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추적

여간첩 원정화의 충격 증언 - “北 보위부, 중국 公安 협조로 한국인 납치”

윤○○씨 납치과정 자세히 증언. 재판부도 인정

  • 글 : 조성호 조갑제닷컴 기자  chosh760@chosun.com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내가 북한 보위부 요원에게 전화를 하니 중국 공안이 차를 내어주고 사복(私服)한 공안과 공안 복장을 한 깡패가 한 팀을 이뤄 호텔 객실로 들어와 윤씨에게 수갑을 채워 끌고 나갔다. 나는 그에게 ‘미안하게 됐어요’라고 냉정히 말했다.”
북한 보위부 直派간첩이었던 원정화의 최근 모습.
“저, 원정화입니다.”
 
  지난 4월 18일 오전 <조갑제닷컴>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전화의 주인공은 200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女)간첩’ 원정화씨였다. 군(軍)장교들로부터 정보를 빼내 북한에 넘겨준 혐의로 구속되어 5년간 감옥살이를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힐 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기자는 먼저 전화를 한 용건에 대해 물었다. 그는 “언론이 제 사건(원정화 간첩사건)을 뒤집으려 한다”고 분개했다. 원씨는 자신의 사건에 의혹이 있다는 취지의 기사를 게재한 월간지 《신동아》를 비판했다. 그는 “《신동아》 기사에 실린 녹취록 등에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있다”며 줄곧 기사가 날조되었다고 주장했다.
 
  원정화씨는 2008년 7월 15일, 간첩혐의로 우리 수사 당국에 검거되었다. 당시 나이 35세. 검찰은 원씨가 ‘최초의 위장탈북 남파(南派)간첩’이라고 발표했다. 검찰에 따르면, 원씨는 북한 보위부 소속으로 2001년 탈북자로 위장, 남파되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살면서 중국과 북한을 드나들며 간첩활동을 벌였다. 특히 재중(在中) 북한 보위부의 지시하에 무역회사(단둥무역대표부) 내 보위부 간첩으로 활동했다고 밝혔다. 원씨는 대표부로부터 공작금을 받고 국군 장교들에게 접근, 군사정보 등을 빼내 북(北)에 넘겼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간첩·잠입탈출 등)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고, 2013년 7월 만기 출소(出所)했다.
 
 
  원정화, “나는 간첩 맞다”
 
원정화에 대한 수원지법 판결문.
  《신동아》는 2014년 4월호와 5월호 두 차례 원정화 관련 기사를 실었다. 기사의 요지는 원씨의 간첩행적에 의혹이 있다는 것이었다. 기사 제목도 단정적이었다. 제목은 “나는 보위부의 ‘보’자도 모른다(4월호)”, “원정화, 남파간첩 주장 스스로 뒤집다(5월호)”였다. 이 기사의 제목만 본다면 원씨의 간첩사건은 조작된 것이 분명했다.
 
  《신동아》를 비롯한 일부 매체가 원정화 사건에 의혹을 제기하고 사건을 뒤집으려 하자, 원씨는 지난 4월 8일, 입장을 밝혔다. 그는 자료에서 “제 사건은 수사과정에서 회유와 협박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랜 내사(內査)와 많은 증거물을 대한민국 법 (法)기관에서 충분히 검토하고 판결을 내려 처벌을 준 것”이라며 그간의 언론보도를 비판했다.
 
  <검찰 조사 중 조금 불미스러운 부분에 대해 (언론과) 한 번 인터뷰했는데 마치 억울해서 사건을 파헤쳐 달라는 식으로 계속 보도됐다. (기자가) 집에 무례하게 찾아오고 먹는 약까지 분석하는 등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당장 중지해 달라.>
 
  원씨는 “(자신이 간첩이 되기 위해) 어린 딸을 5년간 복지시설에 맡기면서까지 교도소에 들어가 사는 엄마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
 
  자신을 ‘간첩’이라고 시인한 이유에 대해 원씨는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드러난 내 죄를 속죄하고, 국가에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종편 방송에 출연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생계 문제도 있었지만, 그보단 간첩활동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느슨한 안보태세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내가 출소하고 난 뒤엔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도 터졌다. 난 북한과 종북세력에 대해 잘 알기에 그들의 실체를 방송에서 알리고 싶었다. 그게 국가를 위해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자는 원정화 간첩사건의 판결문 전문(全文)을 입수, 원씨가 북한 보위부에 의해 간첩으로 선발된 과정, 간첩행각, 검거과정 등을 알아보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원씨는 1989년, 평양 모란봉 구역 전승동에 있는 공작원 양성소인 특수부대(805부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805부대 입대 직전엔 조선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에서 약 5개월간 사무원으로 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1998년 북한 보위부에 공작원으로 선발되었다. 2001년 탈북자로 위장, 한국에 들어왔다. 검거될 때까지 원씨는 안보강연을 기회로 삼아 군장교들과 정보기관 요원들에게 접근, 정보를 빼냈다.
 
 
  “내가 간첩이란 결정적 증거는 한국인 납치 실행”
 
2008년 8월 27일 수원지검 관계자들이 탈북 간첩으로 체포된 원정화의 간첩 활동 증거물을 공개했다.
  지난 4월 19일 경기도 군포에서 원씨를 만났다. 기자는 먼저 북한 보위부에 대해 물었다. “보위부의 ‘보’자도 모른다”는 《신동아》의 기사 제목 때문이었다. 원씨는 《신동아》 기사에 대해 “‘내가 보위부의 보자도 모르겠느냐’고 말한 게 와전(訛傳)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보위부에 대한 원씨의 설명은 판결문 내용대로였다. 판결문은, 보위부에 대해 〈각 도·시·군 단위 및 대기업소 등 산하 부서와 중국 내 베이징, 옌지, 훈춘 등에 대북무역업체로 위장하여 운영하면서 사회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반탐공작활동(반혁명분자 및 간첩 색출, 탈북자 색출, 남한 출신 대북무역업자 포섭)을 비롯하여 대남(對南) 정보수집을 하는 대남공작부서〉라고 적시(摘示)했다.
 
  그는 자신이 간첩이라고 누누이 설명했다. 자신이 가짜가 아니고 진짜 테러리스트라고 애써 설명하는 김현희(金賢姬) 같았다. 자신이 간첩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납치라고 했다. 북한 보위부의 지시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등을 납치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관여, 다수의 한국인들을 북으로 넘겼다는 것이다.
 
  1심 판결문(注: 원정화씨는 항소를 포기, 1심으로 刑이 확정)에는 원씨의 납치행각이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피고인(注: 원정화)은 1999. 9. 경 중국 연길(옌지) 서(西)시장 꼭대기에 있는 노래방에서 종업원으로 위장취업해 있을 때, 손님으로 놀러온 남한 사람 윤○○(남, 47세, 경기도 거주)을 알게 된 다음, 윤○○에게 자신은 탈북자인데 돈도 없고 있을 데도 없어 노래방에서 일을 한다면서 거짓말을 하여 윤○○으로부터 전화번호를 받은 후 다음날 윤○○에게 전화를 걸어 윤○○이 묵고 있던 우전호텔로 가게 되었고, 피고인은 위 호텔로 가기 전에 보위부 박○○(注: 박철민) 과장에게 “윤○○이 내가 탈북자라고 이야기하자 관심을 보이며 전화번호를 주면서 호텔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을 보니 북한정보를 수집하는 남한 정보기관 사람이거나 그 앞잡이일 수 있다”는 취지로 보고를 하였다.>
 
 
  중국 公安, 北 보위부 요원과 한국인 납치에 가담
 
중국에서 찍은 원정화의 사진. 원정화는 중국 공안 및 공안으로 변장한 깡패들을 동원해 한국인을 납치했다.
  보위부 상선(上線) 박철민의 지시를 받은 원씨는, 그 전에도 노래방 종업원으로 위장해 그곳을 방문한 한국인 등에게 접근, 호텔로 유인하는 수법을 썼었다. 판결문이다.
 
  <(피고인은) 박○○ 과장, 김진길 지도원 및 위 박○○ 과장이 동원한 중국 공안으로 가장한 중국 깡패들을 호텔 앞에 대기시킨 후 윤○○의 방으로 들어가 윤○○으로부터 “중국돈 1500원을 줄 테니 북한에 가서 북한 군부 내 기지나 군수품 공장, 북한주민 실상 등을 사진 찍어 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받고, “나는 북한에 쉽게 들어갈 수 있으니 사진을 찍어 주겠다”고 윤○○을 안심시킨 다음 박○○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리 약속한 은어로 “야, 내다. 내가 지금 좋은 사람 만나고 있는데 소개시켜 줄께”라고 말을 하자, 위 중국 공안 복장을 한 중국 깡패들이 윤○○의 방으로 들어와 수갑을 채우고, 방안을 뒤져 북한에서 찍은 사진이 많은 것을 확인한 다음 북한 보위부 요원들의 아지트인 두만강 호텔 301호실로 납치해 갔다. 피고인은 1999년 1월 경부터 2001년 10월 경까지 중국 옌지·훈춘 등지에서 위와 같은 방법으로 탈북자, 북한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대한민국 사람들 등 총 100여 명을 두만강 호텔로 약취하였다.>
 
  원씨는 판결문에 나타난 한국인 납치 수법을 계속 사용했다고 말했다. 대상자를 호텔 객실에서 만나면 그가 보는 앞에서 전화를 한다. ‘내가 좋은 친구 하나를 소개해 주겠다’는 요지의 말을 하는데, 이는 보위부 요원에게 즉시 행동하라는 뜻이다. 연락을 받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북한 보위부 요원들은 중국 공안과의 협조하에 한국인을 납치한다고 했다. 판결문에 나오는 ‘중국 공안으로 가장한 중국 깡패들’ 뒤에 진짜 중국 공안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원씨는 “중국 공안이 피랍자(被拉者)를 태울 차를 제공하고, 사복(私服)한 공안과 공안 복장을 한 깡패가 보위부 요원과 한 팀을 이뤄 피랍자를 유인한 호텔 객실을 급습한다”고 증언했다.
 
 
  정부는 모른 체하는가?
 
  원씨는 판결문에 나온 윤씨의 실명(實名)을 기자에게 말해 주었다. 그의 거주지가 경기도 이천이란 것, 윤씨의 아들 이름까지 이야기했다. 참고로 원정화 사건을 수사했던 검찰은 윤씨의 아들을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검찰 진술조서). 기자는 ‘윤씨의 직업 등 신분에 대해 아는 것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윤씨는 나에게 자신이 사업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어요. 내가 ‘왜 북한 내부의 사진을 찍으러 중국까지 오셨어요’라고 묻자 ‘내 친구가 부탁했다’고 말했어요. 북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어요.”
 
  원씨는 중국 공안과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호텔 방을 급습하고 윤씨를 납치했을 때의 상황도 설명했다.
 
  “윤씨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와 요원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어요. 나는 그에게 ‘죄송해요. 미안하게 됐어요. 따라가세요’라고 냉정히 말했죠. 깡패들은 윤씨에게 수갑을 채웠고, 사람이 많은 로비를 빠져나갈 때 윤씨가 저항할 것을 우려해 ‘네가 조용히 나가면 살 것이다’라고 협박하기도 했어요. 윤씨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깡패들에 의해 호텔 밖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원정화씨는 윤씨에게 ‘미안하게 됐어요’라고 냉정히 말한 부분이 기억에 생생하다고 증언했다. 원씨는 “윤씨의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고개를 떨궜다.
 
  국내 언론은 원정화 사건을 보도할 때 중국 공안이 북한 보위부와 공모한 납치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않았다. 원씨가 군장교들로부터 정보를 빼돌린 사실만 부각됐을 뿐이었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씨가) 윤○○을 약취한 것은 그가 현재까지 생사(生死)가 불분명하여 사망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국가안보 이전 문제, 즉 윤리적 생명경시 범죄”라고 했지만 우리 정부가 윤씨의 송환을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한국인 선교사 납치에도 가담
 
  원씨는 북한 보위부가 윤씨를 납치했을 당시 사복 차림의 중국 공안이 현장에 있었으며, 피랍자는 먼저 중국 공안에 넘어간다고 했다. 원씨는 또 ‘납치를 한 번 할 때마다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보위부 간부의 말을 전해 주었다.
 
  납치에 드는 돈이 적지 않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원씨는 검찰에서, ▲북한이 납치 대가(代價)로 중국 공안에 건네는 돈은 전부 달러였고 ▲중국 공안에 있어서 북한 보위부와 협조하는 한국인 납치는 일종의 돈벌이 사업이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원씨는 탈북자 북송(北送)에도 중국 공안이 개입한다고 했다. 그는 “이것을 ‘탈북자 몰이’라고 한다. 변방 공안국과 임업공안국 요원들까지 동원돼 옌지 등지에 숨어 있는 탈북자 수색에 나서기도 했다”고 말했다.
 
  원씨는 중국 공안이 개입된 또 다른 납치 사례를 털어놓았다. 그는 1999년 무렵 중국 옌지교회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한국인 선교사 납치를 도왔다고 한다. 원씨는 그 선교사가 탈북자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원씨 자신이 탈북자인 것처럼 위장해 옌지교회에 침투했다. 당시 선교사의 집은 2층이었는데, 2층에 탈북 여성 7명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중 나이가 제일 어렸던 19살 영순이를 알게 되었어요. 내가 선교사 집에 온 첫날 탈북 여성 중 한 명은 내게 ‘여기 오면 선교사와 잠자리를 가져야 한다’고 귀띔해 줬어요. 나는 ‘여성을 돌봐 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성(性)을 착취한다’는 생각에 화가 났죠. 선교사가 없는 틈을 타 영순이를 데리고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을 감행했어요.”
 
  탈출한 원씨는 곧바로 옌지 시내에 있던 박철민(보위부 상선)에게 상황을 보고했다고 한다. 박철민은 원씨의 보고를 받은 뒤 중국 공안과 함께 선교사의 집을 급습했고, 선교사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원씨는 “중국 공안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선교사가 ‘미(美) 영주권자’로 확인되어 추방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미 시민권자나 영주권자를 납치할 경우, 미·북(美北)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어 납치자의 국적이 어디냐에 따라 북송 여부가 결정된다고 했다.
 
  한국인 납치 과정에 중국 공안이 북한 보위부를 도와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원씨의 주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판결문은 “(원씨가) 대한민국 사람들 등 총 100여 명을 두만강 호텔로 약취하였다”고 밝혀 원씨가 기자에게 증언한 것 이외에 더 많은 수의 피랍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注: 100여 명이란 숫자는 직간접적인 사례를 다 포함한 것이라고 함). 재판부가 확인한 한국인 납치에 대하여 한국 정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존재 의미에 대한 회의(懷疑)마저 갖게 한다.
 
 
  보위부 간첩이 된 과정
 
  판결문은 원씨가 805부대에서 태권도, 독침 뿌리기, 사격훈련 등 공작원 훈련을 받았고, 1992년 2월 경 머리를 다쳐 그해 7월 감정제대(注: 의가사제대)를 했다고 적고 있다. 기자는 805부대에 대해 물었다.
 
  “805부대는 평양 전승역과 삼흥역 사이에 위치해 있어요. 부대 입구를 넝쿨로 위장해 민간인들은 쉽게 알아볼 수 없죠. 평양 시내에선 총소리가 울려선 안 되기 때문에 실제 훈련은 평양 외곽인 동북리, 강동군, 사동구역 송신동 부근에서 이뤄졌어요. 이들 지역이 산악지대라 군부대가 밀집되어 있어요.”
 
  805부대를 나온 원씨는 청진시 부령군 고무산 분주소(注: 파출소)에서 일했다. 판결문은 그가 이 무렵 비행(非行)을 한 것으로 적시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재가(再嫁)를 하면서 집안을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판결문은 원씨가 평양시 락원백화점에서 물건을 빼돌린 혐의로 교화소(注: 교도소)에서 2년간 복역하다가 1995년 5월 경 김정일의 특사(特赦)로 출소(出所)했다고 기록했다.
 
  1996년 12월엔 청진화학섬유공장의 사로청 부위원장이었던 친구의 아연절도 사건에도 연루되었다고 했다. 원씨는 이 두 사안에 대해 완강히 부인했다. 재판과정에서 한 증인이 잘못된 증언을 한 것이라며, 원씨 자신은 북한에 거주할 때 절도를 할 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원씨는 아연 사건의 여파를 피하고자 잠시 중국 등지를 전전하다가 1998년 초 다시 북한으로 갔다고 한다. 이때 외가 친척 중 한 사람인 국가안전부 소속의 방○○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 보위부 소속 함경북도 도보위부 정치부장과 다른 두 사람이 더 있었다고 증언했다. 판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98. 12. 말경 함경북도 도보위부 정치부장을 만나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원으로 선발되었는데 위 정치부장이 “동무, 이제 신입생 교육을 받고 중국 옌지에 파견되어 나갈 것인데, 앞으로 하는 일은 부모한테도 비밀이고 누구한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한 후 맹세문을 쓰도록 하였고…>
 
 
  원정화는 셀프 간첩?
 
  원씨가 보위부 공작원으로 선발된 과정을 적시한 부분이다. 《신동아》를 비롯한 일부 탈북자들은 이 대목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원씨 본인이 자처해 간첩이 된 것 아니냐’는 이른바 ‘셀프(self)간첩’ 논란이다. 북한이 원씨와 같은 일종의 ‘경제사범’에게 보위부 공작원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겼다는 건 의심할 만하다는 것이다. 원씨의 설명은 이렇다.
 
  “중국에서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아연 사건이 잠잠해진 시점이었어요. 그 시기 외가 쪽 친척(注: 방○○)을 만나는 자리에서 보위부 요원(注: 함경북도 도보위부 정치부장)을 만났어요. 그 사람은 나에게 ‘정화 동무, 대남훈련(注: 공작원 교육) 받은 적 있느냐’고 물었어요. 훈련받은 사실을 보안상 누설해선 안되지만 상대가 보위부 요원인지라 그냥 ‘그렇다’고 답했죠. 그랬더니 그는 ‘장군님의 특별배려를 많이 받았는데 이제 당을 위해 일해 보라. 동무 집안은 원래 훌륭하지 않냐’고 회유했어요. 그래서 (보위부 공작원으로) 뽑혔어요.”
 
  그는 “그때 보위부 요원들은 ‘정화 동무가 배짱이 좋은 것 같고 장사 수완도 있다’고 내게 말했었다”고 주장했다. 원씨는 “보위부 요원은 날 바로 한국에 직파(直派)할 수 없으니, 먼저 중국에 가 (공작원 교육을 위한) 경험을 쌓으라고 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上線 김교학의 사진 공개
 
단둥무역대표부 부대표로 원정화의 上線 역할을 했던 김교학.
  판결문에는 김교학이란 이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김교학은 단둥무역대표부 부대표로, 원씨가 한국에서 간첩활동을 할 때 그의 상선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2000년까지는 앞서 언급된 박철민이, 그 이후부터는 김교학이 담당했다고 한다. 판결문에는 김교학이란 이름이 132회나 등장한다. 김교학은, 원정화가 국내에서 활동할 당시 ▲군부대 촬영 ▲한국 정보기관 요원 접촉 ▲공작금 송금 등 대남공작과 관련된 각종 지령을 내렸다.
 
  원씨는 기자와 만나는 자리에 두툼한 앨범을 가지고 나왔다. 그 속에서 중년 남성의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사진 속의 인물이 김교학이라고 했다. 사진 속의 김교학은 김일성-김정일 초상화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원씨는 김에 대해, “북한 보위부에서 단둥무역대표부에 파견한 인물로 수완이 매우 좋아 윗선에서도 함부로 자르지 못할 정도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김교학으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았다”며 “이 사실은 경찰의 내사를 통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김교학은, 원씨가 우리 당국에 검거됐을 때 북한으로 소환됐지만 얼마 전부터 단둥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신동아》 4월호는 김교학과 원정화씨가 서로 모르는 사이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었다. 원씨는 이날 인터뷰에서 김교학의 사진을 제시하고, 김교학의 최근 거취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김교학의 지시로 간첩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법원 판결로 확정된 것이다.
 
  판결문에는 원씨가 김교학의 지시로 국내의 모 종북(從北)단체를 방문한 기록도 있다.
 
  <피고인은 2006년 여름 경 김교학으로부터 지시받은 비전향 장기수의 거처를 파악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에서 인터넷으로 ‘○○○’(注: 판결문엔 단체명이 나와 있으나 여기선 익명 처리)의 전화번호를 확인해 그곳으로 전화를 걸어 위치를 파악한 다음, 금정역에서 지하철을 이용하여 서울역까지 가서 ○○○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원씨가 방문한 단체는 대법원에 의해 이적(利敵)단체로 판시된 바 있다. 그는 “단체의 직원들이 내 신분을 확인하는 데에만 하루가 걸렸다. 결국 그 다음 날에야 단체 관계자를 만났고, 김교학의 지시대로 봉투를 건네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봉투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그 사무실엔 대학생들과 종교계 관계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원씨는, 포섭한 한국군 장교들로부터 받은 명함과 군부대 위치를 기록한 서류들을, 김교학이 보낸 사람에게 전해 주었다고 했다. 판결문에는 김교학이 원씨에게 “스포츠머리 하고 덩치 큰 사람이 올 것이다. 그 사람에게 줘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정화씨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받아 가기 위해 김교학이 보낸 사람들이 자주 바뀌었다고 했다. 그들이 한국인인지 북한 간첩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판결문에서 확인한 원정화의 범행사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정화씨의 간첩행위를 종합적으로 확인했다. 윤씨 납치를 비롯해 ▲6만 달러가 넘는 공작금 수수 ▲북한 공작원과 회합 ▲군사상 기밀 내지 국가기밀 탐지·수집 ▲대한민국 군인과 정보기관 요원 약취·유인 시도 등을 원씨의 주요 범행사실로 적시했다. 재판부는 “다른 간첩의 사례와 비교하여서도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위험성이 보다 크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원씨가 어린 딸과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는 내용의 전향서를 제출하는 등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 이를 참작해 형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