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세계 읽기] 이란 사태를 계기로 보는 ‘제국의 해체’ : 월간조선

2025년 6월 세계인의 이목이 다시 중동(中東)으로 쏠렸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란의 핵무기 개발이 임박했음을 세계에 경고하며 6월 13일에 이란을 기습 공격하는 ‘일어나는 사자’ 작전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모사드의 첩보 역량과 우월한 공군력을 바탕으로 이란 혁명수비대 수뇌부와 주요 핵 과학자를 제거하며 이란 체제의 취약성을 노출시켰다. 물론 이란도 곧 태세를 정비하여 텔아비브, 하이파 등의 주요 인프라를 미사일로 쉴 틈 없이 공격하는 ‘진실의 약속’ 작전으로 응수했다. 양측의 공격 기간에서 따 ‘12일 전쟁’이라고도 명명된 이스라엘-이란 전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포르도 핵 시설에 벙커버스터를 떨어트리고 휴전이 선언되면서 가까스로 멈춰 섰다.

이슬람공화국 체제의 운명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 원전 폭격 이후 이란 국민들은 일단 애국주의 기치 아래 뭉치는 모습이다. 사진=AP/뉴시스

전쟁의 군사적 차원을 분석하는 것 이외에도 많은 관찰자는 충돌 배후에 깔린 정치적 배경에도 주목했다. 그중에서 특히 조명받은 주제는 1979년 이슬람 혁명 이래로 46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이란 이슬람공화국 체제의 운명이었다.

이슬람공화국은 대외적(對外的) 고립 속에서도 꾸준히 현대화를 이루고, 중동에서도 지정학적(地政學的) 세력을 확대해 왔지만 2020년대부터는 불안정 요인이 크게 부각되고 있었다. 핵 문제와 미국의 제재(制裁)는 이란에 끔찍한 경제적 곤경을 안겨줬다.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예멘, 하마스를 포괄하는 이란의 대리(代理) 조직 네트워크인 ‘저항의 축(軸)’은 2020년 카셈 솔레이마니 장군의 피살과 2024년 이스라엘의 전면적인 헤즈볼라 공격, 같은 해 이란이 후원하는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붕괴가 겹치며 급격히 축소됐다.

결정적으로 가장 큰 취약점은 혁명과 전쟁(이란-이라크 전쟁)을 경험한 기성세대와 혁명 이후에 태어난 청년층 사이에 깊어지고 있는 감정의 골로 꼽혔다. 2009년 녹색운동부터 2022년 마사 아미니 시위에 이르기까지, 대도시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고 온라인으로 세계와 연결된 중산층 청년들은 정권의 보수적 문화 통제 정책과 대외 강경책에 환멸을 느끼며 거리로 나왔다. 네타냐후 총리는 물론이고 미국, 서유럽의 논평가들도 이번 ‘일어나는 사자’ 작전으로 이란 청년층이 군사적 긴장과 충돌을 유발하는 이슬람공화국 체제에 더 큰 불만을 표출할 수도 있다고 기대를 표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 직후부터 상황은 그들의 기대와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다. 이란의 청년층은 이스라엘의 선제(先制) 공격에 맞서 조국인 이란을 수호해야 한다며 뭉쳤다. 평소에 이슬람공화국 체제가 싫다고 불평하던 청년들이 이제는 이스라엘과 미국을 규탄하며 보수적 중년층, 노년층과 한목소리를 냈다. 이란 정부도 시아파 이슬람 혁명의 언어에 더해 고대(古代) 페르시아로부터 이어져 오는 이란 민족주의 언어를 꺼내 들고 국가 방어를 위한 애국주의 수사(修辭)를 동원했다. 따라서 이란의 현 체제가 이스라엘의 공격을 계기로 이란 민족주의를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보수적 문화 통제를 완화한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통치 정당성 위기를 수월하게 넘길 수도 있다.

‘제국의 함정’

그러나 전쟁은 기존의 이란 체제에 존재하던 단층선(斷層線)을 봉합(縫合)했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다른 균열을 드러내기도 했다. 바로 민족 문제다. 이란은 고대 페르시아 이래로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서 존재감을 발휘한 하나의 문명이자 제국(帝國)이었다. 따라서 이란 내부에는 페르시아어를 구사하지만, 이들과는 독자적인 정체성(正體性)을 지니는 쿠르드인, 아제르바이잔인, 발루치인, 아랍인, 루르인 등 여러 소수(少數)민족이 존재한다. 탈레반 시기 이래로 이란에 꾸준히 유입된 아프가니스탄 난민(難民)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민족은 대체로 이란 문명에 대한 소속감과 ‘이란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느낀다. 하지만 이란의 소수민족과 주류(主流) 페르시아인과의 긴장은 분명히 실존(實存)하며, 외국과 연결된 분리주의 단체들도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다. 만약 이란이 내부 단합을 위해 시아파 이슬람 대신에 이란 민족주의를 더욱 강조하게 된다면, 민족주의를 통해 체제와 화해하게 된 청년층 대신에 이들 소수민족 집단이 새롭게 소외감(疏外感)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물론 페르시아 문명의 유구한 역사를 생각하면, 이란이 단기간에 민족 분규가 악화되는 ‘제국의 함정’에 빠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냉전(冷戰)이 끝난 이후에 내전(內戰)을 경험한 여타 다민족(多民族) 국가들은 주류 민족이 확고한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국가로서의 원형이 20세기에나 들어서 급조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론파 기독교, 수니파, 시아파, 드루즈파가 권력을 분점 한 레바논, 기독교와 알라위파의 동맹이 수니파를 억압한 아사드 정권의 시리아, 티토의 지도력으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알바니아인을 간신히 묶어낸 유고슬라비아가 대표적이다.

주류 민족이 수적으로도 우위를 점하고, 소수민족을 제국 체제에 효과적으로 통합해 온 전통이 있는 러시아, 중국, 이란, 튀르키예 등은 분리주의 반군(反軍)의 도전과 중앙 정부의 억압이 상존하고는 있어도 제국의 다민족 공존 질서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유라시아 육상 제국 vs 대서양 국민국가

제국은 언뜻 보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제국사 연구의 거장 프레데릭 쿠퍼의 정의대로, 제국은 “통합을 촉진하면서도 동시에 차이를 재생산하는 위계적(位階的) 권력”이다. 상부의 통합적 질서와 하부의 다양성이 공존하는 균형이 깨질 때, 과거의 영광이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 500만 대군을 보유한 초강대국 소련 제국조차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근대사에서 제국의 해체가 가장 두드러진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였다. 당시 가장 큰 도전을 받고 있던 제국들은 유라시아 각지의 육상 제국들이었다.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제국, 중국의 청(淸)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수 세기의 역사 동안 무수한 소수민족들을 정복하고 제국 질서 속에 통합해 냈다. 이 제국들의 황제들은 가톨릭, 이슬람, 불교, 유교 등 소수민족들이 믿는 다양한 신앙을 보호하고, 장엄한 건축과 예술을 후원하며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질서의 구현자를 자처했다.

18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놀랍게 안정적으로 보였던 이 유라시아 육상 제국들은 대서양에서 자연과학, 계몽주의,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서유럽 국가들에 의해 심대한 도전을 받았다.

전통 제국은 다민족 질서의 한계로 신민(臣民)을 철저히 동원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혁명, 프랑스혁명을 거치며 대서양 세계에서는 국민이 납세(納稅)와 징병(徵兵)에 참여하고, 그 대가(代價)로 정치적 권리를 얻어내는 국민국가로의 이행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발전된 무기만큼이나 계속해서 고도화되는 관료제 역량과 국민의 정부 참여도 서유럽 국민국가들이 유라시아 제국을 압도하는 비결이었다.

개혁과 저항

게다가 인쇄술의 발전과 대중 언론의 등장은 국가는 민족을 위해, 민족은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정서인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다. 국가로서 가장 취약한 이란(페르시아)의 카자르 왕조는 물론이고, 한때 유럽을 벌벌 떨게 한 오스만 제국과 ‘현자(賢者)’들이 통치한다는 동양의 청 제국은 이제 모두 유럽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심지어 유럽 세계 내부에서 발전된 군사 기술을 꾸준히 수용하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도 서유럽과의 경쟁에서 뒤처졌다.

제국들은 국민국가들과 경쟁하고자 나름의 개혁을 추구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제(農奴制)를 폐지했고, 오스만 제국은 탄지마트 개혁을 통해 황제와 신민을 더욱 가깝게 묶어내고자 했다.

이런 개혁들은 내부적으로 극심한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기존 질서에 이해관계가 있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엘리트의 반발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느슨한 제국을 총동원이 가능한 국민국가로 전환하고자 했던 노력이 제국 내부 각 민족의 전면적 반발을 초래한 것도 중요했다. 오스만 제국이 징병제를 고려할 때 기독교인들은 징집이 부당하다고 저항했고, 무슬림들은 이교도(異敎徒)와 같은 군대에서 복무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주류 민족인 독일인은 물론이고, 특권적 지위를 누리는 헝가리인들도 남쪽의 슬라브인과는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며 계속해서 불평했다.

게다가 근대화 과정에서 문해율이 높아지고 지식인과 언론이 출현하면서 서유럽식 민족주의도 제국에 당도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제국의 민족주의는 두 방향으로 동시에 작동하며 위기를 증폭시켰다. 주류 민족들은 소수민족들이 제국 문화를 더욱 철저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소수민족 지식인들은 민족 언어를 발전시키고 제국 주류에 동화(同化)되어서는 안 된다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소수민족의 이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군으로 징병됐다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된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은 ‘체코군단’을 만들어 총부리를 거꾸로 돌렸다.

1900년 즈음에 유라시아 제국들은 서구식의 화려한 도시를 건설하고 최신 기관총과 전함을 수입하고 있었지만, 제국 내부의 도전은 수면(水面) 아래에서 계속해서 끓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전제정(專制政)에 저항하는 1905년 혁명 당시 소수민족들이 정당을 결성했다. 청 제국에서는 ‘한족(漢族) 민족주의’가 등장하여 만주족 통치자를 몰아내야 한다는 반만(反滿) 사상으로 발전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폭발한 한족 민족주의는 곧 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 각지 소수민족의 ‘한족화’를 촉구하는 종족적 민족주의(ethnonationalism)로 발전했다. 종교적 권위와 황실의 전통에 근거하여 여러 민족을 통합해 내는 제국의 보편 이념은 근대화의 충격을 견뎌낼 수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제국의 균형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연쇄적으로 파탄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은 후방 민간인도 국가의 전쟁 수행을 위해 총동원하는 총력전(總力戰)의 시대를 알렸다. 이미 국민국가에 기반한 동원 체제를 구축한 영국, 프랑스, 독일은 병력부터 생산까지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전선에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참전국인 러시아, 오스트리아, 오스만은 훨씬 힘겹게 자원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국가들은 상대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서로 소수민족 분리주의를 선동했다. 주류 민족주의를 강요하는 러시아와 오스만에서는 소수민족의 반발과 이탈이 갈수록 심해졌다.

러시아 제국은 1917년 2월에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시위로 퇴위(退位)하기 이전인 1916년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일어난 연쇄적 반란으로 변방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제국 정부가 선포한 노동대대 징집령이 중앙아시아에 누적되고 있던 러시아인과 무슬림의 긴장에 불을 지핀 것이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독교 소수민족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과의 감정이 갈수록 험악해졌으며, 이 과정에서 끔찍한 재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오스트리아군의 슬라브 병사들은 러시아에 포로로 잡힌 뒤 많은 수가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며 러시아군 편에서 싸웠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체코 군단’이 대표적인 사례다.

해체된 제국들

총력전이 가한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한 제국들은 패전(敗戰)과 혁명을 마주하고 해체됐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사상들도 제국 해체를 촉진했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에 타격을 입히고자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주창했는데, 이는 모든 이가 각자의 자결권을 가진다는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한 사상이었다.

민족자결주의는 예상치 못하게 상대적으로 안정된 통치를 유지하고 있던 승전국(勝戰國)들의 식민지에 당도하기도 했다. 식민지 조선, 인도, 이집트 등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운동이 등장하여 대서양의 근대 제국들에 도전을 가했다.

한편 붕괴한 러시아 제국을 접수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민족해방 사상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는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모든 식민지 민족이 해방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창하며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 질서를 약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종교와 전통에 기댄 기존 제국 모델이 흔들리며 20세기에 제국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적응에 나서야 했다. 제국 해체로 전후에도 엄청난 고통이 이어진 동유럽과 중동이 중요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무슬림을 중심으로 한 단일민족 국가인 튀르키예(터키)공화국으로 변모했다. 이 과정 역시 막대한 고통을 수반했다. 그리스와 튀르키예 간의 대규모 인구 이동과 아르메니아인 추방이 잇따랐고, 쿠르드인을 향한 동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 각지에서 반혁명 백군(白軍)은 물론이고 민족 독립 세력을 마주한 볼셰비키는 다른 선택을 했다. 이들은 민족 자치권을 보장하고 소수민족을 세계혁명 과업에 참여시키겠다고 공약하며 소수민족 집단에서 지지자를 확보하고, 여전히 대러시아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백군을 고립시키며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성립된 소련 제국은 소수민족인 조지아인 혁명가 스탈린의 지휘 아래 민족어 교육을 진흥하고, 소수민족 공산당원을 충원하며, 동시에 러시아 중심주의를 강하게 유지하는 특수한 제국 체제를 만들어내며 생존에 성공했다.

하지만 중동부 유럽에서는 상황이 간단하지 않았다. 무수한 민족이 얽히고설킨 이 지역에서 신생 국민국가는 다민족 공존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소수민족 억압과 분리주의, 무장투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는 제국을 박탈당하고 중부 유럽의 소국(小國)으로 남게 되었으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독일인의 제국을 만들겠다며 잔혹한 나치 제국을 수립했다.

일본 제국과 아시아주의

1943년 11월 5일 소위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일본의 동맹국 및 괴뢰국 수뇌들. 왼쪽부터 바모(미얀마), 장징후이(만주국), 왕자오밍(중국), 도조 히데키(일본), 완 위테예캉(태국), 로웰(필리핀), 보스(인도).

전간기(戰間期·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부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사이의 기간-편집자 주)는 동아시아에서도 제국의 해체와 적응이 동시에 일어난 시기였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등장한 중화민국은 변경 소수민족 지역은 물론이고 한족 지역에서도 중앙 권력을 확립하지 못해 사실상 분열했다. 이미 한반도와 대만으로 확장한 일본 제국은 중국의 권력 공백에서 기회를 포착한 신흥 제국이었다. 하지만 일본 제국도 소수민족이 가하는 도전에 나름의 대응을 해야만 했는데, 특히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레닌의 공산주의가 모두 당도한 조선이 가장 큰 문제였다. 중국으로의 세력 확장이 미국과 서구 열강으로부터 지속적인 반발을 사는 것도 문제였다.

일본은 결국에 자유주의에 입각한 국제연맹 질서를 이탈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제국 원리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모든 아시아인의 해방을 이끄는 제국이 되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가 그것이다. 아시아주의는 일본이 만주, 중국, 동남아시아로 팽창하고 새롭게 추가된 인구를 제국 질서에 통합하고 동원하는 이념적 근간이 되었다. 이는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으로 이어졌다.

‘20세기형 제국’의 몰락

이렇게 등장한 ‘20세기형 제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엇갈린 운명을 겪었다. 독일 민족을 세계 제일로 세우겠다는 나치 제국과 ‘10억 아시아 해방 성전(聖戰)’을 외친 일본 제국은 연합군에 의해 파멸을 맞이했다. 연합군은 이 두 국가가 제국을 재건하고자 할 가능성을 뿌리 뽑고자 노력했다.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고, 조선은 독립하고, 대만은 중국에 반환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억압적이고 잔혹한 제국이었어도 해체는 언제나 고통을 수반했다. 중동부 유럽에서 수백 년을 뿌리내린 독일인 공동체는 모두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추방되었다. 사할린, 만주, 조선을 가리지 않고 척식(拓殖)에 나섰던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국 각지에 백만이 넘게 퍼져 있던 일본인들은 일궈놓은 재산을 모두 버리고 복수를 피해 일본 본토로 돌아가야만 했다. 독일과 일본 모두에서 제국의 주인은 순식간에 난민 신세가 되었고, 이들이 겪은 고통은 오늘날까지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로 남아 있다.

한편 패전국뿐 아니라 대표적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제국들도 빠르게 해체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복합적인 효과가 작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 각국이 해외 식민지에서 더 강도 높은 동원을 하게끔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근대적 행정을 익힌 식민지 엘리트는 전후(戰後)에 더 광범위한 자치를, 나아가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의 역할도 컸다. 그 자신이 제국이었지만 ‘아시아 해방’을 외쳤던 일본 제국은 동남아시아의 유럽 제국을 접수한 뒤에 명목상이나마 독립 정부들을 꾸렸다. 동남아시아의 민족 운동가들은 아시아인 일본이 유럽 제국을 무찌르는 것을 보면서 자신감을 얻었고, 일본이 물러간 뒤에도 식민지 독립 투쟁을 계속하였다.

‘제국이면서 제국이 아닌’

‘제국이면서 제국이 아닌’ 미국과 소련의 부상(浮上)도 중요했다. 광대한 영토에 걸맞은 다양성을 지닌 이 두 제국은 전후 각지에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영향력을 따르는 사실상의 ‘제후국(諸侯國)’도 거느리게 됐다. 동시에 미소 양국은 유럽 제국주의를 과거의 유물로 규정하며 각각 윌슨과 레닌의 사상에 따라 해체하게끔 압박을 가했고, 이후 유럽 제국주의가 물러간 신생 독립국을 어느 제국에 끌어들일지를 둘러싸고 냉전에 돌입했다.

물론 유럽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도 민족 갈등은 빈발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대규모 인구 교환 과정에서 대규모 상호 학살이 발생했다. 대영 제국이 관리하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대부분의 제국을 내려놓았으나, 자국 거류민이 다수 거주하는 알제리는 포기하지 않고자 잔혹한 진압 작전을 펼쳤다. 전후 프랑스 정치 최악의 문제로 부상한 알제리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우리의 6·25 전쟁도 김일성(金日成)의 남침(南侵)과 극심한 좌우 이념 갈등의 전쟁임과 동시에, 일본 제국의 해체가 촉발한 전쟁이기도 하다.

소련 제국의 해체

쿠데타가 무산된 후인 1991년 8월 23일, 러시아 서민들은 소련 비밀경찰(KGB) 창건자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동상을 쓰러뜨렸다. 넉 달 후 소련 제국이 무너졌다. 사진=AP/뉴시스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격화된 냉전 역시 소련 제국의 붕괴로 마무리되었다. 공산주의의 비효율성으로 가중된 경제난은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소련의 동유럽 제국을 무너뜨렸다. 게다가 민족어 교육 학교를 보급하고, 소수민족 당원, 관료, 기술자를 육성한 소련의 정책은 소련에 속한 각 소수민족들의 민족의식 발전을 꾸준히 자극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이 당장 독립을 꿈꾼 것은 아니지만, 모스크바 중앙의 권위가 약화될 때 독립을 향한 유혹은 언제든지 표출될 수 있는 것이었다.

역시 연쇄적으로 벌어지는 민족 갈등은 소련 제국의 해체를 촉진하는 가장 큰 연료였다. 이미 1988년에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치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소련 안에서 사실상의 내전에 돌입했다. 조지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에서도 민족 분규가 터져 나왔다. 체첸처럼 러시아 내부의 소수민족도 러시아로부터의 이탈을 열망했다.

이럼에도 소련 제국의 해체는 이전의 다른 사례와 비교했을 때 독보적으로 평화로웠다. 소련은 내부 행정을 국가 정부와 유사한 ‘공화국’ 체제로 운영하고 있었고, 공화국 경계를 대다수 민족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제국의 주류 민족인 러시아인의 운명은 고달팠다. 초강대국 소련의 주인에서, 신생 독립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것이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 합병으로 시작되어 2022년 전쟁으로 확대된 우크라이나 위기는 제국 해체 과정에서 등장한 재외(在外) 러시아인의 문제가 가장 커다란 규모로 비화(飛火)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국에 대한 부담감

제국 해체의 역사는 오늘날 귀환한 제국의 지정학 시대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에 이르기까지 제국들은 자신들의 통합력을 지켜내면서, 상대방 제국의 분열과 약화를 촉진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제국은 생존하면서도 제국의 이념을 바꿔야 했고, 또 다른 제국들은 도전을 견뎌내지 못하면서 무너지기도 했다. 러시아, 이란, 튀르키예, 인도, 중국 등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을 시작한 오늘날, 제국의 경쟁은 해체와 안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내야 하는 도전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제국의 해체 과정이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자발적으로 제국을 내려놓는 국가들이다. 오스트리아, 오스만, 일본 등은 전쟁에서 패전하면서 타의(他意)에 의해 제국이 해체된 경우다.

반대로 제국의 주류 민족들이 제국의 다양성에 피로감을 느끼고, 자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국가를 원하게 된다면 자발적으로 제국의 해체를 선택할 때도 있다.

대영 제국은 미국과 식민지의 압력과 동시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에 부담을 느낀 전후 영국인들의 선택으로 해체되었다.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제국도 유사한 사례다. 전후 서아프리카의 민족 지도자들은 ‘프랑스 문명’에 계속 애착을 표하면서, 자신들을 동등한 프랑스 국민으로 대우해 준다면 프랑스 제국에 잔류(殘留)하겠다는 의사를 비추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이 동등한 프랑스 국민으로 대거 합류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프랑스는 알제리를 제외한 대다수 식민지를 신속히 독립시켰다.

소련 제국의 해체에도 러시아인들이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 등 ‘후진 지역’에 러시아의 자원을 언제까지 쏟아부을 수 없다는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요구가 결정적이었다. 이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을 이끈 지도자가 소련 해체를 주도한 보리스 옐친이었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드림’이 살아 있는 이민(移民) 국가이자 세계 제국인 미국의 주류 백인들이 ‘제국의 부담’을 더는 지지 않기로 선언한다면 과연 세계는 어떻게 될까? 제국 해체와 민족자결이 독립의 영광만큼이나 중앙 권력의 부재(不在)로 폭발한 민족 갈등과 복수의 연쇄로 끝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선언은 매우 으스스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