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김태완의 인간탐험

한국 영화평론의 산증인 金鍾元

‌“영화 〈기생충〉은 〈오발탄〉의 사회비판, 〈만추〉의 감각, 〈하녀〉의 속물성 담고 있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영화에 빠진 7세 제주 소년, 한국영화 100년사를 논하다
⊙ 제주극장에서 봤던 일본영화 〈마라이노 하리마오〉 통해 영화의 ‘신세계’에 빠지다
⊙ “한국영화 100년의 기점은 연쇄극 〈의리적 仇討〉가 아닌 〈京城全市의 景〉”
⊙ 한국영화사상 질적·양적 융성기는 1960년대… 대표작은 〈하녀〉 〈오발탄〉 〈장군의 수염〉
⊙ 《주간조선》 영화담당 기자 시절이 전성기… 시리즈 ‘스타 스토리’ ‘母女 대담’ ‘라이벌 스토리’ 기획

金鍾元
1937년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수학 / 《문학예술》 《사상계》 통해 등단(詩) / 前 《주간조선》 기자, 월간 《영화잡지》 편집장 /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장,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 공연윤리위 영화심의위원, 춘사영화제 심사위원장 역임
  한국영화 100년사를 다 꿰는 영화평론가가 있다. 정영일(鄭英一·본명 鄭君在·1928~1988), 이영일(李英一·1932~2001)과 함께 영화평단을 이끈 주인공이다. 김종원(金鍾元) 선생은 지금도 평단에서 활동 중이다. 1937년 제주에서 태어난 그는 여전히 영화비평을 쓰고 시사회에서 처녀작과 만난다. 집에서는 허구의 시공(時空) 속에서 마치 비단옷을 입은 것처럼 옛 영화를 탐닉하고 있다.
 
  ‘제주의 명동(明洞)’이라 불리는 칠성 통에서 태어난 그는 일곱 살 때 처음 영화를 접했다. 관덕정 앞, 지금은 허물어진 제주극장에서 고가 세이진(古賀聖人) 감독의 일본영화 〈마라이노 하리마오(マライの虎)〉(1943)를 보고 영화의 ‘신세계’에 빠지면서 평생 영화광이 됐다.
 
  영화평론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59년, 23세 때다. 월간 종합지 《자유공론》 11월호에 ‘한국 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를 쓰면서다. 앞서 서라벌예대 2학년 때 《문학예술》(1957), 동국대 국문과 3학년 때 《사상계》(1959)로부터 시(詩) 추천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영화평 쓰기는 남다르다. “뛰어난 직관력과 풍부한 서정적인 정감”(李御寧)이 평론에 묻어 있다.
 
  지금처럼 쉽게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영화평론 쓰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그는 “대개는 재개봉관이었지만 영화를 볼 때면 반드시 종이를 꺼내 들고 인상적인 대사와 장면을 적거나 그려놓곤 했다. 이렇다 보니 놓친 장면을 확인하기 위해 이미 본 영화를 눌러앉아 다시 볼 때가 많았다”고 한다. 암막(暗幕) 커튼 속 불편하게 적어놓은 메모는 노트로 정리되고 부피로 늘어나면서 요긴한 자료가 됐다. 선생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쓴 메모 뭉치를 ‘검은 도서관’이라 부른다.
 
한국영화비평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김종원씨.
  현장 비평 전성기 시절인 1980~ 1990년대 일간신문에 1년 이상, 길게는 5년간 고정적으로 영화평을 쓰면서 주목을 받았다. 청룡영화제 제1회 정영일 영화평론상(1994)과 한국예술발전상(2001)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의 영화평단은 그때와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영화 전문지가 없음은 물론, 일간신문에서 외부 평론가들의 영화 리뷰가 사라진 지 오래죠. 고작 인터넷에 올리거나 주간지에 두어 줄 남기는 별점 평 따위만 존재할 뿐입니다. 오늘날의 한국영화평단은 공교롭게도 60년 전 제가 이 길에 들어서면서 언급했던 것처럼 ‘위기’를 맞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현역입니다, 현역….”
 
  이 현역 노장에게 한국영화 100년을 물어보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아카데미상 감독상·작품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을 받아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까. 지난 1월 29일 서울 광화문에서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한국영화 100년, 나의 영화평론 60년’이란 부제를 단 《영화와 시대정신》(작가 刊)을 최근 펴냈다.
 
  ― 영화 〈기생충〉 보셨나요.
 
  “예컨대 냉철한 사회비판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닮았고, 한편으론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상업주의를 붙들고 있죠. 〈만추〉의 이만희 감독이 지닌 감각에다 〈안개〉의 김수용 감독의 연금술을 겸비했다고 할까. 〈기생충〉도 김기영 감독이 〈하녀〉에서 보여준 가족 간 관계와 인간의 속물성을 마치 외과의사가 집도하듯 날카롭게 스크린에 옮겼더군요.”
 
  입이 딱 벌어졌다. 〈기생충〉 리뷰 속에 한국영화 100년사가 모두 들어간 답변이었다. 역시 대가다웠다.
 
 
  민족 현실 그린 무성영화 〈아리랑〉과 〈임자 없는 나룻배〉
 
1953년 오현고등학교 1학년 때, 제주도로 피란 온 문학의 스승 소설가 계용묵 선생을 모시고. 왼쪽부터 2, 3년 선배인 고영기, 박철희, 강통원, 김성주. 오른쪽이 김종원. 한 명을 제외하고 문인이 되었다.
  ― 고전(古典)이 될 만한 한국영화를 꼽아주세요.
 
  결코 쉬운 질문이 아니다. 영화란 보는 이의 취향과 관점에서 얼마든지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고심 끝에 10편을 꼽았다.
 
  “당대 대중의식과 시대정신이 잘 반영된 작품, 장르적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 소재나 형식 면에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3가지 기준”에 따라 10편을 골랐다.
 
  〈아리랑〉(1926), 〈임자 없는 나룻배〉 (1932) 등 무성영화 시대의 작품 2편을 포함해 〈마음의 고향〉(1949), 〈피아골〉 (1955) 등 해방 후 6·25전쟁 시기 작품 2편, 〈하녀〉(1960), 〈오발탄〉(1961), 〈장군의 수염〉(1968) 등 1960년대 작품 3편, 〈바보들의 행진〉(1975), 〈깊고 푸른 밤〉 (1984), 〈서편제〉(1993) 등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사이 작품 각 1편씩을 골랐다.
 
  ― 무성영화 시대에 만든 〈아리랑〉과 〈임자 없는 나룻배〉는 필름이 없지요.
 
  “비록 제가 눈으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나운규 각본·감독·주연의 〈아리랑〉과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는 일제 강점기 당시 제작된 159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정수(精髓)라 할 수 있어요.
 
  두 작품의 뛰어남은 상영 후 평가뿐만 아니라 《조선일보》가 부민관에서 처음 영화제를 개최(1938년 11월 26~28일)하며 독자 대상으로 뽑은 ‘무성영화 베스트 10’ 가운데 〈아리랑〉(4974표)과 〈임자 없는 나룻배〉(3783표)가 각기 1, 2위를 차지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신문과 잡지, 증언 등 기록을 통해 ‘명화(名畫)’로 꼽혀왔으나, (보존되지 않아 검증 기회를 갖지 못한 경우) 필름이 없다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시키기 어렵지 않겠어요? 영화사적 맥락에서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1963년 신봉승 작가(왼쪽), 박봉우 시인(중앙), 김상일 문학평론가(오른쪽 선 분) 등이 중심이 된 ‘네오드라마 동인회’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중앙 베레모 쓴 이가 이 중 가장 어린 김종원.
  ― 전설이 된 민족영화 〈아리랑〉은 어떤 영화인가요.
 
  선생은 영화 스토리를 줄줄이 꿰고 있다.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분명치 않은 이유로 실성하여 농촌에 돌아온 후 마을 사람들의 놀림감이 된 영진(나운규)이 누이동생(신일선)을 괴롭히는 지주의 앞잡이(주인규)를 보다 못해 죽이게 된다는 게 영화 내용입니다. 단순히 줄거리를 화면에 옮기는 역할로 만족했던 당시 한국영화 수준으로 볼 때 〈아리랑〉은 파격적인 작품이었죠. 조선인 고유의 감정과 사상, 생활의 진솔한 면을 정확히 파악했다고 볼 수 있어요.
 
  이 영화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특유한 기법, 예컨대 비유와 암시, 상징의 몽타주를 말합니다. 비유의 예로 ‘개와 고양이’를 내세운 자막이 있었다고 해요. 앙숙인 영진과 지주의 앞잡이 오기호를 대립관계로 만들어 지배자인 일제와 피지배자인 한민족을 상기시켰죠.”
 
  ― 〈임자 없는 나룻배〉는 어떤 영화인가요.
 
  “이 영화는 가뭄과 수해로 살길이 막막해지자 임신한 아내(김연실)와 함께 서울로 올라온 젊은 농부 춘삼(나운규)이 겪는 수난기를 그리고 있어요. 당시 이 영화는 검열을 거쳤음에도 개봉을 앞두고 곤욕을 치렀죠. 이규환 감독이 상영 직전 조선총독부 경무국 활동사진검열계로 불려갔는데, 영화 제목이 나라를 빼앗긴(임자 잃은) 우리 민족(나룻배)을 암시하고 있었어요. 주인공이 철로를 때려 부수는 후반부 장면은 항일적(抗日的)이라는 이유로 필름을 자른 뒤에야 빛을 볼 수 있었어요.”
 
한국영화 100년의 기점은…
 
  “연쇄극 〈의리적 仇討〉가 아닌 〈京城全市의 景〉”
 
  한국영화는 지난해 100주년을 맞았다. 1919년 10월 27일 서울 단성사에서 개연(開演)한 신파극단 신극좌의 활동사진연쇄극 〈의리적 구토(仇討)〉를 기점으로 잡는다. 이 작품은 무대에서 도저히 실연(實演)할 수 없는 야외 활극 장면을 연극과 연접(連接)시켰다. 연극 중간에 한강철교와 장충단·노량진 공원 등을 배경으로 찍은 12분가량의 토막 필름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김종원 선생은 연쇄극 〈의리적 구토〉보다 실사영화 〈경성전시(京城全市)의 경(景)〉이 먼저 상영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사영화(實寫映畫)는 실제 상황이나 자연 현상을 사실 그대로 찍은 일종의 기록영화를 말한다.
 
  당시 보도(《매일신보》 1919년 10월26일자 기사 ‘조선활극 촬영 단성사에서 영사한다’, 《매일신보》 10월27일자 광고)에서도 〈의리적 구토〉보다 먼저 상영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경성전시의 경〉에는 남대문 정거장과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뚝섬, 홍릉, 살곶이다리(성동구 성수동1가에 위치한 석조 다리) 등 당시 경성 풍경을 고스란히 담았다고 한다.
 
  10분 내외의 상영 내내 관객들은 줄곧 박수갈채를 보낼 만큼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김종원은 “한국영화사는 실사영화 〈경성전시의 경〉을 도외시한 채 〈의리적 구토〉 위주로 기술돼왔다”며 “이는 애초부터 실사물을 제외하고 흥행 위주의 연쇄극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해방 후 영화 2편 〈마음의 고향〉 〈피아골〉
 
1970년대 초 한국예총 회장인 이봉래 감독(왼쪽)과 이영일 평론가(중앙), 김종원 기자.
  김종원 선생은 해방 후 6·25전쟁 시기 작품으로 〈마음의 고향〉(1949)과 〈피아골〉(1955)을 꼽았다.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은 절에 버려진 열세 살 소년의 애절한 사모곡이죠. 주지스님(변기종)의 보살핌 아래 성장한 ‘까까중’ 도성(유민)이, 어린 자식을 잃고 공양을 드리러 온 젊은 미망인(최은희)의 눈에 들었으나 친어머니(김선영)가 뒤늦게 찾아온 사실을 알고 절을 떠난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월북문인 함세덕(咸世德·1915~1950)의 희곡 〈동승(童僧)〉이다.
 
  선생은 “새벽 안개 속에서 범종을 치는 동자승의 일상생활로 시작되어 안개가 걷히는 절에서 나온 도성이 범종 소리를 들으며 산을 내려가는 시퀀스로 마무리되는 〈마음의 고향〉은 ‘해방 후 최고봉에 오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동승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새털부채와 살생, 염주라는 피사체에 의해 주요 모티브로 투영됩니다. 〈마음의 고향〉은 서정적 리얼리즘으로 승화된 해방 후 최초의 문예(文藝)영화로 오래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어요.”
 
  ―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은 대표적인 반공(反共)영화지요.
 
  “미국영화의 특징이 서부극에 있다면, 반공영화는 한국에만 존재한 특수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공영화는 1949년 홍개명 감독의 〈전우〉와 한형모 감독이 〈성벽을 뚫고〉 이후 정부의 영화 정책에 힘입어 1980년대 초까지 기형적으로 양산되었죠. 문제는 대부분의 내용이 일당백(一當百) 정신을 강조하다 보니 국군과 인민군을 선악(善惡)의 이분법에 맞추면서 리얼리티를 상실했다는 데에 있어요. 하지만 〈피아골〉은 균형감을 유지하려는 감독의 고심이 엿보이는 주목할 만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지리산에서 활동하는 인민군 유격대장 아가리(이예춘)와 대원 철수(김진규), 그리고 당성이 높은 여자대원 애란(노경희)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냉철한 여성 애란과 달리 철수는 흘러가는 구름에도 반응하는 인텔리다. 토벌대에 밀리는 극한 속에서 전의를 잃은 대원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철수는 애란과 함께 하산한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용공(容共)영화라는 비판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빨치산들의 산 생활을 통해 인간 본연의 존엄성은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공산주의라는 이즘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이 없었다’는 이유였죠. 결국 6개 장면이 삭제되고 마지막 장면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추가한 후에야 개봉될 수 있었어요.”
 
 
 
1960년대의 상징 〈하녀〉 〈오발탄〉 〈장군의 수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김종원 회장이 1981년 제2회 ‘영평상’ 남자연기상을 배우 전무송에게 수여하고 있다.
  한국영화사상 질적·양적으로 가장 융성했던 시기가 1960년대다. 1960년 87편, 1961년 79편을 제외하면 해마다 최하 112편에서 최고 229편까지 제작돼 10년간 1505편을 만들었다.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다. 선생은 그중에서도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이성구 감독의 〈장군의 수염〉(1968)을 ‘고전’으로 선정했다.
 
  ― 영화 〈하녀〉는 2010년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한 작품입니다.
 
  “방직공장 여직공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동식(김진규)은 새집을 짓기 위해 무리하게 재봉 일을 하다 몸이 쇠약해진 아내(주증녀)를 위해 하녀(이은심)를 들이죠. 아내가 친정에 간 사이 하녀의 유혹에 빠져 몸을 섞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하녀를 설득하여 계단에서 굴러 낙태하게 만듭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하녀는 동식의 어린 아들(안성기)을 계단에서 떨어져 죽게 만들고, 모든 사실을 외부에 알리겠다고 협박합니다. 이런 상황에 괴로워하며 하녀와 동반자살을 기도한 동식은 하녀를 뿌리치고 아내 곁으로 돌아와 숨을 거둡니다.
 
  〈하녀〉는 김기영 감독이 그간 추구해온 사실주의를 지양하고 표현주의 계열의 그로테스크한 사디즘 영화로 전환한 출발점이 된 영화죠.”
 
  영화 〈오발탄〉은 설명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최무룡·김진규·문정숙 주연의 흑백 35mm 영화로 1961년 제작되었다. 한국영화사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데 이견이 없는 영화다.
 
  “이 영화는 일제 지배 아래서 미치광이 청년과 나룻배 사공을 통해 핍박받는 한민족의 울분을 우회적으로 표출한 〈아리랑〉 〈임자 없는 나룻배〉의 시대정신과 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란민들이 모인 해방촌에 사는 송철호(김진규)는 돌봐야 할 여섯 식구가 있다. 정신이상자인 어머니(노재신)와 만삭인 아내(문정숙), 상이군인인 동생 영호(최무룡), 양공주가 된 여동생(서애자), 학업을 포기한 채 신문팔이에 나선 막냇동생, 그리고 어린 딸 혜옥이 바로 그들이다.
 
  “이야기는 박봉과 치통으로 시달리던 가장의 아내가 해산하다 죽고, 일확천금을 노린 동생은 은행 강도짓을 하다 붙잡히면서 전개됩니다. 철호는 썩은 이를 뽑고 아내 대신 새로운 생명체를 얻게 되지만 방황과 좌절의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오발탄〉에는 여러 기호(記號)가 등장합니다.
 
  고막을 찌르는 전투기 편대의 소음, 통금시각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 퇴직금 보장을 요구하는 데모대의 외침, 미군 병사와 양공주가 나타날 때 들리는 재즈와 판소리의 대비 등 불안한 전후(戰後)의 사회상을 표출한 음향이 바로 기호죠. 한마디로 분단이 낳은 이산의 고통과 후유증을 의미합니다.”
 
  이성구 감독의 〈장군의 수염〉은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플래시백을 이용한 다층적인 서사 구조, 영화 속의 소설을 애니메이션(신동헌 작화)으로 재현한 액자 구조, 치밀한 구성과 조형적인 세트 등이 그렇다. 선생은 “한국영화 가운데 모노크롬(monochrome·흑백으로 된 영화나 사진)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첫 사례”라고 설명한다.
 
  “영화는 산동네 허름한 하숙집에 묵고 있던 김철훈(신성일)이라는 사진기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비롯됩니다. 노련한 박 형사(김승호)와 젊은 형사(김성옥)는 철훈에게 편지를 보낸 소설가 한정우(김동원)에게서 철훈이 쓰려던 소설 〈장군의 수염〉의 내용에 대해 듣게 되죠. 개선행진에 나온 독립군 장군처럼 수염을 기르는 것이 유행하던 시대에 이를 거부했다가 곤욕을 치른 사내의 이야기였어요.
 
  이어령 원작, 김승옥 각색으로 이뤄진 이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수시로 교차하며 필요에 따라 생략하거나 선택하는 영화적 시간과, 확대·축소되는 영화적 공간을 효과적으로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1970년대 이후 대표작 〈바보들의 행진〉 〈깊고 푸른 밤〉 〈서편제〉
 
1985년 5월 31일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첫 영화평론집 《영상시대의 우화》 출판기념회 때. 왼쪽부터 손기상 《중앙일보》 문화부장, 한 사람 건너 김종원의 장녀 영아, 아내 김영자, 김종원, 최금동 시나리오 작가, 김동리 소설가, 조경희 예총회장, 안성기 배우.
  김종원 선생은 197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고전으로 〈바보들의 행진〉(1975)과 〈깊고 푸른 밤〉(1984), 〈서편제〉(1993)를 꼽는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1970년대 암울한 시대의 단면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젊은이들의 울분과 불만이 푸념으로 변하던 시절, Y대학 철학과에 다니는 병태(윤문섭)와 영철(하재영)은 그룹 미팅에서 같은 또래인 불문과 여학생 영자(이영옥)와 순자(김영숙)를 알게 되죠.
 
  병태의 짝이 된 영자는 데이트를 하면서도 선본 남자와 결혼할 것이라며 거리를 두려 합니다. 술만 마시면 버릇처럼 예쁜 고래를 잡으러 가겠다던 영철은 입대가 좌절되자 동해로 떠나 바닷가 벼랑에서 몸을 던집니다. 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가고 친구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병태는 영자가 배웅하는 가운데 입영열차에 오릅니다.
 
  막걸리 마시기 대회, 함성이 쏟아지는 야구 경기장, 미팅이 대세인 대학가의 연애 풍속도 등 역동적이고 낭만적인 화면과 병치시킨 폐쇄된 대학 정문 앞의 무장 군인들의 모습은 역설적인 억압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선생에 따르면, 신체검사를 받으러 간 대학생이 일등병을 놀리는 장면, 대학생들이 구호가 써 있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 영철이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 대목 등 8군데 15분 분량이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고 한다.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은 작품의 수준과 흥행이 일치된, 흔치 않은 경우에 속한다. 60여만 관객을 동원했을 뿐 아니라 대종상,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평상 등 국내외 작품상을 휩쓸었다.
 
  “이 영화는 미국 사회에 정착하려고 불법 입국한 한국 청년의 카멜레온적 행각,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현대 사회의 병리적 에고이즘에 초점을 맞추고 있죠. 한국에 애인을 두고 온 백호빈(안성기)은 미국 사회에 뿌리 내리려는 야망의 청년입니다. 영주권을 얻기 위해 ‘그레고리 백’이라는 미국식 이름을 앞세워 유부녀를 유혹하고, 갈취한 돈으로 제인(장미희)이라는 교포 여인과 계약결혼을 하죠.
 
  그러나 초청장을 기다리던 한국의 애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자 호빈은 사막에서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안성기·장미희 콤비의 완숙한 연기와 간결한 커팅 처리를 앞세워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비정한 현실을 날카롭게 부각시킨 작품입니다.”
 
  ― 반면 〈서편제〉는 가장 한국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어요.
 
  〈서편제〉는 임권택 감독의 93번째 작품이다. 정일성의 카메라에 힘입어 한국적인 특색과 정감을 살린 역작이다. 영화에는 굽이진 황톳길과 바람에 휘는 은빛 억새의 들판, 눈 쌓인 산야, 정겨운 논두렁 등 자연 풍광과 함께 잘 어우러진 판소리가 담겨 있다.
 
  “떠돌이 소리꾼의 인생 여정을 담은 이 영화는 1960년대 초 전라도 보성 한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은 길손(동호)이 여주인의 판소리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기억나세요? 소리 품을 팔기 위해 큰집 잔치에 불려온 소리꾼 유봉(김명곤)은 그곳에서 동호(김규택)의 어미 금산댁을 만나 자신의 수양딸 송화(오정해)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죠.
 
  오누이처럼 돌보며 송화에게는 소리를, 동호에게는 북을 가르쳐 소리꾼과 고수(鼓手)로 한 쌍을 이루게 하지만,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화목이 깨집니다. 가난을 견디다 못해 동호가 떠나게 되고, 유봉은 송화도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완벽한 소리에 집착한 나머지 부자(附子)를 먹여 송화의 눈을 멀게 합니다.”
 
  ― 득음의 경지를 위해 딸을 장님으로 만든 소리꾼 이야기… 무척 여운이 남았어요.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세 명의 소리꾼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롱 샷의 고갯길을 내려와 큰길에서 덩실덩실 춤추는 장면까지 이어진 5분40초가량의 롱 테이크입니다.”
 
김종원이 꼽은 2000년 이후 한국영화 18선
 
 
〈기생충〉 〈동주〉 〈피에타〉 〈시〉 〈가족의 탄생〉

 
  선생은 지난 1월 출간한 저서 《영화와 시대정신》에 한국 극영화 100선(選)을 선정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평생을 ‘영평’ 현장에서 살아온 일생의 작업일는지 모른다. 지면의 한계로 모두 소개하기 어려워 아쉬울 뿐이다. 향후 인터넷 ‘월간조선’ 뉴스룸을 통해 공개할 예정인데, 100편 중 2000년 이후 제작된 작품만 우선 소개한다.

 
  1. 〈공동경비구역JSA〉(2000) 박찬욱 감독, 이병헌·이영애 주연, 명필름 제작
  2. 〈봄날은 간다〉(2001) 허진호 감독, 유지태·이영애 주연, 싸이더스 제작
  3. 〈복수는 나의 것〉(2002) 박찬욱 감독, 송강호·배두나 주연, 스튜디오 박스 제작
  4. 〈집으로〉(2002) 이정향 감독, 김을분·유승호 주연, 팝엔터테인먼트 제작
  5. 〈오아시스〉(2002) 이창동 감독, 설경구·문소리 주연, 이스트필름 제작
  6. 〈올드보이〉(2003) 박찬욱 감독, 최민식·강혜정 주연, 에그필름 제작
  7. 〈살인의 추억〉(2003) 봉준호 감독, 송강호·김상경 주연, 싸이더스HNH 제작
  8. 〈지구를 지켜라〉(2003) 장준환 감독, 신하균·황정민 주연, 싸이더스HNH 제작
  9. 〈빈집〉(2004) 김기덕 감독, 이승현·재희 주연, 김기덕필름 제작
  10. 〈웰컴 투 동막골〉(2005) 박광현 감독, 신하균·강혜정 주연, 필름있수다 제작
  11. 〈왕의 남자〉(2005) 이준익 감독, 정진영·이준기 주연, 씨네월드·이글픽쳐스 제작
  12. 〈괴물〉(2006) 봉준호 감독, 송강호·배두나 주연, 청어람 제작
  13. 〈가족의 탄생〉(2006) 김태용 감독, 엄태웅·문소리 주연, 블루스톰 제작
  14. 〈밀양〉(2007) 이창동 감독, 송강호·전도연 주연, 파인하우스필름 제작
  15. 〈시〉(2010) 이창동 감독, 윤정희·김희라 주연, 파인하우스필름 제작
  16. 〈피에타〉(2012) 김기덕 감독, 조민수·이정진 주연, 김기덕필름 제작
  17. 〈동주〉(2015) 이준익 감독, 김하늘·박정민 주연, 루스 이 소니도스 제작
  18. 〈기생충〉(2019) 봉준호 감독, 송강호·조여정 주연, 바른손 제작
 
  “스마트폰으로 영상물을 쉽게 볼 수 있는 세상”
 
1999년 6월 5일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 개관식에 초대받은 김종원(오른쪽 끝). 왼쪽부터 김수용 감독, 유현목 감독, 배우 문희.
  기자는 한국영화의 초창기 모습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선생에 따르면, ‘활동사진’으로 불리던 영화가 본격적으로 흥행에 들어간 것은 1909년이다. 이 무렵 극장은 무성에다 자막도 없는 두세 권짜리 단편 실사나 희극을 상연하는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소녀 광대가 무대로 나와서 줄을 타거나, 몇 가지 춤을 보여준 다음에야 영화를 틀었다고 한다. 김종원의 말이다.
 
  “초창기 영화 관람 풍경을 담은 책 《한국영화측면비사》(1962)에 이런 묘사가 등장해요. 스크린에서 화차가 달려오면 관중석이 아수라장이 됐다는 겁니다. 혹시나 화차와 충돌할까 봐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느라 아우성을 치기 때문이었죠. 그도 그럴 것이 화차가 곧장 그대로 달려오다 보면 관중들은 영락없이 광무대(光武臺)의 귀신이 될 테니까….”
 
  광무대는 1912년 을지로 부근의 극장을 말한다. 1920년대에는 민속극, 창극 같은 재래 연극을 전문적으로 공연했다고 한다.
 
  ― 영화가 끝나면 관객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현실로 돌아왔나요.
 
  “아니죠. 더욱 가관이었죠. 상영이 끝나고 불이 켜지면 으레 관중들은 무대로 몰려들어 일대 혼잡을 이뤘어요. 스크린에 대한 궁금증에서였죠. 하지만 옥양목으로 된 스크린을 아무리 들쳐본들 그 안에 무엇이 있겠어요?”
 
  영화해설자가 변사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10년대 초였다. 변사는 영사가 시작되기 전에 잠깐 나와서 영화 줄거리를 설명하는 이른바 ‘전설(前說)’이라는 순서를 끝내고 본격적인 해설로 들어갔다.
 
  “관람 시각은 오후 7시 전후로 되어 있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어요. 연속 상영이 없다 보니 여름에는 오후 8시가 되어서야 시작할 때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먼저 들어간 손님들이 기다리다 못해 야유를 쏟아내기 마련이었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해협〉(1943), 〈사랑과 맹서〉(1945) 등 친일영화에 나타났듯이 조선어가 스크린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자유만세〉 (1946) 같은 항일영화가 등장하면서 극장은 어느새 영화 전문관으로 바뀌게 됩니다. 연극 전용관의 대명사였던 서대문의 동양극장(현 《문화일보》 자리)마저 영화관으로 전환할 만큼 기세가 높았죠.
 
  1960년대는 라디오 연속극이 인기를 끌고, 영화 관람이 유일한 소일거리던 시절이었어요. 개봉관인 광화문의 국제극장, 태평로의 코리아시네마(뒤에 아카데미극장), 을지극장 등과 함께 계림극장(을지로6가), 문화극장(천도교 본관 부근), 경남극장(조선호텔 맞은편) 등 재상영관에서 두 편 동시상영이 성행하고 입석도 허용되었어요. 이때는 영화 상영에 앞서 반드시 새마을운동 등 계몽 뉴스영화와 함께 ‘애국가’를 불러야 했습니다.”
 
 
  스마트 영화관 시대, 재개봉관도 ‘앙코르 로드쇼’도 사라져
 
2017년 3월 서울 답십리 연화전시관에서 열린 배우 신성일 초대전에서. 동갑인 두 사람은 영화사랑모임(약칭 영사모)의 일원으로 자주 만났다.
  196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는 연간 200편을 상회하는 제작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시기부터 1990년대 초까지는 단성사, 대한극장, 국도극장, 명보극장의 전성기였다. 대한극장은 70mm 대형영화 〈남태평양〉(1961), 단성사는 〈서편제〉, 국도극장은 칼라 시네마스코프 붐을 낳은 〈성춘향〉 (1961), ‘손수건’이 필요한 〈미워도 다시 한 번〉(1968), 명보극장은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등 화제작으로 각기 명성을 이어갔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 아래 등장한 서울극장은 처음으로 심야프로를 도입하고 복합극장 시대를 예고했다. 우리나라에 영화가 들어온 지 100여 년 만에 창고극장에서 단일 대형극장 시대를 마감하고, 2010년에 이르러 복합극장 시대가 정착했다.
 
  “극장이 소형화되는 대신 주변에 식당과 커피숍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인터넷 예매 등 관람 환경이 바뀌게 됐어요. 비디오, DVD 출시로 재개봉관이 사라졌고 ‘앙코르 로드쇼’ 관행도 없어졌습니다. 인터넷이나 VOD 서비스, PMP 등 이동 IT 기기로 영화를 내려받는 단계에서 벗어나 이제 스마트폰으로 영상물을 쉽게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 1960년대가 한국영화의 전성기라는데, 선생님은 언제 전성기였나요.
 
  “제가 《주간조선》 창간할 때 영화담당 기자로 입사한 사실을 아시나요?”
 
  그렇다. 선생은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주간조선》에서 영화·가요·출판·문학 담당 기자였다. 눈썹이 아주 특이한 기자, 등단시인답게 완벽한 기사를 쓰기 위해 몸부림치던 기자였다. 그 시절 《조선일보》에서 미술기자로 일한 김정 교수(숭의여대)는 “김종원 기자는 오자가 발생했을 때 보통 기자들이 줄 하나 죽 긋고 그 옆에 새로 쓰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새 원고지를 갖다 놓고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썼다”고 했다.
 
  “하하하, 글을 꼼꼼하게 쓰던 시절이에요. 원고 마감이 제일 늦었어요. 시 쓰던 버릇이지…. 늘 마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러고 보니 기획기사를 많이 썼어요. ‘스타 스토리’ ‘모녀(母女) 대담’ ‘라이벌 스토리’ 같은 시리즈를 썼어요.”
 
  ― 참신한 기획이네요. 요즘 같아선… 연예 기획사들이 반대할 것 같아요.
 
  “문희 모녀, 남정임 모녀, 여운계 모녀, 정혜선 모녀도 다뤘고 라이벌로는 ‘패티 김 대(對) 이미자’ ‘구봉서 대 곽규석’이 생각납니다. 아무래도 짧지만 강렬했던 《주간조선》 기자 시절이 제 전성기가 아닐까요?”
 
  그와 헤어진 뒤 《주간조선》 1970년 8월23일자 ‘구봉서 대 곽규석’ 라이벌 스토리를 찾아보았다. 기사의 앞부분을 인용한다.
 
  〈…뚝배기 된장찌개처럼 구수하고 소박한 얼굴에 컬컬한 목소리로 무작정 퍼부어대는 직사포식 코미디언 막둥이 구봉서(具鳳書). 이 익살의 포격에 행여 뒤질세라 기관총처럼 따따따따 숨차게 반격을 가하는 재롱둥이(?) 사수(射手) -그가 바로 깔끔한 외모에 깐깐하면서도 서글서글한 음성, 쨈을 바른 빵의 맛처럼 재치와 표정으로 한몫거드는 후라이보이 곽규석(郭圭錫)- 폭염의 막바지에서 이들 두 익살꾸러기들이 엮는 라이벌 스토리. 누가 누가 더 웃기나? ‘지상 그랜드쇼’의 막을 올려본다.…〉
 
  정확하고 감각적인 영화현장 비평은 아무래도 영화담당 기자 시절 체득한 것인지 모르겠다. 비록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당시 문인 자격으로 동조해 신문사를 떠나야 했지만, 치열했고 욕심이 많았으며 증(憎)보다 애(愛)가 더 컸던 그 시절이 그는 여전히 그립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