는 입이죠. 가족이 많다란 말은 곧 먹는 입이 많다는 의미가 돼요.
 
  ‘너희 집 식구가 몇이냐’고 물으면 우리 집 식구 수를 손꼽아 대답하는데 전혀 이상하지 않죠. 도시 내 사는 사람, 나라 전체의 국민들도 사람의 입, 인구(人口)라고 하고, 호구(戶口) 조사라고 합니다.
 

  사람을 셀 때 뇌가 있는 머릿수(頭)로 계산하여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라고 하면 이상합니다. 그러나 한 입, 두 입이라고 하면 어색은 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지요.
 
  한자문화권에서는 포로나 노비 그리고 소와 같은 가축도 식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입으로 수를 따져 생구(生口)라고 불렀어요. 광개토대왕비에는 396년 백제가 고구려에 대패해 생구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런데 가축 가운데 소만 생구라고 불렀지, 먹고 자기만 하는 돼지나 개는 생구라고 하지 않았어요. 땀으로 함께 일하고 한솥밥 먹는 대상에게만 ‘입 구(口)’를 썼던 겁니다.
 
  중국 《한서(漢書)》에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民以食爲天)’는 맹자의 말이 나옵니다. 먹는 것으로 지고한 하늘의 뜻을 배우고 섬긴다는 말이지요. 먹는 것은 물질이 아니고, 경제도 생리도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고 인사하는 민족
 
동남아 국가의 다양한 ‘진지 드셨습니까’ 인사들.
  이 대목에서 잠시 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먹는 입을 ‘생명의 문’으로 여겨서인지 먼 옛날 우리나라엔 밥집이 없었습니다. 밥이나 물, 공기 같은 생명을 사고파는 장사를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여겼어요. 대신 술집[酒幕]이라고 해놓고 밥을 팔았던 겁니다. 밥은 남에게 팔 수가 없어요. 거저주는 것이니까요.”
 
  곧이어 인사말에 담긴 ‘먹는 것’의 의미를 분석했다.
 
  “우리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었니?’ 하고 인사하는 민족입니다. 얼마나 가난하고 배가 고팠으면 남들이 ‘굿모닝’ ‘좋은 아침’이라 인사할 때 그렇게 인사했을까요?
 
  고학하던 대학 시절, 뭘 제대로 먹었겠어요. 아침밥 안 먹고 학교 가는 일이 많은데 친구가 ‘야, 밥 먹었냐’ 그러면 기분이 나빴어요. 어떻게 나 밥 굶은 거 알고…. ‘먹었다 왜?’ 하고 싸움이 나는 겁니다. (웃음)
 
  그런데 ‘진지 드셨냐’는 인사말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캄보디아 같은 동남아에서도 이런 인사를 한다고 해요.
 
  우리 민요에 이런 노래가 있었어요. ‘황새야 황새야 뭘 먹고 사니/ 이웃집에서 쌀 한 됫박 꿔다 먹고 산다/ 언제 언제 갚니/ 내일 모레 장 보아 갚지.’”
 
 
  지도에 없는 ‘고개’와 ‘섬’ 하나
 
  이야기꾼인 선생은 유머를 잃지 않았다.
 
  “지금은 잊혔지만 지지리 가난하던 시절, 자신의 처지를 황새에게 비유했지만 요즘 생각해보면 굶주림에 굴복하지 않고 먹는 것을 미학적, 철학적 단계로까지 끌어올린 민족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우리나라에 지도에 없는 ‘고개’와 ‘섬’ 하나가 있었다고 하지요. 하나는 ‘보릿고개’, 다른 하나는 ‘그래도’라는 섬. 한국인은 춘궁기 보릿고개를 넘기 어려웠지만 굶주림에 손들고 항복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정신으로, 쓰러지다가도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걸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섬 3348개에 없는 ‘그래도’라는 섬 덕택에 시련을 이겨온 한국인이지요.”
 
  선생의 유머에는 통찰이 담겨 있었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우리나라만큼 ‘먹는 맛’의 표현이 많은 나라도 없어요. 한국인에게 ‘먹는다’는 단순히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시대 문화와 사랑을 담았습니다. 또 한국 미학의 근본으로 꼽고 있는 ‘멋’이란 말이 먹는 ‘맛’에서 나온 말이라고 학자들이 말해요. 그러고 보면 미각언어가 발달한 것도 다 그런 데에 있어요. 아무리 언어가 풍부한 나라도 ‘쓰고’ ‘씁쓸하고’ ‘쓰디쓰고’ 또 ‘달고’ ‘달콤하고’ ‘달짝지근하고’를 구별하긴 어려울 거예요.
 
  세상을 살아가는 생사고락을 ‘쓴맛, 단맛 다 봤다’고 하잖아요. 슬픔도 기쁨도 어금니로 씹어 먹고 미각으로 맛보는 한국인에게 ‘먹는다’는 것은 짐승처럼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 깊은 뜻을 담았던 겁니다. 신바람이 나면 ‘살맛 난다’, 고통스러우면 ‘죽을 맛이다’고 하지요. 살고 죽는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우리는 먹는 맛으로 표현했어요.”
 
 
  3대 불가사의 ‘먹는다’
 
2002 월드컵 한국-독일 4강전을 광화문에서 응원하던 시민들이 경기가 끝난 후 태극기를 펴들고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음성은 낮았으나 말은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람의 성격을 맛으로 표현하는데 ‘싱거운 놈’ ‘짠 놈’ ‘매운 놈’이라고 하잖아요
 
  어디 그뿐인가요?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세계를 놀라게 한 3대 불가사의가 있었다고 하지요. ‘대~한민국’ 하고 손뼉치는 것, 새벽부터 전광판 앞에 앉아 있는 길거리 응원,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뭔지 알아요? ‘한 골 먹었다’는 표현이래요. 영어로는 ‘로스(loss)’인데 우리는 굳이 ‘먹었다’고 합니다.
 
  한국인처럼 ‘먹는다’는 말을 이렇게 다양하게 쓰고 있는 나라는 없을 것 같아요. 홍수환 선수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란 말도 유명하지 않나요.”
 
  ‘먹다’라는 표현은 그야말로 부지기수다.
 
  ‘밥을 먹었다’는 기본이고, 남의 재물을 부당하게 빼앗을 때 ‘곗돈을 먹고 달아났다’, 뇌물을 받았을 때 ‘뇌물을 먹다’, 수익이나 이문을 가지라는 뜻으로 ‘나머지 이익은 네가 다 먹어라’, 꾸지람을 듣고 ‘호되게 욕을 먹다’, 어떤 마음이나 감정을 품을 때 ‘마음을 굳게 먹다’, 공포나 위협을 느끼면 ‘겁을 먹다’, 해가 바뀌어 나이 한 살을 더할 때 ‘나이 먹다’, 일사병에 걸릴 때 ‘더위 먹다’, 봉록 따위를 받을 때 ‘녹(祿)을 먹다’ 등등이 있다.
 
  선생은 먹는 행위에 사회적, 철학적 의미를 투여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초등학교 1학년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문제를 냈어요. ‘사과 열 개 가운데 3개를 먹었다. 몇 개가 남았느냐’고. 한 학생이 계속 ‘세 개가 남았다’고 하자 선생님이 ‘세 개를 먹었다는데 왜 세 개가 남느냐’고 화를 내자 학생이 그러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 먹는 게 남는 거래요.’
 
  ‘먹는 게 남는 것’은 배고파서 먹는 게 아니에요. ‘먹는다’는 것은 내 안에 들어와 없어진다,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감(五感)을 거리로 따지면, 시각이 제일 멀리 있고 그다음으로 청각, 후각, 촉각인데 미각은 (내 안으로 들어온) 상대가 없어지는 겁니다.
 
  지금도 시골 잔치를 하면 온 동네 사람이 다 옵니다. 지나가던 거지도 한술 뜨고 가게 해요. 먹는 것에 우열이 있을 수 없고 다 평등하니까요.”
 
  선생은 미국의 심리학자 케네스 케이(Kenneth Kaye·1946~2021)의 이론을 소개하며 “먹는 것 이상의 사랑을 구하는 지구상 유일한 포유류가 인간”이라고 말했다.
 
  “‘먹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신진대사를 위한 생물학적 욕망을 의미하지 않아요. 미국의 심리학자 케네스 케이에 따르면 젖을 빠는 포유동물 가운데 젖꼭지를 문 채 잠시 멈췄다가 다시 빠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 젖을 먹다 말고 멈추는 걸까요?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해요. 가볍게 흔들어 달라는 신호라는 것이지요. 그것도 태어난 지 이틀도 안 된 아기가 말이지요.”
 
 
  共食
 
  ― 놀랍네요.
 
  “그러면 산모도 무의식적으로 아기를 가볍게 흔드는데 그러면 아기가 다시 젖을 빨아요. 이렇게 주기적으로 젖을 빨다 말고 멈추면, 엄마가 흔들고, 다시 빠는 독자적인 리듬을 만들면서 대화를 하는 것이지요.
 
  전문가들은 이것을 ‘엄마와 아기의 발레’라고 아주 멋지게 표현하는데 아기를 가볍게 흔들어주는 동작은 엄마와 아기만의 독자적인 리듬이 있는 발레 동작인 셈이죠. 먹는 것, 젖을 빠는 것을 통해 상대와 일체화하는 유대를 형성하는 겁니다. 먹는 것을 통해, 먹는 것 이상의 사랑을 구하는 지구상 유일한 포유류가 인간이지요.
 
  인간은 여타 동물과 달리 수렵과 채집을 통해 획득한 음식을 혼자 독식(獨食)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대개 가족과 함께 먹습니다.
 
  말하자면 ‘공식(共食·common meal)’이었던 셈입니다. 공식은 ‘가족·친족, 지역공동체의 성원이 모여 같은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일’을 의미하는데, 이때 음식은 사회적 단결과 친목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어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례나 축제 등 공동사회의 다양한 행사에 음식과 술이 빠지지 않았던 이유지요.”
 
 
  콘비비알리티와 聖餐式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속성을 연구한 이반 일리치 교수.
  선생에 따르면 미국 예일대 교수를 지낸 이반 일리치(Ivan Illich·1926~2002)는 콘비비알리티(conviviality·향연 혹은 연회)라는 키워드로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속성을 연구했다고 한다. ‘함께 사는 것’ ‘함께 밥을 나눠 먹는 것’이 콘비비알리티다.
 
  “상생하는 것, 같이 먹는 것, 그게 인간의 목적이고 사회의 궁극적인 목표죠. ‘먹는다’는 인간의 가치문제고 소통의 문제고,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거예요.
 
  그런데 함께 모여 같이 먹는 동물은 고릴라밖에 없어요. 짐승들은 같이 사냥은 해도 먹을 때는 서로 먹겠다고 싸웁니다. 인간이 왜 평화로운 짐승이냐? 함께 나눠 먹는 존재니까요. 나눠 먹고 함께 먹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해요.
 
  라틴어 코뮤니스(communis)에서 유래한 말로 코뮤니타스(communitas)라는 말이 있는데, 무상의 나눔을 서로 가질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가진 생활 공동체를 뜻합니다.
 
  또 커뮤니온(communion)은 어떤 일을 함께하는 친교 활동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성체인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 가톨릭의 성찬식(聖餐式)을 ‘The Holy Communion’이라고 하죠.
 
  가톨릭 미사에서 예수님의 성체를 신자들에게 나눠주고 먹게 합니다. 신자들은 그 성병(聖餠), 혹은 성체성사 때 쓰는 누룩 없이 만든, 얇고 동그란 제병(祭餠)을 입에 넣고 녹여 먹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초대(初代) 교회 때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성체는 효모를 쓰지 않은 딱딱한 보리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빈자와 약자 편인 예수님이 효모를 넣은 하얀 밀가루(小麥)빵을 먹었을 리 없었다는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은 모든 제사에 효모를 쓰지 않는 딱딱한 빵을 썼다. 그러니 초기 교회 신자들은 미사 때 딱딱한 빵(성병)을 씹어 먹었지, 요즘처럼 녹여 먹지 않았을 것이다. (조종건 목사의 ‘성체(聖體)로서의 빵’ 참조)
 
  “어찌 보면 딱딱한 빵을 입안에 넣어 녹여 먹기 쉽게 만들면서 교회가, 우리 신앙이 말랑말랑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요즘 먹거리 대부분이 먹기 쉬운 유동식(流動食)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문명사회가 과거의 거친 빵처럼 딱딱한 것, 어려운 것, 힘든 것에 어금니를 깨물고 도전하는 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지 고잉(easy going)’ 하고, 쉽게 살려는 유동식 문화에 젖은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과 가진 ‘최후의 성찬식’ 모습이다.
  다시 예수님의 성찬식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제가 기독교를 믿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마지막에 한 게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이었죠. 바로 먹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받아라. 이는 내 몸’이라고 하셨죠.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이 빵이고, 포도주가 피인 셈이지요. 예수님의 마지막이 먹는 것이라면, 인류의 시작도 먹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에덴동산에 있던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 말이죠. 성경이 선악과로 시작해 성찬식으로 끝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음악학교〉와 새까만 음표
 
존 업다이크의 소설 〈음악 학교〉와 카프카의 소설 〈단식 광대〉 표지.
  선생은 이 대목에서 두 편의 단편소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매우 흥미로웠다.
 
  “미국 소설가 존 업다이크가 쓴 〈음악학교(The Music School)〉라는 소설이 있어요. 이 소설은 부드러운 것을 녹여 먹는 성병(성체), 지금은 잊어버린 초대 교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교회가 씹어 먹지 않고, 입에 넣어 녹여 먹으면서 삶의 고난을 망각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잊어버리게 됐다는 의미지요.
 
  소설 속 주인공 알프레드 슈바이겐(Alfred Schweigen)은 음악학교에서 피아노 레슨을 시작한 8세짜리 딸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깁니다. 어젯밤 성찬식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태도 변화가 떠올랐던 겁니다. 미사 때 먹는 하얀 성체를 입에 넣어 녹을 때까지 물고 있으면 안 되고, 한 번에 씹고 삼켜야 한다는 의미를 되새긴 것이죠.
 
  어느 날 슈바이겐이 피아노를 치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상기된 얼굴을 한 딸이 음표로 새까만 악보, 도저히 눈으로 읽을 수 없는 어려운 악보를 치며 황홀경에 빠졌던 겁니다. 새까만 악보가 딱딱한 빵, 씹어 먹는 성체를 연상시키죠.
 
  사실, 먹는다는 것은 지상의 것, 세속적인 것일지 몰라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에서는 단식 주간이 있고 때로 금식을 합니다. 먹는 것은 육체의 것이니까 단식은 영적인 것에 가까운 행위지요.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고 부처님도 깨달음을 위해 단식하셨어요.”
 
 
  〈단식 광대〉와 표범
 
  선생의 계속된 이야기다.
 
  “왜 단식을 하셨을까요? 육체는 소멸되니까…. 오감 중에 후각이나 시각, 청각을 고등 감각이라 여기고, 촉각이나 미각은 하등 감각이라 여겼어요.
 
  카프카의 단편소설 〈단식 광대〉를 보면 배우 한 사람이 우리에 들어가 아무것도 먹지 않습니다. 앙상한 갈비뼈, 두 눈을 내리깐 단식 광대에게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씩 구경하러 올 정도로 열광합니다. 광대는 때로 짐승처럼 우리의 창살을 마구 흔들어대기도 했어요. 단식 광대가 40일 동안 단식쇼를 마치면 매니저는 단식의 성공을 자축하는 행사를 열고 음식을 먹입니다. 그리고 며칠 휴식 기간을 가진 뒤 다시 40일간의 단식 공연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전처럼 단식에 열광하지 않습니다. 자극적인 볼거리 앞으로 사람들이 점점 떠나갑니다. 그래도 광대는 예전대로 단식을 계속했고, 별 어려움 없이 단식에 성공했지만, 누구도 단식 일수를 함께 세지 않았어요. 결국 단식 광대는 굶어 죽고 맙니다.
 
  그러자 서커스 단장은 광대가 지내던 우리에 젊은 표범 한 마리를 집어넣어요. 오랫동안 적막했던 우리에서 맹수가 날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환호하지요.”
 
 
  ‘먹는다’와 밥의 의미
 
한국의 멋과 정이 느껴지는 넉넉한 고봉밥. 사진=국제교류재단 제공
  왜 사람들은 단식 광대를 떠나갔을까? 세속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빠져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선생의 답이다.
 
  “사람들은 광대가 단식하는 이유에 점점 흥미를 잃었고 단식 자체를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외면 속에서 단식 광대는 고립돼 스스로 굶어 죽었죠. 어쩌면 소설 〈단식 광대〉는 오늘날의 영적인 패배, 금욕적 이상의 소멸을 상징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선생은 ‘먹는다’의 깊은 행간, 콘비비알리티, 성찬식을 지나 ‘밥’ 이야기로 나아갔다.
 
  “원래 빵은 덩어리라 사람의 마음을 담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밥은 퍼주는 거잖아요. 밥을 퍼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따뜻한 밥, 고봉으로 퍼주는 밥을 떠올려봐요. ‘찬밥 신세’라는 말도 있잖아요. 밥의 온도와 퍼주는 그 모양에서 음식을 주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밥은 그때그때 먹을 사람을 위해 지어야 합니다. 먹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밥을 안칠 수 있나요? 어머니의 온기이며 기다림이 밥입니다.
 
  뜸을 들여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밥은 아무 때나 잘라 먹을 수 있는 싸늘한 빵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햇반’이란 상품도 나왔지만, 밥은 본질적으로 반(反)인스턴트 식품이지요.”
 
 
  고봉문화, 우주적 메시지
 
김치에는 오색(청·황·적·백·흑), 오미(신맛·쓴맛·짠맛·매운맛·단맛)가 들어 있다. 사진=조선일보DB
  선생은 “우리 조상들이 고봉문화, 나눔의 문화, 융합의 문화를 음식 속에 담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고 말했다.
 
  “밥 한 그릇에 담긴 한국인의 마음이 21세기의 식문화를 만드는 자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왠지 아세요? 우리는 음식에 화합과 함께 살아가는 우주적 메시지를 담았죠. 이게 탕평채(蕩平菜)라는 거예요. 조선 정조 때 사색(四色) 당쟁을 없애고 고루고루 인재를 등원했던 탕평책에서 따온 말인데 검은색(북인-석이나 김 가루), 푸른색(동인-미나리), 붉은색(남인-고기), 흰색(서인-청포)의 사색이 다 있어요. 먹으면서 당쟁을 넘어서는 조화로움을 꿈꾸었어요.
 
  사실은 이미 정조 때만이 아니라 한국 음식 자체가 오방색, 우주의 색을 담고 있어요. 김치를 보세요. 김치에도 오색(청·황·적·백·흑), 오미(신맛·쓴맛·짠맛·매운맛·단맛)가 들어 있어요. 신선로, 비빔밥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의 이야기는 한층 무르익었다.
 
  “이제 본격적인 한국 음식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람들은 음식을 요리의 결과인 명사로만 생각하지만 저는 요리하는 과정인 동사를 유심히 살폈어요. 예컨대 우리 민족은 나물을 많이 먹는 민족이기에 ‘무치다’ ‘데치다’ ‘비비다’ ‘캐다’ ‘뜯다’ 등과 같은 낱말이 많아요. 외국에선 그런 말이 없잖아요.”
 
  선생은 “음식이라는 결과에는 요리라는 과정이 따른다”며 “과정 없는 결과가 없듯 각 나라의 고유한 음식은 고유한 요리 방법에 의해 탄생한다”고 했다. “서양 음식이 굽고 볶고 튀기는 게 기본이라면, 한국 음식은 대개 삭히고 끓이고 무치고 섞는 방법으로 요리한다”고 강조하며 “한국적 맛의 비밀 또한 한국인의 이 고유한 요리 방식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선생은 기자에게 최근 간행된 《K FOOD: 한식의 비밀》(디자인하우스 刊)을 건넸다. 이 책에 실린 선생의 말을 일부 요약해 소개한다. -선생의 당부이기도 하다- 한국인의 맛에 대한 깊은 통찰을 느낄 수 있었다.
 
 
  밍밍하고 슴슴한 無味의 맛
 
  〈①한식의 첫 번째 비밀 : 밍밍하다 무미(無味)가 만드는 순환과 역설의 문화=한식의 맛은 짜고 달고 시고 맵고 쓴 오미가 끝이 아니다. 밍밍하고 슴슴한 무미의 맛이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밥맛이다. 밥은 맛이 아주 싱거워서 무(無)이며, 텅 빈 공허다. 그래서 빵처럼 밥 하나만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짜고 매운 여러 반찬과 어울리면 밥은 새로운 맛을 띠게 된다.
 
  밥은 국물 음식, 마른 음식, 매운 것과 짠 것, 딱딱한 것과 약한 것 등 온갖 반찬의 맛을 차별화하면서 동시에 융합한다. 말하자면 밥을 먹는 것은 입을 씻어 맛을 지우는 지우개 같은 역할을 한다.
 
  매운 음식을 먹었어도 일단 밥이 들어가면 입안에는 언제든지 새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백지(白紙)가 마련되고, 그 백지 속에서 모든 음식이 제맛과 제 표정을 갖게 된다. 그리고 밥은 동시에 그 맛을 합산한다. 반찬은 밥의 텅 빈 맛 덕분에, 그리고 밥은 반찬의 맵고 짠 맛 덕분에 싱싱하게 살아난다. 한국의 음식은 이 관계의 틈새에서 존재한다.
 
 
  포용하고 통합하는 맛의 문화
 
  ②두 번째 비밀 : 싸다 비비다 - 입안에서 완성되는 융합 문화=서양의 음식문화는 분리가 핵심이다. 그들은 고기에는 고기만, 채소에는 채소만 먹는다. 절대 섞어 먹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음식은 먹는 사람의 입안에서 하나의 음식으로 완성된다. 매끼 밥과 국, 채소, 고기, 생선, 심지어 후식으로 먹는 떡과 식혜까지 동시에 한상 위에 차린다. 이들은 홀로 있는 음식도, 독자적인 맛을 지닌 음식도 아니다. 김치든 국물이든 나물이든 반드시 밥과 함께 먹기 때문이다. 다른 음식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맛으로서 존재 이유를 갖는다. 그 병렬적 동시 구조의 상차림 앞에서 한국인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능동적으로 입안에 넣는다. 밥 한 숟갈에 김치 한 조각을 얹어 먹었다가, 갈비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가 하면, 남은 밥을 국에 말아먹기도 한다. 먹는 사람이 음식 맛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음식 문화는 ‘되다’ ‘becoming’의 상태이며, 생성론의 개념이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통합하는, 즉 ‘포함적(inclusive)’ 문화다.
 
 
  삭힌 맛, 기다리고 용해하고 변화하는 시간의 지속
 
  ③세 번째 비밀 : 담그다 삭히다 - 뭐든 삭혀야 제맛인 발효 문화=어떤 형태의 요리든 맛의 근원적 의미는 날것과 익힌 것, 즉 생식(生食)과 화식(火食)의 대립 항에 의해 구분된다.
 
  그러나 한국의 요리 코드는 화식과 생식의 대립 코드에서 일탈해 그것을 융합하거나 매개하는 제3항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날것도 익힌 것도 아닌 삭힌 것의 맛, 바로 발효식이다.
 
  김치, 된장·간장·고추장, 젓갈 등 발효 음식은 한국 음식의 기저(基底)에 해당한다.
 
  배추를 날것으로 요리하면 샐러드가 되고, 불에 익히면 수프가 된다. 그러나 그것을 삭히면 김치가 된다. 그 ‘삭힌 맛’은 샐러드 같은 자연의 맛이나 채소 수프 같은 문명의 맛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3의 새로운 미각이다.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뛰어넘는 ‘통합(integral)’의 맛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대표적 발효 음식인 장(醬. 된장·간장·고추장)은 기다리고 용해하고 변화하는 시간의 지속 속에서 이루어진다.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말려 간장과 된장을 담그기까지, 그리고 독에 담아둔 간장과 된장이 발효돼 제맛이 들기까지, 대개 수개월 혹은 수년의 시간이 걸린다.
 
  한국 대표 음식 중 하나인 김치야말로 삭힌 맛의 전형이다. 특히 김장 김치는 겨우내 쉽게 무르거나 상하는 일 없이 시원한 맛과 아삭한 식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땅을 깊이 파고 그 안에 독을 묻어 보관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과 김치로 대변되는 한국 음식 문화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콩이나 배추, 무가 아니라 시간일지도 모른다.
 
 
  채집 시대의 전설이 숨 쉬다
 
삼색 나물. 무치는 나물 요리 외에 나물죽, 나물국, 나물찜, 숙채, 생채, 강회, 나물장아찌까지 조리법이 다양하다. 사진=조선일보DB
  ④네 번째 비밀 : 캐다 따다 뜯다 - 나물 민족의 식생활, 채집 문화=옛날 한국의 여인네들이 집 밖을 나설 때 바구니를 낀 채 봄에는 나물을 캐고, 여름에는 뽕잎을 따고, 가을에는 빈 밭에서 이삭을 주워 담았다. 캐고, 따고, 줍고…. 그 기능의 메타언어는 ‘채집’이다. 바구니 속에는 인간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조차 모르던 채집 시대, 혈거민의 전설이 숨 쉬고 있다.
 
  한국어 사전에서 ‘나물’이 들어 있는 한국말을 검색하면 ‘가는갈퀴나물’부터 ‘흰바디나물’에 이르기까지 무려 250가지나 나온다. 달래·냉이·도라지처럼 뿌리를 캐 먹는 나물, 시금치나 취나물처럼 잎을 먹는 나물, 콩나물이나 숙주나물처럼 열매의 싹을 틔워 먹는 나물까지 식물의 잎·열매·줄기·뿌리·껍질·새순 등 거의 모든 부분을 음식으로 만들어 먹는다.
 
  무엇보다 한국인은 이 나물들을 생으로 먹기도 하지만, 살짝 데쳐서 참기름·깨소금 등 갖은양념을 넣어 무쳐 먹기도 한다. 나물은 덩이와 입자형의 음식물과는 달라 금세 다른 것과 뒤엉겨 결합될 수 있다. 그래서 나물의 요리법은 무치는 것이고, 나물의 맛은 맵고 달고 시고 짜고 쓴 오미가 된다. 무치는 것 외에도 나물죽, 나물국, 나물찜, 숙채, 생채, 강회, 나물장아찌까지 한국인의 나물 조리법은 매우 다양하다.
 
 
  찌고 고고 끓이는 게 한국의 물맛
 
한식에서 국물은 수단이자 목적이다. 사진은 냉이달래된장찌개. 사진=조선일보DB
  ⑤다섯 번째 비밀 : 끓이다 삶다 찌다 - 국물 맛이 일품, 습식 문화=국물은 한국의 맛을 해독하는 중요한 코드 중 하나다. 서양의 요리 코드가 ‘고체-액체’ ‘건식-습식’의 대립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한국의 요리 코드는 이 대립의 경계를 없애고 음식의 건더기(고체)와 국물(액체)을 함께 먹는 혼합 체계로 이뤄져 있다.
 
  서양 요리에선 (수프처럼 정식으로 국물 요리를 만들 때를 제외하면) 조리 시 생기는 국물은 음식을 익히는 수단으로, 일종의 노이즈(noise)로 생각해 없애버린다. 반면 한식에서 국물은 수단이자 목적이다. 면을 끓이기 위해 부은 물도 버리지 않고 국수와 함께 요리 속으로 끌어들인다. 칼국수나 라면 그리고 한식화한 국물 스파게티 등이 좋은 예다. 김치는 어떠한가. 김치의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국물을 버리는 법 없이 함께 먹는다.
 
  한국의 음식 문화는 ‘물’이 핵심이다. 이에 비해 서양은 ‘불’이 더 중요하다. 한국에선 물을 이용해 시루에 떡을 찌지만, 서양에선 물 없이 오븐에서 빵을 굽는다. 물맛과 불맛, ‘시루’와 ‘오븐’, ‘떡’과 ‘빵’, ‘찌다’와 ‘굽다’가 대립 항을 이루는 것이다. 찌고 고고 끓이는 게 한국의 물맛이라면, 굽고 볶고 기름에 튀기는 것이 서양의 불맛이다.〉
 
 
  “진화하고 발전하는 현재진행형의 맛”
 
이어령 선생이 손짓을 하며 말하고 있다. 사진=김용호 작가
  선생은 《K FOOD: 한식의 비밀》에 나오는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한국의 식문화가 기다림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렇게 삭히고 끓이고 무치고 섞어서 완성한 한식은 발효 문화와 국물 문화, 나물 문화와 융합 문화를 대변하죠. 그리고 이 모두는 순환과 역설의 원리를 품은 채 조화롭게 어우러집니다. ‘배제’하지 않고 ‘포함’하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화합합니다.”
 
  한식은 결코 과거의 기억이나 전통의 맛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현재의 맛과 이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진화하고 발전한다.
 
  “이탈리아의 대표 음식인 파스타에 국물을 더해 국물 파스타를 만들고,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햄버거에 밥과 불고기 등 한국의 대표 음식을 결합해 새로운 맛을 창조해냅니다. 또한 서양의 맥주와 한국의 치킨을 결합한 ‘치맥’ 문화로 많은 해외의 젊은이를 한국으로 불러들이죠.
 
  이처럼 한식의 경쟁력은 이미 완성돼 끝난 맛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하는 현재진행형의 맛 속에 숨어 있습니다. Being(존재)이 아니라 Becoming(생성)의 미학(美學), 융합의 미학(味學)이야말로 K-푸드로 세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한식의 특성이라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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