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100년 된 동춘서커스 : 월간조선

“내가 처음 봤을 때가 딱 청년 때였는데… 손자랑 이렇게 또 오고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할아버지 서커스가 뭐야?”

“보면 알아. 진짜 재미있어. 네 아빠도 참 좋아했다.”

기자는 지난 6월 28일과 29일 대부도에 있는 동춘서커스 상설공연장을 찾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와 습한 공기, 바닷바람을 뒤로하고 서커스를 보기 위해 줄을 선 관광객들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서커스장에 입장 후 느껴지는 고소하고 달콤한 팝콘 냄새와 시원한 공기, 무대에서부터 보이는 푸르스름한 조명은 동춘서커스를 모르는 세대와 이미 서커스를 향한 향수를 가진 이들 모두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공연에 앞서 들리는 남녀노소의 모든 기대와 목소리는 곧 세대를 넘나드는 ‘낭만적인 화음’으로 변했다.

“배삼룡, 이주일, 서영춘, 다 동춘에 있었다”

동춘서커스의 박세환 단장(왼쪽)과 그의 막내아들인 박재광 이사가 마주보고 있다.

동춘서커스는 꼭 100년 전인 1925년 동춘(東春) 박동수가 목포에서 창단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커스단이다. 지난 1985년 당시 태풍으로 동춘서커스가 막심한 자금난에 시달리자, 현재 동춘서커스를 이끌고 있는 박세환(朴世焕·81) 단장이 그때 돈으로 ‘잠실아파트 3채 가격’에 동춘서커스를 1987년 인수했다.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역사를 이대로 묻히게 둘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박 단장의 눈은 대화 내내 번뜩였다. 80대 고령(高靈)임이 믿기 힘들 만큼 카리스마와 걸걸한 목소리를 내뿜었다.

― 아직 무대에 서도 될 것 같습니다.

“내가 23세 때 서커스를 처음 시작했어요. 노래도 부르고 연극도 하고 코미디 원맨쇼에 주연급 역할도 맡고 MC도 해보고 거의 다 해봤습니다. 자기 자랑 같지만 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엔터테인먼트 유망주였어요. 그 시절에 ‘배삼룡(裵三龍)’ ‘이주일(李朱一)’ ‘서영춘(徐永春)’ 등도 다 동춘(서커스)에 있었다 아닙니까. 저는 정말 60년 서커스 외길을 걸었습니다.”

― 이제는 딱 하나 남은 서커스단 아닙니까.

“그렇죠. 옛날엔 크고 작은 10개 이상의 서커스단이 있었지만 시대를 이기지 못하고 다 사라졌습니다. 동춘(서커스)도 지난 2011년 6월 대부도에 자리를 잡았지만 그전까지는 한 달에 한 번씩 자리를 옮겼습니다. 서커스단을 옮길 때마다 10톤 차량 10대가 필요합니다. 또 땅도 미리 빌려야 할 것 아닙니까. 가건물(假建物) 축조 신고도 하고 공연 신고에… 참 별의별 신고를 다 하고 그렇게 공연을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1970~ 80년대에는 서커스 한 번 하면 가장 신경 쓰이는 게 저잣거리의 불량배입니다. 그렇게 돈을 뜯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근데 우리 서커스 단원들이 근력이 얼마나 강한지 압니까. 그 험한 세상에서도 불량배는 무섭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시대가 변해 요즘 그런 일은 없지만 과거에는 비일비재(非一非再)했죠. 그 세월 다 버텨 보내고 지금은 이렇게 안정적으로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동춘서커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국민들의 사랑과 미디어의 관심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관객들이 가장 무섭습니다.”

박 단장이 앉은 자리 뒤로 그동안 수많은 공연을 펼쳤던 동춘서커스의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 실패한 공연은 없었나요.

“동춘의 자존심이 뭔 줄 알아요? 박동수 단장 때부터 지켜온 게 있습니다. 볼거리 있는 공연, 사기 치지 않는 공연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80년대까지 창경원(昌慶苑) 동물원 다음으로 동물을 우리가 가장 많이 데리고 있었어요. 관객과 단원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는 공연이야말로 진정한 서커스입니다.”

그의 서커스에 실패는 없었다는 자신감으로 들렸다.

“현재 무대에 서는 단원들은 전부 중국인”

동춘서커스의 피에로가 풍선을 나눠주기 전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하고 있다.

형강도(形江濤·36) 동춘서커스 공연기획팀장은 지난 2002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그는 지난 1997년 8세 때 중국 산둥성(山東省)에 있는 서커스 예술학교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는 동춘서커스에 입단해 숱한 기술을 펼친 베테랑 서커스 단원이다. 지난 2013년을 끝으로 은퇴한 그는 서커스 공연 연출의 길을 택했다. 그가 말하는 서커스의 기초는 다름 아닌 ‘근력(筋力)’이다. 실제 중국 서커스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6년 중 앞선 3년은 기초근력 및 기초기술 습득을 연마한다고 한다.

“‘물구나무서기’ ‘다리 찢기’ ‘텀블링(tumbling)’은 쉬워 보이는 기술이지만 근력과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코 시연할 수 없는 기술입니다. 단적인 예로 물구나무서기가 되지 않아 퇴교한 경우도 잦아요. 중국 서커스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연간 60~80명 정도지만 졸업할 즈음에는 평균 25명 안팎만 수료합니다. 제가 서커스 학교를 졸업할 때도 22명에 불과했어요.”

현재 동춘서커스는 중국 산시성(陝西省)에 있는 서커스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지난 2013년부터 12년째 단원들을 꾸준히 받고 있다. 현재 무대에 서는 단원들은 전부 중국인이다. 한국인은 연출분과에만 일부 있을 뿐이다.

― 중국인 단원들로만 서커스단을 구성한 이유가 뭔가요.

“한국은 서커스 아카데미가 없지만 중국은 시(市), 현(縣) 단위로 서커스 학교가 있습니다. 빠르면 5세 늦더라도 8세에는 입학합니다. 또 학교 수만 해도 600여 개가 넘습니다. 전문적으로 서커스 교육을 받는 이들인 만큼 그 수준은 남달라요.”

박세환 단장도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 단원들 일부는 중국 서커스 학교 출신이라고 말했다.

― 한국은 왜 서커스 학교가 없을까요.

“중국은 국가가 서커스를 육성하고 있지요. 각 시마다 우리나라 세종문화예술회관만 한 서커스 상설공연장이 떡 하니 있습니다.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기에 가능한 부분이겠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서커스 하면 이미 구시대적인 예술로 본다 이 말입니다. ‘태양의 서커스’가 한번 내한(來韓)한다고 하면 그렇게 또 좋아하지 않습니까. 근데 나도 그런 거 만들 줄 압니다. 우리 단원들 능력이 결코 태양의 서커스 단원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박 단장은 동춘서커스 단원들을 향한 애착이 무척 강했다. 기자가 그에게 “‘호랑이 단장’ 같다” “엄했을 것 같다”고 하니 그는 “서커스단의 막내에게도 절대 반말을 하지 않고 존댓말을 한다”며 “어린 단원들이 나를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했다. 형강도 공연기획팀장 역시 “(박세환) 단장님을 처음 봤을 때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며 “(박 단장은) 아직도 막내 단원들에게 존댓말을 한다”고 했다.

‘경영자’ 박세환 단장

‘코로나19’는 동춘서커스에 막대한 타격을 줬다. 이때 동춘서커스는 첫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 2003년 태풍 ‘매미’와 2009년 발생한 ‘신종플루’로 입은 피해는 코로나19 앞에서 ‘새발의 피’ 수준이었다. 박 단장은 “코로나19가 이렇게 길 줄 몰랐다. 신종플루는 한 반년 버티니 해결되지 않았느냐. (코로나19도) 비슷할 줄 알았다”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사내유보금을 써 직원들 월급을 지급하고자 노력했지만 5개월이 지나니 약 6억원 손실이 나 단원들에게 월급 삭감을 부탁했다고 한다. 박 단장은 “공연 수도 줄고 관객들도 줄어 동춘서커스의 존폐(存廢)가 걸린 문제였다”고 했다. 대신 “상황이 나아지면 못 받은 월급을 반드시 전부 정산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 경영자로서 고민이 컸겠습니다.

“2020년도 월급의 60%, 2022년 월급의 70%, 80% 이렇게 순차적으로 다시 정상화하고자 노력했죠. 코로나19 사회적 거리 두기 제한이 지난 2022년 4월에야 풀렸죠. 그때부터 회복세였습니다. 2023년이 되고 다시 월급 100%를 지급했습니다. 2024년에는 (월급의) 120%를 지급했고요. 보너스 급여도 지급했습니다. 어떻게든 단원들에게 보상해 주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당시 주지 못한 급여를 전부 다 지급했습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박 단장은 서커스 단장이 아닌 경영자로서의 철학을 강조했다.

“내가 노동부가 주관하는 사회적 기업 강의 강사로 많이 참여했습니다. 강의를 할 때 ‘동춘은 세 마리 토끼를 잡은 기업’이라 항상 강조합니다. 첫 번째는 전통을 지켰고, 두 번째는 일자리를 창출했고, 마지막은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말 그대로 우리 동춘은 ‘사회적 기업’입니다. 또 동춘서커스가 지금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제 방문해도 지불한 것 이상의 가치상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자신이 있어요. 공연 내용이 좋은데 손님이 없는 건 괜찮습니다. 손님들은 금방 돌아옵니다. 하지만 공연 내용도 안 좋고 허위로 홍보하면 그건 정말 위기라는 소리입니다. 말 그대로 망하는 겁니다.”

― 단장님 후계자는 있습니까.

“저기 서 있는 아들이 내 후계자입니다. 동춘서커스 일을 돕고 있습니다.”

후계자의 ‘고민’

박재광(朴在光·31) 동춘서커스 진흥원 이사는 박세환 단장의 2남 2녀 중 막내아들이다.

현재 그는 서커스 공연의 기획부터 연출, 홍보 등 박 단장의 노하우를 전수받고 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개인사업을했는데 박 단장의 건강 악화 등 현실적인 문제가 닥치자 스스로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뜻을 전했다고 한다. 박 단장이 동의해 동춘서커스에서 근무한 지 올해로 4년째가 됐다. 현재 이들은 아버지가 배우와 사회자로 서커스 무대에 처음 올랐던 것과 같이 서커스 공연 사회를 3년째 맡고 있다. 또 경영자로서의 역량, 공연 내용에 대한 연출 역량을 키우고자 공부 중이다. 박 이사는 곡예에 도전하고자 한 번은 물구나무서기를 시도하다 골절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서커스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것을 그때 실감했다”고 했다.

― 어깨가 많이 무겁겠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떤 서커스를 만들지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서커스는 ‘행위예술’입니다. 같은 영화를 봐도 평가가 갈리는 것처럼 서커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서커스 공연은 약 90분 정도 진행합니다. 동춘서커스의 경우 각 곡예를 약 5분 단위로 연출하는데 이는 테마가 금방 바뀌는 셈이죠. 관객들에게 최대한 많은 기술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요즘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요.

“관객들의 수준과 요구하는 바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단순 서커스 기술로 승부를 보는 건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평균적으로 1개의 서커스 기술을 온전히 선보이기 위해서는 4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죠. 또 서커스 단원들이 모두 같은 곡예를 하는 건 아닙니다. 기본적인 기술은 선보이더라도 개개인마다 특기와 장점을 살리는 쪽으로 서커스 기술을 연마합니다. 예전처럼 인간의 신체를 극한으로 몰아넣는 곡예는 선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서커스도 이제는 하나의 ‘스토리텔링’에 가깝습니다.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박 이사는 동춘서커스 단원들이 중국인이라는 점을 고려해 중국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의 전공도 중국어다. 그는 서커스 단원들의 능력과 개인의 역량을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수준 높은 공연 제작의 시작이자 경영자로서의 기본자세’임을 기자에게 강조했다.

기자는 두 부자(父子)와 점심 식사도 함께 했는데 박 이사는 박세환 단장에게 ‘아버지’라 부르는 대신 ‘단장님’ 혹은 ‘대표님’이라는 호칭만을 썼다. 그는 “단장님의 동춘서커스를 잇겠다고 한 만큼 본인이 더욱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기자가 “박재광 단장의 동춘서커스를 곧 기대해도 되겠냐”고 묻자 그는 그제야 “아버지께 인정받는 것이 우선”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해야”

동춘서커스 단원이 ‘우산곡예’를 선보이고 있다.

기자는 이날 처음으로 동춘서커스를 봤다.

맨 앞줄에서 관람했는데 한순간도 서커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긴 막대기 한 쌍을 다수의 서커스 단원이 오르내리며 곡예를 펼치기도 했고 서커스 막내 단원이 외줄을 타거나 또 외줄 위에서 외발자전거로 자유로이 오가는 모습은 시끄러운 관객 모두를 숨죽이게 했다. 피에로(pierrot·광대)가 나와 풍선을 주러 돌아다녔을 때는 조용하던 아이들 모두가 적극적으로 손을 번쩍 들기도 했다. 또 추억의 ‘우산곡예’와 ‘공중곡예’를 서커스 단원들이 선보이자 노년층 관람객들은 감탄하며 “참 대단하다. 어떻게 저리 잘할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연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생사(生死)륜’ 곡예였다. 2개의 큰 원통형이 빙글빙글 도는 가운데 두 명의 서커스 단원이 서로 번갈아 기술을 펼치는 것이다. 그렇게 15개가량의 곡예가 쉴 틈 없이 쏟아진 후 극장 문을 나서는 가족 관객들 중 다수는 “아이보다 내가 더 신났던 것 같다. 또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형강도 공연 기획팀장은 “관객들은 잘 모르겠지만 곡예의 종류와 수도 철저하게 기획·연출되고 있다”고 했다.

“동춘서커스는 늘 같은 공연을 선보이지 않습니다. 3개월 단위로 준비하는 곡예가 달라요. 단원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서커스 기술과 스타일이 다 다르기 때문이죠. 또 관객 중 일부는 다회차 관람객도 있습니다. 늘 똑같은 공연을 보고 싶어 오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저희 기획팀 쪽에서도 항상 새로운 서커스 공연을 연구하고 개발하고 있습니다.”

K-POP을 공연의 BGM(배경음악)으로

형강도 동춘서커스 공연기획팀장(오른쪽)과 그의 아내인 류효설 서커스 단원. 중국의 서커스 학교에서 처음 만난 둘은 한국에서 두 딸을 낳고 가정을 꾸렸다.

형 공연기획팀장에 따르면 공연 때 선보이는 기술도 ‘기준’이 있다. 바로 남녀노소 모두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동을 위해 공연의 일부는 피에로 공연이나 마술로 편성하기도 하지만 젊은 세대의 경우 트렌드에 민감하기 때문에 유행하는 최신 K-POP을 공연의 BGM(배경음악)으로 넣기도 한다. 또 노년층 관람객을 위해 ‘항아리 돌리기’ ‘접시 돌리기’ 등 추억의 곡예도 함께 선보이는 식이다. 실제 동춘서커스가 순회공연을 하거나 특정 연령대가 뚜렷한 특별공연을 기획하는 경우에는 공연의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다. 단원들 역시 단순 똑같은 공연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매 공연에 ‘적응’하는 셈이다.

― 단원들의 체력 소모가 심할 것 같습니다.

“어우 많이 심하죠. 스케줄로 체력관리를 해주고자 노력합니다. 단원 관리 차원에서 공연에서 선보이는 기술을 살짝 바꾸기도 합니다. 고난도 기술과 일반 기술의 배분이 정말 중요하죠. 또 서커스 단원들의 전성기는 15세에서 25세 사이입니다. 대부분 유연성이 점점 떨어지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부상의 위험도 점점 커집니다. 서커스 단원의 연기 생명은 꾸준히 자기 관리를 하는 것 말고는 비법이 없습니다.”

무대 욕심에는 ‘연차’가 없다

송장로 단원(오른쪽 위)이 생사륜 묘기에서 저글링을 선보이고 있다. 송 단원은 지유청 단원과 생사륜 곡예에서 호흡이 좋다.

류효설(劉曉雪·35) 씨는 6세부터 서커스를 시작한 30년 베테랑 단원이다. “어린 시절 TV로 서커스를 처음 접한 후 서커스의 매력에 빠져 서커스 학교에 입학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2000년 동춘서커스에 들어와 공연 단원으로 일하다 서커스 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형강도 팀장과 결혼 후 한국에서 두 딸을 낳고 가정을 꾸렸다. 그는 최고 전성기 시절 때는 8개의 기술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2개 정도를 구사한다고 했다. 기자가 공연을 관람했을 당시 류 단원의 변검(變臉)술이 가장 인상 깊었다. 가면이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의상도 달라졌다. 기자가 다소 전성기가 지난 시점임에도 꾸준히 서커스를 선보일 수 있는 비법을 묻자 “매일 연습하는 것 말고는 롱 런(long-run)의 비법이 없다”며 미소를 지었다. 류 단원은 “언제까지 설 수 있을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무대에 서고 싶다”고 했다.

― 남편분처럼 서커스 연출로 새로운 길을 걸어도 되지 않습니까.

“지금은 후배들이 서커스의 주연을 맡고 있습니다. 뿌듯한 일이에요. 만약 제가 공연을 할 수 없는 날이 온다면 후배 양성에 노력하고 싶습니다. 제 남편이 서커스 연출로 역할을 바꾼 것과 같이 저 역시 기술 코치로 전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드러나지 않지만 서커스 단원들의 부상은 ‘숙명’과도 같다.

‘생사륜’ 기술을 선보인 송장로(宋長路·35) 단원은 “생과 사 기술 연습을 하다 안전장치가 없는 곳으로 떨어진 적도 있다. 타박상을 입었는데 골절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송 단원은 13세 즈음 서커스를 시작했다. 기자가 다소 늦은 시작에 의아해하자 “서커스 보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진로를 고민하다 ‘마지막 꼬리’에 겨우 들어갔다”고 했다. 기자가 그의 생사륜 기술을 치켜세우자 멋쩍은 듯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할 수 있는 한 무대에 꾸준히 서고 싶다”고 했다.

지유청(嬉魚靑·21) 씨는 지금 전성기에 접어든 젊은 서커스 단원이다. 나이만 봤을 때는 막내 단원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그는 동춘서커스에서 어엿한 중견급 서커스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묘기는 ‘링 통과하기’ ‘봉 기술’ ‘집단체조’ ‘저글링’이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한국 생활을 이어가는 그는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해 걱정이 없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 삼겹살”이라고 했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해 보였지만 “공연을 앞두고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연습하고 오후에도 1시간 반 정도 연습한다”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프로정신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서커스 아카데미, 서커스 박물관 짓기 원해

외발자전거 곡예는 남녀노소가 모두 좋아하는 묘기 중 하나다.

박세환 단장의 마지막 목표는 서커스 아카데미와 박물관 건립이다.

순수 국산 서커스를 선보이는 것이 그의 꿈이다. 박 단장은 서커스 아카데미를 짓기 위한 부지도 이미 마련해 놨다. 동춘서커스 상설공연장에서 2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박 단장은 “스포츠 종목의 경우 7~8세부터 시작하지 않느냐”며 “서커스도 마찬가지다. 국산 서커스인 양성을 위한 전문교육기관 설립이 간절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서울시에 “1년에 5억원만 지원해 준다면 전문 서커스인 20명을 양성해 3년 뒤 서울시립서커스단을 만들어주겠다”는 제안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풍물놀이, 국악, 민속예술 등 전 세계인들이 인정하는 예술단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하며 “3년만 지원해 주면 그 비용도 다 갚겠다”고 했지만 끝내 지원받지 못했다.

박 단장은 “아무리 서커스가 사양산업이라 해도 북한과 중국에도 있는 게 서커스 극장이고 서커스 학교”라며 “영화와 연극, 드라마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이제 서커스를 만드는 곳은 대한민국에 딱 하나다. 사실상 국가대표라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정말 우리가 마지막이라면 대한민국 예술 장르의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라 걱정이 크다”는 말도 덧붙였다.

박 단장은 서커스 박물관 건립도 원하고 있다. “지난 1925년부터 이어져온 동춘서커스의 역사를 전시하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동춘서커스와 함께한 코끼리가 있었는데 죽은 후 차마 묻을 수 없어 박제(剝製)해 놨다. 훗날 박물관이 지어진다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동춘서커스 100주년을 맞아 동춘서커스 구성원들은 “100년이 넘었으니 더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더 양질의 공연을 선보이겠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박재광 동춘서커스 진흥원 이사는 “물론 동춘서커스의 이름을 전혀 모르는 젊은이들도 많아졌지만 서커스의 뜻을 모르는 이들은 없다”며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대표 서커스단으로 더욱 각인될 수 있도록 새로운 무대, 새로운 공연을 선보여 아시아 서커스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