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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안종범수첩-박근혜 정부의 비망록》 펴낸 안종범 전 경제수석비서관

“미르재단 관련해 특혜 없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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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이 집을 압수수색할 때 가져간 수첩은 한 권뿐… 보좌관에게 ‘보고서 작성 시 참고하라’고 줬는데 검찰 손에 들어가”
⊙ “미르재단은 韓流와 경제 접목해 시너지 효과 얻기 위한 것”
⊙ “미르재단은 경제수석 소관이 아닌데도 기소, 세월호 조사 방해는 해양수산부가 경제수석 소관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소”
⊙ “대선 후보들, 포퓰리즘·재정남발성 공약 너무 많아… 박근혜의 ‘공약가계부’ 참고해야”
  2009년 가을 한 대학교수가 《월간조선》을 찾아왔다. 그는 “현재 국가부채 산정 방식은 일반 정부부채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 결국 정부가 부담해야 할 공기업 부채, 공적 연금 부족분 등을 포함하면 훨씬 더 많아진다. 또 국가부채 증가 속도가 위험할 정도로 높다”면서 이에 대해 지적하는 글을 기고하고 싶다고 했다. 순수함과 열정이 느껴졌다. 그리하여 《월간조선》 2009년 12월호에 그가 쓴 〈정책진단/되살아나는 ‘재정 포퓰리즘’ 망령 - 1997년 60조원이던 나랏빚, 올 연말 366조원으로 폭증〉이라는 제목의 글, 이듬해 7월호에는 〈국가채무와 재정건전화법 통과〉라는 글이 실렸다.
 
   2012년 대선(大選)을 앞두고 박근혜(朴槿惠) 캠프에 참여한 교수 이름 가운데 그의 이름이 보였다. 2012년 총선 때에는 새누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더니, 2014년에는 경제수석비서관이 되어 청와대로 들어갔다. 2016년 7월, 돌연 그의 이름이 방송과 신문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청와대의 강제 모금으로 대기업이 수백억원의 기금을 출연하여 재단을 만들었고, 그 중심에 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그가 있다는 보도였다. 이른바 ‘최순실 사태’의 발단이었다. 이후 그는 ‘탄핵정국’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서게 됐다. 검찰이 발견한 그의 업무수첩은 그야말로 폭탄의 뇌관이었다. ‘순진한 책상물림으로 보이던 그 사람이…’ 하는 탄식이 나왔다.
 
  문재인(文在寅) 정권이 들어선 후 그는 이른바 ‘적폐(積弊)청산 재판’에 회부되어 4년간 형(刑)을 살고 나왔다. 그러고 그가 겪은 최순실 사태, 탄핵정국, 검찰 조사와 재판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냈다. 책 제목은 《안종범수첩-박근혜 정부의 비망록》(조선뉴스프레스 펴냄). ‘그’는 안종범(安鍾範·63) 전 경제수석비서관이다.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왜 하필 이 시점에?’라는 것이었다. 책이 나오는 것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5주년과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구정(舊正) 연휴가 끝난 2월 3일, 안종범 전 수석을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책 내면서 다른 고려 없었다”
 
‘안종범 수첩’에 실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미르재단 설립 관련 지시 사항.
  ― 하필 이 시점에 책을 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질문을 받으니 오히려 당황스럽습니다. 구치소에서 보내는 동안 제가 겪은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원고를 썼습니다. 작년 9월 28일 출소 즈음에는 거의 원고가 완성되었고, 출소 후에 마무리하여 바로 출간하게 된 것입니다.”
 
  ― 지금도 ‘박근혜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윤석열(尹錫悅)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우리가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자고 5년 동안 고생한 것이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책이 그런 주장들을 강화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요.
 
  “그렇다고 이재명(李在明) 후보를 찍을 수야…. 하여튼 저는 더 이상 정치를 할 생각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책을 내면서 다른 고려는 전혀 없었습니다. 만일 책 발간을 대선 후로 미룬다면 그때는 ‘정권이 바뀌니까 책을 냈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안종범 전 수석이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그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있으면서 대기업들로부터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설립을 위한 모금에 관여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의 책을 보자.
 
  〈창조경제혁신센터의 성공적인 개소식과 함께 창조경제가 잘 추진되고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대통령은 2015년 1월, 문화 관련 재단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정확한 시점과 내용은 훗날 검찰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 수첩에 기록된 것을 보고 기억이 떠올랐다. 수첩 17권(2015. 1. 18~29) 1월 19일자 대통령의 지시 사항 5가지 중 다섯 번째에 ‘5. 문화재단, 대기업별 문화재단 갹출 → 공동문화재단’이라는 메모가 있었다. (중략)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대기업들이 공동으로 만드는 문화재단이라는 점에서 최고경영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사가 있다고 분명히 말한 바 있다. “당시 경제수석이 대기업 회장에게 이야기하는데, 나쁘다고 이야기할 회장이 어디 있냐”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기업이 함께해서 만드는 문화재단은 일종의 공공재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개별 기업의 문화재단보다는 의미가 있다는 데는 적어도 공감하고 있었다.〉
 
 
  “미르재단 등, 韓流와 경제 접목시키려던 것”
 
  ― 그런 것이 일종의 준(準)조세로 기업들에 부담을 주는 행위 아닙니까.
 
  “저도 교수로서 준조세 등에 대해 비판을 많이 했지만,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은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외국에서는 한류(韓流)가 무척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한류 열풍을 경제와 접목시켜서 기업에 도움을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은 해외에 나갈 때 우리 문화예술단이나 태권도 시범단 등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대통령 순방 시에 방문하는 나라의 문화예술공연을 보고 오는 경우는 많지만, 그런 식으로 우리 문화예술단이나 시범단을 데리고 나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에 대한 반응도 좋았습니다. 이를 기업의 해외 진출, 수출 신장과 연계를 시키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두 재단은 그런 일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 그런 일들을 굳이 정부가 나서서 하려 한 게 낡은 생각 아닌가요. 전두환(全斗煥) 정권 때 일해재단 문제로 그렇게 홍역을 치렀는데도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일해재단 때에는 개별 기업들로부터 돈을 걷었고, 그러면서 기업들의 민원을 들어준 것이었지만, 두 재단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전경련을 통한 공동 모금이었고, 돈을 낸 개별 대기업들에 특혜를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혜택이 돌아갔다면 중견·중소기업을 비롯한 우리 기업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 책을 보면 미르재단 이름, 이사장, 이사, 사무총장 등을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알려주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인지는 아는 바가 없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모든 분야에 있어 디테일까지 챙기는 스타일이어서, 검증을 거친 후 좋은 분들을 추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뒤에서 누가 무엇을 하고 있다든가 하는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 ‘미르재단 설립 등을 반대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는 없습니까.
 
  “지금도 두 재단 설립 당시의 취지는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대통령으로부터 가끔 질타를 받으면서도 바른 방향으로 조언하려 애썼고, 박 대통령도 고집이 센 분이기는 했지만 근거를 제시하며 서너 번 계속 설득하면 결국 수긍하곤 했습니다. 때문에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사전(事前)에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은 듭니다.”
 
  ― 그렇게 박근혜 대통령을 설득한 사례가 어떤 게 있습니까.
 
  “예를 들어 박 대통령은 보여주기식의 쇼 행보를 극단적으로 싫어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통령께 현장 방문을 많이 권했습니다. 제가 경제수석이 된 후 첫 시장 방문 행사인 청주 서문시장 방문도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려서 전태일 열사의 누이인 전순옥 당시 민주당 의원을 독일 등 유럽 순방에 동행하도록 한 적도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전 의원을 독대한 자리에서 전태일 열사의 일에 대해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청와대, 문재인 청와대
 
안종범 전 수석은 박근혜 정권 시절 경제수석비서관과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사진=안종범 제공
  안종범 전 수석의 책을 보면, 최순실 사태가 본격화되면서 청와대 비서실이 허둥대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재단 문제와 관련된 국회와 언론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나 홀로 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방관자 자세로 일관했다는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민정수석(우병우-기자 주)은 자신의 문제를 방어하느라 정신없었다 하더라도 대통령과 관련된 이 문제에 대한 대처가 소극적이었다. 그때 한 의원이 내게 질문하면서 당신도 또 한 명의 희생양이 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말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 박근혜 대통령 당시의 청와대는 대통령만 쳐다보고 있었지, 보좌진 간의 유기적 연계, 동료애, 국정에 대한 공동의 목적의식, 우리 사회의 좌우 대결구도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이 없는, 출세주의자들의 집단이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문재인 정권의 청와대는 자기들만의 이념, 목표 의식으로 뭉쳐 있지요. 하지만 그건 자기들 소사이어티끼리 뭉쳐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박근혜 대통령 시절의 청와대는 적어도 자기편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똘똘 뭉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문재인 정권의 청와대에서는 청와대 행정관조차 국회의원이 되거나 요직으로 나가고 있지만, 박근혜 청와대에서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사건이 난 후에 일부 수석이나 대통령 측근의 행보 중에서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아직도 많은 분은 탄핵 이후 어려움을 겪었으면서도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 목표에 공감해서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소통에 문제없었다”
 
  책을 보면, 미르재단 문제 등이 터진 후 안 수석과 민정수석, 홍보수석이 대통령을 만나 사태 수습을 논의하는 대목이 나온다.
 
  〈상황이 중차대하다는 설명과 재단 관련 해명은 이렇게 하자는 제안, 그리고 민정수석이 법적으로는 문제없다는 보고와 함께 핵심인 비선 실세를 인정하자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비선 실세를 인정하자는 홍보수석의 제안에 불쾌한 표정을 짓고는 그건 안 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그래도 하셔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다. 그 순간 대통령은 더욱 강한 반대 의사를 표했다.
 
  순간 모두 침묵에 휩싸였다. 더 이상의 설득은 불가능했다. 세 수석은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별도의 회견 발표 없이 2016년 10월 20일 대수비(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모두말씀에서 사과문을 발표하기로 하고, 내가 초안을 만들어 올리기로 하고 끝을 맺었다. 민정수석은 대통령이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니 너무도 떨리더라고 했다.〉
 
  ― 박근혜 대통령 시절 청와대는 참모와 대통령이 허심탄회하게 문제를 공유(共有)하지 못하는 권위주의적인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소통하는 방식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소통 자체에 문제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수석, 장관들과 끊임없이 대화했습니다. 여러 부처 간 이해가 상충(相衝)되는 문제가 생기면 대통령께서 늘 앞장서서 관련 부처 장관을 위시한 수석들과 회의를 하곤 했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비서실장, 국정원장을 만나는 것조차 꺼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람들과 편하게 만나는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었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역량(力量)이 부족해서 사람을 멀리했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에 임하는 자세나 지식 등이 월등했고, 감탄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 소통은 어떤 식으로 했습니까.
 
  “대면(對面)보고보다는 전화 통화를 많이 했습니다. 90% 정도는 전화 통화였을 것입니다.”
 
  ― 전화 통화나 화상(畵像)회의보다는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 부분이 좀 아쉽기는 합니다.”
 
 
  “사과는 더 빠르게, 더 강하게 했어야”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10월 25일 ‘최순실 사태’와 관련, 對국민사과를 했지만 성난 민심을 돌리지는 못했다. 사진=조선DB
  안종범 전 수석은 이 책에서 최순실 사태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수차 강도 높은 대(對)국민사과를 건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10월 25일과 11월 4일 대국민사과를 했다.
 
  ―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사과를 했지만, 한편에서는 ‘대통령이 사과를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었다. 사과를 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밀리기 시작했다’고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금 정부가 하는 것을 바탕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누가 제게 ‘이 정권이 하는 것을 보니, 그렇게 사과할 것이 있었나 싶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그렇다면 박근혜 정권도 이 정권과 똑같은 정권이 되지 않았겠느냐. 그럴 수는 없는 일 아니냐’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대통령께서 국민이 기대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솔직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건의를 했습니다. 사과가 지체됐고,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은 지금도 아쉽습니다.”
 
  최순실 사태와 탄핵정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른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안종범 수첩’이다. 모두 63권에 달하는 이 수첩은 검찰 조사와 재판 과정, 그리고 언론에서 증거 자료로, 또 보도 근거 자료로 끊임없이 등장하면서 ‘안종범 수첩’은 ‘사초(史草)’로 불리기까지 했다.
 
  ― ‘안종범 수첩’은 어떻게 생겨난 것입니까.
 
  “저는 기억을 돕고자 대학 시절부터 뭐든 메모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10여 년 전쯤 문구점에서 우연히 손바닥 크기의 얇은 수첩을 발견하고 애용하게 됐는데, 청와대에 들어간 후에는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기록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사실 수첩 내용은 사건과 관련된 내용보다는 국정운영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다 사용한 수첩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나를 도와주었던 김건훈 보좌관에게 지시사항을 정리해서 컴퓨터에 입력한 후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시 대통령께서 지시하시는 내용을 정리하여 1년에 2~3번은 지시사항에 대한 이행상황을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 보좌관은 나중에 제가 찾을 경우를 생각해서였는지 그걸 가지고 있었더군요.”
 
 
  ‘안종범 수첩’
 
  ― ‘안종범이 바보같이 수첩을 내주는 바람에 상황이 더 악화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수석에서 물러난 직후 새벽에 압수수색이 들어왔습니다. 개인용 및 업무용 휴대폰, 그리고 그때 사용하고 있던 수첩 등을 압수당했는데, 이때 검찰도 제가 수첩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압수수색 검찰팀이 나의 서재를 수색한 후에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과거 모든 자료를 안 버리고 잘 보관하셨다. 사모님의 과거 가계부도 모두 있는데 얼마나 알뜰하게 살림하셨는지 놀랍다’고 하더군요. 이처럼 잘 보관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그런 결과를 낳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압수수색 때 검찰이 가져간 수첩 한 권 말고 나머지는 제 손안에 없었습니다. 김건훈 보좌관에게 정리한 후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그런 줄 알고 있었던 거죠.”
 
  ― 검찰은 어떻게 해서 김건훈 보좌관이 갖고 있던 수첩들을 입수한 것입니까.
 
  “특별수사본부의 조사가 한창 진행되던 상황에서, 김 보좌관이 제가 쓴 수첩 16권을 갖고 조사실로 왔습니다. 검찰이 참고만 하고 돌려준다고 해서 가져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김 보좌관은 그 수첩이 제 억울함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나중에 말했습니다. 가져오기 전에 민정수석실과 그 수첩이 국가기록물인지 여부를 검토했는데 대통령의 말씀이나 외교적으로 민감한 내용들, 사건과 관련 없는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조사에 필요한 부분만 열람하고 돌려달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시 복사한 후 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김 보좌관에게 저녁을 먹고 오라고 내보낸 후 그사이에 영장을 발부받아서 압수했습니다. 검찰이 부당하게 입수한 증거는 증거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재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하기 시작한 ‘안종범 수첩’은 4차례에 걸쳐 모두 63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중 어떤 것들은 안 전 수석 등을 궁지로 몰기도 했고, 어떤 수첩은 그를 구해주기도 했다.
 
 
  삼성 합병 관련 대통령 지시 진술 강요
 
  책을 보면 당시 검찰과 언론은 미르재단 문제 등에 대해 최순실과의 공모 여부를 집중 추궁했지만, 안종범 전 수석은 최순실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고, 결국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에도 박근혜 후보와 최태민·최순실 관련설은 파다했습니다. 정말 최순실을 몰랐습니까.
 
  “그런 소문이야 듣기는 했지요. 하지만 2014년 정윤회씨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에 그에 대해 경계심을 품은 적은 있지만, 최순실씨의 존재는 제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만난 적도 없었고요. 검찰도 제가 최순실씨와 공모했다고 생각해서 끈질기게 캐물었지만, 결국 제가 정말 최순실씨와는 모르는 사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검찰 수사 중 겪었던 일들에 대해 안종범 전 수석은 “책에 자세히 썼기에 다시 얘기하는 것이 부담된다. 아프고 되새기기도 힘든 일이어서 책으로 쓰면서도 제일 고통스러웠다”며 말을 아꼈다. 책에는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그가 느꼈던 모멸감, 당혹감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첫날 만난 어느 검사는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경고를 했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초면이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서 “앞으로 협조하면 모든 것이 수월해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시련이 닥칠 거다”라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있는 대로, 기억나는 대로 진술하겠다면서 협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협조는 그것이 아니었다. 삼성의 합병 과정에서 대통령이 내게 이와 관련한 지시나 언급이 있었다는 진술을 하는 것이 ‘협조’라고 했다. 나는 그런 지시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협조가 안 된 거로 알겠고, 이제부터 가족 관련 모든 것을 조사해서 우선 언론에 알리겠다”고 압박했다.
 
  검사발 협박성 경고는 난생처음 눈앞에서 당해보는 것이었다. 그동안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는 없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멋대로 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이미 가족 관련해서 조사한 것이 있다면서 내 조카의 취업 문제를 거론했다. 나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으니 알아서 하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런 실랑이는 그 후 오랜 기간 이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나의 가족, 친척, 그리고 친지의 계좌 추적이 다방면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검찰, 세모를 네모로 만들려고 해”
 
  책에는 검사들이 “가족, 특히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라!” “당신을 당장 풀어줘서 광화문 광장에 내보내고 싶다. 그래서 국민들의 심판을 받게 해야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검찰의 잦은 소환에 대해 그는 “검찰은 마치 냉장고에 넣어둔 음식을 생각나면 꺼내 먹는 정도로 구치소의 수용자를 소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안 전 수석은 “검사들을 접하면서 그들은 세모인데 네모로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세모를 네모라고 하고 만들어놓은 정황과 선별한 자료들, 그리고 진술이 있는 상황에서는 제아무리 재판이라도 이를 바로잡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는 재판에 대해서도 “재판은 검사들이 억지로 만들어놓은 네모를 다시 진실인 세모로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네모를 굳히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검사 측에서 세모가 아니라 네모라는 증거를 내세우면서 하는 재판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네모를 입증하기보다 네모가 아니라는 증거와 세모라는 증거를 갖고 피의자가 노력해서 밝혀내야 하는 재판이다”라고 꼬집었다.
 
  〈검사는 대상이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 있는 피의자라는 점에서, 이들이 저질렀을 범죄를 기정사실화해서 벌을 줘야 한다는 인식으로 일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검사들은 당연히 모든 걸 의심하고, 의심을 사실로 밝히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기에 사람들을, 나아가 사회를 힘들게 할 수 있는 위험도 존재한다. 세모를 네모라고 만들어내는 경우에 한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언론을 활용하기도 한다. 조사 내용을 언론에 흘려서 여론을 검찰 수사에 유리하게 조성하거나 피의자들의 범죄 사실에 관한 국민의 분노나 의구심을 필요 이상으로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이다. 세모라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묻힐 수밖에 없다.〉
 

  ― 검사들이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을 수사할 때는 인간적 모멸감을 줘서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책에도 그런 내용이 보이더군요.
 
  “저도 별건(別件)수사의 피해자 중 하나이지만 당하는 사람은 극단에 몰리는 절박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자칫 극단적 선택도 하게 되는 것이죠. 저도 그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순간을 용케 넘겼다 싶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헝클어진 머리에 수갑을 차고 수의(囚衣) 차림으로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검찰개혁은 검찰로부터 자유로운 정권이 해야”
 
  ― 참 야비한 짓이었죠.
 
  “그걸 왜 또 그렇게 자주 TV에서 보여주는지…. 꼭 그렇게 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런 모습을 하도 자주 보여줘서 국민들도 무덤덤하게 여기게 된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 책에서 ‘검찰개혁’을 말했더군요.
 
  “검찰개혁은 당연히 해야겠지만, 그건 ‘검찰로부터 자유로운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검찰로부터 자유롭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검찰을 동원해온 정권은 ‘검찰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겠죠. 그런 정권이 말하는 ‘검찰개혁’은 슬로건에 불과할 뿐입니다. 검사들이 정권의 성향이나 진영논리에 맞추지 않고, 그럴 경우 생기는 부담과 불이익을 묵묵히 감수해나갈 때, 진정한 검찰개혁이 가능하겠지요.”
 
  ― 대선에서 ‘검사 출신 대통령’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제학자를 비롯한 사회과학자들, 특히 저와 같이 정책을 연구하는 사람은 늘 미래를 생각하며 어떤 정책을 시행했을 때 효과를 사전에 검토하는 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런데 검사는 과거 발생한 특정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과 자료들을 통해 그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데 노력합니다. 경제학자들이 미래를 바라본다면, 검사는 과거를 바라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라고 할까요. 때문에 검사를 비롯해 법조에 오래 계셨던 분들이 정치를 하려면 일종의 전환(轉換)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조사 활동 방해 사건
 
  안종범 전 수석에게 씌워진 혐의는 다양했다. 그 결과에 대해 안 전 수석은 이렇게 정리했다.
 
  〈① 재단 관련 직권남용죄 ② 현대자동차 관련 KD코퍼레이션 부분 직권남용죄 ③ GKL 관련 직권남용죄 ④ 포레카 관련 강요미수죄 ⑤ 이승철 관련 증거인멸죄에 대하여만 유죄로 확정.
 
  당초 국정농단 사건으로 기소되었던 공소사실 중 항소심에서 ① 롯데그룹 부분과 ② 김필승에 대한 증거인멸 두 가지가 전부 무죄(이른바 통무죄)였던 것이 대법원 판결에 따라 ③ 현대자동차 관련 플레이그라운드 부분 ④ KT 인사 부분 ⑤ KT 광고 부분 ⑥ 포스코 부분의 4가지가 추가되어 총 6가지가 전부 무죄(통무죄)로 확정되었다.〉
 
  이와 별건으로 UAE에 의료사업 진출을 꾀하던 성형외과 의사 김모씨 부부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일부 무죄, 일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중요한 혐의 가운데 상당 부분이 무죄를 받았음에도 그의 형량(刑量)은 당초 6년에서 4년으로 2년 줄어드는 데 그쳤다. 4년의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했지만, 안 전 수석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자가 1월 말 인터뷰 날짜를 잡으려고 전화를 걸었을 때에도 그는 법정에 출두하고 있었다.
 
  ― 아직 남은 재판이 있습니까.
 
  “세월호 조사 활동을 방해했다는 건이 있습니다. 이 건에 대해서는 김영석 전 해양수산부 장관, 윤학배 전 해양수산부 차관,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 그리고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저까지 모두 다섯 명이 직권남용죄로 기소됐는데, 1심에서 저는 무죄, 다른 분들은 집행유예 판결이 내려졌어요. 2심에서는 한 분 제외하고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어요. 검찰이 상고(上告)해서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입니다. 그런데 2020년 ‘철저하게 다시 조사하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검찰이 수사단을 다시 구성하면서, 또 기소를 했네요. 이해가 안 됩니다.”
 
  ― 경제수석이 왜 거기에 낀 거죠.
 
  “경제수석이 해양수산부를 관할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죠. 보세요. 미르재단 등과 관련해서는 제 소관이 아닌데도 제가 실질적으로 관여했다면서 기소를 하더니, 세월호 건과 관련해서는 해양수산부가 제 소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실질적으로 관여한 바가 전혀 없는 데도 기소를 했습니다. 말이 안 되는 거죠.”
 
 
  “재정남발성 공약 너무 많아”
 
  ― 경제 전문가로서 대선 후보들의 경제정책들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포퓰리즘, 재정남발성 공약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이재명 후보의 경우는 ‘한번 공약하고 보자’는 식으로 내지르는 것이 많은 것 같아요. 책임성이 부족하고, 일관성도 없어요. 공약 가운데 서로 어긋나는 것들이 많습니다. 기본소득도 한다고 그랬다가, 안 한다고 하기도 하고…. 이런 부분들을 상대 후보나 언론들이 집요하게 지적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 포퓰리즘, 재정남발성 공약은 윤석열 후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2012년 총선 및 대선 때 박근혜 후보는 ‘공약가계부’를 내놓았습니다. 각종 공약에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나 되고, 그것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를 가계부에 수입·지출을 기록하듯이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집권 후에는 공약가계부 내용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을 했습니다. 지금 대선 후보들도 이 ‘공약가계부’를 참고했으면 좋겠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2005년 8월, 유승민 당시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유승민 실장과는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같이 공부하는 등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를 이회창 캠프에 소개한 게 저였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과는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연금개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유승민 실장이 저를 재정·연금 전문가라고 소개했거든요. 연금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뜻을 같이했습니다. 그게 나중에 박근혜 정부 시절 공무원연금개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첫 느낌은 어땠습니까.
 
  “나라 생각이 가득했고, 열정과 진정성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2005년부터 그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고, 정책을 놓고 공부를 함께하면서, 또 수석으로 일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분과 일할 기회가 있었던 것은 정말 큰 영광이었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2007년에는 신자유주의적인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운다)를 주장하다가 2012년에는 경제민주화를 주장한 것은 정책이 너무 표변(豹變)한 것 아닙니까.
 
  “저는 줄푸세와 경제민주화가 서로 어긋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제민주화는 ‘줄푸세’의 ‘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당시만 해도 대기업들의 불공정행위 같은 것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경제민주화는 이를 바로잡자는 것이었으니, ‘법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의 일환이었던 셈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전부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와 줄푸세를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김종인 위원장은 경제민주화를 너무 전면에 내세우는 바람에 두 분 사이에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걸 조정하느라고 고생했습니다.”
 
 
  “둑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 김종인 위원장은 어떤 분입니까.
 
  “2012년 새누리당 비대위를 같이했고, 국회의원 시절 제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던 분입니다. 고집이 세지만, 정치 감각이 뛰어나고,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고, 국민 여론과 정서를 잘 읽고, 국면을 잘 활용하는 분이죠.”
 
  ― 2009년 《월간조선》에 국가부채 문제를 들고 왔을 때보다 상황이 훨씬 나빠졌습니다.
 
  “(한숨을 푹 쉬면서) 그때는 그래도 걱정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걱정하는 사람도 없어요. 둑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2020년 결산 기준으로 흔히 말하는 국가채무(D1)는 순수 정부부채인데 846.9조원, GDP의 43.9%입니다. 2009년 기고할 때만 해도 366조원(추정치)으로 GDP 대비 35.6%였습니다. 일반정부부채(D2)는 D1에 비영리공공기관 채무를 합친 것을 말하는데, 945.1조원으로 GDP 대비 48.9%에 달합니다. 공공부문부채(D3)는 D2에 비금융공기업채무를 더한 것으로 1280조원, GDP 대비 66.2%에 달합니다. D2나 D3도 결국은 정부가 부담해야 할 몫입니다. D1만 가지고 우리나라의 국가채무 비율이 낮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계획입니까.
 
  “앞으로는 일종의 정책평가연구원을 만들어 운영해보고 싶습니다. 미국에서는 하나의 정책을 내놓기까지 10년 이상의 연구가 있고, 그에 대한 사회적 실험을 하고, 사후(事後) 관리도 철저하게 합니다. 브루킹스연구소를 비롯해서 50년 이상 된 연구기관만 5~6개가 있습니다. 한데 우리나라의 경우 정책에 대한 평가가 없어요. 국책연구원이나 기업부설 연구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정부나 기업의 일을 할 뿐이죠. 인터넷으로 의뢰를 받아서 정책이나 국가부채 같은 문제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비용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조달하고요. 크게 일을 벌이려는 것은 아니고 제가 알고 있는 전문가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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