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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60년 전문 의약품 생산 외길 이종호 JW중외제약 명예회장

“이윤이 남지 않더라도 내 나라 국민을 치료하는 약은 내가 만든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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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약업을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돈부터 벌겠다는 생각에 이 바닥으로 들어오는 것은 안 돼요. 생명이 먼저냐, 돈이 먼저냐를 늘 따지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돈을 선택합니까. 꺼져가는 생명 앞에 서면 내가 물러서야 한다고. 그게 다른 산업과 달라요”

⊙ 국내 수액 시장 40% 점유, 누적 생산 30억 개 돌파
⊙ 매출의 일부분을 R&D 비용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R&D 비용 때문에 매출 일으키는 회사
⊙ “R&D에 투자 안 하면 약 장사야. 연구 개발 안 하는 곳이 무슨 제약 회사예요”

李宗鎬
1932년생. 서울고, 동국대 법대 졸업 / JW중외제약 회장, 한국신약개발연구조합 초대 이사장, 한국제약협회장, C&C신약연구소 공동대표 역임. 現 JW홀딩스 명예회장, 중외학술복지재단 이사장 / 모범납세 대통령상, 새마을 훈장 협동장, 국민훈장 목련장, 국민훈장 모란장, 경제정의 기업상 수훈
  JW중외제약이라는 이름이 낯설지라도 대다수의 국민은 이 회사 덕을 봤다. 우리나라 국민뿐 아니라 유럽의 환자들도 이 회사 덕에 병상에서 훌훌 털고 일어났다. 회사 이름보다 만드는 제품으로 존재감이 있는 회사, JW중외제약이다.
 
  ‘링거’로 잘 알려진 ‘수액’은 환자를 살리는 생명수와 같은 필수 의약품이다. 기초 수액제 시장의 40%를 점유하는 JW중외제약은 지난해 3월에 수액 누적 생산 30억 개를 돌파했다. 수액 시장의 절대 강자로 JW중외제약이 각인되기까지는 이종호 JW명예회장의 공이 크다.
 
  2015년 현업에서 물러난 이종호 명예회장은 얼마 전, 아시아 제약회사로는 최초로 유럽에 종합영양 수액을 수출하는 등 제약 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약업(藥業) 대상을 받았다. 1966년에 선친(先親)인 성천 이기석 선생이 만든 JW중외제약에 입사한 이종호 명예회장은 60년 가까운 세월을 제약업에 바쳤다.
 
 
  “좋았던 추억은 사라졌지만, 가슴 아픈 기억은 오래 남아”
 
1945년 조선중외제약소라는 이름으로 창업했을 당시의 회사 로고(왼쪽)와 회사 전경.
  ― 한 업종에 60년 가까이 몸담는다는 것이 상상이 안 갑니다.
 
  “60년이라는 시간은 참 긴 세월이 맞는데 그냥 지났네요. 초창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빌린 사채 빚이 매우 많았거든. 죽을 때까지 못 갚을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빚도 없어지고 세월도 흘렀지요.”
 
  ― 하루하루 살다 보니 그리됐다는 얘기로 들립니다.
 
  “그런 것 같아. 시간이 그렇게 지났지요.”
 

  ― 지난 60년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요.
 
  “좋았던 추억은 금세 사라지는데 가슴 아팠던 기억은 오랫동안 남아요. 요즘은 회사 영업부에 있던 엄 모라는 직원이 생각납니다. 50년은 된 일인데 착실했던 친구가 결근해서 직원들이 찾아가 보니 단칸방 문이 닫혀 있는 거라. 내가 직접 찾아가서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연탄불 켜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삿돈에 손을 댔는데 견디지를 못했다네요. 장례를 치르는데 외딴 시골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한다는 아버지가 찾아왔습디다. 제 손을 잡고 ‘회사에 폐를 끼쳐 죄송하다’며 시골집을 판 전 재산이라며 돈뭉치를 내밀어요. 자식을 먼저 보낸 양반이 그 와중에 그러더라고. 그걸 내가 어떻게 받나요. 한사코 사양하는데 그 양반이 ‘내 교육 철학이 정직인데 자식 놈이 정직하지 못했다’며 돈뭉치를 주는 겁니다. 서울역까지 따라가서 그 양반이 탄 기차가 출발할 때 던지다시피 하고 왔지요. 참 대단한 양반이었지, 그 영업부 직원도 참 착실한 친구였는데 순간적으로 잘못 판단했던 것 같아요. 그런 기억이 많이 남아요.”
 
  60년이란 세월을 회고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물으면 회사 매출이 최고치를 찍었을 때, 제품을 출시하느라 겪은 일화를 꺼낼 줄 알았다. 하지만 아흔을 넘긴 회장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가장 기억난다”며 인터뷰 내내 사람에 얽힌 얘기를 많이 들려줬다.
 
 
  팔수록 손해 보는 수액 포기하려다, 병원 불빛 보면 마음 바뀌어
 
1960년대 수액제 이물질 검사 공정을 하는 직원들 모습.
  물은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신체 구성요소로 수분이 1~2%만 부족해도 갈증을 느낀다. 제때 수분을 보충하지 않으면 장기가 손상되고 질병, 노화, 사망의 원인이 된다. 수액은 환자의 혈관을 통해 수분, 전해질, 영양분을 직접 공급해 체액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교정해준다. 또 항생제, 항암제 등 고농도의 각종 주사제를 희석해 체내에 나르는 역할을 한다. 수액(輸液)의 ‘수’자가 ‘물 수(水)’가 아닌 ‘나를 수(輸)’인 이유다.
 
  JW중외제약의 매출에서 수액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30% 가까이 된다. JW중외제약은 2021년 매출 6066억원, 영업이익 334억원을 기록했다. 기초수액제의 매출이 791억원, 영양수액제 1027억원이었다. JW중외제약의 국내 수액 부문 시장 점유율은 기초수액이 40%, 영양수액이 43%를 차지한다. 병원 입원환자 10명 중 4~5명은 이 회사 수액을 맞는 셈이다. JW그룹 내 수액 개발, 생산은 JW생명과학이, 수출은 JW홀딩스, 국내 영업 마케팅은 JW중외제약이 담당한다.
 
  ― JW중외제약은 누가 뭐래도 ‘링거 회사’죠?
 
  “그럼, 1970년대에 한 병 납품할 때마다 1000원 정도 받았어요. 원가(原價)가 안 나오는 거야. 팔수록 병당 200원씩 손해였습니다. 아버님이 시작했지만 이걸 계속 생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기자 같으면 해야 해, 말아야 해요?”
 
  ― 팔수록 손해 나는 장사를 하기는 좀 그렇죠.
 
  “그런 건가? 제품은 납품하는데 갈수록 손해가 나고 답답할 때 남산에 올라갔어. 그때 서울 시내에 전기 공급이 잘 안 돼서 밤에 캄캄했어요.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서울대 연건병원이랑 고려병원(오늘의 강북삼성병원) 불빛이 반짝반짝거려요. 지금 이 순간에 저기서 꺼져가는 생명이 있는데 싶은 마음이 들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겁니다. ‘그래, 돈이 안 돼서 그만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자’고 마음을 다잡고 내려왔어요. 그 마음에 오늘날이 된 거야.”
 
 
  성천 이기석 선생, 1945년에 JW중외제약 창업
 
JW중외제약을 창업한 성천 이기석 선생.
  JW중외제약은 1945년 성천 고(故) 이기석 선생이 조선중외제약소라는 이름으로 창업했다. 1910년에 태어난 이기석 선생은 일찍이 한학자인 부친의 영향으로 생명과 인화를 중시했다. 인류애가 컸던 이기석 선생은 “생명을 다루는 제약기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회사를 만들었다. 이 선생이 수액제 생산에 뛰어든 것은 의사 친구 때문이었다. 6·25전쟁 중에는 미군들이 지원해준 수액으로 수술이 가능했는데 미국의 지원이 끊기자, 수술에 어려움이 많았다. 의사 지인들이 그에게 ‘제약회사 한다면서 수액은 못 만드느냐’는 얘기에 수액 생산에 눈을 돌렸다. 당시 우리나라는 환자 치료에 필요한 수액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종호 회장의 얘기다.
 
  “예전에 수술할 때 물을 못 마시니까 거즈 수건을 적셔서 입에 물고 했어요. 환자들이 필사적으로 거즈 수건을 빠는 거라. 거즈 수건에 묻힌 물이야 금세 말라 없어질 텐데 환자들이 괴로우니까 필사적으로 그러는 거지요. 환자 보호자들이 겨우 수액을 암시장에서 사서 의사들에게 건네도 놓는 방법을 모르니까 그냥 근육에 놨습니다. 근육이 시퍼렇게 부어오르면 그 옆을 마사지하면서 버틴 거지요.”
 
  ― 수액제가 귀했군요.
 
  “그럼, 암시장에 나왔다는 얘기가 나오면 서로 쟁탈전이 벌어지는 거예요. 6·25전쟁이 나서 미군이 수술할 때 수액을 혈관에 놓는 것도 처음 봤지요. 아버님이 필사적으로 수액을 만든 이유였어요.”
 
JW중외제약은 1959년 국산 수액 생산에 성공한다. 당시 출시된 중외제약의 5% 포도당수액제 모습.
  이기석 선생은 1959년에 수출에 의존했던 수액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개발을 하기까지, 그 이후에도 우여곡절은 끝나지 않았다. 이종호 명예회장이 회사에 합류하기 전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신약 개발 수준 아니었겠어요? 우리 기술로 혈관에 곧장 꽂는 약을 만들어야 하는데 멸균이 문제였지요. 처음에는 가마솥에 끓였대요. 100도가 넘어야 멸균되는데 가마솥으로 끓인다고 그게 되나. 멸균이 안 되면 그게 맹물이지 뭐예요. 멸균 통을 고온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술을 개발하느라 힘들었지요. 병원에 납품했는데 우리 제품 때문에 죽었다는 사람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 멸균 말고 다른 문제가 있었나요.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의료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어요. 간호사 자격증 가진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다른 일 하다가 환자가 들어오면 손 소독도 안 하고 링거를 혈관에 주사하는 사람이 많았죠. 수액을 혈관까지 연결하는 줄도 그냥 수돗물에 담갔다가 말려서 썼으니 어땠겠어요. 혈관에 꽂는 바늘을 현미경으로 보니까 톱니처럼 울퉁불퉁 엉망이더라고요. 그런 환경에서 약을 놓으면 부작용이 안 날 수가 있나요. 우리 회사 제품 때문에 환자가 죽었다면서 회사로 상여 메고 온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이종호 회장은 “수액에 얽힌 사연을 소설로 쓰면 몇 권은 나올 것”이라고 했다. 수액이 문제인지, 수액을 혈관으로 옮기는 수액 줄이 문제인지, 간호사의 위생 관념이 문제인지 규명하기도 어려운 때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중외제약으로 찾아왔다. 이기석 선생은 환자 가족들로부터 온갖 모진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버지 사업 이어받기 싫었다”
 
  이종호 JW중외제약 명예회장이 1966년이 되어서야 회사에 합류한 것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라서였다. 남들은 사업하는 집안이라면 깨나 넉넉하게 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기석 선생은 집에 생활비를 제대로 갖다 주지 못했고 만날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다. 이 회장의 얘기다.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 아버지가 하는 일이 사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밤에 전화벨이 울리면 십중팔구는 ‘어느 병원에서 환자가 죽었다. 초상 값 내놔라’는 거였으니까요. 아버지가 ‘야, 나는 언제 다리 한 번 뻗고 잠 좀 자보느냐’ 했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아직도 그 말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요.”
 
  이 회장이 회사에 합류한 이후에도 수액의 안전성과 관련된 모함은 계속됐다. 직원들과 속초 설악산으로 연수를 갔을 때 한 직원이 ‘TV에 우리 회사를 고발하는 보도가 나올 것’이라며 뛰어왔다. 누군가 중외제약의 수액 안에 모기가 들어간 사진을 방송국에 제보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모기가 진공 상태인 링거병 안에서 살아 있는 거 연구하면 노벨상 받겠다. 우리는 당당하니 방송 지켜보자”며 직원을 달랬단다. 그 고발은 방송되지 않았다.
 
 
  부도 위기의 선친 회사 구하려 증권사 때려치우고 회사에 합류
 
  이종호 회장이 JW중외제약에 합류하기 전에 그는 잘나가는 증권사 직원이었다. 대학 졸업 후 삼락증권에 입사한 그는 20대에 이사를 달았다. 1964년 당시에 신형 포드 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종업원 50여 명을 거느렸다. 트럭으로 출퇴근하는 이기석 선생의 눈에 띌까 봐 차는 집 앞에 대지도 못했다. 수천억원대의 증권사 자금을 굴리는 덕에 그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하는 나이 지긋한 은행 간부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게 일과가 될 정도였다. 이기석 선생의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이 회장에게 돈을 빌리러 온 경리부장 때문에 알게 됐다.
 
  “증권사에서 돈 수천억원을 굴리던 때라 몇백억원은 우습게 생각을 했어요. 아버님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을 거란 생각은 했었지만 직접 재무제표를 보니까 내일 부도가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더군요. 지급이자비율이 25%가 넘었어요. 안 망하는 게 이상한 지경이었죠.”
 
  ― 그래서 합류를 했군요.
 
  “아버지 지인 중에 지방에서 동인당 약국을 하던 분이 찾아왔어요. 그 양반을 아버님이 참 좋아하셨거든. 나한테 ‘내가 자네한테 조언하는데 빨리 도망가. 네 아버지는 빚쟁이가 됐는데 이걸 다 갚는 건 불가능해. 너라도 살아야지, 아버지 돕는다고 들어오면 너도 영원히 빚쟁이가 돼’라고 하더군요.”
 
  ― 지인이 그런 얘기를 할 정도면….
 
  “시장에는 이미 중외제약 부도설이 파다했어요. 그때 겁도 없이 내가 ‘이게 어디 아버지 한 사람의 문제겠습니까. 집안 전체의 문제죠’라고 말하고 아버지 사업에 뛰어든 거예요. 일 때문에 골프장에 나가면 주위에서 ‘공 치러 나온 걸 보니 오늘은 부도가 안 나나 보다’고 쑥덕거렸어요. 내 속이 어땠겠어. 겉으로 멀쩡한 척하면서 공을 쳤는데 뭐를 친 것인지 기억도 없지 뭐. 제게 도망을 권유했던 양반이 나중에 ‘중외제약 부도 안 난 건 불가사의’라고 종종 말씀하셨어요.”
 
 
  부도 한 시간 앞두고 한일은행에서 자금 융통해 기사회생
 
  이종호 명예회장은 인터뷰 초기에 ‘내 인생은 사채와의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 빌릴 수 있는 돈 다 끌어 쓰고 지인들에게 돈을 꿔서 개인 사채로 7, 8년을 버텼기 때문이다. 더는 버틸 여력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한일은행 김정호 행장을 찾아갔다. 김정호 행장은 김정렴 전(前)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의 친형이자,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장인이다. 김 행장은 서울 중부지점 지점장으로 있을 때부터 이기석 선생과 거래를 해왔다. 김 행장을 찾아간 날 오후 5시까지 어음을 막지 못하면 회사는 부도였다. 오후 4시가 넘어 돌아온 김 행장에게 사정 설명을 했다.
 
  “이봐, 여기 회사에 돈 줘.”
 
  김정호 행장이 동석하고 있던 전무에게 말했다. 전무는 “못 줍니다. 담보도 없습니다”고 했다. 김 행장이 다시 얘기했다.
 
  “내가 책임질게. 돈 줘. 저 집안이 부도를 낼 집안이 아니야. 아버지도 알고 외가도 아는데 안 그래. 내가 책임진다잖아, 그냥 줘.”
 
  전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로 치면 100억원에 가까운 돈을 한일은행에서 대출받았다.
 
  이종호 명예회장의 얘기다.
 
  “이 회사는 김 행장이 살려준 회사예요. 참 옛날 스타일이지요. 그렇지만 은행의 역할 중에는 리스크를 안고서라도 기업을 키워주는 기능도 있다고 봐요. 회사 창립 50주년 때 김 행장 내외분을 신라호텔에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고 큰절을 했습니다. 살려주셔서 오늘날이 있다고. 그냥 허허 웃으시더라고.”
 
 
  “병든 사람 고치는 약 만들라 했지, 쥐 잡는 약 만들라 했나”(이기석 선생)
 
이종호 명예회장은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199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
  급한 고비는 넘었지만, 회사를 정상화시키는 과정은 멀고 멀었다. 중외제약의 위기는 10년 동안 지속했다. 해외에서 약을 수입해서 팔거나, 드링크제처럼 이윤이 남는 제품을 만들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몇 번 시도했지만, 이기석 선생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남들이 돈이 안 돼서 안 만들겠다는 약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종호 명예회장이 말했다.
 
  “아버지는 사업가는 아니셨던 것 같아.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이 워낙 강했으니까. 그게 중외 정신이기도 하고.”
 
  하긴 1970년대 초에 중외제약이 쥐약을 생산하다 중단한 얘기는 오늘날도 널리 회자한다. 1970년대 초에는 전국에 쥐가 들끓어 정부에서 구서(驅鼠)운동본부라는 것을 설치해 운영했다. ‘쥐 잡기’가 국책 사업 1호였고, 제약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쥐약을 만들어 팔았다. 그런데 쥐약에는 2차 독성이 있었고, 쥐약을 먹고 개나 고양이, 가축이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때 JW중외제약이 만든 ‘고양이표 후라 킬’은 2차 독성이 없는 쥐약이라 불티나듯 팔렸다. 회사의 수익에 당연히 도움이 됐을 터. 하지만 어느 날 이기석 사장이 이종호 회장을 불렀다.
 
  “내가 잠이 안 온다. 병든 사람 고치는 약 만들라 했지, 쥐 잡는 약 만들라 했나.”
 
  그날로 채산성이 높았던 쥐약 생산은 중단됐다.
 
  이종호 명예회장의 얘기다.
 
  “부도 위기는 넘겼지만, 하루하루 근근이 연명하다가 밤에 집에 들어가 자는 애들을 보면 정신이 번쩍 났지요. 회사가 부도나면 애들은 다 길바닥에 나앉아야 했으니까. 은행 돈 외에도 지인들 돈을 전부 끌어다 썼는데, 우리 애들을 봐줄 사람이 누가 남아 있겠어요. 그래서 더 이를 악물었지.”
 
  ― 소설 같은 얘기네요.
 
  “어디 저 같은 사람이 하나둘이겠어요. 나만의 일은 아니었지요. 아까 물어봤잖아요, 60년이 어땠느냐고. 그래서 내가 뭐라 답을 못 했던 거예요. 이런 날이 훨씬 많았으니까.”
 
  ― 쥐약은 좀 아까운데요. 2차 독성이 없어 고양이도 안 죽었다면서요.
 
  “그렇지. 그런데 그 약 안 만들어도 이렇게 살아 있잖아(웃음). 아버지가 수액 납품 설명하려고 의사 만나러 병원에 가요. 아버지 차례가 됐는데 환자가 찾아오면, 아버지는 먼저 들어가시라고 하고 또 하염없이 기다리는 거예요. 오전에 의사 만나신다는 양반이 늦저녁이 다 돼 간신히 5분가량 만나고 오셨지요. ‘나는 장사하러 왔으니 얼마든 기다려도 되지만, 환자에게 5분은 너무 힘든 시간’이라며 양보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남들이 안 하는 거 하겠다며 버티셨던 거죠. 그게 중외 정신이야.”
 
 
  경영 참여 4년 만에 국내 최초의 항생제 개발
 
JW중외제약이 1969년에 출시한 ‘리지노마이신’은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한 합성 항생제다.
  아흔이 넘었고, 현장을 진두지휘한 세월이 50년이 넘으면 당신 얘기만 해도 인터뷰 시간이 모자랄 터다. 하지만 이종호 명예회장은 이기석 선생 얘기로 상당한 시간을 보냈고 눈가가 촉촉해진 것도 그때였다. 이 회장이 선친에 대해 얼마나 애틋해하는지, 부자(父子)지간이 얼마나 돈독했는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JW중외제약을 오늘의 반듯한 회사로 만든 것은 이 회장의 공이다.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며 2006년에 충남 당진에 국내 최대 링거액 공장을 설립하고, R&D 개발에 치중해 회사를 의약품 전문 기업으로 만든 것은 그다. 회사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지 4년 만에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합성 항생제 ‘리지노마이신’ 개발에 성공했다.
 
  리지노마이신은 국내에서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경영위기로 어렵던 회사의 기틀을 다지고 국내 제약 산업을 한 단계 진보시키는 역할을 했다. 리지노마이신은 1973년 12월 영국 약전(B.P)에 수록돼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1969년 5월 19일 발명의 날에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항생제 합성 분야에서 큰 성공을 이룬 이 명예회장은 1974년, 당시 페니실린 항생제 분야 최신 유도체로 평가받던 피밤피실린의 합성에 성공, ‘피바록신’을 개발하며 기술력을 입증했다.
 
  1970년대 초반에는 기초원료 합성과 생산을 위한 연구에 집중해 국내 최초로 소화성궤양 치료제 ‘아루사루민’, 진통·해열제 ‘맥시펜’, 빈혈치료제 ‘훼럼’, 종합비타민 ‘원어데이’ 등 신제품을 선보이며 포트폴리오를 확장했다.
 
  이런 공로로 1993년 2월 한국제약협회장에 취임했으며, ‘기업 윤리관 확립’ ‘환경변화 대응능력 배양’ ‘협회의 조직기능 효율화와 위상제고’ 등 3대 목표를 제시했다. 회사의 아이덴티티인 수액 분야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1997년 국내 최초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지 않는 ‘Non-PVC’ 수액백 개발에 성공, 친환경 수액백 시대를 열었다.
 
 
  2006년 당진에 국내 최대 링거 공장 설립
 
  그리고 오늘날 전국 병원에 수액을 납품하는 JW중외제약의 충남 당진 공장을 1600억원을 투자해 지었다. 수액은 수술할 때, 환자 회복에 없어서는 안 되지만 부피 때문에 충분한 재고를 갖추기 어려웠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 회장이 연간 1억4000만 개의 수액제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손수 만든 것이다.
 
  “한국에서 돈 벌 생각이라면 연구 개발보다 부동산에 투자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내가 충남 당진에 링거 생산 공장 짓는다고 5만 평을 사니까 친구들이 혀를 끌끌 차더라고요. 1600억원 들여서 한 개에 1000원 정도 하는 수액 공장 짓는다니까 ‘우리 시대의 마지막 바보’라고 하대요(웃음).”
 

  ― 왜 그런 결정을 하셨나요.
 
  “수액은 부피가 커서 병원에 쌓아둘 수가 없어요. 그럴 공간이 있으면 거기에 병상을 더 만들어야 환자에게도 도움이 되고 병원 이윤도 나아지죠. 수술할 때 꼭 필요하다는 필수품인데 우리라도 넉넉한 공간에 저장할 수 있어야지 싶었지요. 요즘도 수액은 매일 오전에 필요 물량 정도를 병원에 갖다 줘요. 일본에 수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있었고요.”
 
 
  2019년, 아시아 최초로 유럽 시장에 영양수액제 수출
 
  ― 일본에요?
 
  “일본하고 기술 교류를 한창 할 때였는데 일본 제약회사도 증설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거든요. 중외제약 기술력은 알고 있으니까 우리가 많이 생산하면 가져다 쓰지 않을까 기대도 있었어요. 완전 계산이 틀렸어, 우리 것을 단 한 개도 안 가져가더라고.”
 
  ― 왜요.
 
  “‘우리 국민을 치료하기 위한 약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일본은 그런 철학이 확고했어요. 중외제약 수액이 탐나기는 하는데, 내 국민의 생명을 다른 국가에 의존할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그거 보면서 또 한 번 배웠지. 그게 바른 생각 아니요. 내 나라 국민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나도 확고해요.”
 
  하지만 이때 일본에 수출하지 못했던 일을 여전히 아쉬워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2019년부터 JW생명과학에서 생산한 ‘위너프’를 3 체임버 종합영양 수액제 본고장인 유럽 시장에 수출을 시작했다. 유럽 시장에 자체 기술로 개발, 생산한 영양수액이 진출한 것은 아시아권 제약사 중 JW생명과학이 처음이다. 생산시설 기준으로는 비유럽권 공장 중 당진 수액공장이 유일하다. 지난 2021년에는 중국 산둥뤄신제약그룹과 위너프에 대한 기술수출 및 공급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반도체를 만든 한국 사람이 신약 개발을 왜 못 해?”
 
  수액을 비롯해 항생제, 항암제, 순환기용 약 등 병원에서 주로 쓰는 전문 치료제를 생산하는 JW중외제약의 신념은 오너 경영인의 말 속에서 충분히 읽힌다. 기력이 쇠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링게루(링거) 한 방 맞아야겠다’고 우리가 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이 회사 덕분이다.
 
  이종호 명예회장의 얘기다.
 
  “링게루도 아니야, 예전에는 몸만 아프면 ‘큰 주사 한 방 맞아야 낫는다’는 얘기들을 했지요. 우리 회사 이름은 모르더라도 그걸 맞아야 낫는다고 생각을 하니 고맙지요.”
 
  ― 의약업을 하는 것은 전자, 기계, 식음료 사업과 다르지요.
 
  “그럼. 의약업을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돈부터 벌겠다는 생각에 이 바닥으로 들어오는 것은 안 돼요. 생명이 먼저냐, 돈이 먼저냐를 늘 따지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돈을 선택합니까. 꺼져가는 생명 앞에 서면 내가 물러서야 한다고. 그게 다른 산업과 달라요. 제약업계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건 아니다 싶어요.”
 
  ― 명백히 주식회사인데 그럼 돈을 어떻게 버나요.
 
  “신약 개발로 벌어야지. 해외에 있는 약을 수입해서 판매해 이윤을 많이 남긴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신약 만들어서 그걸로 수출하고 돈을 벌어야죠.”
 
  ― 신약 개발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습니까.
 
  “내가 신약 개발한다니까 예전에 한 보사부 장관이 ‘안 될 일에 왜 자꾸 돈을 쓰느냐’고 말리더라고요. 그때 내가 그랬어요. ‘반도체 누가 만들었어요?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거 아닙니까?’라고. 반도체를 만드는 한국 사람은 있는데 신약 개발하는 한국 사람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돼요. 같은 서울대학 나와서 왜 누구는 반도체를 만드는데 왜 약은 못 만들어. 내 생각은 확고해요. 단지 이런 건 있지.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R&D에 투자했듯이 오너가 투자를 해줘야 하는 거거든요. 의약업계에서도 누군가 하면 돼요. 20년이고, 30년이고 실패를 하더라도 지치지 말고, 그게 신약 개발의 키워드야.”
 
  ― 외람되지만, 아직 중외제약에 획기적인 신약은 없지 않나요.
 
  “꽃은 아직 안 피었지만, 꽃밭은 내가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된 거죠. 직원들 앞에서 내가 말한 적이 있어. 내가 죽기 전에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신약 개발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하지만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걸 개발할 수 있는 길이라도 닦아놓으면 나는 만족한다고.”
 
  ― 지금 경영을 하는 큰 아드님께도 R&D 비용은 줄이지 말라고 하셨다고요.
 
  “그걸 안 하면 약 장사야. 연구 개발 안 하는 곳이 무슨 제약회사야.”
 
 
  1983년 중앙연구소 만들어 R&D에 사활 걸어
 
이종호 당시 중외제약 사장은 1983년 중앙연구소를 만들며 회사를 R&D 회사로 키울 꿈을 갖게 된다.
  JW중외제약이 부도 위기를 넘기고, 회사 재무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됐을 때 이종호 명예회장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연구소를 만든 것이었다. 사장 취임 자리에서 그는 “생명을 다루는 제약기업은 이윤도 중요하지만 약 다운 약을 생산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1983년 중앙연구소를 만들었고, 1992년에 로슈 그룹 산하의 쥬가이제약과 공동으로 국내 최초의 합작법인인 C&C신약연구소(현 JW중외제약 100% 지분)를 만들었다. 2000년에는 미국 시애틀에 화학 유전체학 전문 연구기관인 JW Theriac(현재 샌디에이고 소재)을 만들어 항암제 등 난치병 치료를 위한 신약 및 원료 합성 관련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JW중외제약은 이 정신을 이어받아 혁신 신약 중심의 R&D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치료 의약품 개발에 힘쓰고 있다.
 
  이종호 명예회장의 얘기다.
 
  “연구소를 만들었을 때도 회사 사정이 많이 좋아졌던 건 아니에요. 우리 약이 대부분 병원에 납품하는 전문 의약품이잖아요. 돈 되는 약보다 사람 살리는 약 만드느라고 그저 직원들 월급 주고, 연구개발비 할 정도였어요. 내가 말이 회장이지, 아침에 출근하면 그 주에 자금 상황은 어떤지를 매일 챙겨야 했다니까요(웃음). 그리고 큰 문제 없다 싶으면 비행기 타고 일본 가는 거예요. 연구 협약을 해서라도 신약을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이종호 명예회장의 남다른 R&D 사랑은 JW중외제약의 체제를 송두리째 바꿨다. 통상 일반적인 회사는 매출, 이익 상황에 따라서 R&D 예산을 책정한다. ‘올해 R&D 예산이 줄었다, 늘었다’는 것이 자주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회사의 매출과 이익이 매년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JW중외제약은 R&D 예산을 조달하기 위해 사업 계획을 수립한다. R&D가 모든 소통, 시스템, 의사결정의 기준이다. 덕분에 회사의 R&D 비용은 매년 늘고 있다. 2018년에 연구 투자에 344억원(매출액의 6%)을 쏟아부었던 회사는 2019년에 407억원(매출액의 8%), 2020년 507억원(매출액의 9.3%)을 지출했다. 2022년 회사는 850억원을 R&D 비용으로 책정한 상태다. JW중외제약의 신조는 국내 최고의 ‘R&D 중심 제약사’다.
 
  JW중외제약은 환자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010년부터 바이오 인포매틱스(생물정보학) 기반의 빅데이터 플랫폼인 ‘클로버(CLOVER)’와 ‘주얼리(JWERLY)’를 구축해 신약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국내외 환자의 질환 정보와 타깃 연구를 고도로 플랫폼화한 전문회사, 병원, 학교와의 오픈 이노베이션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클로버’는 암세포주, 조직, 유전자 정보, 화합물, 약효 예측 등의 데이터를 축적한 빅데이터 플랫폼이다. 클로버를 통해 특정 질환에 적합한 유효 물질을 발굴하고 신약을 개발할 때 약효, 부작용 등을 예측한다. ‘주얼리’는 생체 현상을 조절할 수 있는 단백질 구조를 모방한 독창적 화합물 라이브러리다. 최근 JW중외제약은 자체적으로 개발한 아토피피부염치료제 JW1601, 통풍치료제 URC102를 글로벌 회사에 기술 수출했다. 전문 의약품 분야인지라 일반인이 몰랐을 뿐, JW중외제약의 신약 개발과 수출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후원한 장애인 전화를 직접 받는 회장님
 
성천 이기석 선생의 흉상 제막식. 2013년부터 ‘성천상’을 제정해 의료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인터뷰 중에 이종호 명예회장에게 전화가 왔다. 30만원을 주고 당신이 직접 샀다는 갤럭시 손목시계로 지인과 통화를 했다. “코로나19로 그 양반이 갔다는구먼”이라며 통화를 끝내면서 섭섭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 명예회장이 말을 이었다.
 
  “인생에서 죽음이 가장 두려운 게 아니겠소. 참 아쉬운 일이구먼. 요즘은 10년 후배들과 자주 식사하고 그래요. 10년 터울인데 같이 늙어가요.”
 
  ― 워낙 건강하셔서 150세까지 사실 것 같습니다.
 
  “에이, 그건 욕이에요. 내가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민폐 안 끼치려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내 몸을 관리해야 주변 사람들이 덜 피곤할 거 아니요. 그리고 난 좋은 선배가 되고 싶어. 후배들한테 밥 한 끼 하자고 말했는데 후배들이 ‘저 노인네가 또 부담스럽게 하네’라고 생각하면 안 되잖아.”
 
  한 시간 반이 넘는 인터뷰 내내 집무실에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햇살만큼이나 대화는 포근했고 평화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회장님’ 방에서 느껴지는 중압감이나 어색함은 느낄 수 없었다. 이종호 명예회장에게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어쩌면 사람을 그 자체로 좋아하는 사람일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 친분이 있는 장애인을 ‘친구’라고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이 명예회장은 2011년 사재 200억원을 털어 공익재단 중외학술복지재단을 만들었다. 보건의료 분야의 학술연구와 소외계층 지원을 위해 설립된 공익 법인이다. 2013년에는 창업자인 이기석 선생을 기리고 고인이 평생 실천했던 생명존중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성천상’을 제정해 음지에서 헌신적인 의료 봉사를 하는 의료인을 발굴해 그 업적을 기리고 있다. 지난해까지 9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올해로 10년을 맞는다.
 
  이 명예회장은 “코로나19로 친구들이 노래를 못 하게 돼서 큰일이다. 다시 모여야 할 텐데”라고 했다. 그가 지원한 장애인합창단 ‘영혼의 소리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종호 명예회장은 우연한 기회에 장애인 합창단 공연을 보게 됐는데 발음도 어눌하고 악보도 보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들의 ‘국제 합창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꿈을 알고 후원했다. 2009년 이 합창단이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안톤 브루크너 국제 합창대회’에 직접 참가해 서양인들 앞에서 한복을 입고 합창하게끔 후원한 것도 그였다. 그때 인연 맺은 친구 중 몇몇은 직접 이 회장의 휴대전화로 전화도 한단다. ‘정말 직접 통화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회장이 말했다.
 
  “전화 오는데 받아야죠. 순수한 친구들이거든. 코로나19 때문에 모이지도 못하고 공연도 없으니까 어째야 하나 싶어요. 코로나19가 빨리 끝나야 할 텐데. 제약업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아쉽기 그지없지.”
 
 
  70세에 안나푸르나 등반
 
이종호 명예회장은 일흔의 나이에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등반했다.
  이종호 명예회장의 집무실은 단출하다. 회사가 있는 서울 강남 한복판 대로변의 14층에 있는지라 경관은 수려하지만, 줄줄이 늘어선 상패도 없다. 책상 뒤편에 있는 커다란 히말라야 사진 액자 2개가 전부다. 대낮의 모습과 일몰 때의 모습을 그가 직접 촬영한 사진이다. 그가 일흔이었던 2003년에 지인들과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섰을 때 찍은 사진이다.
 
  “산을 참 좋아해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등산을 했는데 2003년 겨울에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트레킹했지요. 베이스캠프가 해발 4150m에 있는데 거기까지 올라갔어요.”
 
  ― 일흔에 히말라야 트레킹은 너무한 것 아닙니까.
 
  “올라가는 데만 꼬박 5박 6일이 걸렸지요. 아침 일찍부터 해가 질 때까지 그냥 걷는 거야. 신비한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는데 잊을 수가 없어요. 80세가 됐을 때 다시 한 번 가려고 했는데 발목을 다쳐서 못 갔어요. 두고두고 아쉽지. 지인들한테 다시 한 번 가자고 말하고 있어요.”
 
  ― 아흔 넘어서 도전하시려고요.
 
  “정 못 올라가겠으면 헬기 타고 가려고(웃음).”
 
  ― 진짜 가실 것 같은데요.
 
  “응, 근데 우선 회사가 이사 간다니 거기부터 가봐야지. 내가 집무실을 만들 필요 없다는데도 또 만들 모양이에요.”
 
  JW중외제약은 오는 2023년에 또 다른 시도를 한다. 총 1200억원을 투입해 과천 지식 정보타운에 ‘통합R&D센터’ 중심의 신사옥을 준공하고 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R&D 연구소를 집결해 연구개발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보건의료산업의 패러다임 변화에 선제로 대응하고, 회사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책임지는 R&D 인재들이 창의적으로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모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본사 현관에는 카니발 승합차가 대기 중이었다. 오후 일정은 개인 PT를 받는다는 이종호 명예회장이 타고 갈 차란다. ‘좌석도 편하고 차도 커서 좋다’는 카니발이 이 명예회장의 자동차다. 트럭을 타고 수액 개발을 열심히 했던 이기석 선생의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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