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렌지 혁명(2004), 유로마이단 혁명(2013~14) 거쳐 親러 대통령 탄핵 후 내전 돌입
⊙ 역사적 기억과 정체성, 사회 발전을 위한 합의가 붕괴한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위기
⊙ 독립 후 동남부 우크라이나(친러시아)와 서부 우크라이나(친유럽) 갈등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 역사적 기억과 정체성, 사회 발전을 위한 합의가 붕괴한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위기
⊙ 독립 후 동남부 우크라이나(친러시아)와 서부 우크라이나(친유럽) 갈등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시사저널》 칼럼니스트 / 저서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K를 생각한다》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 2013~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당시 친유럽 시위대는 2차대전 때 극우 세력의 상징인 흑적기를 들고 나왔다. 사진=AP/뉴시스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연말에 시작된 계엄과 탄핵 정국은 여전히 안정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 탄핵 정국이 과거 2016~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9년 전에 시작된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5%까지 폭락했다. 사실상 전 국민이 정부에 등을 돌린 상태였고, 광화문광장의 탄핵 집회가 계속 기세를 키워가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도 사실상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아 탄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라는 선택이 사건의 시발이 되었고, 문재인 정권과 이재명 당대표 체제를 거치면서 더욱 강경해진 민주당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탄핵 시도에 나서고 있지만, 당시와 공기가 전혀 같지 않다. 광화문에서는 탄핵 반대를 외치는 집회가 계속해서 상당한 규모로 열리고 있고, 윤석열 대통령의 한남동 관저에는 공수처의 체포 집행을 막기 위해 보수 시민들이 운집해 시위를 시작했다. 9년 전과 같이 좌익 진영에게 정국 주도권을 순순히 넘겨주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이며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 시기에 보수 진영이 유튜브 채널 위주로 더욱 강력한 대중 동원과 여론 전파 능력을 성장시킨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박근혜 정부 탄핵을 거치며 한국 사회가 정치적으로 계속해서 극단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좌익 진영이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대중 집회 동원력과, 이전 민주당 정부가 누리지 못했던 원내 1당 지위를 동시에 지니며 출범했다. 당시 정부는 탄핵을 통해 들어서며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진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전 정부들과 차별화됐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이니(문재인 전 대통령 애칭)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는 문구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 시기 소득주도성장, 대북·대중 외교정책 등 논란 있는 정책이 추진되었고, 소위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된 관료 조직에 대한 숙청, ‘민주화 서사(敍事)’를 대한민국의 유일한 국가 서사로 간주하는 역사관의 강조가 행해졌다.
‘공화국의 위기’
그 결과 소외감을 느낀 보수 유권자들은 민주당을 향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갈수록 급진적이고 강경해진 언어에 환호를 보냈다. 민주당 역시 친문(親文)에서 친명(親明)으로 전환되며 대한민국에서 보수를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극단화의 길을 택했다. 여기에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를 통해 이미 찢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 사회는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공식적인 제도와 절차가 형해화(形骸化)되고, 각 정치 세력이 거리에 지지자들을 동원하여 대치하는 사실상의 준(準)내전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당분간은 상대 세력의 존재 자체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인구의 수할(割)을 차지하는 비토 집단의 결사(決死)반대가 우리 정치의 상수(常數)가 될 것이다.
자연스레 세계 역사에서 ‘공화국의 위기’로 불리는 여러 선례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좌·우파 갈등이 극에 달했던 프랑스 제3공화정, 좌우 갈등이 결국 3년간의 내전으로 비화한 스페인, 혹은 끝없는 혼란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나치를 지지하며 끝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대표적일 것이다.
국가 서사를 둘러싼 국민의 분열이 제도정치를 작동 불능으로 만들고 그 결과 정치 과정이 해체된 나라가 오늘날에도 있다. 정치적 분열이 외부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경쟁으로 이어져 러시아의 침공과 전쟁이라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원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논해야 할 것은, 침략을 선택한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동기다. 여기에 전쟁의 역사적·지정학적 배경으로서 소련의 해체와 나토의 동진(東進),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까지 더해지곤 한다. 하지만 러시아와 서구가 우크라이나의 향방을 둘러싼 쟁패(爭霸)를 벌이게 된 데는 근본적으로 우크라이나 내부 정치의 극심한 분열과 기능 부전(不全)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우크라이나의 정체성 갈등
동부의 친러시아계 주민과 서부의 친유럽계 주민이 1991년 우크라이나의 건국부터 정치적인 균열을 드러냈고, 국가 정체성(正體性)과 국가 미래 비전을 둘러싼 논쟁은 곧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EU)을 향해야 하는가, 러시아를 향해야 하는가라는 외교 논쟁으로 발전했다.
이 틈에 미국·EU와 러시아는 반으로 갈라진 우크라이나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고자 끊임없이 개입할 수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친러시아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크림(크름)반도를 합병하고 돈바스의 분리주의자를 지원했다. 우크라이나의 극단적 정치 갈등이 자신들이 후원하는 친러시아계 정치 세력의 최종적인 패배로 귀결될 것을 우려하여 전격적인 침공에까지 나섰다.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며 독립한 신생국 우크라이나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국가와 민족 정체성 문제였다. 우선 우크라이나는 인접국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민족사를 쓰기에는 독립된 민족국가를 이룬 역사가 극히 짧았다.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은 러시아 출신
우크라이나인들은 근현대사의 대부분을 로마노프 왕조와 소련이라는 러시아의 제국 질서 속에서 살아왔고,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인과 ‘키이우(키예프) 루시’에서 이어지는 공통된 민족적 기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 중심부에서 활동하기도 용이했다. 많은 우크라이나 출신 인물이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핵심 엘리트로 성장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간 반대 사례도 많다. 대표적으로 지금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 올렉산드르 시르스키부터 소련 시절 러시아에서 태어났다가 우크라이나에 정착한 인물일 정도다. 그의 부모는 여전히 모스크바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한편 소련 시절 공산당이 전국적인 근대화 프로그램을 가동할 때, 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은 우크라이나는 가장 많은 투자를 받은 지역 중 하나였고, 오늘날 발전소, 교량, 공장, 교육기관, 댐 등 우크라이나의 주요 기반 시설도 대부분 소련 시기에 건설됐다. 소련 정권이 세우고 보장한 다양한 기관에서 근무한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독립 이후에도 과거의 기억과 역사를 공유하는 이웃사촌 러시아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와의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이 지역을 러시아의 일개 지역인 소(小)러시아로 칭하며 동화(同化) 정책을 펼쳤다.
두 개의 우크라이나
러시아와 인접해 있고 러시아계 인구가 많은 동남부 우크라이나에서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폴란드 지배의 역사가 길고 러시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늦어도 19세기부터 독자적인 우크라이나 민족 정체성을 탐색하며 제국 정부의 정책에 반발했다. 이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 제국이 전쟁과 혁명으로 해체되던 1917년 무렵에 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을 세우며 독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의 극서부에 위치한 리비우 같은 지역은 스탈린이 소련 영토에 편입시키기 전까지는 러시아의 통치를 받은 역사 자체가 거의 전무(全無)하고 폴란드, 오스트리아 제국과 더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어왔기에 반러시아 감정이 특히 거센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러시아인을 형제 민족으로 보기보다는 제국의 지배자로 보는 시선이 오랫동안 유지됐다. 스탈린 시기에 자행된 민족 엘리트 숙청, 우크라이나에서 피해가 극심했던 1932년의 소련 대기근도 러시아인들이 자행한 우크라이나 민족 억압 조치로 해석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독립 우크라이나는 서로 다른 역사적 기억을 가진 채 우크라이나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하는 두 지역이 공존하는 국가로 출범했다. 동남부 지역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형제 민족이자 러시아와 많은 역사를 공유하는 국가로 생각한 반면, 서부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를 유럽의 일원으로 여겼고, 러시아를 자신들을 유럽에 합류하지 못하게 방해해 온 ‘아시아적 압제자들’로 간주했다.
이 정체성의 차이는 우크라이나가 어떤 국가 노선을 취해야 할지에 관한 논쟁으로 곧바로 이어졌다. 서부인들은 우크라이나가 소련과 러시아 시기의 유산을 청산하고 유럽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동부인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및 다른 구(舊)소련 구성국과의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 두 지역의 대립 구도는 러시아도 친서방 노선을 취하던 1990년대 보리스 옐친 시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2000년에 푸틴 체제가 등장하고 러시아가 서구와 대별(大別)되는 독자적인 강대국의 자리를 지킬 것을 공공연히 밝히며 격화되고 만다. 이 변화는 우크라이나 선거 득표 지도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혼재되어 있던 지역별 정당 지지는 2000년대부터 우크라이나를 반(半)으로 가르는 드네프르강을 기준으로 확연하게 갈리게 된다.
그런데 국가 정체성에 합의하지 못하며 심화된 국론(國論) 분열은 신생 국가 우크라이나에 치명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소련 해체 과정에서 공산당이 통제하던 국가 자산을 헐값에 사유화(私有化)한 과두(寡頭) 재벌 ‘올리가르히’가 탄생했다. 이들 올리가르히는 국민 전체의 복리(福利)보다는 자신의 사욕(私慾)을 제1의 가치로 추구하며 국가 자체를 사유화하는 데 혈안이었다. 인프라가 무너지고 직장이 사라지며 인재가 해외로 유출하는 혼란이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탈(脫)소련 국가들이 이런 혼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발트 3국처럼 안정적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올리가르히를 제도에 구속(拘束)하는 길, 아니면 러시아나 벨라루스처럼 권위주의적인 지도자가 등장하여 올리가르히를 정치 권력으로 제압하는 길이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동쪽이냐 서쪽이냐를 두고 논쟁하느라, 올리가르히를 통제할 강력한 정치 권력이 어느 방향이든 간에 탄생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에서는 여러 올리가르히들이 각자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줄 정당을 후원하면서 키이우 정가는 끝없는 정쟁(政爭)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오렌지 혁명
국가가 표류하는 와중에 정치인들이 국가 비전에 대한 합의보다는 당장의 권력 유지에 급급하면서 우크라이나 정치도 갈수록 극단화되어 갔다. 2004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오렌지 혁명이 그 시작을 알렸다.
10년을 집권한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의 다음을 누가 이을 것인지를 둘러싸고, 서부에서는 빅토르 유셴코를, 동부에서는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지지하며 선거전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유셴코가 러시아 소행으로 추정되는 다이옥신 테러를 당해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부지하면서 제대로 선거가 작동할지에 관한 우려가 커졌다. 결국 야누코비치가 승리한 선거에서 부정선거의 정황이 다수 발견되며 친서방 국민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폭발했다.
오렌지색 깃발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국민들이 시위를 통해 정부를 압박한 결과 재선거가 치러졌고, 야누코비치 대신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친서방 지지자들은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러시아가 후원하는 올리가르히 정치인들을 누르고, 서구식 제도 개혁을 달성해 번영하는 우크라이나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하지만 국민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친러시아계 동부 주민을 완전히 무시하고 정국(政局)을 장악할 수 없었던 유셴코 정부는 역시 강력한 정책 추진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올리가르히의 지배력은 계속 굳건하게 남았다. 그 결과 2010년 대선에서 다시 친러시아 성향인 야누코비치가 당선되며 오렌지 혁명은 환멸만 남긴 채 끝났다.
유로마이단 혁명
엄청나게 부패한 인물인 야누코비치는 러시아와 유럽연합 사이에서 최대한 균형을 지키며 자신의 안전을 도모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우크라이나의 허약한 경제가 위기를 맞이하자, 우크라이나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을 강요받게 된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야누코비치는 유럽과 러시아에 경제 지원을 요청했는데, 유럽은 우크라이나의 부패와 방만한 경제 운영을 지적하며 일련의 구조조정과 개혁안을 조건으로 걸고 지원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구조조정은 정부의 지원과 러시아의 저렴한 에너지 공급을 통해 운영되는 동부 제조업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야누코비치에게 정치 기반을 스스로 해체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요구였다. 결국 야누코비치는 유럽의 지원안을 포기하고, 푸틴이 제시한 더 관대한 지원안을 채택했다.
이는 서부와 수도 키이우 주민들에게 우크라이나를 ‘푸틴과 연계된 부패한 올리가르히의 나라’로 남게 하려는 반동(反動)으로 받아들여졌다. 야누코비치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오렌지 혁명 이후 거의 10년 만에 다시 터져 나왔다.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 시도도 무력화(無力化)시킬 정도로 엄청난 기세로 불어났다. 두려움을 느낀 야누코비치는 키이우를 벗어나 도피했다. 이 사건은 ‘유럽 광장’이라는 뜻의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불리게 된다.
서구에서는 이 유로마이단 혁명을 부패와 독재를 극복한 민주주의 시민 혁명으로 주목했지만, 실제 과정은 훨씬 더 복잡했다. 유로마이단 시위대는 제도 정치 대신에 광장과 거리를 장악하여 국가 기구를 압박하는 혁명 전술을 펼쳤고, 이로 인해 서부와 동부의 위태로운 합의로 유지되던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은 정말로 반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무리하게 진행된 탄핵과 반발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리비우를 중심으로 한 극서부 지역에서 성장한 우크라이나 극우파들이었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하고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한 우크라이나 봉기군(UPA)과 그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를 ‘소련과 러시아에 맞선 우크라이나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하며 준(準)군사조직을 결성했다. 법과 제도보다는 동원과 폭력이 중요한 ‘거리의 정치’에서 이 극우파는 적은 숫자에 비해 훨씬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며 유로마이단 혁명 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야당 의원들은 키이우 거리와 광장을 장악했다는 자신감에 근거해 탄핵 표결 당시 정족수(定足數)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야누코비치 탄핵을 강행했다. 이는 동부의 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아무리 부패하고 무능했어도 우리가 선출한 대통령을 이렇게 끌어내리는 것은 아니다’라는 분노로 이어졌다.
동부 주민들이 주로 청취하는 러시아 언론은 새로 등장한 정부가 반데라를 숭배하는 나치들에게 휘둘릴 것이며, 러시아어 사용과 문화·역사를 억압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자극적인 선전을 계속해서 전파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러시아에 우호적인 돈바스와 크름 지역에서는 유로마이단을 인정할 수 없다는 분리주의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여기에 러시아가 개입하며 우크라이나는 본격적인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민족의식의 출현
물론 러시아가 무력(武力)을 사용해 크름을 합병하고 돈바스 반군을 지원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동서 갈등을 부분적으로 봉합하는 반발 효과를 낳기도 했다. 전쟁이 계속 이어지며 동부에서도 소련의 기억이 없는 신세대를 위주로 ‘우리나라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외세가 개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서부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받아들이는 흐름이 나타났다. 이런 민족의식의 출현은 2022년 푸틴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국민이 3년 가까이 치열한 항쟁을 이어갈 수 있게 한 주요한 배경이다.
안타깝게도 시민혁명과 민족의식의 발전이 있었음에도 우크라이나는 정치적 위기를 끝내 해소하지 못했다. 유로마이단 이후 들어선 페트로 포로셴코 정부가 대표적 보기다. 역시 부패한 올리가르히였던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와 분열을 해결할 능력을 보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신앙, 군대, 언어’를 외치며 포퓰리즘적인 청산주의를 지지의 원천으로 삼기 시작했다.
포로셴코 시기에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반데라의 후예’를 자처하는 다양한 극우 준군사조직이 더욱 크게 성장했고, 우크라이나 민족의 정기(精氣)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소련 및 러시아를 떠올리게 하는 국가 상징물과 위인들이 체계적으로 퇴출되었다. 이런 정책은 초기에는 잠깐 인기를 끌 수 있었으나, 우크라이나의 주요한 산업지대인 돈바스가 분쟁으로 말미암아 가동이 정지되자 경제가 기울고, 부패도 해결되지 않아 포로셴코의 인기는 다시 바닥으로 추락했다.
희극인이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정치를 풍자하는 시트콤으로 일약 스타가 된 뒤, 2019년에 70%의 지지를 얻으며 대통령에 쾌속 당선되는 사건은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다. 무엇보다 돈바스 전쟁을 협상을 통해서 종식시키겠다는 그의 공약은 소외감을 느끼던 동부 주민들에게도 큰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젤렌스키도 결국 민족주의 포퓰리즘에 빠져
하지만 젤렌스키도 이미 외세(外勢)까지 개입하기 시작한 우크라이나 위기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이미 ‘서구에 맞선 항전(抗戰)’을 국가 대전략으로 설정한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나토나 유럽연합 가입을 수용하는 형태로 협상을 이루는 건 불가능했다.
러시아의 영토 점령으로 부분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무장단체는 어떠한 형태의 협상도 거부하며 젤렌스키를 내부에서 압박했다. 젤렌스키는 ‘분리주의자 영토(러시아에 사실상 합병된 돈바스 및 크름반도–편집자 註)를 포함한 전국 선거’를 해결책으로 내걸었지만, 이미 우크라이나 정치는 협상과 타협 대신에 대결과 제압의 언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유리한 환경으로 변모해 있었다.
돈바스 전쟁 종식에 실패하며 여러 정치 개혁에서도 탄력을 상실한 젤렌스키의 지지율은 코로나 팬데믹까지 맞으며 다시 추락했다.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지지율을 회복하고자 젤렌스키가 한 선택은 동부에서 다시 지지를 얻기 시작한 친러시아 정치인인 빅토르 메드베드추크를 공격하는 민족주의 포퓰리즘이었다.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최후의 친러시아 정치 기반마저 모두 무너질 것을 우려한 푸틴은 메드베드추크 숙청 직후에 군대를 배치하며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강대강 대치가 1년간 이어지고, 어떤 해결 방안도 도출되지 않자 푸틴은 2022년 2월에 전격적인 침공을 지시한다. 이렇게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발발 3주년을 앞두고 있다.
반대편을 ‘외국 앞잡이’로 적대시
오렌지 혁명에서 유로마이단을 거쳐 젤렌스키까지 이어지는 우크라이나의 정치 위기는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21세기 세계의 정정(政情) 불안이 어떤 형태로 악화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이 부활한 강대국 지정학과 맞물려, 서로를 같은 국민으로 보기보다는 ‘외국 앞잡이’로 적대시한다.
이런 환경에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가 아니라 상호 적대적인 유권자들끼리 상대의 승리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변질한다. 그 과정에서 국가 기관은 정치적 중립을 포기하고, 거리와 광장을 장악한 세력이 극단적인 투쟁을 영웅시하고, 의회의 절차적 합의도 파행(跛行)을 거듭한다.
그렇게 ‘반쪽 국민’의 지지만을 받는 정부는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서 집권하지만, 추상적이고 공허한 구호를 제외하고는 국가를 정상화하고 국민의 화해를 독려할 방안은 전무(全無)하다. 정치인 몇 명이 화합을 이야기하더라도 강성 지지자의 반발로 인해 진지한 대화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결과적으로 해체되는 산업, 노후화(老朽化)되는 인프라, 줄어드는 인구 등 국민의 실질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적폐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쇼가 주축이 되는 미디어 정치만 남는다.
우크라이나의 사회학자 볼로디미르 이시첸코는 2004년부터 2021년까지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만성적 정치 위기가 단순히 우크라이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선거가 거듭될수록 정치 갈등이 극단화되는 것은 역사적 기억과 정체성, 사회 발전을 위한 합의가 붕괴한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위기라는 것이다.
미중 갈등 속 대한민국의 미래는?
서로 이빨을 드러내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나라는 정치적 양극화(兩極化)가, 서로 다른 국제관(國際觀)의 충돌로 더욱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에 더욱 우려스럽다.
루마니아에서는 얼마 전 대통령 선거에서 친러시아 후보가 1위를 차지하자, 헌법재판소가 선거를 무효화(無效化)하며 국민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조지아에서도 친러시아 정당인 ‘조지아의 꿈’이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자, 친서방 대통령인 살로메 주라비슈빌리가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고 친서방 시위대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경계 지대에서 국민 분열이 연쇄적인 지정학적 갈등으로 전이(轉移)되는 모양새다.
한국은 어떤가? 대한민국의 역사는 무엇이었는지, 또 우리는 어떤 국민인지에 대한 합의를 전혀 이루지 못하며 정치적 갈등이 폭발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부딪히는 전선(前線) 한가운데 위치한 대한민국의 입지를 생각할 때 불길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서사를 혁신해 내 국민적 합의를 새로이 쓰고, 우리 사회가 처한 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안목과 능력을 갖춘 정치가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제도로 흡수되지 않고 계속해서 뜨겁게 발산하기만 하는 거리와 광장의 에너지가 발화점(發火點)을 넘으면 국가는 전소(全燒)될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 사회는 내전의 소방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이번에는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라는 선택이 사건의 시발이 되었고, 문재인 정권과 이재명 당대표 체제를 거치면서 더욱 강경해진 민주당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탄핵 시도에 나서고 있지만, 당시와 공기가 전혀 같지 않다. 광화문에서는 탄핵 반대를 외치는 집회가 계속해서 상당한 규모로 열리고 있고, 윤석열 대통령의 한남동 관저에는 공수처의 체포 집행을 막기 위해 보수 시민들이 운집해 시위를 시작했다. 9년 전과 같이 좌익 진영에게 정국 주도권을 순순히 넘겨주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이며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 시기에 보수 진영이 유튜브 채널 위주로 더욱 강력한 대중 동원과 여론 전파 능력을 성장시킨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박근혜 정부 탄핵을 거치며 한국 사회가 정치적으로 계속해서 극단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좌익 진영이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인 대중 집회 동원력과, 이전 민주당 정부가 누리지 못했던 원내 1당 지위를 동시에 지니며 출범했다. 당시 정부는 탄핵을 통해 들어서며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진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전 정부들과 차별화됐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이니(문재인 전 대통령 애칭)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는 문구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재인 정부 시기 소득주도성장, 대북·대중 외교정책 등 논란 있는 정책이 추진되었고, 소위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된 관료 조직에 대한 숙청, ‘민주화 서사(敍事)’를 대한민국의 유일한 국가 서사로 간주하는 역사관의 강조가 행해졌다.
‘공화국의 위기’
그 결과 소외감을 느낀 보수 유권자들은 민주당을 향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갈수록 급진적이고 강경해진 언어에 환호를 보냈다. 민주당 역시 친문(親文)에서 친명(親明)으로 전환되며 대한민국에서 보수를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극단화의 길을 택했다. 여기에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를 통해 이미 찢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상황을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우리 사회는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공식적인 제도와 절차가 형해화(形骸化)되고, 각 정치 세력이 거리에 지지자들을 동원하여 대치하는 사실상의 준(準)내전 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당분간은 상대 세력의 존재 자체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인구의 수할(割)을 차지하는 비토 집단의 결사(決死)반대가 우리 정치의 상수(常數)가 될 것이다.
자연스레 세계 역사에서 ‘공화국의 위기’로 불리는 여러 선례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좌·우파 갈등이 극에 달했던 프랑스 제3공화정, 좌우 갈등이 결국 3년간의 내전으로 비화한 스페인, 혹은 끝없는 혼란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나치를 지지하며 끝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대표적일 것이다.
국가 서사를 둘러싼 국민의 분열이 제도정치를 작동 불능으로 만들고 그 결과 정치 과정이 해체된 나라가 오늘날에도 있다. 정치적 분열이 외부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경쟁으로 이어져 러시아의 침공과 전쟁이라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원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논해야 할 것은, 침략을 선택한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동기다. 여기에 전쟁의 역사적·지정학적 배경으로서 소련의 해체와 나토의 동진(東進),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까지 더해지곤 한다. 하지만 러시아와 서구가 우크라이나의 향방을 둘러싼 쟁패(爭霸)를 벌이게 된 데는 근본적으로 우크라이나 내부 정치의 극심한 분열과 기능 부전(不全)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우크라이나의 정체성 갈등
동부의 친러시아계 주민과 서부의 친유럽계 주민이 1991년 우크라이나의 건국부터 정치적인 균열을 드러냈고, 국가 정체성(正體性)과 국가 미래 비전을 둘러싼 논쟁은 곧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EU)을 향해야 하는가, 러시아를 향해야 하는가라는 외교 논쟁으로 발전했다.
이 틈에 미국·EU와 러시아는 반으로 갈라진 우크라이나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고자 끊임없이 개입할 수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친러시아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크림(크름)반도를 합병하고 돈바스의 분리주의자를 지원했다. 우크라이나의 극단적 정치 갈등이 자신들이 후원하는 친러시아계 정치 세력의 최종적인 패배로 귀결될 것을 우려하여 전격적인 침공에까지 나섰다.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며 독립한 신생국 우크라이나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국가와 민족 정체성 문제였다. 우선 우크라이나는 인접국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민족사를 쓰기에는 독립된 민족국가를 이룬 역사가 극히 짧았다.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은 러시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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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왼쪽)은 러시아 출신이다. 사진=AFP/연합뉴스 |
한편 소련 시절 공산당이 전국적인 근대화 프로그램을 가동할 때, 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은 우크라이나는 가장 많은 투자를 받은 지역 중 하나였고, 오늘날 발전소, 교량, 공장, 교육기관, 댐 등 우크라이나의 주요 기반 시설도 대부분 소련 시기에 건설됐다. 소련 정권이 세우고 보장한 다양한 기관에서 근무한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독립 이후에도 과거의 기억과 역사를 공유하는 이웃사촌 러시아에 애착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와의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제국은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이 지역을 러시아의 일개 지역인 소(小)러시아로 칭하며 동화(同化) 정책을 펼쳤다.
두 개의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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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5일 젤렌스키 대통령 부부는 우크라이군 장병들과 함께 키이우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대기근(1932~33) 91주년 추모식에 참석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
자연스럽게 독립 우크라이나는 서로 다른 역사적 기억을 가진 채 우크라이나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하는 두 지역이 공존하는 국가로 출범했다. 동남부 지역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형제 민족이자 러시아와 많은 역사를 공유하는 국가로 생각한 반면, 서부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를 유럽의 일원으로 여겼고, 러시아를 자신들을 유럽에 합류하지 못하게 방해해 온 ‘아시아적 압제자들’로 간주했다.
이 정체성의 차이는 우크라이나가 어떤 국가 노선을 취해야 할지에 관한 논쟁으로 곧바로 이어졌다. 서부인들은 우크라이나가 소련과 러시아 시기의 유산을 청산하고 유럽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동부인들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및 다른 구(舊)소련 구성국과의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 두 지역의 대립 구도는 러시아도 친서방 노선을 취하던 1990년대 보리스 옐친 시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2000년에 푸틴 체제가 등장하고 러시아가 서구와 대별(大別)되는 독자적인 강대국의 자리를 지킬 것을 공공연히 밝히며 격화되고 만다. 이 변화는 우크라이나 선거 득표 지도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혼재되어 있던 지역별 정당 지지는 2000년대부터 우크라이나를 반(半)으로 가르는 드네프르강을 기준으로 확연하게 갈리게 된다.
그런데 국가 정체성에 합의하지 못하며 심화된 국론(國論) 분열은 신생 국가 우크라이나에 치명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소련 해체 과정에서 공산당이 통제하던 국가 자산을 헐값에 사유화(私有化)한 과두(寡頭) 재벌 ‘올리가르히’가 탄생했다. 이들 올리가르히는 국민 전체의 복리(福利)보다는 자신의 사욕(私慾)을 제1의 가치로 추구하며 국가 자체를 사유화하는 데 혈안이었다. 인프라가 무너지고 직장이 사라지며 인재가 해외로 유출하는 혼란이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탈(脫)소련 국가들이 이런 혼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발트 3국처럼 안정적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올리가르히를 제도에 구속(拘束)하는 길, 아니면 러시아나 벨라루스처럼 권위주의적인 지도자가 등장하여 올리가르히를 정치 권력으로 제압하는 길이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동쪽이냐 서쪽이냐를 두고 논쟁하느라, 올리가르히를 통제할 강력한 정치 권력이 어느 방향이든 간에 탄생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에서는 여러 올리가르히들이 각자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줄 정당을 후원하면서 키이우 정가는 끝없는 정쟁(政爭)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오렌지 혁명
국가가 표류하는 와중에 정치인들이 국가 비전에 대한 합의보다는 당장의 권력 유지에 급급하면서 우크라이나 정치도 갈수록 극단화되어 갔다. 2004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오렌지 혁명이 그 시작을 알렸다.
10년을 집권한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의 다음을 누가 이을 것인지를 둘러싸고, 서부에서는 빅토르 유셴코를, 동부에서는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지지하며 선거전이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 와중에 유셴코가 러시아 소행으로 추정되는 다이옥신 테러를 당해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부지하면서 제대로 선거가 작동할지에 관한 우려가 커졌다. 결국 야누코비치가 승리한 선거에서 부정선거의 정황이 다수 발견되며 친서방 국민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폭발했다.
오렌지색 깃발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국민들이 시위를 통해 정부를 압박한 결과 재선거가 치러졌고, 야누코비치 대신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친서방 지지자들은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러시아가 후원하는 올리가르히 정치인들을 누르고, 서구식 제도 개혁을 달성해 번영하는 우크라이나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하지만 국민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친러시아계 동부 주민을 완전히 무시하고 정국(政局)을 장악할 수 없었던 유셴코 정부는 역시 강력한 정책 추진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올리가르히의 지배력은 계속 굳건하게 남았다. 그 결과 2010년 대선에서 다시 친러시아 성향인 야누코비치가 당선되며 오렌지 혁명은 환멸만 남긴 채 끝났다.
유로마이단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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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야누코비치(왼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야누코비치는 친러 정책을 펴다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축출되어 러시아로 도주했다. 사진=AP/연합뉴스 |
하지만 이 구조조정은 정부의 지원과 러시아의 저렴한 에너지 공급을 통해 운영되는 동부 제조업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야누코비치에게 정치 기반을 스스로 해체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요구였다. 결국 야누코비치는 유럽의 지원안을 포기하고, 푸틴이 제시한 더 관대한 지원안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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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마이단 혁명 후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에서는 친러시아 시위대가 지방정부를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
서구에서는 이 유로마이단 혁명을 부패와 독재를 극복한 민주주의 시민 혁명으로 주목했지만, 실제 과정은 훨씬 더 복잡했다. 유로마이단 시위대는 제도 정치 대신에 광장과 거리를 장악하여 국가 기구를 압박하는 혁명 전술을 펼쳤고, 이로 인해 서부와 동부의 위태로운 합의로 유지되던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은 정말로 반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무리하게 진행된 탄핵과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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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민족주의기구(OUN) 지도자였던 스테판 반데라(1909~ 1959). |
야당 의원들은 키이우 거리와 광장을 장악했다는 자신감에 근거해 탄핵 표결 당시 정족수(定足數)에 미치지 못했음에도 야누코비치 탄핵을 강행했다. 이는 동부의 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아무리 부패하고 무능했어도 우리가 선출한 대통령을 이렇게 끌어내리는 것은 아니다’라는 분노로 이어졌다.
동부 주민들이 주로 청취하는 러시아 언론은 새로 등장한 정부가 반데라를 숭배하는 나치들에게 휘둘릴 것이며, 러시아어 사용과 문화·역사를 억압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자극적인 선전을 계속해서 전파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러시아에 우호적인 돈바스와 크름 지역에서는 유로마이단을 인정할 수 없다는 분리주의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여기에 러시아가 개입하며 우크라이나는 본격적인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민족의식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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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데라의 후예’를 자처하는 아조프 여단은 유로마이단 혁명 과정에서 활약한 극우 무장 세력으로 러시아와의 항전에 앞장섰다. 사진=AFP/연합뉴스 |
안타깝게도 시민혁명과 민족의식의 발전이 있었음에도 우크라이나는 정치적 위기를 끝내 해소하지 못했다. 유로마이단 이후 들어선 페트로 포로셴코 정부가 대표적 보기다. 역시 부패한 올리가르히였던 포로셴코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와 분열을 해결할 능력을 보이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신앙, 군대, 언어’를 외치며 포퓰리즘적인 청산주의를 지지의 원천으로 삼기 시작했다.
포로셴코 시기에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반데라의 후예’를 자처하는 다양한 극우 준군사조직이 더욱 크게 성장했고, 우크라이나 민족의 정기(精氣)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소련 및 러시아를 떠올리게 하는 국가 상징물과 위인들이 체계적으로 퇴출되었다. 이런 정책은 초기에는 잠깐 인기를 끌 수 있었으나, 우크라이나의 주요한 산업지대인 돈바스가 분쟁으로 말미암아 가동이 정지되자 경제가 기울고, 부패도 해결되지 않아 포로셴코의 인기는 다시 바닥으로 추락했다.
희극인이었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정치를 풍자하는 시트콤으로 일약 스타가 된 뒤, 2019년에 70%의 지지를 얻으며 대통령에 쾌속 당선되는 사건은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다. 무엇보다 돈바스 전쟁을 협상을 통해서 종식시키겠다는 그의 공약은 소외감을 느끼던 동부 주민들에게도 큰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젤렌스키도 결국 민족주의 포퓰리즘에 빠져
하지만 젤렌스키도 이미 외세(外勢)까지 개입하기 시작한 우크라이나 위기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이미 ‘서구에 맞선 항전(抗戰)’을 국가 대전략으로 설정한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나토나 유럽연합 가입을 수용하는 형태로 협상을 이루는 건 불가능했다.
러시아의 영토 점령으로 부분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무장단체는 어떠한 형태의 협상도 거부하며 젤렌스키를 내부에서 압박했다. 젤렌스키는 ‘분리주의자 영토(러시아에 사실상 합병된 돈바스 및 크름반도–편집자 註)를 포함한 전국 선거’를 해결책으로 내걸었지만, 이미 우크라이나 정치는 협상과 타협 대신에 대결과 제압의 언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유리한 환경으로 변모해 있었다.
돈바스 전쟁 종식에 실패하며 여러 정치 개혁에서도 탄력을 상실한 젤렌스키의 지지율은 코로나 팬데믹까지 맞으며 다시 추락했다.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지지율을 회복하고자 젤렌스키가 한 선택은 동부에서 다시 지지를 얻기 시작한 친러시아 정치인인 빅토르 메드베드추크를 공격하는 민족주의 포퓰리즘이었다.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는 최후의 친러시아 정치 기반마저 모두 무너질 것을 우려한 푸틴은 메드베드추크 숙청 직후에 군대를 배치하며 우크라이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강대강 대치가 1년간 이어지고, 어떤 해결 방안도 도출되지 않자 푸틴은 2022년 2월에 전격적인 침공을 지시한다. 이렇게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발발 3주년을 앞두고 있다.
반대편을 ‘외국 앞잡이’로 적대시
오렌지 혁명에서 유로마이단을 거쳐 젤렌스키까지 이어지는 우크라이나의 정치 위기는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21세기 세계의 정정(政情) 불안이 어떤 형태로 악화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이 부활한 강대국 지정학과 맞물려, 서로를 같은 국민으로 보기보다는 ‘외국 앞잡이’로 적대시한다.
이런 환경에서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가 아니라 상호 적대적인 유권자들끼리 상대의 승리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변질한다. 그 과정에서 국가 기관은 정치적 중립을 포기하고, 거리와 광장을 장악한 세력이 극단적인 투쟁을 영웅시하고, 의회의 절차적 합의도 파행(跛行)을 거듭한다.
그렇게 ‘반쪽 국민’의 지지만을 받는 정부는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서 집권하지만, 추상적이고 공허한 구호를 제외하고는 국가를 정상화하고 국민의 화해를 독려할 방안은 전무(全無)하다. 정치인 몇 명이 화합을 이야기하더라도 강성 지지자의 반발로 인해 진지한 대화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결과적으로 해체되는 산업, 노후화(老朽化)되는 인프라, 줄어드는 인구 등 국민의 실질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적폐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쇼가 주축이 되는 미디어 정치만 남는다.
우크라이나의 사회학자 볼로디미르 이시첸코는 2004년부터 2021년까지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만성적 정치 위기가 단순히 우크라이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선거가 거듭될수록 정치 갈등이 극단화되는 것은 역사적 기억과 정체성, 사회 발전을 위한 합의가 붕괴한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위기라는 것이다.
미중 갈등 속 대한민국의 미래는?
서로 이빨을 드러내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나라는 정치적 양극화(兩極化)가, 서로 다른 국제관(國際觀)의 충돌로 더욱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에 더욱 우려스럽다.
루마니아에서는 얼마 전 대통령 선거에서 친러시아 후보가 1위를 차지하자, 헌법재판소가 선거를 무효화(無效化)하며 국민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조지아에서도 친러시아 정당인 ‘조지아의 꿈’이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자, 친서방 대통령인 살로메 주라비슈빌리가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고 친서방 시위대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경계 지대에서 국민 분열이 연쇄적인 지정학적 갈등으로 전이(轉移)되는 모양새다.
한국은 어떤가? 대한민국의 역사는 무엇이었는지, 또 우리는 어떤 국민인지에 대한 합의를 전혀 이루지 못하며 정치적 갈등이 폭발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부딪히는 전선(前線) 한가운데 위치한 대한민국의 입지를 생각할 때 불길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서사를 혁신해 내 국민적 합의를 새로이 쓰고, 우리 사회가 처한 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안목과 능력을 갖춘 정치가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제도로 흡수되지 않고 계속해서 뜨겁게 발산하기만 하는 거리와 광장의 에너지가 발화점(發火點)을 넘으면 국가는 전소(全燒)될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 사회는 내전의 소방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