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연재

새로 쓰는 오효진의 인간탐험 ① 鄭周永

한국의 전설 鄭周永은 살아 있다

  • 글 : 오효진 前 SBS 보도국장  
  • 사진 : 이오봉 월간조선 객원사진기자  ob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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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오효진의 인간탐험’은 《월간조선》 1985년 8월호부터 1992년 6월호까지 7년 가까이 연재됐다. 그사이 우리나라 지도자급 인사 50여 명이 이 칼럼에서 한국을 일으킨 지혜와 역량을 털어놨다. 이분들 가운데 유명을 달리한 분도 많고, 이제 전설이나 신화가 된 분도 적지 않다. 이번 호부터, 우뚝 솟은 인물들이 밝힌 행적과 생각을 돌이켜보고 그 이후 그분들의 역정을 훑어보며, 그들의 언행을 새롭게 정리해서 ‘새롭게 쓰는 오효진의 인간탐험’을 연재한다. 때로는 전설이 된 인물을 다시 만나기도 할 것이고, 전혀 새로운 전설과 새로 만나 새로운 탐험도 할 것이다.

吳效珍
⊙ 69세. 서울대 국문과,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충북대 대학원 문학박사.
⊙ MBC, 《월간조선》, 《조선일보》, SBS 기자, 부장, 보도국장, 이사 역임.
⊙ 정부대변인 겸 공보실장, 청원군수 역임.
⊙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잉어와 꼽추〉 당선. 소설집 《인간사육》 《장씨녀전》,
    소설 〈고구려여신 불나비〉 〈사기열전〉 〈생쥐와 고양이〉 《오효진의 인간탐험》 전 4권 등
    저서 20여 권.
정주영(鄭周永, 1915~2001) 현대그룹 전(前) 명예회장(이하 회장으로 직함 통일)의 출세가도는 가출(家出)에서부터 시작됐다. 정 회장은 지금은 북한 지역인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궁벽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정 회장의 아호를 고향에서 따와 아산(峨山)이라고 하지 않았다면, 이름이 알려질 리 없었던 막다른 마을이었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정주영 회장은 밥이라도 실컷 먹는 도시로 탈출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정 회장은 70세였던 1985년에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밤낮 일만 하는데도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겁니다. 아침에 늦게 조반을 먹고 점심을 거르고 저녁은 콩죽을 먹고 자는 거예요. 열심히 일을 해도 죽밖에 못 먹으니까, 우선 어디 밥을 실컷 먹는 데 가서 살아야겠다 이거죠.”
 
  지금까지는 이렇게 정 회장이 단지 배가 고파서 끈질기게 고향을 떠나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정주영은 아버지의 강권으로 첫 번째 줄행랑을 놓았던 만 16세(1931년) 그 이듬해(1932년)인 17세 때 동네 처녀와 결혼했다. 그리고 1933년 전후에 맏아들 몽필씨를 낳았다. 그러나 정 회장은 그 첫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 회장이 첫사랑의 연정을 품었던 아가씨는 따로 있었다. 송전소학교 동급생으로 졸업 후에 원산 누씨고녀로 진학한 이웃마을 아가씨였다. 아마도 좋아하던 아가씨와 결혼하지 못해서 첫 부인과 사이가 멀어졌던 게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네 번째로 탈출했을 때인 1933년 봄에는 이미 결혼한 처지였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자세히 밝히겠다.
 
  어쨌든 1931년 16세에 처음 가출이 시작된 이후, 고향을 떠나려는 시도가 네 번이나 이어졌다.
 
  어린 정주영은 시장에 나무를 팔러 다니면서 탈출자금을 마련했다.
 
  “겨울에 농사가 끝나면 고저장터로 나무를 팔러 가요. 고저가 송전 밑에 있는데 한 20리 되죠. 소에다 나무를 잔뜩 싣고 가는 거예요. 거기 가서 나무를 잘 팔면 한 50전, 그렇잖으면 45전 받죠. 겨울에 해가 짧다고 아버지가 점심값을 어디 주나요. 45전이나 50전 중에 1전만 쓰라고 해요. 그걸로 그때 눈깔사탕 두 알을 사지요. 그걸 입에 넣고 빨면 빨리 녹으니까, 그냥 입에 넣고만 집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침이 나오면 넘기기만 하고요.”
 
  그런 가운데 돈이 모였다.
 
  “나무 팔고서는 48전 받았으면 45전 받았다고 하고 떼고요, 또 계란 팔고서도 좀 떼고. 그해 겨울은 신이 나서 아버지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나무 팔러 다니고….”(성공요인1: 주도면밀한 준비)
 
  정주영은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돈을 모아 친구들과 줄행랑을 놓았지만 두 번을 연달아 실패했다. 첫 번째 16세 때는 친구와 청진으로 가 철도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찾아오는 바람에 꼼짝없이 잡혀서 집으로 돌아왔다.
 
  정주영은 집에 잡혀와서도 가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다시 친구 두 명과 줄행랑을 모의했다. 이듬해 봄에 감행한 가출은 서울을 목표로 정했지만 중간에 돈이 떨어져 금강산 근처 할아버지댁에 들렀다가 작은아버지의 설득으로 귀가하고 말았다.
 
  그러나 1932년 만 17세 때 감행한 가출에선 극적인 반전(反轉)이 일어난다.
 
  “신문에 조그맣게 난 걸 보니까 평양과 서울에 실천부기학원이 있는데, 6개월만 속성으로 배우면 취직을 알선해 준다 이러잖아요. 그래서 거기다 편지를 해서 안내서를 받았지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한테 당하려고 소 판 돈을 갖다가 궤짝 밑에 넣어놨잖아요. 또 다섯째 작은아버지가 송아지 판 걸 큰형 집에다 맡겼죠. 이놈을 몽땅 훔쳐가지고 서울 부기학원에서 온 안내서를 들고 내 튄 거죠. … 그런데 어럽쇼, 한 달쯤 지났는데 아버지가 나타난 게 아니에요!”
 
  부기학원에서 온 봉투엔 서울학원과 평양학원 안내서가 함께 들어 있었는데 정주영이 서울 것만 들고 오고 평양 것은 그냥 집에 두고 왔던 것이다. 아버지는 평양을 돌아서 같은 이름의 서울 부기학원에 찾아온 것이다.
 
  듣는 나도 걱정이 됐다.
 
  —매 맞지 않았습니까?
 
  “글쎄 나도 큰돈을 훔쳐가지고 왔으니까 되게 맞을 줄 알았는데 하나도 야단도 안 하고, 그저 가자 이거야. 나는 죽어도 못 간다 이러고.”
 
 
  두 집안의 早婚이 현대 일으키는 모티브 돼
 
정주영 회장이 고향에서 월남한 소학교 친구들과 함께 담소하고 있다.(1985. 7.)
  아버지는 야단 대신 사정을 했다.
 
  “아버지는 평생 나한테 칭찬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뭘 못하면 야단이나 치지. 말할 수가 없이 엄했어요. …그런 양반이 나한테 그냥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해서 사정이야. 너는 맏아들이니까 말이야, 농사를 지어야 될 거 아니냐, 네가 이러면 그 수많은 동생 어떡할 거냐,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은데 일을 하면 얼마나 하겠느냐, 네가 열심으로 일해서 논 사고 땅 사고 집 지어 동생들 세간내야 할 거 아니냐, 이러면서 통 사정이야. 대한문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두어 시간 사정을 하는데도 내가 죽어도 못 가겠다고 했더니, 하다 하다 안 되니까, 글쎄 아버지가 우시더라고.”
 
  이 대목에서 정주영 회장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결국 정주영은 아버지의 눈물에 넘어가 그날 밤차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안 됐던지 창경원에 가서 동물 구경을 하고 가자고 했다.
 
  “그때 전차 값이 5전인가 했는데 그걸 아끼자고 걸어서 갔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 ‘대인 10전, 소인 5전’이라고 써 붙여져 있잖아요. 아버지가 그걸 보시더니, ‘응 돈을 내게 돼 있구먼’ 해요. 공짠 줄 알고 구경을 온 건데 말이야. 그걸 보고 아버지는 ‘나는 시골서 호랭이 많이 봤으니까 너나 보고 와라’ 이래요. 그래서 나도 안 보겠다고 했더니 할 수 없는지 표 두 장을 사더라고요.”
 
  그러나 서울에서 아버지와 호랑이를 함께 보고 고향에 돌아온 정주영은 또 탈출을 꿈꾸었다. 이번엔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이웃 마을에 사는 소학교 친구 오인보의 돈으로 함께 탈출할 수 있었다. 오인보는 어려서 결혼을 했는데 부인이 무서워서 살 수 없다고 했다.
 
  정주영도 같은 처지였다. 먼저 정주영이 도망갈 의사가 없느냐고 오인보를 떠보았다. 그랬더니 오인보가 척 달라붙었다. 결행 자금은 삼백석지기 부자의 아들 오인보가 대기로 했다.
 
  여기서 부인 변중석(邊仲錫, 1921~ 2007) 여사가 생전(1985. 8. 21. 청운동 자택)에 한 말을 듣는다.
 
  “회장님이 (고향에서 첫 부인하고) 결혼하고 살다가 서울로 달아나셨대요. 그러니까 아기(몽필)를 하나 낳았는데 밤낮 이혼시켜 달라고 집에다 편지를 하더래요. 그 동네 처년가 봐요. 회장님이 막 그러니까 부모들이 이혼을 시켰는데 내가 시집을 오니까 그 애가 다섯 살(만 네 살. 이하 한 살 뺌)이에요. 우리 여섯째 시동생(정상영)은 세 살이고. … 결혼하고서 저녁에 죽 앉아 있는데, 시할머니가 몽필이에게 ‘엄마라고 그래라, 엄마라고 그래라’ 해요. 그래 난 시집가면 애들이 날 보고 다 엄마라고 하는 줄 알았어요. 열일곱 살인데 뭐 알아요? 아무것도 몰랐죠. 우리 시할머니가 얘기해 주데요. (아기를) 잘 가르치라고. 우리 회장님에 대해서 (결혼한) 얘길 해줘요.”
 
  변 여사도 속을 만했다.
 
  “몽필이도 우리 회장님을 보고 형님이라고 그래요. 아버지라고 않고. 왜 그러냐고 시할머니한테 물으니까, 우리 시동생들이 형님 형님 하니까, 삼촌들 하는 대로 형님이라고 하는 거래요. 그래서 더 몰랐죠.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렇대요.”
 
  이렇게 보면 정주영 회장이 그렇게 끈질기게 탈출을 시도한 것은 꼭 가난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네 번째는 조혼한 첫 부인과의 불화도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오인보씨와 정 회장의 조혼이 세계의 기업 현대를 일으키는 한 모티브가 된 셈이다. 두 쌍의 부부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면 오늘날의 현대는 없었을 수도 있다.
 
  이혼한 첫 부인에겐 정 회장의 아버지가 섭섭지 않게 해줘서 보냈다고 한다. 그 부인은 변 여사가 시집오기 전에 재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 회장은 그게 늘 마음에 걸려 변 여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역시 변 여사의 말이다.
 
  “지금 회장님이 그래요. 이북이 안 막히고 몽필이 어머니 살았으면 오라고 그래서 논밭을 사줘가지고 농사지으라고 했으면 좋겠다고요.”
 
  정 회장의 이 바람은 후에 이루어졌다. 정 회장은 1989년 1월 두 번째로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했을 때 아산리 고향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북한이 그 겨울 눈이 수북이 쌓인 가운데 아산리로 가는 길을 닦아놨더라고 한다. 새로 닦인 길로 정 회장은 자동차를 타고 가서 할아버지(정상학)의 묘소에 성묘도 하고, 운명하기 직전의 첫 부인을 만나 위로하고 돌아왔다. 나는 그 말을 정 회장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연보
 
정주영(1915.11.25~2001.3.21. 향년 85세)

  1930(15세) 강원도 통천 송전소학교 졸업
  1931(16세)~1932(17세) 동네처녀와 첫 번째 결혼
  1932(17세) 소 판 돈을 가지고 세 번째 가출
  1933(18세) 이 전후에 장남 출생. 네 번째 가출 성공
  1934(19세) 서울 복흥상회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
  1937(22세) 1월 8일 변중석(邊仲錫) 여사와 고향에서 결혼
  1938(23세) 복흥상회 주인이 됨. 경일상회라 개명
  1940(25세)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서비스 인수
  1946(31세)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1947(32세) 5월 현대토건사 설립
  1950(35세) 1월 위 두 회사를 합병, 현대건설주식회사로 개편
  1967(52세) 12월 현대자동차주식회사 설립
  1969(54세) 12월 현대시멘트주식회사 설립
  1971(56세) 3월 현대그룹 회장 취임
  1973(58세) 12월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 설립
  1975(60세) 4월 현대미포조선주식회사 설립
  1977(62세)~1987(72세) 전경련 13대 회장 역임
  1981(66세) 3월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피선
  1981(66세) 11월 올림픽 유치 확정
  1982(67세)~1984(69세) 대한체육회장
  1987(72세) 2월 현대그룹 명예회장
  1989(74세) 1월 두 차례 북한 방문. 두 번째는 아산리 고향방문
  1992(77세) 2월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피선
                    3월 제14대 국회의원(비례대표) 당선
                    12월 제14대 대통령 출마. 낙선
  1993(78세) 통일국민당 탈당. 국회의원 사퇴
  1998(83세) 6월 1차로 소 500마리와 함께 북한방문
                    10월 2차로 소 501마리와 함께 북한방문
                    11월 금강산 관광단지 개장식에 참석
  2001(85세) 3월21일 병으로 자택에서 요양하다 아산병원에서 작고
 
  유엔묘지에 보리 덮어 큰돈을 벌다
 
  정 회장은 6·25가 터지자 둘째 동생(정인영)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했다. 형제는 난리 중에도 변화의 흐름을 타고 큰돈을 벌었다. 둘째 동생이 미군 공병대 통역으로 들어가서 공사를 쉽게 따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정 회장은 말한다.
 
  “부산에 가서 보니까 돈이 어디에도 없어요. 미군부대에밖에 없어요. 그래 거기로 간 거죠. … 우리 둘째 동생이 《동아일보》 외신부에 다녔어요. 그니까 영어를 좀 아니까 미국대사를 찾아가서 취직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미국대사가 그러잖아도 통역이 필요한데 잘됐다고 추천을 해준 데가 미군공병단이에요. 그래 미군들 들어와서 하룻밤 자고 가는 천막을 치는데 그때 참 많은 일을 했지요.”
 
  그때 공사를 몰아준 사람이 매카리스트 미군 중위였다. 정 회장은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그 사람이 중령으로 귀국한 뒤에도 현대의 미국 휴스턴 지점의 직원으로 8년간 고용해서 신세를 갚았다.
 
  그런가 하면 돈을 대주며 함께 고향을 탈출한 오인보씨는, 자신은 물론이고 그 아들까지, 대를 이어서 현대에서 정 회장과 한솥밥을 먹고살았다.(성공요인2: 의리)
 
  부산 피란 시절엔 이런 일도 있었다.
 
  “수복한 후에 이른 봄인데, 미군이 별안간 부르더니 유엔군 가매장한 묘지를 어떻게든 퍼렇게 해라 이거야. 돈은 많이 줄 테니. 유엔군 관계자들이 시찰을 온다고. 그래서 뭘 심었는고 하니 보리를 파서 심었어요. 낙동강 연안 보리밭에 있는 보리를 떠다 심었어요. 그러니까 금방 시퍼렇게 될 수밖에. 그러니까 아 좋다고 말이죠. 그때 돈 많이 받았지요.”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습니까?
 
  “아 퍼런 게 보이는데 아이디어는 무슨 아이디어요. 퍼런 거 파다 심은 거지. 그 이른 봄에 퍼런 게 뭐 있어요, 보리밖에 없지!”
 
  정 회장의 결론은 이렇다.
 
  “어쨌든 변화에 적응하는 일을 찾아내면 돼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타격을 받고 변화에 적응하는 일을 찾아내는 사람은 성공하는 거죠.”(성공요인3: 변화에 적응하는 힘)
 
  정 회장은 한국동란을 통해 참 많은 돈을 벌었다. 그때 있었던 일을 부인 변 여사를 통해 듣는다.
 
  “회장님이 부산 가서 건축 일을 했는데, 수복된 뒤에 돌아와서 날 구석으로 오라고 그러더라고요. 가니까 회장님이 ‘몽구 어멈, 나 돈 많이 벌어왔어’ 그래. 이만한 가방을 탁 여는데, 새 돈을 그냥 착착 넣었는데, 그게 2천만환이었나 봐, 아유!”
 
  변 여사는 계속한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을 갔는데, 그분(매카리스트 중위)이 일거리를 또 줬는데, 며칠만 있으면 새 돈이 몇 궤짝씩 들어와요. 돈인 줄도 몰랐어. 옷장에다 넣어놨는데 열어놔도 누가 훔쳐가지도 않아요. 그게 첨엔 뭔지도 몰랐어요. 저게 뭐인가 그랬더니 우리 여섯째 시동생(정상영)이, ‘그거 돈인데 한 10만환만 꺼내주세요’ 그래. 꺼내줬더니, 우리 몽필이가 또 10만환을 훔쳐가지고 가네요. 회장님이 나중에 은행에 예금을 하려니까 20만환이 없어졌네요! 아유 벼락이 났어요! 사람 다 죽이는 줄 알았어! 쓰지도 못하고 다 도로 가지고 왔지.”
 
 
  쌀가게 주인 돼서 돈 벌고 결혼하고
 
1937년 1월 8일 결혼한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과 그의 아내 변중석씨.
  네 번째 가출에서 드디어 성공했다. 정주영은 오인보에게 궁색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고 인천에 가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다가, 서울로 돌아와서 쌀집 종업원으로 정착했다. 여기에도 정주영의 성공비결이 응축돼 있다.(성공요인4: 끈질긴 도전)
 
  서울 복흥상회(福興商會)의 쌀 배달꾼으로 취직할 때 주인이, 자전거는 잘 타느냐고 물었다. 그때 정주영은 겨우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잘 탄다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주인은 그를 힐끗 보고 말했다.
 
  “응, 가랑이는 길구먼.”
 
  취직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비가 오는데 주인이 쌀 한 가마와 팥 한 말을 자기 집에 배달하고 오라고 했다. 결국 여러 번 넘어졌다. 자전거의 핸들이 휘었고 쌀가마도 흙으로 뒤범벅이 됐다. 정주영은 그날 밤부터 사흘 동안 한두 시간만 잠을 자고 밤을 새우다시피 자전거에 쌀을 싣고 타는 연습을 했다. 그 결과 그는 선수가 돼서 쌀 두 가마씩을 싣고 서울 장안을 누빌 수 있게 됐다.(성공요인5: 근면, 성실, 노력)
 
  결국 정주영은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해서 주인한테 신용을 착실하게 얻었다. 봉급을 1년간 모으니 쌀이 20가마나 됐다. 아버지께 편지를 써 소식을 알렸다. 아버지는 1년에 쌀 20가마를 벌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네가 출세를 해도 크게 한 모양이구나”하고 기쁨의 답장을 보냈다.
 
  마침내 스물세 살의 나이에, 그리고 고향을 떠난 지 5년 만에, 정주영은, 주인으로부터 바람둥이 아들 대신, 쌀가게를 물려받았다. 상호도 경일상회로 바꿨다. 그때까진 기껏 가정집에 쌀 배달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정주영은 가게를 인수하면서, 배화여고, 서울여상 같은 대량 소비처로 거래를 넓혔다. 그러나 호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2년 후 일제시대 전시체제의 일환으로 쌀이 배급제로 바뀌게 되면서 정주영은 가게를 닫았다. 하지만 그동안 번 돈으로 고향에 논 2천여 평을 사놓았다.
 
  정주영 군이 변중석 양과 결혼한 것은 1937년 1월이었다.
 
  변 여사의 말을 듣는다.
 
  “열여섯 살(만 15세) 때 동짓달인데, 밤에 동네에 가서 삼을 삼아가지고 오니까 어머니가 그래요. ‘너 서울서 선보러 왔다.’ 난 그때 뭐가 뭔지 알지를 못했어요. 깜깜한 밤인데 방에 들어가니까 등잔불이 켜져 있었어요. 그냥 구석에 서 있었더니 앞으로 못 보고 뒤로 봤대요.”
 
  —무슨 얘기가 오간 건 없고요?
 
  “예, 없어요. 우리 큰오빠가 회장님하고 한 학교를 다녀서 서로 잘 아나 봐요. 큰오빠가 ‘잴 주영이한테 안 주면 난 모르니 어머니 맘대루 하시우’ 이랬나 봐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겁이 나서, ‘에이 네 맘대로 해라’ 이래서 그날 밤으로 말을 떼었어요.”
 
  —그날로 얘기가 끝났단 말입니까?
 
  “예. 그렇게 되니까 회장님이 좋아서 동네에서 메밀국수를 사오고 야단났어요. 회장님이 동네사람들 대접을 한 거죠. 선보러 와가지고. … 하여튼 이듬해 정월 초여드렛날 결혼했거든요. 그때 눈이 많이 왔어요. 신랑이 당나귀 타고 장가오는 건데 눈이 많이 와서 그냥 끌고 오셨대요.”
 
 
  구두 한 켤레를 15년 신은 절약정신
 
  내가 현대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회장(당시 만 70세)을 처음 가까이서 대면한 것은 1985년 7월 서울 계동 신사옥 12층 현대건설 회장실에서였다.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그런데도 방에 에어컨이 켜져 있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에어컨 바람보다는 차라리 더운 게 낫다는 것이었다.
 
  내가 응접실에 앉아서 두리번두리번 하는데 잠시 후, 당시 정주영 회장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키가 너무 커서(176cm) 등이 굽은 것 같은 자세로, 다리가 너무 길어서 휘청거리며, 또 너무 길어서 활처럼 굽은 팔을 천천히 저으며, 내게 다가와서 그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싸쥐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명함 상자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는데 그 명함이 금방 눈길을 끌었다. 종이 한가운데 한자로 ‘鄭周永’, 말 그대로 이름만 찍힌 명함이었다. 웃음이 났다. 세상에 이 노인이 천하의 정주영 회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왜 정주영이라고만 박았을까.
 
  나는 내 눈앞 비범한 노인을 허탈하게 바라봤다. 시골 노인처럼 거칠게 햇볕에 탄 피부, 거뭇거뭇 검버섯이 돋은 얼굴, 허리끈을 너무 분명하게 졸라매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아랫배, 깡똥한 바지, 감색의 두꺼운 겨울 양말, 가죽이 짝짝 갈라진 구두…. 위인은 소탈한 시골 노인 같았다.
 
  후에 이 구두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도대체 이 구두를 얼마나 오래 신은 겁니까?
 
  “한 15년 신었지.”(성공요인6: 지독한 절약정신)
 
  —아니, 회장님 같은 분이 구두를 자꾸 사 신어야 구두 장사가 먹고살지요. 그렇게 한 켤레를 오래 신으면 구둣방 다 굶어 죽지 않겠습니까?
 
  정 회장은 빙그레 웃었다.
 
  “왜 버선하고 마누라는 오래된 게 편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 회장은 재치있게 화살을 피하는 데 선수였다. 나는 한참만에 그 뜻을 알고 웃을 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젠가 국회 청문회장에 출석하게 됐는데 한 국회의원이, 정 회장의 복잡한 여자관계를 놓고 힐난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내가 노동자라서 지방으로 여기저기 다니며 잠을 자는데 그때마다 밥은 누가 해주고 빨래는 누가 해줍니까?”
 
  나도 비슷한 질문을 했다.
 
  —회장님에 대한 스캔들이 나돌던데요.
 
  금방 대답이 주르르 나왔다.
 
  “나는 뭐 남자로서 있을 수 있는 일밖엔 하지 않았으니까.”
 
  나이 70이 되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고 한 공자의 말이 생각났다.
 
 
  아침식사에 불려와서 교육받는 자녀들
 
정주영 회장네 아침 식탁.
  정주영 회장네 식탁에서 그집 식구들과 아침식사를 함께 한 일이 있다.
 
  2층에 식탁을 차렸는데 좀 비좁아 보였다. 6시 반쯤 식사가 시작됐다. 할아버지댁에 와서 함께 살던 몽우씨의 아들이 늦잠을 자니까, 할아버지가 방에 들어가 소리쳐 깨웠다.
 
  “야 이놈아, 빨리 일어나 아침 먹어!”
 
  여느 집 할아버지와 다름이 없었다. 손자도 부스스 일어나 식탁에 앉았다.
 
  식탁엔 밥과 반찬 여러 가지가 나왔는데, 반찬은 앞앞에 작은 그릇에 따로 담겨 있었다. 남의 앞에 있는 반찬을 팔을 길게 뻗어 집어먹지 않아도 됐다. 편하고 위생적으로 보였다. 아침 식탁엔 순두부가 나왔다. 강릉 앞바다에서 길어온 바닷물로 만들었단다. 계란 지지미도 나왔다.
 
  정 회장이 자랑했다.
 
  “옛날에는 새 사돈이나 와야 계란 쪄냈지.”
 
  아침 식탁에는 요일별로 아들 내외가 불려와서 정 회장 내외와 함께 밥을 먹는다. 그러나 즐거운 식탁이 아니다. 꼭 벌받는 사람들처럼 말도 않고 조용조용 먹고 간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식들 볼 새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간 날은 7남 몽윤(夢尹, 당시 30)씨가 당번이었는데 정말 끽소리도 못 하고 밥만 먹고 갔다. 정 회장은 무슨 지적사항이 없는지 아들, 며느리를 흘끔흘끔 본다. 아들과 며느리의 머리상태는 양호한지, 며느리의 손톱에 매니큐어는 칠해져 있지 않은지, 입술에 뭘 바르지 않았는지, 옷은 요란스럽게 입지 않았는지, 일일이 체크하고 넘어간다. 이런 지침들에 하나라도 지적사항이 발견되면 야단이 난다고 한다.
 
  그날 아침에 정 회장 댁에 들어서는데 웬 고물 포니가 주차장에 세워져 있었다. 알고 보니 아들, 며느리가 타고 온 차였다. 그때 스텔라가 나와서 쌩쌩 거리고 다닐 땐데 이게 웬 고물차일까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며느리들은 당번으로 불려가는 날이면 청운동 근처에 있는 미장원에 일찍 가서 머리도 펴고 매니큐어도 지우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는 것이었다.
 
  후에 내가 정 회장에게 며느리들 차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며느님들 차나 좀 좋은 것으로 주시지요. 자동차공장을 하시면서.
 
  정 회장은 정색을 하고 반문했다.
 
  “왜 그거 한참 더 타도 되겠잖아요?”
 
  뒤에 들으니, 며느리들은 외제차를 타고 청운동 집 근처 카센터에 가서 세워놓고, 거기 있던 고물 포니로 바꿔 탄 다음 시침을 떼고 시댁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자녀들한테 좀 무섭게 하는 게 아닙니까?
 
  “시간이 없어서 말을 못 하지만 한번 잔소리를 하게 되면 스파르타식으로 그냥 막 야단을 치는 거죠. 정 말을 안 들으면 종아리도 때리고. 우리 집 애들 가운데 종아리 맞은 애들이 한 절반 되고 안 맞은 애들이 절반 되고 그럴 거예요.”
 
  —칭찬 좀 하시면 좋을 텐데요.
 
  “우리는 낯이 간지러워서 칭찬을 못 해요. 우리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한테 한 번도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어떤 집에선 본인 듣는데 칭찬 많이 하잖아요. 내가 칭찬을 들을 때는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자동차는 세영이 주겠다”
 
정주영 회장이 공사 중인 서산 간척지를 달리고 있다.(1985. 7.)
  정 회장이 현대그룹의 제왕으로 군림할 때, 아무도 정 회장 앞에서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정 회장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아마도 첫 대면의 인상이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정 회장도 두려운 기색 없이 당신을 대하는 내가 싫지 않았는지 우리는 그 후 꽤 오랫동안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유지하며 잘 지냈다.
 
  정 회장도 사람이고 노인이었다.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는 남자도 필요했을 것이다.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속말을 해도 탈나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정 회장과 2주일여의 긴 인터뷰를 한 이후 우리는 더 가까워졌다. 그래서 나는 7~8년간 정 회장의 곁에 있으면서 깊은 말을 나누게 됐다. 어떤 때는 기사로 쓰면 좋을 것 같은 말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그 말이 기사로 쓰여 신문에 실리는 날 우리의 신뢰관계는 끊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개 토요일이나 휴일 전날이면 정 회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오 서방, 낼 뭐하나? 서산 가서 놀지 않을래?”
 
  회사에서도 정 회장 전화가 오면 나를 근무에서 면제시켜 주었다. 신문사에선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근무하는 경우가 흔하다.
 
  대개 우리는 헬리콥터를 타고 서산으로 갔다. 정 회장은 서산에 가면 신이 났다. 포니를 직접 몰고 간척지를 누비고 다녔다. 나를 옆에 태우고 다녔는데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어떤 때는 젊은이처럼 펄펄 뛰어다녔다. 내가 뒤에서 따라가자면 숨이 차서 헐떡여야 했다.
 
  정 회장은 광활하게 펼쳐진 넓은 땅을 손가락으로 휘 가리키며 말했다.
 
  “이봐, 오 서방, 이 넓은 땅에 벼가 퍼렇게 자라서 넘실거릴 걸 생각해 봐. 이게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논이 될 거야.”
 
  —이 넓은 땅에 모를 어떻게 심지요?
 
  “모를 심는 게 아니라 비행기로 볍씨를 뿌려야지. 벌써 비행기 사다가 시험해 봤는데 문제없어. 위에서 볍씨를 삽으로 퍼서 뿌렸더니 처음엔 뭉텅뭉텅 떨어져서 큰일 났다 했는데 가을 되니까 다 고르게 자랐더라니까. 많이 떨어진 데는 안 벌고 덜 떨어진 데는 더 벌고. 처음엔 그것도 모르고 씨가 많이 떨어져서 소복하게 난 곳에 가서 사람들이 막 밟고 난리를 쳤는데 말이야.”
 
  정 회장은 아버지 얘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주 시원찮은 자갈밭을 사요. 그럼 돌을 다 걷어내고, 흙을 져 나르고, 둑을 쌓고, 그렇게 논을 만든단 말이야. 나중에 자식들에게 내주겠다고 했지. 나도 지금 그렇게 하는 거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이 땅에 둑을 쌓고, 소금물을 빼고, 논으로 만드는 거란 말이야.”
 
  정 회장은 재산분배에 대한 얘기도 했다.
 
  —회장님 이후에 후계자가 누가 될까 소문이 분분합니다.
 
  “그게 이상한 거예요. 후계자가 어딨어요. 제 능력껏 일을 하는 거지요. 성격이 찬찬한 애는 전자를 시키고, 대담하게 일하고 싶어하는 몽준이는 중공업을 시키고, 이러는 거지. 무슨 후계자다 해서 전부 맡겨서 권한을 준다, 이런 건 안 하려고 그래요.”
 
  —동생들하고는 어떻게 됩니까?
 
  “다 100% 자기 거예요. 다만 넷째 동생(정세영)이 자동차를 키우고 있는데 계속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까 우리 전체가 대준 거예요. 그러나 자동차에 개인의 주는 넷째 동생이 제일 많아요. 그러니까 넷째 동생이 자기 아들 커서 그걸 하고 싶다면 그냥 하는 거죠.”
 
  그러나 이 자동차에 관한 부분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현재 장남 몽구씨가 맡고 있다. 후에 마음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장자에게 맡기려고 했던 것인가.
 
 
  “박정희 대통령,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사욕 없는 분”
 
1964년 단양 시멘트공장 준공 당시 공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사장 부부.
  정 회장은 계속했다.
 
  “그러나 회사가 크면 클수록 공영화되는 거예요. 세월이 가면 회사를 최적의 전문경영인이 맡아서 장악하게 될 거다, 이렇게 보는 거지. 우리 아들들이 그 많은 재산을 감당해서 주인 행세를 할 수는 없어요. 우리 손주대에 가서는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일류 경영능력이 없으면 회사를 경영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러나 나는 현대가 자기 후손이 지배하고 안 하고는 차치하고 현대란 간판을 붙인 기업이 영원하면 그걸로 일한 보람이 있다, 그렇게 생각해요.”
 
  —말씀은 그렇게 하시지만 회장님은 다른 사람이 들어서는 것을 못 미더워하실 것 같은데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우리 회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나보다 나은 사람도 많아요. 예를 들어 이춘림 회장이라든가, 건설의 이명박 사장이라든가, 자동차의 정세영 사장이라든가…. 어떤 건 미흡한 게 있어서 내가 잔소리도 하지만, 내가 그 일을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못 할 텐데 하는 게 반반이라고요.”
 
  그러나 정 회장은, 이런 뜻과는 달리, 말년에 아들들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재산 싸움을 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세상을 떠야 했다.
 
  —이명박 사장(후에 대통령)의 빠른 출세가 박 대통령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설이 있던데요.
 
  “오히려 그 반대요. 한번은 박 대통령이, ‘고대에서 데모하던 놈들 다 현대에 있다며? 그까짓 반골정신 있는 놈들 나중에 어떻게 당할라고 중용하시오’ 이래요. 건설은 성격이 대담해야 하는 건데 이 사장이 생긴 건 그래도 성격이 대담해요. … 이 사장이 신입사원 적에 태국에서 고속도로 공사할 땐데, 노동자들이 술 먹고 월급 달라고 책상을 안 뒤집나, 목에 칼을 들이대질 않나, 그래도 참 대담하게 잘했어요.”
 
  —박정희 대통령과는 무슨 계기로 가까워졌습니까?
 
  “경부고속도로 때문이지요. 꼭 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하면 싸게 할 수 있느냐고 자꾸 물어와서요.”
 
  —고속도로 아이디어는 박 대통령 쪽에서 나왔습니까, 현대 쪽에서 나왔습니까?
 
  “박 대통령 쪽이지요. 박 대통령이 구상을 했어요. 한번 들어오라고 해서 가니까, 기차로는 도저히 화물을 감당할 수가 없다, 기차 하나 얻는 데 철도청 놈들이 2만원씩 받아먹는다고 그런다, 그래도 할 수 없이 기차로 실어나를 수밖에 없다, 이러면서 한국이 발전되려면 도로망이 발전돼야 한다고 그러세요. 고속도로를 꼭 하고 싶은데 돈은 없고, 그러니 당신이 태국 가서 고속도로 공사를 해봤다니까 그걸 제일 싸게 할 수 있는 안을 한번 내달라고 해요.”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부탁을 현대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걸 나한테만 알아보라고 한 줄 알았더니, 김현옥 서울시장 불러다가도 그랬고, 재무부, 건설부, 육본 공병감에까지 다 부탁을 했어요. 박 대통령이 참 치밀한 분이죠. 몇 군데 이래가지고 제일 좋은 데를 선택한 거죠.”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그때 신이 났다.
 
  “나는 일국의 통치자가 부탁을 했다고 아주 미쳐가지고 경부 간을 수십 번 오르내리면서 조사를 한 거요. 다른 데선 앉아서 했는데. 그 후 건설부가 780억원인가 냈고요, 서울시가 180억원인가 만들어 냈어요. 공병감실에서는 아이고 도저히 못하겠다고 그러고. 우리가 370억원인가를 냈어요. 그때 우리가 서울-대전을 4차선으로, 대전-대구를 2차선으로 하자고 안을 냈어요. 그게 결국 420억원에 시작을 했는데 우리가 가장 가까웠지요.”(성공요인7: 일에 대한 욕망)
 
  정 회장은 그때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때 박 대통령이 그러는 거예요. 외국처럼 고속도로의 두께를 두껍게 하면 돈하고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우리는 얇게 하고 빨리 하자, 이러시는 거예요. 얼른 만들어서 통행료 받아서 고치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박 대통령 생각이 적중한 거죠. 그때 우리가 일본의 동경-나고야 고속도로보다 1년 늦게 시작했는데 1년 먼저 완공했지요.”
 
  그때 현대는 전 구간의 5분의 2를 맡아서 시공했고 나머지 5분의 3은 17개 회사가 나눠서 시공했다고 한다.
 
  —그때 박 대통령과 많이 가까워졌겠네요.
 
  “고속도로 하느라고 참 많이 만났지요. 한번은 밤 11시에 불러서 들어가니까, 이놈의 인터체인지가 왜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느냐 이거야. 외국의 인터체인지를 보면서, 이렇게 하면 싸지지 않겠느냐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러면서 이렇게 하면 얼마나 돈이 덜 드느냐고 묻는 거예요.”
 
  —박 대통령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그분은 참 정직하고, 아주 부지런하고, 사욕이 하나도 없는 분이라고 봐요. 돌아가신 다음에 가서 뒤져보니까, 정치자금 모아서 많이 쓴 건 사실이지만 현금이 2억 얼마 있더라는 거야. 그리고 신당동 그 집, 그거밖에 없더라는 거야. 그만하면 됐죠 뭐.”
 
 
  작은 데 아껴서 큰 데 쓴다
 
  서산에 정 회장과 함께 처음 내려가선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는 가건물로 지은 숙소에서 잤다. 정 회장 옆방에서 내가 자게 됐는데, 첫날 새벽 6시에 일어나보니 정 회장이 어느새 논으로 나가고 없었다. 다음 날은 5시에 일어나 옆방으로 가보았다. 벌써 나갔다. 사흘째 되던 날은 아예 3시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과연 4시가 되니 정 회장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내가 뒤따라 나섰더니 정 회장이 놀랐다.
 
  “아니, 오 서방 같은 백면서생이, 더 자지 않고선!”
 
  그다음부터 우리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
 
  내가 그때 현대에 입사하고 싶다고 운을 뗐더라면 정 회장은 아마 이사 자리 하나는 주었을 것이다.
 
  역시 서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정 회장과 포니를 타고 뽕밭가를 달리는 중이었다. 그때 뽕밭 가운데서 웬 부인이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자동차 앞을 가로막았다. 정 회장은 깜짝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부인이 뽕밭을 가리키며 사정했다.
 
  “이 뽕잎 좀 봐유.”
 
  뽕잎들이 흙먼지를 노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자동차들이 하두 지나댕겨서 이 지경을 만들었슈. 누에 농사 망치것슈. 먹일 수가 있어야쥬. 멕이면 누에가 다 죽어유.”
 
  간척지 공사 때문에 현대의 차량들이 하도 먼지를 일으키며 다녀서 뽕밭이 못 쓰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무슨 보상을 좀 해내라는 모양새였다.
 
  정 회장은 울상을 짓고 있는 부인을 상냥하게 불렀다.
 
  “아주머니, 이리 좀 와봐요.”
 
  아주머니는 얼굴을 펴면서 다가왔다.
 
  정 회장은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에 가면 우물이 있지요?”
 
  “예.”
 
  “그럼 이 뽕을 따다가 깨끗이 씻어요.”
 
  “예?”
 
  “그담에 말려서 누에한테 먹이면 되지.”
 
  “예!”
 
  정 회장은 더 상냥하게 말했다.
 
  “아주머니 그럼 됐지요?”
 
  그리고 붕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1990년 내가 《조선일보》를 떠나 SBS 보도국장으로 가서 창사작업을 할 때였다. 창사특집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는데 제작비가 부족했다. 나는 정 회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전에 정 회장이 나에게 촌지를 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지금은 내가 언론사에서 가장 높은 봉급을 받고 있어서 돈이 필요 없지만, 혹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오면 그때 도와달라”고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 회장에게 정직하게 말했다. 아프리카에 기자들을 보내서 피그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은데 협찬 좀 해주시면 협찬 광고를 잘 내드리겠다고.
 
  정 회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낼 사람 보내.”
 
  현대는 그때 억 단위의 협찬을 해주었다. 정 회장 덕분에 SBS는 창사 프로그램으로 피그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인기리에 방송할 수 있었다.
 
  정 회장은 한술 더 떠 내가 수고한다고 창사작업 중인 간부들에게, 성북동에 있는 현대의 영빈관에서 저녁도 샀다. 나는 보도국의 간부들을 데리고 성북동으로 갔다. 카메라 기자도 데리고 갔다. 커다란 방에서 저녁을 먹고 술이 한 순배 돌았다. 정 회장은 흥을 돋우기 위해 먼저 나가 노래를 불렀다.
 
  “이거야 정말 만나봐야지 아무 말이건 해볼 걸….”
 
  카메라가 돌았다. 정 회장은 의식하지 않고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나를 두고 아리랑’도 불렀다. 이 장면도 창사특집 어디에 끼어 방송됐다. 아직도 이 테이프는 SBS 자료실에 남아 있을 것이다.(성공요인8: 쓸 데 쓸 줄 아는 공익정신)
 
 
  정주영은 대한남아 중에 으뜸이었다
 
현대조선 도크에서 정주영 회장과 필자가 기념촬영을 했다.
  정주영 회장은 내가 보기엔 대한남아 중에 으뜸이었다. 허허벌판 모래밭에서 일어나 거창한 철옹성을 쌓은 성장 대한민국의 표징이었다. 정주영은 인천부두의 노동자로 사회 첫발을 내디뎠다. 서울에 와서 노동자로 불려다니며 고려대(당시 보성전문)의 신축공사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또 엿공장에서 잔심부름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계속 크고 높은 곳을 향해 내달렸다. 정주영은 노동자에서 출발해, 쌀집 점원, 쌀집 주인, 자동차 수리업자, 자동차 공장, 건설업자, 조선업자를 거쳐 마침내 대통령 후보가 됐다.(성공요인9: 새로운 것을 향한 개척정신)
 
  정주영은 남자로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두 번 결혼해서 모두 8남1녀를 두었다. 그중엔 밖에서 낳아서 들어온 자녀들도 있다. 그 자녀 모두를 어엿한 정씨일가로 만들었다. 물론 여기엔 헌신적인 아내가 있었다.
 
  변중석 여사와 이 얘기를 나눴다. 변 여사와는 85년 7월과 8월 두 번에 걸쳐 5시간 정도의 인터뷰를 했다. 그때의 녹취록을 찾아보니 대학노트 한 권에 꽉 찬다. 물론 녹음 테이프도 보관하고 있다.
 
  —어떻게 그 여러 자녀를 그렇게 잘 기르셨어요?
 
  “애들을 길러도 조금도 차별 안 했어요. 회장님은 일단 갖다놓으시고는 간섭을 안 하세요. 절대로 간섭을 안 하셔. 그러니까 제가 더 고생해야지요. 애들도 또 참 착해요.”
 
  —사모님이 착하게 만드셨다는데요. 자녀들이 군대 가 있을 때는 면회도 지성으로 다니시고, 돈도 구멍구멍 몰래 만들어주고….
 
  “다 지나간 거니까 이런 거 얘기하는 건데, 내 팔자에 있으니까 그런가 봐요. 이제 아우 볼 만하면 하나, 또 아우 볼 만하면 하나…. 그리 회장님이 바람을 피우시잖아요. 아기를 갖다놓고도 또 나가서 바람을 피워요. 그럼 내가 그 아기 젖을 먹이면서 같이 울고 앉아서…. 그러니까 회장님도 그거 고마운 거 모르겠어요? 나는 조금도 다름없이 키웠어요.”
 
  변 여사는 모처럼 가슴 속에 있는 말을 다 해놓고 나에게 사정했다.
 
  “이런 얘기 어디 쓰지 마세요. 나 쫓겨나고 죽어요.”
 
  이제 두 분이 다 저세상 사람이 됐으니 쫓아낼 사람도 쫓겨날 사람도 없다. 혹여 저승에서 이 문제로 다투는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두 분 모두 해탈하셨을 테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85년 9월호 《월간조선》에 정주영 회장에 대한 인간탐험이 나가게 돼 있었다. 그 전달 20일쯤 마감시각이 임박해서 부지런히 움직일 때였다. 가까스로 원고를 마감해서 대장을 만들어놓고 교정을 보고 있었다. 그때 비서실차장이던 이병규(현 《문화일보》 사장)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주 난처해하는 목소리였다.
 
  “회장님께서 원고를 좀 보자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죠?”
 
  정 회장과 내가 처음 만나던 날, 정 회장은, 자기에 대해 쓴 책들이 다 마음에 안 든다고 말했다.
 
  그 말끝에 내가 이렇게 말했다.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정 회장은 대뜸 대답했다.
 
  “나에 대해서 치켜세운 게 싫어요. 첫 번서부터 큰 꿈이 있었던 것처럼 쓰고, 조상서부터 미화시킨 게 싫어요. 그렇게 조상 미화시키자면 김일성이 미워할 게 하나 없어요. 모든 건 사실대로 쓰고 판단은 독자가 해야지요. 조금 좋은 걸 괜히 미화해 놓으면 그건 완전히 죽는 거다 이거죠.”
 
 
  종로2가 반줄에서 있었던 일
 
1988년 1월 6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이른 새벽 아들들과 함께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 사옥으로 도보로 출근하고 있다. 왼쪽에 몽구씨와 오른쪽에 몽헌씨가 호위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아 이 양반은 내 뜻대로 글을 써도 뭐라고 간섭하지 않겠구나’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 써놓고 나니, 이제 와서 보잔다. 실망감이 대단했다. 나는 툴툴거리며 교정 보던 대장을 복사해서 비서실로 보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이병규 차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둥둥 떠 있었다.
 
  “회장님께서 너무 좋다고 하시네요. 한 자도 손볼 게 없다고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역시 정주영 회장은 큰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월간조선》에 ‘오효진의 인간탐험 수퍼스타 정주영’이 나가고 반응이 꽤 좋았다. 이 기사 덕분에 판매량도 늘었다. 정 회장이 자연스럽게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그게 고마웠던지 정 회장이 나한테 감사의 선물을 보내왔다. 고급 비단 두 필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중하게 되돌려보냈다. 나는 이병규 차장에게, 이런 촌지를 받지 않고 살고 싶다는 내 뜻을 정 회장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저쪽에서 그럼 밥이나 한 끼 먹자고 했다. 나도 수정제의를 했다. 그러면 우리 부원들 저녁이나 사시라고 했다. 그 정도는 괜찮다 싶었다.
 
  정 회장은 기꺼이 승낙하고 바로 서울 종로2가에 있는 반줄이란 레스토랑으로 우리 《월간조선》 부원 10여 명을 초대했다. 그날 우리는 부지런히 일을 끝내고 저녁에 반줄로 갔다. 나도 거기 가보고 나서야 그 집이 으리으리한 집이란 것을 알았다. 정 회장이 단골로 다니는 술집이었다. 1층과 2층은 차와 식사를 하는 곳이었고 3층과 4층은 술을 전문으로 팔았던 것 같다. 우리는 4층을 통으로 썼다.
 
  정 회장은 우리 부원의 숫자를 미리 파악하여 그 수에 맞는 파트너를 대기시켜 놓았다. 화사한 한복으로 성장한 미녀들이 한 사람씩 우리를 맞이하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나는 그때 로얄살루트라는 양주를 처음 봤다. 패스포트란 양주와 로얄살루트를 수도 없이 마셨다. 로얄살루트가 85년 당시 돈으로 85만원이라고 했다. 그 당시 보통 사람의 한 달 봉급에 맞먹는 돈이었다.
 
  더 놀란 일은 정 회장이 그야말로 몸을 던져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다. 먼저 나가서 ‘이거야 정말’, ‘쨍하고 해 뜰 날’, ‘나를 두고 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부르는가 하면 미인들과 체인징 파트너를 해가면서 손이 치마 속과 저고리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말하자면 우리를 풀어주려고 먼저 망가지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우리도 롤모델을 따라 적당히 망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12시가 넘어서 1층으로 내려갔다.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한 잔씩 더 마시며 2차를 했다. 그러는 사이 1시가 넘었다. 밖에 나와보니 당시 새로 나온 흰색 스텔라 다섯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언제 파악했는지 사는 곳별로 차 한 대에 두 사람씩 타게 하고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 회장 차에 당시 우리 국장과 나를 태우고 각각 집까지 데려다 준 뒤에 자기 집이 있는 청운동으로 갔다.(성공요인10: 정성과 겸손)
 
  이튿날 아침이었다. 우리 《월간조선》 부원 전원이 정주영의 열광적인 팬이 돼 있었다. 이렇게 정성스런 대접을 받고도 그 사람한테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정 회장은 이렇게 정성으로 사람을 대하며 사업을 일구었던 것이다.
 
 
  “진실과 성실은 모든 것을 이긴다”
 
청운동 자택.
  정주영 회장이 서울에서 현대건설을 일으킬 때였다. 아무런 연줄이 없었던 정 회장은 공사를 딸 수가 없었다. 정 회장은 결심을 하고 커다란 과자봉지를 들고 당시 서울시의 건설담당 계장 집을 찾아갔다. 문앞에서 오래 기다렸다.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오는 계장에게 가서 넙죽 절을 하고 공사 하나 달라고 했다. 계장은 정 회장을 확 밀치고 돌아보지도 않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정 회장은 이튿날 또 사탕봉지를 들고 그 집 대문 앞에 가서 기다렸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정 회장은 또 갔다. 계장은 술에 취해 이번엔 막말까지 했다.
 
  “어떤 놈이 남의 집까지 와서 귀찮게 해!”
 
  이런 일이 되풀이되던 다섯 번째 날에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또 넙죽 절을 하며 달려드는 정 회장한테서 계장이 사탕봉지를 낚아채 냅다 땅바닥에 팽개쳤다.
 
  그러면서 소리쳤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 사탕발림을 하고 지랄이야!”
 
  봉지가 터져 사탕들이 대문 앞에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정 회장은 멍하니 그 계장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사탕을 하나하나 주워서 터진 봉지에 도로 담았다. 정 회장은 그때 죽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이 모습을 내려다보던 계장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내일 아침에 사무실로 와보시오.”
 
  정 회장은 물론 공사를 땄고 현대건설은 무럭무럭 자랐다.
 
  이런 사탕발림 사건은 일제시대에도 있었다. 신설동에서 무허가 자동차서비스 공장을 운영할 때였다. 그는 나와의 인간탐험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 파출소는 그런대로 피해서 할 수가 있었는데, 동대문경찰서 일본사람 보안주임이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날 유치장에 집어넣겠다고 하잖아. 그래 그 집에 수십 번을 찾아갔지. 첨엔 사탕을 사가지고 갔더니, 사탕발림을 하는 거냐고 막 야단을 하면서 안 받아서 그냥 들고 오다가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그래도 자꾸 찾아가니까 결국엔 그 사람도 내 말을 들어주더라고. 벌써 구속했어야 했을 텐데 매일 찾아오는 사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뭐뭐를 주의하고, 또 어떻게 숨어서 하라고 하잖아. 어떻든 불내지 말고 사고 없이 하라고 말이야.”
 
  정 회장은 이 일을 겪고 나서, 진실과 성실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얻었다고 했다.(성공요인11: 성실과 진실)
 
  서산 농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정 회장은 현장 직원이 논둑을 너무 높게 만들었다고 모질게 나무랐다.
 
  “이게 뭐야? 둑은 조그맣게, 도랑은 깊게 하랬더니, 그런데 이게 뭐야! 멍청이처럼! 아 이 땅이 아깝지도 않아? 대학 나온 게 그것도 몰라? 넌 그래가지고 사람 노릇 못 해! 딴 데 가서 해봐!”
 
  정주영은 내가 곁에 있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원을 한참 나무랐다. 그러나 그날 저녁엔 그 직원을 불러놓고 술을 권하며 풀어주었다.
 
  이런 그의 성격을 슬그머니 더듬은 적이 있다.
 
  —현대 사람들이 회장님 성질이 급해서 무섭다고 하던데요.
 
  “급하죠. 얼른 알아듣지 못하면 막 야단하죠. 그렇게 하면서도 곧 그걸 후회해요. 아주 찜찜하지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성질이 급한 거 같아요. 모든 일을 선선 지도해야 하는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욕부터 나와요. 또 그렇게 하고 후회를 하는 거죠.”
 
  —그러고선 나중에는 또 싹싹하게 해주신다고요.
 
  “예, 미안하니까! 어떻게든 그 이튿날 불러가지고, 사실 일을 위해서 야단한 거지 사람이 미워서 야단한 게 아니라고 하죠. 오해를 할까 봐 어쩌고저쩌고해요. 좋지 않은 버릇이 일생을 두고 간다는 게 그런 걸 두고 하는 말 같아.”(성공요인12: 남의 가슴에 못을 박지 않는다)
 
 
  “옥스퍼드서 경영학박사 받았다”
 
청운동 자택 1층에서 정주영 회장이 한시를 읽어주고 있다.
  —조선사업에는 어떻게 뛰어들게 됐습니까?
 
  “현대건설이 온 세계에 다니면서 건설을 하는데 그렇게 힘이 들 수가 없어요. 열대지방에서 한대지방까지 기후 풍토가 다 다른데 다니면서 겪는 고생이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조선은 온 세계에서 일거리를 받아다가 우리나라 한 군데서 하는 것이니 좋잖겠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조선에 착수하게 된 거지요.”
 
  —어려움도 많았지요.
 
  “우선 돈이 문제였지요. 울산의 백사장 사진을 한 장 들고 다니면서 여기다 이런 조선소를 지으려 한다 돈을 빌려달라 미국, 일본, 영국을 돌아다녔지요. 결국 영국의 버클레이 은행과 얘기가 됐어요.”
 
  이때 그 유명한 5백원짜리 지폐 일화가 나온다. 버클레이의 롬바톤 회장이 차관에 난색을 보이니까, 정주영 회장이 거북선이 그려진 5백원짜리 지폐를 내보이며, “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1500년대에 이런 철갑선을 만들었소. 당신네 영국은 1800년대부터 조선사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러니 우리가 300년이나 앞섰소” 했다고 한다.
 
  이 말에 롬바톤 회장이 웃으면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서 차관 협의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산 너머 산이었다. 이젠 버클레이의 총재가 만나자고 하는 것이었다. 기술적 검토를 한다고 했다.
 
  이번에도 정주영의 위트가 위기를 넘겼다.
 
  “월요일에 점심을 먹자고 하는데 일요일에 몇 사람이 관광을 갔어요. 저 셰익스피어 생가에 가서 집 구경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옥스퍼드대학에도 갔어요. 일요일인데도 얘기를 하니까 잘 구경을 시켜주데요. 또 윈저성도 잘 구경하고 돌아왔어요.
 
  그리고 월요일이 돼서 약속장소에 갔는데 국제담당 부총재라는 사람이 나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전공이 뭐냐고. 이공계통이냐 경영 쪽이냐. 그래서 내가 구질구질하게 얘기하기 싫어서 웃으면서 이랬어요. ‘당신네 은행에 조선사업계획서를 낸 것을 봤느냐?’ ‘봤다’고 그래요. ‘내가 그 계획서를 가지고 어제 일요일인데도 옥스퍼드대학에 가서 보여줬더니 참 잘 됐다고 하면서 경영학박사 학위를 줘서 그걸 받아왔다’고 했어요. 이렇게 웃어버려서 그냥 넘어가고 말았지요. 폭소로다가.”
 
  잘 알다시피 정주영의 최종학력은 일제시대 송전소학교 졸업이다.(성공요인13: 번득이는 기지)
 
  우리는 85년 여름휴가를 경포대로 함께 떠났다. 현대 신입사원 연수도 강릉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정주영은 신입사원들과 어울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물놀이도 했다. 젊은이들과 수영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또 고향에서 내려온 소학교 친구들을 불러 며칠간 함께 놀기도 했다. 해마다 그런다는 것이다. 정주영은 그 친구들과 함께 놀 때는 쉼 없이 노래를 불렀다.
 
  정주영은 본래 음치였다고 한다.
 
  “이거 봐요. 음치의 3대 조건이 뭔지 알아요? 첫째, 앙코르가 안 나와도 마이크를 놓지 않는다. 둘째, 청중을 무시한다. 셋째, 곡을 무시한다.”
 
  —음치가 아니신데요.
 
  “참 세상에 나처럼 열심히 노래공부한 사람 없을 거요. 가사는 다 외우겠는데 곡이 안 돼요. 그래 사우디에서 그 넓은 사막을 달릴 때, 카세트를 수십 개 가지고 가서 차 속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거요. 왜 그렇게 노래를 배웠는지 알아요? 판 벌려놨는데 노래하랄 때 안 하면 그 판 깨지잖아.”
 
  정말 갈수록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성공요인14: 백절불굴의 정신)
 
 
  너무 지독한 절약정신
 
1986년 11월 25일 고희를 맞은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부인 변중석 여사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정주영 회장의 절약정신은 도가 지나친 것 같다.
 
  자동차 수리공장을 할 때의 얘기를 부인 변 여사가 말한다.
 
  “그때 반찬도 아침에 김치 하나 국 하나만 해놔야지 더 해놓으면 벼락이 나요. 그래가지고 뭐 얻어 잡숫지도 못했다고. 그렇게 돈 모았어요. 생활비도 잘 안 주고. 아유 얼마나 지독한지 말도 못 해요.”
 
  그 무렵 전차요금이 1원50전이었는데, 정주영 회장은 그 돈을 아끼겠다고 아침마다 걸어서 회사에 다녔단다. 그 돈이면 한 끼 밥을 할 수 있는 장작을 살 수 있다면서.
 
  계속된 변 여사의 말이다.
 
  “그때 점심을 굶으셨대요. 친구가 오면 나 점심 먹었으니 너나 먹어라 이랬대요. 또 회장님이 광복되고선 트럭 하나 사가지고 시골로 다니며 잡곡을 사다가 서울서 파는 장사를 하셨어요. 그때 잡곡을 어깨에 하도 메고 다녀서 난닝구가 다 헤지고 그랬어요. 그렇게 하면서 그때 시동생들 다 대학 보내고 그랬어요.”
 
  —회장님이 무섭지 않으세요?
 
  “아이고 말도 못해요. 회장님이 워낙 무서우니까 지금도 함부로 말도 못해요. 손님 같지 뭐.”
 
  —회장님 여름옷 좀 사드리지요. 만날 퍼런 줄무늬 옷만 입고 다니시던데요.
 
  “옷도 안 해 입으셔. 내가 돈 벌어서 가지고 가나 그래도. 아이고! 글쎄 하복도 밤낮 그것만 입고 다니셔. 당신이 돈이 없어요, 뭐가 없어요? 애들한테도 국산 사 입혀라 뭐 어째라 그러고. 어휴 지독해요, 하여간 지독하다고!”
 
  내가 정 회장에게 여름 양복이 한 벌밖에 없느냐고 그랬더니 대답이 쉽게 나왔다.
 
  “요즘엔 뭐 세탁기가 좋으니까.”
 
  다시 변 여사에게 묻는다.
 
  —회장님 속옷은 많은가요?
 
  “회장님이 그때 하도 춥다고 그러셔서 명주를 떠다가 누비바지를 만들어 드렸어요. 솜을 놔서. 위에 조끼도 만들어 드리고. 그랬더니 그것만 10년도 더 입으세요.”
 
  나는 변 여사의 상표처럼 된 흰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깡똥치마를 보며 물었다.
 
  —사모님이나 좀 좋은 옷 사 입으시지요.
 
  “옷 욕심도 없고, 이런 반지나 패물도 해본 적이 없어요. 시집오는 날 화장해 보고 화장도 해본 일이 없어요. 머리가 이렇게 하얘도 무슨 물을 들이느냐고 안 했어요. 그래도 접때 회장님이 진지 잡수시면서 그래요. 내가 점점 젊어가고 예뻐진다고요. 왜 그러냐니깐 화장을 안 해서 얼굴이 제 색이래요. 회장님이 날 보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예쁘다고 그래.”
 
  정 회장이 하도 절약정신을 내세워서 내가 한 번 슬쩍 떠봤다.
 
  —우리 국민들이 회장님 절약정신을 따르자면 자동차를 살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러면 현대자동차가 문을 닫지 않을까요?
 
  정 회장은 얼른 둘러댔다.
 
  “차를 타면 모든 게 능률적이지요. 예를 들어 일요일에 뚝섬 같은 데 다니다 보면, 힘들어서 쉬는 게 아니라 지쳐가지고 돌아오죠. 그런데 차가 있어 봐요. 노는 것도 아주 능률적으로 놀 수 있죠. 마찬가지로 차가 있으면 더 능률적으로 차가 없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거죠.”
 
  정주영 회장은 사업 중 여러 번의 고비를 넘겼다. 그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고비를 물었다.
 
  “1·4후퇴 이후 부산에서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를 했어요. 공기가 3년인데 우리가 그거 하는 동안에 물가가 글쎄 백 배나 올랐어요, 백 배나. 거기서 아주 빚을 태산같이 지고, 완전 파산에 빠졌댔죠.”
 
  —벌었던 걸 다 까먹었군요?
 
  “아 그럼, 완전히 결딴났다니까요!”
 
  —그때 그냥 벌렁 나자빠지지 그러셨어요?
 
  “그럼 그걸로 끝이죠, 그렇죠? 신용은 그걸로 끝이 되는 거죠. 현금을 모아서 성공하는 기업은 적어요. 기업은 신용으로 크는 것이니까요. 세계적인 대기업은 전부 신용으로 크지요. 현금을 모아서 크는 것은 조그만 기업들이죠. 무한한 신용이 무한한 대성을 이룰 수 있는 건데 벌렁 나자빠져서 되겠어요? 또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역경을 몇 번씩 겪으면서도, 본인이 실패했다고 체념할 때에 비로소 실패가 존재하는 것이지, 신용을 유지하면서 실패했다고 체념하지 않는 한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 거죠.”(성공요인15: 신용제일주의)
 
 
  “서산 가서 풍요롭게 여생을 끝내겠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8년 6월 16일 임진각에서 같이 북으로 갈 ‘소떼’와 합류, 판문점으로 향하기에 앞서 보도진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현대를 이끄실 겁니까?
 
  “앞으로 10년간은 정력적으로 하려고 그래요. 그러고선 모든 데서 은퇴하고 서산 가야죠. 서산만 가지고도 내가 풍요롭게 여생을 끝낼 거예요.”
 
  그러나 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내가 이 기사를 정리하고 있는데, 《조선일보》(2013년7월3일자) 신문에 전면광고가 났다. 서산간척지 특별매각에 관한 광고였다. 카피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 가족의 행복한 미래, 투자도 노후도 서산간척지입니다!’
 
  정주영 회장이 풍요롭게 여생을 보내겠다고 한 땅을, 바로 그 아들들이 낯모르는 사람들의 노후를 위해 팔겠다고 내놓은 것이었다. 지금 서산 땅은 이렇게 야금야금 팔리고 있다. 지하의 정주영 회장이 이 광고를 본다면 그 심경이 어떨까. 마음이 아팠다.
 
  정주영 회장은 풍요한 농사꾼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1년 3월 21일 아산병원에서 86세로 생을 마감했다. 아산병원의 아산은 그의 고향 마을에서 따온 것이니까 고향에서 잠들어 고향으로 갔을 것만 같다.
 
  정 회장과 변 여사가 비둘기처럼 살던 청운동 집 1층엔 맥아더의 기도문이 걸려 있었다. 정 회장이 특히 좋아하는 부분이다.
 
  ‘바라건대 나를 쉬움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옵고, 곤란과 도전에 대하여 분투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을 다 주신 다음에 이에 더하여 유머를 알게 하여 인생을 엄숙히 살아감과 동시에 삶을 즐길 줄 알게 하시고, 자기 자신을 너무 중대히 여기지 말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은 소박하다는 것과 참된 지혜는 개방적인 것이요, 참된 힘은 온유함이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정주영 회장은 이 기도문처럼 살다 간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국민 누구보다도, 쉬움과 안락의 길을 버리고 곤란과 도전에 분투하며 살았고, 무서움 뒤에는 유머가 흘렀고, 항상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었고, 당신 자신이 위대했지만 항상 소박하게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주영 회장은 정말 위인임에 틀림없다. 시골 벽지에서 무일푼으로 올라와서, 세계적인 대기업 현대를 창업해 일구어내고, 88올림픽을 앞장서 유치하고, 경제계를 이끌고, 소떼를 몰고 북한에 가서 남북의 물꼬를 트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대통령 후보까지 된 사람이, 이 땅에, 정주영 말고는 다시는 없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수많은 기업인과 젊은이들의 롤모델과 영웅으로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지금 누구라도 정주영처럼 그렇게 억세게 가출을 시도하고, 그렇게 억척스럽게 일을 하고, 그렇게 검소하고, 그렇게 절약하고, 그렇게 실패를 두려워 않고 저돌적으로 도전한다면, 아마도 정주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정주영 회장은 우리 가슴에 확실히 심어놓았다.
 
 
  에필로그
 
  이 기사는, 정주영 회장과 나 사이에, 1985년 7월부터 약 2주간에 걸쳐 진행됐던 집중 인터뷰와, 그 이후 7~8여 년간 가까이 지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것을 토대로 쓰였다. 지금도 대부분의 취재노트와 녹음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
 
  정주영 회장이 타계한 지 12년이 지났다. 이 글을 쓰면서 우리의 추억이 어린 청운동 집, 서산농장, 현대그룹 회장실, 정 회장 내외가 묻힌 묘소를 둘러보고 싶어서, 현대의 여기저기에 물어봤지만 모두 손을 내저었다. 어떤 임원은 자기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라고 했다. 정 회장은 지금도 국민들 마음속에 살아 전설이 되고 있는데, 막상 현대 이름이 붙은 회사나 가족들에게선 좀 멀어진 게 아닌가 해서 안타까웠다.
 
  들리는 말로는 울산대학교와 아산나눔재단에서 정주영 회장에 대한 연구를 하고 청년창업에 관한 교육과 지원을 한다고 한다. 이런 사업이 잘돼서 여러 명의 정주영이 우리나라에서 계속 나오기를 바란다.
 
  이 기사를 정리하면서 되돌아보니,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느낀 것보다 훨씬 더 커보였다. 그러나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정 회장은 생전에 여자문제를 가리느라고 너무 많이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조금만 따져보면 알 수 있는 일도 지나치게 금기시하며 덮으려 했다. 그중에 첫 번째가 첫 부인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감추려다 보니 열 가지가 다 뒤틀려 들어갔다. 이번에 내가 노심초사하는 영혼을 홀가분하게 해드린다. 사후엔 모든 게 밝혀지게 마련이다. 이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서 정주영 회장의 진가가 떨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의 주위엔 많은 여인이 스쳐갔다. 정 회장은 그 많은 여인에게 할 수 있는 만큼의 성의를 다 표시했다. 그러나 오직 첫 부인에게만은 그러지 못한 한이 남아 있었다. 그 한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겹쳤다. 그래서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첫 부인을 서울에 데려다가 살게 할 집까지 마련했었다는 말도 들린다. 정 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으며 금강산 개발에 그렇게 열을 올린 까닭의 한 씨앗은 이 첫 부인에 대한 미안함과 한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 부인이 운명했다는 말을 듣고는 아산병원에 데려와서 치료를 했더라면 더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애석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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