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탄생 100주년 앞둔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암울했던 그때, 수많은 젊은이에게 세계를 향한 꿈 일깨워

  • 글 : 이근미 객원기자  www.root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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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일주 3회 등 20회 세계 여행… 160여 개국 1000여 개 도시 여행
⊙ 산악인 박영석, ‘바람의 딸’ 한비야, 자전거 여행가 차백성 등 김찬삼 여행기 읽으며 꿈 키워
⊙ 100만 권 이상 팔린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1980년대 말까지 방문 판매 도서의 베스트셀러
⊙ 지리 교사로서 ‘살아 있는 지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겠다’는 생각에서 여행 시작
⊙ 유서 품고 다닌 첫 번째 세계여행… 가봉에서는 슈바이처 박사 만나
⊙ 아마존에서 원주민과 쥐 고기 먹고, 숙소가 없어 경찰서 감방에서 지내기도
⊙ 2000년 인천에 세계여행문화원 건립했지만, 영종 개발로 사라져… 유족들, 내년에 탄생 100주년 행사 준비 중
김찬삼 선생은 제2차 세계여행 중이던 1963년 11월 25일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에서 슈바이처 박사와 만났다.

金燦三 (1926~2003)
서울대 사범대학 지리학과 졸업.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SFSU) 대학원 수학(지리학과) / 숙명여고·인천고 지리 교사, 세종대(수도여자사범대학교) 교수, 학교법인 동산육영회 이사장 역임 / 1958.9~1997.2 제1차~제20차 세계여행. 세계여행문화원 설립·운영 / 상훈 국민훈장 모란장 / 저서 《세계일주 무전여행기》 《끝없는 여로》 《목숨을 건 세계여행》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의 세계여행》(전 10권) 《황허의 물은 천상에서 흐르고》 《실크로드를 건너 히말라야를 넘다》
  2872만773명, 지난해 내국인 출국자 숫자다. 1988년의 72만 명과 비교해 약 40배가 늘었다. 우리나라 국민의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건 1989년 1월 1일의 일이다. 한국의 여권 파워는 현재 세계 3위, 한국인은 비자 없이 192개국을 여행할 수 있다.
 
  1958년이라면 어땠을까. 한국 전쟁이 끝나고 폐허도 복구하지 못한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은 국내 여행도 힘든 형편이었다. 그때 유서(遺書)를 품고 세계 각국을 탐험하듯 다녀온 이가 있었으니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선생이다. 내년 2026년은 김찬삼 선생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1926년 6월 5일에 태어나 2003년 7월 2일 타계(他界)했으니 가신 지 22년이 되었다.
 
  신세대들은 ‘김찬삼’이라면 갸우뚱할지 모르나, 지금의 50대 이상들에게는 지금 아이돌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며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하면서 지리학의 바탕 아래 방대한 여행 기록을 남기고 국민들의 시야를 세계로 넓혔기 때문이다.
 
 
  자전거 사고로 세상 떠난 형의 뜻 이어
 
김찬삼 선생은 선친 김세완 대법관과 함께 어릴 때부터 등산을 다니며 기른 체력으로 세계여행을 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제1차 세계 일주를 한 이래 3회에 걸친 세계 일주등 총20회의 세계여행을 통해 160여 개국 1000여 개 도시를 여행했다. 거리로 환산하면 지구 32바퀴, 시간으로 계산하면 꼬박 14년이 걸린 대장정이다.
 
  1950년대, 한국인은 해외여행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취업이나 유학, 공무원, 기업 출장 정도만 가능했다. 이런 제약도 문제지만 경비를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을 때였다.
 
  1958년 첫 출국 때 김찬삼 선생의 나이는 32세였다. 19세에 결혼해 아이 다섯을 둔 그가 해외로 나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그는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8세 때인 1934년 판사 아버지를 따라 인천으로 이사했다. 선친 김세완 대법관은 심계원장(현 감사원장)과 국민대 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1967년에 변호사를 개업했다. 김찬삼 선생은 1946년 경성사범학교(서울대 사범대학 전신)에 진학해 지리교육을 전공했고, 숙명여자중·고등학교와 인천고등학교에서 지리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여행의 꿈을 키운 배경에는 아버지와 형이 있다. 선친인 김세완 대법관은 31세에 판사 첫 임지인 수원에 살 때부터 여섯 살 난 김찬삼을 데리고 등산을 다녔다. 선친과의 등산으로 체력을 단련하며 여행의 꿈을 키운 그는 이후 전국을 여행했으며 독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자전거로 여행하다 사고로 열네 살에 세상을 떠난 형이었다. 형의 유품(遺品)을 정리하다 ‘오늘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달리지만 나의 꿈이 실현되는 십 년이나 십오 년 후에는 남미의 안데스 고원을 헤매고 아프리카를 넘으리라’라는 글을 보았다. 이 일기를 계기로 ‘내가 그 꿈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여행가의 꿈을 키웠다.
 
 
  ‘살아 있는 지식을 전하고 싶다’
 
  실질적인 동기는 직접 가서 보고 공부해 살아 있는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김건영, 박지수 두 친구와 함께 세계 일주 계획을 세웠으나 여러 사정으로 혼자 떠나게 되었다. 세계로 가기 위한 관문으로 유학을 선택했다. 자동차 기술을 배우고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등 치밀한 준비 끝에 60만 환을 들고 1958년 9월 18일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을 떠나기 전 그의 심경은 ‘순전히 나의 인생은 여행을 위한 생애라고 스스로 생각했으며, 미친 듯이 여행만을 꿈꾸다가 마침내 기회를 붙든 것입니다’라고 여행기에 잘 담겨 있다.
 

  김찬삼 선생의 1남 6녀 중 셋째 딸인 김서라 김찬삼기념사업회 이사는 아버지가 해외여행을 떠날 때 자녀가 다섯이었다고 말했다.
 
  “외아들이 세계여행을 간다고 하니 할아버지가 ‘네 부인에게 허락받아라’ 그러셨대요. 어머니는 ‘저 사람 고집은 못 꺾는다’라면서 가라고 하셨고요. 그때 어머니는 임신 5개월로 여섯째를 가진 상태였어요. 당시 할머니가 집안 경제권을 갖고 계셨던 것 같아요. 인천에 2층 건물을 지어 할머니와 어머니가 예식장을 운영하셨어요. 집안 경제는 걱정 안 해도 되니 아버지가 자신의 여행비를 마련해 여행을 계속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김찬삼 선생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교(SFSU) 대학원 지리학과에서 수학할 때 다음 여행을 위해 정원을 돌보고 항공사 기내 청소를 해 2000달러를 모았다. 여행지와 관련 기관에 서신을 보내 초청을 받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서 떠난 첫 여행지는 알래스카였다. 1958년 9월에 시작한 제1차 세계여행은 미국 서부에서 동부, 중남미와 중동, 아프리카, 유럽까지 2년 10개월에 걸쳐 세계 곳곳을 누볐다.
 
 
  유서 품고 다닌 여행
 
김찬삼 선생은 제1차 세계여행 중 페루 안데스고원을 밟으면서 자전거 사고로 세상을 떠난 형의 소원을 이루었다.
  1차 여행 중이던 1960년 6월 20일, 중남미와 아프리카를 여행하기 전 유서를 썼다. 한 통은 로스앤젤레스의 친구에게 맡기고, 한 통은 유서 겉봉에 ‘발견하는 이는 한국공사관과 미국의 친구와 고국에 전해달라’는 부탁을 담아 우편요금 2달러와 함께 여권에 넣었다.
 
  ‘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기쁘게 받으련다. 설령 내가 무슨 사고로 죽더라도 서러워 말고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부모에게 위로하여 줄 것이며, 애들의 교육을 잘 부탁한다’라는 유서를 품고 다녔다.
 
  형의 일기에 기록된 안데스고원이 있는 남미 페루에 도착했을 때 ‘형의 소원을 내가 이루었으니 편히 안식하소서’라고 외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김찬삼 선생은 1차 여행을 마치고 세 가지를 발견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지구상의 많은 사람이 사랑에 굶주리고 있고, 세계는 넓고 사람들의 마음씨는 아름답다. 종교가들이 박애주의를 내세우지만 추상적인 것에 그치고 사상가들이 인류의 단결을 부르짖지만 기계적이다’라는 내용이었다.
 
해외에서 귀국한 후 공항에서 환영을 받은 후 찍은 사진. 몇 차 여행 때의 사진인지는 알 수 없다.
  1961년 6월 22일, 2년 10개월간의 세계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순간 김찬삼 선생은 스타로 떠올랐다. 김포공항에 기자들이 몰려와 플래시를 터트리며 질문을 퍼부었고 텔레비전과 라디오, 주요 일간지들은 ‘걸어서 59개국 지리 교사 김찬삼씨 귀국’ ‘5대륙 무전(無錢)여행 김찬삼씨 귀국’이라며 크게 알렸다.
 
  한국 전쟁 직후 남북 대치와 냉전(冷戰) 체제가 강화된 시국 상황에서 위험한 지역을 여행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고, 해외로 나갈 수 없는 시절에 세계 일주를 했다는 사실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1961년 9월부터 경희대 출강과 함께 방송 출연과 신문 기고, 김찬삼 세계 일주 사진전, 강연회를 열어 직접 돌아본 세계 각지의 생생한 모습을 국민들에게 상세히 전했다.
 
 
  슈바이처 박사와의 만남
 
제3차 세계여행 때 타고 다닌, 독일인 올가 여사로부터 선물 받은 폴크스바겐 승용차 ‘우정 2호’.
  김찬삼 선생은 귀국하자마자 다음 여행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1963년 1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제2차 세계여행을 떠나 동남아와 서남아를 거쳐 아프리카, 유럽, 캐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했다.
 
  아프리카를 횡단 중이던 1963년 11월 25일, 가봉 랑바레네에서 어려서부터 존경했던 슈바이처 박사를 만났다. 편지를 보냈는데 ‘방문을 환영하오. 이곳은 여행하기 매우 어려운 곳이니 조심해서 여행하시오. 교통편도 많지 않을 것이니, 건강 조심하고 특히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기 바라오’라는 슈바이처 박사의 답장이 와 찾아간 것이다. 15일간 슈바이처병원에 머물면서 슈바이처 박사를 도왔다.
 
  다시 여행을 떠나는 김찬삼 선생에게 슈바이처 박사는 친필사인과 카키색 바지를 선물하며 ‘우물은 한 우물만, 물이 나올 때까지!’라는 좌우명을 안겼다. 김찬삼 선생은 이 좌우명대로 평생 여행이라는 한 우물을 팠다. 당시 슈바이처 박사와 찍은 사진은 아프리카 가봉공화국 랑바레네의 슈바이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김찬삼 선생이 생전에 사용했던 서재의 책상 앞에도 같은 사진이 걸려 있다.
 
  2차 여행을 다녀온 후 수도여자사범대학교(현 세종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1966년 4월부터 1982년 2월까지 재직했다. 교수가 된 이후에도 세계여행은 계속됐다.
 
  1969년 12월 제3차 세계여행을 떠나 동남아와 멜라네시아, 오세아니아에 이어 폴리네시아, 카리브제도 등 남태평양 도서 지역과 서부 유럽의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핀란드, 독일을 여행하고 1년 만에 귀국했다.
 
  세 번째 세계여행은 독일인 올가 여사로부터 ‘우정 2호’라고 이름 붙인 폴크스바겐을 선물 받아 진행했다. 그 차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선박을 이용해 한국으로 이송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폴크스바겐은 현재 인천도시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1973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이어진 4차 세계여행 때는 아마존 일대를 탐험했다. 1975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의 5차 세계여행은 서남아와 아프리카 동부를 여행했다. 1976년 7월부터 두 달간에 걸친 6차 세계여행 때는 북극권 도서 지역을 다녔다. 1977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의 제7차 세계여행은 갈라파고스제도를 여행했다.
 
  1982년 56세에 세종대 교수직에서 퇴임한 김찬삼 선생은 그해 7월 8차 세계여행을 떠나 1997년 2월 20차 세계여행 때까지 줄기차게 세계를 누볐다.
 
 
  ‘여행은 고행이자 자학’
 
  39년간 세계 곳곳을 다닌 김찬삼 선생은 여행을 ‘고행(苦行)’이자 ‘자학(自虐)’이라고 축약했다. 《김찬삼의 세계여행》 5권 필리핀 제도 편에서 남북 종단 때 모기에게 물려 몸이 붓고 오지에서 굶주림을 겪을 때의 상황을 ‘내가 스스로 바라는 고행이니 하나의 쾌락일 수 있지만, 육체적 고통을 초월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여행 때는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카메라를 비닐로 싸서 안고 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 상황을 두고 ‘이 무슨 자학일까. 왜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하려는 것일까. 나의 여행관은 아마도 원시적일지도 모른다. 나는 비가 퍼붓고 천둥이 치는 이 연옥과도 같은 화산 꼭대기에서 시지프스와도 같이 시련을 겪으며 새로운 견인주의(堅忍主義)를 자아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찬삼 선생은 ‘배낭, 카메라, 지도’를 생명이자 동반자라고 부르며 배낭에 김찬삼의 이니셜 C.S.KIM과 KOREA 패치를 붙이고 다녔다. 배낭 안에는 여행에 필요한 짐과 한국을 상징하는 기념품이 들어 있었다. 지리를 전공한 김찬삼 선생은 ‘지도만 있으면 걱정 없다. 아무리 낯선 곳에 가도 지리적인 인스피레이션이랄까 이런 감각이 발달해 있기 때문일까’라고 여행기 2권에 피력했다.
 
 
  군화에 구멍 나도 ‘환기가 잘돼 다행’
 
  여행하면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스파이 혐의로 구금당한 일, 괴한(怪漢)과의 사투(死鬪), 사진을 찍다 봉변당한 일, 교통 사정이 여의치 않아 비자 기간 만료로 입국을 거절당해 오도 가도 못 한 상황, 아마존에서 원주민과의 유대를 위해 쥐 고기를 먹은 일, 빗물을 식수로 먹다 이질에 걸려 고생한 일, 숙소가 없어 경찰서 감방에서 지낸 일 등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되돌아오거나, 예정에서 벗어나 건너뛰거나 우회한 적이 없다. 낙천적인 성격에다 어려서부터 등산으로 다진 건강이 뒷받침된 덕분이다.
 
  숲속을 헤매다 배가 고파 주저앉은 적도 있었는데 ‘있으면 잔뜩 먹고 없으면 며칠 굶는 일’이 다반사였다. 김찬삼 선생은 1963년 2차 세계여행을 다녀와서 ‘내 위장은 세계 여러 나라 음식의 소화기, 여러 나라를 돌며 어떤 음식을 먹어도 탈이 난 일이 별로 없다’며 스스로도 진기한 생리라고 탄복하는 글을 남겼다.
 
  접경지에서 비자 문제로 곤경에 빠지는 일도 많았다. 하나를 꼽자면 아프리카 차드에 입국할 때 열악한 교통 사정으로 비자 유효 기간이 지난 데다 통과 사증조차 거부당해 이민국 창고에서 2주간 자취하며 수단 이민국에서 갱신 비자가 오기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이럴 때는 여행 기록을 정리하며 오히려 여유를 가졌다. 여행기에 기록된 ‘기차와 트럭으로 주로 달렸지만 보행으로도 많이 다녔다. 군화 뒤축은 두 번이나 갈아붙였으며, 가죽은 발가락 닿는 데가 뚫렸다. 그러나 환기가 잘되니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글을 보면 그의 낙천성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이나마 알 수 있다.
 
  물가가 비싸기로 소문난 차드의 아베셰 지역을 여행할 때를 두고는 ‘음식값이 너무 비싸서 사 먹지 못할 뿐 아니라, 구걸하기가 겸연쩍어 며칠 동안 간직해 오던 말라붙은 빵조각을 씹었다. 이렇게 굶주리다시피 해도 무한한 힘이 솟구치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라고 썼다.
 
  국내 여행을 할 때 강행군을 하는 김찬삼 선생을 보고 친구들은 “태어날 때부터 여행 여건에 맞도록 태어난 것 같다. 어디서든지 잘 자고 무엇을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 이런 신체기에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럴 때마다 김찬삼 선생은 “여신이 나를 지켜주는 것 같다”며 웃었다. 딸 서라씨는 아버지가 172cm에 단단한 체구였다고 회고했다.
 
 
  ‘위급할수록 미소를 잃지 않는다’
 
김찬삼 선생은 스스로 정한 여행 철칙에 따라 최소 경비를 사용하며 기록을 철저히 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사력을 다해 해결하고 다시 목적지로 행군했다. 김찬삼 선생은 ‘미소’를 해결의 무기로 삼았다. ‘세계 언어는 2000여 종, 이를 다 배우는 것보다는 소박하고 어진 미소가 무엇보다 고귀한 것이 아닐까’라는 기록대로 언어와 문화의 차이 때문에 숱한 어려움에 처했지만 그때마다 미소로 헤쳐나갔다. 《세계의 나그네》(1972) 서문의 ‘수난은 한결같이 나의 인간 수업에 있어 고귀한 경험들이다. 삼천만 국민 중 이런 영광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 아닌가’라는 내용만 봐도 강인한 의지력을 알 수 있다.
 
  김찬삼 선생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엄격한 원칙을 세우고 철저히 지켰기 때문이다. 우선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다. 현지 신문과 방송의 국제면에서 정보 얻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신 현지 지도를 준비하고 현지어 기본 회화 정도는 익혀서 떠났다.
 
  그가 세운 세부적인 ‘여행 원칙 6가지’에는 그의 여행 철학이 담겨 있다.
 
  첫째, 여행의 목적은 지리학적 연구와 인간 수업이다.
 
  둘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걷기와 맨손체조를 생활화한다.
 
  셋째, 경비를 최대한 절약한다.
 
  넷째, 지리학자로서 지형·농산물·돌·토양을 관찰하고 카메라에 담는다.
 
  다섯째, 여행 중에 아무리 피곤해도 취침 전에 여행 상황과 금전 출납을 정리하고 나날의 여행 코스를 지도 위에 기입한다.
 
  여섯째, 위급할수록 미소를 잃지 않는다.
 
  김찬삼 선생의 여행 방식은 자급자족형으로 먹고 자고 움직일 때 최소한의 돈을 썼다. 교통편은 가능한 한 가장 싼 걸 택하고, 복장은 소박하게, 식사는 그 지역 전통시장에서 해결한다는 철칙을 따랐다. 여행 내내 잠은 값싼 숙소와 차 안, 야외 침낭에서 주로 해결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검소해야 진정한 여행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여행 철학이었다.
 
  1차 세계여행 이후 서적 판매와 강연 등으로 수입이 늘었지만 1967년 12월 7일 오키나와로 갈 때 또한 인천 외항에서 미국 화물선 워싱턴 베어호에 짐짝과 함께 기중기로 올랐다. 가장 싼 뱃삯이었기 때문이다.
 
 
  붕어빵 하나 사 먹은 것까지 기록
 
1969년 제3차 세계 일주 여행 환송식 장면. 환송식을 해준 사람들은 누구인지 모르나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이정면 미국 유타대 명예교수는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2008)에서 ‘일상생활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정리 정돈하는 습관을 따를 자가 없다. 지리 하는 사람은 기록하는 데 소질이 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함께 여행할 때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정리했다. 절약정신과 검소한 생활, 금전 출납 정리는 아연실색할 정도다. 붕어빵 하나 사 먹은 것까지 기록하는 정신이 세계여행과 출간을 가능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1차 세계여행을 다녀와 1961년 어문각에서 낸 《세계일주무전여행기》는 15일 만에 3판을 발행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흑백사진이 담긴 이 책은 8쇄까지 찍었다. 2차 세계여행기 《끝없는 여로》(1·2)는 컬러사진을 넣었고 1권은 20판, 2권은 6판까지 발행되었다.
 
  3차 여행기 《세계의 나그네》가 발행된 이후 그간의 여행기를 종합한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 6권이 발간되었다. 이어 1975년에 7, 8권, 1983년에 9, 10권이 발간되면서 전 10권이 완성되었다.
 
  전 10권으로 출간된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100만 권 이상 판매되었다. 1980년대 후반까지도 가정 방문 판매의 대표 서적이었다. 지리학을 바탕으로 각국의 역사와 경제활동상, 자연·인문 현상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응축된 ‘세계 각국의 지리정보서’여서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김찬삼 선생이 펴낸 여행기들은 당대 한국인들에게 세계를 향한 눈을 뜨게 해주었다.
  이어령 선생은 김찬삼 선생의 여행기에 대해 ‘60, 70년대 우리 독서계에 큰 영향을 끼친 책 중 하나였고, 오늘날 우리나라 여행기의 정전(canon)이 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어린이를 위한 《목숨을 건 세계여행》 1, 2권도 발간되었고 사진 없이 글만 실은 문고판도 3권이나 출간되었다. 이 외에도 《황허의 물은 천상에서 흐르고》 《실크로드를 건너 히말라야를 넘다》까지 많은 책이 발간됐다. 한 여행가에 의한 방대한 분량의 각국 기록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조선일보》 오태진 논설위원은 ‘1960년대 후반,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도 안 되던 시절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세계로 열린 창으로 사람들에게 경이로운 설렘과 다채로운 꿈을 길러준 길잡이였다’는 글을 쓴 바 있다.
 
  김찬삼 선생은 여행 중에 국내 일간지와 잡지에 여행기를 보내기도 했다. 에티오피아를 출발해 수단의 고원과 숲을 탐사하고 수도 하르툼에 27일 만에 도착했을 때 독자들의 수북한 편지가 그를 맞아주었다. 해외여행을 갈 수 없었던 시절 ‘횟수를 거듭한 여행에 대한 온 겨레의 열정적인 성원’이 그를 격려한 것이다.
 
 
  자칭 ‘아마추어 세계인종관상학자’
 
  김찬삼 선생은 세계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신문, 방송, 강연, 출판을 통해 ‘세계’를 전했다. 큰 관심을 갖고 탐사한 곳이거나 특별히 성과를 얻은 여행에 대해서는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렸다. 대표적인 나라가 브라질이었는데 폭포나 커피농장이 아닌 아마존강의 경이와 삼바축제를 강조했다. 새마을운동을 벌이는 상황에 광란의 삼바축제를 알린 것은 문화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찬삼 선생의 강연은 특히 인기가 있었는데 지리 전문가다운 실감 나는 설명 덕분이었다. 22만㎢인 우리나라의 넓이는 세계 땅의 626분의 1이며, 아프리카 전체 대륙 크기는 우리나라의 137배, 브라질은 우리나라의 38배, 아마존강 하구 너비는 직선거리로 약 220km인데 서울에서 추풍령을 넘어 구미공단까지라는 식으로 쏙쏙 이해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대중은 김찬삼 선생에게 여러 별명을 붙였는데 ‘세계의 김삿갓, 1세대 여행가, 배낭족의 효시’ 등 다양했다. 가장 좋아한 별명은 ‘세계의 나그네’였으며 그가 스스로 붙인 별명은 ‘아마추어 세계인종관상학자’였다. 《김찬삼의 세계여행》 곳곳에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관상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제4권에서 수단 원주민이 한국 여성들의 민속의상 사진을 보고 감탄하자 이런 글을 남겼다.
 
  ‘미인(美人)은 중국에 많다지만 여러 나라를 두루 다녀보니 한국 여성처럼 갸륵하고 아름다운 여성은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우리나라 여성미의 발견이라고도 하겠다.’
 
 
  세계에 한국 알려
 
  김찬삼 선생은 세계를 여행하면서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늘 우리나라 사진과 우리나라 풍속을 소개할 슬라이드를 갖고 다녔다. 아프리카 여행 때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15일간 같이 지낼 때 한국의 분단 상황, 한국 전쟁과 함께 새롭게 도약하는 상황을 소개하고 준비해 간 자료로 전통문화를 열심히 알린 것도 외교의 일환이었다.
 
  2차 여행 때 중앙아프리카 차드의 미국 공보원에서 한국 전쟁 당시의 고아와 피란민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프리카 원주민보다 더 비참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김찬삼 선생은 더 열심히 우리 역사와 문화를 알렸다. 에티오피아 《헤럴드신문》, 잠비아 국영신문, 알래스카의 유력지 《페어뱅크스 일간신문》 등과 인터뷰하며 한국의 변화상을 알리고 온두라스 여행 때는 장학사와 함께 사범대학을 방문해 한국을 소개했다. 수단 방송국에 아리랑이 녹음된 테이프를 선물했는데 얼마 후 버스에서 한 승객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해 아리랑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감격에 젖은 일도 있다.
 
 
  18번째 세계여행에서 머리 크게 다쳐
 
실크로드 여행을 다녀온 후 공항에서 환영객들과 함께. 이 여행에서 김찬삼 선생은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67세를 맞은 김찬삼 선생은 1992년 3월부터 1993년 2월까지 1년간 18차 세계여행을 떠났다. 한데 실크로드와 서남아시아, 유럽에 이르는 7만3000km의 대장정을 하던 중 크게 다쳤다. 이랬음에도 19차(1995년 9월) 러시아, 20차(1996년 11월~1997년 2월) 동남아시아 여행을 할 정도로 의욕적이었다. 하지만 18차 여행에서 다친 후유증으로 언어 능력을 상실하고 몸이 쇠약해지면서 더 이상의 여행은 이어지지 않았다. 1958년 시작해 1997년까지 39년에 이른 대장정을 마치게 된 것이다.
 
  1998년 1월 1일 김찬삼 선생은 20차 세계여행을 마친 소감을 글로 남겼다. 1992년 6월 하순 인도에서 열차에 의한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치고 갈비뼈가 부러졌으며, 그해 9월 터키 앙카라 성에서 야외조사를 하던 중 성벽의 뾰족한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큰 상처를 입었다고 알렸다. 이럼에도 계획대로 여행을 했고, 이로 인해 언어 장애가 생긴 과정을 설명했다. 덧붙여 부상이 원망스러울 텐데도 오히려 ‘수많은 여행을 하고 18차 때 부상입은 것은 다행’이라며 감사해했다. 언어 장애는 있으나 건강 체질이어서 72세에도 도보 시속 5~6km로 달린다고 전하면서 여행 의지를 꺾지 않았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인간 수업에 있어서 여행처럼 좋은 것이 없어 보입니다. 나는 아마도 여행에 나서고, 여행에 살다가, 여행에 죽는 숙명을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여신을 믿습니다. 나의 영원한 애인인 륙색과 지도와 카메라가 있는 한 나의 여행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여행문화원’ 건립
 
  인천에서 성장하며 세계여행을 꿈꾼 김찬삼 선생은 1973년 인천시 중구 중산동 산 75번지에 6000여 평의 땅을 마련했다. 세계여행기록보존소를 건축하기 위해서였는데 드디어 2000년 6월 5일 ‘세계여행문화원’을 개관했다. 김찬삼 선생이 39년간 세계 각국을 돌며 수집한 책은 1만여 권에 이른다. 이 가운데 여행 가이드북, 여행 관련 서적, 화보집, 각종 여행 전집, 잡지, 세계 각국의 역사·문화 관련 기록 등 2000여 점을 선별해 전시했다.
 
  장차 세계여행박물관을 건립해 더 많은 자료를 전시하고 배낭여행객을 위한 유스호스텔과 여행캠프장을 추가로 지을 계획이었다. 한데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김찬삼 선생은 2003년 7월 2일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2008년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일주 여행가로 기념비적 발자국을 남긴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선생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김찬삼 선생은 여행가이면서 교육자였다. 동산중·고등학교 재단인 동산육영회의 8대 이사장직을 1978년부터 4년간 맡아 인천의 교육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사장 재임 중 당시 보기 드문 1인 1좌석 책상을 도입하고, 3억원을 학교에 기부했다.
 

  김찬삼 선생 5주기인 2009년 고(故) 안병욱 선생이 회장을 맡은 김찬삼추모사업회가 결성되면서 추모집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을 펴냈다. 안병욱 선생은 서문에서 ‘관광 산업을 국가 중요 문화 산업으로 육성하고 관광 입국을 목표로 하는 오늘의 실정에서 인지도 높고 사회적 기여도가 높은 인물인데다 여행 문화라는 명확한 테마가 있는 박물관 건립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
 
  김찬삼 선생은 작고하기 몇 년 전부터 박물관 건립 계획을 밝혔고, 김수근 선생에게 설계까지 의뢰했다. 박물관이 완공되면 자료를 비치해 공공이 활용할 수 있게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김찬삼 선생의 일곱 자녀 중 유일한 아들인 김장섭씨(2024년 작고)가 세계여행문화원을 끝까지 지키며 박물관 건립을 위해 《월드 트레블러》라는 잡지를 발행하며 아버지의 여행 유전자를 이어왔으나 2013년 11월 ‘세계여행문화원’ 운영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영종하늘도시 개발 계획에 부지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 터에는 영종진공원과 영종역사관이 들어서 있다.
 
  김찬삼 선생이 수집한 자료는 1983년부터 살았던 서울 종로구의 복층 빌라에 쌓여 있다. 여행 다니면서 기록한 45권의 일기, 세계 각국의 풍경과 풍물을 찍은 슬라이드, 라이카를 비롯한 10여 대가 넘는 카메라 등 각종 자료가 2층 전체에 꽉 들어차 있다.
 
 
  “여행 다녀오면 짜장면 사주셨죠”
 
영종진공원에서 세운 작은 기념비의 족적 조형물과 똑같은 모형. 김찬삼 선생에 대한 기념물은 족적 모형이 유일하다.
  김서라 이사는 세계여행문화원이 사라져 너무도 아쉽다고 했다.
 
  “몇 번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왔지만 별 소득이 없었어요. 몇 년 전 영종진공원에 아버지의 족적을 떠서 만든 작은 기념비가 들어선 정도예요. 2010년대에 인천시에서 여행박물관을 만들겠다고 해 MOU를 맺었지만 성사되진 않았어요. 앞으로 상설전시관과 기념관, 여행박물관이 세워지길 바랍니다.”
 
  2023년 영종역사관에서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특별기획전〉이 열렸을 뿐 별다른 기념행사도 없었다. 2026년 김찬삼 선생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김기명 김찬삼기념사업회 회장을 주축으로 6명의 이사가 기념사업 실현의 각오를 다지고 있다. 우선 2026년에 심포지엄과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김서라 이사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아버지가 해외여행에서 돌아오시면 서먹서먹했어요. 아버지는 이런 우리 남매를 데리고 나가 산책하고 짜장면을 사주셨죠. 방학 때마다 우리를 데리고 국내 여행을 다녀 아버지의 공백을 느끼지 않도록 해주셨어요. 저는 가정학을 전공했는데 ‘지리학과로 전과하는 건 어떠냐’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일곱 자녀 중 한 명은 지리학을 전공해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길 바라셨던 것 같아요. 결국 전과를 하진 않았지만 늦게나마 아버지의 세계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김찬삼의 아이들’
 
김찬삼기념사업회 김서라 이사(좌)와 차백성 이사. 자전거 여행가인 차백성 이사도 ‘김찬삼 키즈’였다.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고 시야를 세계로 넓히고 꿈을 키운 이는 셀 수 없이 많다. 히말라야 8000m 14좌, 세계 7대륙 최고봉, 지구 3극점을 모두 밟아 산악 그랜드슬램을 이룬 산악인 박영석은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사 온 《김찬삼 세계여행》 전집을 읽으며 등산과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바람의 딸’ 한비야씨도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읽으며 세계 일주를 꿈꾸었다고 밝힌 바 있다.
 
  자전거 여행가로 유명한 차백성 작가도 어릴 때 김찬삼 선생의 여행기를 읽으며 여행가의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을 사주셨어요. 피라미드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정말 멋있다고 생각하며 나도 어른이 되면 세계여행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중학교 때 자전거가 생기면서 ‘나는 자전거로 김찬삼을 능가하겠다’는 당찬 꿈을 꾸었어요.”
 
  차백성 작가는 자신의 삶도 김찬삼 선생을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제가 선생님의 여행기를 보면서 도전 정신과 기록 정신을 본받았습니다. 50세에 호기롭게 대기업을 사직한 후 자전거로 세계를 향해 도전했고, 가는 곳마다 꼼꼼하게 기록해 선생님처럼 책을 냈습니다.”
 
  차백성 작가는 2008년 미국 여행기 《아메리카 로드》를 시작으로 《재팬 로드》 《유럽 로드》 《자전거 백야기행》 《자전거 여행가 차백성의 이베리아 반도 기행》까지 모두 5권의 책을 냈다.
 
 
  ‘대한민국 대표 사나이’
 
오토바이와 함께 선 김찬삼 선생. 그는 ‘대한민국 대표 사나이’였다.
  김찬삼 선생 5주기 때 펴낸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에서 김일기 전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교수는 김찬삼 선생의 업적으로 ‘지리학의 대중화와 지리 교육에 기여한 점’을 꼽았다. 세계 각국의 문헌이나 지리적 정보를 얻기 힘들던 1960~70년대 김찬삼 선생 여행기 속에 생생한 자료가 가득해 지리 교육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단순한 지리 정보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 사람들의 진솔한 생활상까지 깊이 있게 다룬 점을 높이 평가했다.
 
  오홍석 전 동국대학교 사범대 학장은 “김찬삼 선생은 국민의 시야를 세계로 확대시킨 전환점이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해외 이민 붐을 여는 한편 관광 한국의 위상을 확립하는 동인이 되었다”며 우리 국민의 세계 진출을 유도하며 세계화 마인드 확대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천세욱 한국평생학습협회 회장이 김찬삼 선생을 묘사한 글이 인상적이다.
 
  ‘꿈 없이 암울했던 그때 보려고 노력해도 보이는 것이 없던 그때에, 뛰쳐나가려 해도 나갈 길도 몰랐던 수많은 젊은이에게 의욕적으로 오토바이와 배낭 하나 메고 세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땀으로 얼룩지게 했고, 다 해진 구두로 족적을 남기면서도 뒤돌아볼 새 없이 앞으로만 묵묵히 걸어 나갔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던 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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