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분석

한일 관계 꼬이게 만든 ‘강제징용 판결’ 다시 읽기

“식민지배를 불법이라고 전제한 건 과거사에 대한 판단을 사법부에서 한 것”

  •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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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일본에서 시작,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21년 걸려
⊙ 대법원, 2012년 일본의 1~3심, 한국 1, 2심 뒤집고 신일철 손해배상 책임 인정
⊙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그 효력이 배제된다”(2012년 대법 판결)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 등은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에서 승소했다. 사진=뉴시스
“저도 당시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많은 분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서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5월 7일 한일정상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3월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의 방일(訪日) 이후 기시다 총리의 답방 논의가 있을 때부터, ‘강제징용 문제’를 어떻게 짚고 넘어갈 것인가 하는 것은 관심사였다. ‘강제징용 문제’는 문재인 정권 시절 한일 갈등의 단초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문재인 정권 시절 한일 갈등은 일본이 2019년 8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 것이 발단이 됐다. 당시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일본이 그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2018년 10월 대법원이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판결(2013다61381)을 내린 데 대한 보복이라고 해석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사실 2012년에 있었던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2009다68620)의 재상고심(再上告審)이었다. 2012년 5월 24일 김능환 당시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대법원 민사1부는 원고(原告)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패소(敗訴) 판결을 내린 1심과 2심 결과를 뒤집고, 원고 승소 취지로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서울고등법원은 이에 따라 원고인 강제징용 피해자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피고인 신일본제철(신일철)은 대법원에 상고(上告)했다. 대법원(전원합의체)은 2018년에야 상고를 기각(棄却), 원고 승소가 확정됐다. 최종 결론인 재상고심을 맡은 대법원 입장에선 동일한 사건에 대한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다시 뒤집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즉 2018년 대법원 판결의 뿌리는 2012년 대법원 민사1부의 판결인 셈이다.
 
 
  재판의 시작
 
2013년 7월 1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여운택(오른쪽), 이춘식씨가 소송에 쓰였던 자료를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DB
  국내외 강제징용 재판은 고인(故人)이 된 여운택·신천수씨가 1997년 일본 오사카지방법원에 신일본제철(신일철)을 상대로 1941~1945년 구(舊)일본제철에서 일하면서 당했던 불법행위와 미불(未拂)임금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시작됐다. 원고인 여씨와 신씨는 금전적 손해배상과 함께 사죄문 교부를 요구했다. 오사카지방재판소는 2001년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오사카지방재판소는 노동에 강제성이 있었다는 원고의 주장은 받아들이면서도 ‘강제연행(강제징용)’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봤다. 이들이 신일철 오사카제철소에서 일하게 된 것은 노동자 모집 공고를 보고 스스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2심인 오사카고등재판소는 2002년 여씨와 신씨의 항소(抗訴)를 기각했다.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가 여운택씨와 신천수씨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이들의 패소가 확정됐다.
 
  그러자 두 사람은 2005년 2월 28일 서울지방법원에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일본에서와 같은 내용의 소를 제기했다. 김규수·이춘식씨가 이때 원고로 합류했다. 다만 이때는 피고의 사죄문을 요구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진행된 강제징용 손해배상 재판의 핵심 쟁점은 ▲일본에서 나온 판결을 인정할 것인지 여부 ▲신일본제철을 구(舊)일본제철과 동일한 회사로 볼 것인지 여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한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는지 여부 ▲손해배상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는지 여부 등 네 가지였다. 이 중에서 논란이 된 부분은 ‘국가로서가 아닌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이 1965년 협정으로 인해 사라졌는지’ 여부였다.
 
강제징용 재판 일지(※괄호는 사건번호)
 
  - 1997년 12월 24일 여운택·신천수씨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본제철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 제기
  - 2001년 3월 27일 오사카지방재판소, 원고청구 기각
  - 2002년 11월 19일 오사카고등재판소, 항소 기각
  - 2003년 10월 9일 일본최고재판소, 상고 기각
  - 2008년 4월 3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원고 패소(2005가합16473)
  - 2009년 7월 16일, 서울고등법원, 항소 기각(2008나49129)
  - 2012년 5월 24일 대법원, 파기 환송(2009다68620)
  - 2013년 7월 10일, 서울고등법원, 원고 승소(2012나44947)
  -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상고 기각(2013다61381)
 
  2012년 대법, “개인청구권 소멸하지 않았다”
 
  이에 관해 서울중앙지법과 서울고법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른 개인의 청구권 소멸 여부를 제외한 모든 쟁점에서 피고인 신일본제철의 주장을 받아들여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2012년 김능환 대법관이 주심을 맡은 대법원 민사1부는 하급심 판단을 뒤집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원고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한 것이다. 대법원 민사1부는 1965년 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했는지에 대해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1965년의 청구권협정에 대해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은 제2조에 의한 권리 문제의 해결과 법적 대가관계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재판부는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을 비추어 볼 때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대일청구권과 보상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47년이 지난 2012년이 되어서야 징용공 문제와 관련된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나서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오게 된 것은 한일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청구권 문제를 둘러싼 곡절과 관련이 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은 국교 정상화를 위해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과 부속 협정으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청구권협정)’을 체결했다. 청구권협정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유·무상 5억 달러를 수령했다.
 
  1974년 박정희 정부는 ‘대일민간청구권보상에관한법률’(청구권신고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75년 7월 1일~1977년 6월 30일 ‘대일민간청구권 증거자료 등이 있는’ 국민들의 신고를 받아 피징용자 인명 피해 및 재산 피해에 대해 보상했다. 1인당 보상액수는 31만원 미만, 보상건수는 8만3519건, 총 보상액은 91억8769만원이었다. 이는 청구권자금 무상 3억 달러의 9.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2005년 8월 26일 노무현 정부는 이해찬 국무총리가 주재한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를 열고 ‘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효력 범위 문제 및 이에 따른 정부 대책 방향’을 논의, 발표했다. 이 위원회는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논의 결과를 토대로 오랜 기간 고통을 겪어온 강제동원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도의적·원호적 차원과 국민 통합 차원에서 정부 지원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05년부터 2차 보상에 나서, 2023년 2월 말 기준 7만8000명에 대해 약 6500억원을 지급했다.
 
  대법, ‘식민지배=불법’ 판결
 
2009년 김능환 당시 대법관의 모습. 사진=조선DB
  일본에서 피해자들이 패소한 판결을 우리 법원이 인정할 것인지의 여부는 민사소송법 제217조에 따르는데, 동조(同條) 제3호에 의하면 ‘그 판결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모호한 이 규정을 2012년 대법원 민사1부는 이렇게 해석했다.
 
  〈현행 헌법도 그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중략) 계승하고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일제 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그 효력이 배제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일본 판결 이유는 일제 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 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판결이 나온 다음 날인 2012년 5월 25일 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김능환 대법관은 주변 지인들에게 “건국하는 심정으로 이 판결을 썼다”고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조정현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식민지배를 불법이라고 전제한 건 과거사에 대한 판단을 사법부에서 한 것”이라고 했다. 조 교수는 외교통상부 조약국 국제법규과 연구원과 국립외교원 교수를 지냈다.
 
  반면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재판관인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2012년, 2018년) 대법원 판결은 일제 식민지배가 불법이었다는 걸 전제로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위의 신일철 징용공 재판과는 별도로, 2012년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한 강제징용 재판의 원고 대리를 맡은 최봉태 변호사는 이 판결에 대해 “한일 법치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최 변호사는 2012년 5월 24일 김능환 대법관 주심 대법원 소부(小部)가 원고 승소 취지로 판결한 2건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재판(피고는 각각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 중 미쓰비시 사건을 대리했다.
 
 
  대법관 2명, ‘청구권 문제 해결됐다’
 
제3자 변제금 수령을 위해 작성해야 하는 ‘강제징용 관련 확정판결 판결금 지급결정 동의 및 지급신청서’. 자료=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이 판결과 관련,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대법원 소부인 민사1부가 아니라 전원합의체에서 다루어야 했다는 지적도 있다. 전원합의체는 대법원장을 포함한 13명의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인 대법관은 제외)이 사건을 표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 외에는 12명의 대법관(대법원장·법원행정처장 제외)이 4명씩 3개의 소부를 이뤄 사건을 처리한다.
 
  2012년 대법원 판결은 소부에서 만장일치로 내려졌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최종 확정한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선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이 반대의견을 냈다. 두 대법관은 ‘개인의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다수 의견에 대해 “청구권협정 제2조 1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반대의견을 냈다. 이들은 또 “청구권협정의 대상과 목적 등에 비추어 청구권협정 제2조를 (중략) 통상적 의미에 따라 해석하면 청구권협정 제2조 1에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은 대한민국 및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 및 일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과 일본 및 일본 국민의 대한민국 및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에 관한 문제’임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러한 해석의 기준이 된 것은 “조약은 전문 및 부속서를 포함한 조약문의 문맥 및 조약의 대상과 목적에 비추어 그 조약의 문언에 부여되는 통상적 의미에 따라 성실하게 해석하여야 한다”는 빈 협약 제31조였다.
 

  이처럼 강제징용 판결은 한일 양국 조약 해석 및 과거사가 얽혀 있는 국가 간의 문제였기 때문에 외교부의 입장 표명도 중요했다. 주진열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강제징용 문제는 국가 간 조약이 걸린 문제였고 조약의 체결은 행정부가 하는 것”이라며 “외교부가 대법원에 기각하는 게 맞다고 의견을 내는 게 엄밀히 말하면 삼권분립에 맞다”고 강조했다.
 
강제징용 문제와 신일철
 
  일본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1942년 ‘조선인 내지(內地·일본 본토) 이입 알선 요강’을 통해 한반도 각 지역에서 인력을 모집했다. 소송을 낸 피해자들은 당시 평양, 보령, 군산 등에 살고 있었다. 구일본제철은 한반도 각지에서 모집·알선된 조선인들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이때 구일본제철은 기술을 가르쳐준다고 광고했지만 막상 시킨 일들은 기술 습득과는 별 상관없는 위험하고 고된 것들이었다. 1944년 국민징용령이 실시되면서부터 상황은 더 나빠졌다.
 
  판결문에 의하면, 하루 12시간 노동을 하며 임금은커녕 식사조차 턱없이 적었고 도망가고 싶다는 말을 입 밖에 내기라도 했다간 기숙사 사감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1947년, 구일본제철은 피해자들에게 미불 임금을 공탁(供託)했다. 그리고 1950년 구일본제철은 일본의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에 의해 해산되면서 구일본제철의 자산 출자로 야하타제철, 후지제철이 설립됐다. 그리고 1970년 야하타제철은 후지제철을 합병, 신일본제철(신일철)로 상호를 변경했다. 신일본제철은 2012년 스미토모 금속공업과 합병하면서 신일철주금이 되었다가, 2019년 4월 1일 일본제철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능환 대법관의 그후
 
김능환 전 대법관은 2013년 퇴임 후 5개월 동안 부인과 함께 편의점을 운영했다. 사진=조선DB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된 2012년 대법원 판결은 우리 법원의 1, 2심 판결과 일본 법원의 1~3심 판결을 뒤집는 것일 뿐 아니라, 삼권분립의 원칙, 빈 협약 등 국제법에 반하는 것이었다.
 
  김능환 전 대법관은 강제징용 사건 판결을 내린 2012년 이듬해 3월 퇴임했다. 김 전 대법관은 재직 중 국산 중형 세단을 몰고,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에서 대법관 가운데 꼴찌에서 두 번째를 기록했다 하여 ‘청백리(淸白吏)’라는 칭송이 따라다녔다. 그는 퇴임 후 대형 로펌이나 대학으로 갔던 전임자들과는 달리 부인과 함께 편의점을 열어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약 5개월 만에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유지할 수 없다)’이라는 말을 남긴 채 결국 한 대형 로펌에 자리를 잡았다.
 
  오랫동안 표류해왔던 한일 관계가 개선의 기미가 보이는 이때, 2012년 강제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을 내려 한일 관계에 파란(波瀾)을 일게 했던 김능환 전 대법관의 소회를 들어보고 싶었다. 김 전 대법관이 몸담고 있는 대형 로펌에 인터뷰 요청을 했다. 로펌 관계자는 “말씀은 드려보겠지만 김 전 대법관이 인터뷰에 나선 바가 없다”고 했다. 김 전 대법관에게도 직접 연락해봤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얼마 후 해당 로펌에서는 인터뷰를 거절한다는 답변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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