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용가 최승희 제자로 월북했다가 탈출, 한국무용의 르네상스를 꽃피워
⊙ 1947년 평양에서 제1회 ‘김백봉무용발표회’ 열어… 경희대 무용학과 교수로 퇴임
⊙ 최승희와 동서지간… 남편은 카프시인 안막의 동생 안제승
⊙ 안병주·병헌·귀호·혜진 등 자녀·후손 다수가 무용가로 활동 중
⊙ 김백봉이 완성한 〈화관무〉 〈부채춤〉 〈장고춤〉은 명무(名舞)이자 한국예술의 고전
⊙ 1947년 평양에서 제1회 ‘김백봉무용발표회’ 열어… 경희대 무용학과 교수로 퇴임
⊙ 최승희와 동서지간… 남편은 카프시인 안막의 동생 안제승
⊙ 안병주·병헌·귀호·혜진 등 자녀·후손 다수가 무용가로 활동 중
⊙ 김백봉이 완성한 〈화관무〉 〈부채춤〉 〈장고춤〉은 명무(名舞)이자 한국예술의 고전

- 김백봉 선생이 2012년 〈부채춤〉 공연을 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 가락의 멋과 흥을 몸으로 표현하는 춤이 잘 추는 춤”이라고 말했다.
김백봉(金白峰·90·본명 忠實)은 최승희의 제자로 그녀의 ‘모던 댄스’를 정통으로 계승했다. “김백봉의 무용은 최승희의 영향을 받았지만 스승을 능가하는 완성미와 창의성이 빛난다”(서연호 고려대 명예교수)고 할 만큼 쉼없이 달려왔다. 김백봉은 한국을 대표하는 예인(藝人) 중 한 명으로 손색이 없다.
지난 7월 5일 경기도 고양에서 만난 원로 무용가는 아흔이란 나이가 무색할 만큼 기품이 있었다. 두 딸 경희대 무용학부 안병주(安秉珠·56) 교수와 안병헌(安秉憲·54) ‘김백봉춤보전회’ 상임이사도 어머니의 맥을 열심히 잇는 무용가다.
김백봉 선생에게 물었다. “두 딸이 어머니 맥을 이으니 좋으시겠어요.”
선생은 “그냥, 열심히 해 주니까 고맙지. 내 입으로 딸 칭찬하기가 곤란해요. 열심히 좋아서 하니까 감사하지”라고 했다. 다시 김백봉 선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방식이 최승희 선생에게 배울 때와 어떻게 다른가요?”
김백봉은 15살 무렵인 1941년 6월 최승희를 처음 만나 도쿄의 최승희무용연구소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연습은 물론 청소, 빨래, 부엌일 등 궂은 허드렛일을 하며 무용을 배웠다. 1년6개월 뒤인 1942년 12월 도쿄 제국극장 공연에서 〈궁녀무〉를 추어 정식 데뷔했다.
열쇠구멍으로 춤 훔쳐보며 기본기 익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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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11월 공연 〈김백봉, 춤의 아리랑〉에서 김백봉 선생이 커튼콜을 받고 무대에 올라 인사를 하고 있다. |
“연습실 열쇠구멍으로 훔쳐보며 기본기를 익혔어. 선생님(최승희)은 자기 작품을 전수하진 않으셨어요. 무용을 할 수 있는 예술적 역량을 가질 수 있게 가르쳤던 겁니다. 제가 처음 최승희 공연을 봤을 때 선생님의 눈동자가 소의 눈처럼 크게 느껴졌고 저만 쳐다본다고 생각했어요. 공연을 같이 본 사람들 모두가 똑같이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꼈다는 겁니다. 그때 선생님의 눈길, 무용가와 객석의 교감이랄까, 시선 처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게 된 겁니다. 저는 미련했어요. 남의 생각을 한 일이 없어요. 제 생각대로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열심히 했어요. 요새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을 참지 못할 겁니다.”
김백봉의 남편 안제승(安濟承·1922~1998)과 최승희의 남편 안막(본명 安弼承·1910~미상)은 숙명의 대칭관계다. 안제승의 형이 최승희의 남편 안막이다. 안막은 일제시대 프롤레타리아 시인이자 평론가로 문필을 날렸던 월북작가다. 그는 1931년 10월 조선공산당 재건공작 사건에 연루돼 작품활동을 못하게 되자 이후 최승희의 매니저로 활동했다.
안제승은 경성제1고보(현 경기중)를 중퇴하고 니혼대 영화과에 입학해 2년간 수학하며 형과 형수의 공연을 도왔다. 요즘으로 치면 공연 스태프로 일했다. 그 시절, 김백봉은 ‘하늘 같았던’ 최승희의 제자였으나 1944년 안제승과 결혼하며 최승희와 동서지간이 됐다.
김백봉 선생의 말이다.
“남편은 천재에 속하는 것 같아.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어도 음만 잡으면 피아노를 치고, 노래도 잘하세요. 남편 큰형님이 일제시대 음악대학을 졸업할 때 금메달을 따셨을 정도로 시댁 식구가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어요. 남편은 제 무용의 구성에서 무대의상, 조명까지 꼼꼼히 챙길 정도로 재주 있는 천재였어요. 평생 저를 위해 헌신했어요.”
안제승의 맏형 안보승(安輔承· 1994년 사망)은 시인이자 성악가다. 도쿄에 있던 제국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YMCA에서 성가대를 지휘하고 ‘빅터 레코드’에서 음반을 내기도 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와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안막·최승희가 북으로 떠나자 형 보승은 대중 앞에서 성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 젊은 시절 남편은 어떤 매력이 있었나요.
“모르겠어요. (일본 최승희무용연구소) 연습장에서 걸레질을 하는데 이렇게 쳐다봐요.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안병주 교수가 부모의 결혼사연을 들려주었다.
“1944년 일제가 학도병을 징집할 때 아버지는 더는 숨어 다닐 수 없게 됐어요. 마지못해 입대 서약서를 써야 했는데 처음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결혼에 반대했대요. 전쟁터에 나가 죽게 되면 어머니는 평생 과부로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최승희 선생과 춤만 출 수 있다면 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다시 안 이사의 말이다.
“제가 어머니께 짧은 신혼생활이 어땠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어머니 말씀이 ‘좋은지도 몰랐다’고 하셨어요. 남편이 전쟁에 나가는 슬픔도 모르고 이별의 아픔도 모르고 그저 ‘최승희 선생이 가는 곳만 바라보았다’고 하시더군요.”
잠자코 있던 김백봉 선생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남편은 무대 위에 올라 꽃다발을 받은 적이 없어요. 남편에게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멋진 연미복이 있었지만 한 번도 그 옷을 입고 무대 위로 오른 적이 없어요. 박수는 저만 받았습니다. 저는 오로지 젊은 시절, ‘춤’과 ‘최승희’밖에 몰랐어요. 애틋한 사랑을 겪거나 책을 통해 간접 체험한 것도 아니어서 (남녀 간 사랑을) 몰랐어요. (남편에게) 너무 미안해요.”
그 뜨겁던 해방공간 최승희의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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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김백봉 선생. |
“어머니는 1945년 8월 15일 베이징의 ‘최승희동방무도연구소’에서 해방을 맞으셨어요. 일본이 패망하자 무용단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는데 최승희 제자라곤 어머니뿐이셨대요.”
김백봉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광복 당시 강제 징집됐던 남편 안제승은 중국 칭다오의 일본군 제5혼성 독립여단에 배속돼 있었다.
“광복이 돼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고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어. 그해 겨울, 그날은 살이 에일 듯한 추운 날씨였어요. 최승희 선생님과 〈빈사의 백조〉라는 소련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선생이 ‘집에 별일이 없는지 전화를 해 보라’고 하셨어요. 일하는 총각이 ‘집에 누가 찾아왔다’며 전화를 바꿔 주는데 남편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너무 놀라 옆구리가 갑자기 콱 결리더라고. 집에 달려가니 오랫동안 씻지 못해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 몰골이 엉망이더라고.”
광복이 되자, 무장 해제된 안제승은 베이징대학을 나온 친구와 함께 칭다오에서 베이징까지 걸어서 오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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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백봉과 최승희는 사제에서 동서가 됐다. 사진은 안막과 최승희. |
“남편은 서울(경기도 안성) 사람이고 시어머니도 서울에 계시니 북으로 갈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난 고향이 평안도고 내 부모가 모두 평양에 있으니 (북으로) 가고 싶었지. 또 무용하려면 최승희 선생님을 떠날 수 없었고 ….”
— 최승희 선생도 남편 안막을 따라 북으로 갈 생각이었나요.
“어느 날 조택원 선생이 최승희 선생에게 ‘무용협회를 만들었으니 자기 밑으로 오라’고 하니까 선생님(최승희)은 ‘왜 내가 그 밑에 가야 하느냐’는 말씀을 하셨어요. 신문·잡지에 친일파라는 기사가 자꾸 나오고… 그때 아주버님(안막)이 몰래 서울에 오셨어요. 그래서 (북으로) 간 것이죠. 그때 저는 이념갈등이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들어보지도, 알지도 못했어요. 그냥 최승희가 있는 곳이면 불 속이라도 뛰어들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짐을 싼 것이에요.”
“네 공부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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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백봉 선생이 서울 안암동 자택에서 남편 안제승씨와 함께 춤 얘기를 하고 있다. |
“이북에 도착하니 소련 사람이 지프에 태워 김일성에게 데려다줬어요. 김일성 첫마디가 ‘최승희 동무, 다니러 왔어요? 살러 왔어요?’였죠. 최 선생님이 ‘살러 왔다’고 했더니 모란봉 밑에 있는 요릿집(동일관)을 연구소로 쓰라며 내주더군요.”
김백봉은 1947년 평양 국립극장에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최승희에게서 점점 독립해 자신만의 무용세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 〈계월향〉 〈농촌풍경〉 〈지효〉 등과 함께 그녀의 대표작인 〈고전형식〉(이후 〈화관무〉로 명칭이 바뀐다)을 처음 발표했다. 김백봉 선생의 말이다.
“(평양에서 발표회를 갖던) 그날 최 선생님이 우셨어요. ‘네 공부가 무섭다’ 칭찬하시고 눈물을 닦고 가셨어. 평양서 군무 같은 건 제가 다 손댔지 선생님은 안 하셨어. 소도구는 대동강 물 떠다가 염색하고… 무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어요.”
김백봉은 1948년 소련과 동구권 여러 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가졌고 그때 러시아에서 볼쇼이발레 공연을 보았다고 한다. 이듬해 북한의 방중(訪中) 예술단 안무자 겸 주역 무용수로 중국을 순회한 일도 있다.
선생은 “1948년 이후 작품공연에 대한 북한의 간섭과 제약이 심화되기 시작했고 최승희 선생이 통곡까지 하면서 내각출판지도국(북한노동당 직속 예술·문화·교육·출판·선전 등의 제 분야를 감독·지휘하는 기관)에 굴복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그녀의 말이다.
“소련 순회공연 중 레닌그라드에서 6·25 소식을 들었어요. 저는 선생님(최승희)이 겪은 예술적 모멸을 심각하게 맛보지 못했어요. 그러나 주변에서 수없이 비판되고 타도되고 숙청되는 인간 군상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남편의 운명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어요.”
안제승·김백봉은 1951년 1·4후퇴 당시 월남행을 택한다. 안병헌 이사의 말이다.
“아버지는 서울로 가고 싶어하셨고, 당시 국군장교인 고정훈이 ‘대한민국 예술발전에 기여해 달라’는 조건으로 차를 내 주어 피란길에 오를 수 있었대요. 남으로 피란 오실 때 어머니는 딱 두 가지만 챙기셨는데 무용의상인 ‘스팡클 옷’과 당시 4살인 큰오빠 병철이었어요.” 스팡클은 일명 ‘반짝이 옷’으로 공연에 필요한 의상이다.
맏이 안병철(安秉哲·1947~)은 여동생 병주·병헌과 달리 무용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한 뒤 한의대 교수가 됐다가 현재는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김백봉 선생은 아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젊은 시절, 연습복 한복을 챙겨 입고 나서는데 옷고름이 스르르 풀리는 거야. 병철이가 벌벌 기어와서 옷고름을 붙잡고 매달리는데 냉정하게 뿌리치고 돌아서 나오곤 했지. 아들 말이 엄마 등에 업혀 자다가 깨 보면 엄마가 춤추고 있고, 깨 보면 춤추고 있고 그랬대요. 또 건물 4층에 연습실이 있었는데 병철이가 기어서 4층까지 올라갔는데 내려갈 수가 없어 울었다고 해요.”
〈부채춤〉과 〈화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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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채춤을 추고 있는 장녀 안병주. |
“아버지는 이 공연이 ‘전후 무용계 기성층의 괴멸과 공백에 서광을 비춘 명실상부한 재건의 날’이라고 평가하셨어요. 이 공연의 무용사적 의의는 〈부채춤〉과 〈화관무〉가 남상(濫觴) 됐다는 것입니다.”
두 작품은 김백봉 일생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독무로 또는 군무로 변주돼 많은 국내외 무대에서 공연됐다. 오늘날 한국 춤을 상징하는 대표작 반열에 올랐다. 안병헌 이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부채춤〉은 펴고 접는 죽선과 한지의 소박하고 운치 어린 지음(紙音)을 타고 마치 만개한 꽃이 춤추듯 움직이는 춤인데, 1954년 김백봉에 의해 예술적으로 새롭게 창출되어 발전한 작품입니다. 〈화관무〉는 1947년 10월 초연 당시 〈고전형식〉이란 독무로 추어졌어요.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 식전행사에 남녀 2000명이 함께 춘 군무로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죠.”
선생은 자신의 무용단과 대학에서 무용을 가르치다 1964년 경희대 무용과 조교수로 자리를 옮겨 1992년 정년을 할 때까지 재직했다. 2007년 5월 서울시무용단 예술감독으로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햇수로 따져 65년간 무용 현장을 지켰었다.
김백봉 선생에게 “이런 춤사위는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이냐”고 창작방법을 물어보았다. 그녀의 말이다.
“고향이 평안남도 강선군 초리면(기양)입니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과 산과 들로, 냇가로 종일 뛰어다녔고 무지개를 붙잡는다며 내달리곤 했어요. 흐르는 구름을 따라 들판을 따라 걸었고 수정같이 맑은 시냇물에 두 발을 담그곤 했어요.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과 농촌생활이 제 상상력을 키워 주었고 훗날 제 예술창작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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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작품 〈청명심수〉을 공연하는 차녀 안병헌. |
“한동작 한동작, 육체의 움직임은 허공에서 사라지지만 춤과 내가 하나 되어 내 마음이 가 있는 무아(無我)에 이르면 보는 이들도 무아세계를 향한 한마음이 됩니다. 육체를 움직이지만 사실은 영혼으로 추는 것이 춤입니다.”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한국 춤의 가치는 정중동입니다. 잘 추는 사람은 흘러가는 맥이 보여요. 안 되니까 동작을 자꾸 만들어 많이 추게 돼요. 우리 멜로디나 장단을 잘 알아야 하는데, 전에 (어느 무용인의) 〈가야금 산조〉를 추는데 눈에 확 들어왔어요. 그래서 물어보니 가야금을 배웠다고 해요. 우리 가락의 멋과 흥을 몸으로 표현하는 춤이 잘 추는 춤, 아니겠어? 형태가 나와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구질구질해집니다.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인격입니다. 다 몸에서 나와요. 공부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다 춤에 드러나요. 기술이 다가 아니야. 춤에 대한 집념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도 춤추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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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립동 춤을 추는 김백봉의 손녀 안귀호. |
한의사인 장남 안병철은 슬하에 1남2녀를 뒀다. 세 사람 모두 무대예술에 종사하고 있다. 첫째 안귀호(安貴好·44)와 둘째 안혜진(安慧眞·39) 모두 무용가로 대(代)를 잇고 있다. 막내 안정환(安正煥·37)은 일본 최고의 뮤지컬 극단 ‘사계’에서 10년 넘게 배우로 활약 중이다.
장녀 병주는 경희대 무용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밸(Ball)주립대와 브리검영(Brigham Young)대를 거쳐 동덕여대에서 무용학 박사를 받았다. 경희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김백봉 무용단’의 후신인 ‘안병주 춤·이음’을 이끌고 있다. 안 교수는 ‘춤·이음’ 무용단에 대해 “어머니의 예풍과 예맥을 소중하게 축적하고 보존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독무, 군무, 무용극 등 우리 춤 역사가 이뤄 낸 방대한 분량의 레퍼토리를 계승하고 최대한 원형 보전을 위해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차녀 병헌은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했으나 대학원에선 무용을 전공해 경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김백봉춤보전회’ 상임이사다. 안 이사는 “‘보존’이 아니라 널리 알린다는 ‘보전’이란 명칭을 쓰고 있다. 상임이사만 모두 50명이다. 이분들 중에는 대학교수도 계시고 현역으로 활동하는 무용가, 은퇴하신 분도 계신데 제자들이 중심이 돼 어머니의 춤 정신을 널리 알리자는 의미로 결성했다”고 말했다.
김백봉 선생은 “지금도 춤을 출 공간이 있다면 계속 추고 싶다”며 무용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최승희 덕에 유명해졌다고 하지만 저는 최승희 춤을 춘 것이 아니라 저만의 춤사위를 한 것이었어요. ‘제2의 최승희’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