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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性매매와의 전쟁’ 벌인 金康子 前 종암경찰서장

“性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性病 아동범죄 등 크게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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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매매 여성의 인권보호가 우선, 예산 뒷받침에 따라 단계적으로 대처해야

金康子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객원교수
⊙ 1945년 전남 구례 출생.
⊙ 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석사.
⊙ 서울경찰청 민원봉사실장, 同 성폭력상담실장, 충북옥천경찰서장, 서울종암경찰서장.
    경찰청 여성·청소년과장 역임. 現 세계여자경찰연합회원,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객원교수,
    여명회(성매매여성과의 비공식 모임) 회장.
⊙ 저서 : <나는 대한민국 경찰이다> 등.
⊙ 상훈 : 공무원인권상, 여성을 돕는 여성상, 여성권익디딤돌상, 근정포장, 녹조근정훈장 등.
서울 강남 선릉역 인근의 유흥가.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성매매는 음성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性(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지 4년이 지났다. 그동안의 강력한 단속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集娼村(집창촌)이 사라지고 성매매 건수가 줄어드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성매매는 더욱 확산되고 陰性化(음성화)되었다. 性病(성병)은 방치되고 있으며,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인권유린은 철저히 가려지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성매매 단속에 경찰력이 집중 투입되면서 치안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으며, 그 때문에 아동과 청소년들의 안전이 위협 받고 있다.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것일까.
 
  충북 옥천경찰서장 재직 시 미성년자 고용 티켓다방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펼친 적이 있었던 나는 지난 2000년 1월 서울 종암경찰서장으로 부임하면서 ‘미성년자 성매매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당초 나는 성인 성매매도 함께 근절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성매매를 혐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컸다. 무엇보다 성매매 단속을 전담할 경찰력이 부족했다.
 
  처음에는 종암경찰서 내 경비·교통·수사·형사·방범 인력은 물론, 예하 파출소 등에서 몇 명씩 차출하여 성매매 단속 전담반을 만들려고 했지만, 곧 포기했다. 그랬다가는 당장 해당 부서 본연의 임무에 차질을 초래할 판이었다. 상급 경찰기관 등으로부터 인력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미성년자 性매매 단속
 
  이런 현실 속에서 선택한 것이 바로 성매매 단속의 범위를 좁힌 미성년자 성매매 단속이었다. 미성년자 성매매 단속에 집중하기에도 경찰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고민 끝에 성매매 업주들 스스로 미성년자들을 내보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일단 ‘바지 사장’(고용 사장) 위에 군림하고 있는 실제 업주들의 명단을 파악한 뒤, 그들에게 “만약 미성년자를 내보내지 않으면 입건하고 그 신상을 공개하겠다”고 압박했다. 전임 서장들 가운데도 미성년자 성매매 단속을 추진한 분들이 있었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은 실제 업주가 아닌 바지 사장을 입건하는 선에서 수사가 마무리됐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압박이 가해진 그날 밤부터 미아리 집창촌 골목에서는 짐을 싸들고 사라지는 미성년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업소에서는 무려 15명의 미성년자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미성년자를 내보낸 후 264개 업소를 6개 구역으로 나눈 뒤 암행단속을 실시했다. 만약 암행단속을 통해 특정 구역에서 미성년자를 고용해 성매매를 시킨 사례가 단 한 건만 발생돼도 그 구역 全(전)업소에 책임을 물었다. 미성년자 고용 업소 업주는 입건하고, 같은 구역 내 다른 업소들 앞에는 경찰복을 착용한 방범 순찰대원을 고정 배치한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되면 손님이 끊기기 때문에 업소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미성년자 고용을 적극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
 
  미아리에서 시작된 미성년 성매매 근절은 전국으로 이어졌다. 경찰 사상 처음으로 전국적인 미성년 성매매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언론과 국민은 미성년 성매매와의 전쟁을 벌이는 경찰을 적극 지지했다.
 
  나는 경찰청장의 지시를 받고 전국 지방청장에게 단속인원을 최소화하면서 미성년 성매매를 근절할 수 있는 전략을 전수했다. 그 결과 2000년 말에는 미아리뿐 아니라, 전국의 집창촌에서 미성년자 고용이 근절됐다. 만약 당시 성인 賣買春(매매춘) 여성까지 함께 단속했다면, 업주들은 그렇게 쉽게 꼬리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한 性매매 여성의 눈물
 
  미성년 성매매를 근절한 다음 나는 성인 성매매 근절에 나섰다.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일단 성매매 여성이 쉬는 시간인 낮에 집창촌에 나가 보았다. 그런데 한 업소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문이 잠겨있었고, 밤새 성매매를 하고 모든 여성들이 퇴근한 것으로 여기고 있던 터라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얼른 업주를 수배하여 문을 열었더니, 업소 안에서 한 20대 초반 여성이 울고 있었다. 그 옆에는 다른 여성들이 자고 있었다. 우는 이유를 물었더니 “업주의 감시 때문에 근 2년 동안 아버지의 안부는커녕 生死(생사)조차 알지 못하고 지내는 서러움이 그만 터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날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 생일이었다.
 
  놀라고 화난 마음에 설마 하며 모든 업소의 잠겨 있는 문을 따게 했다. 업소마다 안에서는 성매매 여성들이 쉬거나 자고 있었다.
 
  알고 보니 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업주에게 거금의 빚을 지고 있었다. 혹 그들이 외출을 핑계로 나가 빚을 갚지 않고 도망이라도 갈까봐 업주들은 여성들을 안에 가둔 채 밖에서 문을 잠근 것이다. 성매매 여성들은 이렇게 감금된 채 업소 내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이틀 후 난 경찰서 강당에 모든 성매매 여성을 모아놓고 “성매매를 조건으로 한 빚은 법률상 無效(무효)이니 원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알렸다. 또 民辯(민변)의 鄭然順(정연순) 변호사로 하여금 “밖에서 문을 잠근다든지 혹은 업주가 옷을 감추는 행위 등은 법적 처벌이 가능한 인권유린 행위”임을 설명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언론을 통해 이 사실을 적극 홍보했다.
 
  이런 활동을 벌이면서 나는 ‘이제는 성매매 여성들이 집창촌을 떠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집창촌을 떠난 이들은 전체의 10분의1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한 명씩 경찰서장실로 불러 이유를 물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집창촌을 떠나도 포주가 돈을 받기 위해 결국 자기를 다시 찾아낼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떠나는 것을 포기한 경우였다.
 
  다른 하나는 “가족 모두가 길바닥에 나앉게 되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던 절망적인 때 거금을 주어 가족들을 돌볼 수 있게 한 사람이 업주이기 때문에 의리상 떠날 수 없다”는 부류였다. 이들은 가족의 생계 때문에 집창촌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人權의 死角지대 집창촌
 
종암경찰서장 시절 미아리 집창촌을 순찰하는 김강자 총경.
  이 두 부류의 여성들은 집창촌을 떠난다 해도 결국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곳에서라도 성매매를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중 51%가 가출 여성이었으며, 빈곤한 가족을 두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경제 개념이 부족한 탓에 돈을 모으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자기보호능력도 부족해 업주들의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 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액의 의상비, 화장품비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업주에게 돈을 뜯기고 있었다. 밖에서 문을 잠그는 일, 목욕탕에 마담이 따라다니는 것 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빚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집창촌에서는 그야말로 업주의 말과 행동이 법이었다. 집창촌에서는 업주가 고용한 깡패가 경찰 역할을 맡고 있었다. 깡패들은 질이 나쁘거나 술 취한 손님의 폭력과 횡포를 막고, 업주의 요구에 따라 성매매 여성을 감시하고 벌을 주는 일까지 맡고 있었다. 집창촌은 人權(인권)의 死角(사각)지대였다.
 
  그렇게 된 원인은 바로 성매매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경찰이 집창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 여부를 파악하고 단속하는 것 자체가 다른 의미에서는 성매매를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러다 보니 경찰은 집창촌의 인권유린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업주와 일부 경찰관의 유착관계도 경찰이 집창촌 문제에 소극적인 이유가 됐다.
 
  나는 고심 끝에 자발적 성인 성매매는 단속보다는 보호 관리해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법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겐 몸과 마음을 망쳐가는 여성들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업주들을 불러 “자발적 성인 성매매는 단속하지 않을 테니, 성인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지 말고, 그녀들을 위한 몇 가지 조치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집창촌 단속 대신 보호 관리

 
김강자 서장이 말을 걸자 얼굴을 감추는 집창촌 여성들.
  첫째, 모든 업소 문의 잠금장치를 제거하고 성매매 여성들에게 휴일을 주는 등 자유를 보장해줄 것을 요구했다. 성매매 여성 대부분은 명절에도 외출을 못하는 신세였다(극소수지만 빚도 없고 매월 500만원 이상 벌며 자유롭게 출퇴근하는 성매매 여성도 있었다).
 
  둘째, 집창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 행위에 경찰이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경찰이 집창촌 內(내)를 정기적, 혹은 불시에 순찰해 업주가 고용한 깡패를 퇴출시키고, 손님의 횡포를 막는 것은 물론, 업주의 인권유린 여부도 감시하도록 했다.
 
  셋째, 업주와 성매매 여성이 1대9로 나누던 花代(화대)를 5대5로 공평하게 나누도록 하고, 성매매 여성 모두에게 월급 통장을 발급해 준 다음 경찰이 정기적으로 봉급 불입 여부를 점검할 수 있게 했다.
 
  넷째, 성병 검진소를 집창촌으로 옮기게 하여 성매매 여성들이 의무적으로 검진을 받도록 했다. 이와 함께 韓電(한전)과 소방대원이 집창촌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안전점검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성매매 여성들에게 돈의 중요성과 저축 방법 등을 알려 준 것이다. 교육을 통해 경제 관념이 어느 정도 잡혀가면서 성매매 여성들의 낭비는 많이 줄었다. 그중에는 2000만원 이상을 저축하는 여성들도 생겼다. 그들에게는 성매매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해 나갔다.
 
  사람들에게 길러지던 야생동물이 야생으로 돌아가지 못하듯이, 성매매 여성들은 극도로 외부세계를 두려워한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성매매를 그만두고 일반 사회로 복귀한 여성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경찰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미아리 집창촌 여성들은 안전하게 성매매에 종사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내 후임 경찰서장들은 성매매가 불법이라는 사실 때문에 집창촌 관리에 관해 종전의 방식으로 돌아갔다.
 
  나는 주택가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번져나가는 陰性(음성)적인 성매매는 결코 용납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산 퇴폐이발소 단속에 나섰다. 이들 업소는 업소 밖에 CCTV를 설치하여 경찰 동정을 내부에서 모니터하다가 경찰이 나타나면 문을 자동으로 잠글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무작정 쳐들어갈 수는 없었고, 노련한 작전을 구사해야 했다.
 
 
  퇴폐 이발소와의 전쟁
 
  일단 최소 두 명의 경찰관이 손님으로 가장해 화대를 지불한 뒤, 안내원이 리모컨으로 이중 철문을 열어주면 성매매방으로 들어가 콘돔 등 증거를 확보 후 밖에 잠복한 경찰 2진에게 휴대전화로 연락한다. 손님으로 가장한 경찰 2진 네 명이 화대를 지불하는 척하다가 카운터를 장악하여 종업원이 각방에 전달되는 비상벨을 울리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비상구를 막은 후 밖에 잠복한 3진에게 연락한다. 그러면 3진은 한꺼번에 업소 내로 진입해 각 방으로 진입해 성매매자를 붙잡는 것이다.
 
  성매매 업소 단속은 단속 인원이 많을수록 효과적이다. 업소 1개를 단속하는데 보통 10명 이상이 필요하다. 경찰이 동시에 성매매방에 들어가지 않으면 경찰이 들어가지 못한 방에서는 눈치를 채고 증거를 인멸한다. 어떤 성매수자는 재빨리 팬티를 주워 입고 나서 “아직 성매매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성매매 未遂犯(미수범)은 처벌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용한 콘돔을 미처 변기 속으로 흘려 보내지 못한 성매매 여성들은 콘돔을 그대로 삼키는 사례도 있었다.
 
  당시 종암경찰서 관내에는 퇴폐 이발소만 93개, 그 외 유사 성매매 업소까지 합하면 800개가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몇 개를 단속해봐야 그 효과는 全無(전무)하다고 봐야 했다. 결국 방법은 하나, 종암경찰서 관할 전 지역에서 同時多發的(동시다발적)·常時的(상시적)으로 단속을 하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경찰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더 큰 문제는 경찰 인력을 성매매 단속에 집중적으로 동원할 경우, 범죄 발생률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점이었다. 당시 나는 防犯(방범) 순찰대원을 성매매 단속에 많이 활용했는데, 이들이 성매매 단속을 하느라 순찰을 돌지 못할 때에는 절도 등 범죄 발생률이 높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결국 난 음성형 성매매 단속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가 없는 성매매 단속보다는 주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2002년 1월, 나의 건의로 신설된 경찰청 여성·청소년課(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직후인 그해 2월에 군산 소재 집창촌에서 성매매 여성들이 불타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여성계에서는 “이 기회에 집창촌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쏟아냈다.
 
  만일 내게 종암경찰서장 시절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도 집창촌 폐지를 앞장서서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장 경험을 통해 나는 집창촌 폐지가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상부와 청와대에 “집창촌을 없애는 것보다 시급한 것은 집창촌 성매매 여성을 괴롭히는 업주를 강력 처벌하면서 집창촌 성매매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난 전국 경찰기관에 자발적 성인 성매매 단속 지시는 하지 않는 대신, 음성형 성매매 업소에서 미성년자 고용이나 집창촌 내에서 생기는 자발적 성인 성매매 여성의 인권유린을 단속하도록 주문했다.
 
  이와 함께 전국 집창촌 소재 경찰서가 주관해 시민단체,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인권지킴이를 꾸릴 것을 권고했다. 또 경찰이 그들과 함께 집창촌 내부에 직접 들어가 인권유린 여부를 살피고, 그 장소에서 대놓고 사정을 말하지 못하는 여성을 위해 연락처를 남기도록 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性(성)을 사기 위한 남자들 외에는 출입금지구역이나 다름없었던 집창촌에 시민들이 경찰과 함께 만든 단체가 들어가 상황을 살피는 행위 자체가 업주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성매매 여성들에게는 자기들도 충분히 보호 받을 수 있다는 위로가 될 수 있었다.
 
  해당 경찰서와 업주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아예 경찰청 단위에서 전국 집창촌 실태를 파악하러 현지에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경찰청에 성매매 피해여성 신고센터를, 각 지방경찰청에 女警(여경) 기동수사대를 신설해 서로 연계되도록 했다.
 
  내가 퇴직한 후 성매매특별법 시행을 앞두고 경찰청에서 100일간 성매매 피해 여성 긴급지원센터(성매매 피해신고센터의 前身)에서 받은 피해 신고를 보면 음성형 성매매 여성의 신고가 91%였던 반면, 집창촌 성매매 여성의 신고는 9%에 지나지 않았다. 집창촌 내 여성 인권이 그만큼 개선된 것이다.
 
지은희 여성부 장관(오른쪽에서 세번째), 최기문 경찰청장(오른쪽에서 네 번째) 등은 2004년 9월22일 성매매특별법 시행을 앞두고 성매매방지 캠페인을 벌였다.
 
 
“김강자씨, 당신 경찰 맞습니까?”

 
  한계도 있었다. 나는 경찰청에 여성·청소년과가 신설되면 당연히 일선 경찰서의 여성·청소년系(계)도 課(과)로 승격되고, 인원도 어느 정도 증원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전국 모든 경찰기관의 인원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찰 1인당 담당인구가 509명인 반면, 미국은 354명. 프랑스는 273명, 홍콩은 249명에 불과했다. 나는 예산부처를 찾아 다니며 인력 증원을 요청했으나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2004년 군산 집창촌 화재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성매매를 근절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성매매특별법 제정이 추진되자 나는 반대 입장에 섰다. “성매매 여성의 재활을 위한 예산지원 등이 부족한 상황에서 성매매 여성들을 단속해도 ‘풍선효과’로 인해 성매매가 음성적으로 확산될 것이며, 생계형 성매매 여성의 삶이 더 어려워지는 부작용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성매매 정책을 펴야 한다는 내용의 비디오 테이프를 제작해 여성계 인사들을 찾아다녔다. 여성부 장관은 묵묵부답이었고, 성매매특별법 제정에 앞장섰던 한 여성 국회의원은 “김강자씨, 당신 경찰 맞습니까?”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 여성계 인사들은 “무슨 돈으로 그런 비디오를 제작했는지 수사하라”고 요구했다. 신문 등에 나를 비난하는 기고를 하는가 하면, 서울대 등에서 열린 관련 토론회에 집단으로 몰려와 고성을 지르며 나의 발표를 방해했다.
 
  경찰 고위층에 불려가 “여성계에서는 당신의 주장을 경찰을 대표하여 하는 말로 받아들이고 있어, 경찰 전체가 부담을 받고 있으니 발언을 자제하라”는 주의를 받기도 했다.
 
  내게 우호적이었던 분들은 “경무관 승진을 하려면 주장을 굽히라”고 조언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 후 나는 후배 여경의 경무관 승진이 내정된 후 명예퇴직을 했다.
 
 
  J의 비극
 
  내가 퇴임한 직후인 2004년 9월, 황당한 ‘성매매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생계형 성매매 여성에 대한 제대로 된 대책도 없이 말이다.
 
  내가 아는 J란 여성이 있다. J는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던 홀아버지를 피해 14세의 어린 나이에 가출해서 벽돌공장에 취직했다. 숙식을 해결하기 어려웠던 J는 벽돌공장을 드나들던 20대 청년과 同居(동거)를 하게 됐다. J는 미성년자인 상태에서 아기를 셋이나 줄줄이 낳았는데 동거남은 어느 날 자취를 감췄다.
 
  J는 일거리를 찾다가 어렵게 월급 70만원을 받기로 하고 식당에 취직했지만, 방 한 칸 없는 상태에서 그 돈으로 세 아이를 키우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J는 식당에서 일하는 동안 어린아이들을 돌봐줄 사람도 구해야 했다.
 
  결국 J는 2000만원의 선불금을 받고 집창촌에서 일하게 됐다. 그는 집창촌에서 일하는 동안 세 명의 아이를 돌봐줄 아주머니를 월 200만원에 구했다. 선불금 2000만원에 대한 이자와 아이들을 돌보는 아주머니 인건비 월 200만원, 거기에 생활비까지 들어가다 보니 빚은 자꾸 늘었다. 결국 몇 년 만에 J는 8500만원이나 빚을 지고 말았다.
 
  내가 경찰청 여성·청소년과장으로 있을 때, 업주들을 불러 차용증을 폐기하고 빚을 없애주었지만, J의 삶은 이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후 J는 단속을 피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성매매를 했고, 단속에 걸려 벌금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결국 J는 또다시 빚을 지기 시작했다.
 
  우리 주변에는 J와 같은 여성들이 적지 않다. 이들을 성매매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면, 국가·사회의 충분한 지원이 따라야 한다. 스웨덴 말뫼에서는 성매매 근절에 나서면서 218명의 성매매 여성들에게 5년 동안 생계비는 물론 주택·교육·의료비 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대만에서는 2년간 129명의 성매매 여성을 대상으로 매월 1인당 180만원과 함께 의료·주택·자녀교육·취업 등을 지원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성매매 여성은 100여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매년 1만명 이상 발생하는 10~30대의 가출여성 대부분이 사회안전망의 不在(부재) 속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들 중 상당수는 잠재적 성매매 여성으로 봐야 할 것이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아동 범죄 증가
 
2004년 9월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자 집창촌 여성들은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된 후, 경찰은 전면적인 ‘성매매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 主攻(주공) 목표가 된 것은 대체로 자기보호능력이 약한 생계형 여성이 주를 이루는 집창촌이었다. 집창촌 여성들은 단속을 피하느라 이리저리 옮기는 과정에서 기본적인 생계마저 포기하는 처지가 됐다. 인권을 보호한다는 것이 오히려 먹고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최우선의 인권을 유린한 셈이다. 그 결과 집창촌 여성들이 잇따라 자살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다. 집창촌 성매매 여성들이 단속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곳에서 성매매에 나서는 바람에 음성적 성매매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집창촌이라는 통제된 구역이 무너지면서 일반 가정의 주택가 곳곳에 赤線地帶(적선지대)가 늘어난 것이다.
 
  성매매가 그런 식으로 확산되면서 손님에 의한 인권유린이 더 많이 늘어났다. 성매수자로 가장한 범인이 모텔이나 자기집으로 성매매 여성을 유인한 후 강도·강간·폭행을 일삼은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그런 피해를 당해도 성매매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성매매 여성들은 신고도 할 수 없다.
 
  꼭 짚어봐야 할 문제가 또 있다. 현재 성매매 단속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경찰의 여성·청소년계다. 여성·청소년계는 성매매 단속 외에도 관내의 아동·청소년 성폭행, 아동학대, 학교 폭력, 청소년 성매매, 가정 폭력, 가출 청소년, 청소년 유해업소 불법행위, 청소년 非行(비행)·범죄 등에 대한 예방과 단속을 맡고 있다. 이들이 담당해야 할 아동·청소년 수는 경찰서당 평균 4만여명에 달한다. 반면 청소년 담당부서 직원은 1개 경찰서당(전국239개 경찰서) 평균 4.1명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현장에서 뛸 수 있는 지방경찰청 女警(여경) 수사반까지 포함되어 있다.
 
 
  잠복한 뇌관, 性病
 
  이렇게 업무 부담에 짓눌리고 있는 청소년 담당부서가 2004년 9월부터는 성매매 단속 전담부서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2004년 이후 전국에서 학교 폭력, 아동 성폭력, 아동 실종 등 아동 관련 대형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실종 아동들이 시체로 발견된 2006년 서울 용산, 2007년 제주, 2008년 안양의 어린이 실종사건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런 사건들은 어린이들을 보호해야 할 여성·청소년계 인력이 성매매 단속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과 무관치 않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전에는 성매매 여성들로 하여금 보건소에 性病(성병) 검진대상자로 등록하여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도록 했다. 현재는 당국의 성매매 여성에 대한 성병검진과 사회단체들의 성병 감염 예방활동이 오히려 성매매를 인정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다 하여 중단된 상태다. 성매매 종사자들도 성병검진 대상자로 등록하면 성매매를 했다는 증거가 되고, 또 자신의 신상이 노출되어 경찰의 단속망에 걸려들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꺼리고 있다.
 
  이정환 청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난 9월 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된 ‘에이즈·성병 퇴치를 위한 정책토론회’ 주제 발표에서 “윤락행위방지법 등으로 그나마 유지해 오던 성매매 종사자에 대한 성병 예방정책이 성매매특별법 시행으로 공백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에 의하면, 전국 보건소에 등록한 성병검진 대상자는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기 전인 지난 2003년 15만6000명이던 것이 법이 시행된 2004년 12만9000명으로 줄었으며 2006년에는 11만7000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또 ‘성병 매개 우려자’(특수업태부)의 보건소 등록자 수도 2003년 5922명에서 2004년 2632명, 2006년 1914명으로 줄었으며, 보건소에서 치료를 받은 성매매 여성도 3만6000건(2003년)에서 3만1000건(2004년), 1만5000건(2006년)으로 감소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답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매매 단속에 소요되는 인력과 예산이 엄청나게 크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성매매 단속은 성매매 유형별로 이루어져야 실효성이 있다.
 
  최우선적으로 할 일은 미성년 성매매와 성인 성매매에 대한 인권유린을 근절하는 것이다. 아직도 잔존하고 있는 업소 측의 인권유린은 물론 손님에 의한 인권유린까지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
 
 
  3단계 脫성매매 프로젝트
 
  2단계로는 정부의 예산 지원이 확보되는 대로 성매매 단속 전담 경찰관을 확충하여 비생계형 성매매가 주를 이루는 음성형 성매매에 대한 단속을 실시해야 한다. 광역별로 전담 단속반을 설치하여 전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단속하면 노출을 꺼리는 비생계형 성매매 여성의 특성상 성매매 포기 효과가 클 것이다. 대신 집창촌은 단속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성매매를 할 수밖에 없는 생계형 성매매 여성은 집창촌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모인 여성들을 보호·관리하면서 성매매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집창촌은 도시 외곽 특정지역으로 옮기되, 그 비용은 집창촌 업주들이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
 
  2단계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脫(탈)성매매는 그들이 성매매를 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국가에서 성매매 여성에게 지원하는 예산은 월 44만원씩 최장 1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매매 여성 스스로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
 
  물론 탈성매매를 위한 취업교육, 사회적응훈련, 경제교육, 정신치료 등은 국가예산으로 부담해야 한다. 이런 일은 비용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현재의 지원시스템으로는 한계가 있겠지만, 일단 시작은 해야 한다.
 
  또 왜곡된 성문화를 바로 잡는 교육과 운동을 펼쳐 성매매 인구를 줄여 나가야 하며. 가출 여성(잠재적 성매매 여성)에 대한 사회 안전망을 갖추는 일도 착수해야 한다.
 
  3단계는 국가의 추가적인 예산 뒷받침 아래 성매매 여성이 성매매를 그만두고 탈성매매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는 장기적으로는 ▲프리섹스 풍조의 확산 ▲퇴근 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문화의 확산 ▲접대·회식문화의 축소 ▲왜곡된 성문화를 바로잡기 위한 교육·운동의 영향으로 성매매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지속적인 경제성장도 생계형 성매매 여성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경제가 발전하고 성문화가 개방적인 선진국일수록 성매매 여성 수는 적다.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그 대표적인 예다. 두 나라 모두 인구가 5700만명이 넘는다. 하지만 프랑스의 성매매 여성은 3만명(외국인 60%), 이탈리아는 5만명(외국인 9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이들 나라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은 가난한 나라에서 흘러온 외국인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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