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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책으로 세상 읽기

3·15 부정선거 주도자 최인규의 《최인규 옥중 자서전》

부정선거 저지르면 본인도, 정권도 죽는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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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무원 및 그 가족들에게 이승만 지지 지시 ▲경찰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상대로 부정선거 모의 ▲자유당으로부터 부정선거 실행 자금 수령 ▲3·15 선거 당일 투표 조작 지휘 등의 죄목으로 死刑 선고 받아
⊙ 조봉암이 1956년 5·15 대선 때 216만여 표 득표하자 충격… ‘대한민국이 선거라는 방법을 통하여 공산당에 넘어갈 수도 있겠다’ 고민
⊙ 4·19 일어난 후 밀항 권유받자 “남자가 자기가 저질러놓은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마당에 어디로 도망가느냐?”
⊙ 5·16 혁명재판소에서 死刑 선고 받은 후 중앙정보부 권유로 獄中 자서전 쓰다가 20일 후 처형돼
⊙ 우리 국민은 62년 전에 부정선거에 맞서 피 흘리며 싸웠고, 부정선거 책임자를 교수대에 세웠던 국민

#부정선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개표
  제20대 대선(大選)이 20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선을 앞두고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부정선거’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20년 제21대 총선(總選)이 부정선거였다는 주장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2018년 지방선거 당시 ‘대통령의 친구’를 울산시장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청와대 비서관들과 경찰이 개입했던 사건은 아직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아마 대통령과 그의 친구의 임기가 다 끝나고서야 재판이 마무리될 것 같다).
 
  민주공화국이 수립된 지 74년, 그리고 부정선거에 항의해 학생들이 들고일어난 지 62년이 지났다. 언필칭 민주화가 된 지 35년, 소위 문민(文民)정부가 들어선 지 29년, 여야(與野) 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지도 24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명색이 OECD에 가입한 선진국이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는 나라에서 아직도 ‘부정선거’에 대한 논란이 나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38년 전에 나온 《최인규 옥중 자서전》(1984년, 중앙일보사 펴냄)을 꺼내 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최인규(崔仁圭· 1919~1961년)는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당시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부정선거를 총지휘해 4·19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민주당 정권 아래서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5·16 군사혁명 후에는 혁명재판에 회부되어 다시 동법(同法) 및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21일 처형됐다. 처형을 앞두고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관계자가 최인규에게 옥중 자서전을 쓰도록 권유했다. 최인규는 20여 일간 혼신의 힘을 다해 옥중 자서전을 집필했으나, 내무부 장관에 취임했을 무렵의 일을 서술하기 시작할 즈음 형(刑)이 집행되었다. 부인 강인화씨가 이 원고를 간직하고 있다가 1983년 한 잡지에 자신의 한(恨) 많은 인생에 대한 수기를 발표했다. 이 수기가 반향을 얻자 이듬해 남편의 옥중 자서전과 자신의 수기, 그리고 최인규의 재판기록 등을 하나로 엮어 펴냈는데, 그것이 이 책이다.
 
 
  ‘善惡 간에 철저하고 과격한 성격’
 
5·16 후 혁명재판소에 선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 오른쪽부터 최인규 전 내무장관, 이성우 전 내무차관, 이강학 전 내무부 치안국장, 최병환 전 내무부 지방국장. 사진=조선DB
  ‘자서전’이기 때문에 최인규가 이 책에서 자기합리화를 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다 보면 상당히 담백하게 자신의 삶을 서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인규는 1919년 경기도 광주(廣州)군 동부면 미사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강남 동생 하남’ 소리를 듣는 경기도 하남시다. 그런 곳을 ‘깡촌’으로 묘사한 것이나, 지금의 서울 강남 중심부를 ‘언주면’이라고 기술(記述)한 것을 보면 ‘62년 전에는 이랬구나’ 싶어서 슬그머니 미소를 짓게 된다.
 
  최인규는 그럭저럭 먹고사는 자작농(自作農)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925년 ‘을축년(乙丑年) 대홍수’ 때 집과 농지가 유실되면서 한동안 극빈(極貧)하게 살았다. 마을에 교회를 다섯 개나 세운 여장부였던 할머니 밑에서 최인규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랐다. 최인규는 “선악(善惡) 간에 철저하고 과격한 성격, 타협할 줄 모르는 굳은 신념, 나라를 사랑하면 목숨을 바쳐서까지 하고 개인을 숭배하면 생사(生死)를 초월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백만 인이 반대하여도 무섭지 않은 등등의 성격이 모두 우리 조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술회했다. 참 긍정적일 수도 있는 성품이지만, ‘이러한 성품이 그를 비극으로 몰고 갔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그는 보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李承晩만이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
 
  해방 후 최인규는 미군과 조우, 잠시 미군 통역으로 일하다가 미군정 물가행정처에서 근무했다. 그가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숭배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승만 박사가 좌익이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했을 때 이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신념 있는 지도자요, 정의와 원칙의 사람이요,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반공(反共)지도자’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그의 회고이다.
 
  하지만 최인규는 해방 후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정치의 격랑에 몸을 담그지는 않았다. 그는 연희대(현 연세대) 총장을 지낸 언더우드 박사 등의 도움으로 1947년 8월 14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함께한 이들은 모두 33명으로 이들이 해방 후 첫 도미(渡美) 유학생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전성천(鄭聖天) 전 공보실장, 윤일선(尹日善) 전 서울대 총장, 현영학(玄永學) 전 이화여대 교수 등 쟁쟁한 인물들이 다수 있었다.
 

  최인규는 서른을 전후한 나이에 미국에서 고학(苦學)을 하면서 2년 만에 뉴욕대학교를 졸업했다. 주로 공부한 것은 국제무역과 재정·금융 등이었다.
 
  미국에서 최인규는 미국 헌정(憲政)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는데, 한국의 민주주의 지도자는 두 가지 난점(難點)을 안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절제(節制) 있는 자유(Liberty)’가 필요한 한국 현실에 반하여 국민은 ‘절제 없는 자유(Freedom)’를 갈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지도자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민주주의와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민주주의와의 현격한 차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결론적으로 한국의 민주지도자 되시는 분은 누구나 ‘민주주의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험로를 달려야 할 운명에 처하였다고 본다”고 했다.
 
 
  敵治下의 맹세
 
  귀국 후 최인규는 대한교역공사에 영업부장 대리로 입사(入社)했다. 상공부 산하 국영무역회사였다. 이 책에는 당시 자신이 조사한 수출 가능 품목들이 열거되어 있다.
 
  ▲광산물: 중석(重石·텅스텐), 형석(螢石), 흑연, 수연(水鉛·몰리브덴), 창연(蒼鉛·비스무트), 전기동(電氣銅), 무연탄, 바라이트, 광석, 질광석
 
  ▲수산물: 오징어, 멸치, 김, 마른 새우, 한천, 불가사리, 마른 전복, 상어 지느러미, 갈치 비늘, 생어(生魚), 활어(活魚)
 
  ▲농산물: 쌀, 생사(生絲), 사과, 오배자(五倍子), 굴참나무껍질, 우골(牛骨), 돈모(豚毛)
 
  ▲제품: 면직물, 성냥, 비누, 운동화, 자전거 타이어 및 튜브
 
  당시 지지리도 가난하던 나라의 형편이 그려진다. 이런 군색한 상품들을 내다 팔 길을 열어보겠다고 최인규는 1950년 4~6월 무역사절단의 일원으로 동남아시아를 순방하고 돌아왔다. 귀국한 지 며칠 후 6·25가 터졌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하고 적치하(敵治下)에서 3개월을 숨어 살면서 최인규는 이렇게 다짐했다.
 
  “죽지 않고 다시 대한민국 치하에서 살날이 있다면,
 
  첫째, 정부나 대통령이나 국군이나 경찰에 대하여 불평을 참고 살 것.
 
  둘째,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투쟁하되, 감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면을 청산하고, 자유와 민주주의 및 그 헌법을 수호할 수 있는 강력한 대통령과 정부, 국방군(國防軍)을 가진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목숨 내놓고 투쟁할 것.
 
  셋째, 공산당에 맞서 타협 없는 투쟁을 할 것.”
 
 
  이승만, “유 디드 베리 웰”
 
  최인규가 정치에 투신한 것은 아마도 이런 뜻을 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1954년 제3대 총선(민의원 선거) 때 고향인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했다. 광주는 국회의장을 역임한 야당의 거물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의 아성(牙城)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익희에 맞설 대항마를 찾지 못하고 있던 자유당은 최인규가 출마하자 그를 서둘러 영입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익희 2만4000여 표 대(對) 최인규 1만8000여 표. 6000여 표 차이의 참패(慘敗)였다. 경찰과 공무원 조직들이 그를 도왔지만, ‘새파란 애송이가 어디 감히 해공 선생에 맞서 나오느냐?’는 여론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 패인(敗因)이었다.
 
  하지만 이기붕(李起鵬)을 비롯한 자유당 지도부는 ‘거물 신익희’를 상대로 당찬 도전을 한 이 정치 신인(新人)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기붕의 추천으로 UNKRA(유엔한국재건단) 뉴욕사무소 주재관으로 파견되었다. UNKRA 자금으로 하는 물자 구매를 협의, 상담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최인규가 그토록 존경하던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UNKRA 주재관으로 임명되기 전 경무대를 찾았을 때였다.
 
  최인규는 뉴욕에 주재하는 동안 매주 현지 신문에 보도된 국제정세 변동, 미국의 대외정책, 미국 내 여론 등에 대한 기사를 분석, 정리해서 외교 파우치 편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대통령은 “귀관의 보고는 잘 분석, 조직되고, 매우 견문을 넓히는 유익한 보고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귀관 이외는 나의 관심을 환시시켜준 사람이 없었다”고 칭찬하는 내용의 답신을 보내왔다.
 
  최인규가 귀국해서 1956년 1월 1일 신년하례(新年賀禮)를 올리러 경무대를 예방했을 때, 비서가 그를 소개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오, 미스터 최. 유 디드 베리 웰(Oh, Mr. Choi, you did very well).”
 
  이승만 대통령은 최인규와 악수를 나눈 후 다시 “유 디드 베리 웰”를 되다. 최인규는 이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외자청장 거쳐 교통부 장관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칭찬으로만 끝내지 않았다. 그해 1월 4일 최인규를 제2대 외자청장(外資廳長)으로 임명한 것이다. 외국의 원조로 국가 재정을 충당하고 경제가 돌아가던 시절에 외자를 구매, 관리, 처분하는 외자청장 자리는 경제 요직(要職) 중 하나였다.
 
  최인규가 외자청장이 될 무렵, 외자청에 새로운 임무가 부과되었다. 비료 도입, 배급, 관리 업무였다. 당시 전 국민의 70%가 농민이었지만 국내에서는 비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전에는 금융조합에서 이 비료 업무를 담당했지만, 적기(適期)에 도입하지 못하거나 배분 과정에서의 비리(非理)로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비료 업무를 외자청이 책임지라고 지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비료에 대하여 농민으로부터 불평이 있든지, 한 가마니라도 없어지면, 나는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자네를 옥에 가두겠네.”
 
  최인규는 외자청 직원들에게 이승만 대통령의 엄한 말씀을 전하면서 이렇게 훈시했다.
 
  “이 도입 비료는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수입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현 단계에 있어서 원조를 받지 않고는 자립할 수 없는 형편이다.… 원조를 주는 사람도 있는데, 받아서 나누어 먹을 줄도 모르는 국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책에는 안 나오는 얘기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언제까지 미국이 사다 주는 비료에 의존하고 살아야 하는가?”라면서 미국의 원조자금의 일부를 돌려 비료공장 등을 짓자고 나섰다. 미국은 “한국은 목전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면서 반대했지만, 이 대통령은 ‘앞으로 먹고살 거리에 투자해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1959년에 착공, 1961년에 완공된 충주비료공장(1비)이었다. 비료 문제는 호남비료공장(2비), 영남화학(3비), 진해화학(4비) 등이 완공된 박정희 정권 시절에야 해결되었다.
 
  최인규는 UNKRA 및 국회와 마찰을 빚어가면서도 비료의 적기 공급에 성공했다. 또 체불(滯拂)되기 일쑤였던 부두 노동자들의 임금 문제도 잘 해결했다.
 
  외자청장이라는 ‘힘 있는 자리’에 있는 동안 최인규는 고향인 경기도 광주의 여러 민원을 해결해주면서 지역 기반을 다졌다. 오늘날 같으면 구설에 오를 일들도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것들은 별문제가 되지 않을 때였다. 최인규는 1958년 5·2 선거에 출마, 신익희의 아들 신하균에게 압승하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물론 경찰이나 공무원 조직들이 그를 도왔는데, 그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별 가책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국회의원이 된 최인규는 그해 9월 9일 개각(改閣) 때에는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入閣)했다. 교통부 장관 재직 시절 최인규는 업무 중 죽거나 다친 철도노동자들을 위한 재해보상금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언론들은 “한국에서 처음 실시하는 사회보장제도”라면서 이를 대서특필했다. 최인규는 교통부 장관 재직 중 철도 현대화, 산업 철도 신설 등도 추진했다. 자랑 섞인 회고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경력을 쌓아나갔다면 최인규는 경제관료로 대성(大成)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그의 꿈은 재무부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교통부 장관 임명 6개월 만인 1959년 3월 크게 요동친다. 내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내무부 장관
 
1959년 3월 개각 때 입각한 각료들. 맨 오른쪽이 최인규 내무장관.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신현확 부흥부 장관. 사진=조선DB
  당시 내무부 장관은 지금의 행정안전부 장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요직이었다. 외무부 장관에 이어 내각 서열 2위였다(당시에는 국무총리제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전국의 지방행정과 경찰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고, 선거 주무(主務)장관이기도 했다.
 
  때문에 당시 자유당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서는 1년 앞으로 다가온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무부 장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暗鬪)가 치열했다. 결국 자유당을 이끌던 이기붕은 강경파와 온건파 모두 받아들일 수 있으면서도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사람을 찾다가 최인규를 내무부 장관으로 낙점(落點)했다.
 
  1959년 3월 20일 최인규는 후일 국무총리까지 오르는 신현확(申鉉確) 부흥부 장관 등과 함께 장관 임명장을 받았다. 신현확 등도 4·19 후 자유당 정권의 각료였다는 이유로 옥고(獄苦)를 치르기는 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최인규만이 ‘선거 주무장관’인 내무부 장관으로 부정선거를 기획, 실행했다는 죄로 처형됐다.
 
  이미 자유당 정권의 황혼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을까? 최인규는 “외자청장과 교통부 장관에 임명될 때 경험하지 못한 막연한 불안감을 금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최인규의 부인 강인화는 장관이 된 후 최인규는 자주 통성기도를 했다고 한다.
 
  “하나님, 저에게 내무장관직을 주셨습니다. 과연 제가 감당해나갈 수 있는 직분인지 아닌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제 목숨을 뺏어서라도 이 직분을 버리게 해주십시오.”
 
 
  취임 일성으로 “李 대통령에게 충성” 강조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당시 신익희 민주당 후보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인기를 모았으나 선거 유세 중 급서했다. 사진=조선DB
  하지만 일단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하자 최인규는 1960년 3·15 선거 대비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공무원들에게 “우리나라의 원수(元首)이신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고, 그 어른 밑에서 굳게 단결할 것을 요청한다”면서 “공산당이나 야당이 무슨 선동을 하여도 이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길이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는 최선의 길인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고 역설했다.
 
  최인규에게는 하나의 정치적 트라우마가 있었다. 바로 1956년에 있었던 제3대 정·부통령 선거(5·15 정·부통령 선거)였다. 옥중 회고록에서 최인규는 이에 대해 한 장(章)을 할애하고 있다. 이 대목은 선거와 민주주의에 대한 최인규의 인식, 그리고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게 된 최인규의 심리적 기저(基底)를 잘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5·15 정·부통령 선거는, 당시 민주당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세를 올렸으나, 선거 유세 도중인 5월 5일 신익희 후보가 급서(急逝)하는 바람에 이승만 대통령이 3선에 성공했고, 부통령으로는 민주당의 장면(張勉) 후보가 당선된 선거다.
 
  최인규는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에 대해 ‘대한민국 선거사 중 가장 중대하고 위험하였고 비극적인 선거’라고 단언했는데, 그의 지적을 보면 네거티브 공세, 보수 후보의 분열, 언론의 편파 보도 등 이후에도 되풀이되는 우리 선거의 고질(痼疾)이 적지 않다.
 
 
  ‘선거를 통해 나라를 공산당에 넘겨줄 수도…’
 
조봉암 진보당 당수. 사진=조선DB
  5·15 정·부통령 선거와 관련해서 최인규가 가장 고민한 문제는 ‘선거를 통한 체제 전복(顚覆)’ 가능성이었다. 이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546만6870표를, ‘전(前) 공산당원’인 조봉암(曺奉岩) 진보당 후보는 216만3808표를 얻었다. 그리고 신익희 추모표가 185만6818표가 나왔다.
 
  최인규는 6·25전쟁이 끝난 지 3년밖에 안 되었는데, ‘공산당’인 조봉암이 216만여 표를 얻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싸움은 같은 반공보수 진영의 당파싸움이었다. 그러나 조봉암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성질이 다르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은 국군과 유엔군이 피 흘려 찾은 나라다. 이것을 선거라는 방법을 통하여 공산당에 넘겨줄 수 있는가?”라는 고민으로 이어졌다.
 
  논리는 거칠지만, 이것은 사실 심각한 문제 제기다.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나치 독일을 체험했던 전후(戰後) 독일(서독)에서 고민했던 문제이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것이 ‘방어적 민주주의’ 혹은 ‘전투적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자유의 적(敵)에게는 자유를 줄 수 없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를 바탕으로 독일기본법(헌법)은 위헌정당 해산제도, 기본권 실효(失效)제도 등을 두고 있다.
 
  독일뿐이 아니다. 오늘날 베네수엘라, 터키, 폴란드, 헝가리 등에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정권들이 ‘자유를 삭제한 민주주의’, 즉 비자유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는 이름의 권위주의로 체제를 둔갑시키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다. 대한민국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민주정권’을 자처하는 정권이 몇 번 들어서는 사이에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이 엄청나게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최인규는 대통령-부통령 러닝메이트제를 채택하지 않아 대통령과 부통령이 다른 정당에서 나오고 반목하는 현실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장면 부통령 시절을 “대통령은 부통령을 상대도 안 하고, 부통령은 노(老)대통령이 속히 돌아가셔서 자기가 대통령 되기만을 기다리는 불안한 4년”이라고 표현하면서 대통령과 부통령은 절대로 같은 정당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고 회고했다.
 
 
  反共과 민주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전국적 시위는 자유당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사진=조선DB
  문제는 최인규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이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는 데 있다. 최인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지 못하는 자가 내무장관 자리에 앉았으면 나라는 망할 것이다. 아니 그러한 자는 내무장관의 자격이 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평소에 이에 대한 철저한 각오가 없는 자가 불의에 이런 일이 닥치면 손발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5·15 당시 한 걸음 더 나가서 다음과 같은 가상을 하여 보았다. 선거 도중 신익희씨뿐만 아니라 이 박사께서도 서거하시고 조봉암이 단독 후보가 되는 경우, 내가 내무장관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선거법대로 투표하고 개표하여 그가 당선되었다고 발표할 것인가, 내가 법에 의하여 벌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투표함을 없애버리고 선거를 다시 하도록 할 것인가?”
 
  여기서 3·15 부정선거로 가는 길이 열린 셈이다. 최인규도 “이 박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으면 한국은 공산화될 수밖에 없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3·15 선거에 임한 것이 결과적으로 국가와 민족에게 비극을 안겨주게 되었다”고 인정했다.
 
  최인규는 국회에서 서범석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물론 반공과 민주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반공과 민주가 동일 보조를 취하기 어려울 때 나는 반공이 우선하여야 된다고 믿는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영·미·불 같은 민주국가에서도 전시(戰時)국방을 위하여 자유와 민주주의의 제한을 하는 것이 이런 이유다.”
 
  최인규의 옥중 회고록은 그 뒤 1959년 6월 5일 있었던 인제와 영덕군 재선거에 대해 서술하다가 갑자기 끝나버린다. 그에게 옥중 회고록을 쓰라고 권했던 군사정부가 갑자기 그를 처형해버렸기 때문이다.
 
  최인규의 부인 강인화는 “그해 12월 21일 그 자서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3·15 선거의 내막이 밝혀질 대목에서 남편은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면서 “3·15 부정선거의 제일 중요한 핵심인 4할 사전투표, 9인조·3인조 공개투표, 참관인 매수 등의 부정선거 방법을 창안, 지시했다는 죄명의 대목은 형 집행으로 인하여 그 내용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채 영원히 잠들게 되었다”며 안타까워했다. 다만 최인규 본인은 옥중 회고록에서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 당시의 군수·서장이 모두 생존하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런 지령을 받은 자는 현상모집을 하여도 없을 것이다”라며 자신에게 부과된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책임
 
  옥중 회고록에서 미처 쓰지 못한 부분은 부인 강인화의 회고와 법원의 재판기록을 통해 복원하는 수밖에 없다.
 
  최인규는 1960년 3·15 선거가 끝난 후, 전부터 결심했던 대로 사표를 냈다. 그는 장관직을 벗어던지고 국회의원으로서 자기 소신대로 일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이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이어지다가 급기야 서울에서도 4·19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최인규 밑에서 일했던 이성우 전 내무차관과 이강학 전 치안국장이 집으로 찾아와 부인 강인화에게 “동해안 쪽으로 배를 하나 준비해가지고 해외로 가시도록 말씀드려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강인화가 조심스럽게 이 말을 전하자 최인규는 별안간 아내의 뺨을 때렸다. 최인규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가 자기가 저질러놓은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마당에 어디로 도망가느냐?”
 
  시위대가 장충동의 자택 앞으로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최인규는 그들 앞에 나가서 자신의 과오와 소신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맞아 죽겠다고 했다. 아내와 누이는 그를 억지로 지프에 태워 집을 떠났다. 10분 후 시위대가 들이닥쳐 그의 집을 불태웠다.
 

  5월 초 최인규는 서울지방검찰청에 자진 출두했다. 재판의 근거가 된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은 4·19 참여자 및 그 유가족들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소급법(遡及法)이었다. 재판정에서 최인규는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태도로 일관했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5·16으로 들어선 군사정부의 혁명재판소도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강인화는 최인규를 존경하는 형무관(교도관)의 도움을 받아 남편을 탈옥(脫獄)시키려는 계획을 꾸몄다. 그러고 최인규를 면회하는 자리에서 그 내용을 적은 쪽지를 비밀리에 전했다. 다음 날 아내와 만난 자리에서 최인규는 벼락처럼 소리를 질렀다.
 
  “왜 당신은 나의 마음도 모르고 이렇게 바보스러운 일을 하느냐? 나는 이 세상에서 당신만은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줄 것으로 믿고 마음 든든히 생각하고 있는데, 이제 내 얼굴에 똥칠을 할 셈이냐?”
 
  이후 최인규는 앞에서 말한 대로 중앙정보부 간부의 권유에 따라 옥중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다가 1961년 12월 21일 처형당했다.
 
 
  공무원 및 그 가족 상대 선거운동도 불법
 
  4·19를 야기한 3·15 부정선거 수괴(首魁)의 옥중 회고록은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권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괴물이 아니라 아내에게 다정하고, 신앙심 깊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고, 애국심 강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젊은 공직자의 모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최인규를 부정선거의 수괴로 처단한 혁명재판소의 판결문이 첨부되어 있어, 보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최인규와 3·15 부정선거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혁명재판소 판결문에 나타난 최인규의 부정선거 행태는 ▲공무원 및 그 가족들에게 이승만 지지 지시 ▲경찰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상대로 부정선거 모의 ▲자유당으로부터 부정선거 실행 자금 수령 ▲3·15 선거 당일 투표 조작 지휘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판결문에 의하면, 1959년 3월 21일 내무부 장관 취임 연설에서 내무부 전체 공무원을 향하여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 있어서는 자유당 후보자가 기필코 당선토록 선거운동을 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한 최인규는 이를 위해 먼저 내무부 산하 공무원들에 대한 ‘정신교육’에 들어갔다.
 
  최인규는 1959년 4월~1960년 3월 월초(月初)에 1회씩 거행되는 내무부 월례(月例)조회 석상에서 내무부 전체 공무원에게 앞과 동일한 내용의 지시를 되풀이했다.
 
  최인규는 또 1959년 6월경~11월경 서울, 인천, 수원, 광주, 대전, 청주, 춘천, 인제, 전주, 광주(光州), 담양, 대구, 부산, 진주, 산청, 함양, 제주 등지를 순회하면서 각 시·도·군청 회의실 또는 공설운동장 및 극장 등에서 각기 군·시 공무원 50명 내지 6000명을 집합시켜놓고 30분~1시간30분에 걸쳐 앞과 동일한 내용의 지시를 했다.
 
  더 나아가 최인규는 동료 국무위원들과 모의, 공무원친목회 및 공무원가족친목회를 만들어 공무원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 자유당을 위한 선거운동에 동원하려 획책했다. 판결문은 당시 정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59년 3월 말 내지 4월 초경 오전 중 중앙청 내 국무회의 석상에서 당시 국무위원인 법무부 장관 홍진기, 농림부 장관 이근직, 국방부 장관 김정렬, 체신부 장관 곽의영, 교통부 장관 김일환 및 내무부 장관인 피고인(최인규-기자 주) 등 6인으로 구성되었던 소위 6인 위원회에 전체 공무원 및 그 가족들을 선거에 동원할 것을 제의하여 동인(同人) 등의 합의를 얻은 후 같은 장소에서 개최된 전체 국무회의에서 최종적인 합의를 얻어 국무위원 전원과 공동으로 전국적으로 각 동·시·읍·면 단위로 같은 해 4, 5월 중에 공무원친목회를, 같은 해 10월경에 공무원가족친목회를 조직게 하여 매월 1회씩 회합도록 하고, 각 관할 경찰서 사찰계(지금의 정보계-기자 주) 형사 및 동·시·읍·면장 등이 주동이 되어 전국 각지의 각급 공무원 10여만 명 및 그 가족에 대하여 자유당 입후보자의 당선을 위한 선거운동을 하게 하는 한편, 그들로 하여금 공무원 이외의 유권자에 대하여 각종 방법으로 자유당 입후보자를 위한 선거운동을 하게 하고…>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는다”
 
  3·15 선거가 다가오면서 최인규는 전국 경찰 간부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직접 장관실로 불러 부정선거를 독려했다. 판결문을 보자.
 
  <1959년 11월 28일경부터 같은 해 12월 20일경까지, 1960년 1월 초순경부터 같은 해 2월 하순경까지 사이에 거의 매일같이 오전 8시경부터 오전 11시경까지 전국 각 시·도 경찰국장, 사찰과장, 경찰서장 및 군수·시장·구청장 등을 지역적으로 구분하여 30, 40회에 걸쳐 매일 10명 내지 20명 정도씩 내무부에 소환하여 동일 군(시 또는 구) 내의 경찰서장과 군수(시장 또는 구청장)를 동시에 2명씩 또는 당일 소환된 전원을 일시에 내무부 장관실에 초치하여 대체로 피고인 이성우(내무부 차관-기자 주), 이강학(치안국장), 최병환(지방국장) 및 당시의 특정(特情)과장 이상국 입회하에 “여하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놓고 보아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국가대업 수행을 위하여 지시하는 것이니 군수·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전제한 다음 (가) 전출자(轉出者)·자연 기권자·매수(買收) 기권자들의 표(票)의 활용 (나) 3인조·9인조를 이용한 공개투표 (다) 완장부대의 동원 (라) 민주당 참관인의 매수 등 부정선거의 기본요강을 지시한 다음, 그 방법의 세부에 대하여서는 치안국장 및 지방국장의 지시를 받으라고 명하고…>
 
  최인규는 이와 함께 경찰 간부 및 지방자치단체장들을 확실하게 장악해 부정선거에 동원하기 위해 이들에게 미리 사표를 받았다.
 
  <전기(前記) 지령의 실행을 확보하기 위하여 부정선거 지령을 계획대로 실천하지 못할 때에는 언제든지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할 목적으로 앞의 지령을 할 때에 각 도 지사·경찰국장·군수·시장·구청장·경찰서장·사찰과장 등에게 사표를 제출할 것을 명하고, 그 명에 의하여 이성우(내무차관)·이강학(치안국장)·최병환(지방국장)은 앞의 지위에 있는 자들로부터 사표를 받음으로써 앞의 지위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부정선거 지령을 이천(履踐·실천)하게 하고…>
 
 
  3·15 선거 당일 투표 조작 지휘
 
  부정선거에는 돈이 필요했다. 이 돈은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이 산업은행을 동원해 마련했다. 판결문에 의하면 최인규는 1960년 2월 24일 이강학 치안국장과 함께 자유당 총무위원장 박용익과 만나 전국 경찰서를 자유당 입후보자의 선거운동에 이용할 목적으로 선거자금 11억1000만환(?)을 경찰에 교부하기로 합의했다. 다음 날 내무차관 이성우와 치안국장 이강학은 김영찬 산업은행 총재로부터 해당 자금을 받아 전국 경찰에 나눠줬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3·15 부정선거 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기상천외한 부정을 저질렀다. 그 결과 판결문에 의하면, 중간개표 결과 야도(野都)로 유명하던 경북 대구(당시는 대구가 경북에 속해 있었음)의 한 개표구(開票區)에서는 자유당 후보 이기붕이 5000표를 얻은 반면, 민주당 후보 장면은 32표밖에 나오지 않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그와 같은 득표율로 자유당 입후보자가 승리하게 될 경우 부정선거가 감행됐다는 것을 국내외에 폭로하는 결과가 될 것’을 우려한 자유당은 부랴부랴 자당(自黨) 후보자의 ‘득표율 삭감’에 나섰다.
 
  자유당 선거대책위원장 한희석으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은 최인규는 경비전화로 직접 경북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유당 입후보자의 득표율을 이승만 80%,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삭감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내렸다. 이강학 치안국장, 최병환 지방국장도 최인규로부터 지시를 받아 다른 지역에 하달했다.
 
 
  역사의 준엄한 경고
 
1961년 7월 열린 최인규 등의 재판에는 이를 지켜보려는 방청인들이 몰려들었다. 사진=조선DB
  판결문의 내용을 보면, 최인규의 범죄 사실은 분명하다. ‘민주적 선거에 의해 체제가 전복될 수도 있다’는 그의 고민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선택한 부정선거라는 방법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한,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일이었다. 최인규는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때 조봉암이 216만여 표를 얻은 것이 ‘반공국가로서의 체면’을 손상케 했다고 개탄했지만, 3·15 부정선거와 그 이후의 유혈사태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국가로서의 체면’은 말할 수 없이 손상당했다. 부정선거의 후과(後果)로 건국 대통령은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망명 아닌 망명길에 올라 이역(異域) 땅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4·19 후에도 군사혁명과 쿠데타, 그리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反)정부운동이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반정부 세력은 반체제 세력으로 둔갑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반공민주정당이었던 민주당의 맥을 이은 야당에 똬리를 튼 그들은 세 차례 집권하면서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속에서부터 허물어뜨리고 있다. 최인규가 그토록 고민했던 문제가 결국 현실화된 것이다.
 
  결국 최인규의 충성은 그의 본심이야 어떻든 국가에 두고두고 해악(害惡)을 가져온 ‘잘못된 충성’이었던 셈이다. 이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내무부에 선거관리를 맡겼다가 3·15 부정선거와 4·19라는 사변(事變)을 겪은 후 헌법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규정했다. 선관위는 4·19의 자식인 셈이다. 문재인(文在寅) 정권은 그 중앙선관위를 자기들의 수족 역할을 할 사람을 보내서 장악했다. 선관위가 그동안 저질러 온 코미디 같은 편파 행정은 여기서 굳이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문재인 정권은 임기를 다한 상임위원을 변칙적인 방법으로 비상임위원으로 임명, 계속해서 선관위를 장악하려고 획책했다. 다행히 선관위 조직 전체가 들고일어나 저항하는 바람에 그런 시도는 무산(霧散)되고 말았다. 그즈음 선관위 내부에서 터져 나온 “선관위가 과연 헌법기관으로 존재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 신뢰 잃으면 개헌 때 행안부 선거관리과와 지자체로 찢어질 것”이라는 목소리는 더이상 정권의 주구(走狗) 노릇을 할 수 없다는 선관위 구성원들의 절박감을 잘 보여준다. 선관위가 그런 결기를 잃지 말고 이번 대선을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관리해주기를 기원할 뿐이다.
 
  최인규를 죽음으로 몰고 간 부정선거의 여러 행태, 특히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위반, 경찰의 부정선거 개입, 국공영 기업체를 통한 선거자금 염출 등은 모양만 조금씩 달리할 뿐 아직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이미 62년 전에 부정선거에 맞서 피 흘리며 싸웠고, 부정선거의 책임자를 교수대(絞首臺)에 세웠던 국민이다. 최인규의 비극은 부정선거를 저지를 경우, 그 당사자도 정권도 무사할 수 없고, 그로 인한 후과는 두고두고 국가에 큰 후유증을 남긴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는 집권 세력이나 선거관리에 임하는 이들이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준엄한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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