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불법체류자로 쫓겨나야 할 처지이나 머지않아 한국 국민으로 당당히 정착하리라 확신해요. 그때가 되면 한국인이고, 조선족이고 하는 구분도 사라지게 될 겁니다”
⊙ 조선족은 경계인. 한국의 재외동포이자 중국 소수민족
⊙ “한국은 故國이 아니라 苦國”
⊙ “조선족은 외로워서 사고 치는 것이죠”
⊙ 억울한 일을 겪었을 때 해소할 대상이 없는 조선족들이 한국을 ‘타향’으로 인식해
⊙ “세상 어디에 동포를 불법체류자로 만드는 민족이 또 있나?”
취재지원 : 金容載 月刊朝鮮 인턴기자
⊙ 조선족은 경계인. 한국의 재외동포이자 중국 소수민족
⊙ “한국은 故國이 아니라 苦國”
⊙ “조선족은 외로워서 사고 치는 것이죠”
⊙ 억울한 일을 겪었을 때 해소할 대상이 없는 조선족들이 한국을 ‘타향’으로 인식해
⊙ “세상 어디에 동포를 불법체류자로 만드는 민족이 또 있나?”
취재지원 : 金容載 月刊朝鮮 인턴기자

-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중국인 거리.
따지고 보면, 그들은 항상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왔다. 한국의 여느 식당에서, 거친 공사장에서, 한증막 같은 농촌 비닐하우스, 뙤약볕 배추밭에서 그들은 명함이 필요 없는 일터에서 땀을 흘렸던 것이다. 그들의 노동은 더는 한국인의 손이 미치지 않거나 거부한 곳에서 이뤄졌다. 그들의 말투는 이북 사투리와 구분이 어렵다. 또 그들의 잠자리는 한국인이 떠난 도심 변두리이다.
서울주민이 아니더라도 구로디지털단지역과 가산디지털단지역을 한번쯤 지나쳤을지 모른다. 한국에서 가장 긴 역 이름이다. 몇 년 전만 해도 구로공단역과 가리봉역으로 불렸다. 한때는 섬유·봉제·전자부품 공장들로 비좁았던 곳, 그 주변의 남루한 쪽방촌에서 수많은 여공(女工)이 고단한 삶을 버텼다. 어느덧 1990년대 들어 공장과 노동자들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중국 동포들이 터를 잡기 시작했다.
서울 가산동, 가리봉동, 대림동, 자양동, 경기 안산 원곡동 주변에서 조선족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그곳에서 낯선 중국 간판과 상인들, 키 작은 노동자의 옷, 이북 사투리를 접하면,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에서 묘사된 눅눅한 공단의 풍경이 생생한 현실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사실, 한국인이 조선족, 그들에게 덧씌운 이미지는 ‘불법체류자’다. 수많은 농촌 총각을 울렸던 조선족과의 결혼 브로커 사건도 연상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한국인 누구도, 조선족 동포들이 외치는 “한국은 고국(故國)이 아니라 고국(苦國)”이라는 말에 귀기울인 적이 없었다.
조선족은 境界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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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원춘 사건 직후 조선족이 밀집해 사는 영등포구와 구로구 등지에 배포된 ‘칼·흉기 휴대 금지’ 요청 유인물. |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부모들은 구한말(舊韓末) 생존 투쟁과 반일(反日) 운동, 6·25 사변과 중국 혁명을 경험하며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조선족의 한국행이 가속화되면서 ‘민족’과 ‘국적’ 간의 괴리감을 체감하면서 점점 이중 정체성이 현실로 다가왔다.
건국대 인문한국(HK)지원사업 연구소인 통일인문학연구단 이병수 교수는 이들의 정체성을 ‘코리안 트라우마(Korean Trauma)’로 설명한다. 코리안 트라우마란 역사적 격변기를 거친 재외동포의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분열 내지 혼란을 의미한다.
이 교수는 “코리안 트라우마에 영향을 받는 이들은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인지하지만, 한국사회에 대한 귀속 정도가 낮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원인은 민족적 동포애가 결여된 남한 주민의 개인주의적이고 같은 민족을 차별하는 삶의 방식에 기인한다”며 “경제수준, 사고방식 등으로 인한 민족 내부의 위계화는 향후 통합을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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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호형 목사. |
심리학에서는 이런 정신적 결함을 ‘자기애성 성격장애’라 규정한다. 자신을 포장하기에 몰두하거나 특정 가치와 이념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무엇인가에 미친 듯 매달림으로써 자기애를 특정 대상에 투사(Projection·자신의 허물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하는 것이다.
이 목사는 “한국에서 일하는 동포를 보면, 얼굴이 그을려 까무잡잡하고 말이 어눌하며 복장도 보잘것이 없어 같은 핏줄이라는 동류의식을 갖기 어렵다”며 “자신을 존중하고 존중해 주는 문화적 훈련이 안 돼 조선족에게 자신의 열등감을 투사시켜 혐오한다”고 말한다.
한국 식당은 망해도 조선족 식당은 안 망해
지난 4월 30일, 오원춘 사건이 발생한 수원시 팔달구 지동으로 향했다. 지하철 세류역에서 내려 지나가던 택시를 잡았다. “지동에 살인사건 난 곳으로 가달라”고 하자 택시기사는 “지동초등학교요?”라고 반문했다. 그 기사는 혼잣말하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요즘 수원에 조선족 사람들 많아요. 특히 공장 많은 화성, 발안 쪽에 조선족들이 많은데 밤에는 (택시들이) 그쪽으로 안 가요. 조선족들은 대부분 일용직 근무하는 사람들이라 연장을 들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도 했다. “조선족 여자들 없으면 수원 식당 반이 문을 닫아야 한다”고. 그만큼 수원에 조선족 여자들이 많다는 얘기였다.
“중년남성이 많이 찾는 야간업소에 조선족 여자들이 많이 다니는데 그녀들은 한국 남자한테 먼저 다가가 사귀자고 합니다. 생활력 하나는 인정하죠. 부근 조선족 사람이 가게를 내면 다른 조선족 사람들이 그곳으로 찾아갑니다. 특히 수원 역전 상권은 이미 조선족이 점령했다고 해요. 조선족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촘촘히 연결돼 있어 누가 식당을 개업하면 아무리 멀어도 찾아갑니다. 한국 식당은 망해도 조선족 식당은 망하지 않아요.”
어느덧 지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학교 옆 건물 2층에 ‘우만 건축인력개발’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무작정 올라가 작업반장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저희 소개소는 한국 사람과 조선족 거의 반반이다. 조선족 분들은 건설현장 일용직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조선족과 관련한 사건이 잦은 이유는 뭘까. 반장의 대답은 명료했다.
“첫째는 조선족들은 돈 벌려고 낯선 땅에 온 겁니다. 사고를 치더라도 가버리면 그만이죠. 책임에서 한국인보다 자유롭지요. 두 번째는 대부분 혼자 한국에 옵니다. 가족과 함께 오는 경우는 드물죠. 그만큼 외롭습니다. 외로워서 사고 치는 것이죠. 한국인과 조선족이 어울리기는 쉽지 않아요. 시간이 지나도 그 벽을 못 넘습니다. 조선족들은 대개 술, 담배를 다 잘해요. 한국 소주는 술 같지가 않다고 할 정도니까요. 주량이 소주 4~5병이라면 믿겠습니까.”
슬그머니 오원춘 얘기로 넘어갔다. 반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작년 봄에 두 번 정도 왔었습니다. 말수는 적었는데 덩치가 크고 인상이 상당히 강해 기억에 남아요. 그러니까… 질문에 단답형으로 말하던 게 생각이 납니다. ‘주특기가 뭐냐’는 질문에 ‘곰빵’이라고 짧게 답하더군요.”
‘곰빵’이란 벽돌 운반을 뜻하는 ‘노가다’ 일꾼들의 은어다.
주특기는 ‘곰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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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동포들의 밀집지역인 영등포구 대림동 중앙시장 일대에서 경찰관과 중국동포 자율방범대원들이 함께 흉기소지와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 안내가 적혀 있는 전단을 배포하며 순찰활동을 벌이고 있다. |
“우리 교회는 중국인 예배가 활성화돼 있습니다. 예전에 조선족 목사님이 계셨었는데 그분이 선교 목적으로 중국어 예배를 만들었어요. 그땐 조선족 신자가 300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40~50명 수준입니다. 주로 식당, 공장에서 일하시는 여자 조선족 분들과 경기대, 수원대 유학생들이 다닙니다. 일용직 남자 조선족 분들은 거의 오지 않습니다.”
오원춘 사건 이후 교인들이 조선족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이 달라졌는지 물었다. 사무장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특정 사람의 문제지 어떻게 조선족 전체를 매도하나요. 우리 교회 조선족들은 한국인과 잘 융화되고 있어요. 주일에 점심도 같이하고, 저녁에는 잠자리도 제공하죠. 조선족들이 한국에 온 목적은 돈 벌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외로움이 문제입니다. 외로움을 서로 달래줘야 해요.”
사건 현장 부근에서 여러 주민을 만났다.
주민 A씨는 “여기 지동 주민의 10%가 조선족이에요. 친한 조선족들이 있었는데 사건 이후 자격지심 때문인지 요새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일자리도 많이 사라졌어요. 여자 조선족들 대부분이 발안 쪽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이목 때문인지 미용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근처에서 배회하다 간다는 얘기도 들립니다”고 했다.
주민 B씨는 “조선족 남자들의 외로움이 문제예요. 옛날 구천동 골목에 사창가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어요. 여자들이야 식당·편의점에서 일할 수 있지만, 남자들은 노가다 말고는 할 게 없어요. 그러니 술을 마시죠”라며 혀를 찼다.
조선족은 칼을 차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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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룡 중국동포연구소장. |
“2007년쯤인가? 《국민일보》를 비롯해 수많은 언론이 ‘옌볜 흑사파’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어요. 그중 한 언론이 ‘옌볜 흑사파가 가리봉 시장골목에서 백주에 도끼를 차고 다니며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 일대 상인들이 방탄복을 입고 영업한다’고 썼더군요. 가리봉동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집집이 돌며 확인하니 상인들 역시 금시초문이란 겁니다. 정말 황당했어요.”
그는 “다수 한국 언론은 조선족 살인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강냉이 뻥튀기 식으로 잔뜩 부풀려 보도한다”고 했다. “사실 관계를 명확히 확인하지 않은 기사들은 결국 한국인이 조선족 사회를 미워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며 씁쓸해했다.
‘소수’와 ‘약자’의 경험과 시련
같은 민족이자 중국 국적이라는 이중성은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이 분열된 양상으로 존재한다. 중국에서 조선족의 위상과 한국에서 조선족의 위상이 ‘이중 차별’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한 것이다.
그 위상은 재일조선인이 느꼈던 정체성 혼란과 맥이 닮았다.
건국대 김익현 HK 교수는 “재일조선인은 일본인으로부터도, 같은 민족인 남한사람으로부터도 차별을 받았고 이러한 ‘이중 차별’이 독특한 민족정체성을 형성했다”며 “재일조선인들은 거주국의 차별과 배제의 정책과 문화에 저항하고 적응하는 과정에서 민족정체성을 변용시켰다”고 했다.
조선족들은 중국 내의 소수민족으로 ‘소수’와 ‘약자’의 경험과 시련을 겪어왔다. 또한 고국인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소수’와 ‘약자’의 경험을 또다시 겪었다. 이런 경험은 심리적으로 정체성 혼란을 야기한다. 사소한 일에 피해의식을 갖게 하고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축적시킨다. 그리고 때론 극단적으로 감정을 투사한다.
지난 4월 6일 영등포의 한 직업소개소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조선족 이모(37)씨. 그는 중국에서 식당 종업원, 택시운전사 등을 하다가 지난해 6월 한국에 입국했다. 2003년에도 입국했으나 불법체류로 이듬해 추방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지난 1월 이 직업소개소의 소개를 받고 충남 아산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2개월 동안 일하며 400만원을 받기로 했으나 회사는 그에게 280만원만 주었다. 120만원을 받지 못하자 그는 직업소개소를 찾아가 항의했다.
마침 여직원이 “회사에서 돈을 안 주면 우리가 노동청에 신고해 주겠다”고 달랬다. 흥분이 가라앉을 즈음, 직업소개소 소장이 들어와 “떠들지 마라. 여기는 돈 받아주는 곳이 아니다”라고 나무랐다. 순간 이씨는 가방에서 흉기를 꺼내 휘둘렀다. 그 칼은 혼자 생활하던 그에게 꼭 필요한 조리용 부엌칼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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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렬 《동북아신문》 대표. |
타향의식은 조선족의 고향인 중국 동북 3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족 집거지가 해체되고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사실, 만주의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은 과거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영토다. 조선시대 말부터 한반도에 거주하던 한민족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주해 살던 곳이다. 그러나 젊고 어린 조선족들이 중국 대도시와 한국 등지로 떠나면서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있다. 이동렬 대표는 “농어촌이 황폐화되고 조선족 학교가 많이 폐교되는 바람에 민족교육을 체계적으로 할 수 없어 한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며 “과거 동북 3성 농촌지역에 조선족이 100가구 살았다면 지금은 10~20가구도 남지 않았다”고 했다.
고향의 붕괴와 집거지 해체는 조선족의 의식 속에서 점점 한국은 물론 중국을 타향처럼 느끼게 한다. 뿌리가 사라진 상실감은 정처없이 떠도는 ‘부랑의식’을 낳게 마련이다. 이들은 향후 한국과 옌볜, 중국 대도시 등지를 떠도는 국제 미아(迷兒)가 될지도 모른다. 이 대표의 계속된 지적이다.
“국제 아이(international child)라고 하는 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붙여진 이름이죠. 아이들은 눈이 열려 세상에 나가기 전에 자신의 뿌리의식과 소속감, 동족 및 자문화와의 정체감, 그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담아 들이기 전에, 시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죠. 당신이 만약 ‘세계 시민’이라면, 아무 나라의 시민도 아니라는 얘기와 같습니다.”
| [한국인과 조선족의 온라인 공방] “조선족은 도끼, 칼에 익숙하다” vs. “무슨 삼국시대 얘기야” 오원춘 사건을 두고 한국인 네티즌과 중국인 네티즌의 공방이 뜨겁다. 조선족 커뮤니티(www.moyiza.com)에 등장하는 양자 간 공방이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성채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한국인 네티즌의 폄훼와 부정, 편견에 대해 조선족은 울분을 감추지 못한다. 부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한국인 “중국 본토 내 소수민족 중 조선족은 중국에서 가장 신임하지 않는 종족이다. 중국신문 사설에서조차 중국 땅을 떠나길 바라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족 “(우리는) 중국에서 집 한두 채씩은 지니고 산다. 차도 있고, 고기도 냉장고에 쌓아놓고 사는데 어딜 떠나래? 떠나면 북으로 가야 하니? ‘미국 강아지국’에 가야 하니?” ▶한국인 “조선족 체형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키가 작거나 180cm 이하에 농사일을 많이 해 악력이 좋은 편이다. 또 하나는 보통 키에 등짝이 역삼각형 덩치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등에 문신을 하고 조선족 마을에서 건달 행세하거나 흑사회 옌볜지부(삼합회)에서 중국인 조폭들 똘마니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족 “너희 똑똑한 머리로 생각해 봐도 이런 말이 웃기지 않니? 어이 상실이다. 입장 바꿔 너희를 함부로 묘사하면 기분이 어떻겠니?” ▶한국인 “조선족은 중국에서 가축, 도살 등의 일과 약재 캐는 일, 도끼로 나무 잘라 목재 파는 일, 어선 불법조업 등의 일을 하면서 활·총·밧줄·도끼·작두·톱 사용에 익숙하다.” 조선족 “뭐… 나무 잘라? 활? 도끼? 칼에 익숙? 무슨 삼국시대 얘기야.” ▶한국인 “조선족들은 대체로 사람이나 가축이나 똑같이 판단하기 때문에 사람 죽일 때도 패턴이 가축 죽이는 것과 똑같다.” 조선족 “조선족도 사람은 사람으로 보이고 개는 개로 보인다. 다 웃고 넘길게. 너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좀 더 살아봐라.” |
재미·재일교포와 다른 조선족 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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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지하철 대림역 인근의 한 직업소개소 앞에서 조선족 출신 한 노인이 구인광고를 보고 있다. |
“조선족은 만주시절부터 그 땅에 가서 토지를 개척하여 생계를 유지해 왔고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면서 항일도 하고 국민당과도 싸우고 신중국 건설에 피와 땀을 흘렸으며 목숨까지 바쳤죠. 이런 맥락으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저항해 조선을 돕는다는 뜻으로 6·25 전쟁을 지칭)’에도 적극 참여했어요. 중국 사회주의 건설에 직접 참여했기에 중국 공민권을 얻고 주인의식으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반면 재일교포는 수십 년 일본 열도에서 살았어도 국적은 여전히 한반도이기 때문에 거주국에 대한 애정이 조선족과 비교하면 발바닥에도 못 미칩니다. 그들은 일본에 대한 애정이 결핍되어 있어 만약 한국과 일본이 축구경기를 할 경우 당연히 한국을 응원하죠. 그러나 조선족은 다릅니다. 고국인 한국과의 문이 닫혀 있습니다. 양모가 잘 길러준 아이한테 생모가 갑자기 나타나 ‘너 누구 편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질문자가 상식이 없다고 비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牧丹江市) 출신인 건국대 국제무역학과 황명호(黃明浩) 조교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철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고 말한다. 황 교수는 베이징대와 서울대 경영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조선족 3세이다.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왜 중국인들은 우리를 한국인처럼 생각하고, 한국인은 우리를 중국사람처럼 대할까.’ 계속된 그의 말이다.
“‘중국과 한국이 축구시합을 하면 어느 팀을 응원하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난감해요. 이 질문에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의 원칙을 정한 적이 있어요. 중국인이 물어보면 한국을 응원한다고 대답하고 한국인이 물으면 중국을 응원한다고 말이죠. 사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이질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에 사실은 응대할 가치도 없는, 어떤 측면에서는 예의도 없는 질문입니다. 이는 마치 한 아이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면 누구 편 하겠는가, 혹은 딸에게 시집과 친정이 싸우면 누구 편 하겠는가 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 아이 울음 멎은 延邊 옌볜 조선족 인구 16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 지난 4월 10일자 중국 옌볜에서 발행되는 《연변일보》는 조선족 옌볜 인구의 16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농촌 총각들의 결혼난이 가중되고 인구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옌볜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설립 6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옌볜의 조선족 인구는 1995년 85만9956명이었으나 2011년에는 78만853명으로 줄어 16년간 총 7만9103명이 감소했다. 옌볜자치주 창립 때인 1952년 조선족 인구는 옌볜 총인구의 62.01%였으나 10년 후인 1962년에는 50.04%, 40년 후인 1992년에는 40.05%로 내려갔고 2011년에는 35.46%로 줄었다. 1999년까지 출산적령기 여성의 평균 출산율은 2명을 유지했으나 2000년 이후 급감하기 시작해 지금은 0.7명 이하로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현재 추세가 지속한다면 2050년 옌볜의 조선족 인구는 50만명 이하로 줄어들 것이며 2090년에는 20만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고 전망했다. 신문은 옌볜 조선족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원인으로 젊은이들의 대도시 및 해외 이주, 농촌 총각의 결혼난, 미혼 남녀의 불균형, 낮은 출산율 등을 꼽았다. 신문은 ‘두 번째 아이 출생과 관련된 강도 높은 우대정책과 장려정책을 세우라’고 해법을 제시했다. |
천지개벽과 가족의 해체
조선족 동포들이 느끼는 정체성 혼란은 가족의 해체와도 맞닿아 있다. 김정룡 소장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빌려 “조선족과 한국인 간 국제결혼에서 위장결혼 수가 60%를 넘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또 “위장결혼이 아니더라도 가출해 별거상태에 있는 가정이 많아 실제 말썽 없이 사는 비율은 20% 미만일 것”으로 내다본다.
다시 말해, 이미 이혼했거나 이혼 수속 중이거나 잠재적으로 이혼할 수를 어림하면 대략 80%에 이른다는 얘기다.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동북 3성 조선족 자치구는 중국이란 거대 다민족 국가에서 살면서 개혁개방 전인 1970년대 말까지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공산주의 금욕사상이 뿌리 깊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2년 한중수교 이후 결혼관과 정조관이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김 소장은 지적한다.
“1990년대 이후 이혼한 조선족 여성은 코리안드림을 위해 한국행에 몸을 실었어요. 남편과 사소한 마찰이 있던 아내들마저 재빨리 이혼수속을 밟고서 ‘결사적으로’ 한국인과의 국제결혼에 나섰습니다. 멀쩡하게 잘살던 부부 역시 아내를 한국에 보내기 위해 가짜 이혼을 하고 위장결혼에 가세했습니다.”
혼인소개소에서 미리 짜놓은 스케줄에 따라 집단적으로 한 장소에서 물건을 고르듯 선을 보고, 당일 날 여자의 부모를 만나고, 그날 밤 잠자리를 같이하고 며칠 내 결혼식과 혼인신고를 마친다.
“루쉰(魯迅)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마치 두 마리의 암컷과 수컷을 한 돼지우리에 처넣고 이제부터 함께 지내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벼락 혼인이 이루어지게 된 이유는 무작정 여자부터 데려와야 한다는 한국인의 강박관념, 일단 한국 땅을 밟고 보자는 조선족 여성의 과욕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혼인 당사자들의 강박관념과 과욕을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는 수단으로 국제결혼이 변질됐어요.”
45세인 조선족 김모씨는 12세 연상인 한국 남성을 따라 한국에 왔지만, 그날부터 불행이 시작됐다. 남편은 직업도 없는 백수건달이었다. 술 먹고 오입질하고 툭하면 폭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집을 뛰쳐나온 그녀는 건설현장 잡역부, 식당 종업원, 가정부를 전전했다.
월급받는 날이면 남편이 찾아와 돈을 안 주면 국적 취득도 안 해주고 불법체류자로 신고해 쫓아 보내겠다고 위협하는 통에 2년 동안 1400만원을 뺏겼다고 한다. 그런 고통의 대가로 국적은 얻었다. 김 소장은 “위장결혼을 한 한국남자들은 한국에서 직업이 없거나 신용불량자이거나 장애인이거나 심지어 엉덩이를 들이밀 곳조차 없는 노숙자 등 가장 밑바닥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위장결혼을 한 조선족 여자는 이런 무능력한 한국 남자와 중국의 본 남편 사이에서 ‘시집살이’를 해야 하는 이중고통을 겪게 된다. 일단 한국에 왔으니 합법으로 체류해야 하고 내친김에 국적까지 취득하려면 한국 남자를 잘 대해주어야 하는데 중국에서 따라온 본 남편은 여러모로 괴롭다. 행정안전부의 2011년도 외국인 주민현황에 따르면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여성 이민자는 5만3446명이다.
결국, 중국 내 조선족과 한국의 조선족 가정은 파탄 날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 “조선족 여자들이 한국에 시집오면 거개가 도망간다”거나 “조선족 여자와는 결혼하지 말라”는 말까지 나온다. 부부간의 이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혼 가정 자녀와 양가 부모가 느끼는 사회적 심리적 문제로까지 확장된다.
한국 정부, 조선족은 박대
서울 자양동에 사는 김모씨는 예순이 넘은 나이다. 한때는 헤이룽장성 조선족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양부모와 아내, 두 아이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병에 걸려 빚을 지게 되었고 결국 7만 위안을 빌려 몇 년 전 한국에 왔다.
그는 건축현장 목수팀에 끼어 낮에는 고된 노동을 했고 밤에는 현장 지하실의 합판과 스티로폼 위에서 잠을 청했다. 한국에 들어온 지 1년이 되어갈 즈음, 만성병으로 앓던 아내가 죽었다는 부고(訃告)를 받았다. 눈앞이 아찔했다. 이제 겨우 빚을 갚은 정도이고 아직 저축을 하지 못한 형편이어서 귀국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아내가 죽은 지 두 달 만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피눈물을 흘렸지만 귀국할 결심을 하지 못했다. 불법체류자로 산다 해도 다시 쉽게 올 수 없는 한국 땅이기 때문이다.
2011년 6월 현재 한국에 장기 체류하는 조선족 인구는 39만6000여 명으로 집계된다. 한국 국적 취득자와 불법체류자를 합치면 60만명에 근접한다. 국내 체류 외국인 140만명 가운데 조선족 비율이 다수를 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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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숙자 재한동포총연합 회장. |
“언젠가는 중국동포들을 내국인과 똑같이 대하는 시절이 오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당장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2011년 한국 정부가 다문화지원예산에 쏟아부은 돈이 총 2800억원이라고 하는데, 조선족에게 배정된 금액은 고작 1200만원뿐이라고 해요. 다문화 가정과 새터민 가정에 대해서는 정부예산을 아끼지 않으면서 조선족 동포에겐 박대합니다. 참, 이해할 수 없어요. 필리핀 귀화여성이 국회의원이 되는데 같은 핏줄에다 6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에게는 왜 비례대표 자리를 안 주는지 답답합니다.”
취재 중 만난 옌볜 출신의 김모씨는 안양에서 사글세로 살고 있다. 첫 한 해 벌어 빚을 갚고는 그만 허리를 다쳤다. 요즘은 쉬는 날이 출근하는 날보다 많다. 버는 것이 적다 보니 방세·전화비·전기료·물세·식비 등을 내면 주머니가 텅 빈다. 그는 고향 친구들에게 몇 차례에 걸쳐 300만원을 빌려 썼다. 현재로선 갚을 길이 막막하다.
한국인을 돕는 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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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림빈 한마음협회 회장. |
조선족 중심의 봉사단체 ‘중국동포 한마음협회’는 회원 수가 3500명이나 된다. 이들 중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이가 400명에 이른다. 외국인 자율방범대를 국내 처음으로 조직했으며 축구·배구·등산·배드민턴·골프 모임 등을 중심으로 친목도 도모한다. 한마음협회 이림빈(李林彬) 회장은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신강 양꼬치집’을 운영하며 동포들 사이에서 자수성가한 인물로 꼽힌다.
“중국은 우리를 언제든지 받아주지만, 한국은 언제나 우리를 추방하려 합니다. 그것도 수갑을 채워 강제로. 나는 누구인지, 내 뿌리가 어디인지 헷갈리곤 합니다. 타민족은 우리를 받아주는데 모국 사람들에게 외국인보다 못한 대접을 받게 되면 서러울 때가 많죠.”
1997년 한국에 온 그는 입국 3일 만에 프레스 기계에 오른쪽 손목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중국 지린(吉林)성 둔화(敦化)시 소학교 교사였던 그의 코리안 드림은 그렇게 무너지는 듯했다. 여기저기 돈을 빌려 손바닥만 한 가게를 구했다. 하루 두세 시간 자면서 밤낮없이 일했다고 한다. 지금은 영등포와 마포에 가게가 3곳이나 된다.
“저희는 봉사활동을 주로 한국인을 위해 합니다. 조선족 동포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회원들이 대개가 20~40대의 동포 엘리트들입니다. 이들이 미래 동포사회를 이끌어갈 주역이라 생각합니다.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불법체류자로 쫓겨나야 할 처지이나 머지않아 한국 국민으로 당당히 정착하리라 확신해요. 그때가 되면 한국인이고, 조선족이고 하는 구분도 사라지게 될 겁니다. 제 딸이 열일곱입니다. 일찌감치 한국의 유치원에 다녔는데 말투가 거의 서울사람과 같아요.”
“단일 민족 깃발, 내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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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촌사랑나눔 김해성 목사. |
김 목사는 “다문화 가정이 25만 쌍을 넘었다. 그들 사이에 태어나는 자녀가 15만명이 넘는다. 언제까지 단일 민족 깃발만 흔들겠는가. 그 깃발 내리고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를 인정하고 그들과 더불어 살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족이 연루된 사건을 동포 전체로 싸잡아 비난해선 곤란하다고 했다.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가 우려될 수준으로까지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 10만명당 강·폭력범죄 발생은 677건이지만 중국동포를 포함한 외국인은 120명이었습니다. 1/5 수준이죠. 그럼, 외국인 범죄는 현재 늘었을까요, 줄었을까요? 외국인 범죄가 최고조에 달했던 2009년 10만명당 강·폭력 외국인 범죄가 370건이었어요. 그러나 2010년 170건, 2011년 120건으로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한국인이 외국인에게 행하는 범죄가 10배 이상으로 많다는 점을 잊어선 곤란합니다. 그래도 외국인 범죄를 막을 방법이 뭐냐고 묻는다면 방법이야 있지요. 대원군처럼 다 쫓아 보내는 쇄국정책을 펴면 돼요. 그런데 문제는 현재 가동 중인 제조업 공장을 다 세워야 한다는 것이지요. 동포의 빈자리를 메울 수 없기 때문이죠. 그뿐인가요? 식당, 요양소, 농장, 어선 다 올스톱입니다.”
김 목사는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것인지 머리를 맞대어 고민하고 그 위에서 범죄를 줄이는 방법을 논의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사회 안전망부터 가동해야
“한국인이 조선족 동포에게 ‘한국이 중국과 축구경기를 할 때 누구를 응원하겠느냐’고 짓궂게 질문합니다. 답을 못하면 ‘짱개’ 나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물어보는 사람의 의도를 모르니 답을 못하는 것이지요. 조선족 동포들은 대개가 일제 강점기,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징병과 학병, 징용, 정신대를 피해가려고 북간도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빼앗긴 나라를 구하기 위해 피땀 흘린 독립투사의 후손도 있지요. 광복이 된 뒤에도 남북이 분단되는 바람에 귀국할 엄두를 못 냈습니다. 한중수교 이후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왔는데 한국인은 동포로 생각하기는커녕 불법체류자로 낙인찍어 강제 추방합니다.”
김 목사는 “외국인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선 사회안전망을 외국인에게도 가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옛말에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안 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병이 들거나 일자리가 없이 돈이 떨어지면 어찌할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영등포 직업소개소 살인사건은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임금체불과 산업재해, 사기와 폭행 등을 당했을 때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고 인권도 보장해 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미등록 체류 외국 여성은 성폭력을 당해도 신고조차 할 수 없습니다. 신고하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겠지만, 신고자도 미등록 체류자로 체포돼 강제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불법체류자를 발견한 공무원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지체없이 의무적으로 통보하도록 출입국관리법에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런 법은 마땅히 개정해야 하지만 당장 피해 외국인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후 통보하는 ‘선(先)조치, 후(後)통보’ 방식을 도입해야 합니다.”⊙
| ▣ 취재 後記 취재 중 만난 한 조선족 동포는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했다. 지금은 쫓기고, 쫓겨날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처지지만 언제까지나 도망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만약 조선족 동포가 없으면 별안간 공장이 멎고 농촌에 아이들 울음소리가 사라지며 솜씨 좋던 밥집이 문을 닫을지 모른다. 그들은 언제부턴가 한국인의 손과 발이 된 것이다. 이들의 임금수준도 한국인에 근접했다. 장사를 하거나 사업에 성공한 이도 적지 않다. 60만명의 조선족 동포 중에서 국회의원이 탄생할 날도 멀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족 동포의 머릿속에는 ‘코리안 트라우마’의 공포가 잠복해 있다는 점을 잊어선 곤란하다. 유랑하며 북간도를 떠돌던 할아버지·아버지의 설움, 그리고 전쟁과 분단의 역사, 적대적인 결손국가 상태인 남북한이 그들에게 안긴 심리적인 ‘자기장’이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류가 흘러 ‘발작’을 일으킬지 모른다. 이들은 단순히 법과 지시적 어투로 설득할 대상이 아니다. 낭만적 민족주의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게다가 한국사회는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명하다. 그 틈새, 분열, 공백 속에서 조선족은 길을 잃고 방황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한국인은 가해자 역할에 충실했고 조선족들은 피해자로 고착돼 왔다. 조선족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이 가해와 피해 사이 ‘코리안 트라우마’가 낳은 부산물이라면 지나친 억측일까. 한국인은 조선족 동포의 뒤틀린 관계를 직시해야 한다. 조선족에게 보이는 트라우마를 감싸 안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속에서 양자(兩者)가 지닌 ‘우월성’과 ‘절박함’을 죄다 녹여야 한다. 그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