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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30주년, 韓中 관계를 다시 생각한다

중국 정치의 변화와 韓中 관계

‘中國夢’ 외치는 시진핑, 對外 관계를 체제경쟁으로 인식

글 : 주재우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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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공산당, 역사적 목표에 따라 지도부 구성… 시진핑은 건국 100주년인 2049년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달성 위해 선택된 지도자
⊙ 후진타오 시기 중국 경제 浮上 힘입어 한국 경제 호황… 東北工程,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對中 인식 악화
⊙ 韓中 관계, 시진핑의 3연임이 거의 확정된 상황에서 사드 이전 상황으로 회귀할 가능성 희박

朱宰佑
1967년생. 美 웨슬리언대 정치학 학사, 中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석·박사 / 국가안보정책연구소(現 국제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무역협회 무역연구소(現 국제무역연구원) 연구위원 역임. 現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중국연구센터장, 한중사회과학회 회장, 한국세계지역학회 회장(2023년) / 저서 《한국인을 위한 미중관계사: 한국전쟁에서 사드 갈등까지》 《팩트로 읽는 미중의 한반도 전략》 《북미관계: 그 숙명의 역사》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2021년 7월 1일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중화민족부흥’을 외쳤다. 사진=신화/뉴시스
  올해로 수교 30주년을 맞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새로운 기로(岐路)에 서 있다. 지난 30년을 되돌아볼 때 양국의 관계사는 부침(浮沈)의 연속이었다. 다른 한편 이 30년은 중국이 경제·외교·군사 등 다방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어나가고 관련 정책 역시 부단한 변화와 조정을 보인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과 변화는 중국을 이끌어나가는 중국공산당 지도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2년 한중 정상(頂上)이 수교를 결정한 이래,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성격은 지난 30년의 양국 발전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성격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세운 중공의 정치 일정에 따라 결정됐다.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원대한 역사적 목표와 소명(召命) 아래 정치 일정을 세웠고, 이러한 일정에 따라 역대 지도부가 꾸려졌기 때문이다.
 
  가령 1978년 12월에 개최된 11기 3차 중앙위원회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 노선이 확정된 이후에는 개혁·개방을 견지한다는 목표 아래 실용주의적인 온건 개혁파가 대거 등용되었다. 그리고 2002년 10월 제16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향후 20년을 ‘전략적 기회(戰略的機遇)’로 규명한 뒤에는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technocrat)’가 대거 중앙에 진출하여 정치 일정의 달성에 주력했다.
 
  지금의 중국공산당 지도부 역시 마찬가지다. 2012년 11월, 18차 당대회는 새로운 정치 일정으로 2035년 사회주의 현대화의 완성을 소개했다. 이를 기반으로 중국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인 2049년에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이룩하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완성할 인재, 즉 당과 공산주의에 충실한 지도부의 출범이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이런 인물을 이른바 ‘태자당(太子黨·공산혁명 1세대의 후손)’에서 찾은 결과, 시진핑(習近平) 같은 사람이 등용됐다.
 
 
  천안문 사태 후 대학생에게 군사교육 의무화
 
  이렇듯 중국 지도부의 성격은 당이 설정한 정치 일정에 따라 철저히 규정되고 변화되어왔다. 때문에 한중 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중국공산당의 정치 일정에 대해 먼저 이해하고, 중국 지도부의 성격을 섬세히 파악한 뒤, 그에 적절히 대응하는 외교를 구사해야 할 것이다.
 
  장쩌민(江澤民) 시기의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통치 성격은 두 가지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시기는 1989년 6월 말부터 1992년 10월 14차 중국공산당 당대회까지다. 그리고 이후 2002년 퇴임까지를 두 번째 시기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두 시기로 나누는 이유는 두 가지에서다. 하나는 첫 번째 시기를 장쩌민 체제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중국공산당의 총서기가 된 것은 그야말로 천운(天運)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로 사임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의 대체자로 총서기직에 올랐다. 그 이전까지 장쩌민이 오른 최고 관직은 중앙정치와 동떨어진 상하이시장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중국 최고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은 그를 발탁한 것이다. 덩샤오핑의 후광에 힘입어 중앙정치 무대에 진출했지만 천안문 사태의 후유증으로 그는 매우 경직된 통치체제를 이끌어야 했다. 대혼란에 빠진 중국을 다스리는 데는 경직된 통치 방법이 유용했다. 정신교육 강화를 명목으로 중국공산당은 각 계층, 각 단위(회사를 포함한 사회조직 및 단체)의 개개인의 생활을 엄격히 통제했다. 어떤 사회 구성원도 예외는 없었다.
 
  필자는 당시 중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으며 이런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 1990년 대학 신입생부터 1년 군사교육이 의무화되었다. 이들은 체력훈련에서부터 공산당의 교리 교육까지, 심지어 유격훈련에서부터 100km 행군까지 모든 과정을 수행해야 했다. 그들의 훈련 일상은 중국 중앙TV(CCTV)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고 전국에 방송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또한 졸업 후 이들의 해외유학을 금지했다. 유학 금지령은 1995년까지 지속되었다.
 
 
  덩샤오핑의 ‘神의 한 수’
 
천안문사태 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남순강화에 나선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지속을 강조했다.
  그러나 경제 문제는 경직된 통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천안문 사태 이후 서구 사회가 중국에 경제제재를 가했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의 경제 발전 능력이 해외 투자와 대외무역에 높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의 제재(制裁)는 치명적이었다. 서방 사회는 중국공산당이 천안문광장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학생과 시민을 무력(武力)으로 진압한 것을 규탄하며 제재를 결정했다. 서방 사회에 유혈진압은 중국의 인권 문제로 귀결되었고, 경제제재는 이에 대한 보복이었다.
 
  천안문 사태 이전까지 중국 경제는 그야말로 호황을 누렸다. 연평균 두 자릿수의 경제성장률이 그 증거다. 하지만 경제성장률은 제재의 채택과 함께 4%대로 곤두박질쳤다. 1989년에는 4%, 1990년에는 3.8%를 기록했다.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이 채택된 이후 성장률이 최저 기록을 거듭 경신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패닉 상황에 빠진다. 중앙정치 경험이 전무(全無)하고 큰 규모의 경제를 이끌어본 적도 없던 장쩌민 지도부에 있어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는 온 신경이 마비되는 것과 같았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들은 자연히 덩샤오핑에게 구원 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덩샤오핑의 출구(出口)전략은 그야말로 ‘신(神)의 한 수’였다. 개혁·개방이 견지되어야 한다는 신념하에 그는 우선 중국의 주변 지역에서 활로를 찾았다. 여기에는 홍콩, 대만, 싱가포르와 한국이라는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龍)’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중국과의 정상적인 교역 관계를 희망했는데, 특히 싱가포르와 한국은 미수교 국가로서 상호 교역을 위해 수교를 더욱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또 다른 ‘신의 한 수’는 이스라엘과의 수교였다. 중국공산당은 중동 문제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지지하는 입장을 오랫동안 견지했다. 반제국주의를 외교의 최대 동인이자 최고의 원칙 중 하나로 정의했던 중국공산당에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중국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중국공산당은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위한 협상을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미국 내의 중국 강경파를 녹일 수 있었다. 특히 유대인이 경영하는 미국 내의 중국 로비스트 회사들은 제재 해제를 촉구하는 로비를 미국 의회에서 적극 개진했다. 이후 미국의 제재는 1992년 이스라엘과의 수교 이전에 모두 해제되었다.
 
 
  도광양회
 
  두 번째 시기는 1992년 장쩌민이 중국공산당 대회에서 총서기로 정식 선출된 이후부터 그의 퇴임까지다. 이듬해인 1993년에는 중국 국가주석으로도 선출되면서 그는 당 총서기,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이른바 ‘3권(權)’을 모두 장악하게 된다(중앙군사위 주석직은 1989년에 덩샤오핑에게서 물려받았다).
 
  이때부터 장쩌민은 자신의 세력으로 중국을 보다 유연하게 통치할 수 있었다. 그는 집단지도부체제로 통치체제를 전환시켰고, 2연임(連任) 임기제를 비공식적으로 도입했다. 제재가 풀린 상황에서 중국 경제는 정상 궤도로 회귀했고, 중국 사회 역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가 정식 임기 동안 비교적 유연하게 외교를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덩샤오핑이 주창한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을 외교의 기본 노선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이의 핵심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데 있다.
 
  그 결과 그는 1995년 WTO(세계무역기구) 출범 이후, 이의 가입을 위한 장기적인 협상에 적극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안문 사태의 후유증 중 하나였던 미 의회의 최혜국 대우(MFN) 심사를 매년 통과할 수 있었다. 한중수교는 바로 이 시기인 1992년에 이뤄졌으며, 1995년에는 장쩌민의 방한(訪韓)까지 이뤄졌다.
 
  이 시기 한중 관계는 중국의 개혁·개방 견지에 힘입어 우호적이고 협력적으로 발전했다. 한중수교로 양국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인적 왕래가 빈번해진 호기(好機)를 타고 양 국민은 서로에 대한 우의를 다져나갔다. 이의 외교적 징표로 1992년 한중수교 당시에 양국 관계는 ‘선린우호 관계’로 정의되었다. 이후 1998년에 ‘협력 동반자 관계’가 되었다.
 
  또한 양국의 경제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상호보완적인 경제 관계의 구조도 확립되었다. 가령 1992년 한중 무역 규모는 총 64억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10년 뒤인 2002년 이는 총 412억 달러로 급증하며, 연(年)평균 19.6%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다른 한편 이 시기는 1차 북핵(北核) 위기 사태가 발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양국 간의 소통도 잘 이루어지며 한중 관계는 우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더욱이 한중수교 이후 소원했던 북중(北中) 관계가 1999년 회복세로 접어들면서 중국은 남북한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호기를 맞이한다.
 
 
  法治를 꿈꾼 후진타오
 
2019년 10월 1일 건국 70주년 행사에 참석한 중국의 전·현직 지도부. 왼쪽부터 후진타오 전 총서기, 시진핑 현 총서기, 장쩌민 전 총서기, 리커창 총리. 사진=AP/뉴시스
  후진타오(胡錦濤) 정권 기간은 중국의 부상(浮上)을 위한 터전을 닦은 시기였다. 후진타오는 2002년 11월에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되며 당권(黨權)을 장악했고 이듬해 3월에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성격이 유하고 성품이 올바른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중국의 명문대학인 칭화대를 졸업한 그는 머리도 명석했다. 전해 들은 바로는 그는 원고 없이 연설할 정도로 암기력과 기억력이 뛰어났다. 특히 숫자를 절대적으로 기억하면서 틀린 적이 없다고 한다. 학생 시절에도 이러한 자질은 두드러졌다. 그는 야망을 가진 중국 젊은이들의 염원 중 하나인 중국공산당의 청년조직,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 입단하여 대표직까지 올라갔다.
 
  후진타오의 성품을 보면 그가 왜 중국에 법치주의(法治主義)의 뿌리를 내리고 싶어 했는지 가히 알 만하다. 장쩌민은 정치적으로 행정개혁, 국유기업개혁과 반(反)부패투쟁에 전념했다. 반면 후진타오는 농민생활 개선과 농업생산 능력의 향상, 그리고 법치주의의 안착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데 정치적 역량을 집중했다.
 
  여기엔 당시의 현실적 요구도 있었다. 그가 당서기에 선출되던 해에 중국은 정식으로 WTO의 회원국이 되었다. 따라서 WTO 가입 당시 합의한 사항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법제도의 개편이 필요했다. 특히 경제 및 상거래 관련 법안의 제정이 시급했다. 이러한 상황하에 집중된 역량은 빛을 발했고, 가령 전문 변호사로부터 변호를 받을 권리, 항소 신청 등이 더욱 용이해졌다.
 
  후진타오 정권을 두고 3세대 지도부라고도 칭한다. 마오쩌둥 정권, 장쩌민 정권에 뒤이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 지도부의 특징은 모두가 대학 이공계(理工系) 출신이라는 점이다. ‘테크노크라트’로 알려진 이공계 출신들이 과학적 마인드를 가지고 나라를 통치했으니 얼마나 합리성을 추구했겠는가. 그래서인지 이 당시 중국 내에는 법치에 기반하여 더욱 합리적으로 개방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무엇보다 후진타오 정권도 이 방향으로 나라를 선도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회고해 보건대, 이 당시의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아마도 제일 많이 개방되고 제일 자유로웠던 사회였다. 이의 징표로 2003년, 공산주의 교리가 탄생 때부터 줄곧 부정해왔던 사유(私有)재산을 인정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2007년에는 사유재산제를 인정하는 물권법(物權法)이 제정되었다. 이는 사유재산을 국·공유 재산과 동일하게 보호하는 것으로 주택을 영구히 소유하게끔 해주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2002년, 중국공산당의 문호는 민간기업인, 비공유제 기관에 종사하는 노동자와 선진 인력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2008년에는 해외 고급 인재 유치 계획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천인계획(千人計劃)’이 입안되었다. 이들의 입당(入黨)도 역시 허용되었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浮上
 
천안문광장의 베이징 시민들. 시진핑은 작년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샤오캉 사회 진입을 선언했다. 사진=AP/뉴시스
  후진타오의 중국은 출범부터 부상을 꿈꿨다. 2002년 16차 당대회에서 중국공산당은 향후 20년을 ‘전략적 기회’로 명명했다. 중국이 사회주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필요한 경제 역량을 키우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2021년,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때 사회주의 발전 초기 단계의 이정표(里程標)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샤오캉(小康) 사회’를 이룩하겠다는 포부를 2007년 10차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공표했다. 샤오캉 사회는 ‘모든 국민이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경제 수준의 사회’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동시에 절대빈곤수를 1억 명 이하의 수준으로 낮춘다는 목표도 수반한다. 이후 2021년 7월 1일 창당 100주년이 되던 날, 시진핑 주석은 샤오캉 사회의 실현을 선포했다.
 
  후진타오의 법치개혁과 당의 문호개방 정책으로 중국 경제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물론 여기에는 2008년 베이징하계올림픽이라는 특수(特需) 효과도 있긴 했다. 그가 총서기로 선출되었던 2002년을 시작으로 2007년까지 중국은 연평균 1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2007년에는 1980년대 한 번 목도했던 경이적인 성장률, 14.2%를 달성했다. WTO 가입의 혜택과 베이징올림픽의 낙수(落水) 효과가 중국 전역을 뒤덮었다. 이를 등에 업고 중국은 2004년에 세계 최대의 수출국이 되었다. 2009년에는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인 독일을 제쳤고, 2010년에는 급기야 일본을 추월하면서 세계 2대 경제대국의 자리에 올랐다.
 
 
  戰狼외교의 출발
 
  미국의 존재는 중국이 부상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였다. 그 징표가 바로 6자회담이다. 미국은 2001년 ‘9·11테러’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곳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아시아를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2002년 10월 2차 북핵 위기 사태가 발생한다.
 
  미국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에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다자(多者)회담을 중국에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신생 정권이었던 후진타오에게 있어 이는 실로 외교적·정치적으로도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었던 이유는, 미국이 그러지 않으면 북한을 정밀타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놨기 때문이다. 후진타오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국가주석에 선출된 지 한 달도 안 된 2003년 4월에 베이징에서 6자회담의 전초 회의였던 북중미(北中美) 3국 회의를 주관했다.
 
  ‘테러와의 전쟁’이 야기한 미국의 동아시아 부재(不在)가 중국이라는 괴물을 키운 셈이 된 것이다. 중국은 미국의 관여와 견제 없이 하루가 다르게 폭풍 성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시련을 겪게 된다. 미국발(發) 세계 금융위기였다. 이때 미국을 구제한 나라가 아이러니하게 중국이다. 중국은 미국 국채(國債)를 대량으로 매수했고 미국 국채의 최대 보유국으로 올라섰다.
 
  이런 와중, 외교·안보 영역에서 미국이 남중국해에서의 ‘항행의 자유’를 주장하자 중국이 발끈했다. 중국은 남중국해가 자국의 영해(領海)라면서 미국의 주장은 주권(主權)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맞섰다.
 
  또한 2010년 아세안지역포럼(ARF)에서 양국 외교장관 사이에 격렬한 설전(舌戰)이 벌어졌다. 중국의 외교가 공세적으로 변화한 시점이다. 포럼에서 양제츠()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중국은 대국(大國)이고 나머지는 소국(小國)이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발언, 중국 ‘전랑(戰狼)외교’의 출발을 알렸다.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중국은 부상을 위한 경제적 터전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터전을 시진핑 주석이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
 
 
  한국, 對中 인식 악화
 
  중국이 제2의 경제 전성기를 맞이할 때 한중 관계도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듯했다. 중국 경제가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 한국도 낙수 효과를 봤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03년에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국, 2004년에는 한국의 최대 무역국이 되었다. 세계 금융위기 때도 중국이 4조 위안(약 775조원)에 달하는 경기부양 대책으로 대응하면서 큰 타격 없이 지나갔다. 이 자금 대부분이 고용창출과 경기 진작에 유용하다고 판단되었던 SCO(사회간접자본)사업에 투입되면서 한국도 중국 시장의 낙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탄탄대로 같아 보였던 한중 관계는 2004년에 외교적 난관에 봉착한다. 중국 당국이 2003년부터 고구려사를 자국사(自國史)에 편입하는,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자행한 것이 시작이었다. 미국 퓨(Pew)리서치센터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2002년에는 한국인의 66%가 중국에 호감을 가졌으나 2007년에는 52%만이 호감을 표시했다.
 
  여기에 2010년 3월에 북한의 도발로 빚어진 천안함 폭침 사건과 11월의 연평도 포격 사건에서 중국이 ‘북한 편애 일변도’를 보여 우리 국민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38%로 급감했다. 특히 안보 영역에서 우리 국민의 대중 인식은 급변하는 양상을 보였다.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2010~2012년까지 국민의 30% 이상이 중국을 위협으로 인식했다. 한반도 유사시에 중국이 북한을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국민도 55% 이상에 달했다. 2011년에는 68%의 국민이 이를 확신한다고 응답했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 공산혁명 2세대 지도자이다. 그의 언행만 보더라도 전통적인 공산주의 지도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우선 그는 출신 성분에서부터 전임자와 달랐다. 장쩌민은 이른바 ‘상해방(上海邦·상하이 출신 지도자 집단)’, 후진타오는 ‘공청단’이라는 엘리트 집단 출신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1953년, 공산혁명 1세대의 주역 중 한 명인 시중쉰(習仲勳)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자당’인 것이다.
 

  따라서 공산혁명과 공산주의를 대하는 그의 마음과 자세는 매우 남다르다. 그의 정치 언행에서도 이런 면모는 자주 드러났다. 가령, 중국의 6·25전쟁 참전(參戰)을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공개적으로 칭한 이는 그밖에 없다. 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 등을 포함해 역대 어느 지도자도 이런 식으로 중국의 참전을 칭송한 적이 없었다.
 
  이렇듯 공산당과 공산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한 시진핑의 정치적 희망은 당연히 중국이 사회주의 현대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 생전에 이의 기반을 닦기 위한 정지작업에 집중하려 한다.
 
  2017년 시진핑 주석은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을 통해 중화민족의 부흥(復興)을 실현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이는 2035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를 이룩한 후, 건국 100주년인 2049년에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이 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편전쟁(1840년) 이후 중화민족이 100년 동안 겪은 수모와 치욕을 극복하고, 나아가 중국공산당의 건국이념과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민족주의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진핑이 집권하고 싶어 하는 시기는 최소한 2035년까지라고 할 수 있다(5년 임기제를 감안하면 현실적으로는 2033년). 이를 위해 그는 2018년에 주석직의 2연임제를 폐기하는 개헌(改憲)까지 불사했다.
 
 
  ‘中國夢’
 
  2012년 11월 당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은 ‘중국의 꿈(中國夢)’ ‘인류운명공동체’ ‘싸워서 반드시 이기는 강군’ 개념을 연신 소개했다. 그러고 이듬해인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으로 선출된 그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을 개진하기 시작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통치 기반을 민주 진영과의 체제경쟁, 전체주의(全體主義)와 권위주의의 복원에서 찾았다. 2013년 1월 신진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위원들과 18차 당대회의 정신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강조한 자본주의가 소멸될 것이라는 확신에 가득 찬 발언은 무엇보다 분명한 증거였다. 2017년의 19차 당대회에서는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겠다는 결의까지 발표했다.
 
  중국을 강대국으로 키우기 위한 그의 정책 행보는 2015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세계 제조업계의 석권을 목표로 하는 ‘중국제조 2025’에 이어, 2020년에는 ‘중국표준 2035’를 발표하면서 2035년까지 중국이 세계 기술 기준과 표준을 설정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그의 역사적 사명감은 전임자들보다 투철하다. 가령, 그는 공산당이 세운 중국을 바탕으로 사회주의체제를 완성하고 이의 우월성을 세계에 입증했을 때 비로소 건국의 이념과 목표가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그의 확신은 2020년 9월 8일 ‘제로 코로나’에 기여한 이들을 표창하는 자리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중국이 ‘제로 코로나’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로 ‘중국공산당의 지도력과 중국 사회주의 제도의 뚜렷한 우월성(中國共産黨領導和我國社會主義制度的顯著優勢)’과 ‘중국 인민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힘(中國人民和中華民族的偉大力量)’을 꼽았다.
 
  이런 연유에서 시진핑은 대외(對外) 관계에서도 민주자본주의 국가와의 관계를 체제경쟁의 관계로 인식한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 관계가 가치(價値)와 이념의 경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이유인 셈이다. 대내적으로 시진핑이 대승적(大乘的)인 차원에서 장기 집권을 추구하는 배경 역시 마찬가지다.
 
 
  시진핑, 취임 후 북한보다 한국 먼저 방문
 
박근혜 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국가지도자 2세라는 점 때문에 한동안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사진=뉴시스
  시진핑 출범 이후 지금까지, 한중 관계는 대체로 출구 없는 갈등 국면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진핑과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은 같은 해인 2013년에 각각 최고 통치자에 취임했다. 아버지의 후광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인지 두 정상의 출발은 좋았다. 시진핑 주석은 북한을 먼저 방문하지 않고 한국을 먼저 찾았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관례를 깬 사건이었다. 그의 전임자 모두가 최고 통치자에 오른 후 첫 해외 방문지로 북한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화궈펑(華國鋒)·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 모두가 이 같은 전통을 이어갔다. 자오쯔양은 총리로 취임한 후 1980년에 방북(訪北)했고 1987년 총서기가 된 이후에는 1989년에 평양을 다시 찾았다. 1989년에 총서기가 된 장쩌민 또한 1990년에 평양을 방문했다. 그러나 후진타오에서 이 전통은 잠시 중단되었다. 대신 그로부터 중국공산당은 새로운 관행을 만들었다. 당의 총서기 후보로 낙점(落點)되면 첫 외국 행선지로 북한을 찾는 것이다. 후진타오 역시 1992년 총서기 후계자로 발탁된 이듬해에 북한을 찾았다. 시진핑 역시 2008년에 후진타오의 전철을 밟았다.
 
  시진핑이 2014년 한국을 방문하면서 우리 국민의 대중 호감도는 상승했다. 그의 첫 임기 동안 한중 관계는 절정에 달했다.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의 전승절(戰勝節)을 기념하는 열병식(閱兵式) 행사에 참석, 천안문광장 망루에서 시진핑과 함께 관람한 것이 징표였다.
 
 
  文 정권의 ‘3不정책’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는 그러나 2016년 사드(THAAD) 배치 문제가 수면으로 올라오면서 급랭해졌다. 시진핑은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입장을 그해 3월부터 개진했다. 워싱턴에서 개최된 핵안보회의 당시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의 면전에서도 이를 피력했다. 그리고 7월 사드 배치가 결정되자 그는 그해 하반기부터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중 관계는 우리 측의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가령, 2017년 10월 문재인(文在寅) 당시 대통령의 방중(訪中)을 성사시키기 위해 양국은 사드 문제와 관련하여 이른바 ‘3불(不·‘▲사드의 추가 배치 ▲미국의 미사일방어시스템 가입 ▲한미일 군사 관계의 발전’을 하지 않는다)’을 도출했다.
 
  하지만 그해 12월에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방중이 성사된 반면, 시진핑의 답방(答訪)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드 문제의 해결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2019년 G-20 오사카 정상회의 중 이뤄진 한중 정상회담에서도 이런 사실이 잘 나타났다.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이 거의 확정된 상황에서 한중 관계가 사드 이전의 상황으로 회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중국이 자신에 대한 포위망으로 정의하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인태전략)’과 ‘3불’에서 금기시하는 한미일 3국 군사 관계를 발전시킬 의향과 의지를 이미 밝혔다. 인도태평양전략의 일환인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에의 참여 역시 5월 16일에 천명했다. 6월 11일에는 아시아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에서 한미일 3국의 군사협력 강화 방안에 합의했다. 여기에는 미사일경보훈련 등 기존 훈련의 강화와 정보 공유, 고위급 정책 협의, 연합훈련 등이 포함된다. 더 나아가 최근 종결된 6월 30일 나토 정상회담 기간 중 개최된 한미일 다자회담에서는 3국 간 군사협력 강화에 한뜻을 모았다.
 
 
  전략적 선택은 외교뿐
 
  한중 관계는 중국공산당의 정치 일정에 맞춰 구성된 지도부의 성격에 따라 부침을 보였다. 이런 일정의 이유로 시진핑 체제가 최소한 5년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역사적 사명감에 대한 결의를 보면 시진핑은 최대 10년 더 집권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정에서 우리의 대중 관계 개선 전략은 출발해야 한다. 강경한 공산주의자인 시진핑이 ‘중화민족의 부흥’을 부르짖고, 민주 진영 국가와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결의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지금, 한중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외교과제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주어진 전략 선택은 하나밖에 없어 보인다. 이는 외교다. 주변국 외교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이용하고 활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절충점을 찾고 대책을 강구해야만 한다. 중국의 아킬레스건을 파악하고, 중국의 두려움을 외교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 해답은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중국의 외교사에는 이런 사례가 즐비하다. 시대적·역사적 상황이 다른 오늘날에 이를 어떻게 접목(接木)시켜 응용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19세기까지 한반도의 명운(命運)이 일중(日中) 관계로 결정되었다면, 20세기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이후로는 미일(美日) 관계가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사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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