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검사 심재륜의 수사일지 ③ ‘한국판 마피아’를 꿈꾸던 조폭과 맞서다 보니…

  • 글 : 심재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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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먹으로 부딪치던 목가적 건달 세계가 흉기 동원한 무지막지 패거리 전쟁으로
⊙ 국가가 주먹들을 관리하겠다며 주먹세계를 통일케 한 호청련, 한국판 초기 마피아 집단으로 변질
⊙ 김태촌 검거 때 역정보 흘려 유혈사태 막고, 예행연습까지
⊙ 청와대 ‘범죄와의 전쟁’ 선언했지만, 정작 조폭 전쟁의 정예검사들은 뿔뿔이 지방 발령
1986년 발생한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은 조폭이 얼마나 흉포해졌나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톰 크루즈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사법당국은 ‘범죄를 저지를 예정’인 사람을 지목해 미리 잡아 가둔다. 우리나라에도 이 영화 내용과 비슷한 성격의 현행 법률이 있다. 형법 제114조 범죄단체조직죄다.
 
  어떤 범죄를 실제 저지르지 않았어도,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하면 범죄를 행한 것으로 간주해 처벌한다는 조항이다. 그러나 과연 어떤 단체가 범죄단체냐, 범죄단체의 특성이 무엇이냐를 놓고 논란의 여지는 있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까지 검찰도, 법원도 범죄단체라는 죄목으로 사람을 잡아들이거나 처벌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1980년 5공 출범 때 검거된 조양은 등 양은이파가 그 대상이 됐으나 대법원까지 올라가며 범죄단체에 대한 법리(法理)를 다투는 등 형법 114조 적용은 현실에서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오면서 범죄 자체의 성격, 그리고 범죄 세계의 양상이 이전과는 확 달라졌다. 그러면서 검찰과 법원도 적극적으로 범죄단체조직의 죄목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조폭이라는 새로운 범죄세력 혹은 범죄행각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1980년대 이후 갑자기 ‘조폭’이란 것이 부각됐으며 또 주목받게 됐을까.
 
 
  김태촌과 조양은의 3년 전쟁
 
  1975년 1월 2일 정오 무렵. 서울 무교동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가던 오종철의 호남파가 명동의 전통 주먹세력인 신상사파를 급습했다. 오종철의 지시를 받은 조양은 등 10여 명의 돌격대가 이날 신년회를 위해 명동 사보이호텔 커피숍에 모인 신상사파 사람들을 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보이호텔 사건이다.
 
  서울 속의 서울이라는 명동을 주름잡던 신상사네 주먹들이었지만 이날 1분도 채 안 걸린 전광석화 같은 공격에 속수무책,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신상사는 그 자리에 없어 화를 면했고 서너 명만이 부상을 입는 등 실제 피해는 별로 크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제1주먹을 자부하며 명동을 깔고 앉았던 신상사파로서는 그 명성(?)과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어이없이 얻어맞은 쪽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신상사 쪽에서 자기 식구들은 물론 ‘외부 세력’의 도움까지 받아 조양은 등 호남파에 대한 보복전에 나섰다. 마치 용병처럼 신상사 쪽에서 조양은과 맞선 이가 서방파 김태촌이었다. 당시 신상사와 친하던 호남 출신 중견 주먹 박종석(별명 번개)이 김태촌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상대방인 조양은 쪽도 늘 수십 명씩 떼 지어 다니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렇게 해서 서울 한복판에서 두 조직이 이후 3년여에 걸쳐 대립, 충돌하게 됐다. 앞서 사보이호텔 사건은 사실 상징적인 것이었고, 실제로는 바로 이 김태촌과 조양은의 3년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 지하세계의 판도와 성격이 확 바뀌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싸움판에 연장, 곧 무기(武器)가 등장했다. 이전까지는 개인 대 개인이든, 조직 대 조직이든 싸움이라 하면 맨주먹 맞짱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조양은이 신상사파를 처음 칠 때부터 야구배트 등 무기가 동원됐다. 이어 반격에 나선 김태촌 쪽에서 상대파 보스인 오종철을 회칼로 습격했다. 연장을 들지 않으면 싸움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들 양쪽이 3년여에 걸쳐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면서 ‘연장질’은 점차 당연한 것처럼 정착(?)됐다.
 
  두 번째로, 이전까지 이른바 ‘도꼬다이’로 불리던 일대일 맞짱이 사라졌다. 조직의 두목과 두목이 일전을 펼쳐 승패를 가르던 시대는 갔다. 조직원들은 때로는 10여 명씩 많게는 수십 명씩 패거리 싸움을 벌였다. 당연한 결과로서, 주먹계에서는 ‘조직’이 개인보다 중요해졌고 조직원의 ‘머릿수’ 역시 중시되게 됐다.
 
  세 번째로, ‘연장질’이 일반화하고 싸움 패턴이 개인전에서 패싸움으로 변질되면서 특정 개인의 싸움 실력은 별 의미가 없게 됐다. 한 사람의 실전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수십 명은 당할 수 없다.
 
  자연스럽게 신상사파는 물론 과거 한 가닥 했느니 하던 전통 주먹들이 밤무대에서 밀려나게 됐다. 오로지 자기 주먹과 배짱만 믿고 싸움판에 호탕하게 달려들던 구식 건달들이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러면서 밤거리의 주인공은 점차 패거리 칼잡이, 곧 조폭(組暴)으로 교체되어 갔다.
 
 
  서진룸살롱 사건 이후 ‘전국구’ 조폭 등장
 
1975년 사보이호텔 사건으로 ‘조폭시대’를 연 조양은.
  밤의 세계를 장악하기 시작한 조폭들은 1970년대 후반 이후 힘과 세력을 키워 1980년대 중반에는 밤거리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때부터 등장한 ‘전국구(全國區)’라는 말은 조폭 세력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상징한다. 과거 주먹들은 예외 없이 자기 근거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지역구’들이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무기와 수백 명씩에 이르는 조직원을 거느린 조폭들이 지하세계에서 전국구로 이름을 얻게 됐다. 조양은, 김태촌, 이동재 등등 이름 석 자만으로도 전국 어디서나 알아주는 전국적인 주먹 혹은 그런 패거리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건달 아닌 조폭들이 지하세계를 장악하면서 1980년대 후반 밤거리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여주는 일련의 사건들이 잇따라 터졌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1986년 여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서진룸살롱 사건이다.
 
  사건의 성격만 보면 그저 유흥업소 이권을 둘러싼 단순한 세력 다툼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폭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 집단인지, 세상에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눈에 띈 것은 그 대담함과 잔인함이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설사 주먹들이라 해도 가급적 일반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활동하거나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서진룸살롱 사건 때는 그게 아니었다. 좁은 방에 몰린 상대방을 회칼로 난자하고, 달아나던 사람을 끝까지 쫓아가 큰길에서 남들이 보든 말든 기어이 절명시키는 등 무자비한 살육행각을 벌였다.
 
  ‘몸무게 60kg인 한 사람을 손보겠다고 100kg의 거구 서넛이 회칼로 무장하고 달려드는’ 비열하고 무시무시한 밤의 시대가 된 것이다. 이처럼 살벌무쌍하고 거리낌 없는 조폭들의 범죄행각은 서진룸살롱 사건을 필두로 1980년대 후반 내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서진룸살롱 사건이 일어나고 불과 한 달 뒤인 1986년 7월에는 김태촌의 조직원들이 인천의 뉴송도호텔 황모 사장을 습격해 난자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듬해 1987년에는 호남 출신 3대 조직 가운데 하나인 이동재의 OB파가 자신들과 맞서던 양은이파 조직원 2명을 공격했다. 그러자 양은이 쪽 순천시민파 조직원들도 이듬해 OB파 보스인 이동재를 보복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이동재는 중상을 입고 도미(渡美), 주먹계를 은퇴하게 됐다.
 
  1989년 6월에는 강남 유흥업소에 술을 공급하던 유통업체 정전식 사장이 이리 배차장파 조직원들에게 끔찍하게 난자당해 살해됐다. 바로 그 석 달 뒤에는 서울 독산동의 골든벨 스탠드바 박 모 사장이 조직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양은이 쪽 조직원들로부터 칼을 맞았다. 조폭들이 장악한 밤무대에 무지막지한 ‘칼춤’ 판이 벌어진 것이다.
 
 
  거대 폭력조직, 정치를 만나다
 
1987년 발생한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용팔이사건)은 1980년대 조폭과 정치권의 결탁을 보여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주먹들이 ‘조폭화’한 것과 함께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경향이 바로 정치권과의 결탁 또는 합법적인 단체화다. 1957년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정치깡패들이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야당 유세장을 습격한 사건이나 1960년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을 정치깡패들이 습격한 사건 등에서 보듯 과거에는 주먹들이 주로 여당의 돌격대로 동원됐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여야 가림 없이 주먹들을 정치판에 동원했다.
 
  1987년 이른바 용팔이 사건으로 더 잘 알려진 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같은 해 7월에는 (나중에 드러난 것처럼) 아예 국가 정보기관이 주도하여 전국의 주먹들을 규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시 막강한 실력자인 안기부 엄모 실장 주도하에 전북 출신 이승완이란 인물을 대표로 내세운 이른바 호국청년연합회(호청련)가 그것이다. 또 1987년 대선 무렵에는 노태우 후보 측에서 대구·경북지역 주먹들을 중심으로 태림회라는 선거용 행동대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민주화 물결과 함께 잇따른 총선과 대선 등에서 정치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선거판에 주먹들을 동원하는 바람에 주먹들의 활동무대가 더더욱 확대된 것이다.
 
  이와 함께 주먹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봉사단체 또는 종교모임 등의 현수막을 내걸고 합법적인 단체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1988년 말 부산 칠성파의 이강환은 화랑신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실제로 이런저런 봉사활동을 벌였다. 또 1989년 3월 김태촌은 기독교 신자를 칭하며 주변 조직원이나 지인들과 함께 신앙단체인 신우회를 조직했다. 나아가 이러한 단체를 통해 조폭들은 사회 지도층이나 유력인사들과 음으로 양으로 인맥을 형성하기도 했다.
 
 
  ‘낮의 세계’까지 진출한 조폭
 
  주먹들의 이 같은 변화 혹은 시도는 두 가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그들이 더 이상 밤거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며, 급기야 낮의 세계까지 진출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이제 밤의 주먹들을 비호하는 ‘낮의 세력’이 생겨나게 됐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지하세계가 이처럼 여러 측면에서 급격히 달라지면서 이들을 다스리고 제압해야 하는 맞은편의 공권력 체제 또한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주먹들 혹은 지하세계를 상대한 공권력은 정권(政權)과 경찰이었다. 5·16 직후의 깡패소탕, 유신 직후의 사회악 일소, 5공 출범 때의 삼청교육 등 새 정부 체제가 들어설 때마다 얼추 10년 주기로 주먹들에 대한 일제 소탕이 추진됐다.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단속이었다.
 
  5·16 직후에는 군인들이 깡패들을 소탕했지만, 1980년대 이전까지 주먹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맡은 것은 주로 경찰이었다. 경찰은 사건별 또는 지역별로 지하세계에서 벌어지는 개별범죄의 단속을 도맡아 왔다. 깡패든 주먹이든 조폭이든 그쪽에 관계된 일은 당연히 경찰 전담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돼 있었다. 그러나 조직 혹은 조직폭력을 다룬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폭력배 개인, 그리고 개별적인 범법행위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검찰은?
 
  건국 이래 검찰은 주로 굵직한 정치·경제 분야의 사건을 맡아 처리해 왔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민생(民生) 범죄는 경찰에 맡겨 두고, 국가를 뒤흔드는 중대사건이나 우리 사회 상층부의 특수한 범죄를 전담했다. 그래서 검찰은 경찰에서 넘어오는 사건에 대한 수사 지휘 말고는 주먹 또는 조폭에 관련된 일에 직접 손대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본격화한 조폭 문제를 더 이상 경찰에만 맡겨둘 수 없게 됐다.
 
  앞서 본 것처럼 이제 밤거리는 흉기를 들고 수십 명씩 떼 지어 다니는 조폭들의 무대로 변했다. 자유롭게 총기를 쓰지 않는 한 경찰력으로 그런 조폭을 제압하는 일이 당장 물리적으로 어려워졌다. 나아가 조폭들이 정치권 또는 사회 유력인사들과 음으로 양으로 결탁하면서 조폭 비호세력이 형성됐다. 심지어 늘 조폭들과 거리에서, 현장에서 접촉할 수밖에 없는 경찰 내부에도 그들과 유착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단순한 동네주먹을 넘어선 전국구급 조폭들, 게다가 막강한 권력 또는 재력을 가진 비호세력까지 경찰이 상대하기에는 벅차게 됐다. 결국 검찰이 조폭 문제에 직접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됐다. 내가 서울지검 특수1부장으로 발령된 것은 그런 때였다.
 
 
  조승식·함승희·남기춘 등 조폭 드림팀 발족
 
조승식 검사.
  1988년 연말인사로 내가 특수1부장을 맡고 나서 한 달쯤 지난 1989년 1월 교도소에 갇혔던 김태촌이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앞서 1986년 뉴송도호텔 사장을 난자한 사건으로 수감됐던 그가 어찌어찌 연세대 병원에서 발부받은 폐암 진단서를 앞세워 가석방된 것이다. 그런 그가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인연을 맺어 기독교에 귀의했으며, 그해 3월에는 주먹들로 이뤄진 신우회라는 신앙모임을 조직해 활동한다는 소식이 언론에 보도됐다. 6월에는 강남의 주류 유통 이권을 둘러싸고 큰 도매업체의 정 모 사장이 이리 배차장파 조직원들에게 끔찍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89년 초여름, 서소문의 서울지검 청사 10층 특수부장실에서 그런 기사들을 보면서 나는 ‘조폭과의 전쟁’을 생각했다. 물론 이전에 큰 사건이 있을 때도 조폭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단편적인 생각들을 하긴 했었다. 그러나 이제 검찰이 본격적으로 조폭 문제에 달려들어야겠구나, 생각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앞서 살핀 것처럼 이미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조폭 문제를 경찰에만 맡겨둘 수는 없었다. 검찰이 조폭을 다룬다면?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특수부의 의지와 능력, 그리고 결단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때 검찰에 있어서 조폭 분야는 속된 말로 ‘맨땅’이었다. 전쟁을 하려면 먼저 적을 알아야 했다.
 
  경찰이 가진 자료들, 언론에 보도된 기사들, 조폭 쪽을 잘 아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그동안 정부가 조폭에 대해서는 정책적으로 접근한 적이 없었던 까닭에 자료와 정보는 대부분 폭력배 개인과 개별범죄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모아 이른바 ‘전국의 조폭 현황’ 그림을 그려 나갔다. 사실상 조폭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일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료나 정보보다 중요한 것은 뜻이 맞는 사람이다. 하늘이 나를 도우셨는지 조승식, 함승희·문세영·양재택·남기춘 등 조폭 문제에 열정이 충만하던 검사들이 차례차례 특수부로 모였다. 조폭 수사에 관한 한 그런 진용은 검찰에서 앞으로도 다시는 꾸리기 힘들 것이라고 감히 말할 만한 드림팀이었다.
 
  치열하게 파고든 결과 우리 수사팀은 조폭 쪽으로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 또는 백과사전이라 해도 좋을 만큼 많은 것을 조사하고 파악했다. 단순히 명단을 파악하는 수준을 넘어 조폭 개개인이 과연 언제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들에게 어떤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 나아가 과연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할 수 있는지 등등 폭넓게 파고들었다.
 
  어느 정도 자료와 정보, 그리고 사법적으로 그들을 단죄할 자신감을 축적한 뒤 우리는 전쟁을 개시한다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검찰에서 퇴직한 지금까지도 조폭들 사이에 ‘악질검사’로 기억된다는 조승식 검사가 치열한 정보전 끝에 주먹계의 마당발로 통하던 이육래를 전격 검거한 것이다.
 
 
  검찰에 잡힌 이육래, 오히려 안도
 
  1989년 8월 28일. 서울 외곽의 한 단독주택. 며칠 동안 잠복하며 집안 동정을 살피던 조 검사와 수사관들이 이윽고 현관문을 두드렸다. 몇 번을 반복해서 두드리자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 문이 비죽 열렸다. “어디서들 왔소?” 한 사내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그 틈으로 새어 나왔다. 조 검사가 “서울지검입니다”라고 하자 그는 맥이 풀리는 듯 “어이쿠, 그러면 안심이오”라며 문을 열었다.
 
  사내의 이름은 이육래(검거 당시 42세). 전남 보성 출신으로 서울 낙원동의 몇몇 유흥업소를 근거지로 활동하며 지하세계를 주름잡던 실세 주먹이었다. 그는 그쪽 세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류대를 나와 머리가 좋았고 각계 인맥도 넓었다. 당시 정부의 주도로 급조됐던 우익단체인 호국청년연합회(호청련)의 간부로도 이름을 걸어 놓고 있었다.
 
  그런 배경들 덕분인지, 특이하게도 그는 당시 서로 전쟁을 벌이던 양은이파와 서방파, OB파 등 여러 조직을 비교적 자유롭게 오가며 책사(策士) 노릇을 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여러 폭력조직에 다리를 걸치다 보면 결국 바로 그 ‘여러 곳’으로부터 공격당하게 마련이다.
 
  조직과 조직 사이를 오가며 이래저래 잇속을 챙기던 그는 결국 언제부턴가 여러 조직의 ‘손봐 줄 대상’이 되고 말았다. 수갑을 든 검찰이나 경찰에 쫓기는 것과 칼을 든 ‘조직’에 쫓기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그는 잔뜩 겁을 먹고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별장에 숨는 신세가 됐다. 여기다 그는 부산의 한 사업가를 납치한 뒤 폭행·협박해 그로부터 100억대 땅을 빼앗은 혐의로 검찰에서도 추적받던 터였다. 그는 나중에 이래저래 몰릴 대로 몰린 상황에 검찰이 (조직보다 먼저) 들이닥쳐서 뒷일이야 어찌 됐든 일단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승완과 김태촌에 검찰의 수사정보 줄줄 새
 
함승희 검사.
  오랜 준비를 거쳐 조폭과의 전쟁에 돌입하면서 나는 3단계에 걸친 전략을 설정했었다. ▲1단계는 수괴급 조폭들의 소탕 ▲2단계는 조폭들의 서식처이자 자금줄인 고급 유흥업소의 탈세 등 불법운영 단속 ▲3단계는 조폭들의 비호세력 척결이었다. 단순히 조폭들을 잡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조폭 범죄가 근절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우선 제1단계와 관련, 당시 우리 수사팀은 전국의 10대 조폭 계보와 두목, 그들의 혐의 등을 면밀히 파악한 상태였다. 나아가 전국구급은 아니어도 지역을 장악한 주요 조직 및 우두머리 50여 명에 대해서도 정보를 챙겨 놓고 있었다.
 
  이육래 다음 타깃은 호청련의 이승완과 서방파의 김태촌이었다. 이미 두 사람의 폭력 및 불법행위에 대한 혐의사실은 대부분 확인된 상황.
 
  문제는 도무지 이들을 검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수사팀이 움직이려고만 하면 기가 막히게도 이들에게 먼저 정보가 흘러 들어가는 바람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만큼 검경(檢警) 내부는 물론, 각계각층에 이들을 비호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수사팀이 아니면 그들을 단죄할 공권력은 없었다. 반드시 검거해야 했다.
 
  나는 먼저 함승희 검사를 불러 김태촌 검거를 맡기려 했다. 그러나 함 검사는 이승완 쪽을 원했다. “정치권의 비호세력까지 다 치고 들어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승완은 함 검사, 김태촌은 조 검사가 수사를 전담하게 됐다. 나는 조 검사에게는 이렇게 당부했다.
 
  “범인을 잡으려면 꿈에 그 범인이 세 번 이상 나타나야 한다. 수사할 때는 그만큼 정성을 기울여라.
 
  수사에서 한 번 실패하면 두 번 기회는 없다. 그러니 어떻게 검거할 것인지 (수사관들과) 예행연습도 하라.
 
  또 김태촌 같은 경우는 경찰은 물론이고 언론계, 종교계, 의료계 등 인맥이 원체 넓어서 검거한 뒤에도 어디서 어떤 압력이나 공격이 들어올지 모른다. 그러니 그 상황까지 철저하게 따져서 모든 경우의 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생각만 하지 말고 ‘계획서’를 만들어 놓고 움직여라.”
 
 
  민생특별수사부 발족
 
  두 검사는 이렇게 이승완과 김태촌 추적에 들어갔다. 결과를 놓고 보면 그것은 장정(長程)이었다. 5~6개월이 지나 해를 넘겨서야 사건이 모두 매듭지어졌던 것이다.
 
  우리 특수부 수사팀이 조폭과의 전쟁에 몰입하던 당시 검찰 안팎의 돌아가는 상황도 우리에게 힘이 되었다. 1990년 새해가 되면서 법무부장관, 검찰총장이 잇달아 민생치안을 강조한 것이다. 조직폭력, 마약, 인신매매 등 민생범죄를 최우선으로 척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1월 3일 서울지검 민생특별수사부(민생특수부)가 전격 발족했다. 공식기구라기보다는 특별임무를 띤 태스크포스, 그러니까 특수1부 산하의 별동대 조직이었다. 자연스럽게 그 지휘는 특수1부장인 내가 맡게 되었다.
 
  1월에서 2월에 걸쳐 우리 민생특수부는 연예계 폭력 및 방송가 부조리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문세영 검사(2011년 작고)가 주도한 이 수사를 통해 당시 연예계 주변에서 폭력을 일삼던 다수의 폭력배와 상습적으로 금품상납을 받아 오던 방송국 PD들이 대거 사법처리됐다(연예계와 방송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2012년 2월호 기사로 다룬 바 있다-편집자).
 
  연예계 범죄와 방송가 비리 수사로 검찰의 주가가 급상승한 데 이어 2월 말에는 특수부의 양재택 검사가 또 하나의 ‘큰 건’을 해결했다. 라이벌 관계로 대치하면서 대전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두 조직, 곧 진술파와 찬조파 조직원들을 검거·구속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또한 그동안 우리 특수부가 준비에 준비를 거듭한 끝에 거둔 결과였다.
 
 
  이승완, 검거 임박하자 自首로 선수 쳐
 
안기부의 지원 아래 우익폭력단체인 호국청년연합회를 만든 이승완.
  연예계 폭력을 해결하고 진술파와 찬조파를 검거하는 등 조폭과의 전쟁이 탄력을 받을 무렵 우리 특수부로서는 다소 맥 빠지는 일이 벌어졌다. 함승희 검사가 추적하던 이승완이 3월에 갑자기 검찰에 자수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우리 서울지검 특수부가 아닌 남부지검으로.
 
  어찌 된 일인가 경위를 알아보니 이승완이 우리 특수부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발 빠르게 선수(先手)를 친 것이었다. 당시 검찰이 직접 조폭수사에 들어가는 것이 알려지자 안기부 실장이 직접 특별요원 2명을 내 방 부속실에 파견해 상주토록 했다. 일일상황을 감시하며 일일이 자기들 상부에 보고하고 있던 터다.
 
  함승희 검사가 이승완의 마지막 검거작전을 벌이자 이 일이 터진 것이다.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떴다더라’는 소식이 이승완의 귀에 당연히 들어갔을 터였다. 그 때문이었는지 1990년 2월 갑자기 호청련에서 자진 해체 발표를 내놓았다. 모르긴 해도 이승완이 도망 다니던 와중에 재빨리 자신의 주변 정리를 한 모양이었다.
 
  호청련이 해체된 뒤 이승완은 친분이 있는 경찰 고위층 L씨를 찾아갔다. 과연 어떻게 해야 궁지를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을 상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L씨가 “너도 살고 조직도 안 다치게 하려면 일단 자수해라”라고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승완이 친구를 만난 바로 그 다음날 자수를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물타기’를 한 것이었다.
 
  이승완의 자수에 가장 답답해진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그를 쫓던 함 검사였다. 함 검사는 “남부지검에서 넘겨받아서라도 이승완 수사는 내가 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를 말렸다. “일단 저쪽(남부지검) 사건이 된 만큼 우리가 중간에 일을 가로챌 수는 없다. 이승완이 검찰에 들어오기 전 어떤 진술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이미 충분히 대비도 했을 것이다. 과연 어디까지 진상이 밝혀질지 일단 지켜보자.”
 
  이승완에 대한 사법처리는 이처럼 우리 특수부로서는 아쉽게 일단락됐다. 하지만 결국 그가 도망 다니기를 포기하고 조직을 해체, 검찰에 투항한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특수부에서 적극 달려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승완 검거에 있어서 우리 수사팀이 크든 작든, 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김태촌을 추적하던 조승식 검사 쪽 상황은 어떠했을까.
 
 
  김태촌 검거를 위한 ‘특수작전’
 
서방파 두목 김태촌.
  먼저 김태촌을 추적하던 나와 조승식 검사의 소속 및 직함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가정파괴범, 떼강도 등 강력사건이 빈발, 사회문제로 부각되면서 5월 15일 서울지검 강력부가 신설된 것이다. 앞서 민생특수부가 공식 조직이 아닌 임시 별동대였던 반면 강력부는 검사 8명이 배치된 공식 조직으로 발족했다. 그 또한 내가 지휘를 맡게 되어 나는 기존 특수1부장에 민생특수부장, 강력부장 등 세 자리를 겸하게 됐다. 나는 청사 10층의 특수1부장실과 12층의 강력부장실을 오가며 각각 해당 업무를 보았다. 조승식 검사도 강력부에 배속됐다.
 
  그런데 마치 이 강력부 발족을 기념이라도 하듯 불과 그 나흘 뒤인 5월 19일 아침, 조 검사가 보란 듯 김태촌을 검거해 청사로 돌아왔다. 강력부로서는 제1호 성과, 그것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큰 성과였다. 그것은 실로, 나와 조 검사가 꼬박 6개월에 걸쳐 지략과 끈기를 발휘한 끝에 만들어낸 ‘작품’이라 할 만했다.
 
  김태촌을 검거하는 데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는 검경 내부에 도사린 그의 ‘파이프’ 때문에 그를 잡으려 할 때마다 정보가 먼저 새 나가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가 늘 20여 명의 조직원과 함께 다니는 것이었다.
 
  사람을 잡으려 할 때 경호원 하나가 제지를 해도 껄끄럽게 마련이다. 하물며 20여 명의 조폭이 에워싼 사람을 잡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최소 3배수, 그러니까 60여 명이 동원돼야 한다. 그러나 조직원들은 기를 쓰고 자기들 두목을 보호하려 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검거하려다 보면 유혈사태가 일어나기 십상이다. 당장 60여 명의 검거인력을 동원하려다 보면 순식간에 그 정보가 새 나간다. 고민 고민하다가 나와 조 검사는 특단의 작전을 폈다.
 
  역정보를 흘린 것이다. “김태촌에게는 별다른 범죄 혐의도 없는데 세상 사람들은 김태촌을 잡아들이라고 난리를 친다. 여론이 그런데도 김태촌은 오히려 자기가 조폭이라는 것을 과시하듯 조직원 수십 명을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을 검찰 안팎에 퍼뜨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부터인지 김태촌을 에워쌌던 조직원들이 사라지고 그의 곁에는 승용차 운전기사와 경호원 2명만이 따라다니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 검사가 이런 상황을 놓칠 리 없었다. 5월 19일 오전 10시 김태촌이 잘 다니는 동부이촌동의 한 사우나 앞에서 그를 직접 검거한 것이다.
 
  나와 조 검사는 김태촌의 ‘검거 이후’까지 대비했다. 이중구속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하나의 구속영장에 두 가지 범죄에 대한 혐의를 두어 구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령 한 가지 죄목의 구속기간이 끝나거나, 영장의 시효(時效)가 끝나더라도 풀려나지 못한다. 다른 죄목으로 계속 구속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신중하게 그를 상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남기춘, 운좋게 박영장 검거
 
남기춘 검사.
  김태촌을 검거하고 두 달 여 지난 7월 27일 우리 강력부는 조폭 수사에서 또 하나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에는 남기춘 검사가 오랫동안 추적하던 박영장을 검거한 것이다.
 
  박영장은 호남 출신 주먹들 사이에도 대선배로 통하던 인물. 자유당 시절 권력자였던 정치인 신모씨의 사위인 그는 1976년의 신민당 각목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전국 곳곳에 파친코를 운영하면서 폭력 등 각종 불법행위를 저지른 혐의를 받아 왔다.
 
  그를 검거하는 데는 운도 따랐다. 남 검사가 탐문 끝에 그가 강원도 화천의 별장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남 검사가 수사관들을 데리고 그곳을 덮쳤을 때 마침 그는 그곳에 없었다.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별장에서 철수해 나오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승용차 한 대와 좁은 길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승용차에 타고 있던 건장한 남자가 차 밖으로 나오며 수사관들을 향해 “당신들 뭐냐”며 소리치고 나섰다. 남 검사가 보니 아주 낯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박영장이었다.
 
  그렇게 우리 수사팀이 쥐고 있던 조폭 명단의 굵직굵직한 이름들이 하나둘씩 검거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머잖아 조폭전쟁의 1단계 전략이 매듭지어지리라 낙관했다. 그런데 1990년 가을로 접어들면서 우리 수사팀으로서는 다소 머쓱한 일이 벌어졌다. 10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그 전쟁의 최선봉에 서야 할 검찰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대통령의 선언이 나온 바로 다음날 아침 강력부 검사들을 주축으로 한 관계자들이 대검찰청에 소집돼 후속(?) 행사를 가졌다. 당시 ‘범죄와의 전쟁’을 지휘하는 야전 사령관이 나였기 때문에 내가 김기춘 검찰총장 앞에 서서 ‘결의’를 다지는 선서를 했다. 그런 내 모습이 왠지 머쓱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1년여 전 나는 조폭과의 전쟁을 선언했고, 정작 청와대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던 무렵에는 이미 현장에서 치열하게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니 대통령의 범죄와 전쟁 선언도, 또 그것을 복창(復唱)하는 검찰의 다짐도 사실상 한참 뒤늦은 뒷북이었다. 그래서 나로서는 낯간지러운 측면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대통령의 그러한 선언은 정권 차원에서 우리 검사들이 더 열심히 뛸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준 셈이었다. 청와대에서 범죄와의 전쟁까지 선포했으니, 사실상 야전 사령관인 나의 역할과 입지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1단계 조폭 소탕을 넘어 2단계 조폭들의 서식처, 3단계 비호세력까지 반드시 치고 나가리라, 결의를 다지고 다졌다. 또한 무난히 치고 나갈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내 생각대로, 내 계획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전국구級 3大 조직 와해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하순부터 검찰 내부에서 이상한 이야기가 들려 왔다. 내 인사에 관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지방으로 가게 되리란 소문이었다. 긴가민가했다. ‘한창 강을 건너는 중인데 설마 장수를 바꾸겠는가’, 내심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나면서 소문이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나뿐만 아니라 휘하의 강력부 검사들 대부분이 다른 곳으로 전보되리라는 이야기까지도 들렸다. 실로 어이가 없었다. 화가 났다. 그때 속마음을 이제야 털어놓으면 이런 것이었다.
 
  ‘대통령은 범죄와 전쟁한다고 현수막을 내건 마당에 정작 최정예라고 자부하는 우리 수사팀은 해체된다? 조폭 수사를 안 하겠다는 건가, 하지 말라는 건가? 앞으로 검찰이 개별적으로 조폭 사건은 다뤄도 지금처럼 정책적으로 달려들 일이 없을 텐데…. 도대체 어디서 어떤 입김이 작용해서 이런 말도 안되는 인사가 되는 건가?’
 
  아직 공식 인사 발표가 나지 않은 마당에 그에 대해 뭐라 한마디 따져 볼 수도, 따질 곳도 없었다. 후임자들이 온다 해도 조폭에 대해서는 십중팔구 백지상태일 터였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단을 내렸다. 그동안 우리 특수부와 강력부가 파악해 둔 수괴급 조폭들을 세상에 공개하자는 것이었다.
 
  지체 없이 전국 주요 10대(大) 폭력조직인 서방파, 양은이파, OB파, 번개파, 칠성파, 영도파, 전주파, 배차장파, 군산파, 목포파를 공개하고 그 두목 15명 및 행동대장급 50명의 명단을 정리하여, 대학가의 대자보처럼 커다란 현황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통해 이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린다고 발표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내가 직접 주요 신문·방송의 편집국장 및 사회부장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폭력조직과 폭력배를 이번 기회에 공개해서 마음 놓고 돌아다니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 온 국민이 똘똘 뭉쳐서 조폭들을 감시해야 한다. 이번 일은 반드시 도와줘야 한다”고 협조를 요청했다.
 
  나의 진정한 마음이 통했는지 이튿날 아침 대다수 신문에 조폭들의 사진과 함께 공개수배 사실이 크게 실렸다. 방송 뉴스에서도 이를 비중 있게 다뤄 주었다. 놀랍게도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인 10월 29일 서울 강남에서 서방파 행동대장 이양재가 시민의 신고로 경찰에 검거됐다. 이처럼 주요 조폭들을 공개수배한 것으로 나는 조폭과의 전쟁을 일단락했다.
 
  1989년 여름 이육래 검거를 필두로 연예계 주변의 폭력배들을 소탕하고 진술파와 찬조파, 이승완, 김태촌, 박영장 검거까지 1년여 동안 우리 검찰은 조폭과의 전쟁에서 기대 이상의 전과를 올렸다. 조양은은 진작부터 수감돼 있었고 이동재는 주먹계를 떠났다. 이런 터에 우리 강력부가 김태촌을 검거하면서 전국구급 3대 조직인 양은이파, OB파, 서방파는 사실상 이 무렵 와해됐다.
 
 
  조폭 담당 검사들, 졸지에 뿔뿔이 지방행
 
  건국 이래 처음으로 전국 주요 조폭들의 계보가 파악되고 대도시를 장악한 10대 조직의 실체도 드러났다.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언론 등에 인용되는 국내 조폭 분포 및 계보 등도 그때 우리 수사팀에 의해 다 조사되고 체계가 정리된 것이다. 조폭 수사와 관련된 언론의 보도기사 또한 그때만큼 많았던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검찰이 직접 조폭을 상대한다는 인식이 일반화하면서 그만큼 조폭들로서는 그 움직임이 잔뜩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조직 내 인사와 관련해, 인사 명령을 내는 쪽에서야 ‘공정하게 항용 이루어지는 정기인사’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인사 명령을 받는 쪽에서는 십중팔구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는 게 인지상정이다. 1990년 11월 1일 공식 인사 발표를 보면서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대전지검 차장검사, 문세영·함승희 검사는 수원, 조승식 검사는 부산, 양재택 검사는 강릉으로 가게 됐다. 조폭과 일전을 펼쳤던 검사들은 그날로 짐을 싸서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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