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世一의 비교 評傳 (39)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모스크바 極東民族大會와 임시정부의 衰退

  • :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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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하여,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한국독립운동자들의 관심은 1922년 1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極東民族大會로 쏠렸다. 이 대회에는 참석자의 3분의 1이 넘는 56명의 한국대표가 참석했다. 金九는 新韓靑年黨의 대표적 인물인 金奎植과 呂運亨의 대회 참가에 반대하여 新韓靑年黨을 탈당했다.
 
  臨時政府는 공산당의 金立이 모스크바資金을 독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정부자금 횡령」이라고 성토했고, 金九는 옛 제자들을 시켜 金立을 총살했다.
 
  李承晩은 워싱턴會議가 끝나자 동포들을 위로하고 자금지원을 얻기 위해 40일 동안 미국 본토를 순방했다.
 
  臨時政府는 盧伯麟을 제외한 모든 각원들이 총사직하고,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마침내 臨時議政院은 논란 끝에 李承晩과 閣員들에 대한 「不信任」을 결의했다.
 
 
  1. 모스크바 極東民族大會의 韓國代表團
 
 
  1922년 새해가 되자 李承晩은 국무원과 임시의정원에 새해의 행정방침과 재정방침을 통보하는 공함을 발표했다. 그 공함에서 그는 워싱턴회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초로 우리의 결심하는 우리 광복사업은 어디까지나 우리 손으로 귀정내자 하였나니 어찌 남을 의뢰하리오마는, 당초에 태평양회의가 소집할 때에 원동문제를 해결한다 한 바 한국과 중국이 다 원동문제의 주요한 바인 고로 우리 문제가 이 회에 다소간 제출될 줄을 믿은지라.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건대 중국은 그 회석에 참가하고도 원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야 섭섭히 돌아서며, 우리는 참가권도 아직 얻지 못한지라. 그런즉 태평양회의가 배포한 목적을 아직 행치 못하였도다.
 
  우리에게 사사로이 표하는 동정은 더욱 친밀하며, 혹은 말하되 한국문제가 조만간 제출된다 하며, 비밀회의에서는 한국문제가 수차 발론되었다 하니, 우리의 요구하는 말한 바대로만 반포하여 달라하야 아직도 우리는 기다리고 바라는 중이외다.
 
  그러나 우리의 스스로 위로할 만한 것은 우리 대표단과 위원부 일동은 우리 처지에 앉아서 정당히 할 수 있는 것은 다 진행하였나니, 기왕에 한국문제를 찬동하는 친구들이 더욱 많이 알고 동정하야 돕기 원하는 자 더욱 많이 생겼으며, 겸하야 이 일로 인연하야 일인의 야심을 새로 깨달았으매, 일인의 선전이 더욱 무력하여지는지라. 이것이 우리의 실상 소득이라 하겠도다.…〉
 
 
 
 워싱턴會議는 끝나지 않아
 
  그리고 그는 국내에서 보내온 「태평양회의서」가 한국독립운동이 소수의 해외 한국인들의 선동일 뿐이라는 일본인의 선전의 허위성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각국인의 이목을 놀라게 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 내지 청원서를 번역 발간할 즈음에 우리의 요구서를 태평양 회의에 발송하였는데, 그 요구서 뒤에 이 사건을 설명하였더니, 일인대표단은 변론하되 이것이 다 소수 한국인의 수작한 말이오 실상은 아니라 한지라. 모모국 대표들이 사석에 앉아서 우리 중 한인을 개인으로 청하야 문답한 말은 심히 재미로우나 아직 공포할 수 없으며, 일인은 나중까지 이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는지라. 우리가 마침내 그 본문을 공포하였나니, 이것이 우리 한족의 충애와 담량을 표시함이라. 내지 동포들이 곤욕당할 것이 염려이나 그들이 원하는 뜻을 소상히 들은 후에 행하였으며, 애국자들의 희생적 마음과 정신을 우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케 하는도다.…〉
 
  李承晩은 이어 대표단의 활동비를 제공해 준 미주, 하와이, 멕시코 동포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그러고 나서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태평양회의가 다시 모일는지 아니 모일는지 모르나, 원동문제로 국제에 제출된 것은 지금 시작이라. 우리는 이것이 다 끝막난 것인 줄로 알아서는 실수라 할지니, 마땅히 조금씩이라도 준비하야 이렇듯 창졸 미비한 탄식이 없게 하는 것이 가하며, 겸하야 우리 교민들의 경제 곤란을 생각 아니할 수 없도다.
 
  임시정부와 위원부는 유지하여야 될지니, 정부 경상비는 내지와 원동 각지에서 다 도우려니와 오늘 형편으로는 다소간 미주, 하와이, 멕시코 교민의 원조가 아니면 어찌될 수 없을지라. 그러므로 위원부 경비를 감하야 최소액으로 마련하야 매삭 1,057달러이오 상해에 소불하 1,000달러를 보내어야 능히 정부의 위신을 보전할 뿐 아니라 전체를 보전하겠으며 …〉1)
 
   이러한 방침에 따라 1922년도 「예산가정표」를 작성하여 발표했다.
 
  그는 이 예산표를 발표하면서 미국 본토, 하와이, 멕시코 등지의 동포들이 평균 수입의 2%를 정부에 대한 세금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뜩이나 미국경제의 공황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데다가 기대를 걸었던 워싱턴회의가 무위로 끝나는 상황에서 李承晩의 이러한 요구는 실현성이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李承晩은 워싱턴회의에 대한 청원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는 종전대로 유지하고 「코리아 리뷰」도 계속 발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徐載弼은 獨立運動에서 손 떼기로
 
  그러나 워싱턴회의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徐載弼은 李承晩과 달리 회의가 끝나자 약속대로 구미위원장직도 사임하고 「코리아 리뷰」도 폐간하며, 한국친우회 활동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회의성과에 대해서는 李承晩보다도 더욱 높이 평가했다.
 
  〈이번 회의에 인하여 한국은 비록 직접으로 이익을 받은 것은 없으나 중국과 시베리아를 위하여 성취한 바는 결국은 한국에도 이익이 될지라. 또 이번 회의에서 한국문제가 거론치 아니한 것은 우선 중국을 구하여 내며 또 일본으로 하여금 일본이 인방에 대하여 여러 가지 부당한 일을 한 것을 열강 앞에서 시인케 하고 그런 후에 차츰 시기를 기다려 다른 문제들도 그와 같은 외교적 수단으로 체결코저 함이라.…
 
  우리가 이 회의에서 직접으로 아무 이익을 얻지 못함은 당장에는 다소간 실망이 되지마는 그러나 전체상으로는 우리는 이번 회의로 말미암아 상당한 기회를 세운 줄로 생각하노라.〉2)
 
  그러나 구미위원부에 대해서는 서재필도, 워싱턴회의가 끝나면 존속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말을 바꾸어, 될 수 있는 대로 유지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약소민족의 암흑시대가 도래했다』
 
  워싱턴회의에 대한 李承晩이나 서재필의 이러한 평가는 자신들의 활동성과를 강조하고자 한 데서 나온 것이기는 했으나 일반 동포들의 그것과는 너무나 동뜬 것이었다. 「獨立新聞」의 다음과 같은 논평은 워싱턴회의의 결과에 대한 독립운동자들의 실망과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4국협상이 성립되다. 지구의 표리를 4대강국이 꼭 붙잡아 놓았으니까 이제부터 몇 해는 전쟁도 없겠다. 따라서 군비 위해 돈도 덜 들겠다―― 이렇게 기뻐하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한편에는 당초부터 워싱턴회의에 신용을 두지 않는 무리가 있었으니, 강권주의와 자본주의의 정체를 아는 자, 미국의 본체를 아는 자는 워싱턴회의가 강국의 세계분할회의인 것을 안 것이라. 그러나 또 어떤 약소민족 중에는 「美國」이라는 명사에 혹하여 무슨 수나 날까 한 자도 있었다. 강권이 변하야 정의가 될까 하였다. 그 꿈은 일조에 파괴되었다. 그 실망은 파리시대보다도 더 심한 것이 있다(기대하는 것이 더욱 많았던 까닭에) …
 
  아아! 우리는 약소민족의 암흑시대가 눈앞에 이름을 자각하노라. 피압박계급과 민족의 강권계급에 대하야 악전고투할 시대가 이르름을 각오하노라. …〉3)
 
  샌프란시스코의 「新韓民報」도 박영로의 기명기사로 〈이후 우리가 운동할 곳은 파리도 아니고 워싱턴도 아니다. 곧 시베리아와 만주이다. 우리 조국이 가깝고 우리 동족이 많은 원동이다. … 우리의 배운 재주도 거기서 써야 하고 우리의 모든 돈도 거기다 던져야 한다. … 「구미위원부통신」을 본즉 이대통령께서는 근일에 와서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하여야 한다 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워싱턴에 오래 계실 양으로 예산서를 꾸며 발표한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해석할 수 없는 정책이다〉 하고 1월4일에 발표한 李承晩의 신년행정방침과 예산가정표를 비난했다.4)
 
 
 
 韓國은 世界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
 
  「獨立新聞」이나 「新韓民報」의 워싱턴회의 결과에 대한 논평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열리는 극동민족대회에 쏠린 한국독립운동자들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극동근로자대회, 제1회 극동공산주의단체 및 혁명단체 대회, 제1회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 이 회의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제2차대회(1920년 7월19일~8월7일)에서 채택된 「민족-식민지 문제 테제」에 따라 1920년 9월에 아제르바이잔의 바쿠(Baku)에서 열린 동방민족대회의 후속회의였다. 그것은 극동 여러 나라의 혁명세력의 결집과 공산당의 조직을 촉진하고, 자본주의 열강을 교란하는 전략을 토의하기 위하여 열린 회의였다. 또한 이 회의는 1921년 8월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워싱턴회의에 대항하는 뜻에서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워싱턴회의와 때를 같이하여 1921년 11월11일에 이르쿠츠크에서 개회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무렵에 코민테른이 극동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전략과 관련하여 한국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었던가는 이 대회의 소집을 결정한 코민테른 제3차 대회(1921년 6월22일~7월12일)의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아일랜드인 한국은 한국의 지주, 배신자, 밀정들을 이용한 일본제국주의자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지고 있다. 아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나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형리가 한국의 주민으로부터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및 경제적인 인권마저 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에서는 일본제국주의자에 반대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는 참으로 강력한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비록 이 운동이 약간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특히 공산주의자는 이것을 환영해야 한다. 한국인이 그들의 민족적 독립을 달성한다면, 일본제국주의는 그것에 의하여 현저하게 약화될 것이며, 극동, 특히 한국 및 일본에서의 혁명운동은 현저하게 강화될 것이다.〉5)
 
 
 
 金萬謙 등이 極東民族大會 참가자 선정
 
   대회소집을 주관한 것은 1921년 1월에 이르쿠츠크에 설립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였다. 극동비서부 안에는 민족별 지부가 조직되어 있었다. 1921년 11월 현재 고려부, 중국부, 일본부, 몽골-티베트부의 4개 지부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할 한국인 대표자의 선정은 극동비서부 고려부가 주관했다. 이 기관은 1921년 5월에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통칭 이르쿠츠크派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6) 이르쿠츠크派 고려공산당은 국내 공작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앙위원회의 소재지를 북경으로 옮겼다가 1921년 10월에는 임시정부의 소재지이며 여러 독립운동단체의 활동 근거지인 상해로 다시 옮겼다. 그러므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할 대표자 선정은 바로 상해에서 이루어졌고, 가장 많은 대표자들이 선정된 곳도 상해였다.
 
  상해에서는 9개 단체대표로 16명이 선정되었다. 고려공산당 간부들은 여러 가지 배려에서 인선을 했을 것이나, 선정된 단체나 인물 가운데에는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단체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呂運亨, 趙東祜, 崔昌植 등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대표 6명, 상해지부의 權愛羅, 고려공산청년회 대표 金丹冶(김단야) 등 공산주의 단체에서 8명의 위임장이 발급되고, 신한청년당의 金奎植, 독립신문사의 金承學과 林元根, 華東한국학생연합회의 金尙德과 鄭光好, 대한애국부인회의 鄭守貞, 二八구락부의 羅容均, 조선예수교대표회의 玄楯의 위임장이 각각 발급되었다.7)
 
 
 
 玄楯은 지도급 목사 6명의 서명 받아 참가
 
  비공산주의 단체 대표로 선정된 사람 가운데 주목되는 인물은 李承晩에 의해 구미위원장 대리에서 해임된 뒤에 하와이를 거쳐서 상해에 와 있던 현순이었다. 그가 자필로 쓴 조사표에 따르면 그는 金秉祚, 孫貞道 등 상해에 있던 지도급 목사 6명이 서명한 조선예수교대표회의 위임장을 발부받았다.8) 현순의 위임장에 서명한 사람들은 모두 상해 한인교회를 주도하고 있던 목사들이라는 점에서 이무렵 상해에 있던 기독교인들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현순은 자신의 소속단체를 「상해공산당」이라고 기입했다.9) 현순 가족들의 공산주의와의 기구한 인연은 이때에 시작된 것이다.
 
  이팔구락부 대표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던 나용균의 다음과 같은 회고에서 대표선정 당시의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1921년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라는 것이 있었고, 이것에 대항하기 위하여 레닌이 모스크바에서 동방피압박자대회라는 것을 소집했는데, 우리 상해에서도 대내적으로 파벌이 생겨 난관에 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회에 대표를 보내어 소련의 원조라도 받아 임시정부를 좀더 키워 보자는 생각으로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이 우리가 가게 된 것이다. 그때 일부는 모스크바에서 205원씩 여비가 와가지고 하얼빈으로 갔는데, 김규식, 여운형과 나, 이렇게 셋은 북경 장가구를 거치고 몽골을 통해서 가게 되었다.〉10)
 
  한편 이 무렵에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재정 담당자였던 金綴洙는 상해파가 대표단 선정에서 배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김규식·여운형·나용균·김상덕·정광호·장덕진의 여비를 제공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11) 나용균이 그 대표로 참가한 이팔구락부는 상해에 있던 동경유학생 출신들의 모임이었는데, 김철수는 이팔구락부의 간사장이었다.
 
  이르쿠츠크에서는 대표적인 독립군 지도자인 洪範圖를 비롯하여 10명의 대표가 선정되었고, 그밖에 국내와 서간도, 일본 등지에서 여러 대표들이 참가했다.12)
 
 
 
 新韓靑年黨이 分裂되어
 
  극동민족대회의 소집은 상해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큰 분란을 야기시켰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상해 한인사회에서 3·1 운동 이전부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여 온 新韓靑年黨의 분열과 해체였다. 신한청년당에는 경무국장 金九를 포함하여 교통총장 孫貞道, 학무총장 대리 金仁全, 재무차장 李裕弼,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한 趙尙燮, 상해민단장을 지냈고 李承晩의 상해 통신원인 임시의정원 의원 張鵬 등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많이 가입되어 있었다. 신한청년당은 태평양회의 후원회 활동에 열성적이었고, 워싱턴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921년 11월7일에는 美 국무장관 휴즈(Charles E. Hughes)에게 편지를 보내어 회의 참가국들이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었다(「月刊朝鮮」 2005년 5월호, 「李承晩, 워싱턴군축회의에 한국대표단장으로 가다」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 당의 핵심인물인 김규식과 여운형이 신한청년당과 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되었고, 미국에서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규식이 코민테른이 소집한 공산주의자들의 대회에 참가한다는 것은 상해 정국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와 구미위원부 활동에서 느낀 실망이 그로 하여금 러시아행을 결심하게 했을 것으로 짐작되나,13) 그의 이러한 결심은 미국과 서유럽제국을 상대로 한 외교독립론에 실망한 독립운동자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의 모스크바행에 반대하여 이유필·조상섭·김병조·손정도는 신한청년당을 탈당했다.14) 金九도 극동민족대회에 대해서 반대 입장이었다. 일찍이 李東輝의 공산당 입당 권유를 거부하며 그를 질책했던 金九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자 金仁全·張鵬·都寅權·安定根·崔明植 등과 함께 탈당했고, 뒤이어 李奎瑞·金偉宅·申昌熙 등도 탈당했다.15) 그리하여 신한청년당은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여운형은 김만겸으로부터 대회참석 통지를 받았고, 그를 도와 한국대표와 상해에서 출발하는 일본·중국·몽골·자바 등 다른 민족대표들을 위해 여권 수속 등 대회참가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주선했다.16)
 
 
 
 上海派의 朴鎭淳은 호텔에서 쫓겨나
 
  출발일이 늦어지고 신변안전과 관련된 여행코스의 선택 등의 문제로 한국대표들은 한 사람도 회의 개최 예정일인 11월11일 이전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지 못했다. 여행코스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만주를 통과하는 철도편이고, 다른 하나는 몽골을 횡단하는 코스였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신변안전이 위험한 철도편 대신 몽골을 횡단하는 코스를 택했다. 다른 나라 대표들도 도착이 늦어져서 대회는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12월 하순에 이르러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로부터 대회 개최지가 모스크바로 바뀌었다는 연락이 왔다. 여운형이 그의 회상기에서 〈건설기에 들어선 새 러시아의 발랄한 공기를 충분히 호흡할 기회가 주어진 데 대해 가슴 벅찬 감흥을 느꼈다. 모스크바! 레닌이 살고 있는 곳, 신흥 러시아의 ○○○지도자들을 눈앞에 볼 수 있는 모스크바!〉17)하고 감격해 하면서 적고 있는 데서 보듯이, 대부분의 한국대표들은 개최지가 변경된 것이 오히려 크게 기뻤다. 그들은 다른 나라 대표들과 함께 코민테른이 마련한 특별열차편으로 이르쿠츠크를 출발하여 1922년 1월7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러나 1921년 6월에 발생한 비극적인 자유시참변의 여파로 이르쿠츠크派 고려공산당과 상해派 고려공산당 사이의 알력은 극도로 심화되어 있었으므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할 대표선정에서도 상해派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朴鎭淳, 李克魯와 함께 1921년 9월에 모스크바에 도착한 李東輝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등을 방문하고 이르쿠츠크派와 그 지원자인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슈미야스키의 「불법활동과 공공연한 전횡」을 비판하고, 레닌도 면담했다. 이동휘는 코민테른의 지시대로 兩派의 연합을 위한 연합중앙간부(兩派에서 4명씩 8명)를 구성하고 이르쿠츠크로 갔으나, 이르쿠츠크派와의 타협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지 않았고, 자신의 대표로 모스크바에 주재시키고 있던 박진순도 대회참가를 저지당하고 각국 대표들이 묵고 있는 코민테른의 럭스 호텔(Lux Hotel)에서도 쫓겨나고 말았다.18) 결국 상해파는 모스크바의 유학생들과 노동자 대표 4명을 포함한 7명의 대표를 대회에 참가시키는 데 만족해야 했다.19)
 
  극동민족대회는 1922년 1월21일부터 2월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회의장소는 크레믈린 궁전이었다. 대회자격심사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이 대회에 참가한 대표자는 모두 9개국에서 온 144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한국대표가 52명으로 전체 참가자의 3분의 1이 넘었다. 참가국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였다. 대회가 끝날 무렵에는 한국대표자는 56명으로 늘어났다. 한국대표 다음으로는 중국대표 42명, 일본대표 16명, 몽골대표 14명 순이었고, 인도에서는 2명이 참석했다.
 
 
 
 大會 첫날 金奎植이 演說
 
   대회 첫날 의장단 16명이 선출되었다. 한국대표로는 김규식과 여운형이 선출되었다. 김규식은 한국대표로 연단에 올라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그는 모스크바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중심지로서 극동 피압박민족의 대표자를 환영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워싱턴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이 대회는 세계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 준비단계라고 역설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동지 여러분! 우리 앞에는 대단히 큰 전투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극동의 피압박 인민과 혁명조직은 함께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장래의 운동을 함께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계획을 세워야 되겠습니까. 제국주의자에 의하여 그 국경의 모든 지점에서 소비에트 공화국에 가해진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 소비에트 공화국이 보여 준 용기와 역량을 우리가 이 대회에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나의 희망이며, 분명히 모든 사람들의 희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양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른바 세계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진압하고 타도할 강력한 힘이 되어 일어서도록, 그 지식을 극동 중의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대회로부터 세계의 모든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적 체제를 잿더미로 돌려 버릴 불을 러시아의 운동에서 얻기를 바랍니다. 나는 전 대표단의 이름으로 이 극동의 혁명적 인민대회에 다음과 같은 원망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이 위대한 운동의 보루이며 지도세력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만세! 세계제국주의와 세계자본주의를 철저하게 타도하기 위한 극동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서양의 프롤레타리아트, 나아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단합된 투쟁 만세!」』20)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과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청원외교를 벌였던 크리스찬 김규식은 이제 이처럼 놀라운 변신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한국대표단의 공통적인 인식이었을 것이다. 김규식은 이 회의에 이르쿠츠크派 고려공산당의 「후보당원」이라고 등록했다.
 
 
 
 레닌은 臨時政府 후원하라고 지시
 
   극동민족대회는 모두 12회의 본회의가 열려, 1) 국제정세와 워싱턴회의의 결과 2) 각국 정세보고 3) 민족-식민지문제와 그것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태도 4) 선언의 네 가지 주요 의제가 토의되었다.
 
  「국제정세와 워싱턴회의의 결과」를 보고한 코민테른 집행위원장 지노비예프(Grigory Y. Zinovyev)는 워싱턴 회의에서 4개국조약이 체결된 것은 「네 마리 흡혈귀의 동맹」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해방운동의 일부 활동적인 멤버들조차도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무언가 한국문제가 명료해지는 결과가 뒤따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워싱턴에 희망을 걸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일어났습니까. 마치 지구상에 한국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마치 한국의 존재를 들어본 적도 없는 열강이 워싱턴에 모인 것처럼, 「한국」이라는 단어는 워싱턴회의에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마도 누가 더 한국을 억압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 신사들이 무대 뒤에서 의견을 교환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한국 인민이 무언가 교훈이 필요하다면, 그때에는 워싱턴에서의 침묵이 준 것 이상으로 납득이 가는 교훈을 그들은 얻을 수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21)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의 운동방향과 관련하여 매우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본 대회는 모든 한국의 혁명가에게 유럽이나 미국의 선진적인 혁명적 노동자와의 긴밀한 동맹에 의하지 않는 다른 방법으로 한국의 민족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의 미련을 그들 자신으로부터도, 인민으로부터도 단호히 불식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독자적인 신조에 관계없이, 성의 있는 형제적인 방법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들은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제국주의자와 협정을 성립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어떤 타협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22)
 
  이러한 지노비예프의 연설에서 표명된 코민테른의 한국문제에 대한 기본정책은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에서 구체적으로 표명되었다.
 
  대회에서는 한국문제에 관하여 세 가지 보고가 있었다. 1) 워싱턴회의와 그것의 한국에 대한 관계, 2) 한국의 혁명운동, 3) 한국의 경제 및 농민 노동자의 상태와 노동자 농민 대중의 운동이 그것이었다. 이 세 가지 보고서는 본회의에 제출되기 전에 한국대표자들로 구성된 민족별 분과회의에서 토의되었는데, 이들 보고서의 초안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고려부가 주관하여 작성한 것이었다.23)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도 분과회의에서 채택되었을 것인데, 「회의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운형의 「경찰신문조서」에 의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한국에는 아직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또 계급의식이 유치하므로 계급운동은 시기상조이며, 한국은 농업국으로서 일반대중은 민족운동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운동자는 독립운동을 후원 지지해야 한다.
 
  2) 상해 임시정부는 명칭만 너무 과대하고 실력이 이에 따르지 않고 있으므로 임시정부의 조직을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밖에도 레닌은 일본에서의 무산계급은 의회운동을 표어로 삼고,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손잡고 그 운동을 추진하며, 한국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후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시했다고 한다.24)
 
 
 
 『한국의 革命集團은 붉게 물들고 있다』
 
  그것은 대회에 제출된 장문의 「한국의 혁명운동」이라는 보고서의 다음과 같은 마무리말로도 확인된다.
 
  〈한국의 혁명집단이 급격히 붉게 물들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아직도 임시정부를 그들의 중앙조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친미분자와 종교―특히 기독교 신자―가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의 힘은 그 젊은 역사, 그 조직, 그 직원을 가진 임시정부 때문에 그렇게 빨리 쇠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에서 한결 지적인 분자가 독립운동에 관하여 그들의 방법을 변경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고려공산당의 정책은 첫째로 나아갈 단계로서 제국주의 열강의 착취에 대하여 한국인 대중을 통일된 입장으로 결집하는 일이며, 한국 인민의 순수한 해방을 위하여 노력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주요한 목적을 가지고 고려공산당은 전 한국혁명운동의 통일을 가능한 한 원조하기로 결정했다.〉
 
  말하자면, 한국혁명의 첫 번째 단계는 제국주의 열강의 착취에 대한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한국인민의 〈순수한〉 해방, 곧 계급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그러면서 보고서는 이러한 목표를 실천하는 수단이 이미 취해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고려공산당은 모든 여러 가지 분자를 조화롭고 통일된, 그리고 포괄적인 중앙혁명지도기관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저마다의 대표를 국민선거위원회에 집결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그룹의 현재의 운동과 직접 간접으로 협동하고 있다. 지금 말한 위원회를 소집할 준비에 착수하기 위하여 여러 지방으로부터 온 대표들로 구성된 조직위원회가 현재 상해에 있다.〉25)
 
  보고서에서 말하는 「국민선거위원회」란 상해에서 추진되고 있는 국민대표대회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상해에 구성되어 있는 「조직위원회」란 국민대표회 주비위원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를 대회에서 발표한 사람도 김규식이었다.26)
 
 
 
 玄楯은 폐회연설에서 美國批判
 
  극동민족대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에 1월30일에서 2월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제1회 극동혁명청년대회가 열렸다. 민족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청년단체 대표 70명이 회의에 참가했는데, 한국에서는 상해 고려공산청년회 서기 김단야, 「獨立新聞」 대표로 간 임원근, 서울의 조선청년연합회 대표로 간 李茂 등 8개 청년단체 대표 21명이 참가했다.
 
  극동민족대회의 마지막 날인 2월2일의 회의는 장소를 페테르그라드로 옮겨 페테르그라드 소비에트와 공동주최로 우리츠키 궁전에서 열렸다. 대회는 「선언」과 2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폐회했다. 폐회에 즈음하여 한국대표단을 대표하여 현순이 연설했다. 그는 워싱턴회의는 극동인민을 착취하고 억압하기 위한 제국주의자들의 단결이었고, 이 대회는 동양과 서양의 단결이자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단결이라고 역설했다.27)
 
  극동민족대회는 코민테른이 워싱턴회의에 대항하여 그것이 갖는 모순점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개최한 것인데, 워싱턴회의와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가 아시아지역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취한 대응 가운데에서 가장 대조적이었던 것이 바로 한국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워싱턴회의가 한국문제를 전혀 무시했던 것에 비하여 모스크바대회가 한국의 독립문제를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그것을 위한 한일 간의 협력의 필요성까지 시사한 것은, 한국대표들로 하여금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연대의 필요성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절감하게 했을 것이다.28)
 
  대회가 폐막된 뒤에 각국 대표단은 모스크바를 떠났다. 한국대표단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함께 이르쿠츠크로 돌아왔다가 거기에서부터는 몇 사람씩 짝을 지어 개별적으로 행동해야 했다. 상해에서 출발한 대표자들은 거의 3월 초순에서 하순에 걸쳐 돌아왔다.29)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영국공산당기관지에 「아시아혁명운동과 제국주의」라는 영문논문을 기고하여〈미국은 「이타적」 및 「민주주의적」인 가면을 쓰고 흡혈귀와 같은 세 나라와 무서운 4국조약을 맺은 워싱턴회의에서 그 가면을 벗어 던졌다〉30)라고 미국을 비판한 김규식은 최창식과 함께 몽골을 거쳐서 6월17일에야 상해로 돌아왔다.31)
 
 
  2. 獨立運動 分裂시킨 모스크바資金
 
 
  상해 정국에는 워싱턴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풍파가 휘몰아 닥쳤다. 이제 임시정부는 그 명맥조차 유지하기 어렵게 되고 있었다. 국무총리대리 申圭植이 워싱턴회의가 끝나기 전인 1921년 12월19일에 李承晩에게 〈정부 변경 음모 있소. 만일 우리가 있어서 유지 못하면 어찌 작정할지 곧 지시하시오〉32)라고 절망적인 전보를 치고 있는 것이 상황의 심각성을 짐작하게 한다.
 
  신규식이 말하는 「정부 변경 음모」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거의 1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국민대표회 소집 주동자들의 움직임을 새삼스럽게 지칭한 것같지는 않다.
 
  이때부터 임시정부 각원들 및 임시의정원과 李承晩 사이에 빈번히 전보가 오갔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李承晩의 전보철에는 1922년 전반기에 주고받은 전문이 압도적으로 많다.
 
 
 
 閣員들이 연명으로 總辭職 통보
 
  1922년에 접어들자 임시정부에서는 신규식, 李始榮, 申翼熙, 金仁全, 趙琬九, 尹琦燮이 연명으로 총사직하겠다면서 李承晩에게 동반사직을 권고하는 전보를 쳤다.
 
  〈두 번 전보는 보셨을 듯. 미경(美京 : 워싱턴) 외교에 인심 실망. 불량배는 이를 기회로 삼아 정부 요동운동 시작하오. 유지 진행할 실력 없은즉 대국과 우리 신분과 장래 위하야 총사직함이 제일 필요하므로 우리는 정했소. 각하도 일치하거던 사직서를 국회에 전보로 내시오. 이리하면 우리 전도와 국민공론이 있겠소이다. 악배 죄악과 소수 소위 국민대표회 불가함과 우리 고충을 총사직서와 같이 선포하라고 전보로 답하시오.〉33)
 
  내무총장 李東寧의 이름이 빠진 것은 그는 몇 달 전부터 칭병하고 항주로 내려가서 상해에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대표회 소집 주동자들과 구별하여 지칭하고 있는 「불량배」나 「악배」란 아마도 金立 등의 상해파 고려공산당 그룹을 지칭한 것같다.
 
  李承晩은 각원들의 사직을 만류하는 전보를 쳤으나, 각원들의 태도는 단호했다.
 
  〈전보 받았소이다. 우리는 이 전보로 총사직하오. 이유는 이러하오. 무재무능하야 대업 진전 못 하고 악배 징치 못함이오. 결코 다른 까닭 없소. 의회 소집은 2월8일로 정하였소.〉34)
 
  李承晩은 마침내 자기도 사직하겠다고 배수의 진을 쳤다. 그러나 워싱턴회의가 폐회하기 전에는 공포하지 말고, 후임자가 정해질 때까지 시무하라고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미국, 하와이, 멕시코 민심은 정부 유지하려 하나 총사직하면 나도 같이 하리니, 내 사면장을 의정원에 제출해 주시오. 미경회 폐회 전에 선포하면 우리 책망. 이삼 주야 후에 선포함이 가하오. 제공의 고충을 다 양해니 시비할 이 없으나 난국이 될 것을 보고 일어나기도 차마 할 수 없으니 후임자 내기까지 시무하게 하시오. 의정원에 대통령 공함, 위원부 예산표, 공채표 보고 지난 주일에 갔소.〉35)
 
  李承晩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에 그를 뒷받침해 주는 것은 역시 하와이 동포들이었다. 하와이 교민단장 閔瓚鎬는 1월20일에 임시정부로 1000달러를 송금하고 나서 이튿날 李承晩에게 〈내지 동포 충성 잊지 마시오. 사면하심 불가하오. 힘껏 해갑시다〉라고 타전했다.36) 李承晩이 1월25일에 임시정부로 〈하와이에서 1천원 우선 갔으니, 각원 다 있어야 내가 나서서 재정 얻겠고, 여기 경비도 줄이겠소. 제공 다 나가면 총리만이라도 있기 작정해야 돈 얻을 계획 확정하리니 속답하시오〉37)라고 타전했다가, 이튿날 다시 〈국무총리 신규식 각하, 각원 총사직 공식으로 받은 것 아니니, 좀더 인내하시오〉38)라고 타전하고 있는 것은, 이때에 李承晩이 각원들의 총사직에 대하여 얼마나 낭패해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동포들로부터 자금을 수합하는 데 지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각원들은 그들대로 고충과 불만이 심했다. 국무회의에서 李東輝와 金立의 「죄상」을 성토하는 결의를 하고 그것을 李承晩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는 데서 그러한 사정을 느낄 수 있다.
 
  〈사직은 공식 선포 아니하였으나 실행해 봅시다. 다만 후계자 정돈 없이 퇴직하는 것 어려워서 아직 시무하오. 각원들이 사직 결심과 고충을 포고하랴는데 각하도 평일부터 추현양능(推賢讓能: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물려줌)코자하는 본심을 국민에게 다시 알려 주시고 경성(警醒)시킴이 가할 듯. 허락하시면 이곳서 문자를 신중하게 작성하야 반포하겠으니 지시하소서. 이동휘 김립 모든 죄상을 국무회의 의결로 우선 공보에 선포합니다. 이희경 모스크바로 가게 함이 마땅하오.〉39)
 
 
 
 「臨時政府布告」로 金立 罪狀 고발
 
  임시정부는 1월26일에 국무총리대리 외무차장 겸 법무총장 申圭植, 내무총장 李東寧, 군무총장 盧伯麟, 학무총장대리 차장 金仁全, 재무총장 겸 노동총판 李始榮, 교통총장 孫貞道가 연서한 「임시정부 포고 제1호」를 발표했다. 포고문은 독립운동에 방해되는 공적으로 이동휘, 김립, 金羲善(김희선) 세 사람을 지목하고 이들의 「죄상」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어찌 요량하였으랴. 이제 우리 독립당의 분자, 특히 영수 중에서 이런 부류를 낼 줄이야! 실로 몽상조차 하지 못한 바이다. 우리가 관여할 바는 道義에 있고 刑政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응징하지 않으면 國基가 서기 어렵다. 즉 그 죄를 들어 國人 共誅(공주 : 함께 죄인을 죽임)의 의를 밝히려 한다.
 
  이동휘는 그 직이 중임에 있으면서 김립과 더불어 간사한 사건을 만들어 韓馨權(한형권)을 이웃나라에 비밀리 파견하여 이웃나라의 후의로 거금을 정부에 증여하게 하였는데, 김립으로 하여금 중도 횡령케 하고 도리어 죄를 전 각원에 돌리어 정부를 파멸케 하려고 도모한 그 죄는 천인이 다같이 불허하는 바이다. …
 
  김립은 이동휘와 서로 결탁하여 마침내 國金을 횡령하여 사탁(개인 주머니)을 비대케 하고 같은 무리를 모아 共産이라는 미명하에 숨어서 간사한 모의를 하고 있다. 그 죄 극형에 처해 마땅하다. …
 
  덮어만 두려고 하다가 일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대개를 선포하여 동포의 共和를 구하는 바이다. 어찌 말하기 쉬우랴만 또한 실로 부득이한 일이다.〉40)
 
  김희선은 군무차장이라는 요직에 있다가 일본 총독부에 투항한 것이 성토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김립의 죄를 「극형」에 해당한다고 선언한 점이다. 그것은 임시정부 공금횡령범으로 지목된 김립에 대한 공개적인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신규식 등이 李承晩에게 보낸 전보에서 「악배」라고 지칭한 것은 바로 김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형집행은 金九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資金으로 호화생활하기도
 
  박진순과 한형권이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40만 루블의 자금 대부분은 김립이 상해로 가져와서 임시정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제도변경 추진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조직활동비 등으로 쓰고 있었던 것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月刊朝鮮」 2005년 4월호, 「임시대통령 각하, 上海에 오시도다」 참조).
 
  이 자금은 고려공산당 조직활동비 이외로 이동휘가 탈퇴한 뒤의 임시정부의 분열공작을 위한 자금 등으로도 사용되었던 것같다. 가령 김철수가 李承晩과 반목하고 있던 김규식에게 모스크바 주재 외교원이라면서 여비까지 지급했다고 회고하고 있는 것이 그 한 가지 보기이다.41) 그밖에도 이 자금은 金元鳳의 義烈團 활동비, 북경에 있는 申采浩의 역사서 편찬비, 이극노의 「中露韓會話」 책 제작비 보조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42) 청년들에게도 뿌려졌다. 그리하여 〈아마 그때 그곳 젊은 사람치고 다소나마 그 돈을 안 써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일부 인사들은 그돈을 사생활에 사용하여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43)고 한다.
 
  이러저러한 소문도 뒤따랐다. 한형권이 모스크바자금을 받아 온 경위와 김립의 자금사용 양태에 대하여 임시정부 인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백범일지」의 다음과 같은 서술에 잘 표명되어 있다.
 
  〈마침내 한(韓亨權)이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러시아 최고지도자인 레닌씨가 친히 맞이하며, 독립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고 물었다.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루블을 요구하였다. 레닌은 웃으면서 반문하였다.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될 수 있겠소?』
 
  한은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조달한다고 답변하였다. 그러자 레닌은 자기 민족이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곧바로 러시아 외교부에 명령하여 현금으로 200만원을 지급하게 하였다. 그러나 금괴 운반문제로 우선 시험적으로 제1차로 40만원을 한형권이 가지고 떠났다. 한이 시베리아에 도착할 시기를 맞추어 이동휘는 비서장인 김립(金立)을 밀파하여, 한형권을 종용하여 금괴를 임시정부에 바치지 않고 중간에 빼돌렸다. 김립은 이 금괴로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사들였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조선인·중국인·인도인에게 얼마씩 주고, 자기는 상해에 몰래 숨어 다니며 광동 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생활을 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죄를 묻자 이씨는 총리직을 사직하고 러시아로 도망갔다. 그리고 한형권은 모스크바로 되돌아가서 통일운동을 하겠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다시 20만 루블을 얻어 가지고 상해에 잠입하여 공산당들에게 돈을 풀어 이른바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44)
 
 
 
 仁成學校에는 135원밖에 지급 안 해
 
  공산당의 공식보고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 온 40만圓 가운데에서 한형권의 활동비로 지급된 6만원, 金武冕(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金圭冕인 듯)에게 보낸 3만원, 운반 도중에 없어진 4만8,000원, 1921년 5월에 창당된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인계한 15만원을 제외한 11만원이 구 한인사회당 간부, 곧 김립의 책임 아래 사용되었다. 그리고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인계된 15만원 가운데에서 4만5,000원이 국내 조직으로 지급되었고, 중국 및 대만 공산당 보조비로 1만1,000원, 일본공산당 보조비로 1만1,500원이 지급되었다.45)
 
  김철수는 이 무렵에 金九는 공산당이 일본 공산당과 연락하는 것을 가리켜 「친일파의 소행」이라면서, 〈정탐이라도 檀君孫이니 동족이요, 日本人은 모두가 우리의 적일 뿐이다〉라고 비난했다고 회고하고 있다.46)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김립과 헤어져서 다시 모스크바로 갔던 한형권이 볼셰비키 정부의 외무인민위원장 치체린(Georgy V. Chicherin)과 교섭하여 임시정부의 「내부정리」를 위한 활동비 명목으로 다시 20만 루블을 받아내어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21년 11월 말경이었다.47) 한형권은 블라디보스토크 대한국민의회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했던 高昌一의 협력을 얻어서 베를린 주재 러시아 대사관을 통하여 자금을 달러로 받아 가지고 유럽을 거쳐서 상해로 돌아온 것이었다.48)
 
  한형권이 가지고 온 자금을 둘러싸고 상해정국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쳤다. 사무실 임대료도 제대로 내지 못할 만큼 재정난을 겪고 있던 임시정부는, 그 자금은 임시정부로 보낸 것이므로 당연히 임시정부에 내놓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떠나서 국민대표회 소집을 주동하고 있던 安昌浩와 여운형 등은 그것을 지연되고 있는 국민대표대회 개최비용으로 사용할 것을 종용했다. 그런 점에서 새삼스럽게 1월26일에 이동휘와 김립을 단죄하는 「임시정부 포고」를 공포한 것은 한형권에 대한 경고의 뜻도 있었던 것같다.49) 임시정부는 李承晩이 상해에 와 있던 1921년 5월에 국무회의의 결의로 모스크바에 가 있는 한형권을 소환하기로 하고 그 대신에 李喜儆과 安恭根을 특사로 비밀리에 파견했었다(「月刊朝鮮」 2005년 4월호, 「임시대통령각하, 上海에 오시도다」 참조).
 
  뒤에 한형권이 밝힌 20만 달러(26만원)의 사용내역을 보면, 국민대표회의에 준 것이 6만4,975원으로 가장 많고, 「온다간다 하는 여비로 쓴」 돈 5만5,355원, 의열단에 준 돈 4만6,700원, 정부유지운동비 6,335원 등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정부에 준다 하고 잃어 먹은 것」으로 3만원이 적혀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동포들의 유일한 자녀 교육기관인 仁成學校에 지원한 돈은 고작 135원이었고, 민단에도 500원밖에 지급되지 않았던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50)
 
 
 
 金九의 옛 제자들이 金立 총살
 
  1922년 2월8일 오후 2시에 제10회 임시의정원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출석한 의원들은 의장 洪鎭(震)을 포함하여 모두 16명밖에 되지 않았다. 국무원석에는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 재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노백린과 함께 정부에서 물러나서 국민대표대회 소집을 주동하고 있던 안창호도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金九는 여러 방청객들과 함께 방청석에 앉아서 개원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애국가 봉창과 국기에 대한 최경례에 이어 의장의 식사와 국무총리 대리의 고사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金九는 줄곧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의 「공금횡령범」 김립의 처단문제였다.
 
  이 무렵 김립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신의 소재지를 밝히지 않고 거처를 자주 옮기고 있었다.51) 金九는 그런 김립이 중국 구시가의 복잡한 거리에서 중국여자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52) 그러나 金九의 휘하에는 이제 믿을 만한 행동대가 없었다. 경호원들은 모두 생활방편을 찾아 제각기 흩어지고 없었다. 계획을 실행할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해 고심하고 있을 때에 吳冕稙(오면직)과 盧宗均이 金九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황해도 안악 출신의 동갑내기 친구로서 양산학교 교사 시절의 金九의 제자였다. 그들은 상해로 오기 전에 「朝鮮日報」와 「東亞日報」의 안악지국에서 일을 했었다. 오면직은 1921년 7월에 임시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집을 위해 파견된 홍완기를 도와주다가 자기도 신변에 위험이 닥쳐서 노종균과 함께 도피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안동현·봉천·천진을 거쳐서 1921년 11월 20일경에 상해에 도착하여 金九를 찾은 것이었다.53)
 
  金九는 그들에게 김립의 죄상을 말하고 김립의 처단문제를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쾌히 자기들이 맡겠다고 했다. 金九는 두 사람에게 김립의 사진과 은신처를 알려 주고, 권총 두 자루를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김립의 거처를 살피다가 그를 발견하고 미행한 끝에 권총을 쏘았다. 김립은 탄알 일곱 발을 맞고 즉사했다.54) 거사는 마침 임시의정원의 개원식이 거행되고 있던 시간에 이루어졌다.
 
  김립은 동료인 金河球, 愈鎭熙, 김철수와 같이 걸어가다가 총탄을 맞았다. 김철수는 김립이 쓰러지자 동료들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자기는 그 길로 은행으로 달려가서 예금해 놓은 돈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55) 임시정부 쪽에서도 김립이 보관하고 있던 돈의 행방을 쫓았다. 그의 소지품에서 匯豊銀行(회풍은행) 통장을 발견하고 은행에 가서 돈을 찾으려 했으나 그 예금통장은 예금주 본인이 와서 은행에 등록되어 있는 사진과 대조하여 확인해야만 지급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돈을 찾지 못하고 은행에 몰수당하고 말았다.56)
 
  「백범일지」는 이때의 일에 대해서 〈정부의 공금횡령범 김립은 오면직, 노종균 등 청년들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은 잘했다고 칭찬하며 통쾌해하였다〉57)라고 간략하게 적고 있다.
 
 
 
 어머니 郭氏夫人도 上海로 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 개원한 제10회 임시의정원은 의원의 결원문제로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개회한 지 열흘이 되도록 결정된 것이라고는 전원위원장 선거와 네 의원의 사직원을 수리한 것뿐이었다.58) 내무차장 조완구의 보고에 따르면, 법정인원 57명 가운데에 보선 안 된 의원이 모두 32명으로 과반수를 넘었다. 시베리아지역 의원 6명은 국민의회의 임시정부 불참으로 처음부터 선출하지 못했고, 함경도(6명), 경상도(6명), 전라도(5명), 서북간도(5명) 지방 의원들은 자퇴한 이후로 보선되지 않았다. 강원도(2명)와 미주(2명) 지방은 선출은 했으나 아직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59) 따라서 임시의정원은 李承晩을 지지하는 기호파와 안창호 휘하의 서북지방 의원들이 주도권을 다투는 형국이 되어 있었다.
 
  2월11일에 이어 18일의 회의에서 가장 먼저 논의된 사항은 보선된 의원들의 자격심사였다. 이때에 金九는 황중현(경기도), 민충식(충청도), 장붕(하와이), 김마리아(황해도)와 함께 황해도 의원으로 보선되어,60) 청원-징계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61)
 
  그러나 3월20일 회의에서 차이석 등 세 의원이 〈임시의정원 의원은 행정부나 사법부의 관직을 겸대치 않기로 하자〉는 의안을 제안하여 정부 각료로서 임시의정원 의원을 겸임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경무국장으로 임시의정원 의원을 겸하게 된 金九의 자격이 당장 문제가 되었다. 다음날 회의에서 이 안이 토론되자 金九는 〈본안에 시행기일이 없으니 심사위원회에 맡기자〉는 제안을 했으나 그의 제안은 부결되고, 논란 끝에 본 회기부터 이 안을 적용한다는 안이 통과되어 金九·정태희·金容喆 세 사람이 의원직을 사임했다.62)
 
  이 무렵에 어머니 곽씨 부인이 상해로 왔다. 곽씨 부인은 며느리와 손자를 상해로 보내고 나서 사돈(金九의 장모)과 함께 동산평에 살고 있었는데, 사돈이 죽자 그곳 공동묘지에 안장하고 나서 위험을 무릅쓰고 아들을 찾아온 것이었다. 3년 만에 온 식구가 함께 살 수 있게 되어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었다〉고 「백범일지」는 적고 있다.63)
 
 
  3. 大統領과 閣員들에 대한「不信任 決誠」
 
 
  李承晩은 워싱턴회의 결과에 실망하고 있는 재미동포들을 격려하고 자금지원을 얻기 위해 2월20일부터 3월 말까지 미국 본토를 여행하기로 했다. 큰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여행이었으나, 李承晩으로서는 자신의 정치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곤혹스러운 일도 인내하고 극복해야 했다. 그러자면 우선 임시정부가 동요하는 일이 알려지지 않아야 했다. 그는 신규식에게 〈각원 사직 공식으로 받은 것 아니니 좀더 인내하시오〉64)라고 타전하고 나서, 하와이의 측근들에게 〈신규식 총리께 전보하야 미주, 하와이에서 도우리니 사면하지 말라 하시오〉65)라고 타전했다.
 
  또 캘리포니아 리들리에 있는 尹炳求가 임시의정원 앞으로 〈미주교민 다수는 내지 동포 다수같이 현임내각을 신임하고 옹호하기 결심이니 참조하십시오〉라는 전보를 치겠다고 알려오자,66) 李承晩은 그 전보를 의정원보다 신규식 총리에게 치는 것이 더 좋다면서 〈경비를 도우마 하오〉67)라고까지 세심한 주문을 하고 있다. 그러고는 임시의정원 개원에 맞추어 신규식에게 다시 사직하지 말라는 전보를 쳤다.
 
  〈의정원 축하해 주시오. 대표단 해임. 대표집 닫치오. 구미위원부는 약속대로 위원장 사면. 임시정부와 위원부 다 유지 필요하오. 돈 어려워 근심. 돈 급하야 나 미주여행하오. 국무원 사면 말 내면 반대자 이용 난국 만들리니 지키고 있어야 국민이 도우리다.〉68)
 
 
 
 「大統領宣言」으로 國民代表大會 비판
 
  李承晩은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2월13일에 일반 동포들을 상대로 정부와 구미위원부를 유지하고 「코리아 리뷰」의 발행을 계속해야 할 이유와 그것을 위한 동포들의 재정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장문의 「대통령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국민대표대회 소집이나 공산당문제 등에 대한 李承晩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국민대표회의 준비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대개 국민대표회로 말하면 상해에서 몇 사람들의 발기로 이미 1년이 지내었는데 아직도 되지 못한 것을 보아도 보통 인민이 원치 않는 것이 분명한지라. 각 교민계에 분경(紛競: 분쟁)을 이루어서 세인의 이목에 한인의 약점을 드러내어 자기들의 소원도 이루지 못하고 정부도 유지키 어렵게 하는 것뿐이니, 이는 결단코 애국자의 공심이라 할 수 없도다.
 
  만일 이 정부가 무력하여 그 아래서 통일을 이룰 수 없으니 국민대표회를 모아놓고 통일책을 강구할진대, 이는 임시 핑계거리도 되지 못하는 말이라. 민국원년 4월23일에 한성에서 조직 반포한 정부의 각원된 사람들이 왜 함께 붙들고 앉아서 정부를 유력하게 하며 국민이 통일되게 못하고, 도리어 나가 앉아서 국민대표를 모아가지고 무엇을 하려 하느뇨.
 
  우리 국무원에서는 계통적 후임자가 나기까지 지켜나아 가는 것이 직책으로 아는 것뿐이라. 누구 누구를 내어 쫓고 권리나 지위를 빼앗고저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각원 일동이 지재지삼(至再至三)토록 빌고 빌어서 자기들의 원대로 무슨 지위든지 맡아 가지고 다만 정부 이름이라도 함께 지켜 나아가자 하였으나 종시 물리치고 나아가는 고로 어찌할 수 없이 붙들렸나니, 지금이라도 사퇴한 각원들이 다시 들어와서 현재 각원들의 행한 바와 같이 국기 밑에서 선서식을 행하여 지금부터는 같이 붙들고 나아가겠다는 뜻을 확실히 보일진대 그 동안에 정부를 대하여 무엇을 하였든지 다 탕척(蕩滌)하고 여전히 동심병력할 것이어늘, 어찌하여 이것을 아니하고 딴 것을 하려고 난국을 만드느뇨.〉
 
 
 
 漢城政府 정통성 강조하며 安昌浩 겨냥
 
  이처럼 그는 넌지시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상기시키면서 국민대표대회 준비자들의 정부불신 태도를 규탄한 다음, 임시의정원의 권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반대파들을 공박했다.
 
  〈임시의정원은 민국 원년에 본 통령이 미주에 있을 때에 상해에서 당국한 이들의 주동으로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입법기관으로 인정하여 오던 바라. 어찌하여 자기들이 정부에 있을 때에는 남들이 그 의정원을 복종치 않는다고 시비하더니 자기들이 나가서는 그 기관을 무시하고 국민대표회를 소집한다 하느뇨. 이는 계통을 문란케 하며 전후를 모순케 함이니, 자기들이 만든 헌법을 이처럼 멸시하고 어찌 공화사회의 질서가 서기를 바라리오. 만일 그 의정원의 대표자 수효가 부족하든지 혹 대표원의 자격이 불안정하면 헌법을 의지하여 대표를 뽑아 그 의정원을 상당히 만들어서 이를 원만히 조처할 수 있겠거늘, 될 수 없는 딴 단체를 만들어 전체를 문란케 하느뇨. 설령 이와 같이 하여 자기들의 마음대로 일이 잘 된다 하기로 다른 분자도 일어나서 따로 국민대표회라든지 혹 다른 단체를 모아서 이것을 번복하려 하면 무엇으로 방비하겠느뇨. 이는 난국의 길만 열어 놓아 정돈할 도리가 없게 함이니, 조그마한 민회나 민단의 인도자들도 이렇듯 아니하는 바이어늘 어찌 민국의 책임을 맡은 이들이 이와같이 하느뇨.〉
 
  이러한 공박은 안창호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이어 공산당의 세력과 자금력을 빌어 국민대표회에서 정부제도를 바꾸려하는 기도가 있다고 경고했다.
 
  〈또 한편에서는 공산당의 세력과 재력을 빌어서 정부제도를 변경하려는 운동이 기왕에도 심하였거니와 지금에 더욱 창궐하니, 이는 대세를 헤아리지 못함이 심하도다. 오늘 우리 정부가 어떠한 처지에 있으며 세계 형편이 어떠하건데 이러한 운동으로 현국을 유지할 수 있으리오. 국민대회를 소집하여 공산당의 세력을 빌어 정부제도를 변경하자 하면 우리 국민이 이것을 옳다고 따라 갈 것인가. 이와 같이 정부를 변경하면 열국이 우리 독립을 더 속히 승인하겠는가. 이런 위태한 것을 다 알지 못하고 대사를 방해하려 하니 우리 국민은 더욱 주의할 바로다.〉69)
 
  이러한 주장은 국민대표회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그룹의 내심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동휘의 사위 吳永善이 4월10일의 의정원 회의에서 국민대표회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의정원이 있는데 또 다른 대표회를 모임은 불가하다 하나, 양원제의 예에 의하여서라도 다시 대표회를 모이지 못할 리가 없고, 또 다른 나라의 예로 보더라도 프랑스는 기성한 국가로 의회가 있는데도 1789년에 다시 국민대표회가 모였었고, 러시아도 케렌스키 내각시대에 모스크바에 국민대표회가 모였으니, 설혹 다른 나라에 이런 예가 없더라도 우리가 독창적으로 새로운 예를 못 낼 것이 없으며…』70)
 
  오영선은 국민대표회의가 프랑스혁명 때의 헌법제정 국민의회나 볼셰비키 혁명 때의 모스크바 소비에트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자동차로 하루에 200마일 이상 이동하기도
 
  李承晩은 또 각 지방의 교민 단체 앞으로 〈3월 회일(晦日 : 그믐날) 내로 3천원 있어야 외국인에게 진 빚 갚겠소. 금월 15일 내로 5백원 있어야 수치 면하겠소. 공동회로 속히 주선. 즉답〉71)이라는 전보를 쳤다. 구미위원부의 재정이 바닥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는 2월20일 오후 3시 30분발 기차로 워싱턴을 떠났다. 시카고를 거쳐서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Sacramento)까지는 기차를 탔고, 거기서부터는 동포들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이동했다. 어떤 날은 200마일 이상을 달려야 했다. 동포들은 모두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가는 곳마다 한인교회당 등에서 집회가 열렸고, 많은 동포들이 모였다. 李承晩의 「여행일지」(Log Book of S. R.)에는, 17년 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같이 만났던 尹炳求, 대동보국회 회장으로서 혈서로 이승만을 샌프란시스코로 초청하고자 했고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출판했던 文讓穆(문양목), 노백린의 한인비행학교를 지원했던 윌로우즈(Willows)의 「쌀의 왕」 金宗林을 비롯하여 이때에 만났던 30명이 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캘리포니아의 남부도시 베이커스필드(Bakersfield)에서 시애틀(Seattle)로 이동할 때에는 새벽 1시 30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탔다.72) 그만큼 바쁜 일정이었다.
 
  李承晩은 여행하는 중에도 임시정부의 재정문제에 대하여 안간힘을 써야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2월25일자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내 왔다.
 
  〈각하 말씀대로 총사직 안 하오. 안심코 일하시오. 경비 급하니 곧 전환(電換)하시오.〉73)
 
  그러나 자금수합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李承晩은 구미위원부를 지키고 있는 鄭翰景에게 〈돈 없다고 각 지방에 급한 편지 보내오〉74)하고 타전했다. 의지할 데라고는 오직 하와이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하와이 교민단에도 자금이 없었다. 1,000달러만 급히 보내라고 타전하자, 〈민단에 돈 없으니 동지금이라도 원하면 종관(鍾寬)에게 전문하시오. 민단서 갚겠소〉75)라는 대답이었다. 동지금이란 이승만이 워싱턴으로 떠나오기에 앞서 결성된 동지회의 기금이었다.
 
 
 
 『사직 안 받으셔도 우리는 가겠소』
 
  서부지역 여행을 마치고 시카고에 도착하던 3월25일에 李承晩은 다시 신규식, 이시영, 손정도, 김인전이 연명으로 친 전보를 받았다. 李承晩의 수리 여부와 관계없이 총사직한다는 통고였다.
 
  〈우리 사직 받으시고 각하도 사직 전보 하시오. 이리 해야만 시국 전환하겠소. 만일 사직 안 받으셔도 우리는 가겠소. 이동녕, 각 차장, 비서장 사직했소. 노백린은 아직 정부 지키려 하오.〉76)
 
  이러한 전보를 치기에 앞서 신규식은 3월20일에 의정원에서 1922년의 임시정부 시정방침 연설을 하고 나서, 국무원들이 〈艱苦(간고 : 어렵고 고됨)를 견디다 못하여〉 총사직 하기를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전보한 사실을 밝혔다.77)
 
  그런데 신규식 등 네 사람이 사직결의를 통고하던 바로 그날 장붕이 李承晩에게 다음과 같이 타전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각원 사직 허락마시오. 한형권 가진 돈 20만원 정부로 오는 것이라 전보 왔소. 편지하오.〉78)
 
  한형권이 가지고 온 모스크바자금이 임시정부로 오는 자금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전보를 누가 보낸 것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그것이 이 무렵에 모스크바에서 이동휘 그룹과 김규식, 여운형 등의 극동민족대회 참석자들과 함께 볼셰비키 정부를 상대로 자금 교섭 경쟁을 벌이고 있던79) 李喜儆(이희경)의 전보였다면 퍽 중요한 뜻을 지닌 것이었다.
 
  임시의정원의 가장 큰 논쟁거리는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대책문제였다. 3월11일에는 申翼熙, 尹琦燮, 梁基瑕(양기하), 손정도, 延秉昊(연병호)의 다섯 사람 명의로 임시정부가 국내외의 독립운동단체 대표 및 신망과 지식이 특출한 인사를 망라한 대회의를 소집할 것을 건의하는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임시정부 주도의 회의 소집을 제의한 이 건의안은 정부 밖에서의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에 대한 대안으로 마련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건의안에 대해 그 대회가 「과거의 모든 분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없느냐 등의 문제를 두고 여러 갈래로 토론이 있다가 결국 3월14일의 회의에서 찬성 6표, 반대 9표로 부결되었다.80)
 
 
 
 義烈團員이 田中義一 저격
 
   3월28일 오후에 黃浦灘(황포탄) 부두에서 발생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저격사건은 상해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하라 타카시(原敬) 내각의 육군 대신을 지낸 육군대장 다나카는 교분이 있던 미국의 필리핀 총독 우드(Leonard Wood)의 초청을 받아 마닐라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상해에 들른 것이었다. 다나카를 저격한 사람은 의열단원들인 金益相, 吳成崙(오성륜), 李鍾岩 세 사람이었다. 김익상은 1921년 9월12일에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북경에 와 있었고, 고향에서 3·1 운동에 참가하고 북경에 와서 의열단장 金元鳳과 같이 생활하고 있던 오성륜은 1921년 11월에 김원봉의 지시에 따라 권총을 가지고 상해에 와서 일본 요인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오성륜은 다나카의 필리핀 방문소식을 듣고 기회를 노렸으나 다나카의 여행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그가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 김원봉이 김익상과 이종암을 다시 상해로 파견했다. 세 사람은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신문기사를 보고 다나카가 상륙할 마두도 시찰했다. 거사 당일 오성륜은 중국 옷, 김익상은 양복 차림을 하고 각각 권총을 챙겼고, 김익상은 따로 바나나형 폭탄 두 개를 준비했다. 이종암은 단도를 준비했다.
 
  28일 오후 3시 20분쯤 다나카 일행은 세관 검사장을 빠져나왔다. 다나카는 모닝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다나카가 마중나온 일본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천천히 걷고 있는 앞으로 같은 배를 타고 왔던 미국인 여행객 스나이더 부인이 걷고 있었다. 이때에 오성륜이 군중을 헤치고 나와 5, 6미터 거리에서 권총 네 발을 쏘았다. 세 발이 스나이더 부인에게 명중했고, 한 발은 다나카의 모자에 구멍을 내고 지나갔다. 김익상이 6,7미터 거리에서 폭탄 두 개를 던졌으나 불발이었다. 연기를 내며 다나카의 발 앞에 굴러가는 폭탄을 영국 수병이 주워서 강에 던졌다. 다나카는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황급히 세관 창고 옆으로 숨었다가 대기하고 있던 일본 총영사관 자동차로 빠져 나갔다. 이종암은 무사히 현장에서 도망쳤으나, 김익상과 오성륜은 조계지 공부국 경찰 및 영국인 기자와 격투 끝에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프랑스 공무국 유치장에 갇혔다가 이틀 뒤에 일본영사관 경찰에 인계되었다.81)
 
  다나카의 저격은 비록 실패했으나 이 사건은 상해의 한국인 사회를 흥분시켰다. 「獨立新聞」은 다나카 저격사건에 대해 〈대개 암살, 방화, 전쟁은 혁명사업 진행상 불가무의 방법이라. 암살할 놈 암살하고 방화할 데 방화하고 전쟁할 때 전쟁하여야 할지니… 田中은 일개 武夫라. 그 죽고 삶이 별로 큰 관계가 없으나 金, 吳 양 의사가 田中을 죽이고자 함은 오직 우리 민족의 공분을 세계에 선포코저 하는 일종 수단에 불과한지라. 폭탄의 폭발과 불발이나 田中의 죽고 죽지 않음이 무슨 큰 문제리오. 사업은 성공을 목적함이나, 목적하다가 실패한 사업은 실로 성공으로 더불어 그 가치가 동일하다 하노라〉82)라고 찬양했다.
 
  일본 영사관 3층에 갇혀 있던 오성륜은 달포쯤 지난 5월2일 새벽 2시에 같은 감방에 있던 일본인 다무라 주이치(田村忠一)와 함께 쇠창살을 부수고 탈옥했다.83) 일본 영사관 경찰은 영국과 프랑스 경찰의 지원을 받아 오성륜 체포에 총력을 기울였다. 500달러의 현상금을 걸고, 수사비 300달러를 책정하여 시내 곳곳에 그의 사진을 배포하고 한국인들의 집을 수색했다. 그래도 오성륜이 체포되지 않자 일본 영사관은 현상금을 3,000달러로 올렸다. 일본인 친구 집에 숨어 있던 다무라는 5월19일에 체포되었으나, 오성륜의 행방은 묘연했다.84) 오성륜은 미국인 친구 집에 숨어 있다가 광동으로 탈출했다. 그는 뒤에 여권을 위조하여 독일로 갔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공산당에 입당했다.85)
 
  김익상은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두 차례의 특사로 20년형으로 감형되어 1942년에 만기로 출소했다.86)
 
 
 
 吳成崙이 탈옥하자 日警이 金九 집 덮쳐
 
  오성륜이 탈옥하고 이틀이 지난 5월4일 이른 아침에 일본 영사관 경찰 7명이 노기등등하여 金九의 침실로 들이닥쳤다. 일행 가운데에는 金九와 잘 아는 프랑스 경관 서대납(西大納)도 있었다. 그는 그 집이 金九의 거처인 줄 알았더라면 일본인 경찰들과 같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는 그는 체포장에 적힌 이름이 金九인 줄 모르고 같이 체포하러 왔던 것이다. 일본 경찰들이 달려들어 수갑을 채우려 하자 서대납이 나서서 그들을 말리면서 金九에게 말했다.
 
  『옷을 입고 프랑스 경무국으로 갑시다』87)
 
  崇山路(숭산로)에 있는 프랑스 영사관 경무국에는 元世勳, 南公善, 朴益洙, 鄭有麟 등 6명이 체포되어 와 있었다.88) 일본 경찰은 金九를 신문하려 했으나 프랑스 경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 영사가 인도를 요구했으나 프랑스 경찰은 듣지 않고 金九에게 물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김선생이 잘 아는 사람이오?』
 
  『모두 좋은 동지요』
 
  『김선생이 이 사람들의 보증을 서고 데려가고 싶으시오?』
 
  『그렇소』
 
  체포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석방되었다.89)
 
  金九는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서 프랑스 영사관 경찰에서 한인 범죄자들을 체포할 때에 배심관으로 그들을 신문하는 일을 도와 왔다. 이 때문에 金九가 보증하면 현행범 이외에는 거의 그 자리에서 풀어 주었다. 金九와 프랑스 영사관과의 이러한 관계를 안 뒤부터 일본 영사관은 정탐꾼을 보내서 金九를 프랑스 조계 밖으로 유인하여 체포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金九는 尹奉吉 사건으로 상해를 떠날 때까지 프랑스 조계지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다.90)
 
 
 
 國民代表會議 贊助하라는 人民請願書
 
  李承晩은 워싱턴으로 돌아온 바로 그날로 임시정부와 하와이에 전보를 쳤다. 전보에는 그의 고충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임시정부에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미주 순행하고 잘 왔소. 재정형편 곤란하나 인심 좋소. 수전(收錢)대로 곧 보내리다. 이곳 일 조직되니 사직 마시오. 국민대회 거절하오.〉91)
 
  그리고 하와이에는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잘 왔소. 경과 좋으나 수전 부족. 공전 있는 대로 전송. 국무원이 다시 사직하려 하오. 돈 보내야 하겠소.〉92)
 
  李承晩은 자기가 다녀온 여러 지방에도 자금이 수합되는 대로 빨리 보내라고 타전하고 있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임시정부의 상황에 대해 초조해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임시의정원에서는 4월3일에 안창호 측근인 千世憲이 상해 교민 102명의 명의로 제출한 「인민청원서」 문제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청원안의 요지는 임시정부가 국민대표회의 소집 취지에 찬의를 표하고 그 회의가 속히 개최될 수 있도록 「찬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소개의원도 안창호파의 都寅權 등 다섯 사람이었다. 먼저 이 청원서를 접수한 것 자체가 임시의정원법에 저촉되지 않느냐는 논쟁부터 시작하여,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합리이냐 아니냐, 이 안을 의정원에서 수리하는 것이 위헌이냐 아니냐를 두고 국민대회 지지파 의원들과 조완구·윤기섭·장붕 등 정부 옹호파 의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93) 「인민청원서」 제안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준비자들이 임시헌법 제9조 4항의 인민청원권 규정을 근거로 하여 의정원으로 하여금 국민대표회의를 인정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 청원서에 대한 토의는 열흘 넘게 계속되었다. 정부 옹호파 의원들은 정부가 민간에서 발기한 국민대회를 어떻게 「찬조」하느냐, 청원인이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와는 승낙이나 약속이 없었으므로 청원 당사자가 될 수 없다, 인민의 집회는 헌법상 자유이므로 의정원에 청원할 이유가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청원안을 반대했다. 찬반논쟁의 핵심은 국민대표회의의 적법성 문제였다. 4월13일에 토론 종결이 있자 반대쪽의 조완구·윤기섭·閔忠植, 李?圭(이필규) 등이 퇴장하여 표결을 하지 못하고 정회되었다가, 이튿날 출석의원 15명이 표결하여 찬성 10표, 반대 3표로 결국 인민청원안은 가결되었다.94)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임시정부는 이제 완전히 기능을 잃고 있었다. 임시의정원도 회기를 연장해 가면서 20명이 못 되는 의원들로 연일 대책을 논의했으나 뚜렷한 결론 없이 소모적인 논란만 계속되었다.
 
 
 
 議政院과 李承晩의 전보 공방
 
  李承晩에게 책임이행을 촉구하는 의정원과 李承晩사이의 전보왕래가 시작되었다. 임시의정원은 4월8일에 李承晩에게〈노백린 이외 총차장 다 사직하고 가므로 사무 중지. 무정부 상태. 각하 태도와 선후 방침 곧 회답〉95)이라고 타전했고, 이에 대해 李承晩은 이튿날로 〈각원 사직 안 받소. 방책을 의논하니 좀 기다리시오〉96)라고 답전했다. 또 이날 장붕은 李承晩에게 의정원이 한형권의 돈 때문에 동요하고 있다면서 시국이 더 험해지면 연락할 테니까 정부와 의정원을 미국으로 옮긴다고 선포하라고 권고했다.97)
 
  李承晩은 집요했다. 그는 신규식에게 모스크바에 가 있는 이희경의 일까지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지금 물러 가면 일 다 결딴나오. 내지 관계 있고 이희경도 보낸 일 유망. 좀 기다리라 하오. 여기도 돈 없으나 얼마 후 보내리다.〉98)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하와이와 시카고 등지에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하와이나 미국 본토의 동포들도 李承晩의 요구에 응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마침내 4월12일에는 金九와 김인전·조상섭·이유필이 공동으로 李承晩에게 사직을 권고하는 전보를 쳤다.
 
  〈노백린 이외 총차장 전부 사직하고 나갔으므로 무정부된 지 월여되야 대사 와해. 각하는 곧 추현양능하는 아량으로 사직하심이 공사 양편. 충정으로 간고하나이다.〉99)
 
  金九 등의 전보를 받고 뉴욕에 있는 白南七에게 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그날로 오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100) 그들의 권고는 李承晩에게 적잖이 충격이 되었던 것 같다. 의정원은 4월14일에 다시 李承晩에게 전보를 쳤다.
 
  〈각하 허락 여부, 의논 여하 다 불계하고 노총 이외 모든 각원이 다 나갔고, 정국 불안 잠시 연타(延拖 : 끌어서 미룸)할 수 없으니 각하 방침 곧 표시하시오.〉101)
 
  「각하 방침」이란 사직을 뜻하는 것이었다. 같은 날 신익희도 따로 정중하게 사직을 권고하는 긴 전보를 쳤다.102) 그러나 李承晩은 굽히지 않았다.
 
  〈누가 일하든지 돈 가져야 하겠기 여기 경비 줄이고 미주 하와이에 조직하야 돈 보내려 하니 각원들 권하오. 불연이면 의정원이 임시로 국무원 조처하시오.〉103)
 
  총장들이 만류를 듣지 않는다면 임시의정원이 알아서 조처하라는 말은 그의 분노가 극도에 달해 있음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었다.
 

 
 
 걱정하는 하와이에 『나는 잡고 있기 결심』이라고 打電
 
  이러한 李承晩의 전보에 대해 의정원에서는 의원 일동 명의로 4월21일에 다시 〈사직 각원들 만류할 수 없소. 다 사직 받고 노군총에게 우선 총리 책임 맡겨 사람 모아 정부 붙들게 함이 좋겠소. 곧 회답하시오〉104)하고 타전했고, 李承晩은 이 권고를 받아들여 이튿날 〈노군총으로 임시총리 임명하니 내각 조직해 내 결재받아 반포하시오〉105)하고 타전했다.
 
  며칠 뒤에 하와이에서 국무원이 총사직했다는 장붕의 편지가 왔다면서 어떻게 할까 보냐고 놀라서 李承晩에게 묻는 전보가 왔다.106) 그러나 李承晩은 〈지금이라도 돈 있으면 무려(無慮 : 걱정할 것 없음)하오. 새 각원 내겠소. 나는 잡고 있기 결심〉107)라는 답전을 쳤다. 자금만 있으면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상해에서는 같은 날 장붕 등 여섯 사람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항구적인 제도로 개정할 준비를 하기 위하여 4개월 이내에 임시의정원을 소집할 것과 광복운동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구하자는 결의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임시정부가 주동하여 광복운동자대회를 소집하고 거기에서 정부와 의정원의 제도개혁을 함으로써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이 역시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저지하겠다는 의도였다.108) 그러나 이 결의안은 5월8일의 의정원회의에서, 임시정부의 법규와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법정연구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그 효율적인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5개월 이내에 임시의정원을 소집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구한다고 수정되어 채택되었다.109)
 
 
 
 盧伯麟은 總理代理에 취임하지 않아
 
  노백린은 군무총장직을 사퇴하지는 않고 있었으나, 조각을 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하지는 않았다. 조각에 참여하겠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의 임시정부의 형편은 〈부채가 은전으로 수삼만원인데, 대부분은 반대 측에서 공급한 것〉이어서 내각을 새로 조직하더라도 〈소불하 은전 만원이라도 있어야〉110) 부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의정원은 5월18일에 다시 李承晩에게 전보를 쳤다.
 
  〈지급 공전. 노군총은 임시총리 취임하기 불확정이오. 각원 조직 아니하므로 무정부 상태 그냥 계속하오. 각하는 속히 책임이행하오. 5일 이내 답전.〉111)
 
  자금 때문에 각지에 애걸하다시피 전보를 치고 있던 李承晩은 이튿날로 퉁명스러운 답전을 보냈다.
 
  〈의정원. 노군총에게 이 전보 보이고, 임시총리 취임 권고. 총사직설로 재정 얻는 일 방해되니 곧 정돈하시오.〉112)
 
  그러자 의정원은 의정원대로 李承晩에게 정면으로 맞섰다. 이무렵에는 정부 옹호파 의원들은 회의에 출석하지 않거나 사퇴하고 있어서 의정원 분위기는 점차 李承晩에게 비판적으로 되어 갔다. 의정원은 5월26일에 李承晩에게 정식으로 사직을 권고하는 전보를 쳤다.
 
  〈각하로는 이 난국 수습할 수 없으니 공사 양편 다 위하야 각하는 이때에 곧 사직하시오. 5일 이내 답전.〉113)
 
  李承晩도 물론 단호했다. 그는 1주일 동안 생각한 뒤에 노백린에게 이렇게 타전했다.
 
  〈정식 후임자 나기 전에 모든 일 전임할 데 없이 사면 못 한다고 의정원에 답. 형은 속히 내각 조직.〉114)
 
 
 
 大統領과 閣員들에 대한 「不信任」 決議
 
  마침내 의정원에는 오영선 등 다섯 사람 명의로 6월9일에 대통령 및 각원 불신임안이 제출되었고, 그날로 그 사실을 李承晩에게 통보했다.115) 또한 6월10일에는 비공식회의를 따로 열어 상의한 끝에 〈후임자는 의정원에 책임 있소. 더 있을 염려하지 말고 곧 사직하오〉116)라는 전보를 쳤다.
 
  불신임안은 6월12일의 회의에 상정되었다. 이날 참석한 의원은 17명이었다. 제안설명에 나선 오영선은 대통령의 불신임 이유는 첫째로 내정을 통일하지 못하는 것, 둘째로 외교에 실패한 것, 셋째로 조각을 하지 못한 것이고, 국무원들의 불신임 이유는 위의 대통령 불신임 이유와 관련된 책임 이외에 무정부 상태에 빠진 시국에 대하여 걱정하는 마음과 그것을 구하고자 하는 성의가 없다는 것이었다.117)
 
  16일의 회의에서 불신임안에 대한 열띤 찬반토론이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흥미로운 것은 반대토론을 한 민충식의 주장이다. 그는 대통령의 직위는 세습하는 것이 아니므로 아무리 선정을 했더라도 그보다 더 잘 할 인물이 있으면 물려주는 것이 옳다고 전제한 다음, 그러나 李承晩대통령의 재직 4년 동안 지지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과실 때문이 아니라 원조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외교문제만 하더라도 정부 재정이나 조직체가 없어서 각국에 제대로 사절을 파견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문제가 미국 국회에서까지 거론 된 것은 외교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이라고 할 만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보다도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정부 직속으로 군대를 하나도 양성하지 못한 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물을 변경하여 보자는 데는 자기도 찬성하나, 다만 후임자가 문제이기 때문에 불신임안은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118)
 
  그러나 이 불신임안은 이튿날의 회의에서 특별위원회로 회부하자는 홍진의 동의를 거부하고 홍진·민충식·이필규·李秉周 네 사람이 퇴장한 가운데 표결이 강행되어 찬성 12표로 가결되었다. 申翼熙도 찬성표를 던졌고, 반대표는 없었다.119) 그리고 이튿날 의정원은 불신임안 가결 사실을 李承晩과 해외 동포기관에 알렸다.120)
 
  그런데 이때의 불신임결의의 법적 효력에 대하여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대통령이나 각원들에 대한 불신임제도(vote of censure)는 헌법에 없는 것이었다. 이때에 시행하고 있던 헌법 제21조 14항 및 15항에는 대통령의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탄핵 또는 심판」을, 국무원의 그것에 대해서는 「탄핵」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을 뿐이었다.1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임안 가결통보를 받은 하와이 교민단이 〈대통령과 각원 불신임을 11의원이 통과했은즉 헌법위반이라 정부 와해면 하와이 한인들은 절대 불신용〉122)이라고 절차문제에만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이 무렵 일반적으로 불신임결의가 법적인 효력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것은, 일찍이 국무총리 이동휘와 비서장 김립이 일부 차장들을 부추겨 李承晩에 대한 불신임운동을 했던 사실에서 보듯이, 李承晩 반대파들의 정치공세였던 것이다.
 
  李承晩과 반대파들의 지루한 정치공방속에서 임시정부의 무정부 상태는 9월까지 계속되었다. 9월에 이르러 가까스로 구성되는 새 국무원에서 金九는 국무총리 다음 서열인 내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고침〉
  5월호 「李承晩과 金九」(연재 38회)의 497쪽 윗단에서 임시정부 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된 李喜儆이 귀환길에 파리에서 병이 났다고 한 것은 가는 길에 병이 났던 것의 착오였으므로 바로 잡습니다.
 
 

  1) 「新韓民報」 1922년 1월19일자, 「구미위원부통신」 제45호, 「대통령의 공함」. 2) 「新韓民報」 1922년 2월23일자, 「서재필박사의 편지」. 3) 「獨立新聞」 1921년 12월26일, 「! 世界平和――華府會議의 成績과 그 影響」. 4) 「新韓民報」 1922년 2월9일자, 「워싱턴회의 후의 우리는 어찌할까」.
 
  5) 村田陽一編譯, 「資料集 : コミンテルンと日本」(제1권), 1968, 大月書店, 18~20쪽. 6) 金俊燁-金昌順, 「韓國共産主義運動史(1)」1986, 청계연구소, 202~205쪽 및 임경석,「한국사회주의의 기원」, 2003, 역사비평사, 497~498쪽 참조. 7) 임경석, 앞의 책, 499쪽, 508~509쪽. 8) 김창수-김승일, 「해석 손정도의 생애와 사상 연구」, 1999, 넥서스, 229쪽. 9) 韓圭茂,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가한 ‘조선예수교대표회’ 현순의 위임장」, 2004,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0호, 206~207쪽.
 
  10) 李庭植, 「金奎植의 生涯」, 1974, 新丘文化社, 77~78쪽에서 재인용. 11) 金綴洙, 「본 대로, 드른 대로, 생각난 대로, 지어만든 대로」, 「遲耘 金綴洙」, 199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4쪽, 401쪽. 12) 임경석, 「극동민족대회와 조선대표단」, 「역사와 현실」 제32호, 1996년 6월, 45~46쪽. 13) 강만길ㆍ심지연, 「우사 김규식 ―― 생애와 사상(1)」, 2000, 한울, 73쪽. 14) 「公判調書」, 「夢陽呂雲亨全集 (1)」, 1991, 한울, 567쪽. 15) 「獨立新聞」 1922년 3월31일, 「靑年黨員의 移動」;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290쪽. 16) 「나의 回想記」 및 「公判調書」, 「夢陽呂雲亨全集 (1)」, 44쪽, 604쪽. 17) 「모스크바의 인상(나의 回想記 제4편)」, 「夢陽呂雲亨全集 (1)」, 70쪽.
 
  18) 반병률, 「성재 이동휘일대기」, 1988, 범우사, 351~352쪽. 19) 임경석, 앞의 책, 518~519쪽. 20) コミンテルン編, 高屋定國ㆍ 近野功譯, 「極東勤勞者大會――議事錄全文」, 1970, 合同出版, 36~37쪽.
 
  21) 위의 「議事錄」, 52쪽. 22) 같은 「議事錄」, 60쪽. 23) 임경석, 앞의 책, 535쪽. 24) 「警察訊問調書」, 「夢陽呂雲亨全集 (1)」, 413쪽.
 
  25) 앞의 「議事錄」, 141~142쪽. 26) 임경석, 앞의 책, 534쪽. 27) 앞의 「議事錄」, 299~300쪽. 28) 長田彰文, 「日本の朝鮮統治と國際關係――朝鮮獨立運動とアメリカ : 1910-1922」, 2005, 平凡社, 371쪽. 29) 日本外務省,「朝鮮民族運動史<未定稿>(6)」, 1989, 高麗書林, 102쪽. 30) Kim Kyu-Sik, “The Asian Revolutionary Movement and Imperialism”, The Communist Review, July, 1922, The Communist Part of Great Britain, pp.137~147. 31) 「獨立新聞」 1922년 6월24일자, 「金奎植氏歸?」. 32) Shinkiusic→Washington D.C., Dec. 19th 1921, The Institute for Morden Korean Studies ed.,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2002, Kukhak Charyowon, p.250. 33) Shinkiusic, Yisiyong, Cynecky, Chowankoo, Yunkisup→Washington, Jan. 12th 1922, ibid, p.261.
 
  34) Shinkiusic, Yitongnung, Yisiyong, Sonjundo, Kimenchun→Washington, Jan. 16th 1922, ibid, p.263. 35) Yisungman→Kopogo, Jan. 17th 1922, ibid, p.264. 36) Min, Ahn, Lee→Hanin, Jan. 21st 1922, ibid, p.269. 37) Wonam→Shinkiusic, Jan. 25th 1922, ibid, p.270. 38) Datongyung, Yisyngman→Kopogo, Jan. 26th 1922, ibid, p.271. 39) Kopogo→Hanin, Washington, Feb. 4th 1922, ibid, p.283. 40) 朝鮮總督府警務局 , 「大正11年 朝鮮治安狀況(國外)」, 金正柱編, 「朝鮮統治史料(제七권)」, 1971, 韓國史料硏究所, 99~100쪽. 41) 金綴洙, 앞의 글, 11쪽, 399쪽. 42) 위와 같음.
 
  43) 金弘壹, 「大陸의 憤怒」, 1972, 文潮社, 108쪽. 44)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1997, 돌베개, 311쪽. 45) 朝鮮總督府警務局 , 「大正11年 朝鮮治安狀況(國外)」, 「朝鮮統治史料(제七권)」, 191~193쪽. 46) 金綴洙, 앞의 글, 9쪽, 396쪽. 47) 韓亨權, 「臨時政府의 對俄外交와 國民代表會議의 顚末」, 「카톨릭靑年」 1948년 8-9합집, 68~73쪽 참조. 48) 반병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노령지역 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 1999, 국가보훈처, 481쪽. 49) 金綴洙, 앞의 글, 17쪽, 408쪽. 50) 「新韓民報」1923년 11월15일자, 「한형권씨의 26만원 내역」.
 
  51)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356쪽. 52) 崔明植, 「安岳事件과 3ㆍ1運動과 나――兢虛崔明植先生 略傳과 自敍」(打字本), 1970, 兢虛傳記編纂委員會, 104쪽. 5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11집(의열투쟁사자료집)」, 1976, 822~827 및 832~833쪽. 54)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1집(의열투쟁사자료집)」, 822~827 및 832~833쪽 ; 崔明植, 앞의 책, 104쪽 ;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5)」, 1967, 原書房, 301쪽. 55) 金綴洙, 앞의 글, 17쪽, 408쪽. 56) 閔弼鎬, 「大韓民國臨時政府와 나」, 金俊燁編, 「石麟閔弼鎬傳」, 1995, 나남출판, 79쪽. 57) 「백범일지」, 313쪽. 58) 「獨立新聞」 1922년 2월20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59) 「獨立新聞」 1922년 4월15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60) 「獨立新聞」 1922년 3월1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61) 「獨立新聞」 1922년 3월31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62) 「獨立新聞」 1922년 3월31일자, 「議政院議員移動」 및 5월6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63) 「백범일지」, 286쪽. 64) Daitongyung Yisyngman→Kopogo, Jan. 26th 1922, op.cit., Vol.Ⅳ., p.271.
 
  65) Yisyngman→Min, Ahn, Lee, Jan. 31th 1922, ibid, p.274 66) P. K. Yoon→Syngman Rhee, Jan. 31th 1922, ibid, p.275. 67) Yisyngman→P. K. Yoon, Jan. 31th 1922, ibid, p.276. 68) Yisyngman→Yeikwan Kopogo, Feb. 9th 1922, ibid, p.289.
 
  69) 「新韓民報」 1922년 3월2일자, 「대통령의 선언」. 70) 「獨立新聞」1922년 6월14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71) Korean Commission→Chicago, South Bend, Maxwell, Sanfrancisco, Los Angeles, Riverside, Willows, Reedley, New York City, Superior, Feb. 13th 1922, op.cit., Vol.Ⅳ., p.292. 72) Syngman Rhee, Log Book of S. R, 1922년 3월13일조. 73) Kopogo→Datongyong Koric, Feb. 25th 1922,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300. 74) Hanin→Korean Commission, Mar. 11th 1922, ibid, p.312. 75) Min Ahn Kim→Hanin, Mar. 16th 1922, ibid, p.322. 76) Shinkiusic, Lisiyung, Sonjungdo, Kiminjun→Hanin, Mar. 25th 1922, ibid, p.333. 77) 「獨立新聞」 1922년 5월6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78) kocoa→Hanin Washington, Mar. 25th 1922,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334. 79) 「張鵬이 李承晩에게 보낸 1922년 8월11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八권) 簡札 3」, 1998, 延世大 現代韓國學硏究所, 171쪽.
 
  80) 「獨立新聞」 1922년 4월15일자 및 6월5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81) 田中義一傳記刊行會, 「田中義一傳記(下)」, 1981, 原書房影印本, 311~315쪽 ; 김산ㆍ님 웨일즈, 「아리랑」, 1994, 동녘, 110쪽 ; 朴泰遠, 「若山과 義烈團」, 1947, 白楊堂, 75~77쪽 참조. 82) 「獨立新聞」 1922년 4월15일자, 「失敗의 成功者 金吳兩義士」. 83) 「獨立新聞」 1922년 5월6일자, 「吳壯士의 高飛」 및 1922년 12월13일자, 「吳壯士의 脫獄顚末」. 84)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389쪽. 85) 김산ㆍ님 웨일즈, 앞의 책, 111쪽. 86) 朴泰遠, 앞의 책, 84~90쪽.
 
  87) 「백범일지」, 303쪽. 88) 「獨立新聞」 1922년 5월27일자, 「被逮 諸氏의 無事」. 89) 「獨立新聞」 1922년 5월27일자, 「被逮 諸氏의 無事」; 「백범일지」, 304쪽. 90) 「백범일지」, 304쪽. 91) Yisyngman→Kopogo, Mar. 30th 1922, op.cit., Vol.Ⅳ., p.340. 92) Yisyngman→Konation, Mar. 30th 1922, ibid, p.339. 93) 「獨立新聞」 1922년 5월27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94) 「獨立新聞」 1922년 6월24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95) Euijungwon→Datongyung Koric, Apr. 8th 1922, op.cit., Vol.Ⅳ., p.352. 96) Datongyong→Kopogo, Apr. 9th 1922, ibid, p.353. 97) kocoa→Hanin Washington, Apr. 9th 1922, ibid, p.354.
 
  98) Hanin→Yekwan Sungjai Kopogo, Apr. 11th 1922, ibid, p.355. 99) Kim In Chun, Kim Koo, Cho Sang Sup, Lee Yu Pil→Datongyong Koric, Apr. 12th 1922, ibid, p.361. 100) Wonam→Paik Nam Chil, Apr. 13th 1922, ibid, p362. 101) Euijungwon→Datongyung Koric, Apr. 14th 1922, ibid, p.364. 102) Haikong→Hanin Washington, Apr. 14th 1922, ibid, p.366. 103) Datongyung→Euijungwon, Apr. 15th 1922, ibid, p.367. 104) Euijungwon→Datongyung Koric, Apr. 21st 1922, ibid, p.369. 105) Datongyung→Kopogo, Apr. 22nd 1922, ibid, p.370. 106) Min Kim→Hanin Washington, Apr. 25th 1922, ibid, p.373. 107) Hanin→Kohakio, Apr. 25th 1922, ibid, p.372. 108) 尹大遠, 「大韓民國臨時政府의 組織ㆍ運營과 獨立方略의 分化(1919~1930)」, 1999, 서울大學校博士學位論文, 238쪽. 109) 「獨立新聞」 1922년 7월8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110) 「구미위원부 통신」 제57호, 「美洲韓人民族運動資料」, 1998, 國家報勳處, 3쪽.
 
  111) Euijungwon→Datongyung Koric, May 18th 1922, op.cit., Vol.Ⅳ., p.387. 112) Yisyngman→Kopogo, May 19th 1922, ibid, p.388. 113) Euijungwon Euiwonildong→Datongyung Koric, May 26th 1922, ibid, p.396. 114) Yisyngman→Lowkunchong, Kopogo, Jun. 3rd 1922, ibid, p.401. 115) Euijungwon Bisu Kang→Datongyung Koric, Jun. 9th 1922, ibid, p.404. 116) Euijungwon Euiwonildong→Datongyung Koric, Jun. 13th 1922, ibid, p.406. 117) 「獨立新聞」 1922년 7월22일자, 「第10回 臨時議政院會議記事」. 118) 위와 같음. 119) 위와 같음. 120) Euijungwon→Datongyung Koric, Jun. 20th 1922, op.cit., Vol.Ⅳ., p.412. 121) 韓詩俊編, 「大韓民國臨時政府法令集」, 1999, 國家報勳處, 47~48쪽. 122) Konation→Euijungwon, Jun. 21th 1922, op.cit., Vol.Ⅳ.,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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