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흥국tv’로 유튜브 방송 도전
⊙ 2018년 미투 의혹, 최종 무혐의
⊙ 문제가 됐던 ‘그 여자’는 징역살이 중
⊙ 2018년 미투 의혹, 최종 무혐의
⊙ 문제가 됐던 ‘그 여자’는 징역살이 중
- 지난 1월 7일 서울 동부이촌동에서 만난 김흥국씨.
“터가 좋다잖아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왜 동부이촌동에서 보자 했는지 물은 참이다. 지난 1월 7일 서울 동부이촌동의 한 카페에서 방송인 김흥국(61)을 만났다. 1985년 노래 ‘창백한 꽃잎’으로 데뷔, 무명생활을 거치다 1989년 ‘호랑나비’로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다. 그해 ‘10대 가수’에도 올랐다.
이후 30년은 우리가 기억하는 그대로다. 생각해보면 한 사람이 거친 것이라 믿기 힘들 만큼 다양한 수식어를 지나온 삶이었다. 가수, 라디오 DJ, 월드컵 응원단장, 정몽준 대선후보 특보, 대한가수협회장…. 여기에 풍수애호가 직함도 추가하고 싶은 걸까. 터 얘기를 꺼낸 속내가 궁금했다. 몇 마디 나누자 행간이 보였다. 장난스러운 웃음 뒤에 숨겨진 절박한 소망이랄까. 그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 ‘호랑나비’는 처음에 어떻게 빛을 본 겁니까.
“라디오 〈싱글벙글쇼〉 진행하는 ‘강가의 돌멩이’ 강석 형 덕이었지요.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랑 집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어요. 내 노래는 생전 가도 한 번도 안 나오는데 강석 형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흥국아, 라디오 빨리 틀어라. 처음으로 네 노래 나온다’ 그게 일요일이었어요. 그때는 라디오에서 노래를 틀려면 부장, 국장 거쳐서 결재를 받아야 했나 봐요. 일요일은 좀 자유로운 거지. 강석 형이 라디오 스태프들한테 ‘내 동생인데 형편이 어렵다. 노래 한번 틀어주자’ 해서 처음 전파를 탄 거예요. 어머니랑 들으면서 껴안고 울었어요. ‘우리 늦둥이 막내아들이 소원 풀었구나’ 하고.
그때 저는 매니저도 없었어요. 진짜 인생이 한방이더군요. 일요일까지 아무 스케줄도 없었는데, 아니 월요일부터 전화가 막 걸려오는 거예요. 그해 모든 프로그램을 휩쓸었어요. ‘자고 일어나니 스타’ ‘호랑나비 전국 강타, 춤추다 쓰러져서 병원행’ ‘호랑나비춤 따라 하다 환자 급증, 접골원 만원 사례’ 이런 기사가 신문에 실렸어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너스레인지 모를 얘기는 급기야 조용필씨 얘기로 이어졌다.
이주일, “흥국아, 이제 고생 끝났다”
― 조용필씨가 그해 활동을 ‘호랑나비’에 양보했다는 얘기도 하셨는데… 진짜인가요.
“그때는 조용필씨가 나오면 다른 가수는 상 하나 못 건질 때였어요. 가만히 쉬고 있다가 결정적일 때 나타나서 매해 가요계를 다 평정하는 식이에요. 조용필씨가 이런 얘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동안 서서 다들 점잖게 노래했는데 특이한 호랑나비춤까지 추다니 좋은 아이디어다. 그동안 대한민국이 힘들게 살지 않았느냐. 같이 어울려 춤추게 하는 사람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너 하나다. ‘호랑나비’가 주는 메시지가 크다. 너를 위해 내가 1년을 쉬어줄게. 음악의 힘, 음악의 세계는 이런 거다.’
돌아가신 이주일 선생님도 저를 보더니 이런 말을 해주셨어요.
‘흥국아, 이제 고생 끝났다. 나도 고생하다 늦게 방송 데뷔를 했는데 넌 정말 대단한 놈이다. 난 딱 보면 알잖아. 고생 끝났어.’”
― 돈도 많이 버셨지요. 얼마나 버셨나요.
“그게, 제가 자산 관리를 잘하지 못해요. 씀씀이가 커요. 적당히 쓰고 남기자는 식이 아니라, 많이 쓸수록 많이 들어온다고 믿고 살았어요. 절에서 스님한테 잘못 배웠나 봐요. 평생 술과 사람이 좋았어요. 누가 앞에 앉아서 형편이 어렵다고 하면 못 참겠더라고요. 버는 것보다 많이 썼어요. 연예인 누가 어디에 빌딩 갖고 있다, 땅이 어디에 있다 얘기 들으면, ‘아 나도 할 수 있었는데’ 싶어요. 예전엔 쌌거든요. 부동산에서 연락이 한 번씩 왔어요. ‘10억원 있느냐, 50억원 있느냐. 은행 대출까지 해서 100억원짜리, 200억원짜리 빌딩 살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땐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약간 시무룩해진 그에게 위로를 겸해 물었다.
― 물욕이 없는 게 시청자들에게 전해져 오래 사랑받은 것 아닌가요.
“노래만 했으면 30년 동안 사랑 못 받았죠. 드라마·영화·예능,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덕인 것 같아요. 아마 저 같은 케이스가 없을 거예요. 어떤 프로그램에 나가도 역할을 소화할 수 있게 됐어요.”
‘흥궈신’(흥국의 중국식 발음 ‘흥궈’에 예능의 신이란 뜻으로 ‘신’을 붙임), ‘예능치트키’(어떤 예능 프로그램에도 통한다). 그의 별명이다. 오히려 젊은 층에서 그를 더 좋아하고 찾는다. 남을 희화화하거나 무리한 얘기를 지어내 억지로 웃기지 않는다. 편안하게 하고 싶은 얘기를 막 던지는 것 같은데 한 번씩 ‘빵 터지는’ 유머가 매력이다. 한마디로 부담을 주지 않으며, 즐거움을 주는 보기 드문 캐릭터다. 그의 옆에 있다 불시에 화제가 된 이들도 여럿이다. 조세호는 ‘프로불참러’에 등극했고(안재욱 결혼식에 왜 안 왔어?), 가수 김태원은 예능에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2006년 〈라디오스타〉에 함께 출연).
느닷없이 性폭행 의혹
그에게 지난 2년은 연예인의 삶에서 처음 있은 긴 공백이었다. 2018년 3월 성(性)폭행 의혹에 휘말렸다. 한 뉴스 프로그램이 ‘단독’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해 알려졌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여성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했다. 평소 ‘유쾌한 기러기 아빠’로 여자 문제는 없을 듯한 그였기에 파장은 더욱 컸다.
사건이 결국 어떻게 결론 났는지 잘 알려지지 않은 감이 있다. 성폭행 의혹이 보도된 지 두 달 후 경찰은 ‘조사결과 혐의 없음’이란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그해 11월 검찰에서 ‘혐의 없음’으로 최종 처분을 받았다. 당시 해당 여성은 다른 남성들에게 혼인빙자 사기 건으로 고소당한 상황이었다. 그 여성은 징역 1년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 성폭행 의혹을 최초 보도한 방송사에서 후에 사과는 했습니까.
“전혀요. 무혐의가 됐으면 후속 보도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변호사도 싸우자고 했어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면서요. 언론중재위원회에 이의제기하고,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자고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안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방송사로부터 사과 한마디 못 들었어요. 백번 양보해 보도할 수 있어요. 하지만 무혐의로 결론 났으면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처음 보도한 매체에서 방송에 복귀할 수 있도록 정정보도까지 해줘야 사명감 있는 언론 아닙니까.”
― 수사가 비교적 빨리 종결됐습니다.
“조사에 최대한 협조했어요. 늘어지면 저만 손해 아닙니까. 이 여성이 다른 몇몇 사건에도 연루가 되어 있었어요. 그 상대 사람들이 제보한 거예요. ‘김흥국씨 도와야겠다, 또 걸렸다.’ 수사가 병합이 됐어요. 결국 그 여성은 다른 건으로 징역 살고 있습니다. 그건 아무도 모르잖아요.”
― 해당 여성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했다는 보도가 있는데요.
“그 여성이 저에게 1억5000만원을 요구했잖아요. 그래서 변호사 제안으로 형식상 2억원을 손해배상하라고 소송을 한 거예요. 돈을 받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배상할 능력이 안 돼요. 실형을 선고받았잖아요. 게다가 저도 무혐의로 판명이 났고요. 변호사에게 더 싸워서 뭐하냐 항소하지 말자고 했어요. 손해배상 재판에서 졌다고, 저에게 무슨 혐의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도하면 안 되지요.”
― 타격이 컸겠네요.
“사실 방송 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돈을 못 버는 거는 어떻게든 버티면 되는데, 문제는 가족이 힘든 거였어요. ‘당신 왜 그랬어. 기러기 아빠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대체 왜 그랬어. 어떻게 내가 얼굴을 들고 살아. 동네를 다닐 수 있나,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나’ 이게 너무 힘들었어요.
아이들을 많이 달랬어요.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 아니다. 후에 누구한테든 물어봐라, 내가 어떻게 그동안 살아왔는지. 여보, 당신도 힘들겠지만 나 정말 열심히 살았다. 방송하면서 기러기 생활 나만큼 오래한 사람이 어디 있나.’
한순간에 가족이 무너졌어요. 말도 안 먹혀요. ‘아, 시간이 지나는 수밖에 없겠다. 이젠 시간과의 싸움이다’ 했죠.”
‘흥국 대통령’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축구와 종교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어둠을 뚫고 축구하러 나갔어요. 매일 나갔죠. 낮에는 절에 가 있었어요. 하루에 절을 세 군데 간 적도 있어요. 절에 가면 부처님 앞에서 108배 하고 참선하는 거예요. 눈 감고 앉아 있는 거지.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가만히 부처님 보고 앉아 있으면 별 생각이 다 들어요. 내가 잘 살아왔나 못 살아왔나 스스로 평가하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무너지느냐, 되살아나느냐. 봄이 되면 호랑나비가 다시 날 줄 알았는데 안 날아요. 이거 봐라, 이게 다 때가 있구나.
저녁때는 술 한잔 해야겠는데 사람을 못 만나요. 사람이 두려웠어요. 마음 편한 사람들만 만났어요. 그 사건을 물어보지 않는 사람. ‘그 여자 어떻게 생겼나’ 이런 질문해오면 술 마시다 일어나기도 했어요. 옥석을 가리게 됐다고 할까. 인간관계를 많이 정리했어요. 휴대전화 연락처 지우느라 손에 쥐가 났을 정도니까요. 몇천 명을 지웠어요. 그런 시간이 힘들었어요. ”
그는 2015년 대한가수협회 회장에 선출됐다. 이후 추문에 연루된 데는 가수협회 내부의 내홍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회장을 하지 말아야 했어요. 당시 ‘난 소속사도 없는 독립군이다, 안 하겠다’고 끝까지 버텼어요. 그러다 ‘그래, 원로가수들 복지에 신경 쓰고, 전국에 있는 무명가수들에게 무대 만들어주자’는 생각에서 맡았는데,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 알았어요. 그런 자리는 이전에 한 번도 안 해봤으니까요. 최측근이 제일 무섭고, 제일 조심해야 한다는 걸 절실히 알았어요.”
분위기가 심각하게 흘러갈 즈음 그는 느닷없이 칼럼 얘기를 꺼냈다.
“아침마다 신문을 봐요. 근데 칼럼에서 내 이름 뒤에 ‘대통령’을 붙인 거예요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 대통령이고 박정희 대통령은 흥국 대통령이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나를 ‘흥국 대통령’이라 하더라고. 내가 나라를 흥이 나게 하는 사람 맞잖아요. 칼럼 쓴 분이랑 일면식도 없는데, 참 훌륭한 분이에요”
지난해 12월3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김대중 칼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그만의 웃음 코드가 이렇게 탄생하는구나’ 싶었다.
정몽준과 김흥국
문득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 떠올랐다.
27년 전 축구장에서 만나 시작된 두 사람의 동행은 정치계로 이어졌다. 정치인 정몽준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옆엔 김흥국이 있었다. 얼핏 납득이 쉽지 않은 조합이다. 재벌 2세와 가수. 둘 중 어느 쪽의 입장에서 봐도 간단치 않은 관계다.
돈 많은 사람들은 사람을 가려서 만난다. 재벌 2세까지 갈 것도 없이 서울 외곽의 어느 건물주만 봐도 그렇다. 축구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터지는 유머, 세풍에 좀처럼 풍화되지 않는 서민적이며 원초적인 의리, 이런 것들 때문에 정 이사장은 자신보다 여덟 살 어린 연예인 김흥국에게 깊은 친밀감을 갖게 된 게 아닐까. 정 이사장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그 입장에서 상상해보면 그렇단 얘기다.
방송인 김흥국의 인생에서도 정 이사장은 아주 무거운 존재였던 것 같다. 인생행로의 선로전환기(線路轉換器)라고 할까. 달리는 기차가 분기점을 만났을 때 다른 선로로 이동하게 하는 장치가 선로전환기다. 정 이사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많이 달랐을 터. 국회의원 선거, 대선(2002년), 서울시장 선거(2014년)에서 기쁨과 절망을 느끼지 못했을 테고,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갑자기 하차(2011년)되는 일도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MBC 측은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의 선거 유세에 동행’한 것을 하차 이유로 들었다. 이후 국정원까지 연관된 ‘블랙리스트 조치’였다는 게 밝혀지기도 했다.
연예인을 업으로 삼는 그가 정치인과 오랜 시간 공개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둘 사이엔 축구라는 매개체가 있지만 말이다. 정 이사장은 김흥국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준 사람이다. 김흥국은 자신의 총선 불출마 기자회견(2008년) 경험을 유머로 승화해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했다. 허허실실 유머에 간단치 않은 정치 경험이 덧입혀져 대체불가능한 ‘예능의 신’이 된 셈이다.
정몽준의 대선 출마와 좌절
짐짓 험담을 시도했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가 덜컥 높아졌다.
― ‘MJ(정몽준)는 짠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치권에 있습니다.
“그렇게 떠드는 분들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필요할 땐 연락해 도움받고 뒤에서 욕하는 거예요.”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그는 국민통합21의 문화예술특보였다. 벌써 18년 전 얘기다.
― 요즘도 정몽준 이사장을 만납니까.
“작년 연말에 만났어요. 부인이 1년에 한 번씩 전통문화 보존과 관련한 봉사활동을 하시거든요. 거기서 만났어요. 여전히 건강하시죠. 사람이 어떤 걸 갖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싫어지면 재미없잖아요. 선거 때문에 정몽준씨는 손해를 많이 보셨죠. 선거 때는 경쟁이니까 그럴 수 있지만, 선거 후에는 포용하는 분위기가 돼야 하는데 아쉬워요.”
― 애초에 정 이사장과는 어떻게 인연이 됐나요.
“1993년이었어요. MJ가 대한축구협회장에 처음 취임했을 때인데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취임하고 찾아보셨겠죠 ‘축구 하면 누구냐’. 그때는 국가대표팀 선수들 사이에서 투표해도 제가 1위였어요. 축구팀이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으로요.”
― 대선까지 같이 치르셨지요.
“2002년에 월드컵 4강을 이뤄냈잖아요. 우리 국민이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갑자기 MJ가 지리산에 가자고 해요. 갔는데 물으시는 거예요.
‘국민의 소리를 들었나?’
‘무슨 소리요?’
‘나는 들었어. 나보고 대통령 나오래. 대한민국 살면서 이런 행복은 처음 느껴봤어. 세계인들이 놀랐잖아.’”
당시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는 대선 선거일 직전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를 철회했다. ‘이 결정에 김흥국 특보가 큰 역할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김행 국민통합21 대변인은 당시 상황을 일지 형식의 글로 발표하기도 했다. 다음은 그 일부다.
〈지지철회 결정 당일 부평 유세에서 정 대표는 몰려든 청중 앞에서 춤까지 추며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오후 6시30분에 시작된 명동 유세에서는 당초 노무현-정몽준 두 분만 연단에 오르기로 했는데 민주당 정동영(鄭東泳)·추미애(秋美愛) 의원 등이 노무현-정몽준과 함께 등단했다. 이때 김흥국 문화예술특보는 단상에 오르려다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했다. 노 후보는 민주당 의원들을 치켜세우고 특히 정동영 의원을 ‘차세대 지도자’라고 소개한 반면, 정몽준 대표에 대해선 ‘재벌개혁을 하겠다’며 ‘도와주실 거죠’라는 말만 했다. 이어 종로 유세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오후 8시30분쯤 종로4가에 있는 음식점 우래옥에서 김흥국 특보는 캔맥주를 마시며 울분을 토로했고, 정 대표의 부인 김영명(金寧明)씨는 눈물을 흘렸다.〉
당시 얘기를 물었다.
“선거가 끝나고 양쪽에서 MJ를 공격했잖아요. 이회창 캠프에선 ‘다된 밥인데 정몽준 때문에 졌다’, 노무현 캠프에선 ‘더 큰 격차로 이길 수 있었는데 지지철회 때문에 이렇게 됐다’. 이걸 보니 ‘아 이게 정치구나’ 싶더군요. 나중에 서울시장 선거에도 나갔잖아요. 2014년이었죠. 박원순 후보랑 겨뤘지요. 그때는 당에서 지원을 안 해줬어요.”
“保守는 도와도 그때뿐”
그는 보수(保守) 진영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갔다.
“그게 보수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선거가 제일 큰 판 아닙니까. 다 와서 도와야 되는데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친이-친박’ 한 지붕 두 가족이라 할 때부터 불안했어요. 반성을 많이 해야 해요.
MJ가 당시 그러더라고요. 당대표라고 앉아 보니 우리 안에서도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는 거예요. 제가 어쩌다 보수 진영 정치인들을 만나게 되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당신들이 잘못한 것을 왜 국민들한테 돌리냐. 친박-친이 싸움 때문에 결국 보수가 지금의 모습이 된 거 아니냐.’
대선이나 총선 때 문화예술인들이 더러 드러내놓고 나서서 보수 후보들을 돕기도 했잖아요. 선거 후에 이들이 무슨 득을 봤나요? 오히려 불이익을 당한 경우가 더 많아요. 보수는 도와도 그때뿐이에요. 그래서 지는 거예요.”
축구 사랑은 여전할까.
“축구를 열한 살 때부터 했어요. 이제 딱 50년입니다. 새벽에 손흥민 경기를 봅니다. 지난번에 손흥민 선수가 퇴장당해서 세 경기 안 나오는데 미치겠더군요. 대한민국에서 손흥민 같은 선수가 나왔다는 건 대단한 거예요. 박지성을 뛰어넘는 선수는 당분간 못 나올 줄 알았어요.
사람이 자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또 사람을 만드는 거예요. 손흥민 선수 자리는 아무 때나 슛이 가능한 자리거든요. 좋은 위치에 좋은 자리예요. 차지하기 어려워요. 원래 다른 선수에게 가려 있었는데 이 선수가 부상당하니 손흥민에게 기회가 온 거예요. 손흥민 본인이 다치지만 않고 사고만 안 내면 대단한 기록을 세울 수 있어요. 같이 뛰는 선수와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자기 욕심만 부리면 위험해요. 볼이 본인한테 계속 와야 되거든요. 경기 없을 때는 밥도 사고 술도 사고 그러면 탄탄대로일 거예요. 만약 그렇게 되면 세계 1위 선수도 될 수 있어요. 흥국이라 흥민이를 좋아하나? 흥민이·흥국이, 흥부자. 아, 내 아들이 아니구나. 으아, 양아들 삼으면 안 되나요.”
20년간 300여 명에게 장학금
그는 김흥국장학재단을 만들어 매년 초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방송 쉴 때도 계속한 활동이다.
“제가 어렵게 자랐으니까요. 어려운 초등학생 아이들을 돕고 싶었어요. 학교장 추천 받아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줍니다. 20년 동안 300여 명을 도왔어요.
장학금 주면서 같이 사진 찍잖아요. 학생한테 이렇게 말해요. ‘절대 나한테 연락하지 마라. 오늘 만난 걸로 끝이야. 너도 잘돼서 어려운 사람 도와. 그래야 내가 보람이 있다. 나한테 문자도 전화도 하지 마라. 다른 사람한테 갚아라’
그렇게 오래해왔다는 게 나도 믿기지 않아요. 이게 알려지니까 돈을 보태주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통장을 열어보면 1만원, 2만원, 3만원 찍혀 있어요. 원래 한 해 10여 명에게 장학금을 줬는데 요즘엔 20명에게 줍니다.”
― 유튜브 방송도 시작했는데요.
“‘김흥국tv’ 채널입니다. 전에는 지인들과 같이 하다가 지금은 혼자 방송합니다. 상업적으로 한순간에 구독자와 조회수 늘리려 하지 않습니다. 시청자들과 소통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합니다. ‘왜 이 사람이 방송에 안 나올까, 유튜브에서 볼 수 있구나’ 이런 메시지를 위해서요. 더 열심히 해야지요.”
― 올해는 어떤 김흥국이 되고 싶으신가요.
“저를 믿어주고 인간적으로 좋아해주는 분들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어요. ‘김흥국은 죽지 않을 거다. 살아난다. 그 아픔이 헛되지 않을 거다. 딛고 더 크게 살아난다’ 이런 기대죠. 이제 다시 방송에 나가면 이전과는 또 달라질 거예요. 요즘엔 술을 마셔도 즐거워요. 전엔 살기 위해 마셨는데. 환경을 바꿨으니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시작할 겁니다. 봄이 되면 ‘호랑나비’가 다시 날 겁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왜 동부이촌동에서 보자 했는지 물은 참이다. 지난 1월 7일 서울 동부이촌동의 한 카페에서 방송인 김흥국(61)을 만났다. 1985년 노래 ‘창백한 꽃잎’으로 데뷔, 무명생활을 거치다 1989년 ‘호랑나비’로 단숨에 스타로 떠올랐다. 그해 ‘10대 가수’에도 올랐다.
이후 30년은 우리가 기억하는 그대로다. 생각해보면 한 사람이 거친 것이라 믿기 힘들 만큼 다양한 수식어를 지나온 삶이었다. 가수, 라디오 DJ, 월드컵 응원단장, 정몽준 대선후보 특보, 대한가수협회장…. 여기에 풍수애호가 직함도 추가하고 싶은 걸까. 터 얘기를 꺼낸 속내가 궁금했다. 몇 마디 나누자 행간이 보였다. 장난스러운 웃음 뒤에 숨겨진 절박한 소망이랄까. 그는 새로운 도약을 위해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 ‘호랑나비’는 처음에 어떻게 빛을 본 겁니까.
“라디오 〈싱글벙글쇼〉 진행하는 ‘강가의 돌멩이’ 강석 형 덕이었지요.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랑 집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어요. 내 노래는 생전 가도 한 번도 안 나오는데 강석 형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흥국아, 라디오 빨리 틀어라. 처음으로 네 노래 나온다’ 그게 일요일이었어요. 그때는 라디오에서 노래를 틀려면 부장, 국장 거쳐서 결재를 받아야 했나 봐요. 일요일은 좀 자유로운 거지. 강석 형이 라디오 스태프들한테 ‘내 동생인데 형편이 어렵다. 노래 한번 틀어주자’ 해서 처음 전파를 탄 거예요. 어머니랑 들으면서 껴안고 울었어요. ‘우리 늦둥이 막내아들이 소원 풀었구나’ 하고.
그때 저는 매니저도 없었어요. 진짜 인생이 한방이더군요. 일요일까지 아무 스케줄도 없었는데, 아니 월요일부터 전화가 막 걸려오는 거예요. 그해 모든 프로그램을 휩쓸었어요. ‘자고 일어나니 스타’ ‘호랑나비 전국 강타, 춤추다 쓰러져서 병원행’ ‘호랑나비춤 따라 하다 환자 급증, 접골원 만원 사례’ 이런 기사가 신문에 실렸어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너스레인지 모를 얘기는 급기야 조용필씨 얘기로 이어졌다.
이주일, “흥국아, 이제 고생 끝났다”
![]() |
2008년 8월 10일 친황다오 스포츠센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08베이징올림픽 이탈리아와의 예선 2차전에서 김흥국(가운데)과 연예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그때는 조용필씨가 나오면 다른 가수는 상 하나 못 건질 때였어요. 가만히 쉬고 있다가 결정적일 때 나타나서 매해 가요계를 다 평정하는 식이에요. 조용필씨가 이런 얘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그동안 서서 다들 점잖게 노래했는데 특이한 호랑나비춤까지 추다니 좋은 아이디어다. 그동안 대한민국이 힘들게 살지 않았느냐. 같이 어울려 춤추게 하는 사람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너 하나다. ‘호랑나비’가 주는 메시지가 크다. 너를 위해 내가 1년을 쉬어줄게. 음악의 힘, 음악의 세계는 이런 거다.’
돌아가신 이주일 선생님도 저를 보더니 이런 말을 해주셨어요.
‘흥국아, 이제 고생 끝났다. 나도 고생하다 늦게 방송 데뷔를 했는데 넌 정말 대단한 놈이다. 난 딱 보면 알잖아. 고생 끝났어.’”
― 돈도 많이 버셨지요. 얼마나 버셨나요.
“그게, 제가 자산 관리를 잘하지 못해요. 씀씀이가 커요. 적당히 쓰고 남기자는 식이 아니라, 많이 쓸수록 많이 들어온다고 믿고 살았어요. 절에서 스님한테 잘못 배웠나 봐요. 평생 술과 사람이 좋았어요. 누가 앞에 앉아서 형편이 어렵다고 하면 못 참겠더라고요. 버는 것보다 많이 썼어요. 연예인 누가 어디에 빌딩 갖고 있다, 땅이 어디에 있다 얘기 들으면, ‘아 나도 할 수 있었는데’ 싶어요. 예전엔 쌌거든요. 부동산에서 연락이 한 번씩 왔어요. ‘10억원 있느냐, 50억원 있느냐. 은행 대출까지 해서 100억원짜리, 200억원짜리 빌딩 살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땐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약간 시무룩해진 그에게 위로를 겸해 물었다.
― 물욕이 없는 게 시청자들에게 전해져 오래 사랑받은 것 아닌가요.
“노래만 했으면 30년 동안 사랑 못 받았죠. 드라마·영화·예능,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덕인 것 같아요. 아마 저 같은 케이스가 없을 거예요. 어떤 프로그램에 나가도 역할을 소화할 수 있게 됐어요.”
‘흥궈신’(흥국의 중국식 발음 ‘흥궈’에 예능의 신이란 뜻으로 ‘신’을 붙임), ‘예능치트키’(어떤 예능 프로그램에도 통한다). 그의 별명이다. 오히려 젊은 층에서 그를 더 좋아하고 찾는다. 남을 희화화하거나 무리한 얘기를 지어내 억지로 웃기지 않는다. 편안하게 하고 싶은 얘기를 막 던지는 것 같은데 한 번씩 ‘빵 터지는’ 유머가 매력이다. 한마디로 부담을 주지 않으며, 즐거움을 주는 보기 드문 캐릭터다. 그의 옆에 있다 불시에 화제가 된 이들도 여럿이다. 조세호는 ‘프로불참러’에 등극했고(안재욱 결혼식에 왜 안 왔어?), 가수 김태원은 예능에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2006년 〈라디오스타〉에 함께 출연).
느닷없이 性폭행 의혹
그에게 지난 2년은 연예인의 삶에서 처음 있은 긴 공백이었다. 2018년 3월 성(性)폭행 의혹에 휘말렸다. 한 뉴스 프로그램이 ‘단독’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해 알려졌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여성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했다. 평소 ‘유쾌한 기러기 아빠’로 여자 문제는 없을 듯한 그였기에 파장은 더욱 컸다.
사건이 결국 어떻게 결론 났는지 잘 알려지지 않은 감이 있다. 성폭행 의혹이 보도된 지 두 달 후 경찰은 ‘조사결과 혐의 없음’이란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그해 11월 검찰에서 ‘혐의 없음’으로 최종 처분을 받았다. 당시 해당 여성은 다른 남성들에게 혼인빙자 사기 건으로 고소당한 상황이었다. 그 여성은 징역 1년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 성폭행 의혹을 최초 보도한 방송사에서 후에 사과는 했습니까.
“전혀요. 무혐의가 됐으면 후속 보도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변호사도 싸우자고 했어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면서요. 언론중재위원회에 이의제기하고,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자고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안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방송사로부터 사과 한마디 못 들었어요. 백번 양보해 보도할 수 있어요. 하지만 무혐의로 결론 났으면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처음 보도한 매체에서 방송에 복귀할 수 있도록 정정보도까지 해줘야 사명감 있는 언론 아닙니까.”
― 수사가 비교적 빨리 종결됐습니다.
“조사에 최대한 협조했어요. 늘어지면 저만 손해 아닙니까. 이 여성이 다른 몇몇 사건에도 연루가 되어 있었어요. 그 상대 사람들이 제보한 거예요. ‘김흥국씨 도와야겠다, 또 걸렸다.’ 수사가 병합이 됐어요. 결국 그 여성은 다른 건으로 징역 살고 있습니다. 그건 아무도 모르잖아요.”
― 해당 여성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했다는 보도가 있는데요.
“그 여성이 저에게 1억5000만원을 요구했잖아요. 그래서 변호사 제안으로 형식상 2억원을 손해배상하라고 소송을 한 거예요. 돈을 받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배상할 능력이 안 돼요. 실형을 선고받았잖아요. 게다가 저도 무혐의로 판명이 났고요. 변호사에게 더 싸워서 뭐하냐 항소하지 말자고 했어요. 손해배상 재판에서 졌다고, 저에게 무슨 혐의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도하면 안 되지요.”
― 타격이 컸겠네요.
“사실 방송 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돈을 못 버는 거는 어떻게든 버티면 되는데, 문제는 가족이 힘든 거였어요. ‘당신 왜 그랬어. 기러기 아빠로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대체 왜 그랬어. 어떻게 내가 얼굴을 들고 살아. 동네를 다닐 수 있나,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나’ 이게 너무 힘들었어요.
아이들을 많이 달랬어요.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 아니다. 후에 누구한테든 물어봐라, 내가 어떻게 그동안 살아왔는지. 여보, 당신도 힘들겠지만 나 정말 열심히 살았다. 방송하면서 기러기 생활 나만큼 오래한 사람이 어디 있나.’
한순간에 가족이 무너졌어요. 말도 안 먹혀요. ‘아, 시간이 지나는 수밖에 없겠다. 이젠 시간과의 싸움이다’ 했죠.”
‘흥국 대통령’
그를 버틸 수 있게 해준 건 축구와 종교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어둠을 뚫고 축구하러 나갔어요. 매일 나갔죠. 낮에는 절에 가 있었어요. 하루에 절을 세 군데 간 적도 있어요. 절에 가면 부처님 앞에서 108배 하고 참선하는 거예요. 눈 감고 앉아 있는 거지.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가만히 부처님 보고 앉아 있으면 별 생각이 다 들어요. 내가 잘 살아왔나 못 살아왔나 스스로 평가하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무너지느냐, 되살아나느냐. 봄이 되면 호랑나비가 다시 날 줄 알았는데 안 날아요. 이거 봐라, 이게 다 때가 있구나.
저녁때는 술 한잔 해야겠는데 사람을 못 만나요. 사람이 두려웠어요. 마음 편한 사람들만 만났어요. 그 사건을 물어보지 않는 사람. ‘그 여자 어떻게 생겼나’ 이런 질문해오면 술 마시다 일어나기도 했어요. 옥석을 가리게 됐다고 할까. 인간관계를 많이 정리했어요. 휴대전화 연락처 지우느라 손에 쥐가 났을 정도니까요. 몇천 명을 지웠어요. 그런 시간이 힘들었어요. ”
그는 2015년 대한가수협회 회장에 선출됐다. 이후 추문에 연루된 데는 가수협회 내부의 내홍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회장을 하지 말아야 했어요. 당시 ‘난 소속사도 없는 독립군이다, 안 하겠다’고 끝까지 버텼어요. 그러다 ‘그래, 원로가수들 복지에 신경 쓰고, 전국에 있는 무명가수들에게 무대 만들어주자’는 생각에서 맡았는데,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 알았어요. 그런 자리는 이전에 한 번도 안 해봤으니까요. 최측근이 제일 무섭고, 제일 조심해야 한다는 걸 절실히 알았어요.”
분위기가 심각하게 흘러갈 즈음 그는 느닷없이 칼럼 얘기를 꺼냈다.
“아침마다 신문을 봐요. 근데 칼럼에서 내 이름 뒤에 ‘대통령’을 붙인 거예요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 대통령이고 박정희 대통령은 흥국 대통령이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나를 ‘흥국 대통령’이라 하더라고. 내가 나라를 흥이 나게 하는 사람 맞잖아요. 칼럼 쓴 분이랑 일면식도 없는데, 참 훌륭한 분이에요”
지난해 12월3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김대중 칼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지는 그만의 웃음 코드가 이렇게 탄생하는구나’ 싶었다.
![]() |
2008년 2월 4일 여의도 가수협회 사무실에서 총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는 김흥국씨. 가수 남진, 정훈희씨도 함께 참석했다. 사진=조선DB |
27년 전 축구장에서 만나 시작된 두 사람의 동행은 정치계로 이어졌다. 정치인 정몽준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옆엔 김흥국이 있었다. 얼핏 납득이 쉽지 않은 조합이다. 재벌 2세와 가수. 둘 중 어느 쪽의 입장에서 봐도 간단치 않은 관계다.
돈 많은 사람들은 사람을 가려서 만난다. 재벌 2세까지 갈 것도 없이 서울 외곽의 어느 건물주만 봐도 그렇다. 축구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엉뚱한 곳에서 터지는 유머, 세풍에 좀처럼 풍화되지 않는 서민적이며 원초적인 의리, 이런 것들 때문에 정 이사장은 자신보다 여덟 살 어린 연예인 김흥국에게 깊은 친밀감을 갖게 된 게 아닐까. 정 이사장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그 입장에서 상상해보면 그렇단 얘기다.
방송인 김흥국의 인생에서도 정 이사장은 아주 무거운 존재였던 것 같다. 인생행로의 선로전환기(線路轉換器)라고 할까. 달리는 기차가 분기점을 만났을 때 다른 선로로 이동하게 하는 장치가 선로전환기다. 정 이사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많이 달랐을 터. 국회의원 선거, 대선(2002년), 서울시장 선거(2014년)에서 기쁨과 절망을 느끼지 못했을 테고,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갑자기 하차(2011년)되는 일도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MBC 측은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의 선거 유세에 동행’한 것을 하차 이유로 들었다. 이후 국정원까지 연관된 ‘블랙리스트 조치’였다는 게 밝혀지기도 했다.
연예인을 업으로 삼는 그가 정치인과 오랜 시간 공개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둘 사이엔 축구라는 매개체가 있지만 말이다. 정 이사장은 김흥국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준 사람이다. 김흥국은 자신의 총선 불출마 기자회견(2008년) 경험을 유머로 승화해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기도 했다. 허허실실 유머에 간단치 않은 정치 경험이 덧입혀져 대체불가능한 ‘예능의 신’이 된 셈이다.
정몽준의 대선 출마와 좌절
![]() |
총선을 이틀 앞둔 2008년 4월 7일 동작을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가 김흥국씨와 함께 동작구 상도동의 한 아파트 단지를 찾아 인사하는 모습. 사진=조선DB |
― ‘MJ(정몽준)는 짠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치권에 있습니다.
“그렇게 떠드는 분들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필요할 땐 연락해 도움받고 뒤에서 욕하는 거예요.”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그는 국민통합21의 문화예술특보였다. 벌써 18년 전 얘기다.
― 요즘도 정몽준 이사장을 만납니까.
“작년 연말에 만났어요. 부인이 1년에 한 번씩 전통문화 보존과 관련한 봉사활동을 하시거든요. 거기서 만났어요. 여전히 건강하시죠. 사람이 어떤 걸 갖고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싫어지면 재미없잖아요. 선거 때문에 정몽준씨는 손해를 많이 보셨죠. 선거 때는 경쟁이니까 그럴 수 있지만, 선거 후에는 포용하는 분위기가 돼야 하는데 아쉬워요.”
― 애초에 정 이사장과는 어떻게 인연이 됐나요.
“1993년이었어요. MJ가 대한축구협회장에 처음 취임했을 때인데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취임하고 찾아보셨겠죠 ‘축구 하면 누구냐’. 그때는 국가대표팀 선수들 사이에서 투표해도 제가 1위였어요. 축구팀이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으로요.”
― 대선까지 같이 치르셨지요.
“2002년에 월드컵 4강을 이뤄냈잖아요. 우리 국민이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갑자기 MJ가 지리산에 가자고 해요. 갔는데 물으시는 거예요.
‘국민의 소리를 들었나?’
‘무슨 소리요?’
‘나는 들었어. 나보고 대통령 나오래. 대한민국 살면서 이런 행복은 처음 느껴봤어. 세계인들이 놀랐잖아.’”
당시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는 대선 선거일 직전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를 철회했다. ‘이 결정에 김흥국 특보가 큰 역할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김행 국민통합21 대변인은 당시 상황을 일지 형식의 글로 발표하기도 했다. 다음은 그 일부다.
〈지지철회 결정 당일 부평 유세에서 정 대표는 몰려든 청중 앞에서 춤까지 추며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오후 6시30분에 시작된 명동 유세에서는 당초 노무현-정몽준 두 분만 연단에 오르기로 했는데 민주당 정동영(鄭東泳)·추미애(秋美愛) 의원 등이 노무현-정몽준과 함께 등단했다. 이때 김흥국 문화예술특보는 단상에 오르려다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했다. 노 후보는 민주당 의원들을 치켜세우고 특히 정동영 의원을 ‘차세대 지도자’라고 소개한 반면, 정몽준 대표에 대해선 ‘재벌개혁을 하겠다’며 ‘도와주실 거죠’라는 말만 했다. 이어 종로 유세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오후 8시30분쯤 종로4가에 있는 음식점 우래옥에서 김흥국 특보는 캔맥주를 마시며 울분을 토로했고, 정 대표의 부인 김영명(金寧明)씨는 눈물을 흘렸다.〉
당시 얘기를 물었다.
“선거가 끝나고 양쪽에서 MJ를 공격했잖아요. 이회창 캠프에선 ‘다된 밥인데 정몽준 때문에 졌다’, 노무현 캠프에선 ‘더 큰 격차로 이길 수 있었는데 지지철회 때문에 이렇게 됐다’. 이걸 보니 ‘아 이게 정치구나’ 싶더군요. 나중에 서울시장 선거에도 나갔잖아요. 2014년이었죠. 박원순 후보랑 겨뤘지요. 그때는 당에서 지원을 안 해줬어요.”
그는 보수(保守) 진영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갔다.
“그게 보수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선거가 제일 큰 판 아닙니까. 다 와서 도와야 되는데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친이-친박’ 한 지붕 두 가족이라 할 때부터 불안했어요. 반성을 많이 해야 해요.
MJ가 당시 그러더라고요. 당대표라고 앉아 보니 우리 안에서도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하기 쉽지 않다는 거예요. 제가 어쩌다 보수 진영 정치인들을 만나게 되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당신들이 잘못한 것을 왜 국민들한테 돌리냐. 친박-친이 싸움 때문에 결국 보수가 지금의 모습이 된 거 아니냐.’
대선이나 총선 때 문화예술인들이 더러 드러내놓고 나서서 보수 후보들을 돕기도 했잖아요. 선거 후에 이들이 무슨 득을 봤나요? 오히려 불이익을 당한 경우가 더 많아요. 보수는 도와도 그때뿐이에요. 그래서 지는 거예요.”
축구 사랑은 여전할까.
“축구를 열한 살 때부터 했어요. 이제 딱 50년입니다. 새벽에 손흥민 경기를 봅니다. 지난번에 손흥민 선수가 퇴장당해서 세 경기 안 나오는데 미치겠더군요. 대한민국에서 손흥민 같은 선수가 나왔다는 건 대단한 거예요. 박지성을 뛰어넘는 선수는 당분간 못 나올 줄 알았어요.
사람이 자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또 사람을 만드는 거예요. 손흥민 선수 자리는 아무 때나 슛이 가능한 자리거든요. 좋은 위치에 좋은 자리예요. 차지하기 어려워요. 원래 다른 선수에게 가려 있었는데 이 선수가 부상당하니 손흥민에게 기회가 온 거예요. 손흥민 본인이 다치지만 않고 사고만 안 내면 대단한 기록을 세울 수 있어요. 같이 뛰는 선수와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자기 욕심만 부리면 위험해요. 볼이 본인한테 계속 와야 되거든요. 경기 없을 때는 밥도 사고 술도 사고 그러면 탄탄대로일 거예요. 만약 그렇게 되면 세계 1위 선수도 될 수 있어요. 흥국이라 흥민이를 좋아하나? 흥민이·흥국이, 흥부자. 아, 내 아들이 아니구나. 으아, 양아들 삼으면 안 되나요.”
20년간 300여 명에게 장학금
![]() |
2011년 6월 17일 김흥국씨는 서울 여의도 MBC 앞에서 자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두시 만세〉에서 퇴출된 것에 항의하며 삭발 시위를 했다. 사진=조선DB |
“제가 어렵게 자랐으니까요. 어려운 초등학생 아이들을 돕고 싶었어요. 학교장 추천 받아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줍니다. 20년 동안 300여 명을 도왔어요.
장학금 주면서 같이 사진 찍잖아요. 학생한테 이렇게 말해요. ‘절대 나한테 연락하지 마라. 오늘 만난 걸로 끝이야. 너도 잘돼서 어려운 사람 도와. 그래야 내가 보람이 있다. 나한테 문자도 전화도 하지 마라. 다른 사람한테 갚아라’
그렇게 오래해왔다는 게 나도 믿기지 않아요. 이게 알려지니까 돈을 보태주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통장을 열어보면 1만원, 2만원, 3만원 찍혀 있어요. 원래 한 해 10여 명에게 장학금을 줬는데 요즘엔 20명에게 줍니다.”
― 유튜브 방송도 시작했는데요.
“‘김흥국tv’ 채널입니다. 전에는 지인들과 같이 하다가 지금은 혼자 방송합니다. 상업적으로 한순간에 구독자와 조회수 늘리려 하지 않습니다. 시청자들과 소통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합니다. ‘왜 이 사람이 방송에 안 나올까, 유튜브에서 볼 수 있구나’ 이런 메시지를 위해서요. 더 열심히 해야지요.”
― 올해는 어떤 김흥국이 되고 싶으신가요.
“저를 믿어주고 인간적으로 좋아해주는 분들의 기대에 보답하고 싶어요. ‘김흥국은 죽지 않을 거다. 살아난다. 그 아픔이 헛되지 않을 거다. 딛고 더 크게 살아난다’ 이런 기대죠. 이제 다시 방송에 나가면 이전과는 또 달라질 거예요. 요즘엔 술을 마셔도 즐거워요. 전엔 살기 위해 마셨는데. 환경을 바꿨으니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시작할 겁니다. 봄이 되면 ‘호랑나비’가 다시 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