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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키드 안정효의 ‘별들이 빛나는 이야기’ ⑦ 흑인 배우 시드니 푸아티에와 덴젤 워싱턴

“순종적인 검둥이를 거부하다” vs. “백인적인 용모의 이지적인 이미지”

  • 글 : 안정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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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아티에, 인종의 장벽을 지성과 능력으로 이겨내
⊙ 푸아티에, “흑인은 항상 백인보다 나쁘다”는 백인우월주의 공식을 파기
⊙ 워싱턴, 변호사·군주·경찰서장 등 흑인 ‘고유’의 역할을 탈피한 배우
⊙ 워싱턴,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없는 흑인

安正孝
⊙ 71세.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코리아헤럴드》 기자, 《코리아타임즈》 기자·문화체육부장,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 주요 작품으로 소설 《전쟁과 도시》(후에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은마는 오지 않는다》(후에 《銀馬》) 《악부전》 《솔섬》 등이 있다.
    번역서로 《백년동안의 고독》을 비롯해 150여 권이 있다.
앤토니 퀸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남의 나라에 가서 타향살이하며 크게 성공한 미국 배우들이 있는가 하면, 제 나라에서 활동하면서도 텃세와 차별 때문에 아픔을 경험한 할리우드 배우들 또한 많았다. 이른바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African American)’이라고 일컬어지는 흑인들이 그러했다.
 
  오랫동안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조금이나마 중요한 역할이라면 흑인을 쓰는 대신 얼굴을 시커멓게 칠한 백인이 도맡아서 했다. 흑인을 쓴 경우라고는 굽실거리는 노예 역이 고작이었으며, 흑인 연기자로서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받았던 해티 맥대니얼 역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젖 아줌마(Mammy)’ 노예 역이었다.
 
  오토 프레밍거 감독이 비제의 가극 <칼멘>을 오스카 해머스타인의 손을 거쳐 흑인 뮤지컬로 만든 화제작 <칼멘 존스(Carmen Jones, 1954)>에서 주연을 맡았던 해리 벨라폰테와 도로티 댄드릿지 역시 인종 차별을 비켜 가지 못한 연예인들이었다. 그토록 유명했던 가수였음에도 벨라폰테는 남부의 호텔에서 공연할 때면 정문으로 드나들지 못하고 하인이나 잡역부들 전용인 뒷문을 사용해야 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리고 HBO에서 제작한 <도로티 댄드릿지의 영광과 좌절(Introducing Dorothy Dandridge, 1999)>을 보면 댄드릿지 역을 맡은 할리 베리가 백인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해서 종이컵에 소변을 봐야 하는 한심한 상황이 등장한다.
 
 
  “나는 흑인이다”
 
  이런 풍토에서 시드니 푸아티에가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흑인 배우로 두각을 나타내는 데 성공했던 까닭은, 동양인 역을 독식했던 필립 안이나 제3세계인으로 널리 팔렸던 앤토니 퀸과는 달리, 한 인간으로서의 개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인종의 장벽을 지성과 능력으로 이겨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우선 미국인이다. 그다음으로 나는 배우다. 마지막으로 굳이 따지자면 나는 흑인이다.”
 
 
  피부 빛깔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1963년 시드니 푸아티에에게 흑인 최초로 아카데미 주연남우상을 안겨준 <들판의 백합>의 한 장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보면 우리는 푸아티에가 덕망과 실력이 대단히 훌륭한 의사여서, 백인들에게 주눅이 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상류층인 원로 언론인(스펜서 트레이시)이나 성직자 앞에서조차 전혀 위축된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푸아티에는 그의 첫 영화 <막다른 골목(No Way Out, 1950)>에서도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 리처드 위드막을 위시한 백인 집단의 편견에 맞서 싸우는 이지적인 의사 역을 맡았다. 그는 미련하고 순종적인 검둥이의 전형이 아니라, 사실상 주연급 배우로서 눈부신 연기력을 처음부터 과시해 크게 주목을 받았다.
 
  에반 헌터(Evan Hunter)의 사회비판적인 소설을 리처드 브룩스가 영화로 만든 <폭력교실(The Blackboard Jungle, 1955)>에서는 공부시간에 칼을 휘두르는 빅 모로우를 위시한 불량학생들에게 시달리는 선생 글렌 포드의 입장을 가장 먼저 이해하고 편을 들어 주는 아이가 시드니 푸아티에다. 그는 “흑인은 항상 백인보다 나쁘다”는 백인우월주의 공식을 파기한다.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학생들을 선도하려고 애쓰는 <폭력교실> 교사 글렌 포드의 역할을 푸아티에는 나중에 감동적이고 유쾌한 불량학생 영화 <언제나 마음은 태양(To Sir, With Love, 1967)>에서 그대로 물려받기도 한다.
 
  《쇼군(Shogun)》의 작가 제임스 클라벨(James Clavell, 1924~94)이 어느 흑인 교사의 실제 체험 기록을 각색하고 연출한 영국 영화 <언제나>를 미국에서 텔레비전극으로 재탕한 속편(To Sir, With Love II, 1996)은 무대를 시카고로 옮겼을 뿐, 상상력이 부족하여 똑같은 배경과 주제를 지나치게 안이한 방법으로 베껴 먹은 작품의 표본처럼 보인다.
 
  시드니 푸아티에 선생의 은퇴식에서 룰루가 다시 부르는 주제곡은 물론이요 거리로 인생 학습을 나가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내용을 비슷한 방법으로 되풀이하는 삽화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黑白의 두 경우
 
<밤의 열기 속에서>의 필라델피아의 민완 수사관 푸아티에와 무능한 백인 경찰관 워렌 오츠.
  영화나 문학에서는 읽기보다 쓰기가 당연히 먼저 이루어지고, 그래서 방법의 변화 또한 쓰기에서 먼저 보여줘야 옳겠다. 하지만 <언제나> 2편은 <날이 새면 언제나>의 낭만 시대, 그리고 30년 전에 만든 1편의 화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현재’의 상황을 얘기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까 틈이 생겨난다.
 
  학생들이 총질과 몽둥이 패싸움을 일삼아 입구에 금속탐지기까지 설치해 놓은 학교의 불량한 아이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푸아티에 선생에게 그렇게까지 쉽게 설득당하고 선량해진다면, 도대체 그들이 애초에 왜 불량학생이 되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30년 동안 현실이 달라져서,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뇌물 교육감과 촌지 선생이 상식화하고 일진회 조폭 수습생들이 사방에 깔린 상황에서는 ‘스승의 선도’라는 안이한 주제가 아예 시대착오적인 개념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을까? 무엇인가 간단하게 재탕을 하고 싶어하는 표절 취향의 사람들이 조금쯤은 주저해야 하는 이유다.
 
  <폭력교실>의 브룩스가 감독한 <흑아(黑牙, Something of Value, 1957)>에서는 케냐의 토인 푸아티에가 백인 록 허드슨과 농장에서 형제처럼 친하게 성장한다. 그러나 흑인 친구가 독립투쟁을 벌이는 마우마우(Mau Mau)족에 가담하면서 두 주인공은 대립과 죽음의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다른 인종이 친했다가 갈라지는 <흑아>에서와는 반대로 <흑과 백(The Defiant Ones, 1958)>에서는 쇠사슬로 손목이 함께 묶인 채로 탈옥한 백인 토니 커티스와 흑인 시드니 푸아티에가 처음에는 철천지원수처럼 서로 미워하다가 온갖 역경을 겪고 죽음의 위기를 몇 차례 넘기는 사이에, 서로 이해하고 아끼는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을 묶어 놓은 쇠사슬을 끊어 버린 다음에 시골 여자한테 속아 위험한 늪지대로 혼자 떠난 푸아티에를 구하기 위해 뒤쫓아 가는 커티스, 그리고 자유의 나라로 그들을 싣고 갈 화물차에 겨우 먼저 뛰어올랐던 푸아티에가 커티스를 끌어올리지 못하자 자신도 더 이상의 도망을 포기하는 장면은 당시의 인종적인 감각으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또 개를 끌고 나타난 추격대를 허탈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실신한 커티스를 끌어안고 흑인 노래를 부르던 푸아티에의 괴이한 목소리는 관객들에게 참으로 깊은 감명을 주었다.
 
  영화로 진출하기 전에 흑인 극단(The American Negro Theater) 소속으로 무대에서 연기력을 탄탄히 쌓았던 시드니 푸아티에는 이지적이고 섬세한 연기력을 <흑과 백>에서 아낌없이 발휘하여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 은곰상을 받았고, 같은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 겨우 1년 전 우리나라에 <흑아>가 수입되었을 때는 포스터에 이름조차 올려 주지 않았던 ‘무명’의 흑인 배우가 이제는 꿋꿋하고 강인하게 환난을 이겨내는 주인공으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흑인 최초로 아카데미 주연남우상을 받다
 
흑인 여성 극작가 로레인 한스베리의 브로드웨이 희곡을 영화로 옮긴 <월터의 선택> 포스터.
  흑인 최초로 그에게 아카데미 주연남우상을 안겨준 <들판의 백합(Lilies of the Field, 1963)>은 푸아티에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심각한 인종 문제나 사회적인 갈등 따위의 부담스러운 주제 때문에 전혀 긴장할 필요가 없이 옆으로 비켜나서 속 편히 즐겨도 좋은 아담하고 소박한 희극영화다.
 
  동독, 헝가리,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한 다섯 명의 수녀가 베를린 장벽을 넘어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미국 애리조나 사막지대까지 흘러와 어느 신자로부터 기부를 받은 ‘자갈밭’에 감자 농사를 짓는다. 그러다 땡전 한 푼 없이 일손조차 구하지 못해 고군분투하던 어느 날, 도로변 수녀원에 구세주처럼 시드니 푸아티에가 나타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 흑인 청년은 건축 중장비까지 자유자재로 만지며 집을 짓거나 보수하는 일이라면 무엇에나 능수능란하다.
 
  캘리포니아로 일자리를 구하러 가다가 자동차에 물을 채우러 잠깐 들른 그를 ‘하느님이 보내 주신 분’이라고 생각한 수녀원장은 “지붕을 잠깐 봐 달라”고 부탁하고는, 용돈이나 몇 푼 벌어 볼까 하는 단순한 생각에 한나절 작업을 끝낸 그에게 품삯은 주지 않고 대신 저녁과 잠자리를 제공하며 붙잡아 놓은 다음, 이튿날부터 온갖 잔머리를 굴려 가며 도랑을 파고 장작도 패라는 식으로 하나둘 오랫동안 밀렸던 일들을 그에게 시킨다.
 
  남자에 굶주린 여자들처럼 곁눈질하며 졸졸 따라다니는 수녀들의 애절한 눈초리를 차마 뿌리치지 못해 푸아티에는 결국 낮에는 차가 없는 그들의 운전수 노릇을 하고 저녁이면 덤으로 영어 회화까지 가르치다가, 혼자 힘으로 성당 한 채를 번듯하게 공짜로 지어 주고 서부의 방랑자 총잡이처럼 홀연히 떠나간다는 낭만적인 얘기다. 수녀원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달걀 하나에 역시 수녀들이 소에서 직접 짠 우유 한 잔으로 의자에 앉지도 않고 일어선 채로 10초 만에 빈약하기 짝이 없는 끼니를 때워 가면서 말이다.
 
  “노예한테 밥은 안 주려나?”라고 푸념하는 푸아티에의 표정, 에스파냐어로 불평을 늘어놓는 주민들과 성당 설계를 놓고 서로 사공이 되겠다고 독일어로 싸우는 수녀들, 그리고 ‘노예’ 품삯을 달라고 푸아티에가 성경을 들이밀고 누가복음 10장 7절을 인용하여 요구하자, 수녀원장이 잠언 1장 4절 그리고 영화 제목의 출처인 마태복음 6장 28~29절로 응수하는 장면은, 그런 웃음이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점잖게 포복절도할 대목들이다.
 
 
  ‘푸아티에’에 담긴 노예의 역사
 
영화 <폭력교실>의 한 장면. 불량학생들에게 시달리는 선생(글렌 포드)의 편을 들어주는 학생이 시드니 푸아티에다.
  흑인 여성 극작가 로레인 한스베리(Lorrain Hansberry)의 브로드웨이 희곡을 영화로 옮긴 <월터의 선택(A Raisin in the Sun, 1961)>은 아버지의 생명보험금 1만 달러 때문에 벌어지는 가족 파괴의 위기를 기록하는 섬세함이 단편소설집 《행동반경(Elbow Room, 1977)》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흑인 작가 제임스 앨런 맥퍼슨의 지독한 감수성에 필적한다.
 
  자가용 운전수로 평생을 보내지는 않겠다며 주류 유통업에 투자해 떼돈을 벌어 떵떵거리는 호강을 해 보려는 35살의 시드니 푸아티에,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당당한 신분상승을 하려는 여동생, 아침마다 공동화장실을 놓고 싸움을 벌여야 하는 임대 공동주택을 벗어나 꽃밭을 가꿀 마당이 딸린 하얀 2층 집을 꿈꾸는 어머니, 그리고 푸아티에의 허망한 대박 꿈과 그의 주변에 꼬여 드는 수상한 친구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임신 2개월의 아내—고달픈 흑인 인생의 무게에 눌려 살아가는 가족의 구석구석에서 배어 나오는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긴장관계가 한참 이어진다.
 
  그러고는 막상 보험금을 받은 어머니가 흑인이 한 명도 살지 않는 백인 동네로 가서 집을 사려고 계약금을 치른다. 하지만 어머니가 맡긴 나머지 돈 6500달러를 푸아티에가 사업에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해 동생의 학자금까지 몽땅 날려 버리면서, 가족은 모든 꿈과 희망이 무너지는 위기의 정점에 이른다.
 
  이런 와중에 이사를 며칠 앞두고 푸아티에 가족의 새집으로 지역 번영회 대표가 찾아온다. 한껏 예의를 갖춰 가면서 번영회장은 “우리 동네 사람들은 인종 편견 따위는 없지만, 모두의 행복을 위해 흑인은 자기들의 지역에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며 주민들이 모금한 돈으로 하얀 집을 되사겠다고 제안한다.
 
  한바탕 좌충우돌 갈등을 거친 다음, 다섯 세대에 걸쳐 조상이 노예로 살았던 푸아티에 가족은 “무지개는 비가 온 다음에야 떠오른다”는 어머니의 꿋꿋한 정신을 이어받아 결국 백인 지대로 당당하게 진입하는 도전을 시작한다.
 
영화 <흑과 백>에서 함께 탈옥한 백인 토니 커티스와 흑인 시드니 푸아티에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서로를 아끼는 친구가 된다.
  이쯤에서 이름에 관한 얘기를 좀 언급해야 하겠다. ‘Poitier’는 프랑스 성이어서 서양에서는 누구나 다 ‘푸아티에’라고 발음한다. 흑인 노예들은 백인 농장주의 성을 따르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시드니 푸아티에의 조상은 프랑스 농장주 소유의 노예였을 듯싶다. 아니면 덴젤 워싱턴의 조상처럼 노예들은 대통령이나 유명인의 성 가운데 아무것이나 가져다 쓰기도 했다. 그리고 덴젤 워싱턴이 주연했던 <말콤 X(Malcolm X, 1972)>는 마틴 루터 킹과는 대조적으로 급진적인 투쟁을 벌이다 암살을 당한 흑인 해방 운동가의 전기 영화로서, 말콤은 백인의 성 ‘리틀(Little)’을 버리고 대신 X를 취한 인물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와는 달리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푸아티에의 성을 ‘포이티어’라는 일본식 표기를 그대로 따르는데, 이것은 모리스 슈발리에(Chevalier)를 모리스 ‘체발리어’라고 부르는 격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월터 매타우도 월터 ‘매토’라 하고, 해리 포터 소설의 작가인 ‘조운’ 롤링(Joan K. Rawling)까지도 ‘조앤’ 롤링이라는 잘못된 표기를 국가에서는 악착같이 고집한다. ‘조앤’은 Joan이 아니라 Josephine과 Anne을 결합한 Joanne이라는 이름이 따로 있다.
 
  언젠가 어느 신문의 연예 기자가 국제영화제에 갔다가 “워렌 비티를 만나서 인터뷰를 하자고 그랬더니 자기 이름은 워렌 비티가 아니라 워렌 베이티라면서 기분 나빠하더라”는 체험담을 텔레비전에 나와서 털어놓기도 했는데,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국제적인 인물에게 대화를 나누자고 요구하는 행위라면 결코 올바른 예우가 아니겠다.
 
  영화배우 출신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리건’이라고 표기하여 한국 언론이 주한미국대사관으로부터 표기법을 수정해 달라고 창피한 공식적인 요청을 받기도 했었는데, 로널드 Reagan과 워렌 Beatty에서처럼 겹모음 ea는 하나의 장모음 ‘이—’가 아니라 ‘에이’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뒤바뀐 ‘미천한 흑인’과 ‘잘난 백인’의 위치
 
안정효가 그린 시드니 푸아티에 캐리커처.
  <들판의 백합>과 <어느 헤비급 복서를 위한 진혼곡>을 만든 랄프 넬슨 감독의 서부극 <디아블로 요새(Duel at Diablo, 1965)>를 보면, 백인 도박사처럼 멋진 옷차림의 시드니 푸아티에가 기병대 장교나 주인공 제임스 가너보다 훨씬 더 뛰어난 솜씨를 보이며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지휘력을 발휘한다. 백인을 능가하는 이런 푸아티에의 위상은 <밤의 열기 속에서(In the Heat of the Night, 1967)>에 이르면 숨이 막힐 지경으로 팽팽한 긴장의 상황을 자아낸다.
 
  어머니를 만나러 멤피스로 가던 필라델피아의 민완 수사관 푸아티에는 기차를 갈아타려고 소도시 스파르타의 역에서 기다리다가 무능한 백인 경찰관 워렌 오츠에게 살인 혐의로 체포돼 경찰서로 끌려간다. 그래서 이루어진 흑인 수사관과 백인 경찰서장 로드 스타이거의 만남과 대립은 처음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관록과 관례에 크게 의존하며 나름대로 유능하게 임무를 수행해 온 스타이거 서장은 붙잡혀 온 흑인이 자신보다 봉급이 훨씬 많다는 사실에서부터 심기가 불편해진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인종적 우위를 탈환하기 위해 다각도로 사납게 공격을 계속하지만, 푸아티에의 정체가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양파처럼 알맹이가 사라지기는커녕 반대로 점점 자기보다 훨씬 우수한 경찰관임이 확실해진다. 그리고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의 비밀을 풀어내는 푸아티에의 솜씨를 보고 스타이거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자존심과 경쟁심을 포기하고는 수사 협조를 요청한다.
 
  그리하여 미천한 흑인과 잘난 백인의 위치가 조금씩 바뀌고, 흑인의 수사를 받는 백인들의 반발은 폭력으로까지 발전한다. 푸아티에가 검시(檢屍)를 하려고 ‘심부름’을 시키면 장의사가 아니꼽다며 마룻바닥에 침을 뱉고, 살해된 기업인의 아내를 위로하려고 푸아티에가 다가서면 손이 닿을까 봐 여자가 질겁하고, 유치장에 갇힌 무고한 백인 청년은 그의 혐의를 벗겨 주려는 흑인에게 “백인처럼 차려입고 뭘 하자는 거냐”고 따지면서 덤빈다.
 
  <밤의 열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살인범의 배후라고 푸아티에가 의심하는 농장주를 스타이거와 함께 저택으로 찾아가 온실에서 만날 때 벌어진다. 수많은 흑인을 부리며 옛날식으로 목화를 재배하는 지역 최고의 실력자인 농장주는 한껏 예의를 갖추고 온실에서 두 사람을 맞아 주며 “흑인들처럼 먹여 주고 보살펴 줘야 하기 때문에 난을 좋아한다”고 나름대로 ‘검둥이’들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그냥 내버려두면 굶어 죽을 정도로 무능력한 검둥이들을 거두어 보살핀다”는 이런 독선적인 시각은, 영화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KKK 활동을 미화한 마거릿 밋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끈질기게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바람》의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그토록 짝사랑하는 애슐리 윌크스는 쿠 클럭스 클란 단원이다.
 
  <밤의 열기>에서는 두 경찰관과 대화를 계속하던 농장주가 자신이 ‘깜둥이에게 심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격분하여, “옛날 같았으면 벌써 널 쏴 죽였을 거야”라면서 푸아티에의 뺨을 때리고, 푸아티에는 즉석에서 백인 농장주의 뺨을 마주 때린다.
 
 
  흑인 부함장이 백인 함장을 체포하다
 
덴젤 워싱턴 캐리커처.
  NBC 텔레비전의 인기 첩보 활극 <나는 스파이(I Spy, 1965~68)>에서 백인 첩보원 로벗 컬프와 함께 맹활약을 펼치는 흑인 동료로서 수많은 백인과 격투를 벌였던 빌 코스비는 “흑인이 백인을 두들겨 패는 날이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라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밤의 열기>에서 시드니 푸아티에가 가차없이 내지른 반격은 로드 스타이거 경찰서장의 안목을 한꺼번에 바꿔 놓는다. 흑인에 대한 스타이거의 인습적인 편견과 경멸은 경악을 거쳐 푸아티에에 대한 존경심으로 바뀐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차를 타러 가는 푸아티에의 무거운 가방을 들어다 주며 검은 안경을 쓰고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스타이거의 모습은 그래서 희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흑백의 자리바꿈은 <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 1995)>에서, 소련이 붕괴한 직후에 반란 집단이 미국과 일본에 핵 공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하자, 이에 대응하려고 발진한 핵잠수함의 진 해크먼 함장과 덴젤 워싱턴(Denzel Hayes Washington, Jr., 1954~ ) 부함장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캄차카 해역에서 소련 잠수함의 공격을 받기 직전에 사령부에서 하달된 EAM(emergency action message, 긴급작전명령)과 교전 중에 불완전하게 수신한 두 번째 EAM의 해석을 놓고 대립한 함장과 부함장은 결국 선상반란(mutiny)으로 이어져 흑인 부함장이 백인 함장을 체포하고 지휘권을 찬탈한다.
 
<크림슨 타이드>에서 핵잠수함 부함장으로 등장한 덴젤 워싱턴.
  하지만 관객은 이것을 흑백의 대립이 아니라, <밤의 열기 속에서>의 스타이거 경찰서장처럼 유능하지만 섬세하지 못하면서도 절대권력을 원하는 독선적인 지휘관과 냉철하고 이론적인 부함장의 대결로 파악하게 된다. 핵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백전노장의 저돌적인 추진력을 발휘하여 핵탄두 유도탄으로 소련 본토를 공격하려는 해크먼 함장과 실전경험은 전혀 없지만, 전쟁사와 전술에 능통하며 “핵전쟁에서는 진짜 적이 러시아가 아니라 핵무기이며, 인간은 무기를 이기지 못한다”는 원칙을 믿는 워싱턴 부함장의 충돌에서는 흑백 대립의 주제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위기를 넘기고 난 다음 군사재판에서 내리는 결론은 물론 “강력한 추진력은 정확한 정보를 수반해야 한다”는 화해의 원론에 머물고, 퇴역하는 해크먼이 후임으로 워싱턴을 추천하고 두 사람이 미소를 주고받는 상투적인 종결이 이루어진다.
 
 
  푸아티에 영화와 워싱턴 영화의 뚜렷한 경계
 
<영광)>의 한 장면. 1989년 덴젤 워싱턴은 반항적인 ‘흑인 병사’의 역을 맡아 아카데미 조연남우상을 받았다.
  대립 구도는 영화에서 긴장과 흥미를 살려내는 필수적인 장치다. 긴장과 위기가 겹으로 작동하면 흥미는 배가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상승효과 때문에 3배나 4배로 뛰어오른다. <흑과 백>이 탈옥이라는 추격전(chase) 주제에 흑백의 대립을 중첩하고, <밤의 열기>에서는 살인범을 추적하는 상황이 흑백 주제와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이중 구도의 긴장 증폭이 이루어진다.
 
  반면에 <크림슨>은 적과의 대결과 내부의 대결을 쌍립시키지만, 냉전과 하극상 주제는 둘 다 워싱턴 흑인 영화에서는 식상한 장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푸아티에 영화에서 강렬하게 부각되는 흑백 문제는 우리나라의 종북(從北)세력 논란처럼 당시까지는 함부로 사람들이 입에 올리지 못했던 주제로서, 푸아티에 영화와 워싱턴 영화의 뚜렷한 경계를 이룬다. 새로운 주제에 도전하는 개척자라면 힘겨운 도전을 당연히 이겨내야 하지만, 그래서 얻는 업적과 보람 또한 그만큼 커지기 마련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찰스 풀러(Charles Fuller)의 희곡이 원작이며 덴젤 워싱턴의 초기 작품인 <어느 병사의 이야기(A Soldier's Story, 1984)>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흑인으로만 구성된 전투부대에서 노병 선임하사가 권총으로 사살된 사건을 조사하러 워싱턴으로부터 파견된 흑인 법무관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흑인 장교라고는 본 사람이 거의 없고, 더구나 유력한 혐의자로 몰린 백인 장교들까지 수사할 권한을 행사하려는 흑인 대위의 출현에 백인들은 긴장하고, 흑인 병사들은 신이 난다.
 
  <밤의 열기 속에서>처럼 신경질적인 대립이 시작되고, 누군가 거울에 인종차별적인 낙서를 남겨 놓는가 하면, ‘라쇼몽(羅生門)’ 식으로 여러 증인이 제시하는 진실의 껍질들이 하나씩 벗겨지자, 백인 사령관과 흑인 수사관의 추측을 엉뚱하게 벗어나 덴젤 워싱턴 병사가 살인범으로 밝혀진다.
 
  <어느 병사>에서는 범인을 추적하는 줄거리의 궤도 속에 하극상 병영 주제를 깔고, 관객이 당연히 예상했던 백인 장교들과 흑인 병사들의 대립이 아니라, 흑인 선임하사와 흑인 병사들 간의 흑흑 대결이 벌어진다. 그리고 결국 워싱턴과 대립하는 선임하사의 ‘악질적인’ 인간성이 관심의 초점으로 떠오른다. 흑인 병사들의 군기와 긍지를 살리겠다며 부하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늙은 선임하사는 노래나 부르고 놀기를 좋아하는 어리석은 ‘깜둥이’들의 엉성한 정신상태 때문에 같은 흑인인 자신의 위상까지 덩달아 떨어진다고 믿으며, 그래서 백인 장교들보다도 훨씬 더 가혹하게 부하들을 들볶아 댄다. 자신이 백인에게 당한 굴욕과 차별을 다른 병사들에게 분풀이하는 선임하사의 행태는 시어머니에게 당한 그대로 며느리에게 자행했던 옛날 한국 여인들의 우매함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1989년 반항적인 ‘흑인 병사’역으로 아카데미 조연남우상
 
<펠리칸 브리프>에서 워싱턴은 로벗 컬프 대통령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민완 기자로 분한다.
  비뚤어진 자존심과 열등감으로 인해 같은 흑인들을 경멸하는 선임하사 때문에 자살을 하는 병사가 생겨나고, 그래서 사사건건 부사관과 충돌하는 워싱턴 병사는 이렇게 통렬히 묻기도 한다.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생겨먹은 검둥이요?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요? 영국에서 왔어요?”
 
  이렇게 워싱턴은 흑인의 자유를 찾기 위해 흑인과 싸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영화배우 덴젤 워싱턴은 부모가 갈라선 다음, 미용실을 운영하던 어머니의 강한 교육열에 힘입어 대학 두 곳과 대학원에서 연극과 언론학을 전공했으며, 이것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언젠가 그는 술회했다. “어릴 적에 친했던 친구들이 교도소에서 보낸 기간을 모두 합치면 40년이나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워싱턴이 뒷골목 깡패가 되지 않았던 까닭은 16살이었던 그를 ‘인간 재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군사학교(Oakland Military Academy)로 보내기로 했던 어머니의 결단력 때문이었다고 그는 믿는다.
 
  이런 교육적인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크림슨 타이드>의 이지적인 해군 장교나 <어느 병사의 이야기>에서 맡은 고달픈 ‘졸병’의 배역이 썩 잘 어울려 보인다. 그리고 그는 <영광(Glory, 1989)>에서도 역시 반항적인 ‘흑인 병사’의 역을 맡아 아카데미 조연남우상을 받아 낸다.
 
  남북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무렵인 1862년에 흑인으로만 구성된 최초의 부대(colored regiment)를 창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지원자들이 몰려든다. 이들은 매튜 브로데릭 대령의 지휘하에 강훈련에 돌입하지만, 백인 병사보다 봉급을 4분의 1밖에 받지 못하는가 하면, 가혹한 훈련에 발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어도 신발조차 지급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 그리고 백인 병사들의 멸시와 차별은 바깥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런 여건에서는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겠다면서 분노하고 저항하다가 최초의 탈영병이 된 워싱턴 훈련병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고 40대의 채찍을 맞는다.
 
  험난한 훈련을 겨우 끝낸 다음 보충대로 이동한 병사들은 어서 전선으로 나가 전투에 임하고 싶어하지만, 지역 사령관은 그들을 전투지로 보내지 않고 대신 온갖 사역(使役)을 시키며 노예로 부려 먹기만 한다. 후방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백인 사령관을 워싱턴에 고발하겠다고 브로데릭 대령이 협박한 다음에야 겨우 전선으로 나가게 된 흑인 부대는, 바닷가에 있는 와그너 요새를 공략하는 선발대로 나가겠다고 지원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마지막 전투에서 워싱턴과 함께 가장 먼저 전사하는 브로데릭은 돌격이 시작되기 직전에 취재를 나온 종군기자들한테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죽더라도, 여러분은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를 잊으면 안 됩니다.(If I fall, remember what you see here.)”
 
 
  덴젤, 시드니의 ‘흑인’ 영토를 크게 확장
 
워싱턴은 푸아티에가 구축한 ‘흑인’ 영토를 넓혔다.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은 오랫동안 백인들만의 직업이었던 변호사로 분했다.
  덴젤 워싱턴은 <필라델피아(Phila delphia, 1993)>에서 오랫동안 백인들만의 직업이었던 변호사가 되고, 케네드 브래노가 같은 해에 만든 셰익스피어의 희극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에서 얼굴을 검게 칠한 백인 대신 진짜 검은 얼굴로 아라곤의 군주 역할을 맡았고, <초강력형사 퀸(The Mighty Quinn, 1989)>에서는 카리브해의 어느 섬에서 새하얀 제복에 검은 안경을 쓰고 검은 얼굴에 하얀 치아를 반짝이는 멋쟁이 현지인 경찰서장으로 맹활약을 벌인다.
 
  이렇게 은막에서 흑인 ‘고유’의 역할을 탈피한 워싱턴은 “우선 미국인, 그다음으로 배우, 마지막으로 굳이 따지자면 흑인”이라던 시드니 푸아티에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셈이다.
 
  <펠리칸 브리프(The Pelican Brief, 1993)>에서 워싱턴은 로벗 컬프 대통령의 정권을 무너트리는 민완 기자로서 거의 구세주에 가까운 능력을 과시한다. 24살의 법대생 줄리아 로버츠는 펠리칸의 서식지와 대법관 두 명의 암살을 연결하는 고리가 석유 재벌의 정치자금이라는 개요서를 작성했다가 막강한 권력의 거대한 음모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리고 사방에 우글거리는 수상한 남자들로부터 총체적인 추적을 당하는 무력한 그녀를 지켜 주는 마지막 보루가 흑인 기자 워싱턴이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끊임없이 위기가 이어지는 존 그리샴(John Grisham) 원작의 소설적 위기 상황이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압도하는 바람에 사실 등장인물들은 줄거리 전개의 도구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탓도 있지만, <펠리칸>의 워싱턴은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갖지 않는다.
 
영화 <트레이닝 데이>의 포스터. 덴젤 워싱턴은 흑인 판 더티 해리로 출연하면서 2001년 아카데미 주연남우상을 수상했다.
  얼굴의 용모까지도 백인적(Cauca sian)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고상하고 이지적인 은막의 인간형으로 굳어져 가던 덴젤 워싱턴은 <트레이닝 데이(Training Day, 2001)>에서 흑인 판 더티 해리로 파격하면서 아카데미 주연남우상을 타내는 쾌거를 이룬다. 그리고 워싱턴이 여기에서 뒤집기를 거쳐 그려내는 ‘파시스트’ 형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식 카우보이 경찰관에 시대적 가치관의 변이를 가미한 모습이다. 체제를 무시하고 스스로 법을 집행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집행자(vigilante)라기보다는 악의 소굴에서 지나치게 오랫동안 살아 오고 활동한 결과로 윤리 감각이 오염되어 선과 악의 분별력이 크게 흐려진 인간이다.
 
  LAPD 마약단속반으로 발령을 받은 백인 신참 이탄 호크는 ‘훈련받는 날’에 담당 구역을 처음 답사하면서, 혁혁한 업적을 뒷받침해 온 그의 크롬 쌍권총을 아무 데서나 휘두르는 13년 고참 워싱턴의 경험론을 전수받는다. 규칙보다는 능률적인 반칙으로 정신없이 밀어붙이며 백인 신참 길들이기에 나선 워싱턴은 “걸레는 걸레처럼 다뤄야 한다”거나, “늑대로부터 양을 보호하려면 스스로 늑대가 되어야 한다”면서, 결국 하루 만에 ‘더 높은 다른 세상’을 보는 시각을 갖추도록 단단히 호되게 계몽하여 신참 호크의 의식구조를 오염시키는 데 성공한다.
 
  백인 신참 호크는, 고참 워싱턴이 다른 몇 명의 악덕 단속반원들과 짜고서 오랜 친구인 경찰 출신 마약상 스콧 글렌을 ‘급습’하여 살해하는 ‘영웅적인 공훈’을 세우고는, 글렌에게서 압수한 거액의 돈을 분배하여 착복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백인이 흑인을 멸시하는 호칭인 ‘깜둥이(nigger)’라는 말을 흑인에게서 들어 가며 하루의 훈련을 마치고선, 청교도적 윤리관이 무너지고 50년이 지난 시점에 서서, ‘증명을 못하면 진실이 아니다’라는 원칙이 어째서 생겨났는가 하는 가혹한 현실만큼은 확실하게 깨우치게 된다.
 
  그러나 폭력의 벼랑 끝에서 살아가던 무자비한 고참 워싱턴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법칙의 함정에 빠져 길바닥에서 개처럼 무참한 죽음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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