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8〉

허난성 벽촌에서 꽃핀 무술 태극권의 ‘태극세가주’와 삼고초려를 낳은 난양의 ‘와룡주’

  • 글 : 모종혁 在 중국 경영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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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산약과 고량, 소맥 등을 두 차례 발효시킨 뒤 심층 암반수를 더해 만든 태극세가주
⊙ 제갈량의 명성을 차용한 난양의 초려대와 와룡옥액

牟鍾赫
⊙ 44세. 중국 정법대 경제법학과 졸업.
⊙ 방송 저널리스트, 취재 코디네이터.
⊙ 현재 충칭에서 기업투자·경영컨설턴트로 활동 중.
태극권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파괴력을 지녔다.
손과 발, 척추와 허리, 상체와 하체를 끊임없이 움직여 운동량이 많다.
예부터 중국에는 ‘중원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得中原者得天下)’는 속담이 있다. ‘중원(中原)’은 중국 문명을 잉태한 황허(黃河) 중류의 허난(河南)성을 가리킨다. 허난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중국 문명의 정수인 한자(漢字)를 잉태했다. 한자의 선조 격인 갑골문(甲骨文)은 허난 북부에 있는 안양(安陽)에서 발견됐다. 안양은 중국 최초의 왕조였던 은의 수도다. 갑골문은 은 왕실의 무덤인 은허(殷墟)에서 쏟아져 나왔다.
 
  허난은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도 잇달아 배출했다. 도가의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묵가의 묵자(墨子), 법가의 한비(韓非)와 이사(李斯) 등 춘추전국시대 최고의 사상가와 정치가가 허난 출신이다. 두보(杜甫), 한유(韓愈), 이상은(李商隱) 등 내로라하는 시인과 문인도 허난에서 태어났다. 인구는 중국 전체 성·시·자치구 중 가장 많다. 2014년 말 허난성 인구는 1억662만명으로, 중국에서 처음으로 1억명을 돌파했다. 전 세계적으로 허난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10개국에 불과하다.
 
  유구한 역사와 거대한 인구를 지녔지만, 오늘날 허난은 중국에서 낙후된 성 중 하나일 뿐이다. 황허를 기반으로 성장해 온 농업은 허난을 중국 북부 제일의 곡창지대로 키웠다. 그러나 중공업 발전에는 독이 됐다. 농업 비중이 높다 보니 제조업 성장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농촌 유휴 인력이 많아 연해 지방으로 나가 일하는 농민공이 중국에서 쓰촨(四川)과 더불어 가장 많았다. 지난해 농촌 거주 주민의 소득은 9416위안(약 169만원)으로, 중국 농민의 평균 수입인 1만489위안보다 낮았다.
 
  이처럼 허난은 눈부신 발전을 구가했던 동부와 인접했으나 성장에선 소외됐었다. 1980~90년대에는 에이즈 발병률이 중국에서 가장 높기까지 했다.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허난 농민들은 매혈을 선택했는데, 한 주사기를 계속 사용하면서 예기치 않은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외지로 나간 일부 주민은 좋은 머리를 이용해 사기를 쳤다. 실제 가짜 상품을 제조하는 상인들을 살펴보면 허난 출신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허난인은 더럽다” “허난인은 사기꾼이 많다”는 오해와 편견이 생겨났다.
 
 
  ‘태극권의 고향’
 
원현 지도.
  그러나 허난 어디를 가나 중국 문화의 기원(起源)을 찾아볼 수 있다. 성도 정저우(鄭州)에서 서쪽으로 86km 떨어진 원(溫)현에서도 마찬가지다. 원현은 한족의 가장 오래된 주거지 중 하나로, 곳곳에 앙소(仰韶)문화 유적이 많다. 변변한 공장이 없어 지역경제가 침체되고 가난하지만, 현재는 어느 현 못지않게 유명하다. 그 이유는 중국을 대표하는 무술 태극권(太極拳)의 발상지인 천자거우(陳家溝)를 경내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원현에 들어서면 커다란 선전판이 찾는 이를 반긴다. 중국인들이 하얀 도복을 입은 채 태극권을 수련하는 모습이다. 그 아래에 ‘태극권의 고향 원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쓰여 있어 무술성지에 왔음을 실감케 한다. 천자거우는 현청에서 6km 떨어져 있다. 허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촌마을로, 천(陳)씨 주민이 주로 사는 집성촌이다. 마을 주민은 다 해봐야 200여 가구에 불과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원주민보다 더 많은 외지인이 몰려와 생활하고 있다. 오직 태극권을 배우기 위해 시골까지 찾아온 수련생들이다.
 
  마을 중앙에 조성된 조사전(祖師殿)은 천자거우와 태극권의 역사를 자세히 보여준다. 조사전 앞마당에는 태극권의 창시자 천왕팅(陳王廷·1600~1680)의 석상이 우뚝 서 있다. 본래 천씨 가문은 산시(山西)성 훙둥(洪桐)현에서 살았다. 명대 초기 관부의 압력에 의해 허난으로 이주한 천푸(陳卜)가 천자거우 천씨의 시조다. 천푸는 문무를 겸비한 호걸이었다. 원현에 정착한 뒤 고향을 지키고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무술을 익혔다. 그로부터 9대손인 천왕팅이 본격적으로 태극권을 창시했다.
 
  천왕팅은 가전(家傳)무술을 바탕으로 척계광(戚繼光)이 편찬한 《기효신서(紀效新書)》, 기공의 모태인 ‘도인토납술(導引吐納術)’, 도교의 음양사상, 전통의학 등을 종합했다. 이는 천왕팅의 신위를 모신 조사당의 좌상 양쪽에 쓰인 경구에 잘 드러난다. ‘대도일원(大道一元) 제가대성(諸家大成), 태극양의(太極兩依) 조권술진제(造拳術眞諦).’ 큰 뜻을 품어 모든 무술의 정수를 하나로 모으고, 여기에 도교사상을 더해 창제한 무술이 곧 태극권이라는 의미다.
 
 
  소림사 무술과 태극권
 
중국 선종과 소림무술의 발상지인 소림사.
  흥미롭게도 또 다른 무술성지 소림사가 원현에서 남쪽으로 2시간 거리에 있다. 소림사는 덩펑(登封)시 쑹산(嵩山) 끝자락에 자리한다. 493년 북위 황제 효문제(孝文帝)가 인도에서 온 고승 발타(跋跎)를 위해 세웠다. 사찰 이름은 사오스산(少室山) 숲 속에 지은 절이라는 뜻으로 명명했다. 수십 년 뒤 인도에서 온 고승 달마(達摩)가 소림사의 운명을 뒤바꾸었다. 달마는 남인도에 위치한 한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 뒤 출가해 인도 선불교의 28대 조사에까지 올랐다.
 
  520년 중국에 넘어온 뒤 중국인을 대상으로 선종을 포교하기 시작했다. 독특한 불교이론과 좌선수행법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남조 황제 양무제와 만나 선문답(禪問答)을 했다. 527년 달마는 북위로 온 뒤 쑹산의 한 동굴에 거처를 정했다. 무려 9년간 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 수행을 했다. 이 과정에서 맹수와 화적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호신술을 익혔다. 이 달마의 참선법과 호신술은 제자 도육(道育)과 혜가(慧可)에게 전해져 중국 선종과 소림무술로 꽃을 피웠다. 달마가 면벽참선한 달마동은 불교도와 무술인의 영원한 성지로, 오늘날 찾는 이가 끊이질 않는다.
 
역대 소림사 고승들의 사리를 모신 240여 개의 탑숲 ‘탑림’.
  소림사가 무술로 이름을 떨친 것은 당대부터다. 618년 왕세충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소림사 승려들이 나서서 왕자 이세민(李世民)을 구해내고 난을 진압했다. 훗날 이세민은 당 태종이 됐고, 황위에 오르자 소림사에 친필 비석과 많은 전답을 하사했다. 소림사 승려들은 원대 말기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창을 들고 나가 반란군에 맞섰다. 명대에는 일본 왜구가 중국 동남 지방을 수시로 침입해 약탈하자, 소림사 무승(武僧)들이 출동해 왜구를 물리쳤다. 20세기에는 소림사 주지를 위시한 수많은 승려가 승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맞서는 등 호국 사찰로 명성을 떨쳤다.
 
  이렇듯 1500여 년간 소림사는 중국 역사와 무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불교 유적은 그리 많질 않다. 긴 세월의 억겁 속에 4차례의 큰 화재로 옛 사찰은 모두 파괴됐다. 현재는 달마동과 탑림(塔林), 비석 등 일부 유적만 옛 모습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1974년 중국 정부는 대웅전을 보수한 뒤 1979년 대외에 개방했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 후 일반인에게 개방된 최초의 종교시설인 것이다.
 
 
  發勁하는 데 5년 이상 걸려
 
  태극권의 여러 명칭은 소림사의 무술과 동일하다. 천씨의 가전무술이 소림무술의 영향을 받은데다, 태극권의 기본 권법이 《기효신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척계광 장군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각종 병법서와 전투 시 응용됐던 무술을 바탕으로 《기효신서》를 편찬했다. 같은 시기 토벌에 나섰던 소림사 무승들은 왜구의 칼에 대항하여 긴 창을 사용해 큰 전공을 세웠다. 천왕팅은 《기효신서》에 소개된 권경(拳經) 32개 중 29개를 따와 태극권에 응용했다. 그러나 태극권은 실전무술일 뿐만 아니라 심신을 단련하는 수련술이기도 하다. 소림무술이 파괴력을 중시하는 외가권(外家拳)이라면 태극권은 내가권(內家拳)이다. 태극권도 노가일로(老架一路)와 노가이로(老架二路)로 대표되는 연마 틀이 있긴 하다. 하지만 마음의 다스림을 통해 내기(內氣)의 배양과 음양의 조화를 중시한다. 사실 태극권의 기초 동작이나 품새를 익히는 데는 긴 시간이 들지 않는다. 하나 몸속의 음양을 조화시켜 내재된 기를 내뿜는 경지, 즉 발경(發勁)에 다다르기까지는 무척 어렵다.
 
  발경을 하려면 적어도 5년 이상 혹독히 수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방송(放鬆)의 자세가 필요하다. 몸 안의 단전에서 나오는 복식호흡으로, 근육과 관절의 긴장 및 수축을 유연히 풀어주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태극권은 신법(身法)이 수법(手法)을 이끄는 무술이다. 움직임과 동시에 동작이 나눠지고 끝날 때는 동작이 합쳐진다. 동작의 속도가 느리면서도 유연해 수련 패턴을 조절할 수 있다. 손과 발, 척추와 허리, 상체와 하체를 끊임없이 움직여 운동량이 상당히 많다.
 
  하나의 동작은 전체와 조화를 이뤄야 하기에 정신을 고도로 집중시켜야 한다. 이렇게 내재된 기를 발경하기에 그 세기는 강력하다. 또한 태극권은 기와 마음을 다스리기에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현대인에게 잘 어울린다. 2010년 6월 필자가 천자거우에서 만난 독일인 수련자 도리스 묄러(여)는 “현재 독일에서 소림무술보다 정신수련을 강조하는 태극권이 더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회산약을 첨가한 태극세가주
 
몸소 태극권을 선보이는 천샤오싱 교장.
  실제 태극권이 줄기세포를 증진시키고 정신적인 피로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011년부터 3년간 대만의 중국의학대학 동서의학팀은 학생 60명을 대상으로 태극권을 수련하는 그룹, 달리기만 하는 그룹, 전혀 운동하지 않는 그룹으로 나눠 실험을 진행했다. 이 결과 태극권 수련 그룹은 줄기세포 수량이 3~5배나 증가했다. 또한 심장 기능이 증진됐고 대뇌·신경세포 기능도 촉진됐다. 이런 영향으로 태극권 수련자들은 술을 즐겨 마신다. 적당한 음주는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천자거우에도 흥미로운 주류 기업이 하나 있다. 바로 태극권을 테마로 바이주(白酒)를 생산하는 천씨태극주업이다. 천씨태극주업은 예부터 천자거우에 있던 양조장을 원현의 대표하는 주류업체인 자오쭤술공장(焦作酒廠)이 인수하여 확장한 회사다. 예부터 천자거우에서는 원현 특산의 한약재인 회산약(懷山藥)을 더해서 약주를 빚었다. 이 전통주에다 자오쭤술공장의 바이주 양조 방식을 더해 론칭한 술이 천씨태극주업의 대표 브랜드인 ‘태극세가주(太極世家酒)’이다.
 
  회산약은 마(麻) 중 최고 품질을 지닌 한약재다. 크고 곧으며 흰 겉모양이 특징이다. 약효는 전신의 기를 원활하게 소통시키고 비음(脾陰)을 보충시켜 준다. 권태감과 무력감을 다스려주고 식욕 감소와 설사를 고쳐주는 효과도 지녔다. 태극세가주는 회산약과 고량, 소맥 등을 두 차례 발효시킨 뒤 심층 암반수를 더해 증류시켜 술을 제조한다. 약주의 효능을 지니고 있어 태극권 수련에 피곤한 신체를 편안하게 해준다.
 
  자오쭤술공장은 2010년 태극세가주를 처음 시장에 내놓았다. 이듬해 3월 천씨태극권의 19대 장문인인 천샤오왕(陳小旺)과 정식 계약을 맺은 뒤 천자거우양조장의 명칭을 천씨태극주업으로 바꿨다. 2013년부터는 천샤오왕과 그의 동생이자 천자거우태극권학교의 교장인 천샤오싱(陳小星)을 모델로 내세워 대대적인 광고를 전개하고 있다. 이 덕분에 출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태극세가주의 판매량은 해마다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무술산업’ 성업 중
 
  오늘날 소림사가 있는 덩펑시는 ‘무술마을’ ‘무술도시’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무술산업이 번성 중이다. 특히 80여 개나 되는 무술학교가 문을 열어 학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도시 전체가 무술학교로 뒤덮여 있을 만큼 거대한 산업 트러스트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온전히 소림사의 명성에 기대어 얻은 경제적 효과다. 한해 소림사를 찾는 관광객은 5백만명이 넘는다. 관광객이 내는 입장료와 관련 부가수입이 덩펑시 전체 재정수입의 20% 가까이 차지할 정도다.
 
  덩펑시 정부는 홍콩의 중뤼(中旅)그룹과 각각 1억 위안(약 183억원)을 출자해 강중뤼(港中旅)쑹산소림문화관광회사를 설립했다. 강중뤼는 소림사를 발판으로 각종 수익사업과 공연, 이벤트, 숙박체인사업까지 벌이고 있다. 2013년 말 덩펑 곳곳의 무술학교에서 수련하는 학생 수는 9만여 명에 달했다. 이 중 1978년 소림탑구무술학교는 중국 정부로부터 최초로 인가를 받아 개교했다. 덩펑시 정부와 소림무술의 대가인 류바오산(劉寶山)이 공동으로 세웠다.
 
  류하이커(劉海科) 소림탑구교육그룹 회장은 필자에게 “1970년대 말 10여 명의 학생을 모아 수련시키면서 출발했던 소림탑구의 역사는 현재 유아부부터 전문대 과정까지 2만8000여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육그룹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무술학교의 학비는 한해 1만5000위안(약 274만원)으로 일반 학교보다 훨씬 비싸다. 하지만 중국 각지에서 몰린 학생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덩펑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인 수련생도 수백명에 달한다.
 
  이런 상황은 천자거우도 마찬가지다. 천자거우에는 10여 개의 무술학교가 성업 중이다. 천샤오싱 교장은 “천자거우에 대한 특별난 홍보가 없었는데도 태극권을 배우려는 수련자가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 끊임없이 몰려온다”며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이뤄진다면 소림무술 못지않은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중국을 가면 광장이나 공원에서 태극권을 수련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태극권은 시골 천자거우에서 시작되어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태극권에 기댄 태극세가주도 중국 주당들의 식탁 위에 오를 날을 위해 담금질을 하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제갈량의 무후사
 
난양의 무후사 산문. 청대에 지은 무후사의 옛 입구이다.
  덩펑에서 남쪽으로 3시간 반을 내려가면 동아시아인들에게 사랑받는 한 인물의 사당이 있다. 바로 중국인이 고금을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재상 제갈량(諸葛亮)을 모신 무후사(武候祠)다. 여기서 ‘무후’는 제갈량에게 내려진 시호(諡號)다. 제갈량은 생전에 무향후(武鄕候)라는 작위를 받았고, 사후에는 충무후(忠武候)로 봉해졌다. 잘 알려졌다시피, 제갈량은 위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 과정에서 234년 지금의 산시(陝西)성 치산(岐山)현에 있는 오장원(五丈原)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촉군은 제갈량의 시신을 (勉)현의 딩쥔산(定軍山)에 급히 묻은 뒤 철수했다. 제갈량이 죽자 삼국 중 가장 국력이 약했던 촉은 263년 쳐들어온 위의 대군에 항복했다. 위는 촉을 멸망시키자마자 방치됐던 제갈량의 봉분을 정리하고 사당을 세웠다. 이것이 중국 최초로 세워진 현의 무후사다. 뒤이어 삼국을 통일한 진(晋)나라는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 삼고초려(三顧草廬)했던 허난성 난양(南陽)과 촉의 수도였던 청두(成都)에 무후사를 더 세웠다.
 
  훗날 중국 각지에서 무후사가 우후죽순처럼 건립됐지만, 중국인들은 역사적 배경과 의의를 되새겨 현·난양·청두의 무후사를 으뜸으로 쳐준다. 한데 흥미롭게도 제갈량이 주군으로 모셨던 유비의 사당은 단 한 곳밖에 없다. 심지어 그 이름조차 제갈량에게 내주었다. 청두의 무후사는 본래 223년 조성된 한소열묘(漢昭烈廟)였다. 한소열제는 유비가 죽은 뒤 추존된 시호다. 제갈량이 사망하자 유비의 아들인 유선은 청두 외곽에 무후사를 세웠다.
 
  이를 5세기 지방정권인 성한(成漢)이 시내로 옮겨왔고, 명대 초기에 한소열묘와 합쳐서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군신합묘(君臣合廟)가 만들어졌다. 그 뒤 유비보다 제갈량을 더 높이 평가하는 후대인들의 시각이 담겨 한소열묘보다 무후사로 불리게 됐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청두의 무후사가 제갈량 사당인 것은 알아도 유비의 묘가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유비의 사당인 유비전으로 들어가는 문의 현판조차 ‘명랑천고(明良千古)’라 쓰여 있다. 이는 ‘명군양신 유전천고(明君良臣 流传千古)’의 줄임말로, 현명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오래도록 모범이 됐다는 뜻이다.
 
  이와 달리 난양의 무후사는 제갈량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중국 내 무후사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무엇보다 제갈량이 농사를 지으며 학문에 정진했던 초려(草廬)에 세워졌다. 제갈량은 181년 지금의 산둥(山東)성 이난(沂南)현인 낭야(琅琊)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급관리였는데 제갈량이 어릴 때 병사했다. 그로 인해 제갈량은 작은 아버지인 제갈현을 따라 후베이(湖北)성 징저우(荆州)로 가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제갈량은 청소년기에 거처를 후베이성 샹양(襄陽)로 옮겨 수경(水鏡) 선생이라 불렸던 은사(隱士) 사마휘 밑으로 들어가 학업을 닦았다. 이때 같은 문하에는 서서, 석광원 등 쟁쟁한 학우들이 있었다. 하나 제갈량의 지식과 인물 됨됨이는 그들 중 으뜸이었다. 스승의 곁을 떠난 뒤 제갈량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한쪽에선 샹양에 남아 융중(隆中)에서 10년간 지냈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선 융중에서 1년여간 지낸 뒤 난양으로 이사해 초려를 짓고 살았다고 반박한다.
 
  전자는 샹양 주민들이, 후자는 난양 사람들이 주장하며 수백 년간 불꽃 튀는 입씨름을 벌여왔다. 그 근거로 샹양은 제갈량이 속세로 나오면서 유비에게 바친 융중대책을 손꼽는다. 융중대책은 흔히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로 요약된다. 진의 학자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는 소설인 《삼국지연의(演義)》와 달리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아 사실을 근거로 편찬했다. 여기에는 제갈량이 오나라의 손권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설득한 기록이 있다.
 
  “만약 위군을 (유비와 힘 합쳐) 격파하면 조조는 반드시 북쪽으로 돌아가고, 그러면 징저우와 오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삼국이 솥발처럼 정립하는 형태가 됩니다(操軍破, 必北還, 如此則荊吳之勢彊, 鼎足之形成矣).” 실제 샹양에서 서남쪽으로 20여km 떨어진 곳에는 융중이라는 마을이 있다. 명대부터 샹양인들은 이곳을 정돈해서 고융중이라는 제갈량 성지를 조성했다. 이에 반발해 난양인들이 내세운 근거는 무후사와 내로라하는 시인 및 정치가가 와룡강(臥龍崗)을 무대로 쓴 명문이다.
 
 
  중국 정부가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한 난양의 무후사
 
제갈량을 모시는 전각인 대배전. 예부터 제갈량을 추모하면서 방문객들이 남긴 각종 현판이 눈길을 끈다.
  와룡강은 난양시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언덕배기다. 오늘날 무후사는 대문, 석패방(石牌坊), 산문(山門), 대배전(大拜殿), 제갈초려, 영원루(寧遠樓) 등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그 주변에 제갈량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곳에 세워진 고백정(古柏亭), 제갈량 가족이 식수를 해결했던 제갈정(諸葛井), 제갈량이 책을 읽으며 학문에 몰입했던 독서대(讀書臺) 등이 있다. 특히 당대 이래 무후사를 방문했던 유명 인사들이 글을 지어 남겨놓은 비석을 모은 비랑(碑廊)은 고융중이 따라올 수 없는 역사적 장소다.
 
  그들 중 당대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지은 ‘누실명(陋室銘)’은 무후사를 배경으로 쓰인 시 중 두보의 ‘촉상(蜀相)’과 더불어 최고의 절창으로 손꼽힌다.
 
  산이 높지 않더라도 신선이 살면 이름을 얻고, (山不在高, 有仙則名)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영험하다. (水不在深, 有龍則靈)
  이 누추한 방에는 오직 내 덕의 향기만 있도다. (斯是陋室, 惟吾德馨)
 
  … (중략) …
 
  번잡한 소리에 귀를 어지럽히지 않고 공문서에 몸을 힘들게 하지 않으니, (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난양 제갈량의 초려요, 서촉 자운의 정자로구나. (南陽諸葛盧, 西蜀子雲亭)
  공자도 말씀하시길, 군자에게 무슨 누추함이 있으리오. (孔子云, 何陋之有)
 
  이 시는 초려에서 지식을 배양하고 힘을 키웠던 제갈량처럼 세인들도 공명심을 멀리하고 더욱 학문에 정진할 것을 노래했다. 눈에 보이는 초려가 초라해 보이지만 여기에서 춘추에 길이 남을 명재상이 나왔기 때문이다. 시 구절에 제갈량의 초려가 난양에 있었음을 명시했기에 후대인들은 난양을 찾아 제갈량을 추모했다.
 
제갈량의 팔괘진을 본떠서 지붕을 8각으로 복원한 초려.
  ‘누실명’과 쌍벽을 이루는 ‘촉상’은 760년 일어난 안사의 난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청두에 정착했던 두보는 무후사를 자주 찾으면서 시상을 떠올렸다. 그는 제갈량의 일생을 시 한 편에 고스란히 담아 지금까지 중국인의 격찬을 받고 있다.
 
  세 번 찾게 한 번거로움은 천하 위한 계책이요, (三顧頻煩天下計)
  두 임금을 섬기며 나라를 구하려 한 노신의 마음을 보여줬네. (兩朝開濟老臣心)
  전쟁에 나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후세의 영웅들 눈물로 옷깃을 적시게 하네. (長使英雄淚滿襟)
 
  송대에는 중국 역사상 비극적인 인물 중 한 명인 악비(岳飛)가 와룡강을 방문했다. 본래 악비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북송이 멸망한 무렵 의용군에 투신해 혁혁한 전공을 세워 장군이 됐다. 특히 후베이성을 다스리는 군벌로 성장해 금(金)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악비는 이에 만족하질 않고 악가군(岳家軍)을 이끌고 금나라로 여러 차례 출병하여 금군을 무찔렀다. 1138년 악비는 난양을 지나는 길에 잠시 무후사에 들렀다. 여기서 북벌에 나섰던 제갈량을 떠올리며 깊은 동병상련을 느꼈다.
 
  이에 붓과 종이를 꺼내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기 전 후주(後主) 유선에게 바친 ‘출사표(出師表)’를 썼다. 반드시 금을 정벌해 제갈량이 못다 이룬 북벌을 완수하겠다는 다짐의 표출이었다. 그가 쓴 출사표는 처음에는 해서(楷書)로 단정하게 써나가다가 뒤로 가면 행서(行書)로 바뀐다. 국력이 미약한 남송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악비의 우국충심은 이뤄지질 못했다.
 
청두의 무후사에 있는 악비가 쓴 출사표. 처음과 끝의 서체가 다르다.
  당시 남송 조정은 금과 화평을 주장하는 주화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였던 재상 진회(秦檜)는 연일 승전보를 울리는 악비가 못마땅했다. 결국 1141년 진회는 악비의 지휘권을 박탈했고 악가군을 중앙군으로 흡수했다. 악비가 이에 반발하자, 무고한 누명을 덮어 씌워 살해했다. 그때 악비는 39세에 불과했다. 생전에 악비는 서예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악비는 붓으로 쓴 출사표를 석재에 새겨 무후사에 남겼다. 이를 19세기 청 조정이 2개로 복각(復刻)해서 하나는 난양에 보관했고, 다른 하나는 청두의 무후사로 보냈다.
 
  이처럼 난양의 무후사는 숨겨진 스토리와 볼거리가 많다. 전체 면적도 15만3000m2에 달한다. 13세기 원대에 처음 성역화된 뒤 규모를 끊임없이 늘려왔기 때문이다. 1996년 중국 정부는 무후사를 전국 중점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했고, 지난해에는 허난성 정부가 10대 관광지로 선정했다. 특히 재정비된 정원은 무후사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난양 주민들은 저렴한 월표(月票)를 구입해 무후사를 자주 찾아 휴식을 취한다.
 
 
  茶의 보급자로 둔갑한 제갈량
 
난양 무후사 대배전 내부. 가운데는 제갈량, 오른쪽으로 제갈첨, 왼쪽으로 제갈상을 모셨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삼고초려의 역사 현장에서 제갈량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시도해 봐야 한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제갈량과 관련된 고사 대부분이 정사에 의존했기보다, 14세기 나관중(羅貫中)이 창작한 《삼국지연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27세에 출사한 뒤 긴 세월 동안 유비의 책사이자 외교관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이는 ‘제갈량 신화’를 처음 탄생시킨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서 제갈량은 손권을 설득해 개전(開戰)시켜 조조와 싸움을 붙인 이간계(離間計)를 벌였을 뿐이다. 양쯔강변에 제단을 쌓아 하늘에 축원을 올려 동남풍을 일으켰고, 허수아비를 세운 배를 앞세워 위군에게서 10만 개의 화살을 얻어냈다는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책략은 모두 나관중의 상상력에서 나온 픽션에 불과하다. 사실 조조의 위군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질 못했고, 적지 않은 병사들이 강남의 역병(疫病)에 걸려 전력이 약해지면서 대패했다.
 
  물론 적벽대전에 승리하여 주군에게 징저우를 품에 안겨준 제갈량의 공로는 칭송받을 만하다. 유비는 징저우를 발판삼아 뒷날 지금의 쓰촨인 익주(益州)를 점령했고 촉을 건국했다. 제갈량도 유비를 도와서 선정을 펼쳐 촉의 기반을 빠르게 다져갔다. 이처럼 제갈량은 재상으로서는 뛰어난 지략과 역량을 발휘했다. 하지만 군사 지휘관으로서는 그리 성공하질 못했다. 실제로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뒤 군대를 직접 지휘했지만, 내세울 만한 전공은 거두질 못했고 북벌은 잇달아 실패했다.
 
  ‘제갈량 신화’의 또 다른 사례인 남만(南蠻) 정벌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에 등장하는 맹획(孟獲)은 훗날 지어진 가공의 인물일 뿐이다. 제갈량이 9개월간 남정하여 정복했다는 장소는 오늘날 쓰촨과 윈난(雲南)의 접경지역에 불과하다. 이 지역은 지금도 오가기 힘든 험준한 산악지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군대가 이 지역을 가뿐히 넘어 윈난 남부까지 평정한 것으로 묘사했다. 최근 윈난성 정부는 이를 근거로 제갈량이 소수민족들에게 차 재배를 보급시켜 준 은인으로 왜곡하고 있다.
 
  제갈량의 업적에 논란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남긴 문장은 현대를 사는 우리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2차 북벌에 나서기 전 쓴 ‘후출사표’에 나오는 “몸이 부서지도록 최선을 다하고 죽은 뒤에야 일을 그만둔다(鞠躬盡瘁 死而後已)”는 글귀는 공직자라면 가슴에 깊이 되새겨야 한다. 제갈량이 죽기 전 어린 아들에게 쓴 편지 ‘계자서(誡子書)’도 정독할 만하다. 86자에 불과한 짧은 내용이지만, 배움과 수신에 대한 명구가 가득하다. 특히 ‘담백하고 밝은 뜻이 편안하고 고요하여 원대함을 이룬다(澹泊明志寧靜致遠)’는 여덟 자는 예부터 선비들과 지식인들에게 경종을 울려왔다.
 
 
  난양의 중저가술 와룡옥액
 
  제갈량의 가르침대로 제갈첨은 바르게 성장해 촉의 장군이 되어 활약했다. 263년 위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출병해 위의 장군 등애와 맞붙었다. 등애는 사신을 보내 “투항하면 낭야왕이 되도록 주청하겠다”고 제의했지만, 제갈첨은 사신의 목을 단칼에 베면서 거절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위군에 포위당했지만, 항복하지 않고 돌파를 시도하다 전사했다. 제갈량의 손자인 제갈상도 이 전투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3대가 촉에 대한 충성을 최후까지 다했던 것이다.
 
  이런 제갈량을 그냥 놔둘 난양 사람들이 아니다. 와룡강이 위치한 행정구역은 와룡구이고, 그곳의 상점 대다수는 와룡 자를 붙여 가게 이름을 지었다. 한 주류업체도 와룡술공장(酒廠)이라 명명해 바이주를 제조하고 있다. 이 업체는 1939년 지혜(智慧)주업이라는 국유기업으로 시작했지만, 금세기 초 제갈량과 무후사의 명성에 기대어 회사 이름을 지금처럼 바꾸었다. 개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급 술인 초려대(草廬對)와 중저가인 와룡옥액(玉液)을 시장에 내놓았다.
 
  지난 8월 9일 필자가 난양을 찾아 와룡옥액을 마셔보니, 농향형(濃香型) 바이주답지 않게 맛이 부드러웠다. 평소 청빈하게 살았던 제갈량처럼 술맛은 맑고 향기는 은은했다. 술병도 여느 바이주와 달리 엷은 녹색에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와룡술공장은 2006년까지 허난의 일개 주류업체에 불과했지만, 2008년부터 와룡옥액을 중심으로 판매량이 급증하여 현재는 해외로까지 수출하고 있다. 《삼국지연의》 마니아가 적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도 수년 내 와룡옥액을 마실 날이 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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