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준비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軍 동원 카드로 과격시위를 잠재우고, 盧泰愚가 직선제를 수용하도록 압박하려는 陽動전술이었다.
- 광주 민주화운동이 진압된 후 전남도청 앞으로 進駐한 계엄군. 1980년 광주에서의 경험은 1987년 전두환 대통령과 군부의 행동을 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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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 1~5: 1987년 6월 19일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전국적 규모의 비상계엄령을 준비, 세부지침을 軍에 하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 문서와 ‘출동부대 소요진압 작전간 행동 지침’ 문서. |
비상계엄령 준비 명령 문서 확인 |
우리는, 1987년 6월 19일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전국적 규모의 비상계엄령을 준비, 세부지침을 군(軍)에 하달한 사실을 문서로 확인하였다. 전두환 전(前) 대통령의 회고록과 당시 측근들의 증언을 통해 군을 동원한 비상조치가 검토됐다는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등장했지만 문서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급 비밀로 분류된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은 6월 19일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 명의로 출동부대에 내려갔다. 임무란에는 “육군은 현 임무를 수행하면서 ’87. 6. . 시부로 소요진압 작전을 실시한다”고 적혀 있다. 작전명령은 출동부대에 대한 배속 명령으로 이어진다. 역사적 문서이므로 우선 원문(原文)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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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 1~5: 1987년 6월 19일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전국적 규모의 비상계엄령을 준비, 세부지침을 軍에 하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육군본부의 작전명령 문서. |
발신: 육군 참모총장
수신: 수신처 참조
주무: 작전처장(국장, 부장)
작상전 제 호
제목: 작전명령 제87-4호
1. 관련 근거
2. 위 관련 근거에 의거 아래와 같이 작전명령 제87-4호를 지시함(보고, 통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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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서울, 용산(CS 2155)
’87. 6. 19.
작전명령 제87-4호
1. 상황
2. 임무
육군은 현 임무를 수행하면서 ’87. 6. . 시부로 소요진압 작전을 실시한다.
3. 실시
가. 작전개념
(1) 육군은 ’87. 6. . 시부로 소요진압 작전에 가용한 부대를 다음과 같이 배속한다.(별첨, 전투편성참조)
(가) 26사단, 3특전여단, 해병 2개 연대를 11군단에 배속
(나) 9사단을 9군단에 배속
(다) 7, 11특전여단을 31사단에 배속
(라) 706특공연대를 39사단에 배속
(마) 20사단, 30사단, 1, 5, 9특전여단, 701, 705, 708특공연대를 수방사에 배속
(2) 소요진압 작전은 명에 의거 실시한다
(3) 전, 후방 경계부대는 ’87. 6. . 시부로 진도개 “둘”과 동일한 경계태세를 유지한다
나. 제1군사령부
(1) 현행 임무 계속 수행
(2) 책임지역 내 소요 확산 예방 및 의명 소요진압 작전 실시
다. 제2군사령부
배속: 26, 9사단, 3, 7, 11특전여단, 해병 2개 연대, 706특공연대
(1) 11군단장을 부산, 경남지구, 9군단장을 충남북 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
(2) 26사단, 3특전여단, 해병 2개 연대를 11군단에 배속하여 부산 지역에서 운용
(3) 7, 11특전여단을 31사단에 배속하여 광주 지역에서 운용
(4) 9사단을 9군단에 배속하여 대전 지역에서 운용
(5) 706특공연대를 39사단에 배속하여 마산 지역에서 운용
(6) 201특공여단을 50사단에 배속하여 대구 지역에서 운용
라. 제3군사령부
(1) 현행 임무 계속 수행
(2) 책임지역 내 소요 확산 예방 및 의명 소요진압 작전 실시
(3) 26, 9사단, 706특공연대를 2군에 배속 전환
(4) 20, 30사단, 701, 705, 708특공연대를 수방사에 배속 전환
(5) 수도기계화 사단: 육군 예비

마. 수도방위사령부
배속: 1, 5, 9특전여단, 701, 705특공연대, 20, 30사단
(1) 현행 임무 계속 수행
(2) 의명 충정 작전 실시
바. 특전사령부
(1) 현행 임무 계속 수행
(2) 3, 7, 11특전여단을 2군에 배속
(3) 1, 5, 9특전여단을 수방사에 배속
(4) 특전사(-6): 육군 예비
사. 제1항공 여단(-)
(1) 육군 예비
(2) 의명 소요진압 작전 실시
아. 기타부대
(1) 현행 임무 계속 수행
(2) 화학, 통신, 군수지원부대: 소요진압 작전 지원 준비 철저
자. 육군 예비
(1) 특전사(-6)
(2) 1항공여단(-)
(3) 수도기계화사단

차. 협조지시
(1) 일 개시: 추후지시
(2) 전 부대는 ’87. 6. . 시부로 진도개 “둘”과 동일한 경계태세를 유지(해제 및 강화되는 경우는 추가 지시함)
(3) 이동부대는 출발 시 보고 철저
(4) 출동 전 정신교육 및 세부 진압 요령 교육 철저
(5) 세부 작전 지침
(가) 탄약휴대: 대(對)침투 작전 휴대 탄약 기준 적용
(나) 식량휴대: 비상식량 3일분 휴대
(다) 군은 중요시설 점령 경계를 원칙으로 하고, 시가지 작전은 경찰 병력을 최대 활용
(라) 가스탄 발사 등 폭도의 전투의지를 약화시킨 후 진압봉 사용
(마) 투입 시 경계대책 강구
(바) 고립 및 분리 시 대책 수립
(사) 발포 명령은 선(先) 육본 건의 후, 승인하 조치
(아) 총기 유기 및 피탈 방지 대책 강구
(자) 초기에 강력하고 완벽한 작전 실시
(차) 철저한 진압 및 도주 시 추적 강조
(카) 관계기관, 특히 경찰과의 유기적인 협조
(타) 부대 이동 간 작전명령 변동사항에 유의
(파) 진압작전의 정당성 입증 자료를 확보(사진, VTR 등)
(하) 작전 중지 시 즉각 복귀계획 수립
(거) 기간 중 능력 범위 내에서 대민(對民) 선무활동 실시
(너) 공공시설 사용 시 파손 및 오염 방지
4. 전투 근무지원: 현행 규정 참조
5. 지휘 및 통신: 현행 규정 참조
출발과 동시 부대 문지 제거
수령 후 보고
참모총장 대장 박희도
주무관 작전참모부장 소장 이문석〉
출동 명령은 내려가지 않았다!
이 문서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그 전날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부산 등 주요 도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군대를 투입한다.
*부산, 마산, 광주, 대구, 대전을 집중적으로 통제한다.
*병력 출동 및 배속을 준비하고 있다가 명령이 내려가면 즉각 실천에 옮긴다.
*문서가 급조된 듯, 질서가 없다. 대구, 광주는 계엄령 대상인지 위수령인지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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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부대 소요진압 작전간 행동 지침. |
이 문서와 함께 하달된 또 하나의 문서가 있다. ‘출동부대 소요진압 작전간 행동 지침(出動部隊 騷擾鎭壓 作戰間 行動 指針)’이라는 문서다. 이를 읽어보면 1980년 광주사태를 많이 의식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행동 지침 첫 쪽에는 “과거 시위 양상을 기준으로 행동 지침을 작성하였기 때문에 현 소요 사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에는 다소 미흡”하다는 내용이 있다. ‘진압부대에게 음식물 또는 꽃, 리본 제공 등 진압의지 약화 기도에 대한 대비책이 별무(別無)하며 언론인과 성직자 접촉에 대한 세부 행동 지침이 수립되어 있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재야 및 시위권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출동부대 장병들의 진압의지 약화를 획책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과격 분자들이 자해행위 후 진압부대에 책임전가 및 여론 호도 또는 시위의 과격화 유도가 예상된다”고 했다.
행동 지침으로는 “소요 군중 및 시민과 일체의 대화 및 접촉을 금지하고 묵묵히 행동만으로 실천, 성가(聖歌)·애국가 제창 및 각종 유언비어 유포 시 일체의 감정표시 및 부화뇌동 금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진압 과정에서는 “시위군중 타격 시 두부 및 급소 부위 타격을 금지하고 하퇴부를 타격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부녀자, 노약자에 대한 구타 및 욕설 등 시위군중 흥분 유발 행위를 금지하고 화학탄 발사 시 직격탄에 의한 시위군중 피해를 방지하라” “해산 및 도주군중 추격 및 구타를 금지하고 시위군중 체포 시 민간인 직접 신문을 금지하고 경찰에 인계하라” “성직자, 여성 연행 시 몸 접촉을 최대한 지양하고 손목 잡고 연행하라” “기자들의 시위 진압 장면 사진 촬영을 최대한 억제하라. 필요 시 카메라를 회수하고 차후 반환하라(필름은 회수 조치)”고 적혀 있다.

이 문서를 받은 사람 중 한 분은 당시 특전사령관 민병돈 예비역 중장(육사 교장 역임)이다. 민 사령관은 계엄령 준비 명령을 접하자 ‘오늘 잘못하다간 나라가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부하 장교들을 시위 현장에 보내 보고받은 상황은 군대가 출동해도 막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는 육사 15기 동기생인 고명승 국군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요지의 충고를 했다고 한다.
“군대가 나오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사태 수습이 안 된다. 장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동요하고 있다. 군대가 진압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렇게 되면 전두환 대통령도 불행해진다. 이 말을 꼭 대통령을 만나 전해주고 나에게 알려다오. 누가 한 말이냐고 물으면 민병돈이라고 해라.”
몇 시간 뒤 고명승 사령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대로 전 대통령에게 전했다”는 것이었다. 민 장군이 “반응이 어땠어”라고 했더니, 고 사령관은 “(전 대통령은) 싱긋이 웃으면서, ‘알았으니 가봐’라고 하더군”이라고 대답했다. 다음 날 새벽에 출동 명령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이 계엄령 계획을 실천에 옮기진 않았다. 그날 광화문 일대의 언론과 관가(官街)에선 ‘오늘 밤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반정부 기자로 찍혀 해직된 적이 있었던 필자(조갑제)는 ‘계엄령이 내리면 맨 먼저 기자들부터 손볼 터인데 어디로 피신해야 하나’는 생각을 하면서 밤을 보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날 비상계엄령 준비는 전두환의 심리전(心理戰)이었다.
군대를 동원하면 1988년 서울올림픽도, 평화적 정부 이양도 어렵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한편으론 군 출동계획을 지시하고, 다른 편으론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설득하고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취임할 때 나는 내 임기 중에는 어떠한 위기가 닥쳐도 그것이 외부의 공격이 아닌 한 결코 군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국내 소요 사태에 군을 동원하는 순간 5공화국의 명예는 그것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날 나의 병력 출동 명령은 어디까지나 양동전술(陽動戰術)이었다. 올림픽 때문에 내가 결코 군대를 동원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서 상황을 극한으로 몰아가고 있는 세력에게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망설이고 있는 노태우 대표로 하여금 파국에 이르기 전에 나의 결심대로 직선제를 조속히 수용하도록 결단하라고 촉구하는 뜻이었다. 일석이조(一石二鳥)를 노린 양면(兩面) 동시 공격이었던 것이다.〉
“둘째 놈이 자고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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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당시 명동성당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를 하는 가톨릭 사제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명동성당에 가서 시위대를 직접 설득해보려 했다”고 회고했다. |
6월 10일부터 전국적으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번지고, 일반 시민까지 합세하고 있었다. 전 대통령은 6월 14일 새벽에는 시위대가 농성 중인 명동성당에 직접 들어가려 했다. 학생들을 만나 설득하려 했는데 둘째 아들이 이를 막았다는 대목도 육성 증언에 담겨 있다.
전 대통령은 이런 이야기를 6월 17일 측근들에게 소개한다. 저녁 7시20분부터 9시30분까지 안가(安家)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만찬을 함께 했다.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 이춘구(李春九) 민정당 사무총장, 이치호(李致浩)·현경대(玄敬大) 의원, 박영수(朴英秀) 비서실장, 안현태(安賢泰) 경호실장, 김윤환(金潤煥) 정무1, 이종률(李鍾律) 공보 수석비서관 등도 함께했다.
〈일요일 새벽 한 시 반쯤 일어나서 옷을 입고 침실에서 나왔어. 둘째 놈이 안 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나를 보고 ‘어디 가시느냐’고 물어. 내가 ‘명동성당에 가려고 한다’고 했더니 ‘아버지 앉아서 말씀해보시라’고, ‘명동성당에 왜 가시려 하느냐’고 물어.
내 말이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성당에 있는 신부, 성직자들한테 야단을 쳐서 자기네가 종교인으로서 정당한 활동을 하도록 주의를 주고, 둘째는 내 말을 들을지 안 들을지 모르지만 학생들한테 훈시도 하고 꾸지람도 해서 돌려보내려고 한다. 위험도 있겠지. 혹시 어떤 위험이 일어나도 나를 구출한다는 명분이 생기지 않겠느냐. 오늘 밤에 내가 이 일을 해버리려고 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둘째 아이의 말이 ‘다른 분들과 상의를 해보셨느냐’고 물어. 그래서 안 했다고 했어. ‘그러면 거기서 아버지가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외국에서 볼 때 나라 체면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해. 내 체면이야 어떻든 나라 체면이라? ‘전 세계 매스컴에 뉴스로 나올 텐데 국가원수로서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한 잔 마시지요’라면서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한 잔 가지고 왔어. 그러면서 ‘다시 생각하시라’고 해.
할아버지가 손자한테서도 배운다고 하는데 ‘나라 체면이라…. 그래 위기도 아닌데 그렇게 하면 경솔한 짓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안 갔어요.
그래서 날이 샌 다음 날 아침에 안보 장관과 군 지휘관들을 오라고 했었어. 둘째 놈이 그 시간에 자고 있었더라면 내가 경호실장을 오라고 해서 바로 명동성당에 갔을 것이고 내가 경호실장이 말려도 안 들었을 거야. 그러면 일이 벌어졌을 거야.〉
이날 모임을 옆에서 지켜본 김성익씨는 이렇게 정리했다.
〈이 시점은 전 대통령이 이미 직선제를 수용하기로 결심을 하고 나서 노 대표를 설득하고 있는 단계로서 그런 태도 변화를, 다른 참석자들에 대한 보안을 의식, 완곡한 어법으로 표시한 것이다. 6·10사태에서 나타난 민의를 며칠 후에 발표되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수용으로 풀어나가기로, 전 대통령과 노 대표 사이에서 깊은 논의를 통해 그 방향을 잡아가던 결단의 전야(前夜)이기도 했다.〉
전 대통령은 이날 만찬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께서는 나보다 정말 훌륭한 분이다.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노 후보, 이 나라를 구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분이 노 대표시다. 오늘은 좋은 날, 내 다음 대통령 후보 모시고 한 잔 먹는 날 아니냐. 나보다 이분이 더 권력이 세다. 나는 8개월 남았는데 무슨 권력이 있겠어.”
전두환 대통령은 ‘떠나가는 김삿갓’ ‘애수의 소야곡’을 불렀다.
〈죽장에 삿갓 쓰고 떠나가는 전 삿갓(두 번 노 대표와 합창)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 떠나가는 전 삿갓 전 삿갓 / 전 삿갓은 떠나고 노 삿갓이 들어오는 거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 눈물로 달래보는 / 구슬픈 이 밤 / 고요히 창문 열고 별빛을 보니 /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소리.(박수)〉
그 다음 날인 6월 18일 재야 세력은 그날을 ‘최루탄 추방결의의 날’로 정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특히 부산 지역에서 격렬했다. 5만명 이상이 시내 중심부를 6시간 동안 장악, 자정을 넘어 19일 새벽 3시까지 시청을 위협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대구에서는 시위 학생들이 파출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날 하루에만 전국에서 19개소의 파출소가 불에 타거나 파괴됐다. 대통령은 19일 오전 8시 반 집무실에서 군을 동원해서라도 빨리 진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받고 오전 10시 반 군 고위 간부들을 소집했다.
디데이: 20일 04:00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준비를 내밀하게 진행시키는 한편 개헌 촉구시위가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고 격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응책을 강구해야 했다. 비상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낌새를 비쳐야 하는 것이다. 이날 오전 10시30분 군 관계자들을 소집해서 비상조치를 전제로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디데이와 시간까지 정해줬다. 20일 04:00였다.〉
6월 19일 오전 10시 반 전 대통령은 안기부장, 국방장관, 3군 참모총장, 수방사령관, 보안사령관 등 군 고위 관계자들을 청와대 집무실로 소집, 비상조치를 전제로 한 군병력 배치 계획을 결정하고 시달했다.
〈(전국의 지역별 비상시 병력배치 계획에 관한 보고와 서울 지역의 병력배치 계획에 관한 보고를 들은 뒤)
대통령: 한미연합사령부에 통보해야 될 사단의 이동은 통보하라. 통보 안 해도 되는 사단은 하지 말고. 대전과 대구에 1개 사단을 내려보내고 2개 여단은 전남·광주로 돌려라. 부산은 1개 사단과 1개 연대를 보내서 1차로 부산과 대구, 마산의 시위 사태를 진압해야겠어. 서울은 4개 연대를 배치해서 주요 대학에 배치하도록 해. 군에 가스탄은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가.
이기백(李基百) 국방부 장관: 20일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풀 가동을 지시했습니다.
대통령: 대학교는 휴업령을 내리면 될 거고 방학기간이므로 학부모들께는 알리는 조치를 해야 돼.
내일 새벽 4시까지 전부 진입하도록 해야 돼요. 학교에 아무도 없을 때를 택해서 들어가고 농성자들은 검거하고. 농성, 데모의 배후 연계 사항을 밝혀서 그 뿌리를 1, 2개월 안으로 뽑아야 합니다.
이것은 계엄선포가 아니라 비상조치입니다. 계엄령에다 플러스 알파를 하는 게 비상조치야. 군부 동원도 할 수 있고 군법회의도 할 수 있고 정당 해산까지도 가능해요. 안기부 등에서 준비가 다 돼 있지. 지금 학원사태는 중앙의 지휘부가 두뇌전을 하고 있어. 좌경 세력들은 정부가 손 놓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고 사기가 오르고 있는 것 같아.
안무혁 안기부장: 데모 학생들에 대한 작전은 6월 25일까지는 끝낸다는 계획입니다. 학생 간부들은 부산을 거점으로 하려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10·26이 부산에서 일어났어요. 4·19도 대구, 마산, 부산, 서울, 호남으로 파급되었고, 부산·마산·대구의 이 영남 일대 삼각형이 문제야. 일차적으로 경찰이 검거를 맡도록 해야 돼요.
안기부장: 부산은 학생들이 나오면 구경하는 시민들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경찰 병력이 모자라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모여서 시내로 가는 게 아니라 시내에서 바로 모이고 있습니다.
대통령: 그러면 부산에는 군병력을 투입하면서 통금 조치를 할 필요가 있어요. 부산은 내일 새벽 4시까지 군병력을 보내도록 해요.〉
밝은 표정의 대통령
당초 계획은 밤 8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비상조치권을 발동하는 절차를 밟고 9시 생방송을 통해 비상조치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김성익씨는 “사태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라며 “그러나 군 핵심 간부들과의 회의에서 전 대통령의 표정에는 긴장감이나 무거운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명랑하다고 할 정도로 활기가 있었다”고 했다.
당시 비상조치가 실천될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는 또 하나 있다. 전 대통령은 군 핵심 간부들과의 회의가 끝난 뒤인 오후 2시에 릴리 주한 미국대사를 만났다. 비상조치를 강행할 생각이었다면 조치 이후로 만남을 연기, 즉 미국이 이를 눈치채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릴리 대사는 청와대에 와서 전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 대한 회신을 전달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군부대가 출동하여…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전 대통령은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나는 항상 정치문제는 정치적 대화로 풀어가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전 대통령은 릴리 대사와 만난 직후인 오후 4시경 출동 명령을 취소했다. 이 때문에 릴리 대사가 계엄령 선포를 막았다는 설(說)이 돌았다.
노태우 대통령의 회고록에도 군 동원이 검토되던 6월 18~19일의 긴박한 상황이 담겨 있다. 그는 당시의 현행 헌법하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직선제로 가고 김대중씨를 사면·복권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는 군 출동 준비 지시가 내려졌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盧 “모든 직위 걸고라도 軍 출동 막겠다 결심”
〈6월 18일 자정에 전 대통령이 고명승 국군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20일 새벽 4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위수령 발동을 전제로 한 군 출동 준비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청와대로부터 직접 통보를 받지는 못했으나 국방부와 군 쪽에서 알려준 내용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만일 이번 사태에 군을 동원한다면 이 정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성심 강한 군 간부들도 군이 출동하면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 동원된 군이 누구 편에 서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라인에 있는 이기백 국방장관, 안무혁 안기부장, 권복경(權福慶) 치안본부장 등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군의 출동만은 불가(不可)하다는 점을 건의해달라고 했다. 특히 권 치안본부장의 손을 잡고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해결해야 군 출동을 막을 수 있다”고 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전 대통령이 끝까지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나의 모든 직위를 걸고서라도 군 출동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다행히 6월 19일 오후 전 대통령은 이기백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군 출동을 유보시켰다.〉
김성익씨의 관찰은 이렇다.
〈전 대통령은 집권 말기인 86년 하반기부터 비상조치나 군부 동원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다. 정국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86년 말에는 실제로 비상조치권 발동에 관한 일부의 건의를 받고 검토를 시킨 일도 있었다.
87년에 접어들어 정부 여당이 밀리는 상황으로 나가면서 각종 회합에서 비상조치를 언급하는 횟수는 더욱 빈번해지는 것을 목격했다. 전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자신의 속을 털어놓을 상대에게는 군부 동원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확실히 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심리전술을 통치에 원용,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군부 동원의 실감을 줄 수 있다는 계산 아래 힘을 과시하려는, 바둑으로 말하면 ‘사석작전(捨石作戰)’ 같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전 대통령 자신은 퇴임 후 이때의 상황을 언급, “나는 이미 극적인 방안을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 동원 지시는 별개 문제였다”면서 “군 동원 지시는 치안 차원에서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서 예방적 효과도 감안해서 지시한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극적 조치’는 물론 직선제 수용과 김대중씨 사면·복권을 가리킨다.〉
“전두환이 먼저 직선제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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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표를 대선 후보로 확정한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함께 손을 잡고 인사하는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표. 두 사람은 6·29선언으로 가는 과정에서 역할분담을 하고 협조했다. |
전두환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6월 17일 오전,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어 있던 노태우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직선제를 수용할 것을 제안했다면서, 노 대표는 직선제 개헌을 선택할 경우 후보직을 사퇴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적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비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군대를 동원하는 일을 끝까지 피하고 싶다며 노 대표를 설득했다고 한다. “비상조치를 취하게 되면 경제에도 악영향을 주고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도 장애요인이 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직선제로 해도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사례를 들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는 것이다.
6월 17일은 전 대통령과 노 대표가 청와대에서 저녁을 함께 하며 ‘떠나가는 김삿갓’을 합창한 날이다. 김성익씨는 이렇게 기록했다.
〈노 대표가 참석자들에게 백성이 원하는 바를 초점으로 하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말한 것은 전 대통령과 노 대표 사이에 참석자들이 그 내용을 모르는 어떤 얘기가 별도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직선제 수용에 관한 얘기였다. 이 모임이 시작되기 전 대통령은 노 대표위원과 따로 비밀리에 만나 얘기를 나눈 뒤 다른 참석자들보다 늦게 이 자리에 나타났다.〉
노태우, 전두환의 제안 수용하다!
저녁 만찬이 끝나고 노 대표는 연희동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집 앞에서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언론에서 하자는 대로 해야겠지. 그게 바로 국민들의 뜻일 테니까”라고 했다. 그러곤 박철언(朴哲彦) 안기부장 특보를 집으로 불렀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결심을 했다. 직선제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에 관한 모든 준비를 해달라”고 말했다. 독자적으로 직선제 결심을 내렸다는 것인데 전 대통령의 회고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전 대통령은 6월 19일에도 청와대에서 노 대표를 비밀리에 만나 직선제를 논의했다고 했다. 이날 노 대표는 직선제를 수용하겠다면서 “그런데 제가 직선제 수용을 포함한 민주화 조치를 건의 드리면 각하께서는 크게 노해서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욱 효과가 있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 대통령은 6월 22일 노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이런 제의를 거절했다고 썼다. “세상에 비밀이 없는데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면 그 선언의 진정성과 가치가 훼손될 수 있으며 나는 민주화 조치를 끝까지 반대한 사람으로 영원히 낙인찍히는 결과가 될 것 아닌가”라고 했다. 노 대표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회고록에는 6월 24일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당의 신뢰도나 노 대표가 쌓아 올린 이미지로 보아 직선제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이기지 않겠소”라며 직선제에 대한 의중을 떠봤다고 했다. 그는 선뜻 수긍하지 않은 채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했다고 한다. 전 대통령의 태도가 자주 바뀌어왔으므로 이번에도 직선제를 한다고 했다가 번복하게 되면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전 대통령의 결심을 굳히게끔 하기 위해 반어법을 썼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박철언 특보가 6월 18일부터 이미 직선제 수용 관련 선언문 기초 작업에 들어갔고 자신으로부터 두 차례 보완 지시를 받은 상황이었다고 했다. 즉 직선제를 직접 추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철언 특보는 5공과 6공의 비사(秘史)를 담은 책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2005년에 냈다. 이 책에 따르면 노 대표는 6월 23일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를 집으로 불러 전 대통령이 먼저 직선제를 제의했다는 얘기를 꺼내놨다. 노 대표는 “사태 수습을 위해 그 길밖에 없다고 하면서 난국 타개에 자신감을 잃은 듯하더라. 처음에는 반대 의견을 얘기했으나 결심이 강한 듯해서 오늘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김대중은 사면·복권하고 구속자도 석방해야 한다고 내가 주장했다”고 했다. 박철언 특보는 이날 이후부터 직선제 등 종합 시국 수습 방안을 마련하는 세부 작업에 들어갔다고 했다.
6월 27일 全-盧 회동의 진실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주장이 엇갈리는 부분은 계속된다. 6월 29일을 앞두고 노 대표가 선언문 내용을 청와대와 미리 공유했는지 여부이다.
우선 전 대통령은 6월 27일 노 대표가 직접 청와대를 찾아와 6·29선언 보고서 내용을 전달했다고 했다. “극적인 발표 직전의 만남이어서 이날의 회동은 청와대 본관과 떨어진 별관에서 오후 2시에 이뤄졌고 노 대표는 중앙청 서문에서 내가 보낸 청와대 차량으로 바꿔 타고 왔다”고 했다. 이 자리엔 아들 재국씨가 동석했다. 전 대통령은 “최종 결론이 났으니 최대한 보안을 유지해야 한다. 따라서 청와대나 안가에도 일절 오지 말고 예상치 못한 급한 일이 생기면 우리 큰애를 통해 서면으로 상호 연락을 하도록 하라”고 했다. 또한 이날 “노 대표는 자필로 써서 준비해온 발표문을 낭독한 뒤 공식 발표 이후 자신이 취할 일련의 행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했다.
김성익 비서관 역시 6·29선언의 실무작업은 노 대표팀에 의해 약 2주일에 걸쳐 이뤄졌다고 했다. “이 2주일간 전 대통령과 노 대표와의 비밀회동은 6월 17일 청와대 대식당, 6월 19일 오후 5시 청와대 별관, 6월 24일 오후 7시 청와대 별관, 6월 27일 오후 2시 청와대 별관 등에서 네 차례 있었고 서면 연락과 전화 통화가 수시로 있었다. 막바지 회동에는 전 대통령의 장남이 배석해 기록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일부 보도에는 내가 발표 문안을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서 협의를 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6월 24일 이후 6·29선언 때까지 나는 청와대에 올라간 일이 없었다”고 했다. “선언 직전 주말인 6월 27일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어도 올라가지 않았다. 중대 선언이 금명간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아 기자들이 집 앞에 진을 쳐 움직일 수도 없었다. 선언 내용을 청와대에 보낸 일도 없다”고 했다.
“역사가 큰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한 충격”
전두환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6월 28일 김성익 비서관에게 노태우 대표가 보고한 내용을 설명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 비서관은 “선언 발표 주체가 전 대통령이 돼야지 왜 공(功)을 모두 노 대표에게 넘기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발표는 노 대표를 부각시키고 중단 없는 국가 중흥을 위해 내 신념을 담보로 택한 나의 마지막 카드이자 선택이다. 나는 이 민주 발전을 위한 선택이 얽히고설킨 모든 것을 풀고 국가의 밝은 미래를 열고 올림픽을 성공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빌 뿐이다. 내가 역사에 남고 안 남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노 대표를 띄워서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가도록 하자. 나는 국민으로부터 칭송받지 못하더라도 노 대표가 부각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다.〉
전 대통령은 “다음 정권을 힘으로 만들면 올림픽도 못 치르고 그러면 역사의 큰 호기를 놓친다”고 했다. “공천을 놓고 파벌끼리 싸우는 게 야당 생리 아니냐”며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직선제를 받는 것은 야당과 언론의 급소를 찌르자는 거야”라고 했다. 김성익씨는 “이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으며 직선제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자신 있는 태도를 보였다”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역사의 시나리오를 짜는 사람으로서 대통령의 큰 힘과 역할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날 “역사가 큰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한 충격과 흥분으로 잠시 멍멍해졌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청와대의 몇몇 비서관이 ‘어떻게 이것을 노 대표 단독으로 하게 합니까? 합작품 내지는 전 대통령 각하의 작품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건의했다고 한다”며 “그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청와대에 오라는) 전 대통령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박철언 특보는 “누가 먼저 직선제 수용을 주장했든 또는 어떤 참모가 직선제 얘기를 먼저 꺼내었든 그것은 ‘6·29선언의 주역’ 다툼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기존의 제도에 따른 손쉬운 방법의 집권 기회가 보장돼 있는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국민의 뜻에 따라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떳떳하게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나선 데 있다”며 “당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 사람은 바로 노태우 대표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