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검증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냐 안창호냐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 ‘작사자 논쟁’ 70년의 종지부를 찍다

  • 글 : 김연갑 애국가 연구가·(사)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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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 국사편찬위, 사실상 윤치호 인정하고서도 윤치호의 친일 행적 의식해 외견상 ‘미상’으로 발표
⊙ 서재필 영자신문 칼럼에 “윤치호가 행사 기념으로 지었다”고 기술
⊙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설은 전기 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비롯
⊙ 윤치호 역술 《찬미가집》에 현 ‘애국가’와 흡사한 ‘무궁화노래’ 수록
⊙ “‘무궁화노래’는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아펜젤러전집》)
⊙ 일각에선 “친일파 윤치호는 작사자 될 수 없다” 주장
⊙ 김을한, “윤치호는 ‘애국가’ 남긴 것으로 할 일 다 했다”

金煉甲
1954년생. (재)국제한국연구원 기획실장, 사운연구소 연구부장 역임. 現 (사)아리랑연합회 이사장, 국가상징연구회 애국가분과위원장, 아리랑사업회 회장 / 저서 《아리랑시원설연구》 《애국가작사자연구》 등
1955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애국가’ 작사자 논쟁으로 뜨거운 4개월이었다. 4월 2일자 《서울신문》에는 〈우리나라의 ‘애국가’, 미 백과사전에 삽입〉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의 한 출판사가 주한 미국 대사관에 ‘애국가’의 연혁(沿革)을 문의했고, 문교부(현 교육부)는 “‘애국가’의 작사자는 안창호(安昌浩·1878~1938년), 작곡가는 안익태(安益泰·1906~1965년)”로 기재해 전달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이 보도되고 열흘이 지나는 동안 문교부에는 수많은 제보와 항의가 빗발쳤다. 이 때문에 문교부는 산하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 작사자 조사를 지시했다. 1955년 4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국사편찬위원회는 13인으로 구성된 ‘작사자 조사위원회’를 통해 3차에 걸친 조사, 그리고 이후 1년간의 자체 조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조사위원회의 최종회의 결과는 사실상 윤치호(尹致昊·1865~1945년)의 작사 여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교부, 윤치호 확정하고도 발표 안 해
 
작사자 문제를 처음으로 보도한 《서울신문》 1955년 4월 2일자. 사진 오른쪽은 국사편찬위원회가 1955년 5월 13일 발행한 조사자료. 사진=김연갑
  1955년 7월 28일 개최된 제3차 회의 결과는 이렇다. 《서울신문》은 “윤씨가 유력하다로 ‘애국가’ 작사자 규명 일단락”이라고 했고, 《경향신문》은 “격론 끝에 ‘윤치호씨가 작사자로 가장 유력하다’고 결정”, 《동아일보》는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 유력하다고 낙착”, 《한국일보》는 “무기명 투표 결과, 11대 2로 현재까지 수집된 사료 중 ‘윤치호설이 가장 유력하다는 판정’을 짓고, 작사자 조사 문제의 일단락을 지었다”라고 보도했다.
 
  그러고 1년 후인 1956년 8월 31일, 《국도신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자체 조사 결과, “윤치호씨로 결론, ‘애국가’ 작사자에 종지부, 국사편찬위원회 불원 문교부 장관에게 보고하려 한다”는 보도를 했다. 국사편찬위가 1년간 자체 조사를 더해 윤치호로 결론을 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문교부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확정해 공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외견상 “‘애국가’ 작사자는 미상(未詳)”으로 유포될 수밖에 없었다.
 
1955년 4월부터 8월 사이의 신문 기사들. ‘애국가’ 작사자로 윤치호를 지목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선근(李瑄根) 당시 문교부 장관이 사견으로 윤치호가 작사자라고 밝힌 기사. 사진=김연갑
  그 이유는 맨 처음 문제를 제기한 성악가 박은용(朴殷用·1919~1985년)과 국사편찬위 조사 과정의 발언에서 유추(類推)가 가능하다. 박은용은 “윤치호씨가 현재 아무리 불미한 입장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애국가’를 작사한 사실까지 무시하고 거짓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 작품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국사편찬위 ‘작사자 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위원의 발언으로, 그는 “윤치호는 친일(親日)한 사람이므로 작사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즉 친일 문제에 대한 우려에서 정부는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로 하지 않고 ‘미상’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부가 주저하는 사이에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는 ‘틈’이 생겼고, 이로 인해 왜곡과 조작이 끼어들 여지를 만들었다. ‘안창호 작사설’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안창호 소설에 ‘안창호설’ 끼워 넣은 편집자
 
1947년 1만 부를 판매한 초판 《도산 안창호》 표지. 이광수가 썼으며 편집자 박현환이 가필 과정에서 ‘안창호설’을 삽입했다. 사진=김연갑
  ‘안창호설’은 문제의 전기 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출현했다. 이 소설은 1947년 5월 30일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명의로 발간됐다. 초판 1만 부를 발간했는데, 읽을거리가 변변치 않았던 시기에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실제 작가는 이광수(李光洙·1892~1950년)다. 1947년 1월,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실무자로 임시정부 시절 춘원을 도왔던 작가 박현환(朴賢煥·1892~?)이 양주 봉선사(奉先寺)로 춘원을 찾아와 요청해, 춘원이 4개월여 만에 완성한 책이다.
 
  그런데 6·25 전쟁 직후인 1953년 10월, 부산에서 발간된 ‘한글 3판’ 이전까지는 ‘지은이 이광수’는 숨겨진 채 발간됐다. 이광수의 친일 문제를 우려했을 테지만, 그 내용에 대한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 문제는 박현환의 자의적 부연(敷衍)과 의도적 가필(加筆)에 대한 불만으로 이광수가 거부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이광수의 원고에 부연과 가필을 했다고 추정하는 부분은 첫머리 1쪽 분량의 ‘예언(例言)’과 ‘편자식(編者識)’으로 넣은 14쪽 분량의 ‘서언(緖言)’이다.
 
  특히 목차에는 있으나 실제 내용에서는 없는 것도 있다. “살아 있는 태극기와 ‘애국가’”란 대목은 이광수가 쓴 원고에는 있었으나, 출판에서는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대신, 박현환은 ‘애국가’에 대한 언급이나 가사를 제시한 부분에서는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내용을 작은 활자로 가필했다. 임시정부 청사의 아침 일과를 시작하며 의례(儀禮)로 ‘애국가’를 부른다는 대목에서 ‘애국가’에 대한 에피소드를 박현환이 끼워 넣은 경우다. 소설 《도산 안창호》에서 ‘애국가’를 언급한 부분으로 문제가 되는 대목은 이렇다.
 
  ① 정청(政廳)은 매일 아침 사무 개시 전에 전원이 조회를 하여 국기를 게양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하는 ‘애국가’를 합창하였다. 도산은 그 웅장한 음성으로 힘을 다하여서 ‘애국가’를 불렀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점잔을 빼던 사람들도 아이들과 같이 열심히 부르게 되었다.
 
  ② ‘애국가’ 끝 절에, ‘임금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라고 도산이 수정하였다.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作)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 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하였다.
 
  ③ 정청을 정제(整齊)하는 외에 큰일은 《독립신문》 발행과 민족운동 거두(巨頭)를 일당(一堂)에 모으는 일이었다.
 
  《도산 안창호》 제6편 ‘상해시대’라는 부분의 일부인데, 맥락상 임시정부 청사 일과(日課) 의례 상황이다. 일과를 시작할 때 ‘애국가’를 부르는 상황에다 가사 일부를 수정한 사실은 물론, 작사까지 하였다는 듯한 ②를 끼워 넣은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계 기로 지었다는 전제도 없고, 지었느냐고 물으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이유도 없는 허술한 내용이다. 그야말로 작사자라고 거짓말은 못 하겠다는 듯한 표현으로, 이는 일종의 ‘조작’이다. 정리하면, 항목과 내용상으로는 ②를 뺀 ①에서 ③으로 연결되어야 맥락에 맞는다.
 
 
  안창호의 또 다른 ‘애국가’
 
안창호가 1907년 일본에서 귀국할 때, 《태극학보》에 발표한 지금의 ‘애국가’와는 전혀 별개인 ‘애국가’. 사진=김연갑
  《도산 안창호》의 이 기록 때문에 ‘작사자 안창호설’이 유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2차에 걸친 ‘흥사단’과의 논쟁에서 “‘애국가’를 지으셨느냐고 물었을 때 도산이 대답하지 않은 것은 평소 윤치호와 교분이 두터웠던 도산이 윤치호와 ‘애국가’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을 것”이라며 “만일 윤치호가 작사했다면, 임정 초기 요원들은 ‘애국가’를 부르지 않겠다고 했을 것이며, 이는 결국 윤치호를 폄하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 직전, 중국에서 발간된 《김구 선생 제 한국애국가(金九 先生 題 韓國愛國歌)》에서 “50년 전 한 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일명(佚名)해버렸다”고 한 이유와 같다. 만일 안창호가 작사자라면 김구가 이를 모르고 이렇게 썼겠는가. 50년 전이란 ‘무궁화노래’가 작사된 시기이고, 윤치호는 분명 ‘한 애국지사’인 것이다.
 
  ‘안창호 작사설’이 나온 두 번째 배경은 의외로 흥사단이나 안창호 작사설 주장자들이 은폐하고 있는 안창호 작사의 현재의 ‘애국가’와는 별개의 ‘애국가’의 존재 때문이다. 안창호가 1907년 일본을 거쳐 귀국할 당시, 일본에서 회합을 가진 단체가 서북 지방 출신의 일본 유학생 단체 ‘태극학회’였다. 바로 이 단체가 발행하는 《태극학보》 1908년 2월호에 ‘애국생(愛國生)’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애국가’다. ‘애국생’은 안창호가 ‘산옹(山翁)’과 ‘섬뫼’와 함께 쓴 필명이다. 곡조를 찬송가에서 따와 노래로 지은 것이 분명하다.
 

 
  안창호는 ‘신앙 고백’ 한 적 없어
 
  이 작품이 ‘안창호 작사 애국가’임은 홍언(洪焉·1880~1951년)과 이강(李剛·1878~1964년)의 기록에서 확인이 된다. 홍언은 1913년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을 창단했고, 일곱 번째 단우(團友)로 경기도 대표를 맡았던 인물이다. 《신한민보》 1943년 11월 5일자 행사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안창호 선생이 지은 노래”라고 했다. 이강은 1904년 안창호와 함께 공립협회를 창립해 기관지 《공립신문》 주필을 맡고, 1907년 신민회에 참여해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1954년 잡지 《새벽》 창간호 〈내가 본 안창호, 성(誠)의 사람〉이란 글에서 “… 도산 선생의 자작자음(自作子吟)하던 ‘애국가’ 일절(一節) ‘긴날이 맛도록 생각하고, 깊은 밤 들도록 생각함은 우리나라로다, 우리나라로다…”라고 회고한 바가 있다.
 
  그러면 안창호설 주장자들은 안창호의 ‘또 다른 애국가’의 존재를 왜 은폐해왔을까? 이 자료가 영인본(影印本)으로 공개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안창호가 1907년경에 지었다고 주장해 왔던 것을 숨기려 한 것이다.
 
  한편 이 작품에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당시 ‘애국가’의 일반적인 내용인 기독교적 신앙심으로 나라를 위하자는 구절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많은 연구자들이 말했듯이 안창호는 신앙고백(信仰告白)을 한 바가 없다. 그래서 현 ‘애국가’의 ‘하나님이 보우하사…’와 같은 가사를 작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안창호설’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 때는 단순하게 등장해 별다른 논의 없이 끝났다. 그런데 ‘안창호설’이 또다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두됐다. 이것은 윤치호 작사 사실에 대한 집요하고 지속적인 왜곡과 조작이었다. 작사자 조사가 국사편찬위 조사위원들의 조사 결과에 따른 ‘지상 논전’이었다면, 이는 순흥 안씨 계열과 흥사단과 그 진영 논리를 따르는 이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이 반대편에서 필자가 논쟁을 맡아왔다. 이는 두말할 여지없이 1955~56년 문교부가 ‘작사자 미상’으로 남긴 폐해(弊害)의 여파다.
 
 
  윤치호의 《찬미가》
 
  앞서 문교부가 《도산 안창호》를 근거로 작사자를 안창호로 넘겨짚은 일로 작사자 문제가 발생했음을 설명했다. 최초 국사편찬위 작사자조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자를 최초의 서양음악 교사인 김인식(金仁湜·1885~1963년), 도산 안창호, 좌옹(佐翁) 윤치호 등 3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김인식은 조사위원회에 출석해 증언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하면서 제외됐다. 안창호는 1차 회의에서 “안창호는 작사자가 아닌 것만은 명백히 되었다”라는 말이 나오면서 제외됐다.
 
  결국 윤치호만 3차까지 남았고, 그러고 이듬해 국사편찬위원회 자체 조사 결과로 ‘애국가’ 작사는 윤치호라고 재확인하게 됐다. 여기에는 거의 유일하게 입증이 되는 증거 자료가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초기 사진으로 논박을 벌이다 원본이 도착하자 과학적 감식까지 받게 된 친필 〈가사지(歌詞紙)〉, 5월 2일 ‘윤치호씨 저 찬미가집 가지신 분 알려주시길 요망’이란 광고까지 내서 입수해 살핀 《찬미가》, 그리고 1910년 9월 21일자 미주 《신한민보》 소재 ‘윤티호작’으로 표기된 현 ‘애국가’ 4절 소개 기사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 친필 〈가사지〉와 동일 후렴의 2편의 작품이 수록된 《찬미가》는 절대적인 증거력을 갖는 자료다.
 
  1908년 재판 윤치호 역술 《찬미가》는 현 ‘애국가’를 비롯한 두 편의 ‘애국가’와 12편의 번역 찬송가를 수록한 《애국 찬미가집》이다. 윤치호가 1906년 개성에서 한영서원(韓英書院)을 개교하며 첫 입학생 14명을 위해 발행한 프린트본 초판과 1907년 제2회 입학생들을 위해 인쇄본 18쪽의 소책자로 발행한 것이 이 재판본이다. 1970년 《국회도서관보》에 발표된 해제(解題)에 의하면 서지 사항과 그 가치는 다음과 같다.
 
  “尹致昊 譯述, 隆熙 二年(1908), 活字本 一冊, 17.5cm x 12.5cm 18p, 裝幀 赤黃色 表紙 湖附裝. (중략) 초판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초판 인쇄는 재판으로 미루어 보아 1년 미만에 발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명치 45년(1912) 2월 7일 판매 금지도서가 되었다. (중략)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가기관에서도 엄연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적당히 넘겨왔으나, 이제는 사실대로 밝혀서 그릇된 역사를 시정하여야 한다.”
 
  국회도서관 귀중도서 《찬미가》의 존재를 분명하게 기록한 자료다. 주목할 점은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는 점, 관계기관이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하지 않은 점을 질타한 부분이다. 전자(前者)는 탄압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조사 당시 희귀했던 이유를 알게 하는 것이고, 후자(後者)는 문교부가 ‘작사자 미상’으로 남긴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현 ‘애국가’의 원형인 ‘무궁화노래’
 
《찬미가》 제10장에 들어 있는 ‘무궁화노래’. 애국가와 후렴이 같아 현재 ‘애국가’의 원형으로 불린다. 오른쪽은 ‘무궁화노래’가 처음 불려진 독립관. 현판이 보이는데, 최초로 공개되는 사진이다. 사진=김연갑
  이 《찬미가》에는 서양 찬송가 번역 12편과 윤치호 작사 작품 3편이 수록돼 있다. 이 번역 12편과 창작 3편을 묶어 ‘윤치호 역술(譯述)’로 발행한 것이다.
 
  Patriotic Hymn No[1] TUNE AULD SANG SINE/ 제10장/ 무궁화노래
 
  一 승자신손 천만년은 우리 황실이오/ 산고슈려 동반도난 우리 본국일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애국하난 열심의긔 북악갓치 놉고/ 충군하난 일편단심 동해갓치 깁허
 
  三 이천만인 오즉 한맘 나라 사랑하야/ 사롱공상 귀천업시 직분만 다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 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

 
《독립신문》 1897년 8월 13일자로 ‘무궁화노래’의 첫 출현을 알리고 있다. 사진=김연갑
  현재의 ‘애국가’와 후렴, 곡조, 곡명, 형태가 같다. 이 때문에 현 ‘애국가’의 원형(原型)으로 취급된다. ‘민요론’에서 보면 같은 노래의 각편(各遍) 관계다. 그런데 이 노래의 문헌상 첫 출현은 《독립신문》 1897년 8월 13일자에 ‘무궁화노래’로 등장한다. 조선 개국 505주년 기념식을 보도한 기사에서 기자는 가사 일부와 곡명만을 소개하고 있다.
 
  〈무궁화노래를 불으니-우리나라 우리님군 황텬이 도으샤 님군과 백셩이 한 가지로 만만셰를 길거야 태평 독립 하여 보셰- 하니 외국 부인이 악긔로 률에 병챵 했다더라.〉
 
 
  배재학당 학생들이 지었다?
 
  이 한 소절의 가사는 앞에서 살핀 ‘Patriotic Hymn No[1]’의 제4절 ‘우리나라 우리 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를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다. 다만 한자를 우리말로 풀어 운율에서 벗어난 것일 뿐이다. 곡명을 ‘무궁화노래’라고 하였고,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과 가사 1~3절은 생략했다. 기사를 보면 작사자와 곡조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이유를 추정한다면 당일 프로그램을 소개한 전단(팸플릿)이나 이를 제시한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데 2년 후 1899년 6월 29일자 《독립신문》 배재학당 방학식 기사에는 전체 4절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친일음악론》의 저자 노동은(魯棟銀) 전 중앙대 교수는 자신의 논문 〈‘애국가’ 언제, 누가 만들었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배재학당 학도들은 이를 반증이나 하듯이 ‘무궁화노래’를 지어 그때까지의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종합하여 점차 일반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1899년에 지어 부른 ‘무궁화노래’가 그것이다.
 
  一 성장신손 오백년은 우리황실이오/ 산고수려 동반도난 우리 본국일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四 우리나라 우리님군 황천이 도으사/ 국민동락 만만세에 태평독립하세(2, 3절 생략)〉

 
  이 기사를 통해 ‘무궁화노래’ 가사의 전모가 처음으로 드러난 것인데, 노 교수는 배재학도들이 노래를 지어 《독립신문》이 주도해온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종합해 일반화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밑줄 친 두 곳에서 동사 ‘지어’라는 표현을 썼다. 이 ‘무궁화노래’ 4절 가사의 작사자는 ‘배재학당 학도들’이라고 한 것이다. 문제적인 이 주장에 대해서는 뒤에서 검토하기로 한다.
 
 
  제10장 ‘무궁화노래’와 제14장 ‘애국가’와의 관계
 
《찬미가》 제14장의 ‘애국가’. 현재 우리가 부르는 윤치호작 ‘애국가’다. 사진=김연갑
  한편, 이 《찬미가》 10장에는 기존 찬송가집의 편찬 방식에 따른 곡명과 곡조 표기 다음에 유일하게 ‘No[1]’이란 번호를 부여했다. 이는 지금부터 살피게 될 제14장, 즉 현 ‘애국가’에 앞선 작품임을 밝히는 것으로, 전·후편 또는 제1편이란 의미다. 제14장과 같은 곡명, 곡조, 성격(애국적 찬미가)의 작품이지만, 이것이 첫 번째 작품이라고 표시를 한 것이다.
 
  1897년 작사했기에 1907년 작사한 제14장(현재의 ‘애국가’) 간의 선후(先後)를 밝힘과 동시에 같은 작사자의 작사임을 밝힌 것이다. 이 《찬미가》를 지은 윤치호는 실용성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서문이나 주(註)를 달지도 않았으니, 이런 표기로 보완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노동은 교수는 1897년 조선 개국 505주년 기념식에서 불린 일부 가사와는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에서 1899년 완전한 4절 가사로 나오게 되었다고 보았다. 서로 다른 노래라고 한 것은 물론, 전자는 작사자가 없고, 후자는 배재학당 학도들이 작사자라고도 하였다. 노 교수는 두 작품을 윤치호가 재판 《찬미가》에 작사한 것이 아니라 ‘감수’하여 옮겨놓았을 뿐이라고 하며, 현 ‘애국가’의 후렴도 이 노래에서 차용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이후 윤치호를 작사자로 보지 않게 하는 가장 큰 논리로 작용했다.
 
  Patriotic Hymn TUNE AULD SANG SINE/ 제14장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일편딘심 일세
 
  四 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 하세

 
 
  민족운동 현장 경험 통해 민중이 ‘애국가’ 선택
 
  현 ‘애국가’의 문헌상 첫 출현이다. 앞에서 살핀 제10장 ‘무궁화노래’와 함께 기독교계에 널리 확산되면서 1910년을 전후해 대표성을 갖게 됐다. 그리고 1919년 3·1 운동 현장의 거의 유일한 ‘애국가’로 불리게 됐다. 이는 작사자의 의도도, 누군가의 권유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민중의 선택으로 된 것이었다. ‘만세삼창’과 ‘태극기’와 함께 ‘애국가’는 3·1 운동 구성원의 ‘무기’로서 그 위상을 확보한 것이다.
 
  이렇게 민중이 민족운동 현장 경험으로 스스로 ‘애국가’를 선택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일제의 눈을 피해 지하에서 부르는 노래가 되었으나, 해외 독립운동 진영과 교민단체에서는 각종 의례에서 ‘국가’ 기능으로 불러 그 위상을 공고히 했다. 특히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개원식과 광복군 성립식과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에서 연주됨으로써 관습법적인 국가(國歌)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윤치호 친필 〈가사지〉
 
윤치호가 작고 직전인 1945년 9월에 딸 문희씨에게 남긴 친필 〈가사지〉. 미국에서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사진을 보내왔다. 최남선 등이 이 자료로 육인 감식을 했다. 〈가사지〉 뒷면에 문희씨가 ‘아버지께서 친히 써주신 것’이라고 적었다. 사진=김연갑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작사자 조사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연합신문》 7월 30일자는 “윤씨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단정하는데, 그 물적 증거는 윤치호 친필(親筆) ‘애국가’ 사본(寫本)과 샌프란시스코 거주 양주은(梁柱殷)씨로부터 온 앨범 복사판 및 윤치호 작 찬미가(讚美歌)를 목도(目睹)하였다는 인사(人士)들의 증언 등에 의한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여기서 ‘친필 애국가 사본’, 즉 ‘친필 가사’의 증거력이 입증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미국에서 보내온 사진판은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해제로 보존돼 있다.
 
  “愛國歌 / 분류 書畵 〉 筆蹟 / 등록번호 史資 2220 / 본문 愛國歌 / 대한제국 때의 정치가 佐翁 尹致昊(1865~1945)가 ‘애국가’ 가사를 자필로 쓴 원고. 자료 끝 부분에 一九0七年 尹致昊 作이라고 쓰여 있음. / 소장 서울특별시 尹永善.”
 
  조사 당시 〈가사지〉에 대해 최남선(崔南善·1890~1957년) 위원이 “자필이 맞다면 작사자를 좌옹으로 봄이 타당하다”는 발언을 하면서 국립과학수사소 치안국 감식과의 감정을 거쳐 친필임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1945년 9월 윤치호의 셋째 딸 문희(文姬)가 일부 구(句) 제4절 ‘임군을 섬기며’를 세간에 바꿔 부르는 것이라고 윤치호에게 알려 ‘충성을 다하여’로 고쳐 쓰고, 원본 《찬미가》대로 현대 철자법으로 써서 가족에게 남긴 것이다. 뒷면에는 ‘1945년 9월 아버지께서 친히 써주신 것’이라고 되어 있어, 해방으로부터 한 달, 서거하기 석 달 전에 남긴 것이다. 1907년 작사 시점과 한글맞춤법을 이른 시기에 실천한 사실과 충군애국적 신앙관을 입증하는 자료로 국사편찬위원회가 이를 인정한 것이다.
 
 
  1980년대에 다시 문제 등장
 
서지학자 안춘근이 1903년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애국충성가’ 내용이 보도된 《조선일보》 기사. 사진=김연갑
  그런데 《찬미가》와 함께 이 자료의 증거력을 와해시키려는 책동들이 나타났다. 1980년대 들어 ‘애국가’ 작사 문제가 다시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1981년 한 달 사이에 ‘애국가’ 가사를 필사한 자료 3종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서지학자 안춘근(安春根·1926~1993년)이 2차에 걸쳐 공개한 자료들인데, 1981년 4월 2일자 《조선일보》에 공개한 1903년 필사 ‘애국충성가(愛國忠誠歌)’와 《중앙일보》 4월 11일자에 공개한 유명인사가 썼다는 ‘한문 애국가’ 외 1편이다. ‘애국충성가’는 곡명부터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는데, 현재 ‘애국가’와 내용이 거의 유사했고, 필사 시점이 1903년이란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 ‘애국가’를 윤치호가 작사했다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10일 후 2종이 더 공개됐다. 천도교 주요 인물로 3·1 운동 33인 중 한 분인 김완규(金完圭) 선생이 1905년에 옛 철자법대로 필사했다고 했다. 또 하나는 김수항(金壽恒)이란 사람의 필사 ‘한문 애국가’로, 비단천에 ‘甲辰(1904년)’이란 간지(干支)를 밝힌 자료라고 했다. 필사자가 각각 다르다는 점에서 “현 ‘애국가’를 특정인이 작사했다고 단정하기 어렵게 한다”는 평을 했다. 이대로라면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히 윤치호의 1907년 작사 사실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1907년 윤치호 작사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수집하였다가 공개한 듯한 인상을 갖게 했다.
 
 
  ‘공동작사설’ 등장
 
  1994년 뜻밖에도 이들 자료 공개로 인해 영향을 받은 논문이 발표됐다. 근대음악사와 친일음악론을 전공하는 노동은 전 중앙대 교수(2016년 작고)가 1994년 《역사비평》 25호에 〈‘애국가’ 언제, 누가 만들었나〉라는 글을 발표한 것이다. 안춘근의 공개 자료에 나타난 1905년이란 시점을 ‘애국가’의 작사 시기와 《찬미가》 초판 발행 시점으로 잡고, ‘공동작사설’이란 논리를 전개했다. 이것은 윤치호 작사에 대한 핵심 증거인 《찬미가》와 친필 〈가사지〉의 관계를 해체시키려는 논리로 작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창출된 것이 ‘역술’의 편협한 해석이다. 역술을 단지 ‘감수하여 옮긴 것’이라고 풀이한 것인데, 1908년 윤치호 역술 《찬미가》 수록 3편의 작품은 ‘감수하여 옮긴 것’이라고 했다.
 
  〈‘우리황상폐하’ ‘승자신손 천만년은’ ‘동해물과 백두산’, 이 세 작품의 가사는 윤치호가 ‘감수하여 옮겼다’라는 뜻을 가진 역술일 것이다. 이것은 이미 앞서 살펴보았듯이 배재학당 학도들이 1899년 지은 ‘무궁화노래’가 다름 아닌 윤치호 역술의 ‘승자신손 천만년은’이었기 때문이다.〉(노동은, 〈애국가 언제, 누가 만들었나〉, 31쪽)
 
  ‘역술’에 대해 노 교수의 해석을 수용하기는 어렵다. 1998년 필자는 졸저 《애국가 작사자 연구》에서 “일부는 번역이고, 일부는 지은 것으로 역과 술의 합성어”라고 했다. 객관적으로 보아 번역 12편 찬송가와 번역이 아닌 3편의 창작을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냈다면, 이를 달리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당시 급속히 밀려오는 선진 학문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근대출판 용어로서, 오히려 윤치호는 합리적 표현을 썼다고 봐야 한다. 1895년 일본 《제국문학》 8월호 〈번역의 진상〉이란 글은 ‘역술’을 이렇게 설명했다.
 
  〈번역이 곤란하여 때로 오류가 불가피한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역술로 되는 것이고, 이것 역시 가능하더라. 무릇 역술이라 함은 7할의 번역과 3할의 창작을 가미한 것이라더라.〉
 
  이러한 해석에 비춰볼 때 노동은의 주장은 매우 자의적인 해석이다. 노 교수는 이를 확대해 윤치호의 두 자료에 대한 증거력을 와해시키거나, 안창호를 중심에 둔 ‘공동작사설’을 입론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펜젤러전집》에서 윤치호 자료 발굴
 
배재대 발행 《아펜젤러전집》에는 윤치호를 ‘무궁화노래’의 작사자라고 밝힌 《독립신문》 영어 기사가 실려 있다. 사진=김연갑
  2010년대 들어 다시 ‘애국가’에 대한 관심이 일게 된다. 흥사단이 2014년 창단 100주년을 기념해 ‘애국가 작사자 규명위원회’를 조직하고 학술대회 등을 준비하면서부터다. 이 과정에서 필자도 흥사단 측과 2차에 걸친 공개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다. 필자는 두 자료의 증거력을 강화하는 주장을 발표했다. 흥사단 측은 윤치호가 친일파이기 때문에 작사자가 될 수 없다는 ‘진영(陣營) 논리’를 기본으로, 안춘근과 노동은 주장으로 비롯된 《찬미가》와 친필 〈가사지〉의 증거력을 무시하는 투로 나왔다. 그러다 보니 격렬한 논쟁으로 변질했다.
 
  이렇게 격론을 벌이던 중, 필자는 배재대학교에서 발행한 《아펜젤러전집》을 보게 됐고, 여기에서 획기적인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그것은 1897년 8월 17일 조선 개국 505주년 기념식 영어판 기사로, 그동안 곡명과 일부 가사만 소개된 8월 19일자 한글판보다 자세하게 다룬 〈The Day We Celebrate Editorial Notes〉다. 독립문 근처 독립관(獨立館)에서 행한 기념식의 식순은 물론, 윤치호의 강연 내용이나 부른 노래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그리고 매우 놀라운 내용도 있었다.
 
  〈배재 청년들이 ‘무궁화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한국의 계관시인 윤치호가 이날 행사를 위해 작사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 시를 스크랜턴 여사가 오르간으로 반주하는 ‘올드 랭 사인’ 곡조에 맞춰 불렀다.(The Paichai boys sang a song ‘National Flower’ which was composed by the poet lauriate of Korea, Mr. T. H. Yun, for the occasion. They sang it to the tune of ‘Auld Lang Syne’ accompanied by Mrs. M.F. Scranton on the organ.)〉
 
  계관시인(桂冠詩人) 윤치호가 ‘무궁화노래’를 지어 배재학당 학생들이 불렀다는 내용이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글판 기사에는 작사자를 밝히지 않았는데, 윤치호가, 그것도 국가의 행사 의례문을 지어내는 계관시인이란 명예를 부여한 기록이었다.
 
 
  《독립신문》에는 ‘지어’라는 말 없어
 
  이로써 노 교수가 배재학도들이 지어 불렀다고 한 1899년 방학 예식 기사를 다시 꼼꼼히 살펴봐야 했다. 노 교수는 논문에서 이 기사에 대해 각주를 달았는데, 의외로 내용이 없는 ‘《독립신문》 1899년 6월 29일자’만 달았다. 그래서 다시 해당 기사를 찾아보았다.
 
  〈배재학당 학원의 방학예식 行하다. 前報에 기재얏거니와 昨日下年 二時에 정동회당에 배재학당 교장 교원 학원이 제회, 無窮花歌로 송축고, 下 五時에 歸엿더라.〉
 
  그런데 “無窮花歌”를 언급한 부분에서 노 교수의 글과는 다른 점이 확인됐다. 여기에는 분명히 ‘지어’라는 동사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노 교수의 글에는 학도들이 ‘지은’ 또는 ‘지어’라는 언급이 세 곳이나 있었다. 그렇다면 노 교수는 의도적으로 ‘지어’를 넣었다는 것이다.
 

  2014년은 흥사단이 창단 100주년을 맞아 윤치호 작사 사실을 무력화(無力化)시키고, 정부에 안창호 작사를 공표해달라는 청원을 했음에도 낭패를 본 해이다. 순흥 안씨 후손 안춘근에 이어 안창호설 띄우기에 가담한 안민석(安敏錫)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동원해 ‘안창호설’을 부각시키려 했다.
 
  그런데 오히려 되치기를 당했다. 이 프로그램은 윤치호 친필 〈가사지〉의 필적 감정을 다시 해 ‘진품’이라는 감정 결과를 받아 방영했다. 무엇보다 관심을 모았던 안춘근 공개 자료를 화면을 통해 공개하는 바람에 ‘육안 감정’을 한 이들로부터 격(格)이 떨어지는 자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방송을 통해 소장처를 알게 된 필자는 완주책박물관 박대헌(朴大憲) 관장에게 진위 감정을 의뢰했다.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안춘근의 공개자료 3종 모두 ‘끼워 넣기’ 등의 수법에 의한 위작(僞作)임이 밝혀진 것이다.
 
 
  최남선이 지은 〈독립선언서〉도 인정
 
  이렇게 격렬한 ‘애국가’ 논쟁 시대였던 2014~2019년을 전후해 윤치호가 작사자임이 확인됐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최남선이 지은 〈독립선언서〉를 인정하듯이 ‘애국가’도 이같이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인지. 또한 1897년 ‘무궁화노래’ 작사로부터 1907년 현 ‘애국가’ 작사까지 윤치호의 ‘충군애국’ 활동을 이후의 친일 행위로 소급해서 그 작품까지도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특히 당시 윤치호의 사상 검증을 하여 ‘애국가’ 작품을 의뢰한 것이 아닌데다, 개인적 애국심으로 지은 작품을 우리가 필요해 3·1 운동 현장에서 선택함으로써 오늘에 이른 각별한 현상을 무시해야 할 것인지도 고민해야 할 문제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의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위원은 “현재 작사자 판정을 주저하는 큰 이유는 불건전하고 감정적인 선입견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계속 조사의 필요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라며 “‘애국가 작사자 조사위원회’ 첫 회합에서 작사자가 판명되기도 전 편찬위원 간에 ‘윤치호가 작사자라면 애국가는 개작돼야 한다’는 무모한 망언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조사위원의 상황 한계를 벗어난 지나친 불평”이라면서 “윤치호씨는 친일한 사람이므로 작사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 고의적으로 작사자 판명에 무형의 압력을 가한 오류를 범한 일”이라고 했다.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로 할 일 다해”
 
춘원 이광수. 이광수는 윤치호와 막역했던 안창호를 통해 윤치호의 인간됨을 파악하고 있었다. 사진=조선일보
  《도산 안창호》의 발간인인 서영훈(徐英勳)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전 부회장(2017년 작고)은 “도산 선생이 직접 ‘애국가’를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면, 오히려 선생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춘원 이광수는 일찍이 윤치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좀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명망과 재능과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도 일신의 안락(安樂)에만 탐(耽)하여 세사를 잊어버린 사람이라 씨를 비난하였다. 나도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였었다. 그러다가 기미년 간에 내가 상해에 유랑할 때 씨의 예전 동지이던 안씨(안창호)를 만나 ‘윤씨는 전전긍긍(戰戰兢兢)한 수성(守成)의 인물일지언정 그가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을 위하여 일하려 하는 지(志)와 성(誠)을 나는 굳게 믿노라’라고 누누이 역설(力說)함을 듣고 나와 및 나와 같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씨에 대하여 존경과 정중(鄭重)을 갖게 되었다.”
 
  작가 이광수가 윤치호를 인식하게 된 배경이 ‘안창호의 윤치호 평가’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재일한국신문》 주필을 지낸 김을한(金乙漢·1905~1992년)은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조사 미상 결정을 비난이나 하듯 《연합신문》 1959년 11월 27일자 〈애국가만으로도 할 일을 하였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남기고, 윤치호는 ‘애국가’를 남긴 것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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