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世一의 비교 評傳 (38)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李承晩, 워싱턴 군축회의에 한국 대표단장으로 가다

  • : 손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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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하여,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上海에서 돌아온 李承晩은 하와이僑民團과는 별도로 열성적인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同志會를 조직했다.
 
  李承晩은 호놀룰루에서 열린 범태평양교육대회에 참가한 각국 대표를 자기가 설립한 한인기독학교로 초청했다.
 
  워싱턴軍會議(太平洋會議)에 참석하기 위하여 워싱턴으로 가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 들른 李承晩은 그곳 동포들에게 金九를 특별히 치켜세웠다.
 
  上海에서는 太平洋會議外交後援會가 조직되어 지원활동을 벌였다. 國內에서는 종교계 및 사회단체 대표와 전국 13도의 지방대표 총 372명이 서명한 「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를 만들어 워싱턴會議에 보냈다.
 
  그러나 韓國代表團은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軍문제나 中國문제 등에서 일본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한 美國政府의 입장 때문이었다.
 
  韓國代表團은 韓國親友會를 중심으로 한 美國人들의 성원을 받았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失意에 찬 李承晩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워싱턴會議를 취재하러 와 있던 英國의 저명한 作家 겸 言論人이자 계몽사학자인 H. G. 웰즈였다.
 
 
  (1) 하와이에 돌아와서 同志會 결성
 
 
  하와이는 李承晩에게 언제나 「약속의 땅」이었다. 그의 소명의식과 자존심과 인내력의 원천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하와이 동포사회의 기대와 성원뿐만이 아니었다. 백인사회의 높은 평가도 큰 몫을 차지했다. 호놀룰루에서 발행되는 영자신문의 그에 관한 보도가 그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李承晩은 조용히 全世界를 움직이는 사람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紙는 李承晩이 상해를 방문하고 온 사실을, 7개월 전에 그가 미국 본토에서 돌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서특필했다. 이 신문은 李承晩이 상해뿐만 아니라 중국·만주·블라디보스토크 등 한국인들이 거주하는 지방을 순시한 것 같고, 본인은 부인하겠지만 한 번은 반드시 한국 땅에도 발을 들여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기술하면서, 그와의 회견 내용을 길게 소개했다.
 
  그 회견에서 李承晩은 3·1 운동 뒤에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을 개혁했다는 일본의 선전은 전혀 허위라는 것과, 비상한 세력으로 확산되고 있는 사회주의운동 때문에 일본 정부는 내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고, 한국인의 독립운동도 이 사회주의운동과 동일한 보조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이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은 동양에서의 일본의 먼로주의(Monroe Doctrine)이며, 미국으로서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가장 위험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머지않아 일본은 동양을 지배하는 대강국이라고 선언하고 그것의 승인을 요구할 것이며, 그 필연적 결과로서 다시금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전망했다.
 
  李承晩은 또 하와이의 경작기업이 노동자가 더 필요하다면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 있는 200만 한국인을 데려올 수 있다고 말하고, 그 일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은 하와이에 와서 성공할 자신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기꺼이 미국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이다. 나도 또한 그들 한국인의 자제들이 미국식으로 교육되고, 그런 다음에 그들이 한국에서 우리 한민족의 미국화를 기도할 아메리카니즘의 전도사가 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미국 편중주의를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애드버타이저」紙는 이러한 李承晩의 말을 소개하고 나서, 다시 그를 중국혁명의 주도자인 孫文과 비교하면서 그가 〈孫씨가 만주 조정을 전복시키고 중국 공화국을 건설할 일대 기도를 (하와이에서) 꾸미던 때와 같은 태도로 잠시 익명자가 되어 조용히 전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격찬했다.1) 「애드버타이저」紙가 어떤 근거에서 李承晩이 국내에까지 여행한 것으로 추측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李承晩에 대한 이러한 과장된 보도는 하와이 동포사회에서 李承晩의 성가를 높이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國民會地方總會는 僑民團으로 개편돼
 
  李承晩이 상해에 가 있는 동안 하와이 한인사회에는 큰 변동이 있었다. 가장 큰 변동은 國民會 「하와이지방총회」가 「하와이 교민단」으로 개편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 3월에 국무원령 제2호로 「임시거류민단제」를 포고하여 지역별로 재외동포들이 거류민단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지휘와 감독을 받도록 했다.2) 그러나 이미 1918년에 대한교민단이 조직되어 있던 상해와는 달리, 미주나 하와이에서는 교민단이 조직되지 못했다. 이들 지방에는 일찍부터 동포들의 「무형정부」의 역할을 해 온 대한인국민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하와이교민단으로 개편된 직접적인 계기는 국민회 지방총회의 1921년도 대의회에 맞추어 통달된 내무총장 李東寧의 「특전」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李承晩의 의향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는 하와이지방총회가 샌프란시스코의 중앙총회의 하부기관으로 되어 있는 대한인국민회 조직이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그대로 존속되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는 安昌浩의 근거지였다.
 
  교민단을 조직하라는 이동녕의 특전에 따라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는 해체하고, 1921년 3월3일에 한인학교 교장 閔燦鎬를 회장으로 하고 사업가 安元奎를 부회장으로 하여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을 발족시켰다.3) 이에 따라 1909년 2월에 창립된 이래 하와이 지방정부의 사단법인 인가를 받고 한인사회의 공공기관 역할을 해 온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는 해체되었다.4) 李承晩은 하와이에 도착하여 워싱턴으로 떠날 때까지 개편된 교민단 단장 민찬호의 집에 머물렀다.
 
 
 
 환영회에서 2시간 동안 演說
 
  7월1일 저녁에 교민단 사무실에서 열린 李承晩 환영회에는 남녀동포 600여 명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 자리에서 李承晩은 두 시간에 걸쳐 상해에 가서 했던 일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동포들을 감동시키는 연설을 했다.
 
  李承晩은 이 연설에서 임시정부의 궁핍한 재정의 실상과 申圭植을 국무총리 대리로 하는 새 내각이 구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한 다음, 예산결산제도를 충실히 이행하여 정부의 경비절감을 실현하게 되었음을 큰 성과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1년간의 임시정부 경비를 2만 달러로 책정했는데, 그 상당 부분을 하와이 동포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일찍이 「자기보다 더 유력한 선각자」에게 정부의 우두머리되는 책임을 맡기려고도 했으나, 국내에서 결단코 사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 왔고, 또 외국에 있는 동포들 역시 국내에서 피흘려 수립하고 세계에 알린 정부를 변동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여, 극동 각지에서는 서로 단결하여 정부를 옹호하고 정부 각원들을 존경한다는 맹약을 하고 있다면서 미주·하와이·멕시코 동포들도 이 뜻을 이어 받아 대동단결에 힘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경신참변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 가운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소년애국자」 李範奭의 용기 있는 행동을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그는 또 하와이의 부인구제회가 금품을 모아 여러 차례 軍政署로 보낸 일을 칭찬하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5)
 
  이날의 연설문은 「國民報」의 논설란에 길게 소개되었고, 팸플릿으로 만들어져 각지의 동포들에게 배포되었다. 국내로도 몇 부가 우송되었다.6)
 
 
 
 평생 동안 지지기반이 되는 同志會 조직
 
  환영회에 이어 李承晩은 몇 군데에서 유세를 하면서 열성적인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확고한 지지단체를 조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중의 지지를 중시하는 포퓰리스트인 李承晩은 그때까지 安昌浩의 흥사단처럼 특정인들로 구성되는 단체의 조직을 내켜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상해의 반대파들과 북경그룹에 의하여 큰 시련을 겪고 있는 상황에 당면하여, 임시정부와 자신의 리더십을 지키기 위해서는 확고한 지지단체가 있어야겠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상해에서 協誠會가 하고 있는 역할도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민찬호, 安玄卿, 李鍾寬 등 핵심 측근들과 상의하여 서둘러 조직한 것이 大韓人同志會였다. 7월14일에 발표된 동지회의 「설립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재외 각지에 산재하는 단체는 서로 자기가 다른 단체를 합하여 그 수령이 되려고 하여 서로 암투를 일삼는다. 특히 근자에는 우리 동포가 피로써 이룩하여 세계에 공포한 정부마저 파괴하려는 자가 있게 되었다. 그들은 반드시 그 정부를 넘어뜨리고 다시 이에 대신할 단체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 같으나, 그러한 일은 도저히 행할 수 없고, 반드시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현 정부를 끝까지 옹호하고, 그 명령에 복종하며,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 2천만 민족의 단결인 정부로서 세계에 공포하여 우리 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7)
 
  이것은 동지회 결성의 이유가 국민대표회의 개최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14개 항목으로 구성된 「동지회 규정」의 다음과 같은 항목들은 동지회 결성의 목적과 결의가 폭력투쟁도 불사하는 비밀결사의 그것과 같은 것임을 보여 준다.
 
  (2) 본 회의 목적은 현 정부를 옹호하며 대동단결을 도모하는 데 있음.
 
  (3) 불충 불의한 국민이 있어서 현 정부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위해를 가하는 일이 있으면 본 회는 일심 방어하되, 상당한 방법으로 조처할 일.
 
  (7) 중대한 관계되는 사건은 극히 비밀을 지킬 일.
 
  (8) 현 정부가 만일 위난할 경우에 이를 지경이면 우리는 몸과 물질을 다하여 응대하기로 결심할 일.
 
  (9) 회원 중에 본 회 목적을 준수하다가 타방면의 위해를 받게 되는 경우에는 본 회에서는 일심으로 극력 보조할 일.8)
 
  이렇게 결성된 동지회는 1924년 11월의 동지대회를 통하여 본격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고 李承晩의 강력한 세력기반이 되었다.
 
 
 
 박용만派의 「太平洋時事」社를 습격
 
  동지회가 결성되고 열흘쯤 지난 7월23일자 「太平洋時事」지에 李承晩 지지자들을 격분시키는 고약한 기사가 실렸다. 상해의 대한인 적십자회로부터 〈李承晩이 행방이 불명하므로 그 동정을 탐지하여 급히 회보하기 바란다〉는 편지가 하와이 적십자지부로 왔다면서, 李承晩이 상해에서 「도망」해 왔다고 보도한 것이다.9)
 
  李承晩 지지자들은 며칠 동안의 구수회의 끝에 이 사건을 계기로 박용만派를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구미위원장 대리에서 해임된 玄楯이 하와이에 와서 李承晩을 아직도 위임통치 주장자라고 공격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참이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저 대역부도 박용만의 당류를 박멸하여 위로 정부를 보호하며 아래로 민심을 안돈시켜 놓아야 우리의 정무, 곧 내치 외교에 차서를 따라 진행할 수 있을 것을 깨닫고 물질과 몸과 정력을 다 바쳐 왜적을 박멸하기 전에 저 왜적보다 더 해를 주는 박용만의 당류를 진압하자〉는 「통첩」을 돌렸다.10)
 
  8월2일 오후 5시에 먼저 대한부인구제회 회원들이 신문사를 찾아갔다. 사장 咸三汝는 기사를 취소할 것을 약속했으나 성에 차지 않은 부인들은 기사의 무례함을 힐난하고 물러가지 않았다. 그러자 신문사 사람들이 이들을 문 밖으로 밀어냈다. 부인들은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남녀 수십 명이 신문사로 몰려가서, 사원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창문을 깨고 집기를 둘러엎었다. 경찰이 출동하여 10여 명이 연행되었다. 일단 그곳을 벗어났던 사람들은 다시 동지를 규합하여 철봉 등을 들고 저녁 8시쯤에 다시 신문사를 습격하여 사원들을 밖으로 쫓아내고 인쇄기계를 파괴했다. 경찰이 다시 출동하여 33명이 구속되었다.11)
 
  이 사건은 그것과 관련된 재판과정을 통하여 李承晩 지지세력과 반대파 사이의 반목을 더욱 격화시켰다.
 
 
 
 汎太平洋敎育大會 참가자들을 招請
 
  이때의 李承晩의 활동 가운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8월7일에 개막된 제1회 범태평양교육대회에 참가한 각국대표들을 초대한 일이었다. 범태평양교육대회는 하와이 호놀룰루에 본부를 둔 범태평양협회(Pan-Pacific Union) 주최로 열린 태평양 연안지역 10여 개국의 교육자 대표들이 참가한 국제회의였다. 범태평양협회는 「하와이의 선각자」로 평가받는 알렉산더 흄 포드(Alexander Hume Ford)가 주동이 되어 태평양 연안 국가와 민족들 사이의 평화와 이해증진을 목표로 1917년 5월에 결성된 단체인데, 李承晩도 이사로 참여하고 있었다.
 
  李承晩은 동포들의 협력을 얻어 자기가 설립한 한인기독학교 학생회관으로 회의 참가자들을 초대한 것이었다. 동포들은 자동차를 30대쯤 가지고 와서 손님들을 실어 날랐는데, 자동차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꽂고 있었다. 일본 대표들도 초청에 응했고, 그들이 탄 차에도 태극기와 성조기가 꽂혀 있었다. 국내에서는 培材學堂 교장인 申興雨가 참석했다.12) 「東亞日報」가 1면 머리에 「申興雨君을 보내노라― 汎太平洋敎育會議에」라는 논설을 싣고 있는 것은 이 회의에 대한 국내 지식인들의 관심이 매우 컸던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13)
 
  범태평양교육대회가 열리고 두 달 뒤인 10월에는 제2회 세계신문기자대회가 호놀룰루에서 열렸는데, 이 대회에는 東亞日報의 金東成이 참가했다.14) 워싱턴에 있던 李承晩은 이 대회에 鄭翰景을 파견했다.
 
  李承晩이 호놀룰루를 떠나기 이틀 전인 8월8일자 「뉴욕 타임스」는 그가 일본으로부터의 자유와 완전한 독립을 바라는 한국인의 희망이 한층 강렬해졌다고 말했고, 곧 워싱턴으로 갈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李承晩은 孫文과 마찬가지로, 유명해지기 전에 호놀룰루에서 오래 머물렀다고 덧붙였다.15)
 
 
  (2) 샌프란시스코 同胞들에게 金九 추어올려
 
 
  李承晩은 8월10일 오전 10시에 호놀룰루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에 올랐다. 부두에는 많은 동포들이 나와서 그를 배웅했다. 李承晩의 이번 여행 목적은 새로 취임한 공화당의 하딩(Warren G. Harding) 대통령이 7월11일에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4개국에 제의한 워싱턴회의(The Washington Conference: 일명 태평양회의 또는 태평양 군축회의)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하딩 政權의 「協助에 의한 抑制」 정책
 
   하딩 대통령은 선거전에서 「정상으로의 복귀(Return to Normalcy)」와 「국제 연대(Association of Nations)」를 주창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국익우선주의였다. 그러나 대외정책에서 윌슨(Woodrow Wilson) 정권과 하딩 정권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두 정권은 다같이 미국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재래의 제국주의를 배격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했다. 두 정권은 다같이 평화적 非군사적 정책과 경제적 이익 추구가 양립된다고 믿었다. 군사력을 수단으로 하여 정치지배나 경제적 독점을 추구하여 싸우는 제국주의적 국제질서 대신에 모든 나라들이 평화유지를 위해 협조하면서 각각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국제관계의 형성을 지향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두 정권은 다같이 일본이 낡은 제국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극동 정책에서 미국과 협조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하딩 정권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현안으로 대두된 군축문제와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문제들에 대하여 일본과 합의를 이룸으로써 국제 긴장을 완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하딩 정권의 이른바 「협조에 의한 억제」 정책이었다.16)
 
  하딩 대통령의 워싱턴회의 제안은 처음 일본 국민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위기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東京朝日新聞」이 이 뉴스를 전하면서 「극동문제― 총결산의 날, 대 난국하의 일본」이라고 큰 표제로 놀라움을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17) 이러한 위기감은 이 무렵에 일본이 느끼고 있던 국제적 고립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독일의 패배, 러시아혁명, 유럽제국의 피폐라는 국제환경의 대변동에 따라 바야흐로 세계는 「미국과 영국이 지배하는 국제질서」, 아니 「미국 만능주의에 지배」되는 시대가 되고 일본은 고립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에 따른 것이었다. 서유럽 열강이 유럽에서 총력전을 치르는 동안 일본은 英日동맹을 근거로 만주, 몽고, 시베리아, 중국 본토, 티베트, 태평양의 섬들에까지 진출하여 권익을 확대시켰는데, 이제 미국과 영국이 공모하여 일본의 이러한 「역사적 성과」를 박탈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18)
 
 
 
 『韓國의 生死가 이 會議에서 작정될 터』
 
  하딩의 워싱턴회의 제의는 한국독립운동자들을 고무시켰다. 가장 먼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은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 徐載弼이었다. 그는 7월14일에 임시정부 재무총장 李始榮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미국이 워싱턴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곧, 만일 태평양 지역에 이해관계가 있는 열강이 현재의 태도를 계속하면 머지않아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겠으므로 각국 대표자를 모아 각종 문제를 토의하고 공평한 결말을 지어 장래 전쟁을 배제하자는 취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문제도 이 회의에서 다루어질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평의회에서 한국의 생사(生死)도 작정될 터인데, 어떠한 정책을 한국에 대하여 쓰기로 작정되든지 6대 강국은 그대로 시행할 터인즉, 만일 한국에 독립을 주기로 작정하면 6대 강국이 보증할 것이며 불행히 한국을 일본 밑에 여전히 두면 그 정책도 또한 6대 강국에서 직행할 터이올시다. 그런즉 귀하께서는 이 기회가 우리에게 긴요하고도 긴급한 경각인 것을 확신할 줄 믿나이다.〉
 
  그러므로 이번 워싱턴회의는 한국인으로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절호의 기회라고 그는 말했다.
 
  서재필은 또 구미위원부의 존폐여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워싱턴회의에 대한 한국인의 결연한 각오를 촉구했다.
 
  〈만일 이 평의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작정하면 구미위원부를 더 유지할 필요가 없고 정식적 공사관을 워싱턴에 설치할 것이며, 또한 불행히 한국을 일본에 붙여도 위원부를 이곳에 두는 것이 필요함이 없다 하나이다. 이는 미국 정부가 한번 어떠한 정책을 작정하면 백성들은 그 정책에 복종하므로 백성의 도리상 원조를 구하는 것이 소용이 없을 것이외다. 이러한 경우에는 위원부를 모스크바에나 5개 강국 밖의 다른 나라 도성에 설치하는 것이 나을 줄로 믿나이다.〉
 
  끝으로 서재필은 워싱턴회의의 결과 여하에 따라서는 자신이 운영하는 필라델피아 사무소도 폐쇄하고 「코리아 리뷰」 발행도 중단하겠다고 못 박았다.19)
 
 
 
 會議經費로 10万 달러 募金運動
 
  이러한 서재필의 편지를 받은 임시정부는 국무회의 결의로 워싱턴회의에 대한 일체의 조치와 행동을 구미위원부에 위임하기로 하고, 그 사실을 외무총장과 법무총장을 겸임하고 있던 국무총리 대리 申圭植 명의로 7월20일에 구미위원부로 타전했다.20)
 
  임시정부의 통보를 받은 그날로 서재필은 〈한일 양국이 대 판결할 기회를 잊지 말지어다. 대한국민들이여〉라는 성명을 내어, 미주동포들을 상대로 특별외교비 수납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워싱턴회의를위한 활동경비로서 유능한 국제변호사를 고용하는 비용 등 수백만 달러를 예산할 수 있으나 동포들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감안하여 10만 달러를 책정했다면서 적극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21) 또 서재필은 같은 날 하와이의 교민회 회장 민찬호 앞으로 하와이에서 8만 달러를 모금하라고 타전했다.22)
 
  서재필은 다시 7월25일에는 동포들에게 3개월 안으로 공채표를 살 뿐만 아니라 며칠 동안 일을 쉬고 외국인들에게도 공채표를 팔 것을 촉구하면서, 〈만일 이 회(워싱턴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옳게 가결되지 아니하면 한인들은 한 가지밖에 할 일이 없으니, 이는 한일전쟁이 올시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23)
 
  한편 샌프란시스코의 「新韓民報」는 「세계대세의 변천과 우리의 기회」라는 논설에서 이번 워싱턴회의는 파리 강화회의와 달리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개최되는 회의이므로 한국문제도 마땅히 다루어져야 하며, 그 성패 여부는 〈많이는 우리의 일하는 데 달렸〉으므로 동포들은 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재정적으로 돕고, 외교 담당자들은 준비를 잘하여야겠다고 강조했다.24)
 
  뉴욕거주 한인공동회 대표인 趙炳玉은 〈우리가 기회라 하는 물건에게 속아도 많이 보았고, 기회를 많이 기다려도 보다가 정말 기회가 왔다〉면서, 구미위원부의 외교활동에 대한 동포들의 희생적 협조를 역설했다.25)
 
 
 
 國內와 極東 각지에서 示威運動 벌이도록
 
  그러나 워싱턴회의에 대한 李承晩의 대응자세는 신중했다. 그 역시 이 회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일본의 먼로주의가 결국은 美日전쟁을 촉발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던 李承晩으로서는 이른바 「협조에 의한 억제」를 통하여 현상유지의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는 하딩 정권의 정책이 기본적으로 불만스러웠다. 그를 기다리던 구미위원부는 7월26일에는 〈속히 도미 아니하면 대사 와해, 즉답〉이라는 전보를 치기까지 했다.26)
 
  워싱턴회의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7월 29일에 국내의 李商在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먼저 지금은 太平洋時代이며 호놀룰루에서 열리는 세계교육자대회와 제2회 세계기자대회가 다 태평시대의 도래를 상징하는 것임을 지적한 다음, 워싱턴회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중에 가장 긴요한 것은 11월에 열리는 만국군비축소회라. 이를 워싱턴에서 열려는데, 혹은 호놀룰루에서 하자는 발기도 有하외다. 이 회는 특별히 東洋問題를 논의할 터인 고로 이때에 韓國事가 잘만 결정되면 우리의 추후사가 용이할 것이며 불능이면 前路가 더욱 難할지라. 美大統領과 인심이 우리에게 동정을 표하는 동시에 우리는 극력 노력할지니, 財政上實力이 內地에서 나와야 되겠소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몇십만원 금전을 得送하셔야 대사를 가히 도모하겠소이다. 이 회를 열 임시에 內地와 遠東 각처에서 시위운동을 크게 하는 것이 또한 필요하니 미리 준비하게 하시오.〉27)
 
  회의 개막에 즈음하여 국내와 극동 각지에서 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요망하고 있는 것은 李承晩의 정략가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李承晩은 임시정부에는 그때까지 아무런 지시를 하지 않고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먼저 李承晩의 뜻을 묻는 전보를 쳤다.
 
  〈태평양회의가 어찌되오. 여하간 지휘 없어 답답하오. 대표는 제이손(서재필)으로 정하야 참가 요구 속히 함이 어떠한지요. 곧 전보로 답하소서.〉28)
 
  이 문의 전보에 대한 李承晩의 답전은 그의 전보철에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 경찰 문서에는 8월5일에 하와이의 李承晩으로부터 임시정부에 「태평양회의에 관한 임시대통령의 중요 전보」가 왔다고만 기술되어 있다.29) 그런데 李承晩은 8월4일자로 국무원비서장 申翼熙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그는 이 편지를 국무회의에서 낭독하든지 개별적으로 돌려보든지 하라고 말하고, 〈內地에서 財政을 몇십만원 획득하여야 이번과 같이 막대한 기회를 喪失치 않겠소이다〉라고 하면서, 국내와 연락하여 거액의 외교활동비를 조달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서재필을 회의대표로 결정하는 것을 은근히 반대하면서 대표문제는 위원부와 대통령이 협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30) 이때까지도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떤 자격으로 워싱턴회의에 임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上海에서는 太平洋會議外交後援會가 結成돼
 
  李承晩의 호놀룰루 출발과 때를 같이하여 상해에서도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李承晩이 상해에 있을 때에 결성된 協誠會가 8월10일에 워싱턴회의의 소집 경위와 그 배경이 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황을 자세히 적은 장문의 「太平洋會議에 대한 事實槪論」을 발표한 데31) 이어, 8월13일에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가 결성되었다.32)
 
  임시정부는 8월15일에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 이하 각 총장들이 서명한 「臨時政府布告文」 제2호를 발포하여 이 회의에 대한 기대를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이번 회의의 발기된 동기와 사정은 한둘이 아니나 합하야 말하면 곧 이해관계와 정책관철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상대된 것이라 하야도 과언이 아니라.… 그러면 우리에게도 또한 절실하고 중대한 生死의 문제니 반드시 大東의 분규를 해결한다 함인즉, 우리의 문제는 이 석상에서 반드시 한 중대문제가 될지라. 곧 大東平和의 요소인 우리 문제를 歸正하지 아니하면 何日이든지 분규해결을 見得할 수 없음을 인지하는 까닭이라.〉33)
 
  이처럼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중요한 의제로 반드시 상정될 것이고, 따라서 한국인에게는 「생사의 문제」가 된다고 한 임시정부의 포고는 국민대표회의의 소집문제로 온통 들썩거리고 있던 상해 정국의 관심을 돌려놓는 역할을 했다.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는 18일에 교민단 공회당에서 제2차 총회를 열고 「후원회 규칙」을 제정한 데34) 이어 27일에는 간사회(간사장 洪震(鎭), 서무부 전임간사 張鵬, 재무부 전임간사 趙尙燮)를 조직하고, 워싱턴회의에 대한 방침을 밝힌 「통고문」을 발표했다.35)
 
 
 
 모스크바 갔던 李喜儆은 파리에서 臥病
 
  李承晩은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 위에서 워싱턴회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현실주의자의 통찰력을 가진 李承晩이 볼 때에 워싱턴회의는 한국인의 「생사문제」가 걸린 회의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회의에 대한 활동의 성과여하에 따라 자신의 정치생명의 「생사문제」가 좌우될 것은 틀림없었다. 李承晩은 상해나 북경 지역에서의 국민대표회 소집요구의 핵심적인 의도는 자신을 임시정부에서 축출하려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36)
 
  그러므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토의가 있게 만들어야 했다. 서재필을 비롯한 국내외의 많은 한국인들이 열성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나, 모든 상황판단과 그에 따른 정책결정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기의 몫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금 동원 능력이었다.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것이 자금이었다.
 
  이 무렵에 李承晩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차관교섭을 위하여 모스크바에 밀파한 李喜儆(이희경)이 교섭에 실패하고 파리로 와서 병이 났다면서 구원을 요청해 온 것이었다. 이희경이 모스크바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가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그가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李東輝와 朴鎭淳도 그곳에 있으면서 볼셰비키 정부 및 코민테른(국제공산당) 관계자들과 접촉하고 있었으므로 이희경이 아무리 임시정부의 공식 대표임을 주장했더라도 볼셰비키 정부가 비중 있게 대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李承晩이 〈이희경 프랑스에서 돈 없이 병났소. 속히 구원〉이라는 구미위원부 鄭翰景의 전보를 받은 것은 8월1일이었다.37) 그는 앞에서 본 8월4일에 신익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李喜儆이 파리에 가서 病臥(병와: 병으로 자리에 누움)라고 금전을 付送하라고 전보가 왔으나, 이를 어찌할지 모르겠소이다. 李君으로 워싱턴대회에나 와서 참여하라고 하는 것이 如何할런지요〉하고 걱정하고 있다.38) 그는 우선 모금운동에 전력을 기울여야겠다고 결심했다.
 
 
 
 國民會 주최 환영회에서 演說
 
  李承晩은 8월16일 아침 8시30분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상륙하기도 전에 신문기자들이 배 위로 몰려와서 사진을 찍었다. 클리프트 호텔(Clift Hotel)에 여장을 푼 그는 기자들의 요청으로 골든 게이트 공원에 가서 활동사진을 찍었다.39) 「샌프란시스코 크로니컬(The Sanfransico Chronicle)」 등 신문들이 李承晩과 서재필 등이 워싱턴회의에 참석한다는 것과 李承晩이 워싱턴회의 개회 전에 각지에서 독립선전 연설을 한다는 것을 보도했다.40)
 
  李承晩의 샌프란시스코 도착 기사는 매우 이례적으로 국내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東亞日報는 〈조선 임시정부 대통령이라 하는 리승만(李承晩)은 상해로부터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거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얏는데, 그 사람은 말하되 금년 십일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조선의 대표가 출석하기를 허락하고 또 조선에 민족자결을 허락케 할 일을 조선에서는 바란다 하였으며, 리승만은 그로부터 워싱턴에 향하리라더라.(샌프란시스코 19일발 전보)〉라고 보도했다.41)
 
  17일 저녁에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주최로 열린 환영회에는 많은 동포들이 모였다. 임시정부의 「임시거류민단제」가 공포된 뒤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 환영회 자리에서 李承晩은 상해에 갔던 일의 보고를 겸하여 긴 연설을 했다. 이날 저녁의 연설에서 그는 몇 가지 매우 주목할 만한 말을 했다.
 
  그는 먼저 임시정부의 재정궁핍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자기 환영회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가 정부 소재지로 갈 때에 한 가지 결심한 것은 정부 내부결속을 잘 만들어 안에서 하는 일을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고저 함이었소. 나는 환영회 기회도 원치 아니하였으나 여러분들이 고집하므로 필경 환영회가 되었소.
 
  처음으로 나는 말하기를, 돈을 가져온 것이 없노라 하였소. 내지에서 나오던 돈은 나올 수 없으므로 끊어지고 외양에서도 오는 것이 없는 때에 여러 청년들은 내지로부터 모험하고 안동현과 만주 등지에 나와서 무한한 기한(飢寒)과 고초를 당한 뒤에, 특별한 희망을 가지고 상해로 오면 기한을 면할까 하여 와서 본즉, 또한 곤란이 막심하므로 절망하는 이가 많았소. 그런 정경을 보는 정부 당국자는 기한의 괴로움보다 마음 고생이 더욱 심하였소이다. 그러한데 그곳 동포들은 내가 돈을 많이 가져오기를 바랐던 바, 마침 풍설이 내가 40만원을 가지고 나온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이 나를 고대하던 차에, 돈을 못 가지고 나왔다 함에 그들은 심히 서운히 여기었소.
 
  둘째로는 그들이 나에게 ○○ 신출귀몰하는 무슨 정략이 있을 줄을 바랐는데, 나는 그 희망도 흡족히 하여 주지 못하였소.…』
 
 
 
 李東輝의 委員制는 러시아制度라서 反對
 
  이날의 李承晩의 연설 내용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의 하나는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퇴하게 된 경위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때에 국무경 이동휘씨가 위원제를 제창하니, 곧 러시아 정부 제도를 채용하자 함이라.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무엇이라 하든지 우리의 좋을 대로 위원제를 쓰자 하였으나, 필경 결론은 그 의견이 서지 못함에 이동휘씨는 곧 사직하고 밖으로 나아갔소이다』
 
  이동휘의 위원제 주장을 국무회의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제도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었다.
 
  李承晩은 이동휘의 사퇴에 이어 신규식을 국무총리 대리로 하는 새 내각이 구성되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한 다음, 북경에서 「무정부주의의 행동」을 하는 박용만 일파는 설 땅이 없고, 국민대회는 국민이 원하는 바가 아니며, 우리 정부는 국내와 극동지방 동포들이 모두 지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金九씨는 警察事務뿐 아니라 宣傳까지 잘해』
 
  그러면서 金九를 특별히 거명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경무국장 김구씨는 조용히 앉아 경찰 사무를 잘 보는 동시에 선전까지 잘하오』
 
  金九의 어떤 행동을 가리켜 선전까지 잘한다고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자신이 상해에 있는 동안의 金九의 성실한 업무수행과 자신에 대한 예절을 李承晩은 높이 평가하고 그를 특별히 신뢰하게 된 것이 틀림없다. 또한 샌프란시스코는 안창호의 오랜 연고지인데, 그곳 동포들 앞에서 안창호와 가까운 金九를 특별히 거명한 것은 여러 가지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이었다.
 
  李承晩은 이어 정부 반대자들의 책동을 막기 위하여 국민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줄 것을 다음과 같은 말로 촉구했다.
 
  『지금 소수배들이 감히 정부가 없느니 소수인의 정부이니 하는 행동이 있소. 나는 이전에 등뼈 없는 사람 모양으로 모든 무리한 행동을 다 받았는데, 그것은 다만 그들을 무마하여 그들이 양심이 발하기를 바란 까닭이외다. 그러나 지금 형편은 어떠하오. 상해와 북경 한인의 행동이 심히 악하여 그대로 버려둘 수 없는 형편이오. 그러므로 나는 책임으로 말하는 바, 백성은 충의를 다하여 정부를 옹호하기로 나서라 하는 것이외다. 이후에는 누가 정부 당국자가 되든지 이 기관을 공고케 하여야 하겠소.… 모든 나라에 다 경찰관, 군병, 감옥소 등이 있는 것은 법률로나 도덕만으로는 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까닭이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러한 기관이 있어서 악한 자들을 다스릴 처지에 있지 못한즉 여러분들이 잘 동력(動力)하여 주어야 되겠소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정부 반대자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면 물리적 강제력도 서슴지 말라는 뜻으로도 들릴 수도 있는 말이다.
 
 
 
 『워싱턴會議에서 韓國問題 논의될 것』
 
  李承晩은 다가오는 워싱턴회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모든 사람이 다 열강회의를 중요히 보아 각처에서 수전(收錢)에 열심 중이외다. 현시의 미국 정부 당국자는 우리하고 일을 같이 하고저 하는 이들이며, 하딩 대통령은 반드시 원동문제를 해결하고야 말 터인데, 원동문제 중에는 중국 산동, 시베리아, 한국문제가 포함될 것이오』
 
  이처럼 그는 현재의 미국 정부 당국자가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므로, 이번 회의에는 한국문제가 당연히 의제가 될 것이라고 단정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서재필에 대해서 『서재필 박사는 한인의 일에 손을 씻었다가 지금 우리 일에 다시 착수하여 활동하는 중인 바, 이번 이 일에 대활동을 하는 중이외다』라고 덧붙였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서재필이 동포사회와 절연하고 지냈던 일을 새삼스럽게 언급한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되새겨 볼 만하다.
 
 
 
 『나에게 勢力이 많게 만들어 주어야…』
 
  李承晩은 마지막으로 워싱턴회의에 대비한 자금수합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그러면 어찌하면 우리가 돈을 많이 거두어 쓸 건지요?』 하고 묻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끝냈다.
 
  『나는 대통령의 값어치를 벌어야 되겠소. 그러나 대통령 혼자는 어찌할 수 없소. 여러분이 나에게 세력이 많게 만들어 주어야 되겠고, 그렇지 못하면 어찌 할 수 없소이다. 이는 이후에 독립을 못 찾아오면 여러분이 잘 협력하여 주지 아니하여 못 하였다 하려고 미리 깔고 하는 말이 아니오. 실정으로 여러분들이 도와주지 아니하면 나 혼자 어찌할 수 없소. 나는 국가 일에 명을 희생하기를 원하며, 죽을 뻔한 적도 여러번이었소. 그러나 우리는 죽으려 하지 말고 살기를 도모합시다. 링컨이 일찍이 정탐꾼을 잡아다가 묻기를 「이후에는 어찌할 터이냐」함에 그 정탐꾼이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여 죽겠소이다」 하는지라. 링컨은 말하되 「나라를 위하여 죽지 말고 나라를 위하여 살라」 함에 그 사람이 그 후에 좋은 일을 많이 하여 좋은 성적을 보였다 하오. 우리도 나라 일을 하는 데 살아 하옵시다. 워싱톤에 모이는 열강회의는 우리에게 직접 직책이 있는 줄 아시오』42)
 
  이러한 말에서도 우리는 李承晩이 필요할 때에 적절한 일화를 인용할 만큼 미국 역사에 통달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년 2개월 만의 歸還
 
  구미위원부에서는 李承晩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동포들의 환영회가 열린 다음 날 李承晩은 〈워싱턴으로 급히 출발〉이라는 정한경의 전보를 받았다.43) 그는 이튿날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그러나 워싱턴으로 직행하지는 않았다. 동포들이 많이 사는 몇몇 지방을 방문하여 모금운동을 하면서 가야 했기 때문이다.
 
  李承晩의 지시와 자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미위원부뿐만이 아니었다. 임시정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면서 임시정부로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몇 지방 다녀 미경(美京: 워싱턴)으로 가오. 미경대회 경비 위하야 미주, 하와이, 멕시코 각지는 위원부로, 원동 각지는 모든 지방의 정부기관으로 협조하라고 대통령교서 곧 반포하오.〉44)
 
  여행은 쫓기다시피 바쁜 일정이었다. 8월19일 밤 11시에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李承晩은 가까운 다뉴바(Dinuba)로 향했다. 다뉴바 한인교회에서 환영회가 열렸다. 가까운 프레스노(Fresno)에서 눈을 붙인 李承晩은 尹炳求와 함께 그곳을 떠나서 20일 저녁 9시에 새크라멘토(Sacramento)에 도착했다. 이튿날 오후 2시에 새크라멘토를 출발하여 시카고로 향했다. 기차가 24일 새벽 3시에 콜로라도의 푸에블로(Pueblo)를 지날 때에는 역에서 동포들을 만났고, 아침 7시에 덴버에 도착하여 그곳 학생들과 아침식사를 같이 했다. 10시30분에 덴버를 떠난 기차는 심한 뇌우를 만나 예정시간보다 11시간이나 지연되었다. 그 뇌우로 콜로라도주 그랜드 정션(Grand Junction)의 서부지역에 토사가 나서, 李承晩이 탄 다음 편 기차를 덮쳤다. 그러한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나서 시카고에 도착한 것은 25일 오후 3시. 많은 동포들이 역에 마중나와 있었다. 26일 밤 10시30분에 시카고를 떠나서 이튿날 같은 시간에 워싱턴에 도착했다.45) 1년 2개월 만에 워싱턴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3) 申圭植이 孫文 만나 5個項 要求
 
 
   도착한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李承晩은 바로 그날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먼저 서재필을 만나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구미위원부 위원회를 열었다. 대표단 구성문제부터 논의를 시작하여, 대표단장은 李承晩 자신이 맡기로 하고 서재필은 대표, 정한경은 서기, 돌프는 고문을 맡고, 상해에서 한두 사람 올 사람이 있으면 같이 참가시키되, 아니면 미주에서 적당한 인물을 선정해서 대여섯 사람 규모로 대표단을 구성하기로 했다. 활동비는 서재필이 이미 발표한 대로 10만 달러로 책정했다. 서재필과 돌프는 회의에 참석하는 외국대표들을 한두 사람씩이라도 초대하기 위해서는 회의기간 동안 외교공관과 같은 가옥을 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46)
 
  구미위원부 회의를 끝낸 李承晩은 저녁에는 기자들을 만났다. 그는 한국문제는 일본의 국내문제가 아니라 국제문제이며, 이번 회의의 성패 여부를 가늠할 핵심 과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회의기간 동안 워싱턴에 자신의 본부(headquarters)를 설치하겠다는 말도 했다. 「뉴욕 타임스」가 〈워싱턴회의에 한국문제를 상정시키려는 열성적인 노력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이른바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의 수장 李承晩 박사가 1년 남짓 동양에 머물다가 워싱턴에 돌아옴으로써 오늘 저녁에 해소되었다〉라고 적고 있는 것은, 그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47)
 
  李承晩은 이튿날에는 임시정부로 구미위원부의 회의 내용을 알리는 전보를 쳤다.
 
  〈28일 도착. 위원회 했소. 미경회(美京會: 워싱턴 회의) 대사(大使) 여하히 하시오. 대통령으로 대사장하고, 서(재필)씨로 대사, 정(한경)으로 서기, 돌프 고문. 고명한 율사 여기서 구하니 고문관 둘 낼 권리 내게 맡겨주고, 게서 올 이 있거던 선정 반포 후 전권 위임하는 증서를 율사 의논해 곧 선송하고 전보 증명. 돈 얻을 희망 있소. 집세 내려 하오. 게서도 내지로 재정운동 이 일 위해 하시오.〉48)
 
  이러한 전보에 이어 31일에는 국무위원들 앞으로 같은 내용을 편지로 자세히 적어 보냈다. 李承晩은 이 편지에서도 모스크바에 갔다가 아무런 성과 없이 파리에 와 있는 이희경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49)
 
  李承晩은 파리의 黃玘煥(황기환)에게도 곧 워싱턴으로 오라고 타전했다.50) 그리고 하와이에는 만국기자대회에 대한 대책을 지시했다.51) 이어 9월2일에는 워싱턴회의 대표단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의정원의 결의가 있는 것이 좋겠다면서 위임장 문안까지 작성해 보내면서 임시의정원을 소집할 것을 지시했다.52) 국무회의에서는 李承晩이 직접 대표단장을 맡는 것이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논란이 있었으나, 워싱턴과 전보가 오간 끝에 李承晩의 지시대로 대표단 선임을 결의하고, 의정원의 임시회의 소집도 요구하여, 의정원은 9월25일에 임시회의를 열기로 했다. 신규식은 李承晩에게 그 사실을 전보로 보고하고, 金奎植을 부대표를 포함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53)
 
  신규식은 李承晩에게 보낸 「國務院呈文」(제27호)에서 위의 사실을 다시 보고하면서 〈이번 그 회의에 我國代表의 正式出席함을 내락함이 有하온지, 또는 각하께서 친히 출석하심이 예의 존엄상 손익관계가 여하하올지〉54) 알려 달라고 적고 있는데, 그것은, 李承晩이 직접 대표단장을 맡는 데 대해 임시정부가 적이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後援會演說會에서 安昌浩가 연설
 
  상해에서는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가 중심이 되어 활발한 운동을 벌여 나갔다. 9월3일 저녁에는 프랑스 조계 港口路의 慕爾堂(모이당)에서 후원회의 결성목적을 홍보하기 위한 특별 대강연회가 열렸다. 安昌浩도 이 강연회에 연사로 초청되어 연설을 했는데, 그는 워싱턴회의가 독립운동의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하는 후원회 주동자들의 말과는 뉘앙스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독립운동의 사생과 흥망이 이 회의에 달렸느니, 또는 우리가 이번에 하기만 하면 독립이 꼭 될 터이니 외교를 후원하여야 되겠다는 등의 말을 하면 이는 국민을 속이는 말이오. 왜? 독립운동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나 임시정부의 살고 죽는 것은 모두 우리 자신이 잘하고 못함에 있지 태평양회의에 달릴 리가 없음이외다. 다만 우리는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이익을 얻겠고, 잘못하면 해를 입을 터이니, 이 기회에 힘을 아니 쓸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전제한 다음 그는 외교후원의 방법은 첫째로 대표자를 〈과거에는 친하였거나 원수이었거나〉 거국일치로 응원하는 일, 둘째로 意思와 금전을 제공하는 일, 셋째로 재료를 공급하는 일이라고 말했다.55) 재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말은 한국인의 〈자치할 능력과 독립할 자격〉이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나서 열성을 쏟고 있는 국민대표회의 의의를 강조했다.
 
  『우리가 외교를 후원하려거든 근본적으로 통일부터 합시다. 통일을 하려거든 국민대표회의 완성에 힘씁시다. 왜 대표회를 아니 보고 개인의 색채만 보고 꺼립니까? 개인을 보지 말고 대표회의 정신을 보시오』56)
 
  말하자면, 외교 후원에 필요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대표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이처럼 그가 추진하는 국민대표회가 결코 임시정부를 파괴하는 운동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後援會機關紙로 「宣傳」 발행
 
  이날의 강연회에는 남녀 280여 명이 모였고, 의연금 700여원이 수합되었다.57) 9월23일에 열린 제4회 간사회에서 재무전임 간사 조상섭은 9월2일에서 17일까지 117명이 의연금 955원을 약속했고 현금수입은 159원이라고 보고했다.58)
 
  후원회 간사장 洪震은 「선언서」를 발포하고 1) 태평양회의에 참여한 열국이 동양평화의 근본 문제인 대한 독립을 완전 승인할 때까지 적극적 활동을 계속할 일, 2) 내외 각 지방에 있는 각 단체나 개인을 막론하고 상호 연락을 취하여 고취하며 선전하여 일치 행동을 도모할 일, 3) 전 국민으로 하여금 대내·대외에 맹렬한 운동을 행하게 하며, 상당한 금전을 수합하여 경비에 충당할 일의 세 가지 결의를 천명했다.59)
 
  또한 임시정부 재무차장 李裕弼(이유필)은 「獨立新聞」과의 인터뷰에서, 워싱턴회의는 파리강화회의나 국제연맹과는 달리 일본의 침략주의를 배제하여 태평양 방면의 평화를 영구히 유지하려는 것이 주된 정신이므로 〈우리의 運命을 一決할 外交上好機會〉라고 말하고, 임시정부에서는 워싱턴회의를 위한 외교활동비로 300만원을 예상하고 임시예산을 편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만한 액수의 자금이 조달될지는 의문이나 정부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있고 그 전망도 지금으로서는 낙관적이라고 했다.60) 이 무렵 임시정부는 국내와 만주 및 러시아 지방의 동포사회에 사람을 보내어 의연금을 모집하고 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독려했다.61)
 
  외교후원회는 기관지로 「宣傳」이라는 주간신문을 발행하여 워싱턴회의를 계기로 동포들의 독립의욕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宣傳」은 장붕이 주필을 맡아 9월29일에 창간호를 발행한 데 이어 주로 매주 토요일에 발행되었다. 창간호에는 「崔南善 선생의 출옥」, 「워싱턴회의와 미국의 방침」, 「이 대통령의 宣言」, 「구미위원부의 활동」, 「신 총리대리 광주행」, 「미일전쟁의 최대 원인」 등의 글이 실렸다.62)
 
 
 
 申圭植이 廣州로 孫文 찾아가
 
   이 무렵의 임시정부의 활동 가운데에서 주목되는 것은 孫文의 廣東政府(護法政府)와 정식으로 상호 승인과 지원 교섭을 벌인 사실이다. 李承晩은 상해를 떠나오면서 국무위원들에게 보낸 「臨時大統領諭告」에서 북경정부와 광동정부에 각각 위원을 파견할 것을 지시했었다(「月刊朝鮮」 2005년 4월호, 『임시대통령 각하, 상해에 오시도다』 참조).
 
  李承晩은 그러나 실제로는 孫文의 광동정부와의 교섭에 주력하도록 지시했던 것 같다. 李承晩과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받고 있는 북경정부보다도 이 해 5월에 廣東省에서 다시 성립된 孫文의 護法政府를 승인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광동으로 떠나기에 앞서 신규식은 李承晩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각하의 渡美하시기 전에 기위 內命하신 바에 의하야 9월22일 국무회의에서 본직을 廣東에 파견하는 特使로 임명하기로 결정되야… 今次此行은 廣東政府를 내용으로 승인하야 我國政府와 인연을 結하며… 금번 太平洋會議에 대표파견이 아직 미정이오나 만일 파견하게 되면 그 대표에게 미리 약속하야 我國問題를 회의에 제출케 하고 진력 봉조케 하도록 하기 위함에 不外하나이다.〉63)
 
  신규식의 광동행을 수행했던 閔弼鎬가 이때의 일을 〈정부 조직 이래 정식으로 特使를 파견하여 友邦을 방문한 것은 이것이 최초의 거사이었다〉64) 라고 적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임시정부가 이때의 광동정부와의 교섭을 중요시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10월26일에 상해를 출발한 신규식은 香港을 거쳐 29일에 광동에 도착했다. 이튿날 신규식은 1911년의 辛亥革命(신해혁명) 때의 동지였던 광동정부 간부들의 환대를 받았다. 현지 신문들은 신규식의 방문을 대서특필했다. 孫文과의 회담은 10월3일에 있었다. 두 사람은 먼저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나누었다.
 
  『재작년에 상해에서 각하와 작별한 뒤에 俗務에 몸이 매여 여러 번 南下하여 배알하고 문안을 한다고 하였으나 끝내 여의치 못하여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번 저희 나라 임시정부 李大統領의 명령을 받들어 國書를 휴대하고 광동을 방문하여 貴大總統의 기체안부를 문안하고 아울러 저희 임시정부 및 전 인민을 대표하여 귀대총통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신규식의 이러한 말에 孫文은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선생은 나의 老同志이신데, 원로에 내방하여 주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다시 한국 특사의 자격으로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경하롭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회견은 비공식이니 우리는 자유롭게 담화하여 오래 쌓인 심정을 토로하여도 무방할까 합니다』65)
 
 
 
 護法政府에 500만원 차관 요청
 
  이 자리에서 신규식은 임시정부가 마련한 다음과 같은 5개항의 요구사항을 적은 문서를 제출했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護法政府를 중화민국의 정통정부로 승인하고, 아울러 그 元首와 國權을 존중함.
 
  (2) 중화민국 호법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기를 요청함.
 
  (3) 한국 학생의 중화민국 군관학교 수용을 허락해 주기를 요청함.
 
  (4) 차관 500만원을 요청함.
 
  (5) 조차지역을 허가하여 한국 독립군 양성에 도움이 되게 해 주기를 요청함.66)
 
  李承晩이 상해에 있을 때에 작성한 「차관조건」이라는 문건은 볼셰비키 정부뿐만 아니라 광동정부와의 차관교섭도 고려한 것이었다.
 
  이러한 요구사항을 적은 문서를 들여다보면서 잠시 침묵하던 孫文은 이렇게 말했다.
 
  『목하 北伐作戰(북벌작전)이 아직 성공되지 못하고 국가가 아직 통일되지 못하여 겨우 廣東一省의 역량을 가지고는 한국 광복운동을 원조하기가 실은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귀 정부의 제4조, 제5조의 요청에 관하여서는 현재 아직 불가능하니 적어도 북벌군이 武漢을 점령한 후에라야 비로소 가능할까 합니다. 또 제2조 한국임시정부의 승인에 관한 문제는, 원칙상 문제가 없습니다. 중국에 流亡하여 艱苦奮鬪(간고분투)를 계속하고 있는 귀 임시정부에 대하여 우리 호법정부는 마땅히 심심한 동정을 표하고 승인을 해야겠지요. 사실은 우리 호법정부는 지금까지 아직 다른 나라 승인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웃음을 지었다.67) 孫文과 신규식의 이 회담내용으로 볼 때에 광동정부가 임시정부에 대해 「사실상의 승인」을 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68)
 
  이 무렵 광동정부는 워싱턴회의에 대한 대표참가 요구와 광동정부 승인요구를 중심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이고 있었다.69)
 
  병약한 신규식은 광주에 머무는 동안 잠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는데, 李承晩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전보는 임시정부 「특사」 신규식의 구차한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孫文 만나 일 의논하오. 각하와 정부에 깊은 동정하오. 이곳 전보는 「예관 캔톤(yeikwan canton)」으로 하시오. 교제비 곧 이곳으로 전환하야 주시오. 돌리면 도로 보내리다.〉70)
 
  신규식은 10월18일에 거행된 北伐誓師(북벌서사) 전례에 임시정부의 특사로서 공식으로 참례하는 등 정중한 대우를 받고 12월25일에 廣州를 떠나 상해로 돌아왔다.71)
 
 
  (4) 會議場 밖에서 請願運動
 
 
  李承晩이 워싱턴회의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임시정부로 하여금 자기의 지시대로 필요한 활동을 차질 없이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재정지원을 해야 했다. 李承晩은 9월7일에 하와이에 타전하여 500달러를 임시정부로 보내게 한 다음72) 14일에는 임시정부에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내지와 만주의 시위운동이 미경회(美京會) 시보다 지금 하는 것 더 나으니 곧 밀통(密通)하시오. 하와이와 위원부서 돈 좀 보냈소. 박(용만)이 전쟁 반포하고 미경 대표 보낸다니 다 못 하게 하시오.〉73)
 
  李承晩으로서는 박용만의 동향이 두고두고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워싱턴회의에 맞추어 국내와 만주지역에서 시위운동을 벌이라고 했던 것을 앞당기라고 하고 있는 것은, 회의에 앞서서 대회 참가자들의 한국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표단은 임시의정원의 정식 통보가 오기 전에 이미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서재필은 9월24일에 하딩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1월에 메리언이 그의 사저를 방문하여 회견했을 때에 하딩이 한국문제, 특히 미국이 한국에 대해 지고 있는 도의적 및 법률적 의무를 자세히 검토하겠다고 했었는데, 이번 워싱턴회의 개최는 그것을 실천해 주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치켜세우고, 한국인은 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예정이므로 협력을 당부한다고 적었다. 이 편지를 받은 하딩의 비서장 크리스찬(Christian)은 어떻게 회답해야 할 것인지를 휴즈(Charles E. Hughes) 국무장관에게 물었다. 휴즈는 편지를 접수했다는 것과 한국은 국제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통령이 서재필의 요청을 들어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취지로 회답하라고 크리스찬에게 통보했다.74)
 
 
 
 美國代表團에 請願書 보내
 
  9월29일에 열린 의정원의 임시회의는 워싱턴회의에 출석할 대표단 구성을 李承晩의 제의대로 하기로 의결하고 나머지 한 사람의 인선도 선정된 네 사람에게 맡겼다.75) 네 사람은 특별 법률고문 자격으로 콜로라도州 출신의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1913.1~1921.3)이었던 토머스(Charles S. Thomas)를 합류시켰다. 그는 미국 상원에서 베르사유조약 비준 문제를 심의하면서 한국문제 유보조건안을 상정했던 사람이었다(「月刊朝鮮」 2005년 2월호, 「金九의 공산주의 거부」참조). 그는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로비활동을 맡기로 했다. 토머스는 하딩 대통령과 같이 오랫동안 상원의원 생활을 했었다.
 
  李承晩은 신규식에게 토머스를 선임한 사실을 알리면서, 토머스가 하딩뿐만 아니라 휴즈와도 친하고, 미국대표단의 한 사람인 상원 외교위원회의 민주당 소속 의원 언더우드(Oscar W. Underwood)와는 막역한 사이여서, 28일에 언더우드를 만나서 의논한 결과 한국문제를 미국대표단에 제출하여 한국대표단으로 하여금 설명할 수 있게 하기로 했다고 적고 있다.76)
 
  한국대표단은 10월1일에 대표단장 李承晩, 대표 서재필, 서기 정한경, 고문 돌프, 특별고문 토머스의 다섯 사람 이름으로 회의에 참가할 미국대표단에 청원서를 보냈다. 미국대표단의 단장은 휴즈였고 대표에는 상원 외교위원장 러지(Henry C. Lodge), 상원의원 언더우드와 함께 전 국무장관 루트(Elihu Root)가 들어 있었다. 루트는 1905년에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을 방관하면서 한국의 지원요청을 묵살했던 장본인이었다(「月刊朝鮮」 2002년 12월호,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다」 참조).
 
 
 
 美國務部報告書의 한국관계 記述
 
  한국대표단은 청원서에서, 「한국문제는 동아시아 문제 가운데에서 중대한 문제이다.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 및 병합은 강제에 의한 불법 부당한 행위이며, 일본은 한국통치를 통하여 물질적 향상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나 그것은 일본의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고 한국인의 부담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므로 한국 독립문제를 미국대표들이 회의에 제출하거나 한국대표들이 직접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77)
 
  그러나 미국 국무부 극동과는 〈한국은 아무런 국제적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우리는 그 나라와 1905년 이래로 어떠한 외교적 접촉도 없었다〉면서 한국대표단의 청원서에 대해 별다른 언급 없이 그것을 문서철에 보존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국무장관에게 건의했다.78)
 
  국무부 극동과의 이러한 건의는 워싱턴회의에 대비하여 국무부가 마련한 기본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국무부는 회의에 앞서 미국대표단에 제공하기 위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것은 예상되는 31개 주제를 선정하여 미국정부의 입장을 설명한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한국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고서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근대 이전의 역사, 개항 이후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 일본의 식민통치 등을 서술하고 나서,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적었다. 한국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독립국의 지위를 누린 적이 없으며, 현재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일본이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그러나 한국민은 자기네 나라가 세계문제의 한 요소가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적고 있다.79) 이리하여 한국대표단은 회의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한편 상해주재 일본 총영사는 李承晩이 임시정부로 한국대표단이 10월 중순에 직접 하딩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어 1) 한국을 태평양의 일부로 간주할 것, 2) 한국을 피침략국으로 인정할 것, 3) 한국의 독립은 세계평화 확보의 기초가 됨을 고려할 것, 4) 이상의 이유로 한국대표의 워싱턴회의 참가를 허용하고 그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의 4개 조건을 요청했음을 타전해 왔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하고 있다.80) 그러나 李承晩의 이러한 전보는 그의 전보철에는 보존되어 있지 않다.
 
 
 
 日本政府는 代表團의 身邊安全 보장 요구
 
  미국정부가 일본을 워싱턴회의에 정식으로 초청한 것은 8월13일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정부 안에서는 회의 의제인 해군 군축문제나 동아시아-태평양 문제와 관련해서는 일본이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美日관계를 중시하는 하라 타카시(原敬) 수상은 그 관계를 평화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8월23일에 일본정부는 회의에 참가하겠다고 회답했다. 그러한 일본으로서는 이미 해결이 끝난 한국문제, 곧 일본의 한국관할이라는 현실의 변경으로 이어지는 어떠한 타협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81)
 
  일본정부는 10월14일에 자국대표단에 줄 「총괄훈령」을 확정했는데, 이 문서는 한국문제가 회의에 상정되는 것 자체를 반대해야 된다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번 회의를 기화로 하여 조선인 가운데 독립의 기세를 올리려고 망동을 시도하고 있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소위 「조선문제」가 회의에 상정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러한 경우에는 본 문제와 같은 것은 논의의 대상이 못된다고 곧장 거척해야 한다.〉82)
 
  또 일본정부는 한국사정 및 한국독립운동에 정통한 사람을 워싱턴에 보내어 일본대표단을 지원하라고 조선총독부에 지시했고, 이 지시를 받은 총독부는 사무관 1명 이외에 경기도 경찰부장 치바 사토루(千葉了)를 비롯하여 영자신문 「서울프레스(Seoul Press)」 주필·대학교수 등을 워싱턴에 파견하여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역선전을 펼치도록 했다.83)
 
  한편 일본정부는 미국에 대해서 일본대표단의 신변안전을 위해 한국독립운동자들에 대한 경계와 단속을 요구했다. 이에 미국정부는 필요한 조치를 강구했다고 말하고 일본정부가 입수한 정보가 있으면 제공해 달라고 회답했다.84)
 
  국내에서도 긴장은 고조되고 있었다. 「東亞日報」는 워싱턴회의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 거의 매일같이 회의와 관련된 논설과 기사로 국민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한편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구실을 하던 「每日申報」는 워싱턴회의와 한국문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 한국문제의 논의 가능성을 부인했다.85) 또 尹致昊의 일기를 보면, 한국인들이 이번 회의에서 일본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조선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논리라고 적혀 있다.86)
 
 
 
 콜롬비아 公使館이었던 건물 세내어
 
   회의 개막에 맞추어 구미위원부는 외국대표들을 비롯한 회의관계자들의 접대 등에 사용할 집을 세내었다. 외국공관들이 몰려 있는 노스웨스트 16가 1327번지의 4층짜리 건물이었다. 얼마 전까지 콜롬비아국 공사관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그 건물을 월세 550달러에 6개월 동안 빌린 것이다. 李承晩은 11월1일에 돌프와 함께 이 집에 입주했다.87) 구미위원부는 한국대표단의 접대비 등 외교활동비로 2만 달러를 책정했다. 동포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공황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구미위원부의 모금활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9월부터 11월8일까지 2만1,219달러가 모금되었다. 캘리포니아 일대를 비롯하여 시카고·뉴욕 등 미국 본토 동포들이 1만1,539달러, 하와이 동포들이 7,088달러, 그리고 멕시코와 쿠바의 가난한 동포들도 각각 484.15달러와 225달러를 모아 보냈다. 동포들뿐만이 아니라 한국에 호의적인 중국인들도 1,883달러를 희사했다. 이들은 주로 공채표를 사 준 것이었다.88)
 
  구미위원부는 이렇게 수합된 자금 가운데에서 임시정부로도 조금씩 송금하고 있었다. 그런데 李承晩이 임시정부로 보낸 10월17일자 전보에서 〈미화 오백원 보냈소. 여기도 돈 없어 고난하오. 이희경 소환 아라사(러시아)와 상관 있으면 대사 위태〉라고 하고 있는 것은 이희경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오게 된 사실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89)
 
  구미위원부는 또 1922년 1월부터 4월 사이에 국내에서 보내온 6,217달러를 포함하여 2만3,299달러의 재정수입이 있었다.90) 이처럼 구미위원부는 워싱턴회의를 전후하여 4만5,000달러 이상의 자금을 수합했는데, 이는 서재필이 동포들에게 요망했던 10만 달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으나 구미위원부 설립 이래로 가장 많은 액수였다.
 
 
 
 휴즈 장관의 폭탄선언
 
  워싱턴회의는 예정대로 1921년 11월12일에 개막되었다.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의 5개국 간의 해군 군비제한 문제와 이들 5개국에 중국·네덜란드·벨기에·포르투갈의 4개국을 더한 9개국 간의 태평양 및 동아시아 문제를 의제로 한 회의였다.
 
  공교롭게도 회의 개막 직전인 11월4일에 일본의 하라 타케시 수상이 도쿄역에서 암살되었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암살범이 한국인이라고 보도되는 바람에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행동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이 한결 심화되었다.91)
 
  개회 첫날의 본회의에서 휴즈는 주최국 대표단장으로서 연설을 하면서 국제회의에서는 이례적인 방법으로 미국 해군 군축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했다. 그것은 미국안의 극적 효과를 부각시킴으로써 미국의 여론뿐만 아니라 국제 여론의 지지를 획득하고 군축교섭에서 완벽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용의주도한 계산에 따른 폭탄선언이었다.92) 회의는 해군 군비제한위원회와 태평양 및 동아시아문제위원회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휴즈의 제안은 미국·영국·일본의 주력함 톤수의 비율을 5 대 5 대 3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과의 비율을 10대 7로 할 것을 주장했던 일본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5개국은 위의 세 나라의 비율에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각각 1.75의 비율을 갖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해군 군축 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이 강력히 바라던 대로 英日동맹은 폐기되고, 그 대신에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의 태평양 방면의 이해관계를 규정한 4개국 조약이 성립되었다.
 
 
 
 中國人과 美國人들도 支援 나서
 
   회의의 또 하나의 의제인 동아시아 문제에는 당연히 한국문제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독립운동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협조에 의한 억제」를 통하여 동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에 안정된 국제질서를 실현하고자 하는 하딩 정권으로서는 일본이 그들의 내정문제라고 주장하는 한국문제를 굳이 다루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대표단에게 회의에 출석하여 발언할 기회가 주어질 턱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대표단은 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단에 직접 청원하기로 하고, 12월1일에 「군축회의에 대한 한국의 호소」라는 문서를 배포하고,93) 이듬해 1월25일에 다시 「한국대표단의 추가호소」라는 문서를 배포했다.94)
 
  상해로부터도 각종 문서가 답지하고 있었다. 신한청년당은 회의 직전인 11월7일에 한국의 독립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며 각국은 한국의 독립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휴즈에게 보냈다.95)
 
  廣東에서 결성된 中韓協會는 11월19일에 중국어로 된 선언서, 미국정부와 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단에 대한 전보, 중국대표단에 대한 전보와 각종 문서를 작성하여 보냈다.96)
 
  한국대표단을 지원하는 미국인들의 활동도 한국친우회를 중심으로 여러 방면에서 전개되었다. 한국친우회 회장 톰킨스(Floyd W. Tomkins)는 워싱턴회의가 시작되기 전인 6월28일에 이미 주미 일본대사 시데하라 키주로(幣原喜重郞)에게 편지를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에 일본의 위신을 높이고 안전을 강화하며 세계의 모든 정의로운 사람들과의 우호를 굳건하게 하는 것이라고 충고했었다.97)
 
  톰킨스는 11월11일에는 미국대표단장인 휴즈에게 편지를 보내어 한국인들이 회의에서 그들의 주장과 요구를 진술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목사인 톰킨스는 동양에서 서구문명, 특히 기독교를 가장 먼저, 그리고 폭넓게 받아들인 한국인들에게 미국인들이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때가 지금이라고 말했다. 그는 열강이 2천만 한국 국민의 평화적인 호소를 계속 외면한다면 그들은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전쟁과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98)
 
  11월22일에 필라델피아의 한 침례교회에서 톰킨스 주재로 대중집회가 열렸는데, 회의 참가자들은 한국이 독립된 완충국(an independent and buffer state)이 되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워싱턴회의에 참석한 미국대표단이 1882년의 조미수호조약에 합치하는 공평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99) 톰킨스는 이 결의문을 미국대표단에 전달했다.100)
 
  시카고의 한국친우회와 펜실베이니아州 레딩(Reating)市의 한국친우회도 각각 미국대표단에 편지를 보냈다.101) 또한 11월29일에는 뉴저지州의 애틀랜틱시티에 있는 한 장로교회의 여성선교회가 회의를 열고 한국의 현재의 지위를 개선하기 위하여 현실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워싱턴회의에 요청하기로 결의하고, 그 사실을 휴즈에게 편지로 전했다.102) 이어 12월14일에는 워싱턴에 있는 건턴(Gunton) 성당 장로교 선교회에서도 200만 명 이상의 한국 장로교인들이 억압받고 있다면서 한국대표가 회의에서 발언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지를 국무부에 보냈다.103) 또한 이듬해 1월15일에는 한국에 동정적인 미국인 49명의 서명으로, 한국문제를 회의에 상정하여 참가국들로 하여금 한국인들의 주장을 잘 생각해 보게 해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정한경을 통하여 휴즈에게 보냈다.104)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지방의 미주동포들도 미국대표단을 상대로 청원활동을 벌였다.105)
 
 
 
 「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던 한국대표단은 상해에서 보내온 국내 인사들의 「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를 받고 크게 고무되었다. 이 문서에는 국민공회 대표 명의의 李商在와 梁起鐸을 필두로 하여 황족대표 李堈(이강), 귀족대표 金允植,·閔泳奎, 기독교 대표 尹致昊, 천도교 대표 鄭廣朝, 조선불교회 대표 李能化, 산업대회 대표 朴泳孝, 전국 변호사 대표 許憲, 청년회 연합회 대표 張德秀, 계명구락부 대표 金炳魯, 전국의사회 대표 吳兢善 등 종교계 및 사회단체 대표 100명(각 단체 2명)과 道·府·郡 대표 271명 등 모두 374명의 서명과 날인이 되어 있었다.
 
  이 청원서는, 워싱턴회의가 동양의 중심인 한국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지 못하면 동양의 평화는 보전할 수 없고 따라서 세계평화를 성취할 수 없다고 전제한 다음, 〈이에 우리는 日本의 韓國合倂을 부인하는 동시에 在上海 韓國政府를 완전한 한국정부로 성명하고 因하야 列國에 향하야 우리 한국에서 파견하는 委員의 出席權을 요구하고, 동시에 열국이 日本의 武力政策을 방지하야 世界의 平和와 한국의 獨立自由를 위하야 노력하기를 기원하노라〉106)라고 주장했다.
 
  「獨立新聞」이 이 글의 전문을 크게 게재하면서 서명자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것은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임은 말할나위도 없다.107)
 
  「태평양회의서」를 보고 서재필과 돌프는 매우 기뻐하면서 당장 전문을 번역하여 인쇄하자고 했다. 그러나 李承晩은 극력 말렸다. 서명자들이 곤욕을 당할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108) 그는 이 문서를 공포하는 것이 일에 크게 도움이 되겠으나 서명자들이 체포될 것이 염려된다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임시정부로 물었고,109) 임시정부는 필요하면 공포해도 좋다고 회답했다.110) 그리하여 한국대표단은 이 「태평양회의서」의 전문을 영어로 번역하여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단과 언론사에 배포했다.
 

 
 
 휴즈가 日本代表에게 「太平洋會議書」 보여
 
  국내 저명인사들의 이름이 망라된 이「태평양회의서」가 발표되자 일본인들은 대표자들의 서명이 두세 사람의 필치인 점 등 몇 가지 의문점을 들어 그것이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대표단은 「태평양회의서」가 진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1947년에 일시 귀국한 서재필의 구술을 토대로 하여 집필한 金道泰의 「徐載弼博士 自敍傳」에는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다.
 
  휴즈 장관이 일본대표단장 가토 토모사부로(加藤友三郞)와 대표 도쿠가와 이에사토(德川家達)를 만났을 때였다. 한국대표단이 제출한 청원서가 화제가 되었다. 일본대표들은, 李承晩 등은 수십 년 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국의 실정을 모를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모른다고 말하면서, 한국대표단의 청원서를 묵살하려고 했다. 그러자 휴즈는 이 「태평양회의서」를 보여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조문서가 아니오. 내가 당신들에게 사적으로 권하는 바는 인도적 입장에서 한국의 무고한 양민을 학대하지 말라는 것이오. 일본은 일등국가입니다. 일등 국가답게 도량과 관용을 보여야 할 것이오. … 오늘은 이렇게 비공식 권고에 그치거니와, 만일 일본이 한국 통치 방침을 고치지 아니하게 되면 결국에는 미국의 교회와 미국의 여론이 격앙하게 되어 미국은 부득이 공식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오』
 
  그래서 일본대표들은 4개월 이내로 한국정책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111)
 
  그러나 회의를 총괄하고 있던 휴즈가 일본대표단을 만나 과연 이런 말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美國기자와 金東成의 李承晩 關係記事
 
   워싱턴회의는 한국대표단의 요구를 묵살한 채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실망과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갔다. 12월13일에 英日 동맹조약을 대신할 4국(美·英·日·프랑스) 조약이 체결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하와이에서는 대표단 앞으로 〈사국동맹된 후 한국 일 성패를 알기 원하오. 불여하면 정책 변경 필요하니 답하시오〉라고 타전해 왔다.112)
 
  李承晩은 「태평양회의서」를 번역한 팸플릿을 들고 회의장 입구에 서서 각국 대표들에게 직접 나누어 주었다. 대표들 가운데에는 얼굴을 돌리기도 하고 입을 다물고 그를 못 본 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팸플릿을 배포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지켜본 미국의 한 신문기자는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는 학자풍의 인물이라고 묘사하면서, 「한국 대통령」인 李承晩이 영웅의 행동을 거부하고 기품 있고 조용한 고집으로 한국문제가 세계의 과제가 되게 하고 있다고 썼다.113)
 
  한편 호놀룰루에서 만국신문기자대회에 참가하고 워싱턴으로 와서 워싱턴회의를 취재했던 「東亞日報」 특파원 金東成은 이때의 李承晩의 활동 모습을 아주 실감나게 묘사했다.
 
  〈나는 근 10년 전에 미국에 유학하였을 시에 博士와 面晤(면오: 서로 만나 봄)한 事이 有하다. 박사는 신체가 비대하여졌다. 박사는 독립협회 시에 7개년간 감금의 고생을 經한 여독으로 소위 풍증이 면상에 노현되어 담화할 시에 입술이 조금 실룩실룩함이 그 특징이다. 檀君유족 특성인 溫厚寬大한 資性은 박사 자신에 의하야 외국에 소개된다. 기술함과 如히 대륙은행 건물 9층 위에는 재류동포의 사무실이 有하지마는 박사의 사저는 워싱턴의 각국 大公使館이 나열한 제16가 스컷 서클 부근에 在하다. 그 집은 전 콜롬비아국 공사관으로 사용하던 관사인데, 인근에는 워싱턴 내의 일류 주택이 있다. 미국 상하의원의 사택도 이 方面에 在하고 英伊日 등 대사관이 亦 이 近邊에 在하다.… 박사는 서양인 고문과 동거한다. 그 고문은 유명한 변호사인데, 근일에는 失音하야 법정에서 친히 변호키는 불능하나 워싱턴 정객교제에 매우 능하고 또 유수한 통계학자이다. 그래서 워싱턴의 일류 정객은 박사의 사택에 출입함이 빈번하고, 또 그 안의 요리인은 시카고 재류동포 중 1인이 來하야 그 任에 당한 것인데, 그는 言하기를 자기는 평생에 學得한 것이 음식요리인 즉 이로써 조선민족의 운동을 助함에 그 미충을 표한다 한다. 박사에게는 워싱턴이 고향이나 無異하다. 친우도 많고 교제범위도 넓다. 전 대통령 윌슨氏가 프린스턴 대학 총장으로 재임 시에 박사는 박사학위를 得하야 師弟의 교분이 有하므로 박사의 사교상 범위가 확대함은 무리가 아니다. 박사의 서양인 고문인 돌프氏는 곧 박사의 지배인이다. 금번 워싱턴회의에 내참한 諸國委員이나 미국 일류 정객이 박사의 사택에 출입할 시에는 먼저 고문 돌프氏에게 통지한다.
 
  워싱턴에 있는 각 사진통신사에서는 박사의 사진을 가끔 요청하는데, 一日은 박사의 외출을 聞하고 통신사원 4, 5인이 來하야 자동차로 入하는 박사를 촬영하는 것을 내가 목도한 事가 有하다. 박사는 미국 사정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박사학위를 政治전공에 의하야 得하얏으므로 친우는 대개 內外政治家에 多하다. 박사는 정치가일뿐만 아니라 또 종교가이다. 기독교의 독신자이므로 미국 각 교회에서 비상히 흠모하여, 주일학교의 학과에도 박사의 내력을 교수한다 한다.
 
  박사 사택은 4층 가옥인데, 내장의 화려함은 조선궁전도 불급할 만하다. 대륙은행 건물상의 조선재류동포의 사무실은 곧 구미위원부의 사무실이라. 이 사무실 안에서 무엇을 획책하야 워싱턴의 대무대를 중심으로 삼고 어떻게 활동을 하는지, 이에 대하야는 耳聞하고 또한 목도한 바가 불소하지마는 事가 政治에 涉(섭: 걸침)하야 금일에 이를 보도치 못함은 부득이한 事이라 한다.〉114)
 
  언론자유가 근본적으로 제약된 상황에서 국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려는 의도가 역력한 이러한 기사는, 李承晩이 워싱턴회의에서 거둔 성과와는 상관없이, 뒷날 그가 누리는 카리스마적 권위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金東成은 뒷날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공보처장을 지냈다.
 
 
 
 李承晩에게 용기 준 웰즈와의 對話
 
  워싱턴회의에서 논의된 동아시아 문제는 모두 중국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이 20세기 초두부터 제창해 온 중국에 관한 문호 개방, 영토 보전, 기회 균등 등의 문제가 회의 참가국들의 동의를 얻어 중국에 관한 9개국 조약이 체결되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山東半島의 옛 독일 권익을 중국에 반환하는 조약이 맺어지고,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시베리아에 파견되어 있는 일본군의 철수와 얍(Yap)도에 관한 양해각서가 이루어졌다.115)
 
  이 조약들이 체결됨으로써 1931년에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킬 때까지 거의 10년 동안 동아시아 국제정치질서를 지배하게 되는 이른바 「워싱턴 체제」가 성립되고, 회의는 1922년 2월6일에 폐막되었다.
 
  워싱턴회의는 李承晩으로서는 이른바 「신외교(New Diplomacy)」라는 이념에 입각하여 동아시아에 새로운 국제정치질서가 형성되는 현장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던 값진 기회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실망과 분만과 고독감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李承晩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준 사람은 유명한 H.G. 웰즈(Herbert George Wells)였다. 영국의 작가 겸 저널리스트이자 사회학자, 계몽적 역사가로서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그는 회의를 취재하기 위하여 위싱턴에 와 있었다. 회의 참가자들과 각계 인사들은 웰즈를 초청하려고 기승을 부렸다. 그러한 웰즈가 어느 날 李承晩의 만찬 초청에 응했다. 웰즈는 李承晩에게 인류의 자멸을 막으려면 세계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그의 이상주의적 지론을 강조했다. 李承晩은 웰즈에게 동아시아의 정세를 설명하고 독립된 한국의 역할이 동아시아의 평화유지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것을 역설했다. 李承晩은 웰즈가 자신의 생각에 공감한다고 느꼈다. 웰즈와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면서 李承晩은 〈여러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정치인들이 웰즈와 같은 역사인식을 지니고 있다면 국제관계를 규정할 그들의 결정은 한결 현명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올리버는 적고 있다.116)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한국독립운동자들이 그토록 기대했던 워싱턴회의가 한국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조차 없이 끝나자, 독립운동자들 사이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李承晩의 정치생명을 뒤흔드는 거센 풍파가 일기 시작했다. ●
 
 

  1) 國會圖書館編,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1976, 國會圖書館, 340~341쪽.
 
  2) 「獨立新聞」, 1920년 4월8일자, 「臨時居留民團制」. 3) 「僑民團代表會召集布告書」,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二권) 하와이·美洲僑民團體關聯文書」, 1998, 延世大現代韓國學硏究所, 554쪽. 4)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2004, 연세대 출판부, 187~188쪽 참조. 5)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Ⅰ)分冊」, 1967, 原書房, 766~769쪽. 6) 같은 책, 767쪽.
 
  7) 「新韓民報」, 1921년 7월28일자, 「하와이에 동지회 설립」;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Ⅰ) 分冊」, 765~766쪽. 8) 위와 같음. 9)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344쪽. 10) 방선주, 「1921~1922년의 워싱턴회의와 재미한인의 독립청원운동」, 「한민족독립운동사(6) 열강과 한국독립운동」, 1989, 국사편찬위원회, 214쪽에서 재인용. 11) “Koreans Wreck Newspaper Office,” The Honolulu Advertiser, Aug. 3th 1921 ;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344~345쪽. 12) 전택부, 「人間 申興雨」, 1971, 基督敎書會, 168~169쪽. 13) 「東亞日報」, 1921년 7월24일자, 「申興雨君을 보내노라― 汎太平洋敎育會議에」. 14) 金乙漢, 「千里駒 金東成」, 1981, 乙酉文化社, 45~48쪽; 「東亞日報」, 1921년 10월17일자, 「萬國記者大會」, 10월18일자, 「萬國記者大會에 與하노라」, 10월24일자, 「我社代表金東成 副會長에 當選」. 15) “Says Koreans Ask Liberty,” The New York Times, Aug. 8th 1921.
 
  16) 有賀貞, 「ワシントン體制の形成過程Ⅰ. 協助による抑制―アメリカ」, 「日本政治學會年報: 國際緊張緩和の政治過程」, 1969, 岩波書店, 1~52쪽 참조. 17) 「東京朝日新聞」, 1921년 7월13일자. 18) 麻田貞雄, 「ワシントン會議と日本の對應」, 入江昭·有賀貞編,「戰間期の日本外交」, 1984, 東京大學出版會, 23쪽. 19) 「新韓民報」, 1921년 7월28일자, 「재무부와 위원부 간의 내왕공문」.
 
  20) 「新韓民報」, 1921년 10월27일자, 「구미위원부통신」 제32호. 21) 「新韓民報」, 1921년 8월4일자, 「구미위원부통신」 제30호. 22) Koric→ Minchanho, July 20th 1921, The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ed,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2000, Kukhakcharyowon, p.152. 23) 「新韓民報」, 1921년 8월11일자, 「열강평의회」. 24) 「新韓民報」, 1921년 7월21일자. 25) 「新韓民報」, 1921년 8월11일자, 「임박한 군비제한대회와 한국문제」. 26) Koric→ Reesyngman, July 26th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153. 27) 「李承晩이 李商在에게 보낸 1921년 7월29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六권), 簡札1」, 184~185쪽. 28) Kopogo→ Reesyngman, Aug. 2th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158. 29) 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朝鮮民族運動年鑑」, 1921년 8월5일조. 30) 「李承晩이 申翼熙에게 보낸 1921년 8월4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六권) 簡札1」, 67쪽.
 
  31)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八권) 大韓民國臨時政府關聯文書 3」, 363~372쪽. 32) 李炫熙, 「太平洋會議에의 韓國外交後援問題」, 「韓國史論叢」 제1집, 1976, 誠信女師大 國史敎育科, 53~79쪽 참조. 33) 「獨立新聞」, 1921년 8월15일자. 34) 「朝鮮民族運動年鑑」, 1921년 8월18일조. 35) 「太平洋會議外交後援會 幹事會 組織」, 「通告文」,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八권) 大韓民國臨時政府 關聯文書 3」, 375~381쪽. 36) 「警告同胞文」, 위의 책, 507~531쪽. 37) Chung→ Reesyngman, Aug. 1st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157. 38) 「李承晩이 申翼熙에게 보낸 1921년 8월4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六권) 簡札1」, 68쪽. 39) Syngman Rhee, Log Book of S.R., 1921년 8월16일조. 40)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219쪽.
 
  41) 「東亞日報」, 1921년 8월24일자, 「桑港에 着한 李承晩― 태평양회의와 리승만의 말」.
 
  42) 「新韓民報」, 1921년 8월25일자, 「리대통령의 연설」. 43) Henry Chung→ Syngman Rhee, Aug. 18th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160. 44) Rhee→ Kopogo, Aug. 19th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161. 45) Syngman Rhee, Log Book of S.R., 1921년 8월19~27일조. 46) 「臨時大統領函 제1호: 政務指示」,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六권) 大韓民國臨時政府 關聯文書 1」, 76~82쪽.
 
  47) “Korea Will Press Claims”, The New York Times, Aug. 29th 1921. 48) Reesyngman→ Kopogo, Aug. 30th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164. 49) 「臨時大統領函 제1호: 政務指示」,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六권) 大韓民國臨時政府 關聯文書 1」, 76~82쪽. 50) Reesyngmsn→ Whang, Aug. 30th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163. 51) Reesyngman→ Kohakio, Aug. 29th, 1921, ibid, p.162. 52) Yisyngman→ Kopogo, Sept. 2nd 1921, ibid, p.167. 53) Yiekwan→ Tatongyong Koric, Sept. 9th 1921, ibid, p.174~175. 54)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六권) 大韓民國臨時政府 關聯文書 1」, 363쪽. 55) 「太平洋會議外交後援에 대하여」, 주요한編著, 「安島山全書」, 1963, 三中堂, 601쪽. 56) 같은 글, 604쪽. 57) 「朝鮮民族運動年鑑」, 1921년 9월23일조. 58) 위와 같음.
 
  59) 「宣言書」,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八권) 大韓民國臨時政府 關聯文書 3」, 387~389쪽. 60) 「獨立新聞」, 1921년 10월5일자, 「太平洋會議와 우리의 經費問題」. 61) 「韓國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篇 其一)」, 654쪽. 62) 李海暢, 「韓國新聞史硏究」, 1971, 成文閣, 231~233쪽;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Ⅱ)」, 169~170쪽. 63) 「國務院呈文(제28호) 政務報告」,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六권) 大韓民國臨時政府 關聯文書 1」, 409~410쪽. 64) 閔弼鎬, 「中國護法政府訪問記」, 金俊燁編, 「石麟 閔弼鎬傳」, 1995, 나남출판, 178쪽, 214쪽. 65) 위의 글, 192쪽, 234~235쪽.
 
  66) 같은 글, 193쪽, 236쪽. 67) 같은 글, 193쪽, 237쪽. 68) 裵京漢, 「孫文과 上海臨時政府― 申圭植의 廣東訪問(1921년 9~10월)과 廣東護法政府의 韓國臨時政府 承認問題를 중심으로」, 「東洋史學硏究」(56), 1996, 東洋史學會, 73~100쪽 참조. 69) 藤井昇三, 「ワシントン體制の形成過程Ⅱ. 平和からの解放―中國」, 「日本政治學會年報: 國際緊張緩和の政治過程」, 1969, 岩波書店, 53~98쪽 참조. 70) Yeikwan→ Coric, Oct. 9th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191. 71) 閔弼鎬, 위의 글, 205쪽, 256쪽. 72) Koric→ Konation, Sept. 7th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171. 73) Syngman Rhee→ Yiekwan, Sept. 14th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176. 74) Jaishon→ Harding, Sept. 24th 1921, Christian→ Hughes, Sept. 26th 1921, Hughes→ Christian, Oct. 5th 1921, 500A4/201, St.Dec, File 10-29(National Archives, Washington), Record Group59, Box5244. 75) 「美國華盛頓市에서 開會하는 軍備制限會議에 出席할 大韓民國代表團任命案을 同意하는 證書」,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 (제六권) 大韓民國臨時政府 關聯文書 1」, 427~436쪽.
 
  76) 「李承晩이 申圭植에게 보낸 1921년 9월30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 (제十六권) 簡札 1」, 66쪽. 77) “An Appeal from the Korean Mission to the Washington Conference, Octover1, 1921,” Korea Review, Octover 1921, pp.6~8. 78) 미 국무성 문서 #895.01 Memorandum(Division of Far Eastern Affairs, 1921.10.13), 고정휴, 앞의 책, 412쪽 註64. 79) “Papers Relating to Pacific and Far Eastern Affairs Prepared for the Use of the American Deligation to the Conference on the Limitation of Armament, Washington, 1921~1922”, 고정휴, 앞의 책, 391~392, 397~398쪽. 80)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228쪽; 朝鮮總督府警務局, 「大正11年 朝鮮治安狀況(國外篇)」, 金正柱編, 「韓國統治史料(제七권)」, 1971, 韓國史料硏究所, 119쪽. 81) 長田彰文, 「日本の朝鮮統治と國際關係―朝鮮獨立運動とアメリカ 1910~1922」, 2005, 平凡社, 329~330쪽. 82) 방선주, 앞의 글, 217쪽에서 재인용. 83)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224쪽; 千葉了, 「朝鮮獨立運動秘話」, 1925, 帝國地方行政學會, 176~177쪽.
 
  84)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228쪽. 85) 「每日申報」 1921년 8월22일자, 「太平洋會議와 朝鮮問題」. 86) 「尹致昊日記(八)」 1921년 8월11일조, 1987, 國史編纂委員會, 281~282쪽. 87) 「新韓民報」, 1921년 11월10일자, 「구미위원부통신」 제36호; Syngman Rhee, Log Book of S.R, 1921년 11월1일조. 88) 「新韓民報」, 1921년 11월24일자, 「구미위원부통신」 제38호. 89) Reesyngman→Kopogo, Oct. 17th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Ⅳ., p.198. 90) 「歐美委員部財政報單」 제11호, 朝鮮總督府警務局, 「大正11年 朝鮮治安狀況(國外篇)」, 「朝鮮統治史料(제七권)」, 154~155쪽. 91) “Japanes Premier Stabbed to Death by Korean Fanatics,” The New York Times, Nov. 5th 1921. 92) 有賀貞, 앞의 글, 34쪽.
 
  93) “Korea’s Appeal to Arms Conference,” Korea Review, Octover 1921, pp.4~7. 94) “Supplementary Appeal by Korean Mission,” Korea Review, February 1922, pp.1~2. 95) Young Korean Independence Party Representative→ Hughes, 長田彰文, 앞의 책, 334~335쪽. 96) 「中韓協會特別幹事會公牒」, 「中韓協會宣言書」, 「快郵代電」, 「致各社團通電」, 「快郵代電」, 「致美國政府及華府會議各國代表電」, 「致華府會議中國代表電」,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八권)」, 404~419쪽. 97) “Friend of Korea Writes to Japanes Envoy,” Korea Review, August 1921, pp.13~14. 98) Tomkins→ Hughes. Oct. 11th 1921, Basil Miles(Secretsry of the American Delegation)→ Tomkins, Oct. 29th, 1921, 고정휴, 앞의 책, 415쪽. 99) “Mass Meeting,” Korea Review, December 1921, p.15. 100) Tomkins→ Hughes, Nov, 23th 1921, 고정휴, 위의 책, 415쪽. 101) M.L. Guthapfel→ Hughes, Nov. 11th 1921, Frank S. Livingwood→ Hughes, Dec. 5th 1921, 고정휴, 위의 책, 415쪽. 102) Hamilton & Howell→ Hughes, Nov. 29th 1921, 長田彰文, 앞의 책, 335쪽. 103) Warden Nick Wilson→ Stanly, Dec. 16th 1921, 長田彰文, 위의 책, 335~336쪽. 104) The Undersigned Citizens of the United States→ Hughes, 長田彰文, 위의 책, 336쪽. 105) 고정휴, 앞의 책, 415쪽.
 
  106) 「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八권) 大韓民國臨時政府 關聯文書 3」, 391~403쪽. 107) 「獨立新聞」, 1921년 11월19일자, 「國內同胞가 太平洋會議에 致書」 및 「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 108) 「李承晩이 李商在에게 보낸 1921년 12월30일자 편지」, 「雩南李承晩文書 東文篇(제十六권) 簡札 1」, 186쪽. 109) Yisingman→ Kopogo, The Syngman Rhee Telegrams, vol. Ⅳ, p.255. 110) Kopogo→ Koric, Dec. 31th 1921, ibid, p.254.
 
  111) 金道泰, 「徐載弼博士自敍傳」, 1948, 首善社, 255~256쪽. 112) Konation→ Koric, Dec. 12th 1921, The Syngman Rhee Telegrams, Ⅳ., p.245. 113) Cyril A. Player, “Syngman Rhee,” Arms- and the Men, 1922, The Evening News Association, p.111.
 
  114) 「東亞日報」, 1922년 2월11일자, 「李博士와 그 活動」. 115) 日本外務省, 「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下)」, 1965, 原書房, 3~21쪽; 김용구, 「세계외교사」, 1998, 서울대학교 출판부, 596~598쪽. 116)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ith, 1960, Dodd Meed and Co, pp.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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