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팍스 아메리카나’ 좌절로 미국 후퇴… 각국이 各自圖生 모색하면서 新민족주의 대두
⊙ 중국, 한반도를 ‘수복해야 할 영토’로 간주… 북한은 外省으로 편입, 한국은 半속국화(핀란드화)하는 게 목표
⊙ 한국, 만약의 경우 베이징·상하이를 날려버릴 수 있는 능력과 결기 갖추어야
⊙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는 ‘더 이상 동맹이 아니니, 미군을 붙잡아 두고 싶으면 미군 비용까지 내라’는 것
⊙ 정치이념 체제 다른 남북한은 이미 다른 민족…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나치
李相禹
1938년생. 서울대 행정학과 졸업,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박사 / 前 《한국일보》·《조선일보》 기자,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통령자문 21세기위원장, 한림대 총장, 국방선진화추진위원장,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 신아세아질서연구회 이사장 겸 회장 역임. 現 신아시아연구소장 / 저서 《정치학개론》 《국제정치학강의》 《북한정치》 《21세기 국제환경과 대한민국의 생존전략》 등
⊙ 중국, 한반도를 ‘수복해야 할 영토’로 간주… 북한은 外省으로 편입, 한국은 半속국화(핀란드화)하는 게 목표
⊙ 한국, 만약의 경우 베이징·상하이를 날려버릴 수 있는 능력과 결기 갖추어야
⊙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는 ‘더 이상 동맹이 아니니, 미군을 붙잡아 두고 싶으면 미군 비용까지 내라’는 것
⊙ 정치이념 체제 다른 남북한은 이미 다른 민족…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나치
李相禹
1938년생. 서울대 행정학과 졸업,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박사 / 前 《한국일보》·《조선일보》 기자,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통령자문 21세기위원장, 한림대 총장, 국방선진화추진위원장,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 신아세아질서연구회 이사장 겸 회장 역임. 現 신아시아연구소장 / 저서 《정치학개론》 《국제정치학강의》 《북한정치》 《21세기 국제환경과 대한민국의 생존전략》 등
- 사진=조선DB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1848년에 나온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의 첫 구절이다.
그로부터 17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 그 유령의 이름은 ‘민족주의(nationalism)’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유럽을 떠돌았을 뿐이지만, 이 민족주의라는 유령은 피레네산맥에서 한반도까지, 아니 영국제도(諸島)에서 일본열도(列島)까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온 세계를 떠돌고 있다. 냉전(冷戰)체제의 붕괴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유령인지라, 이 유령의 재등장은 사람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한다. 가히 신(新)민족주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신민족주의 시대가 도래한 원인 등을 짚어보고, 대한민국의 나아갈 바를 모색해보기 위해 한림대 총장을 지낸 이상우(李相禹) 교수를 만났다. 이 전 총장은 1970년대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부터 40여 년간 역대 정권에 외교·안보·통일·국가미래전략 등을 조언해온 정치학계의 원로다. 김영삼(金泳三)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자문 21세기위원장, 이명박(李明博) 정권 시절에는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 국방선진화추진위원장, 외교경쟁력강화특별위원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사단법인 신아시아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좌절
― 탈(脫)냉전 이후 세계화의 물결 속에,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처럼 보였던 민족주의가 오늘날 선진국, 후진국 할 것 없이 다시 득세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냉전에서 승리한 후 미국이 추진해온 ‘미국 주도의 평화질서(Pax Americana·팍스 아메리카나)’가 좌절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한 후 그들이 꿈꾸어오던 ‘단일세계민주공동체(One world community of free market democracy)’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세계 모든 국가가 민주국가가 되면 민주국가들로 구성되는 하나의 세계민주공동체가 이루어지고 팍스 아메리카나가 완성될 것으로 본 거지요. 이를 위해 미국은 그들 표현으로 ‘선교자적 사명감’을 갖고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타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어요. 그런데 그러는 과정에서 두 가지 회의(懷疑)가 오게 됐어요.”
― 그게 뭡니까.
“하나는 민주주의의 후퇴 현상입니다. 2003년 기준으로 세계 192개국 중 160개국이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이 중에서 93개국은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8년에는 26개국만이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인정받았어요. 민주의식이 확고한 국민이 전체 국민 중 다수를 차지하지 못한 나라에서 등가(等價)참여의 민주정치 제도를 악용하여 대중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가 정권을 장악하는 비민주적 지배 체제(illiberal democracy)를 구축하여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것이죠.
또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시작할 때 중국을 잘살게 해주면 민주화될 것으로 보고 여러 가지 특혜를 제공했지만, 중국이 경제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당 1당 독재국가로 남아 있는 것도 미국을 좌절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는 사이에 미국 국내에서 일이 벌어졌어요.”
힐빌리, 트럼프, 내셔널리즘
― 경제 문제인가요.
“그렇죠. 해외 주둔 미군의 유지 비용, 분쟁 지역에서의 군사작전 비용 등의 직접적 경제 부담과 함께 미국은 우방국가에 대한 간접적 경제 지원을 위해 베풀던 시혜적(施惠的) 교역 조건 허용 등으로 많은 부담을 안아왔습니다.
원래 미국은 모든 공업 분야에서 앞서 있었지만, 그동안 우방을 돕다가 미국 동부의 섬유공업은 메이드 인 코리아, 메이드 인 차이나에 다 깨져나갔어요. 디트로이트부터 뉴올리언스로 이어지는 중부의 자동차 공업은 토요타, 현대에 다 깨졌고…. 세계를 위해 미국이 희생해왔는데, 그 때문에 미국 내 중산층(中産層)이 희생하게 된 거죠.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중산층이 굳건해야 하는 제도인데, 이 중산층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경제적 상황을 옆하고도 비교하지만 자기 아버지 세대와도 비교합니다. 아버지 세대에는 애팔래치아산맥에 살던 촌놈, 힐빌리(Hillbilly)들이 디트로이트 등으로 나와서 공장에서 일하면서 잘살게 되고,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자부심을 갖고 자유민주주의를 튼튼하게 지켰는데, 지금은 토요타와 현대가 들어와 디트로이트가 먼지 펄펄 날리게 됐잖아요? J.D 밴스의 《힐빌리 앨러지》를 읽어보면 그런 얘기가 나와요. 이들의 불만이 보통이 아니게 됐는데, 그걸 이용한 사람이 트럼프입니다.”
― 그렇죠.
“우리는 트럼프 개인이 아니라 트럼프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든 트럼피즘(Trumpism)에 주목해야 합니다.
트럼프가 나와서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우면서, ‘지금 우리가 세계 내다보게 생겼니, 내 코가 석 자인데…. 나는 러스트벨트(rust belt)를 살리겠다. 바깥은 모르겠다’고 하니, 표가 몰려 대통령이 됐잖아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후 동맹도 재평가하면서, 나토(NATO)가 허물어지고 있고, 한미동맹도 와해돼가고 있어요. 이렇게 미국이 후퇴하는 바람에 다른 나라들이 정신이 번쩍 들어 ‘미국만 믿고 있을 수 없다’면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데, 그걸 내셔널리즘(nationalism·민족주의)의 복귀라고 표현하는 거죠.”
3000개 민족, 200개 국가
― 내셔널리즘을 억제하고 인간의 이성(理性)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세계로 나갈 수 있으리라던 것은 인간의 착각이었을까요.
“거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해요. 문화 동질성을 가졌다고 믿는 인간의 집단이 민족입니다. 그럼 문화란 무엇이냐? 생활양식의 총화(總和)를 문화라고 합니다. 문화는 여러 가지로 드러나는데, 언어를 비롯해 문화양식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만나면 누구나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문화 동질성을 공유한 사람이 같이 모이는 것이고, 그게 바탕이 되어서 부족국가에서 민족국가까지 발전해온 거잖아요? 이제 팍스 아메리카나가 좌절되고 각자도생을 하려니까, 다시 그 마음 편한 민족 단위로 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 그렇다고 해도 유럽연합(EU) 통합까지 진행돼온 유럽에서 수백 년 동안 같은 나라로 살던 스페인의 카탈루냐, 영국의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요구하고 나서는 것은 충격입니다.
“전 세계에 자기들의 독자적인 생활양식을 지키면서 살고 싶어 하는 민족단위가 약 3000개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국제질서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고 있는 나라는 200개밖에 안 돼요. 대부분의 민족은 다른 민족이 지배하는 국가 내에서 소수(少數)민족으로 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서 2등 민족으로 차별받으면서 살고 있는 이들은 언젠가는 자기들만의 자주국가를 만들어 당당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오늘날 국제사회가 불안정한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국가단위와 민족단위가 불일치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 그 모순을 극복할 방안은 없을까요.
“옛 제국주의 국가가 다스리던 식민지들을 독립시킨 후 유엔에 가입하도록 한 것이나,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연합(CIS)을 만들었던 것처럼 자주를 원하는 민족을 전부 독립시키고 협조 체제를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理想的)이겠죠.”
― 그게 어디 뜻대로 되겠습니까.
“물론 어려운 일이죠. 예컨대 중국의 경우 한족(漢族)을 비롯해 56개 민족으로 되어 있는데, 적어도 신장(新疆) 위구르와 티베트 정도는 독립시켜주고 CIS 같은 시스템 아래서 서로 협력할 수 있다면 좋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되겠어요? 중국은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덩치가 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하나의 중국’ 원칙은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죠. 홍콩 사태를 진압하는 것을 봐요. 대만(臺灣)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 홍콩 사태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을 재선시킨 대만 선거 결과를 보면, 시진핑(習近平)이 말하는 ‘중국몽(中國夢)’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민족주의의 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문화 동질성을 가진 인간의 집단이 민족이고, 생활양식의 총화가 문화라고 했잖아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도 문화의 중요한 일부지요. 대만이나 홍콩은 문화라는 점에서 보면, 중국보다는 일본이나 미국, 한국을 더 가깝게 느낄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그들은 이제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3반도 발전계획’과 ‘수복해야 할 중국 땅’
― 하지만 시진핑 정권이 ‘중국몽’을 내세우면서 중화패권주의는 더욱 더 강화되는 것 같습니다.
“중국은 중국몽을 달성할 때까지 미국의 지배권을 존중하되, 중국이 역사적으로 지배해왔던 아시아 지역에 대해서는 미국도 중국의 지배를 허용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이 주장하는 이른바 ‘신형강대국관계’입니다. 중국은 구체적으로 미국이 이 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는 AA/AD(Anti-Access/Anti-Denial) 정책을 펴고 있어요. 그리고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선언, 옛 실크로드에 해당하는 중앙아시아~유럽 간 육상 통로 해당 지역과 동남아~인도양~중동~유럽에 이르는 해상 실크로드 해당 지역을 중국 영향권에 넣으려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 그런 중국 정책이 한반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중국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어요. 북한은 중국의 외성(外省·자치구)으로 편입시키고, 한국은 반중(反中)을 하지 못하는 반속국(半屬國)으로 만드는 것이죠. 옛 냉전(冷戰) 시절 핀란드가 소련에 외교·안보정책상 종속된 것처럼 한국을 핀란드화(Finlandization)하는 것이 중국의 목표예요.”
― 증거가 있나요.
“아주 오래전 내가 학술 교류 등을 위해 중국을 자주 드나들던 시기의 일이에요. 한번은 중국의 (직위가) 상당히 높은 사람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책상 위에 놓인 서류가 눈에 들어오는데 제목이 ‘3반도(半島) 발전계획’이었어요. 중국에는 반도가 산둥(山東)반도와 랴오둥(遼東)반도 둘밖에 없잖아요. 가만히 보니 나머지 하나는 조선반도더군요.”
― 어이가 없네요.
“그 사람 사무실 벽에 걸린 지도를 보니, ‘수복해야 할 중국 땅’이라고 되어 있는데 ‘연해주(沿海州), 1858년 아이훈조약으로 러시아에 빼앗김’ ‘조선반도, 1894년 일본에 빼앗김’ 하는 식으로 써놨어요. 그들의 머릿속에 한반도는 조선성(朝鮮省)이고, 지금은 잠깐 빼앗겼지만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땅인 거죠. 그래서 시진핑이 미국에 갔을 때,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전통적으로 우리 것’이라고 했던 거 아니겠어요?”
― 하긴 중국인의 의식 속에는 국제질서는 동등한 주권국가 간의 질서라는 생각이 전혀 없죠.
“그들의 사고(思考)방식 속에는 피라미드적인 위계(位階)질서밖에는 없어요. 옛날 조공(租貢)체제적인 사고방식….”
― 중국이 지금 한국에 ‘우리가 잘해줄게’라고 하는 것은 ‘우리 밑에 들어와서 굴종하면 독립국 간판은 유지시켜줄게’ 하는 거겠죠.
“그게 핀란드화죠.”
― 과거 핀란드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련에 대한 외교·안보상 굴종이 내정(內政) 간섭으로까지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했더군요.
“바로 그거예요. 땅까지 갈라주면서 피눈물 나는 시절을 보냈지만, 그 작은 나라가 싸워서 지지 않을 만큼 독한 군대도 만들어놓았고….”
‘고슴도치 전략’
― 1939~1940년 겨울전쟁 당시 핀란드가 아주 독하게 싸웠기 때문에 소련도 발틱 3국처럼 핀란드를 합병하거나 동유럽 국가들처럼 위성국가로 편입시키지 못했죠. 문제는 우리에게 그런 결기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결기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항상 얘기하는 게 ‘고슴도치 전략’입니다. 유사시 중국에 ‘너희와 전쟁을 하면 우리는 죽겠지. 그러나 그냥 죽지는 않겠다. 적어도 베이징(北京)하고 상하이(上海)는 날려버리고 죽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중국은 우리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중국과 우리는 오랜 세월 함께 돕고 살아야 할 소중한 친구”(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파리가 말 궁둥이에 붙어가듯 우리도 중국에 붙어가야 한다”(박원순 서울시장) 같은 맥 빠지는 소리와 비교해볼 때,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 저도 늘 중국에 대해 ‘우리를 죽이려면 너희도 팔다리 하나는 잃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중국 인구의 80%가 해안가에 살고 있는데, 우리 착탄(着彈)거리 안에 있습니다. 결심만 하면 할 수 있어요. 우리도 기죽을 거 없습니다. 당당하게 할 수 있어요.”
―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고슴도치의 가시’에 해당하는 군사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명박 정권 시절 장기국방계획에서 구축하려 했던 3-K전력(戰力), 즉 적공격능력 선제타격능력(Kill Chain),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Korea Air and Missile Defence), 대량응징보복(KMPR·Korea Massive Punishment Retaliation) 전력만 갖추면, ‘대중(對中) 고슴도치 전략’ 능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 그게 가능할까요.
“우선 미국과의 미사일 협정을 개정하고, 현재 800km까지로 되어 있는 사거리(射距離) 제한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핵(核) 재처리 금지를 풀어서 당장 핵무기를 갖지는 않더라도 언제든 가질 수 있는 상태까지 해놓아야 합니다.”
가치동맹
―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장거리미사일이나 핵무기를 가져도 미국이나 미국 동맹국에 해롭지 않다는 믿음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 벌써 세 번이나 좌파 정권이 들어서서, 점점 더 신뢰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가는 판국에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그런 믿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한미동맹을 가치(價値)동맹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정체성(正體性)을 분명히 하면 한미동맹이 굳건해지고, 그 틀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억지능력만 다 갖추어놓으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중국도 우리에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에요.”
― 문재인 정권이 원전(原電)폐기 정책을 고집하는 게, 중국이나 북한의 사주(使嗾)를 받아서 우리나라의 원자력 잠재력을 파괴하기 위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거예요. 미국에서 나온 평가보고서에는 핵 재처리를 풀어만 주면 한국은 1년 이내에 핵무장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요. 재미있는 게, 일본은 한국이 도와주면 (일본이 한국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한국이 일본을 도와주는 거예요) 반 년 이내에 핵무장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더군요.”
― 한국이 일본을 도와준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일본은 기왕에 핵연료 재처리해놓은 것으로 원자폭탄을 1만 개 이상 만들 수 있어요. 우리도 재처리할 수 있게만 되면, 우리가 갖고 있는 핵연료를 가지고도 수백 개를 만들 수 있어요. 그런데 일본이 약한 게 원자탄을 터뜨리는 기폭(起爆)장치예요. 미국 보고서에서 한국은 이 부분에서 일본보다 앞서 있다고 보고 있어요.”
‘합의도 안 지키는 게 어떻게 나라냐’
― 한국과 일본은 안보 면에서 정말 협력할 게 많군요. 그런데 한일관계가 이렇게 엉망이 되어버렸으니 답답합니다.
“제일 기가 찬 게 지소미아(GSOMIA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입니다. 작년에 문재인 정부가 지소미아를 카드로 쓰겠다고 했을 때, 어이가 없었어요. ‘일본이 지소미아를 카드로 쓰겠다고 하면 말이 되지만, 우리가 지소미아를 무기로 쓴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싶더군요. 그건 심각한 자해(自害)행위입니다.
우리는 지소미아하고 악사(ACSA·한일상호군수지원협정)가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어요. 이것은 우리 군인들도 알고, 일본 군인들도 알아요. 그런데 그걸 대일(對日) 카드로 쓰겠다니, 지소미아가 뭔지도 모르는 거죠. 지소미아는 정치적 이유 등으로 정식 동맹까지는 하지 못해도 한국과 일본을 준(準)동맹으로 묶어주는 장치였습니다.”
― 위안부 협정도 그렇고, 국가 간 협정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질서의 핵심은 규범입니다. 한일 갈등에 대한 일본의 입장은 ‘합의도 안 지키는 게 어떻게 나라냐’는 것인데, 할 말이 없지요.”
― 일본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대한민국과 맺은 약속이 지켜지겠느냐’고 생각하겠지요.
“일본은 현 정부하고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정부끼리 싸우다가도 정부가 바뀌면 관계가 좋아지기도 하는데, 이제는 일본 국민들이 한국에 대해서 지쳤어요. 피로감이죠. ‘조선놈은 별 수 없다’는 생각이 일본 국민들 일반에 팽배해 있어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문제입니다.”
―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점점 외톨이가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미국과 중국 간의 신(新)냉전 시대가 이미 시작됐어요. 그런데 일본은 미국에 ‘한국이 하던 몫을 일본이 더 맡아서 해줄 테니 한국을 버려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사실 군사기술 발전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데 있어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예전보다 못해졌어요. 한국이 없어도 미일관계만으로도 대중(對中) 견제가 가능해진 거죠. 이게 지금의 미일관계입니다.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을 세우고 미국·일본·호주·인도의 4각 협력체제를 구축했는데, 한국은 여기서 빠졌어요. 최근 남중국해에서의 해상훈련에서도 필리핀·호주·일본은 참여했지만, 한국은 빠졌고…. 이렇게 가면 한국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거예요.”
― 한미동맹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한미동맹을 재조정하고 있는데, 방위비 분담금 문제를 잘 봐야 합니다. 분담금 액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미국이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는 논리를 사람들이 정확하게 모르고 있어요.”
―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동안은 한미동맹 아래서 미국이 우리 동맹국이기 때문에 같이 싸우는 것이었고, 그러니까 자기들 비용은 스스로 부담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1조원 정도 부담하고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한국인 노무자 월급, 땅값, 전기세, 수도세 등 사실상 우리가 쓰는 비용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한국을 동맹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을 붙잡아두기를 원한다면, 거기에 필요한 비용은 한국이 부담하라는 것입니다.”
― 무서운 얘기군요.
“이거는 분담금을 얼마나 부담하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에요. 한미 두 나라가 동맹관계를 회복하고, 진정한 가치동맹이 되면 다 해결될 문제예요. 친미(親美)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로서 얘기하면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가겠다고 하는 한, 미국과 동맹하는 수밖에 없어요. 미국과의 동맹은 한국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동맹은 당사국 양측이 모두 그 동맹을 필요로 할 때 유지되는 것입니다.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미국이 항상 한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해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미국이 한국과의 동맹을 소중히 여기도록 만들어야만 한미동맹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미동맹 유지 조건
― 미국이 한국과의 동맹을 소중히 여기도록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1970년대 말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철수한다고 했을 때,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해준 얘기가 있어요.
첫째, 이념적 상응성(Ideological compatibility)입니다. 미국의 대외정책의 기본지침은 ‘자유민주주의의 확신 지원’입니다. 미국은 전 세계를 하나의 민주평화공동체로 만드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어요. 이념적 상응성을 갖춘 나라가 아니면 미국 정부도, 미국 국민도 동맹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둘째, 전략적 중요성(Strategic importance)입니다. 당시는 냉전시대니까 소련이 내려오는 것을 막고 일본을 지키기 위해 한국이 필요했습니다. 지금 미국은 중국과의 대결에서 미국에 보탬을 줄 수 있는 지역에 있으면서 군사적으로 미국을 도울 수 있는 나라를 동맹으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일본을 가장 중요한 동맹국으로 존중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셋째, 경제적 이익(Economic interest)입니다. 미국은 미국 본토와 동맹국들의 안전을 위해 많은 경제적 부담을 감수해왔습니다. 이제 미국, 특히 트럼프 정부는 동맹 유지비용과 동맹 유지이익을 대비(對比)해서 동맹 존속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넷째, 동맹국의 자존능력(viobility)입니다. 자립능력을 갖지 못한 허약한 나라를 동맹으로 삼게 되면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부담만 안게 되기 때문입니다.”
―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라면 방위비 분담금 같은 것은 선수를 치겠어요. 지금 우리가 분담금으로 1조원가량을 부담하고 있는데, 우리가 1년에 복지예산으로 120조원을 쓰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안보를 위해 3조원이나 4조원, 맥시멈 5조원을 못 써요? 미국이 신경을 쓰고 있는 동중국해에도 군함을 파견해야 합니다.”
이상우 전 총장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11월 방한(訪韓)했을 때 국회에서 한 연설의 의미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트럼프가 한 연설은 얼핏 들으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했기 때문에 이만큼 번영했고, 북한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저런 꼴이 됐다’면서 한국을 칭찬하는 것처럼 들렸어요. 그래서 트럼프가 혹시 싫은 소리나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많은 사람이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건 ‘한국이 앞으로도 계속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남는다면 동맹관계를 계속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끝이다’는 마지막 경고였어요.”
“북한 체제의 본질은 나치즘”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文在寅) 정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유지보다는 ‘우리민족끼리’식의 사고(思考)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문화 동질성을 공유한 인간의 집단을 민족이라고 할 때, 남북한은 이미 한민족이라고 할 수 없어요. 70년 이상 떨어져서 다른 가치관(價値觀)을 갖고 살아오면서 생활양식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문화 중에서도 중요한 게 정치이념 체제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문화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북한보다 대만과 가까운 거예요. 중국 본토와 대만·홍콩도 달라졌고, 우리도 남북한 간에 달라진 것입니다.
남북한은 과거에는 한민족이었지만, 지금은 사실상 다른 민족이 된 상태입니다. 언젠가는 이를 다시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당위(當爲)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점을 제대로 봐야 우리가 북한을 제대로 다룰 수 있어요.”
이상우 전 총장은 정치이념 체제와 관련해 “북한 체제의 본질은 나치즘”이라고 규정했다.
“우리는 북한을 자꾸 공산주의 국가로 생각하기 때문에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로 시작했지만, 점차 변질되었습니다. 유물론(唯物論)을 버리고 유심론(唯心論)의 극치인 주체사상(主體思想)을 국가 이념으로 내세운 배타적 민족주의와 1당 지배의 전제적(專制的) 사회주의를 배합한 새로운 형태의 나치즘 국가로 변질된 것입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합친 것이 민족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 즉 나치즘입니다. 나치즘이라는 틀로 이해해야 북한 정권의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 그래도 ‘우리민족끼리’라는 북한의 구호가 많이 먹혀들어 갑니다.
“그것은 반미(反美)·반일(反日)을 위해 전략적·정략적(政略的)으로 민족을 내세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북한은 민족을 생각한 적이 없어요. 2300만 인구 중에서 300만명만 남기고 2000만명을 굶기는 게 무슨 놈의 민족주의입니까? 그리고 요즘 같은 세상에서 종족적(種族的) 민족주의를 내세워서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나라도 이미 200만명 이상의 외국인을 포용하는 다민족(多民族)국가로 가고 있잖아요?”
“‘우리민족끼리’에 속지 말아야”
― 세계 6, 7위의 무역대국, 10위권의 경제대국임에도 우리가 아직도 종족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민족은 하나’라면서 통일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죠. 아까도 말한 것처럼 냉혹하게 말하면 남북한은 이미 같은 민족으로 볼 수 없지만, 심정적으로는 아직도 같은 민족인 거죠. 거기에 전교조 교육의 영향도 크고….”
― 나라 안팎에서 민족주의의 격랑이 극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대한민국이 생존해낼 수 있을까요.
“한국민이 북한의 ‘우리민족끼리’라는 전략적인 정감적(情感的) 호소에 속아 ‘반미·반일 종족주의적 민족주의’를 수용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자멸(自滅)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21세기 시대 주류(主流)를 이루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국가들로부터 소외당하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통일’을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국가 목표로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야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 정체성에 저촉(抵觸)되는 통일정책을 택해서는 안 됩니다. 민주국가들과의 연대(連帶) 속에서만 대한민국의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848년에 나온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의 첫 구절이다.
그로부터 17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 그 유령의 이름은 ‘민족주의(nationalism)’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유럽을 떠돌았을 뿐이지만, 이 민족주의라는 유령은 피레네산맥에서 한반도까지, 아니 영국제도(諸島)에서 일본열도(列島)까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온 세계를 떠돌고 있다. 냉전(冷戰)체제의 붕괴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 알았던 유령인지라, 이 유령의 재등장은 사람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한다. 가히 신(新)민족주의 시대라고 할 만하다.
신민족주의 시대가 도래한 원인 등을 짚어보고, 대한민국의 나아갈 바를 모색해보기 위해 한림대 총장을 지낸 이상우(李相禹) 교수를 만났다. 이 전 총장은 1970년대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부터 40여 년간 역대 정권에 외교·안보·통일·국가미래전략 등을 조언해온 정치학계의 원로다. 김영삼(金泳三) 정권 시절에는 대통령자문 21세기위원장, 이명박(李明博) 정권 시절에는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의장, 국방선진화추진위원장, 외교경쟁력강화특별위원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사단법인 신아시아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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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미국 자동차회사 크라이슬러가 파산보호신청에 들어간 후 미국 미시간주 워런시 마운드로드에 위치한 크라이슬러의 트럭조립공장은 텅 비어버렸다. 사진=조선DB |
“냉전에서 승리한 후 미국이 추진해온 ‘미국 주도의 평화질서(Pax Americana·팍스 아메리카나)’가 좌절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한 후 그들이 꿈꾸어오던 ‘단일세계민주공동체(One world community of free market democracy)’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세계 모든 국가가 민주국가가 되면 민주국가들로 구성되는 하나의 세계민주공동체가 이루어지고 팍스 아메리카나가 완성될 것으로 본 거지요. 이를 위해 미국은 그들 표현으로 ‘선교자적 사명감’을 갖고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타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어요. 그런데 그러는 과정에서 두 가지 회의(懷疑)가 오게 됐어요.”
― 그게 뭡니까.
“하나는 민주주의의 후퇴 현상입니다. 2003년 기준으로 세계 192개국 중 160개국이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었고, 이 중에서 93개국은 ‘완전한 민주주의’ 체제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8년에는 26개국만이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인정받았어요. 민주의식이 확고한 국민이 전체 국민 중 다수를 차지하지 못한 나라에서 등가(等價)참여의 민주정치 제도를 악용하여 대중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가 정권을 장악하는 비민주적 지배 체제(illiberal democracy)를 구축하여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것이죠.
또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시작할 때 중국을 잘살게 해주면 민주화될 것으로 보고 여러 가지 특혜를 제공했지만, 중국이 경제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당 1당 독재국가로 남아 있는 것도 미국을 좌절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는 사이에 미국 국내에서 일이 벌어졌어요.”
힐빌리, 트럼프, 내셔널리즘
― 경제 문제인가요.
“그렇죠. 해외 주둔 미군의 유지 비용, 분쟁 지역에서의 군사작전 비용 등의 직접적 경제 부담과 함께 미국은 우방국가에 대한 간접적 경제 지원을 위해 베풀던 시혜적(施惠的) 교역 조건 허용 등으로 많은 부담을 안아왔습니다.
원래 미국은 모든 공업 분야에서 앞서 있었지만, 그동안 우방을 돕다가 미국 동부의 섬유공업은 메이드 인 코리아, 메이드 인 차이나에 다 깨져나갔어요. 디트로이트부터 뉴올리언스로 이어지는 중부의 자동차 공업은 토요타, 현대에 다 깨졌고…. 세계를 위해 미국이 희생해왔는데, 그 때문에 미국 내 중산층(中産層)이 희생하게 된 거죠.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중산층이 굳건해야 하는 제도인데, 이 중산층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경제적 상황을 옆하고도 비교하지만 자기 아버지 세대와도 비교합니다. 아버지 세대에는 애팔래치아산맥에 살던 촌놈, 힐빌리(Hillbilly)들이 디트로이트 등으로 나와서 공장에서 일하면서 잘살게 되고, 자식을 대학에 보내고, 자부심을 갖고 자유민주주의를 튼튼하게 지켰는데, 지금은 토요타와 현대가 들어와 디트로이트가 먼지 펄펄 날리게 됐잖아요? J.D 밴스의 《힐빌리 앨러지》를 읽어보면 그런 얘기가 나와요. 이들의 불만이 보통이 아니게 됐는데, 그걸 이용한 사람이 트럼프입니다.”
― 그렇죠.
“우리는 트럼프 개인이 아니라 트럼프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든 트럼피즘(Trumpism)에 주목해야 합니다.
트럼프가 나와서 ‘아메리카 퍼스트’를 내세우면서, ‘지금 우리가 세계 내다보게 생겼니, 내 코가 석 자인데…. 나는 러스트벨트(rust belt)를 살리겠다. 바깥은 모르겠다’고 하니, 표가 몰려 대통령이 됐잖아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후 동맹도 재평가하면서, 나토(NATO)가 허물어지고 있고, 한미동맹도 와해돼가고 있어요. 이렇게 미국이 후퇴하는 바람에 다른 나라들이 정신이 번쩍 들어 ‘미국만 믿고 있을 수 없다’면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데, 그걸 내셔널리즘(nationalism·민족주의)의 복귀라고 표현하는 거죠.”
3000개 민족, 200개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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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홍콩의 反中시위 기간 중 거리에는 중국을 나치에 비유하는 구호가 나붙었다. 사진=뉴시스/AP |
“거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해요. 문화 동질성을 가졌다고 믿는 인간의 집단이 민족입니다. 그럼 문화란 무엇이냐? 생활양식의 총화(總和)를 문화라고 합니다. 문화는 여러 가지로 드러나는데, 언어를 비롯해 문화양식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만나면 누구나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문화 동질성을 공유한 사람이 같이 모이는 것이고, 그게 바탕이 되어서 부족국가에서 민족국가까지 발전해온 거잖아요? 이제 팍스 아메리카나가 좌절되고 각자도생을 하려니까, 다시 그 마음 편한 민족 단위로 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 그렇다고 해도 유럽연합(EU) 통합까지 진행돼온 유럽에서 수백 년 동안 같은 나라로 살던 스페인의 카탈루냐, 영국의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요구하고 나서는 것은 충격입니다.
“전 세계에 자기들의 독자적인 생활양식을 지키면서 살고 싶어 하는 민족단위가 약 3000개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국제질서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고 있는 나라는 200개밖에 안 돼요. 대부분의 민족은 다른 민족이 지배하는 국가 내에서 소수(少數)민족으로 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서 2등 민족으로 차별받으면서 살고 있는 이들은 언젠가는 자기들만의 자주국가를 만들어 당당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오늘날 국제사회가 불안정한 이유 중 하나는 이처럼 국가단위와 민족단위가 불일치하는 데서 기인합니다.”
― 그 모순을 극복할 방안은 없을까요.
“옛 제국주의 국가가 다스리던 식민지들을 독립시킨 후 유엔에 가입하도록 한 것이나,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연합(CIS)을 만들었던 것처럼 자주를 원하는 민족을 전부 독립시키고 협조 체제를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理想的)이겠죠.”
― 그게 어디 뜻대로 되겠습니까.
“물론 어려운 일이죠. 예컨대 중국의 경우 한족(漢族)을 비롯해 56개 민족으로 되어 있는데, 적어도 신장(新疆) 위구르와 티베트 정도는 독립시켜주고 CIS 같은 시스템 아래서 서로 협력할 수 있다면 좋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되겠어요? 중국은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덩치가 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하나의 중국’ 원칙은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죠. 홍콩 사태를 진압하는 것을 봐요. 대만(臺灣)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 홍콩 사태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을 재선시킨 대만 선거 결과를 보면, 시진핑(習近平)이 말하는 ‘중국몽(中國夢)’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민족주의의 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문화 동질성을 가진 인간의 집단이 민족이고, 생활양식의 총화가 문화라고 했잖아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도 문화의 중요한 일부지요. 대만이나 홍콩은 문화라는 점에서 보면, 중국보다는 일본이나 미국, 한국을 더 가깝게 느낄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그들은 이제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 하지만 시진핑 정권이 ‘중국몽’을 내세우면서 중화패권주의는 더욱 더 강화되는 것 같습니다.
“중국은 중국몽을 달성할 때까지 미국의 지배권을 존중하되, 중국이 역사적으로 지배해왔던 아시아 지역에 대해서는 미국도 중국의 지배를 허용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이 주장하는 이른바 ‘신형강대국관계’입니다. 중국은 구체적으로 미국이 이 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는 AA/AD(Anti-Access/Anti-Denial) 정책을 펴고 있어요. 그리고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선언, 옛 실크로드에 해당하는 중앙아시아~유럽 간 육상 통로 해당 지역과 동남아~인도양~중동~유럽에 이르는 해상 실크로드 해당 지역을 중국 영향권에 넣으려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 그런 중국 정책이 한반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중국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어요. 북한은 중국의 외성(外省·자치구)으로 편입시키고, 한국은 반중(反中)을 하지 못하는 반속국(半屬國)으로 만드는 것이죠. 옛 냉전(冷戰) 시절 핀란드가 소련에 외교·안보정책상 종속된 것처럼 한국을 핀란드화(Finlandization)하는 것이 중국의 목표예요.”
― 증거가 있나요.
“아주 오래전 내가 학술 교류 등을 위해 중국을 자주 드나들던 시기의 일이에요. 한번은 중국의 (직위가) 상당히 높은 사람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책상 위에 놓인 서류가 눈에 들어오는데 제목이 ‘3반도(半島) 발전계획’이었어요. 중국에는 반도가 산둥(山東)반도와 랴오둥(遼東)반도 둘밖에 없잖아요. 가만히 보니 나머지 하나는 조선반도더군요.”
― 어이가 없네요.
“그 사람 사무실 벽에 걸린 지도를 보니, ‘수복해야 할 중국 땅’이라고 되어 있는데 ‘연해주(沿海州), 1858년 아이훈조약으로 러시아에 빼앗김’ ‘조선반도, 1894년 일본에 빼앗김’ 하는 식으로 써놨어요. 그들의 머릿속에 한반도는 조선성(朝鮮省)이고, 지금은 잠깐 빼앗겼지만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땅인 거죠. 그래서 시진핑이 미국에 갔을 때,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은 전통적으로 우리 것’이라고 했던 거 아니겠어요?”
― 하긴 중국인의 의식 속에는 국제질서는 동등한 주권국가 간의 질서라는 생각이 전혀 없죠.
“그들의 사고(思考)방식 속에는 피라미드적인 위계(位階)질서밖에는 없어요. 옛날 조공(租貢)체제적인 사고방식….”
― 중국이 지금 한국에 ‘우리가 잘해줄게’라고 하는 것은 ‘우리 밑에 들어와서 굴종하면 독립국 간판은 유지시켜줄게’ 하는 거겠죠.
“그게 핀란드화죠.”
― 과거 핀란드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련에 대한 외교·안보상 굴종이 내정(內政) 간섭으로까지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했더군요.
“바로 그거예요. 땅까지 갈라주면서 피눈물 나는 시절을 보냈지만, 그 작은 나라가 싸워서 지지 않을 만큼 독한 군대도 만들어놓았고….”
‘고슴도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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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는 1939~1940년 소련과의 전쟁에서 격렬하게 싸운 덕분에 핀란드화라는 굴종을 감수하기는 했지만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우리도 그런 결기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항상 얘기하는 게 ‘고슴도치 전략’입니다. 유사시 중국에 ‘너희와 전쟁을 하면 우리는 죽겠지. 그러나 그냥 죽지는 않겠다. 적어도 베이징(北京)하고 상하이(上海)는 날려버리고 죽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중국은 우리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중국과 우리는 오랜 세월 함께 돕고 살아야 할 소중한 친구”(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파리가 말 궁둥이에 붙어가듯 우리도 중국에 붙어가야 한다”(박원순 서울시장) 같은 맥 빠지는 소리와 비교해볼 때,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 저도 늘 중국에 대해 ‘우리를 죽이려면 너희도 팔다리 하나는 잃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중국 인구의 80%가 해안가에 살고 있는데, 우리 착탄(着彈)거리 안에 있습니다. 결심만 하면 할 수 있어요. 우리도 기죽을 거 없습니다. 당당하게 할 수 있어요.”
―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고슴도치의 가시’에 해당하는 군사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명박 정권 시절 장기국방계획에서 구축하려 했던 3-K전력(戰力), 즉 적공격능력 선제타격능력(Kill Chain),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Korea Air and Missile Defence), 대량응징보복(KMPR·Korea Massive Punishment Retaliation) 전력만 갖추면, ‘대중(對中) 고슴도치 전략’ 능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
― 그게 가능할까요.
“우선 미국과의 미사일 협정을 개정하고, 현재 800km까지로 되어 있는 사거리(射距離) 제한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핵(核) 재처리 금지를 풀어서 당장 핵무기를 갖지는 않더라도 언제든 가질 수 있는 상태까지 해놓아야 합니다.”
―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장거리미사일이나 핵무기를 가져도 미국이나 미국 동맹국에 해롭지 않다는 믿음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 벌써 세 번이나 좌파 정권이 들어서서, 점점 더 신뢰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가는 판국에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그런 믿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한미동맹을 가치(價値)동맹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정체성(正體性)을 분명히 하면 한미동맹이 굳건해지고, 그 틀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억지능력만 다 갖추어놓으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중국도 우리에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에요.”
― 문재인 정권이 원전(原電)폐기 정책을 고집하는 게, 중국이나 북한의 사주(使嗾)를 받아서 우리나라의 원자력 잠재력을 파괴하기 위한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거예요. 미국에서 나온 평가보고서에는 핵 재처리를 풀어만 주면 한국은 1년 이내에 핵무장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요. 재미있는 게, 일본은 한국이 도와주면 (일본이 한국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한국이 일본을 도와주는 거예요) 반 년 이내에 핵무장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더군요.”
― 한국이 일본을 도와준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일본은 기왕에 핵연료 재처리해놓은 것으로 원자폭탄을 1만 개 이상 만들 수 있어요. 우리도 재처리할 수 있게만 되면, 우리가 갖고 있는 핵연료를 가지고도 수백 개를 만들 수 있어요. 그런데 일본이 약한 게 원자탄을 터뜨리는 기폭(起爆)장치예요. 미국 보고서에서 한국은 이 부분에서 일본보다 앞서 있다고 보고 있어요.”
‘합의도 안 지키는 게 어떻게 나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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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좌파는 한·미·일 안보협력 장치인 지소미아 파기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제일 기가 찬 게 지소미아(GSOMIA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입니다. 작년에 문재인 정부가 지소미아를 카드로 쓰겠다고 했을 때, 어이가 없었어요. ‘일본이 지소미아를 카드로 쓰겠다고 하면 말이 되지만, 우리가 지소미아를 무기로 쓴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싶더군요. 그건 심각한 자해(自害)행위입니다.
우리는 지소미아하고 악사(ACSA·한일상호군수지원협정)가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어요. 이것은 우리 군인들도 알고, 일본 군인들도 알아요. 그런데 그걸 대일(對日) 카드로 쓰겠다니, 지소미아가 뭔지도 모르는 거죠. 지소미아는 정치적 이유 등으로 정식 동맹까지는 하지 못해도 한국과 일본을 준(準)동맹으로 묶어주는 장치였습니다.”
― 위안부 협정도 그렇고, 국가 간 협정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질서의 핵심은 규범입니다. 한일 갈등에 대한 일본의 입장은 ‘합의도 안 지키는 게 어떻게 나라냐’는 것인데, 할 말이 없지요.”
― 일본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대한민국과 맺은 약속이 지켜지겠느냐’고 생각하겠지요.
“일본은 현 정부하고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정부끼리 싸우다가도 정부가 바뀌면 관계가 좋아지기도 하는데, 이제는 일본 국민들이 한국에 대해서 지쳤어요. 피로감이죠. ‘조선놈은 별 수 없다’는 생각이 일본 국민들 일반에 팽배해 있어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문제입니다.”
―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점점 외톨이가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미국과 중국 간의 신(新)냉전 시대가 이미 시작됐어요. 그런데 일본은 미국에 ‘한국이 하던 몫을 일본이 더 맡아서 해줄 테니 한국을 버려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사실 군사기술 발전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데 있어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예전보다 못해졌어요. 한국이 없어도 미일관계만으로도 대중(對中) 견제가 가능해진 거죠. 이게 지금의 미일관계입니다.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을 세우고 미국·일본·호주·인도의 4각 협력체제를 구축했는데, 한국은 여기서 빠졌어요. 최근 남중국해에서의 해상훈련에서도 필리핀·호주·일본은 참여했지만, 한국은 빠졌고…. 이렇게 가면 한국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는 거예요.”
― 한미동맹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트럼프가 한미동맹을 재조정하고 있는데, 방위비 분담금 문제를 잘 봐야 합니다. 분담금 액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미국이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는 논리를 사람들이 정확하게 모르고 있어요.”
―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동안은 한미동맹 아래서 미국이 우리 동맹국이기 때문에 같이 싸우는 것이었고, 그러니까 자기들 비용은 스스로 부담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1조원 정도 부담하고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한국인 노무자 월급, 땅값, 전기세, 수도세 등 사실상 우리가 쓰는 비용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한국을 동맹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을 붙잡아두기를 원한다면, 거기에 필요한 비용은 한국이 부담하라는 것입니다.”
― 무서운 얘기군요.
“이거는 분담금을 얼마나 부담하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에요. 한미 두 나라가 동맹관계를 회복하고, 진정한 가치동맹이 되면 다 해결될 문제예요. 친미(親美)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로서 얘기하면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가겠다고 하는 한, 미국과 동맹하는 수밖에 없어요. 미국과의 동맹은 한국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동맹은 당사국 양측이 모두 그 동맹을 필요로 할 때 유지되는 것입니다.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미국이 항상 한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해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미국이 한국과의 동맹을 소중히 여기도록 만들어야만 한미동맹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미동맹 유지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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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라피노 교수. |
“1970년대 말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철수한다고 했을 때,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가 해준 얘기가 있어요.
첫째, 이념적 상응성(Ideological compatibility)입니다. 미국의 대외정책의 기본지침은 ‘자유민주주의의 확신 지원’입니다. 미국은 전 세계를 하나의 민주평화공동체로 만드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어요. 이념적 상응성을 갖춘 나라가 아니면 미국 정부도, 미국 국민도 동맹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둘째, 전략적 중요성(Strategic importance)입니다. 당시는 냉전시대니까 소련이 내려오는 것을 막고 일본을 지키기 위해 한국이 필요했습니다. 지금 미국은 중국과의 대결에서 미국에 보탬을 줄 수 있는 지역에 있으면서 군사적으로 미국을 도울 수 있는 나라를 동맹으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일본을 가장 중요한 동맹국으로 존중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셋째, 경제적 이익(Economic interest)입니다. 미국은 미국 본토와 동맹국들의 안전을 위해 많은 경제적 부담을 감수해왔습니다. 이제 미국, 특히 트럼프 정부는 동맹 유지비용과 동맹 유지이익을 대비(對比)해서 동맹 존속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넷째, 동맹국의 자존능력(viobility)입니다. 자립능력을 갖지 못한 허약한 나라를 동맹으로 삼게 되면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부담만 안게 되기 때문입니다.”
―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라면 방위비 분담금 같은 것은 선수를 치겠어요. 지금 우리가 분담금으로 1조원가량을 부담하고 있는데, 우리가 1년에 복지예산으로 120조원을 쓰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안보를 위해 3조원이나 4조원, 맥시멈 5조원을 못 써요? 미국이 신경을 쓰고 있는 동중국해에도 군함을 파견해야 합니다.”
이상우 전 총장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11월 방한(訪韓)했을 때 국회에서 한 연설의 의미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트럼프가 한 연설은 얼핏 들으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했기 때문에 이만큼 번영했고, 북한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저런 꼴이 됐다’면서 한국을 칭찬하는 것처럼 들렸어요. 그래서 트럼프가 혹시 싫은 소리나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많은 사람이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그건 ‘한국이 앞으로도 계속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남는다면 동맹관계를 계속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끝이다’는 마지막 경고였어요.”
“북한 체제의 본질은 나치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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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선DB |
“냉정하게 말하자면, 문화 동질성을 공유한 인간의 집단을 민족이라고 할 때, 남북한은 이미 한민족이라고 할 수 없어요. 70년 이상 떨어져서 다른 가치관(價値觀)을 갖고 살아오면서 생활양식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문화 중에서도 중요한 게 정치이념 체제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문화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북한보다 대만과 가까운 거예요. 중국 본토와 대만·홍콩도 달라졌고, 우리도 남북한 간에 달라진 것입니다.
남북한은 과거에는 한민족이었지만, 지금은 사실상 다른 민족이 된 상태입니다. 언젠가는 이를 다시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당위(當爲)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점을 제대로 봐야 우리가 북한을 제대로 다룰 수 있어요.”
이상우 전 총장은 정치이념 체제와 관련해 “북한 체제의 본질은 나치즘”이라고 규정했다.
“우리는 북한을 자꾸 공산주의 국가로 생각하기 때문에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하는 공산주의 국가로 시작했지만, 점차 변질되었습니다. 유물론(唯物論)을 버리고 유심론(唯心論)의 극치인 주체사상(主體思想)을 국가 이념으로 내세운 배타적 민족주의와 1당 지배의 전제적(專制的) 사회주의를 배합한 새로운 형태의 나치즘 국가로 변질된 것입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합친 것이 민족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 즉 나치즘입니다. 나치즘이라는 틀로 이해해야 북한 정권의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 그래도 ‘우리민족끼리’라는 북한의 구호가 많이 먹혀들어 갑니다.
“그것은 반미(反美)·반일(反日)을 위해 전략적·정략적(政略的)으로 민족을 내세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북한은 민족을 생각한 적이 없어요. 2300만 인구 중에서 300만명만 남기고 2000만명을 굶기는 게 무슨 놈의 민족주의입니까? 그리고 요즘 같은 세상에서 종족적(種族的) 민족주의를 내세워서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나라도 이미 200만명 이상의 외국인을 포용하는 다민족(多民族)국가로 가고 있잖아요?”
“‘우리민족끼리’에 속지 말아야”
― 세계 6, 7위의 무역대국, 10위권의 경제대국임에도 우리가 아직도 종족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민족은 하나’라면서 통일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죠. 아까도 말한 것처럼 냉혹하게 말하면 남북한은 이미 같은 민족으로 볼 수 없지만, 심정적으로는 아직도 같은 민족인 거죠. 거기에 전교조 교육의 영향도 크고….”
― 나라 안팎에서 민족주의의 격랑이 극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대한민국이 생존해낼 수 있을까요.
“한국민이 북한의 ‘우리민족끼리’라는 전략적인 정감적(情感的) 호소에 속아 ‘반미·반일 종족주의적 민족주의’를 수용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자멸(自滅)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21세기 시대 주류(主流)를 이루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국가들로부터 소외당하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처지에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통일’을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국가 목표로 흔들림 없이 지켜나가야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 정체성에 저촉(抵觸)되는 통일정책을 택해서는 안 됩니다. 민주국가들과의 연대(連帶) 속에서만 대한민국의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