再조명

애국가 作曲 80주년·서거 50주년 -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일본식 이름 쓰면서도 ‘한국환상곡’ 끈질기게 연주”

  • 글 :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eaglebs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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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를 부르실 때 특히 애국가의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애국적 정인으로 활기 있게 장엄하게 부르시되 결코 속히 부르지 마십시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부르실 때 특히 동해의 ‘해’와 백두산의 ‘백’에 힘을 주고 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는 더욱 힘 있게 충만한 애국심과 활기 있게 부르십시오.〉(1936년 3월26일자 《신한민보》 안익태 기고문)

⊙ 1935년 미국 유학 시절 애국가 作曲, 1937년 한국환상곡 만들고 이듬해 아일랜드서 初演
⊙ 불법취업자로 판단한 美 당국, 체포영장 발부ㆍ조사 후 추방 위협
⊙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교향악단 움직인 지휘자이자 우리 가락을 서양에 알린 작곡가
⊙ “일본 영사관과 트러블 안 일으켰으면… 안익태는 하루 종일 음악만 하는 사람”
⊙ “음악은 국제적인 언어이며 나라의 경계를 넘어 인간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
⊙ “親日 논란… 한 인간에 대한 평가 黑白으로 구분할 수 없어, 단순화시키면 역사왜곡 일어나”
올해는 애국가 작곡 80주년, 안익태 선생 서거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수업 시간 말미에 종종 이런 제안을 합니다. ‘애국가 1절부터 4절까지 모두 부를 수 있는 학생에게는 플러스 점수를 주겠다’고요.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2절까지 제대로 부르는 경우도 드뭅니다.”
 
  안익태기념재단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조문수(趙文秀) 숭실대 교수는 “학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데 대해 스스로 반성하고 있다”고 했다.
 
  광복 70주년인 올해는 안익태(安益泰·1906~1965) 선생이 애국가를 작곡(作曲)한 지 80년이 되는 해다. 안익태 선생 서거 50주년(1965년 작고)이기도 하다. 이를 기념해 안익태기념재단은 오는 8월 2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특별음악회를 준비하고 있다. 조문수 사무총장은 “나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대한국(大韓國)’의 번영을 담은 애국가의 참뜻을 젊은 세대에게 알리고자 한다”고 했다.
 
  애국가가 사람들의 뇌리에서 멀어져 가는 현실은 음악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교향악단을 움직인 지휘자, 한국인 최초로 외국 음악 전문출판사에서 작품집을 낸 작곡가, 한국인 최초로 우리 가락을 유럽과 미국에 알린 음악인이었음에도 그에 대한 평전(評傳)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1976년 신문기자 출신인 김경래씨가 안 선생의 구술(口述)을 바탕으로 《안익태》(태극출판사)를 냈지만 내용상 부정확한 게 많다. 생전 안익태 선생이 사실관계를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한 것들이 책에 그대로 담긴 탓이기도 하다. 그나마 전정임 충북대 교수가 1998년에 《안익태》(시공사)를 내면서 일부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았다. 전 교수는 “개정증보판을 내려고 했지만 자료 입수의 어려움과 출판사 사정 등으로 새 책을 출간하지 못했다”고 했다. 2007년에는 안익태 선생의 친일(親日) 행적 논란에 초점을 맞춘 《잃어버린 시간 1938-1944》(이경분 著·휴머니스트)가 나오면서 ‘안익태’의 관심과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누가 와도 연습 중이면 몇 시간씩 기다리게 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大韓人國民會가 1936년 2월 발간한 ‘애국가’ 표지와 악보.
  세간의 무관심과 음악계의 ‘홀대’에도 허영한(許英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20년 넘게 안익태 선생의 생애를 추적, 연구해 왔다. 그는 1998년부터 음악 학술지를 통해 안익태 선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꾸준히 알려 왔다. ‘안익태 선생에 대해 허영한 교수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는 평가를 받는 허 교수는 1990년대 초부터 인간 ‘안익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애국가를 작곡한 분인데 국내 음악학자들조차 관심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했습니다. 생애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내다 보니 국내에는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았고, 오히려 외국에 자료가 흩어져 있어 연구에 많은 지장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확보한 자료를 종합해 보면 안익태 선생은 항상 완성도 높은 음악을 목표로 살았던 분입니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연습을 많이 한 음악가였습니다. 손님이 그를 찾아와도 첼로를 연습할 때나 지휘 공부를 할 때면 끝날 때까지 몇 시간씩 기다리게 했습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체류할 때 교류했던 일본인 친구의 일기에는 ‘안익태는 하루 종일 음악만 하는 사람이다’고 적혀 있기도 합니다.”
 
  학계에서 안익태 선생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애국가가 불가리아 민요(民謠)를 표절했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친일(親日) 행적 부분이다.
 
  먼저 애국가 표절시비는 1964년 국내에서 열렸던 ‘제3회 국제음악제’에 초청됐던 불가리아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그의 뒤에는 당시 안익태 선생을 시기했던 일부 국내 음악인들이 있었다. 표절시비 논란은 1976년 국내에 다시 이슈가 됐고 마침내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결국 당시 연세대 음대 작곡과에 재직 중이던 공석준 교수가 애국가를 분석, “애국가는 세계 어느 국가(國歌)에도 손색이 없는 독창적이고 위대한 작곡임에 분명하다”고 결론을 지으며 문제는 일단락됐다. 간간이 일부 음악인에 의해 새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1997년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애국가는 일본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과 함께 영광과 수난을 같이하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로 자리 잡았다. 애국가가 법률로 공식 지정되지 않은 것은 결코 현행 애국가의 곡조나 가사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고 밝히면서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일부 헌법학자를 중심으로 ‘태극기’ ‘국어’ ‘애국가’ 등을 법률로 명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2014년 1월 강창희(康昌熙) 국회의장 시절 헌법개정자문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헌법 개정안(案)’을 내놓았다. 헌법 개정안 4조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제4조 ①대한민국의 국기는 태극기이다. ②대한민국의 국가는 애국가이다. ③대한민국의 국어는 한국어이다. ④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
 
  허영한 교수는 “1960년대에 처음 제기됐던 애국가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 논란은 이제 음악계에서 완전히 일단락됐다. 그러나 친일 논란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했다. 그는 안익태 선생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사실을 근거로 한 연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허 교수는 20년 넘게 ‘안익태 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발굴해 냈지만 세상 사람들은 물론 언론조차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인간 안익태, 음악가 안익태, 그리고 애국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허 교수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안익태의 삶과 애국가를 새롭게 조명했다.
 
 
  ‘안익태는 연습벌레’
 
미국 이민당국(노동부)이 1932년 안익태 추방을 위해 발부한 체포 영장.
  안익태 선생의 생애를 시기별로 보면 10대 학창 시절, 20대 초반의 일본 유학기(期), 20대 중반의 미국 유학기, 30대 유럽활동 시기, 40대 이후 스페인 정착기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20년 이상을 보낸 스페인 정착기라 할 수 있다. 안익태 선생은 스페인에서 젊은 여성을 만나 결혼, 딸 셋을 뒀다.
 
  안익태 선생은 1906년 평양에서 ‘문무여관’을 운영하던 안덕훈(安德勳)의 7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출생연도가 1905년이냐 1906년이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미국 유학 서류(호적)에 따르면 안익태는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보통학교를 마치고 미션스쿨인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선교사를 통해 서양음악을 접했다. 그 무렵 맏형이 일본에서 사 온 바이올린과 첼로를 직접 만져 보며 이 작은 악기에서 나는 음색(音色)에 상당히 매료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익태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으나 만 20세이던 1926년, 일본 동경고등음악원(현 구니다치 음악대학)에 입학한다. 당시 동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학교에서 연습벌레로 통했다고 한다.
 
  안익태는 제대로 된 음악가로서 성장하기 위해 일본에 이어 미국유학을 택한다. 고향 선배 박원정(朴元貞)과 일본 현지에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미국인 선교사 한나포드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안익태는 1930년 마침내 미국 땅을 밟았다. 그의 나이 만 24세 때였다. 미국 오하이오주(州) 신시내티에 있는 ‘신시내티음악원’으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기로 하고 유학을 떠난 것이다.
 
  가난한 유학생의 생활고(生活苦)는 곧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1930년 가을학기부터 학업을 시작한 안익태는 이듬해 학교 측이 약속한 장학금 액수가 갑자기 줄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직접 해결해야 했다.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여파가 그가 다니던 학교에까지 영향을 미쳐 장학금 액수가 줄어든 것이다. 안익태는 최소 과목만 수강하며 학적(學籍)을 유지한 채 이른바 ‘연주 알바’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학점 부족으로 이어졌고 결국 그는 추방 위기에 몰렸다. 이런 사실은 유학생 안익태의 미국 행적을 추적·연구한 허영한 교수에 의해 처음 확인됐다.
 
  추방 위기는 1932년 워싱턴 노동부 이민국이 신시내티음악원에 안익태의 학적(學籍)을 문의하면서 비롯됐다. 학교 측은 “안익태는 자기가 좋아하는 앙상블(2시간), 오케스트라(4시간) 수업만 듣는 ‘특별한 학생’이며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이지만 학교 차원에서 그를 지원할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밝힌다. 당시 대공황에 따른 재정난을 겪고 있던 학교로서는 당연한 조치였을 수도 있다. 미국 노동부는 안익태 추방을 위한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수사당국은 안익태를 직접 소환해 조사를 벌였다.
 
  당국이 작성한 진술조서에 따르면, 안익태는 “한국의 가족에게서 학비와 생활비를 받을 계획이며 학교 수업도 열심히 받겠다. 추방을 당하기는 싫다. 시간을 달라. 이곳을 떠나야 한다면 스스로 나가겠다”며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시간을 번 안익태는 연주활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신시내티에서 북쪽으로 250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도시 ‘핀들레이’의 여러 교회에서 ‘밥벌이 연주’를 했다.
 
안익태 선생의 音樂觀
 
“허영심에 빠져 藝術하는 것은 나라에 도움 안돼”

 
  1955년 모국을 처음 방문한 안익태 선생은 국내 오케스트라단을 통해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연주했다. 당시 소감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부인 로리타 안 여사가 생전에 쓴 《나의 남편 안익태》(청구문화사·1974)의 한 대목이다.
 
  〈여보, 난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정말 고마움을 느꼈소. 산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고, 언제나 고생을 참고 견디면 이에 대한 보상이 있게 마련이거든. 당신도 내가 한국에서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지휘했다는 사실이 내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겠지.〉
 
  안익태 선생은 모국에서의 첫 연주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회를 연다. 이때도 한국환상곡을 연주하는데 일본인 합창단이 한국말로 우리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직접 지휘한다. 일제 치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익태 선생은 일종의 ‘복수심’과는 차원이 다른 뜻을 피력한다. 《나의 남편 안익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말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속된 것이 아니고 바로 이런 것이었소. 즉 음악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뜻을 합치게 함으로써 모두가 한 형제처럼 서로 사랑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 말이오. 내가 그들 머리 앞에서 군도(軍刀)를 휘둘렀더라면 아무도 노래를 부르려고 하지를 않았을 거요. 그러나 지휘봉을 드니까 두말없이 노래를 불렀거든. 그것도 아주 열성과 애정과 성실성을 가지고 말이오. 여보, 이제 내 말뜻을 알아듣겠지. 결국 두 나라는 음악을 통해 형제국이 된 거요.〉
 
  안익태 선생의 음악관은 ‘음악은 인류화합의 도구’라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음악은 국제적인 언어이며 나라의 경계를 넘어 인간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의 음악관(音樂觀)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안익태》(시공사·1998)를 출간한 전정임 충북대 교수는 “인류애, 형제애의 정신이 바로 안익태 선생이 음악을 통해 이루려 했던 최고의, 최종의 목표였다”고 했다.
 
  안익태의 음악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현실을 직시한 예술가 정신’이다. 재능이 없는데도 허영심에 빠져 예술을 하는 것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34년 4월 18~19일 이틀간 연재된 《동아일보》 기고문의 일부분이다.
 
  〈일시적 허영심에 의해 자기에게 적합하지도 않고 또 재능도 없이 음악가가 되고자 인생의 최귀(最貴)한 수양(修養)시기에 조선에 필요한 다대(多大)한 금전을 무의의(無意義)하게 낭비하는 것은 도저히 합당치 아니한 줄 아는 바입니다.(중략) 적합한 제 조건이 없으면 자기에게 적합한 다른 과학으로 전진하여 개인적으로 유의의한 생애를 지내고 아울러 동포에게 유효한 봉사를 하기 바라는 바입니다.(중략) 최종은 예술가적 정신, 즉 음악적 정신인데 기악이나 성악, 작곡 등에 대해 극히 세밀한 점에까지 전문가로서 양심의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중략) 위대한 예술가는 위대한 천재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인 것을 여러 음악사(音樂史)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5년에 걸쳐 애국가 작곡
 
급한 성격을 가진 안익태 선생은 음악에 관한 한 고집불통이었다고 한다. 영국 런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한국환상곡을 연습하는 도중 자신의 매니저와 다투는 장면이다.
  다행히 핀들레이는 나라 잃은 동양의 젊은 청년 안익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특히 일본 식민지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했던 핀들레이 제일장로교회는 안익태에게 깊은 애정을 나타냈고 경제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핀들레이 교회의 도움을 받으며 근근이 생활했던 안익태는 1933년 필라델피아 템플대학으로 전학하면서 추방 위기에서 벗어났다. 뉴딜정책으로 미국 경제가 호전되던 시점이었다.
 
  1934년부터 안익태는 자신의 홍보전단까지 만들 정도로 연주활동을 활발히 하며 돈을 모았다. 그 무렵 안익태는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 연주를 많이 했다. 두 도시는 안익태에게 유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재정적 기회를 제공한 터전이었다. 안익태는 1937년 11월, 템플대학 졸업과 동시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미국 유학생 시절의 안익태 행적은 ‘북미한인학생연맹’이 발간한 《한인학생회보》 기사에 비교적 자세히 나타나 있다. 기사에 등장하는 안익태 이름 앞에는, ‘유명한 한국의 음악인’이라는 수식어가 종종 등장한다. 당시 안익태는 신시내티 시민 오케스트라 첼로 수석연주자로 활동했다.
 
  안익태의 미국 유학은 대한민국으로서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애국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김경래의 《안익태》 등 몇몇 자료는, 안익태 선생이 1936년 유럽에서 애국가를 작곡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허영한 교수가 《신한민보》(1936년 3월 26일자)에 게재된 안익태 선생의 기고문을 처음 소개하면서 애국가 완성 연도가 1935년인 것으로 확인됐다. 안익태 선생이 직접 쓴 《신한민보》 기고문의 한 대목이다.
 
  〈미국에 온 후 목적한 바 몇 가지 일이 있었는데 제일 급선무로 대한국(大韓國) 애국가를 작곡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사랑가로도 부르고 어떤 나라에서는 이별가로도 부르는데 참으로 대한국 애국가로서 그 곡조를 사용함은 대한국의 수치인 줄로 자각하였습니다. (중략) 과거 5년간 구심 근작하여 약 2년 전에 처음 절은 필하였습니다만 후렴은 필하지 못하고 지나던 중 지난 11월 하루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실로 하나님의 암시로 후렴 전부를 근작하였습니다.〉
 
  안익태 선생이 애국가를 작곡하기 전에는 스코틀랜드 가곡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그리운 옛날)’에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가사(歌詞)를 붙여 불렀다. 이를 ‘수치’로 생각했던 안익태는 우리의 곡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마침내 ‘지난 11월(1935년 11월)’ 애국가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기고문에 앞서 《신한민보》는 1936년 1월 16일자에 ‘지난 12월 28일 안익태가 새로 작곡한 애국가를 직접 연주했다’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애국적 정신으로 엄숙히 불러야”
 
안익태 선생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우여곡절 끝에 미국을 방문,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다. 1952년 미국 신시내티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이다.
  《신한민보》는 1936년부터 애국가 보급에 적극 나섰다. 당시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애국가 악보를 접하고 국가(國歌)로 사용하는 것을 공식 승인했다. 애국가가 해외에서 널리 퍼지자 당시 조선총독부는 곧바로 애국가를 금지곡으로 지정한다. 애국가의 수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애국가 가사를 쓴 사람은 공식적으로 ‘작자미상(作者未詳)’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 또는 대성학교 교장을 지낸 윤치호(尹致昊) 선생으로 압축돼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윤치호 작사’를 뒷받침하는 것들이 더 많다.
 
  안익태 선생은 《신한민보》 기고문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방법까지 제시했다.
 
  〈대한국 애국가를 부르실 때는 특히 애국가의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애국적 정인으로 활기 있게 장엄하게 부르시되 결코 속히 부르지 마십시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부르실 때 장엄히 애국적 정신으로 엄숙히 부르시되, 특히 동해의 ‘해’와 백두산의 ‘백’에 힘을 주고 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는 더욱 힘 있게 충만한 애국심과 활기 있게 부르십시오. 후렴의 ‘무궁화 삼천리’는 힘 있게 부르되 크게 부르지 마시고 엄숙히 의미심장하게 부르며 ‘화려강산’부터는 화려한 정신과 깊은 애국심으로 부르고 이어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는 처음 절 ‘하나님’과 같이 활기 있게 장엄히 부르십시오. 제2절은 1절과 같은 의미로 노래합니다.〉
 
  애국가와 안익태 선생의 대표 작품 ‘한국환상곡’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우선 두 곡 모두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한국환상곡은 교향곡 형식의 네 개 악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마지막 4악장의 주제 선율(melody)이 바로 애국가이다. 한국환상곡은 안익태 선생이 유럽으로 떠나기 직전 1937년 3월 완성했다.
 
  안익태 선생은 1936년 6월경 유럽을 3개월간 여행했다. 이때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계적 지휘자이자 오스트리아 국립가극장 음악감독인 ‘펠릭스 바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를 만난다. 그의 추천으로 안익태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심포니오케스트라 객원지휘자로 초대받아 그의 첫 오케스트라곡 ‘패스토랄’을 초연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안익태는 이듬해(1937년 11월) 유럽으로 완전히 이주한다.
 
  안익태는 1938년 2월 자신이 만든 한국환상곡을 아일랜드 수도(首都) 더블린에서 처음으로 연주(初演)했다. 당시 안익태는 아일랜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일랜드와 한국은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고통을 받았고, (현재)받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밝혔다.
 
 
  창씨개명하지 않은 안익태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안익태 선생은 6ㆍ25 전쟁이 끝나고 1955년 유학 후 처음 귀국, 창경궁에서 서울 시민을 위한 특별연주회를 가졌다.
  안익태 선생이 유럽으로 건너간 시기는 세계대전의 전운(戰雲)이 감돌던 때였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9년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면서 2차대전이 시작됐다. 1940년 9월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이 추축국(樞軸國) 동맹을 결성하고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이 연합국을 이루면서 전선(戰線)은 확대됐다. 1941년 12월 마침내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침공했다.
 
  전쟁은 안익태의 음악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안익태는 1938년 그의 스승 에르뇨 도흐나니(Ernest von Dohna'ni)의 도움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이듬해에는 헝가리 정부의 장학금을 받으며 리스트음악원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졸탄 코다이(Zolta'n Koda'ly)와 같이 공부했다. 그런데 일본과 헝가리가 문화교류를 맺으면서 안익태의 활동에 제약이 가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허영한 교수의 말이다.
 
  “유럽으로 건너간 안익태의 국적은 일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인 작곡가였고, 일본인 지휘자로 알려진 것이죠. 물론 안익태 선생은 인터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한국사람이라 밝힙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던 1940년부터는 그의 이름이 ‘에키타이(익태의 일본식 발음) 안’으로 소개됩니다. 일본과 헝가리의 관계가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안익태 선생은 비록 자신의 이름이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됐지만 자신의 성(姓) ‘안(安)’은 끝까지 지켜 냈습니다. 일본의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안익태 선생이 당시 유럽에서 일본인 작곡가, 일본인 지휘자로 알려졌음에도 1940년까지 ‘한국환상곡’을 고집하며 지휘했다는 점이다. 허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잃지 않았던 겁니다. 혹자는 그의 작품 ‘강천성악(降天聲樂)’이 일본 궁정음악(宮廷音樂) ‘에텐라쿠(月天樂)’의 주제 선율을 그대로 본뜬 것이고, 그가 작곡한 교향적 환상곡 ‘교쿠토(極東)’나 ‘만주국’은 일본을 찬양하는 작품이라는 이유로 그를 친일파라 주장합니다. 과연 그렇게 봐야 할까요? 자기합리화 또는 변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안익태 선생은 ‘세종대왕 때 우리의 아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즉, 안익태 선생은 일본 아악의 원조가 조선시대의 우리 음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일본 궁정음악 에텐라쿠와 관련해, 안익태 선생은 당시 일본인 지휘자 고노에 히데마로(일본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생)가 에텐라쿠를 ‘단순 편곡’한 것과 달리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 에텐라쿠를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국환상곡을 작곡한 안익태 선생은 제목만 바꾸어 ‘교쿠토’ ‘만주국’으로 활용했습니다. ‘한국환상곡’ ‘교쿠토’ ‘만주국’ 이 세 곡을 연결해 주는 공통 요소는 파스토랄(Pastorle)인데, 이는 우리 민요 ‘방아타령’ 선율에 해당합니다. 결과적으로 ‘교쿠토’ ‘만주국’은 ‘한국환상곡’의 개작에 불과합니다. 안익태에게는 그 곡 모두가 ‘한국환상곡’이었던 셈이죠. 물론 ‘교쿠토’ ‘만주국’은 한국환상곡과 달리 3악장으로 이뤄졌고, 애국가 선율이 들어 있는 한국환상곡의 4악장이 빠져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현실적 제약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조국을 잃은 식민지 출신 작곡가는 자신이 만든 국가(國歌)를 더 이상 연주할 수 없었던 거죠.”
 
애국가 작곡 80주년 특별음악회 여는 안익태기념재단
 
‘國歌는 애국가’ 헌법에 명시해야

 
  안익태기념재단(이사장 한헌수 숭실대 총장)은 오는 8월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대한민국 광복 70주년, 애국가 작곡 80주년, 안익태 서거 50주년을 맞이해 특별 기념음악회를 연다. 이번 공연에는 대한민국 대표 지휘자 정치용이 지휘하는 수원시향과 국립합창단, 숭실콘서트콰이어가 출연한다. 소프라노 한예진, 메조소트라노 김선정, 테너 강무림, 베이스 임철민, 트럼펫 안희찬 교수 등이 솔로이스트로 참여한다.
 
  이번 공연에 일반인 250여 명으로 구성된 ‘국민참여합창단’도 무대에 오른다. 조문수 안익태기념재단 사무총장은 “일반 국민은 물론 독립운동가, 6·25전쟁 참전자, 베트남전쟁 참전자, 중동진출 기업인, 파독(派獨) 광부·간호사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을 온몸으로 맞이한 분들과 각종 세계대회에 나가 태극기를 휘날리고 애국가를 울려 퍼지게 한 문화·예술·스포츠인도 참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선발된 국민합창단은 공연 당일 ‘애국가’와 ‘한국환상곡(KOREA FANTASY)’ 등을 합창한다. 선발된 국민합창단은 7월부터 연습에 들어간다. 자세한 사항은 안익태기념재단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www.ahneaktai.or.kr).
 
  조문수 사무총장은 “현재 애국가와 관련해 법률로 정해진 것이 없는데 향후 개헌(改憲) 논의가 있을 때 ‘국가는 애국가이다’는 조항이 헌법에 들어가도록 재단 차원에서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부당한 권위에 도전한 안익태
 
안익태 선생은 1946년 스페인에서 ‘로리타 탈라베라’ 여사를 만나 결혼, ‘마요르카’라는 섬에 정착하게 된다. 왼쪽부터 딸 엘레나, 로리타 여사, 안나, 레오노르.
  물론 안익태 선생의 생애를 볼 때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허 교수는 “1940년부터 1943년까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이 이전 시기에 비해 흐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시기 세계적 명성을 지닌 독일 지휘자들도 히틀러를 위한 음악회를 지휘하곤 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출신인 안익태 선생이 선택할 수 있는 생존 방법은 일본 측 요구에 순응하는 길밖에 없었을 겁니다. 지휘자의 악기(樂器)는 ‘오케스트라’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오케스트라가 국립(國立), 즉 국가 소유의 음악단체였습니다. 국가 소유의 ‘음악 악기’를 연주하려면 국가의 뜻에 일정 부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안익태 선생이 첼리스트로 활동했다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차라리 지휘봉을 꺾고 지휘를 안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요. 그러나 안익태 선생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매우 강했습니다.”
 
  허 교수는 “친일 여부에 대해 짧게 답해야 한다면 그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답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불행히도 우리 현실은 친일 여부를 학문적 성찰의 결과로 말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에 대한 언급은 자동적으로 정치적 발언으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를 흑과 백으로 뚜렷이 구분하는 행태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삶의 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화시키면 역사의 왜곡이 일어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여러 자료를 검토해 보면 안익태 선생은 부당한 권위에 대해 쉽게 굴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가 1930년대 초 미국 유학 시절 이민당국에 의해 추방될 위기에 처했을 때 “추방당하느니 차라리 내 발로 직접 떠나겠다”고 큰소리친 것이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을 때 안익태의 일본인 친구가 자신의 일기장에 ‘안익태가 문제를 안 일으켰으면 좋겠다. 일본 영사관 측과 트러블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고 적어 놓은 것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베토벤을 사랑한 안익태
 
20년 넘게 묵묵히 안익태 선생의 삶과 음악세계를 연구해 온 허영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1944년 태평양전쟁이 극에 다다를 즈음, 프랑스에 머물던 안익태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으로 몸을 피한다. 그곳에 잠시 머물다 미국으로 건너가 최종적으로 한국에서 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여성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하면서 결국 스페인 마요르카에 완전히 정착했다.
 
  안익태 선생은 1947년부터 1959년까지 마요르카 교향악단(70여명으로 구성)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 3번, 5번, 7번을 자주 연주했는데 그중에서 5번 ‘운명’을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렸다. 그는 베토벤 작품 외에 차이콥스키 교향곡과 드로브자크 교향곡도 많이 연주했다.
 
  당시 지휘자 안익태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원들을 조련하면서 혹독하게 연습시키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성격이 불같은 안익태 선생은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단원들을 혼내 단원들이 우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스페인에 거주하면서 안익태 선생은 1945년 광복을 맞는다. 그러나 그는 1950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무국적(無國籍) 상태에 놓인다. 세계적 음악가였던 그가 5년 동안 국제 미아(迷兒)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 방문은 1955년에야 성사됐다.
 
  1955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이후 그는 불행히도 국내 주류 음악계 인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허 교수에 따르면, 안익태 선생은 성격이 매우 급하고, 음악에 관한 한 자기 중심적이며 고집불통이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에서 국립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안익태 선생은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스페인에서 한국인으로 살다가 생(生)을 마감했다.
 
  안익태 선생에 대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그가 6·25전쟁을 전후로 ‘한국의 음악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전쟁이 끝난 1953년 직후 우리나라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때 안익태 선생은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을 돌아다니며 한국환상곡을 지휘, ‘한국 알리기’에 열정을 쏟았다.
 
  안익태 선생의 삶을 되돌아 볼 때, 그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국내 음악계가 그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국내에 ‘안익태 제자들’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건국(建國) 이후 국내 음악계가 형성되던 초창기에 국내 음악인들과 안익태 선생이 상당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 주장이 강했던 안익태 선생의 ‘고집’은 국내 음악인들로 하여금 그를 불편한 ‘존재’로 각인케 했고, 결과적으로 그가 활동할 수 있는 ‘국내적’ 공간이 마련될 틈이 없었다. 표절·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된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허영한 교수는 “안익태 선생은 음악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분”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현재 한국인으로서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음악인이 많지만 1930~40년대 당시 안익태 선생의 명성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안익태 선생에 대한 몇몇 평가가 있지만 정치와 이념, 또 국경을 넘어선 세계적 음악인으로서 그를 재평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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