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구

西人의 謀主 송익필은 누구인가?

  • 글 :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장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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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 초 파주에서 활동하던 이이, 송익필, 성혼, 심의겸이 西人의 뿌리
⊙ 아버지의 어머니가 賤民, 뒤늦게 노비로 판정받아 비참한 말년 보내
⊙ “조정의 是非와 士大夫의 進退에 관여하여 논하지 않음이 없으며, 邪論을 선동”
    (송익필 체포를 주청한 사헌부의 상소)
⊙ 仁祖反正의 1등공신 9명 모두 송익필과 직간접으로 師弟관계,
    제자 김장생 통해 사상적으로 조선 후기 지배
송시열이 쓴 송익필의 묘갈명. 18세기 중엽에 나온 《國朝人物考》에 실려 있다.
지난해 역사드라마 〈정도전〉에 이어 지난 2월부터 KBS는 류성룡(柳成龍)의 시각에서 임진왜란을 조명하는 드라마 〈징비록〉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주인공인 류성룡보다는 우리에게 아주 생소한 인물이 드라마 초반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서인(西人)의 모사꾼으로 등장하는 송익필(宋翼弼·박지일 연기)이 그 주인공이다.
 
  필자는 2010년 《조선의 숨은 왕》(해냄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송익필을 조명하는 책을 낸 바 있기에 우리 사극(史劇) 역사상 처음으로 전면에 등장한 송익필에 대해 누구보다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당시 책의 부제(副題) ‘문제적 인물 송익필로 읽는 당쟁(黨爭)의 역사’가 보여주듯 그는 참으로 문제적 인물임과 동시에 조선 당쟁사의 뿌리와도 같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이런 비중 있는 인물이 그동안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당쟁의 실상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었고 당연히 당쟁으로 점철된 조선의 중기와 후기 정치사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없었다.
 
  송익필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에 앞서 조선 당쟁에 대한 우리의 초보적인 인식을 점검하는 게 순서다. 우리는 흔히 선조 8년 이조정랑 자리를 두고서 심의겸과 김효원이 충돌하면서 당쟁이 시작됐고 심의겸을 지원한 그룹은 서인, 김효원을 지원한 그룹은 동인(東人)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배웠다. 그리고 율곡 이이는 그 중간에서 조화를 시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우선 심의겸과 김효원의 충돌을 당쟁의 시발로 삼는 것 자체가 실상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고 율곡 이이는 다소 유화적이었을 뿐 초지일관 서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저술 작업을 통해 이 점을 확인한 필자는 따라서 당쟁의 시발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실록과 문집들을 통해 추적하게 됐고 그 결과 뿌리에서 만난 인물이 바로 송익필이었다. 겉에 이이가 있었다면 속에 송익필이 있었다.
 
 
  坡州의 네 청년
 
송익필이 이이,성혼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삼현수간〉.
  《삼현수간(三賢手簡)》이라는 서한집이 있다. 보물 1415호로 지정돼 있으며, 현재 삼성 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삼현이란 세 사람의 현자라는 뜻으로 이이, 송익필, 성혼을 가리킨다. 이들은 젊은 시절부터 서로 주요 사안에 관해 편지를 주고받으며 뜻을 나눴는데 모두 파주의 율곡리(이이), 교하(송익필), 눌노리(성혼)에 살았고 이들의 후원자이던 명종비(妃) 심씨의 동생 심의겸은 파주의 광탄이 본거지였다. 즉 파주의 네 청년이 일찍부터 한 무리가 되어 조정 일에 개입을 시도한 것이 서인의 출발이다.
 
  이이는 1536년생, 송익필은 1534년생, 성혼과 심의겸은 1535년생으로 아래위 10년을 동년배로 간주하던 당시의 풍속에서는 동갑내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이들은 조선의 마지막 적통(嫡統) 임금이었던 명종의 처남 심의겸을 둘러싼 신진(新進)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이미 이들에 대한 경고는 선조 5년 영의정 이준경이 선조에게 올린 유언상소에서 나온다. 선조 즉위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영의정 이준경은 이미 선조 5년 세상을 떠나면서 당쟁의 가능성을 경고하는 상소를 선조에게 올린 바 있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충돌이 있기 3년 전이다.
 
  필자는 이준경의 상소를 그동안 이준경의 예감 내지는 예측으로 보았었다. 그러나 이후 자료를 더 조사한 결과 앞서 선조 5년을 전후하여 당을 형성하고 있는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준경의 상소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현실적 징후에 대한 경고였던 것이다. 당시 이준경은 선조에게 네 가지를 당부했는데 그중 네 번째가 바로 당쟁의 조짐에 대한 경계였다.
 
 
  이준경의 경고
 
KBS 사극 〈징비록〉 속의 송익필 (박지일 연기).
  〈사사로운 붕당을 깨뜨려야 합니다. 신이 보건대 오늘날 사람들은 간혹 잘못된 행실이나 법에 어긋난 일이 없는 사람이 있더라도 말 한마디가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으며, (반대로) 행검(行檢)을 유의하지 않고 독서에 힘을 쓰지 않더라도 고담준론으로 붕당을 맺은 자에 대해서는 고상한 풍치가 있다고 여겨 마침내 허위풍조를 빚어내고 말았습니다. 군자는 모두 조정에서 집정하게 하여 의심하지 마시고 소인은 내버려두어 자기들끼리 어울리게 해야 하니 지금은 곧 전하께서 공정하게 듣고 두루 살펴서 이 폐단을 힘써 없앨 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내는 반드시 국가의 구제하기 어려운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 유언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곧 드러났다. 이이는 즉각 그것이 자신이나 심의겸, 그리고 정철을 겨냥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이와 정철(1536년생)은 친구이자 동지였다. 심의겸과 정철은 과거 동기생이기도 했다. 송익필이나 성혼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세 사람이 자연스레 지목된 것이다. 이에 이이는 이준경의 유서를 논박하는 〈논붕당소(論朋黨疏)〉를 써서 올렸다. 이때 이이는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였다.
 
  이이는 먼저 이준경이 우려한 네 가지 항목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붕당론은 전혀 근거가 없는 난언(亂言)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그의 상소는 이준경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가득 차 있다.
 
  “선(善)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식견이 밝지 못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재기(才器)가 부족하며, 선비를 사랑하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만하여 자기를 높였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시정에 시끄러운 말이 왁자하게 퍼져 여우와 쥐 같은 무리들이 사림을 음해하고자 하였는데, 준경이 주동자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이는 붕당이 전혀 없다며 이준경의 붕당 운운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단정한다.
 
  “준경이 붕당을 한다고 지목하는 사람들이 한때의 청망(淸望)이요 공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어서, 만약 이름을 밝혀 말하면 특별히 사림(士林)에 죄를 얻을 뿐 아니라 소인으로 귀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언을 통해 이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옛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했는데 지금의 이 사람은 그 말이 악하니, 이상한 일이도다.”
 
 
  王黨派 vs. 反왕당파
 
파주 4인방 중 하나였던 율곡 이이.
  이이는 이준경을 삭탈관작(削奪官爵)해야 한다고 했으나 류성룡의 반대로 없었던 일이 됐다. 이는 곧 선조 8년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적어도 선조 5년부터는 파주의 4인방에 정철이 가세한 서인 그룹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당파의 성격이다. 동인은 왕당파(王黨派), 서인은 반(反)왕당파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후궁의 손자였던 선조의 즉위와 직결된다. 출신을 떠나 선조도 똑같은 임금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동인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 남인(南人)으로 이어진다. 반면, 명종의 죽음으로 조선 왕실에서는 사실상 적통은 끝났기 때문에 그 이후의 왕실은 정통성이 없다고 본 것이 서인이고 노론(老論)이며 벽파(辟派)다.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 왕실에 삼년상을 해줘야 한다는 남인과 해줄 수 없다는 서인의 충돌도 고스란히 이런 문맥에 있다. 그랬기 때문에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성공은 그 자체로 왕실의 무력화(無力化)와 연결되며 조선 후기의 왕약신강(王弱臣强) 풍토가 사실상 제도화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버지의 굴레
 
  파주 4인방 혹은 4걸(傑)의 좌장(座長)은 송익필이었다. 그런데 송익필은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었다. 즉 천출(賤出)이었다. 이야기는 조금 거슬러 올라간다.
 
  송익필이 태어나기 13년 전인 1521년 신사년(辛巳年) 10월 11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무렵 천문 지리 등을 맡아보던 예조의 관아 관상감 판관(判官-종5품) 송사련(宋祀連·1496~1575)이 처남 정상과 함께 승정원을 찾아와 충격적인 내용을 고변(告變)했다.
 
  “안처겸이 지난날 언제나 저에게 말하기를 ‘간신이 오랫동안 조정에 있게 해서는 안 되니 마땅히 먼저 제거한 다음 주상께 아뢰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2년 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해 수많은 사림과 인재들을 숙청한 조정대신 남곤과 심정을 먼저 제거한 다음 중종에게 전후 사정을 보고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의 고변으로 터지게 된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번 고변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안처겸과 송사련이 적서(嫡庶)로 얽힌 가까운 친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안처겸의 아버지이자 좌의정을 지내다가 조광조 등 사림을 두둔했다 해서 기묘사화 때 파직당한 안당과 송사련의 어머니 감정은 이복남매 사이였다. 안당은 아버지 안돈후와 본처 사이에서 난 적자(嫡子)였고 감정은 안돈후와 비첩(婢妾) 중금 사이에서 난 서녀(庶女)였다.
 
  어머니 쪽의 신분을 따르기로 돼 있던 당시 조선의 신분제로 보자면 송사련은 이중으로 제약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어머니는 서녀이고 외할머니는 종 출신 첩이었기 때문이다. 적서의 차이는 있지만 안당은 송사련의 외삼촌이었고 안처겸, 안처함, 안처근은 외사촌 형제들이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안당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그 집을 송사련이 차지하게 된다. 물론 송사련은 정3품 당상관에까지 뛰어오르게 된다. 결국 이 일은 두고두고 송익필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金長生을 만나다
 
송익필의 제자로 禮學을 일으킨 김장생.
  1559년(명종 14년) 26세 송익필은 소과에 급제한 후 대과 공부에 한창이었다. 그런데 조정 내에서 송익필은 비첩의 자손이므로 과거를 허용하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송익필은 벼슬의 길을 접고 지금의 파주시 출판단지가 있는 구봉산(현재 심학산) 자락에 거처를 마련하고 학문 연마에만 힘쓰게 된다. 그의 호 구봉(龜峯)은 바로 이 거북이 등을 닮은 구봉산에서 딴 것이다.
 
  이듬해인 1560년 가을 송익필은 첫 제자를 맞아들인다. 학문을 매개로 서인이라는 인맥이 탄생하게 되는 첫 번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초 명문가인 광산 김씨 김계휘가 13세 된 아들 김장생(金長生)을 맡겨온 것이다. 김계휘는 대사헌을 지낸 인물로 이런 인물이 천출 논란과 아버지의 사림 무고로 낙인이 찍힌 송익필에게 아들을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송익필의 학문에 대한 명망이 높았던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훗날 송익필-김장생으로 시작된 서인의 당파가 노론, 벽파로 이어지며 서인의 정통성을 잇게 된다.
 
 
  克己復禮와 直 사상
 
  송익필은 제자를 가르칠 때 주희(朱熹)의 《근사록(近思錄)》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근본사상은 고스란히 《논어(論語)》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이고 또 하나는 직(直) 사상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자는 극기복례에서 학문적 방향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예학을 정립해 조선 예학의 기초를 다졌고 제자 김장생은 이를 더욱 심화시켜 흔히 예학의 종장(宗長)으로 불린다.
 
  또 하나는 직 사상이다. 《논어》 ‘헌문편’에 나오는 구절부터 보자.
 
  “원한은 곧음으로 갚는다(以直報怨).”
 
  또 ‘옹야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곧음(直)이니, 곧지 않게 살아가는 것은 요행스럽게 (환란이나 죽음을) 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곧음이란 믿음과도 통하지만 그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갖는다. 송익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되 상황에 굴복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이 개념은 퇴계 이황의 경(敬) 사상, 율곡 이이의 성(誠) 사상과 더불어 조선 중기 3대 사상 개념 중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다만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한 학계의 주목은 거의 없는 편이다.
 
  여기서 송익필-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학맥의 선상에서 직의 중요성을 짚어봐야 한다. 송익필은 김장생의 장남 김은(金櫽)이 관례를 마치자 자(字)를 내려주었는데 직백(直伯)이었다. 그리고 그 취지를 담은 짤막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백성의 삶이 곧 곧음이다. 곧음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다. 만물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위를 바로 하고 아래를 바로 하는 것이 바로 이치다.”
 
  이런 직 사상의 중요성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송시열이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으면서 남긴 유언에서다.
 
  “천지가 만물을 생(生)하는 소이와 성인(聖人)이 만사에 응하는 소이는 ‘직’일 뿐이다. 공맹(孔孟) 이래로 서로 전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곧을 직자인데 주부자(朱夫子-주희)가 문인에게 부탁한 것도 이에 벗어나지 아니한다.”
 
  즉 송시열은 여기서 ‘할아버지 스승’에 해당하는 송익필은 언급하지 않고 주희를 끌어들여 말하고 있지만 그 스스로 오직 직자에 학문하는 뿌리를 두었음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추노꾼에게 쫓기며
 
  송익필은 직접 벼슬을 하지 않고 대부분 이이나 정철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현실정치에 개입했다. 선조 초 심의겸은 동인들의 견제로 인해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했고 선조 자신도 그의 상징성과 현실세력을 감안해 늘 거리를 두었다.
 
  이런 가운데 1586년 5월 동인의 엘리트 수장인 이발이 서인의 막빈(幕賓)으로 송익필을 지목하고서 그의 제거 작업에 나선다. 이때는 이미 송익필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던 이이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후였고 조정은 동인 일색이었다. 노비 문제를 관할하는 장례원(掌隷院)에서 송익필 일가의 면천(免賤)에 문제가 있었다면서 송익필과 그 일가를 다시 안씨 집안의 노비로 판정해 버린 것이다.
 
  이에 송익필과 그 일가 70여 명은 안씨 집안이 고용한 추노꾼을 피해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때부터 흔히 정여립의 난으로 불리게 되는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기까지 3년 동안 송익필은 전라도와 황해도 일대를 숨어다니며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지금의 전라북도 진안군에는 운장산(雲長山)이라는 해발 1126m의 큰 산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홉 봉우리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구봉산이 나란히 붙어 있다. 문제는 운장산의 이름이 바로 송익필의 자인 운장(雲長)에서 왔다는 점이다. 호는 구봉, 자는 운장이니 운장산과 구봉산이 나란히 있는 것이 그냥 우연일까?
 
  게다가 그가 오랫동안 숨어 살았다는 운장산에서 정여립의 본거지인 죽도까지는 걸어서 반나절도 안 되는 거리다. 그렇다면 여기서 송익필은 숨어 지내는 동안 정여립의 행적을 면밀하게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정여립의 난이 고변되는 과정은 더욱 의심스럽다. 사건은 전라도에서 진행됐는데 고변은 황해도 관찰사인 한준이 올렸다. 황해도는 파주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이나 송익필 모두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이가 벼슬자리를 물러나면 수시로 가 있던 곳이 황해도이고 송익필의 친족들이 대부분 모여 살던 곳도 황해도 해주다. 한준은 서인이었다. 이때 서인이라는 말은 십중팔구 송익필의 제자라는 뜻이다. 그 뒤에 송익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悲運의 천재
 
  이처럼 전라도 시골구석에서 일어난 일을 황해도 관찰사가 고변하는 기이한 형태로 시작한 기축옥사는 결국 정여립을 시작으로 이발과 그의 노모 및 여섯 살짜리 아들을 죽이고 이어 동인 전반에 대한 소탕 작전으로 확대되면서 그 어떤 사화(士禍)보다 큰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드라마 〈징비록〉에 등장하는 송익필은 바로 이 시기의 활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산해와 류성룡의 동인 세력으로부터 반격을 받아 정철과 송익필이 이끌던 서인은 대몰락을 하게 된다.
 
  이 무렵 그의 이름이 선조의 입에도 오르내린다. 임진왜란을 1년 앞둔 1591년 사헌부에서 송익필 형제에 대한 처벌을 주청했다. 그 내용이 놀랍다.
 
  “사노(私奴) 송부필, 송익필, 송한필 등은 사대부의 집에 드나들면서 조정의 시비(是非)와 사대부의 진퇴(進退)에 관여하여 논하지 않음이 없으며, 사론(邪論)을 선동하여 일국을 교란시키는가 하면 심지어 남을 시켜 상소함으로써 사림(士林)을 모함하는 것을 평생의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수십 년 이래 사론(士論)이 갈라지고 조정이 조용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 이들이 현란시킨 소치입니다.
 
  그 사정을 추궁하여 보니 그들이 본 주인에게 죄를 짓고 온 가족이 도망 나와 권문(權門)에 의탁해 소굴로 삼은 뒤 기필코 세상을 뒤엎어서 옛주인에게 보복하려 했던 것입니다. 지난번 간흉(奸凶-정철)이 쫓겨난 이후로는 몸을 숨길 데가 없어지자 더욱 간독(奸毒)을 부려 때로는 서울 근교에 숨고 때로는 지방에 숨어 마치 귀신이나 물여우처럼 기회를 보고 틈을 노려 기필코 일을 만들려고 합니다. 지금 그 죄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뒷날의 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이니 유사에게 명하여 끝까지 수색 체포하여 율대로 죄를 정하소서.”
 
  선조는 허락했고 결국 송익필 형제는 유배를 가게 되는데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갔던 송익필은 그곳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아마도 노비에게 유배형을 내린 지극히 드문 사례라 하겠다.
 
  이후 송익필의 삶 자체는 이렇다 할 것이 없다. 전쟁 중에 서인의 복귀로 송익필도 해배되어 1596년 충청도 당진군 마양촌이란 곳에 거처를 마련한다. 제자 김장생의 배려였다. 2년 후 부인 창녕 성씨가 세상을 떠났고 곧이어 평생지기 성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이가 죽었을 때 ‘율곡 제문’을 썼던 송익필은 성혼의 죽음 앞에 시(詩)를 남겼다. 그리고 1599년 한 많고 굴곡졌던 비운의 천재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아마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4년 후인 1623년(광해군 1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성공하지 못했다면 송익필이라는 이름은 영영 사라졌을지 모른다.
 
  1623년 윤10월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나서 논공행상을 거쳐 52명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 책봉된다. 그중 1등공신은 김류, 이귀, 신경진, 김자점, 심기원, 이서, 최명길, 구굉, 심명세 등 9명이었다.
 
 
  西人의 딜레마
 
송익필의 學脈을 이은 송시열.
  김류는 송익필의 제자로 신립을 따라 왜란 초기 탄금대에서 세상을 떠난 김여물의 아들이며 김류 자신이 잠깐 송익필에게 배웠다. 이귀는 송익필의 제자로 여러 차례 상소문을 대신해서 올릴 만큼 송익필을 받들었다. 신경진은 송익필의 제자인 김장생에게서 배웠다. 김자점은 송익필의 벗 성혼에게 배웠고 심기원은 정철의 제자인 권필에게서 배웠으며 이서와 최명길, 구굉도 김장생에게 배웠고 심명세는 심의겸의 친손자다. 즉 9명 모두가 송익필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제(師弟)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정 당시 76세였던 초야의 김장생은 사실상 거사의 스승으로 추대되어 사헌부 장령(掌令)에 제수됐다. 그리고 조정에 나아가 정치하는 요체를 인조에게 가르치게 된다. 그 핵심은 대부분 송익필로부터 온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딜레마가 있었다. 이들의 학통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송익필이란 이름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상당수는 자신의 스승을 이이로 내세우게 되고 이후에도 이이는 서인의 사상적 종주(宗主)처럼 받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서인 내부에서는 이것이 그릇된 것임을 은연중에 다 알고 있었다. 송시열이 죽으면서 직 사상을 강조한 것이 한 예라고 하겠다. 게다가 행장이나 묘갈명(墓碣銘·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에 새긴 글)을 써줄 때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송시열이 직접 송익필의 묘갈명을 썼다. 거기에는 곳곳에 서인 내에서 송익필의 중요성이 얼마나 컸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구절들이 나온다. 묘갈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앞서 동춘(同春) 송준길공이 나에게 말하기를, “문원공(文元公) 김선생(金先生-김장생)이 율곡(栗谷) 이선생(李先生-이이)을 스승으로 모시어 도(道)가 이루어지고 덕(德)이 높아지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빗장을 풀고 열쇠로 열어 그러한 경지에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분은 구봉 선생(龜峯先生-송익필)임을 감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봉 선생의 문하(門下)에 명현(名賢)과 거공(巨公)이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께서 세상을 뜨신 지 70여 년이 지나도 묘도(墓道)에 글이 없으니, 우리 무리에게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구봉을 숨기려 했던 당시의 상황이 드러나고 송익필이 길러낸 인물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송시열은 송준길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료를 수집하고 해서 묘갈명을 완성하는데, 흥미로운 대목을 몇 곳 살펴보자. 먼저 과거를 포기한 후 그의 행적과 그의 문하생들이 성대했음을 증언하는 말이다.
 
 
  친구 율곡 비방하기를 거부
 
  〈선생은 과거 외에 마음 쓸 곳이 있음을 알았다. 마침내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책을 취하여 밤낮으로 익히고 연구하니, 스승을 거치지 않고도 모든 이치를 칼로 실을 끊듯 이해하고 얼음 녹듯 알아내었다. 문(文)은 좌씨(左氏-좌구명(左丘明))와 사마씨(司馬氏-사마천(司馬遷))를 주로 하였고 시(詩)는 이백(李白)을 주로 하였다. 이치를 논설(論說)하는 데 그 이론이 투철하고 속됨이 없이 깨끗하여 막힌 데가 없었다. 배우려는 자들이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종일토록 끊이지 않았으나 선생이 응대하여 주기를 게으르지 아니하니, 그중에서 아는 것 없이 빈 몸으로 왔다가 잔뜩 배워 돌아간 자가 매우 많았다.〉
 
  또 하나 중요한 증언이다.
 
  〈선생은 옛 방식을 자처하여 비록 공경(公卿)과 귀인(貴人)이라도 이미 벗이 되면 모두 대등하게 사귀어 자(字)로 부르고 벼슬로 부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나무랐으나 또한 개의치 않았다.〉
 
  호(號)나 벼슬 이름이 아니라 그냥 자를 부르는 것은 그 후 서인의 전통이 됐다. 《삼현수간》에서도 이이를 숙헌(叔獻)이라 했고 성혼을 호원(浩原)이라 불렀다. 따라서 서인을 다루는 사극에서 호나 벼슬 이름을 부르는 것은 사실에 맞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 드라마 〈징비록〉은 이 점을 정확히 살리고 있다. 뒤에는 동인의 수장이 됐지만 어릴 때 친구였던 이산해와의 일화도 전한다. 그가 노비소송으로 몰려 곤경에 처했을 때의 일이다.
 
  〈이산해가 선생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오늘의 화근을 아는가? 화근의 빌미는 율곡에게 있으니, 만약 그대가 여러 사람을 따라 율곡을 헐뜯고 비방한다면 화를 면할 것이다”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비록 죽을지언정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기서 송익필이 말했던 직의 정수(精髓)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충청도 당진에서의 말년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지구(知舊)와 문인(門人)이 서로 다투어 처소를 제공하였고 학도(學徒)가 떼지어 모여들었다.〉
 
 
  죽어서 이룬 免賤
 
  그 후에도 서인, 노론, 벽파로 이어지는 당파에서는 꾸준히 송익필의 신원을 시도했다. 그리고 사후 150여 년이 지난 1751년(영조 27년) 충청도 관찰사 홍계희의 주청으로 이듬해 송익필은 통덕랑 행(行)사헌부 지평(정5품)에 추증됐다. 죽어서 면천이 되고 벼슬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다시 150여 년이 지난 1909년(순종 3년) 송익필은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고 문경(文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만큼 서인 당파에서는 크게 내세우지는 못해도 끝끝내 송익필이라는 이름 석 자는 잊지 않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가 시호를 받고서 한 달쯤 지나 그에게 사후에나마 작위를 내려준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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