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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① 왕건

고구려 옛 땅을 찾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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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哲均
⊙ 63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 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주 라오스 대사·주 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후삼국을 통일한 후 북방정책을 추진한 고려 태조 왕건.
  1945년 한국은 일제 강점에서 해방되었지만 ‘2개의 한국’으로 분단되었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통일의 염원을 간직한 채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이러한 분단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 분단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시대였다. 신라의 김춘추(金春秋·604~661년)는 나당(羅唐) 연합군을 형성해서 통일신라를 이루었으나 고구려의 영토를 수복하지 못해 영토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두 번째 분단은 고려의 왕건(王建·877~943년)이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조선-삼국시대-통일신라-후삼국-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역사의 골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우리 역사에는 신라의 통일과정과 김춘추의 대당(對唐)외교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다. 그러나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대외정책과 그가 추진한 외교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왕건은 삼국통일이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한반도 남방에서의 삼국통일과 함께 북방 만주에서 옛 고구려를 부활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는 삼국통일을 위한 ‘남방정책’과 옛 고구려 영지 수복을 위한 ‘북방정책’을 연계하여 추진한 외교전략가였던 것이다.
 
  비록 북방의 유목세력인 거란의 출현으로 고구려 부활 구상은 실현하지 못했지만 왕건이 그 목표를 세우고 추진했다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분단과 통일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남북통일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아니라 고려 왕건의 통일전략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왕건의 외교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왕건 시대의 동북아 정세
 
  왕건이 활동하던 10세기 초 동아시아 지역은 전환기적 상황에 있었다. 중국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고도의 문화를 창달했던 당(唐)제국(618~907년)은 당시 지구상에 존재했던 비잔틴제국(379~1453년), 이슬람제국(571~1258년)과 더불어 동시대의 세계를 삼분했다. 당제국의 지배적 위치는 중국의 정치질서와 한자문화가 동아시아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고 동서교류에도 이바지함으로써 세계사적 의미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당의 몰락과 이로 인한 동아시아에서의 힘의 공백은 새로운 세력의 출현, 그리고 새로운 질서의 태동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장성 안에서는 이민족 절도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하고 이합집산하면서 5대10국(五代十國)의 난세를 겪게 된다. 이러한 격변기에 장성 밖에서 힘을 키워 북방 유목세계를 통일한 것은 거란(契丹)이었다. 거란은 만주의 요하 상류로 흘러 들어가는 시라무렌(Siramuren)의 비옥한 초원에 근거지를 두고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계 유목민족이다. 거란은 산재했던 부족을 8부의 대부족으로 조직화해 이들 간에 세습적인 수장 칸(Qan) 또는 카칸(Qaghan)을 선출하는 발전적 정치체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즈음 거란에서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907년 쿠데타를 통해 수장이 된 후 국명을 대거란국으로 정하고 주변의 유목세계를 통일해 나갔다. 또한 중원에 왕조를 건설하려는 야망을 갖고 장성 안으로 자주 쳐들어가 한족을 포로로 데려오고 당(唐)을 떠난 한족 관리들을 포용해 활용하면서 중원 진출의 기반을 닦았다. 특히 천연암 독점개발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했다. 그리고 916년 스스로 황제에 올라 북방의 돌궐 잔여 세력과 티베트 등을 차례로 정벌한 후 유목세계의 패자가 되었으며 926년에는 발해까지 정복해 거란을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부상시켰다.
 
 
  국호 ‘고려’가 의미하는 것
 
遼를 건국한 야율아보기.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부족을 통일한 후 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하던 그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왕건이 출현해 후삼국 통일을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당이 쇠잔하던 비슷한 시기에 신라 역시 국력이 기울었다. 신라의 무장이었던 견훤(甄萱·?~936년)은 옛 백제땅에 후백제를 세우고(900년) 신라의 왕자 출신 궁예(弓裔·?~918년)는 미륵보살을 자처하며 후고구려를 건국(901년)해 삼국이 경합하는 상황을 맞고 있었다. 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궁예의 부하 장수였던 왕건은 부하로부터 신뢰를 잃은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高麗)를 세웠다(918년).
 
  왕건은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면서 궁예가 당면하고 있었던 국내적 취약점은 물론 후백제와 신라의 정세, 그리고 당말 이후 주변 정세의 변화에 대해서도 경험과 안목을 쌓을 수 있었다. 그는 남으로 신라와 후백제, 북으로 발해, 거란과 대치하는 국내외적 도전을 안고 출발했는데, 이러한 시련과 도전을 극복하면서 왕건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비전을 키울 수 있었다.
 
  왕건이 즉위하면서 취한 첫 번째 조치는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이었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는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국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국호만으로 국가가 계승된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국가관계에 있어 그 이상의 분명한 의사표명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약칭으로 중국의 사적에도 고구려는 흔히 고려로 기록되어 왔다. 예를 들어 《신당서(新唐書)》에는 ‘발해의 대조영은 고려의 별종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임을 알 수 있다.
 
  고려를 국호로 선택한 의미를 대외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①후백제, 신라와의 경쟁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②고구려 옛 영토의 회복을 정당화하며 ③고구려의 옛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발해와의 통일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건의 삼국통일 추진을 ‘남방정책’이라고 한다면, 국호 고려는 바로 고려의 국가비전을 함축하여 대외적으로 천명한 ‘북방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발해와의 통일을 목표로 했는가의 문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고려의 국호 결정만으로도 고려가 그러한 의사를 대외적으로 표시한 것임은 분명하다. 왕건의 이러한 구상은 당제국이 건재해 있었다면 그 발상이 무모하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였다고 볼 수 있겠으나 당이 멸망하고 동아시아가 유목민족에 의해 유린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이를 무모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북방정책은 고려의 대외정책이자 왕건의 야심찬 비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위 첫해부터 북방정책 실천
 
  왕건은 즉위 첫해(918년)부터 자신의 구상을 바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남방의 통일을 서두르지 않고 우선 북방정책부터 추진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건은 “옛 도읍 평양이 황폐된 지 오래되어 터는 남아 있으나 가시나무가 우거지고 번인(蕃人)들이 그 사이에서 사냥하고 침략해 피해가 크니 마땅히 백성을 옮겨 살게 해 변방을 튼튼히 하라” 하고 황주, 풍주, 해주, 백주, 남주(연안)의 여러 고을 백성을 평양에 살게 해 대도호부를 만들고, 그의 당제(唐帝) 왕식렴(王式廉)과 광평시랑 열평(列評)을 보내어 지키게 했다.
 
  평양성이 완성되자 왕건은 고관의 자제와 여러 군현의 양가자제들도 서경(西京·평양)으로 이주시켰으며 왕건 자신도 자주 서경을 순행하고 성곽을 계속 쌓는 한편, 학교와 관부를 건설해 수도 개성과 격을 같이해 나갔다. 훗날 왕건은 “삼한을 평정하면 장차 서경에 천도하겠다”고도 했다. 이러한 왕건의 북방정책은 우선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수복하고 제2의 수도로 함으로써 고구려 계승과 발해와의 통일을 염두에 둔 첫 번째 구체적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왕건은 즉위한 918년부터 삼국통일을 이룬 936년 기간 중 12차례 서경을 순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북 방면(함경도)에 대해서는 포용전략으로 접근했다. 삭방의 골암성주(骨癌城主) 윤선(尹瑄)이 투항해 옴(918년)으로써 이 방면 진출에 진전을 보였다. 그는 궁예의 박해를 피해 골암성(안변부근)으로 가서 이 지역에 잡거하던 흑수(黑水) 등 이민족을 규합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오던 사람으로 동북 변경의 사정과 이민족에 관해 정통한 인물이었다. 또한 922년에는 명주의 장군 순식(順式)이 내부(內附)해 옴에 따라 왕건은 그를 크게 우대하고 국성인 왕(王)씨 성을 하사해 중용했다. 비슷한 시기에 흑수 말갈 추장도 170명을 데리고 귀화했다. 또한 동북 방면 평주 출신 장군 유금필(庾黔弼)은 3000명을 이끌고 골암에 진주해 그곳의 말갈 부족을 복속시키고 고려인 포로 3000명을 돌려보냈다.
 
  왕건은 이들 북방 출신 장군들의 도움을 받아 평양성을 포함해 북방의 여러 지역에 성을 쌓아 북방진출을 계속하면서 백성을 이주시켜 이 지역을 영토화해 나갔다. 이 중에서 안북부(安北府) 성책은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고려가 평양을 중심으로 청천강 이남 각지에 성책을 쌓아 군사지역화를 완료했음을 의미하며 서북 방면의 전초기지가 평양에서 청천강 유역인 안북부로 옮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려의 서북 경계가 신라의 서북계인 대동강으로부터 평양을 넘어 청천강으로 북상해 옛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수복한 것을 의미한다.
 
  왕건은 훈요10조(訓要十條)의 유훈을 통해서도 “서경은 수덕이 순조하여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요 대업만대의 땅이 되는 것이니 마땅히 4중(2,5,8,11월의 4개월)에 순주하여 머무르기를 백일이 넘도록 하여 안녕을 이룩하라”고 해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의 중요성과 북방진출이 후대에도 계속 이어지도록 했다.
 
 
 
남방의 통일전략

 
  개성 거상 출신의 왕건 집안은 부유했지만 일개 호족이었을 뿐이다. 왕건은 그의 야심찬 구상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국내 정치기반을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신라의 통치권 누수 현상으로 각 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호족들과의 친교를 통해 그의 세력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특히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왕건의 호족 출신 후비는 28명에 달했으며 2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상호 근친 통혼으로 왕실과 호족 간 이중 삼중의 혈연관계를 형성했다. 또한 호족들에게 지방행정을 관장하게 하는 사심관 제도(事審官制度), 그들의 자제를 우대하는 기인제도(其人制度)를 실시해 호족세력을 포용해 나갔다. 왕건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이합집산이 극심한 난세의 상황에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나갈 수 있었다.
 
  남방(南方)의 통일경쟁에 있어 왕건은 군사력이 강한 후백제와 전쟁을 계속할 경우 소모전의 양상으로 치닫게 될 것으로 보았고, 이러한 소모전이 결국 ‘승리해도 패배하는 결과’가 되리라는 것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판단에서 그는 기본적으로 후백제, 신라와의 평화공존을 견지했다. 국세가 기운 신라는 고려와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로 약속했다. 후백제와는 전략적 화의를 유지해 나갔다.
 
  고려-후백제 간에 유지되어 온 평화공존 관계는 견훤의 신라 침입(920년)으로 변화를 보였다. 신라는 고려에 원군을 요청했다. 왕건은 삼국의 균형이 깨지는 후백제의 신라 점령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신라는 고려 원군에 힘입어 구원되고 고려와 후백제는 조물성(曹物城) 강화협정에 합의했다. ①전투 중지와 상호 불가침 ②인질의 교환(견훤의 생질 진호와 왕건의 종제 왕신) ③왕건과 견훤은 상부(尙父)의 관계를 맺는다는 내용이다.
 
  이 협정은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고려에 다소 불리해 보인다. 왕건이 비록 열 살 연하라 하더라도 부자에 해당하는 상부 관계를 약속한 것은 굴욕적인 협약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건의 굴욕 감수 태도를 중폐비사(重幣卑辭)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중폐비사는 왕건이 주변 호족들에게 패물을 많이 주고 말을 낮추어 하는 회유 자세를 빗댄 말이다. 중국 한초 시대 유방이 연하의 항우를 형님으로 호칭한 일화가 있다.
 
 
  북방정책을 남방의 통일과 연계하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
  왜 왕건이 이러한 굴욕을 감수했는가에 대한 좀 더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첫째, 휴전은 소모전을 원치 않는 자신의 기본전략과 일치하고, 둘째, 그 시기에 거란의 발해공격이 있어 북방경계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당시 발해는 고려에 원조를 기대하고 있었고 거란은 후백제와 우호관계를 갖고 있었다. 북방의 긴박해지는 상황을 고려해 왕건으로서는 남방의 후백제와 평화 내지 정전관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중폐비사의 유화책을 이용한 것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가 후백제와 강화협정을 체결한 데 대해 신라의 경애왕은 “견훤은 음흉하고 거짓말을 자주 하므로 그와 강화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견훤에 대한 응징을 촉구하기도 했으나 왕건은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가 쌓여 스스로 넘어질 것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했다. 왕건은 견훤의 성격과 후백제 내부 사정을 파악하고 속전속결보다는 지구전을 통해 가급적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왕건의 저자세는 견훤을 안심시키기 위한 전략적 태도였다고 볼 수 있다.
 
  930년 경 신라의 북부 대부분은 고려에 투항한 상태였고 고려의 국세는 흥성하는 반면 후백제는 견훤의 폭정으로 민심이 이반되어 가고 있었다. 934년 후백제에서는 궁중반란이 일어나 견훤은 그의 아들 신검(神劍)에 의해 감금되었다. 견훤은 탈출해 고려에 투항했는데 왕건은 그를 후히 대우했다. 신라 경순왕은 934년 군신회의를 개최하고 고려에 항복을 결정했다. 이로써 신라는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왕건은 장녀 낙광공주를 경순왕과 결혼시키는 등 신라 왕손을 후대했다.
 
  왕건은 936년 9월 대군을 이끌고 신검(神劍)의 후백제군을 일리천(一利川·선산)에서 대파해 삼국을 통일했다. 고려의 유금필은 말갈 등 유목기병 9500명을 이끌고 이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는 왕건이 즉위 후부터 추진해 온 북방경영의 결과이다. 또한 발해 유민을 포용해 내부 정권기반 강화와 북방 변경수비에 활용하는 한편, 신라와는 싸우지 않고 승리해 통일 후의 후유증을 완화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북방정책의 성과를 활용해 남방의 삼국통일을 완성한 것이다.
 
 
 
남북방의 外的 요인 잘 관리

 
  여기서 고려의 통일과정에 영향을 미친 외부 요인에 관해서도 잠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로 돌아가 보자.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와 당의 협공에 의해 붕괴(668년)되었다. 고구려의 멸망은 국론분열에 원인이 없지 않으나 외부적 요인이 더 컸다. 고구려는 70여 년간 수당과 전쟁을 치르면서 중국 왕조와 계속 대립관계에 있었는데 멸망 직전에는 신라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신라와 고구려는 한강 하류의 땅을 둘러싸고 심각히 대립했고, 신라는 이곳을 빼앗기면 당에 입공할 항로를 잃어 조공의 길이 막히게 된다는 김춘추의 논지가 당에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고구려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당에 호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 결과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붕괴되었다. 고구려는 북방과 남방에 모두 적대적 관계를 두는 전략적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거란의 사신 사고(沙古), 마돌(痲咄) 등 35명이 후백제에 와서 예방하니 견훤은 최견(崔堅)으로 하여금 전송하도록 했는데 북상하다가 폭풍을 만나서 당나라(후당) 등주에 이르러 모두 처단되었다”고 했다. 이 사건(927년)은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고 있던 시점이며 또한 거란이 발해를 정복하는 기간으로 거란과 후백제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힘의 한계를 고려하여 적대적으로 대처하지 않았으며, 특히 거란의 발해 침공 시 군대 파견을 자제해 거란과 교전하지 않은 것이 바람직한 외교전략이었다고 보인다.
 
  고려도 고구려와 같이 남북 양방에서 거란과 후백제와 대치했으나 이러한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도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달리 외적 요인을 잘 관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은 이민족 정권에 의한 혼란기였고 군사대국으로 부상한 거란은 장성 내의 왕조와 대치하고 있어 아직 동아시아에는 유일 초강대국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건은 이러한 상황을 잘 판단하고 남방과 북방 간에 균형외교를 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왕건은 이러한 전략적 사고를 통해 대내외적 환경을 조화하고 관리해 나감으로써 남방의 통일과 북방진출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만부교 사건은 왕건의 실책?
 
  고려의 북방정책 대상인 발해를 정복한 거란과 고려의 관계를 살펴보자. 왕건이 즉위한 후 고려와 거란은 통상적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924년 거란의 발해 공격이 표면화하면서 북방의 거란과 남방의 후백제에 의해 양면으로 대치하게 되자 고려는 중국의 후당과 화합하여 거란을 견제하는 친중견란(親中牽丹)—장성내의 왕조인 후당을 중국으로 표기함—의 입장을 유지했다. 고려는 923년부터 후당에 사절을 파견했고 926년 발해가 멸망하자 932년에 후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며, 933년에는 후당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936년 후진이 후당을 대체하자 고려는 938년부터는 후진의 연호를 사용했다.
 
  고려 건국과 삼국통일 이후에도 잠잠했던 고려와 거란 관계는 942년 일대 변화를 맞게 된다. 《고려사》에 의하면 <거란이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보내왔는데 왕(태조 왕건)이 이르기를 “거란은 일찍이 발해와 화친하다가 갑자기 의심하여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것은 매우 무도한 행위로 (거란과) 화친을 맺는다 해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여 마침내 교빙을 거절하고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시키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 매어 모두 굶겨 죽게 했다>는 것이다. 소위 ‘만부교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거란과의 국교단절뿐만 아니라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이 조치는 왕건의 성품과 그간의 정책들로 미루어 볼 때 매우 이례적이고 지나치게 강경한 대응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리고 왕건은 그 이유를 10년 전에 멸망한 발해와 관련짓고 있는데, 이 사유만으로 동아시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거란과 일전도 불사한다는 무모한 조치를 취한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만부교 사건에 대해서는 왕건의 토번인관(吐藩人觀) 사상에 따른 거란 배척의 결과라든가, 거란의 힘을 파악하지 못하고 저지른 외교적 실수라든가, 또는 통일 전 거란-후백제 우호관계에 대한 응징 차원의 조치라든가 하는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훈요십조에서도 “거란은 우매한 나라니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라”고 해서 이 사건이 왕건의 배번 인식에 의한 감정적 대응이고 외교적 실패였다고 평가되어 온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로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익(李瀷)은 “거란이 발해를 배신한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 원수같이 관계를 끊었는가. 이제 변방에 틈이 깊어져 그 재앙이 언덕에서 타는 불을 보고도 끌 수 없게 되어 나라의 존망이 실낱같이 위태롭게 되었으니 그 원인은 모두 고려 태조가 강대한 이웃 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그르친 때문이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만으로 초강대국이 된 거란과 국운을 건 결전을 결정했다는 것은 납득할 만한 설명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고려-거란 관계와 당시의 주변정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란은 발해 정복 후 곧바로 한반도로 남하할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중국 진출에 관심을 두고 후당(後唐)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란은 하동절도사 석경당을 활용해 후당을 전복(936년)시키고 후진(後晋)을 세운 후 장성 내 요충지인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할양받는 데 성공했으며, 같은 해에 고려는 삼국통일을 완성(936년)할 수 있었다. 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거란과 중국 왕조 사이에서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거란의 지원에 의해 들어선 석경당의 후진은 연운을 거란에 할양한 이유로 인해 진통을 겪고 있었다. 수도 대량(개봉)으로부터 화북평야로 이어지는 장성 안의 연운에 거란의 군대와 지방정부가 들어앉아 있는 한 후진은 정치적·안보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후진의 내부적 진통은 거란의 위협에 직면한 고려와 전략적 제휴를 위한 동기가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측도 친중견란의 입장에서 후당에 이어 후진의 연호를 사용했다(938년). 그리고 939년부터는 후진의 사절도 고려에 내왕하기 시작했다. 즉 고려와 후진관계가 긴밀해진 이 시점에서 만부교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왕건과 호승 말라의 비밀협상
 
  이러한 주변 상황을 볼 때 만부교 사건이 왕건의 토번인관에 의한 것이라든지 거란의 실체를 예견치 못한 외교적 실수라든지 하는 이유에 의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왕건은 흑수 말갈과 발해 유민을 포용해 북방의 군사대비와 삼국통일에 활용했던 냉철한 전략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더구나 거란의 발해 공격 시에도 파병하지 않고 거란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삼국통일을 완성한 왕건이 특별한 목적 없이 거란보다 더 야만적인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면 어떤 이유에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왕건은 만부교 사건이라는 초강수 조치를 취했던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만부교 사건과는 무관하게 다루어져 온 후진의 호승(胡僧) 말라(襪羅)가 고려를 왕래해 왕건과 협의했던 문제에서 연결고리를 찾아보자.
 
  《속자치통감》에 의하면 <후진 고조(936~943년) 기간에 서역승(西域僧) 말라가 후진에서 고려로 갔는데 왕건이 연전에 멸망한 발해는 친척의 나라이므로 그 원한을 풀어 주고자 하니 돌아가 고조(석경당)에게 양국의 거란 협공을 설득시켜 주도록 요청하므로 말라가 돌아가 그 뜻을 전했으나 고조가 듣지 않았다. 출제(出帝·石重貴)에 이르러 거란과 싸우게 되자 말라의 권유에 따라 곽인우(郭仁遇)를 고려에 보내 고려로 하여금 거란을 쳐서 견제하도록 하였으나, 마침 왕건은 죽고 왕무(王武·혜종)는 옛 대신들과 뜻이 맞지 않아 어수선했고 그 일이 수습된 후에도 군비는 갖추어져 있지 않고 전의도 불충분해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와 후진이 군사동맹을 형성해 거란을 공격하자는 내용이 담긴 이 중요한 기사는 한국의 사료에는 없고 중국의 다른 사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내용으로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또한 거란에 사대의 예를 갖추고 연운 16주를 할양하는 등 거란의 보호국이나 다름없는 후진에게 고려가 거란 협공을 제의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이 기사는 허구이거나 조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나 당시의 고려와 후진의 관계, 후진 내부의 반거란 세력 동향, 그리고 태조 21년(938년)에 고려를 방문한 인도 홍범 대사가 말라와 동일인일 가능성을 추정해 이 기사를 사실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용범, 역사학보, 1977년).
 
  먼저 《자치통감》 내용을 검토해 보자. 첫째, 말라의 고려 방문이 이루어진 936~943년 기간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와 후진이 우호관계를 유지했고, 이러한 분위기하에서 말라가 고려를 내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몇 번을 왕래했는지는 불확실하나 문맥으로 보아 7년의 기간 중에 수차례 왕래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둘째, 말라가 고려를 내왕하면서 왕건과 서로 신뢰하는 관계가 되었고 주요 사안에 관해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으며 또한 말라는 주요 협의내용을 후진 석경당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아 그는 양국 수뇌의 교량역할을 수행한 밀사의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왕건과 말라는 이러한 의견교환 과정에서 주변 안보상황과 상호 내부사정에 대해서도 협의하고, 특히 왕건은 고려의 입장을 말라에게 설명하고 말라는 후진 내부의 반거란 움직임 등에 대해서 설명했을 것이다. 왕건은 거란과 관련해 고려와 후진의 이해가 일치됨에 따라 후진에 거란 협공을 제의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넷째, 말라가 이 왕건의 제의를 전달한 데 대해 석경당이 동의하지 않은 것은 우선 석경당 자신이 즉위하는데 있어 신세를 진 거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고려의 군사력과 결전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말라의 말에 의존해 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거란의 군사력을 잘 알고 있는 석경당으로서 과연 고려와 동맹하여 거란을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다섯째, 석경당이 죽고 942년 석중귀가 즉위한 후 말라의 권유에 따라 곽인우가 고려에 내왕한 것도 사리에 부합한다. 석중귀는 반거란 인물로서 이미 즉위 이전에 연운16주의 회수를 주장한 바 있어 거란과의 일전을 염두에 두고 있는 만큼 고려와의 군사협력에도 관심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중귀도 석경당과 같이 고려의 전의와 군사력에 의문이 있었을 것이므로 곽인우를 고려에 보내 사정을 알아보도록 했을 것이다. 이때 고려는 ‘왕규(王規)의 난’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고 이러한 상황하에서 그의 눈에 비친 고려의 전의는 불충분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이 기사의 내용은 사실과 다름이 없다 하겠다.
 
  말라의 고려 왕래와 왕건의 군사동맹 제의에 관한 이 《자치통감》의 내용은 당시 정황과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사실과 부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고려 측 사료에 이 내용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구태여 추정해 본다면 이 사건은 태조 왕건이 직접 수행한 고도의 비밀협상으로서 결과적으로 군사동맹이 성사되지 않은 내용을 문서로써 기록에 남기지 않았거나 후대에 거란 성종의 고려 침입 등의 전쟁기간에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연중제란(聯中制丹)
 
  만부교 사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외국의 사신을 유배시킨 것은 국교단절과 함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극단적 조치였다. 또한 사람의 왕래가 많은 다리 아래에서 낙타를 굶겨 죽인 것은 상당 기간 동안 공개처형을 실시한 것인데 이것은 의도적으로 누구에게인가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에 취한 방법일 것이다. 밖으로 알릴 필요가 없다면 구태여 다리 아래에서 낙타를 굶겨 죽일 필요가 있는지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구에게 알리려 한 것인가. 그 대상은 후진(後晋)일 가능성이 있다.
 
  만부교 사건(942년 10월)이 있었던 해에 후진에서는 석경당이 사망하고 석중귀가 즉위했다. 석중귀는 반거란 인물로 거란에 대해 칭신(稱臣)의 예를 거부함으로써 그의 선왕인 석경당이 거란과 맺은 협약을 사실상 파기했다. 이는 거란과의 군사적 대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거란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는 후진은 고려와의 군사동맹이 필요하지만 고려의 의지와 군사력에 대한 구체적 정보가 필요했을 것이다. 고려를 내왕하는 말라는 이 결정적 증거가 있다면 석중귀를 설득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만부교 사건은 후진으로 하여금 고려의 군사행동 의지를 확인시킬 수 있는 명백한 입장표시임이 분명하다.
 
  왕건이 후진과 대거란 군사협공을 성사시키기 위해 만부교 사건을 결행했다고 추정해 볼 경우 만부교 사건과 《자치통감》의 내용은 그 뜻이 명백해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만부교 사건 기간 중에 말라가 고려를 방문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만부교 사건을 직접 목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고려의 ‘친중견란(親中牽丹)’ 입장은 만부교 사건을 통해 후진과 동맹해 거란을 제압한다는 ‘연중제란(聯中制丹)’의 입장으로 한층 적극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연중제란의 확고한 대외적 의사표시가 만부교 사건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왕건이 국운을 걸고 후진과 군사동맹해서 거란을 협공하려 한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자치통감》의 내용에서 왕건은 ‘친척국가 발해의 원한을 풀어 주려고’ 군사동맹을 제의했다. 이 뜻은 혈연적으로 친척국가인 발해의 원한을 풀어 주기 위한 감상적 의미보다는 군사협공의 결과로서 거란을 물리치고 발해의 영토를 수복해 고구려 계승의 뜻을 완성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왕건은 그의 생전에 고구려 계승과 발해 통일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후진이 반거란 입장으로 선회하자 만부교 사건을 결행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왕건의 중국에 경사(傾斜)된 태도를 흔히 모화배번의 사고와 연계해 비판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최승로(崔承老)조차도 그의 시무(時務) 28조(제5항)에서 “태조는 큰 나라 섬기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음에도 몇 년에 한번씩 사신을 보냈는데 지금은 사신뿐 아니라 무역으로 보내는 사신도 많으니 중국에서 천하게 여길 것이 염려됩니다”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왕건이 중국 왕조에 대해 빈번한 사절파견과 조공정책을 서두른 것은 북방정책을 위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다. 왕건의 이러한 외교전략적 사고가 삼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원대한 구상을 가능하게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갖고 있는 고려
 
서희는 요나라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강동6주를 개척했다.
  신라의 통일은 역사적으로 ‘반쪽 통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에 거병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고구려 영토를 상실하여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통일은 고구려, 백제 멸망 후 당의 지배에 항거해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이 신라와 연합해 당을 백제에서 몰아내고 이룩한 통일로서 영토적 의미보다는 민족적 통일의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고려의 통일은 신라의 말기적 현상으로 분단된 삼국의 통일에 그 의미가 국한되지 않고 우리 역사의 중심 골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통일과업이었다. 국호를 고려로 함으로써 고구려 승계를 국내외에 분명히 했고 삼국통일을 성취함으로써 고려는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또한 고려가 발해와의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 영토회복을 추진한 것은 발해가 우리 역사상의 왕조임을 입증해 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 민족의 영토적 통일과 깊은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러한 왕건의 발해 통일 구상이 《고려사》 등 사료에 명백히 보이지 않고 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고 고려는 훗날 거란과 사대의 관계를 맺는 등 상황이 변화하면서 이러한 구상이 고려 측 사료에 전수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왕건은 발해와의 민족적·영토적 통일을 추진하였으나 거란이라는 거대한 유목 기마세력의 등장으로 인해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왕건이 발해와의 통일을 추진한 역사적 사실은 발해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고려의 삼국통일과 북방정책이 불과 왕건의 18년 재위기간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놀라운 지도자적 능력과 외교적 혜안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은 이후 서희를 통해 거란으로부터 옛 고구려 영토인 강동 6주를 영토화함으로써 그 역사적 정당성이 인정되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왕건의 고려건국과 삼국통일 그리고 북방정책은 왕건의 시대에만 머물지 않고 시공을 초월해 우리 역사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고구려의 옛 땅인 평안북도를 수복할 수 있었던 것도 고려가 신라를 계승하지 않고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족과 그 민족의 영토는 역사의 추이에 따라 변천해 왔다. 민족은 소멸하지 않았으나 영토가 소멸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영토가 확장해 민족이 거대해지는 경우도 있다. 동아시아에 있어서 그 후자의 대표적 경우는 오늘날의 중국이라 할 수 있으며, 전자의 대표적 경우는 북방 유목민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한민족은 동아시아의 민족과 영토가 부침하는 지난 2000년의 역사 과정에서 그 영토는 축소되었으나 한반도 안에서 단일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고구려 역사 논쟁을 하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가 오늘날 양국관계에도 영향을 주고 미래관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의 주장을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이고위금(以古爲今)이라고 비판한다. 만약 고려가 없었다면 또는 고려의 국호가 달랐다면, 우리가 고구려를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구려를 우리의 역사로 주장하더라도 이해 당사국이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고려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에도 살아있는 역사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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