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정치 ‘리얼리티 쇼’의 주인공 홍준표

“돈키호테라고? 不正한 한국사회 주류들이 씌운 누명이다”

  •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사진 : 서경리 月刊朝鮮 기자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 “대학 다니고 어렵던 시절, 세상이 한번 뒤집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죠”
⊙ “한국사회 주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비겁하고 탐욕적”
⊙ 고2 때까지 말 한마디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 평생 반장 한 번 못해
⊙ 모래시계 검사 시절, ‘통제되지 않는 검사’로 낙인 찍혀 검찰조직의 변방에만 맴돌아
⊙ “(슬롯머신 수사 당시 YS 비자금 나온 사실)대답하지 않겠다”
⊙ “내년 총선은 개혁공천, 상향식 공천, 이기는 공천을 하겠다”
⊙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이 예측불허로 간다면 국민관심 높아질 것”

洪準杓
⊙ 57세. 고려대 법대 졸업. 사시 24회 합격(1982). 청주·부산·광주·서울지검 검사 역임.
⊙ 15·16·17·18대 국회의원.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국회 운영위원장,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한나라당 혁신위원장,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 한나라당 원내대표 역임.
기자가 보는 홍준표(洪準杓)식 정치는 ‘리얼리티 쇼’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검사 이미지로 정치판에 등장한 홍준표 대표는 야당시절 DJ(김대중)의 저격수로 활약하며 대중의 이목을 끌었고, 선동연설로 정치를 ‘예능’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덕분에 그저 그런 정치인 사이에서 높은 ‘시청률’을 끌어내 계보 하나 없이 지난 7월 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가 됐다.
 
  리얼리티 쇼는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때론 현실보다 더한 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치인 홍준표’는 보수정당 한나라당이 꿈도 꿀 수 없었던 ‘반(半)의 반값 아파트 법안’을 만들었고, 소신으로 치자면 무상교육과 무상의료까지 지지한다.
 
  그를 따라다니는 별칭은 홍 반장, (아닌 밤의) 홍두깨, 럭비공, 버럭준표, 돈키호테 등 셀 수 없이 많은데 모두 돌출행동과 예측불허의 정치행보 탓에 붙여진 말이다. ‘정치 예능’ 캐릭터를 골고루 갖춘 그는, 진짜 예능 고수인 강호동·유재석과 맞먹는 정치 리얼리티 쇼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그러고 보니 그는 검사 시절에도 ‘통제되지 않는 검사’로 낙인이 찍혔다고 한다.
 
  대중심리에 능하고, ‘정치 예능’을 잘 아는 홍준표는 항상 붉은색 넥타이를 즐겨 매고서 자신이 ‘증오’하는 ‘주류 정치인’이 되기 위해 애써 왔다. 구경꾼의 입장이라면 그의 정치가 흥미로운 볼거리였지만, 기성 정치인의 시각에서는 ‘현실인가, 쇼인가’가 헷갈릴 정도다. 그는 정치를 희화화(戱畵化)시킨다는 비난을 자초하고, “무슨 ‘거물 정치인’(쇼의 주인공)인 모양이지?” 하는 날 선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인 홍준표’는 대과(大過) 없이 16년 동안, 마치 예능 프로그램의 주인공 역할을 맡은 것처럼, 중앙 무대에서 또는 지역구에서 감초 같은 역할을 해 왔다.
 
  그 리얼리티 쇼의 주인공이 ‘진짜’ 현실 정치판의 주역이 되었다. MBC의 대표적인 리얼리티 쇼인 <우리 결혼했어요>의 가상 커플이 실제 커플이 된 것과도 같다. 그의 당 대표 선출이 리얼리티 쇼 이상으로 극적이었다면, 검사 생활의 인생 1막에 이어 인생 2막에서 벌써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정치 입문 16년 만에 비주류에서 주류가 돼
 
초선 시절 홍준표 의원. 1999년 2월 3일 아침 전경련 회관에서 검찰의 항명 파동과 정치 중립 문제를 논의한 뒤 무거운 표정으로 나오고 있다.
  홍준표 대표는 정치 입문 16년 만에 비주류에서 주류가 되었다. 그동안 입만 열면 스스로를 비주류에 가뒀다. 그가 지난 2009년 펴낸 자전에세이 제목도 《변방》이다. 책을 펴내며 “이제, 중심을 꿈꾸며 힘들었던 삶의 가장자리를 이야기한다”고 했다.
 
  지난 8월 10일 기자는 강호동이라도 만나듯 홍 대표를 만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여의도 한나라당사로 향했다.
 
  기자가 생각하는 ‘정치인 홍준표’는 비주류 정치인이 아니다. 홍 대표는 15대 국회 당시 이회창(李會昌) 총재의 전위대 역할을 하는 저격수로 ‘주류’에 가까웠다. 언제나 이 총재 연설 바로 앞에 선동연설을 하며 분위기를 돋우면 이 총재가 마무리하는 식으로 전국순회를 했다. ‘차떼기 정당’으로 공격받던 2003년 최병렬(崔秉烈) 대표 체제 때는 당 전략기획위원장(당시 비대위원장 겸 사무총장은 李在五, 외부인사영입위원장은 金文洙)이었고, 지난 2007년 대선 당시에는 이명박(李明博) 후보를 돕기 위해 이재오·김문수와 함께 ‘국가발전연구회’를 주도했다. 심지어 이 대통령을 사석(私席)에선 ‘형님’이라 부를 정도로 주류와 ‘절친’이다.
 
  그런데도 그는 비주류를 고집해 왔다. 마치 주류에 콤플렉스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 있어 비주류 지향성은 이른바 ‘액션’(action)인지, ‘허슬 플레이’(hustle play)를 위한 변칙(變則)행동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본격 질문을 ‘반값 아파트’로 시작했다.
 
  ―반값 아파트가 지금도 가능하다고 봅니까.
 
  “반값이 아니라 반의 반 값입니다. 2년 반 전에 법안을 통과시켜 놓고도 그 정책을 시행하자는 사람이 없어요.”
 
  이른바 ‘반값 아파트 법안’의 정식 명칭은 ‘토지임대부 분양주택 공급촉진을 위한 특별조치법안’이다. 2009년 3월 3일 국회를 통과했다. 공공기관이 먼저 토지를 사들이고 영구임대 형식으로 건물만 분양하는 방식으로 시행하면 서울의 경우 분양값이 평당 500만~600만원대로 내린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막대한 토지매입 비용을 재정에서 부담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홍 대표는 반값 아파트가 불발된 이유를 ‘주류’ 탓으로 돌렸다.
 
  “소위 한국사회 주류를 이루는 부동산 소득자, 부자들, 토지 자본가들이 이 정책에 반대하고 있으니 시행이 안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주택보급률이 100% 넘습니다. 108%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도 집 없는 사람이 서울에 얼마나 많습니까. 집을 주거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재산증식, 투기수단으로 생각하니 문제가 발생합니다. 한국사회 주류들은 과연 그분들이 부의 축적과정에서 얼마나 정당성이 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반값 아파트, 주류들이 호응을 안 해 준다”
 
  ―반값 아파트를 다시 추진하겠습니까.
 
  “(조금 뜸을 들인 뒤) 다시 끄집어냈으면 좋겠는데, 그걸 한국사회 주류들이 호응을 안 해 줍니다.”
 
  정부·여당의 대표가, 이미 국회를 통과한 법을, 한국사회 주류 때문에 못한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신이 주류가 된 사실을 망각한 것일까.
 
  ―이제 주류인데 뭘 그러세요. 주류라는 생각은 안 합니까. ‘정치인 홍준표’는 주류입니다. 밖에서 볼 때, 홍 대표는 주류인데 항상 비주류를 자처합니다.
 
  “비주류란 게 그렇습니다. 비주류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비주류의 변방(邊方)정신이 세상을 바꿉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책을 내놔도 호응하는 사람이 없으니, 호응을 안 해 주니, 소위 한국사회 주류들이 자기 것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변화가 없어요.) 자기 것을 나눠준다고 생각하면 저항이 없을 텐데, 빼앗긴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빗나간 답변이 돌아왔다. 재차 질문했다.
 
  ―정치 입문 이후 줄곧 주류 쪽에 있었지 않았습니까.
 
  “주류 쪽에서 비주류를 해 왔죠.”
 
  주류이기는 한데, 주류들 사이에서 비주류였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소수의 핵심(核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주류인데, (자신이 비주류인 양) 주류가 되고 싶다는 말을 왜 그렇게 많이 하나요.
 
  “주류가 되면 여유가 생기고, 낭만이 생기고, 또 자기가 하고자 하는 정책을 책임 있게 추진할 수 있잖습니까. 그래서 저는 주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다가 이번에 주류가 됐죠. 이번에야 한나라당 주류가 됐죠!”
 
  ―과거에도 주류였지만 ‘완전한 주류’가 아니었는데 이번에 ‘완전한 주류’가 됐다는 의미지요?
 
  “아직 완전한 주류는 안됐죠.”
 
  ―주류가 뭡니까. 돈과 권력을 지닌 자인가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서의 주류인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류는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지향하는 주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서의 주류입니다. 한국사회 주류가 나쁜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안 한다는 것이죠. 한국사회의 주류인 고위공직자 중에서 병역과 세금, 부동산투기 문제에 안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분들이야 정상적인 주류가 아니지요.
 
  “한국사회 주류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한국 부자들, 국민 위해 富를 뱉어 내야”
 
슬롯머신 사건의 수사주역 홍준표 검사가 1995년 사표를 제출할 당시의 모습.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다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주류이면서 자신을 둘러싼 다른 주류들을 부패한 주류라고 몰아붙이니 말이다. 마치 진보·좌파의 수사(修辭)처럼 현실인식이 적대적이고 비판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류를 욕하면서 주류를 지향하는 것은 모순 아닙니까.
 
  “정말로 제대로 된 주류이자 ‘참 보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자기 것을 양보할 줄 아는 주류가 돼야 합니다. 만석꾼이 한 섬 더 가지려고 하면 탐욕입니다. 한국사회 주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비겁하고 탐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주류는 어떻게 보면 ‘사이비 주류’예요. 세상을 자기 곳간 채우려는 욕심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그런 주류가 지배하는 세상은 부패하고 탐욕적인 세상, 양극화가 더욱 가속화되는 세상이지요.”
 
  ―한국사회 주류들이 다 사이비 주류라는 얘긴가요.
 
  “다는 아니지요.”
 
  그러면서 홍 대표는 지난 2005년 5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개정 국적법(國籍法)’(이른바 ‘홍준표 법’으로 당시 회자했었다.) 얘기를 꺼냈다. 개정 국적법에 따르면, 부모가 원정출산이나 유학, 해외근무 등 일시적으로 해외에 체류한 상태에서 태어나 이중국적을 갖게 된 사람은 병역의무를 마치거나 면제가 된 후가 아니면 국적이탈을 할 수 없다. 그의 회고다.
 
  “많은 한국의 주류, 지도층들이 국적법 허점을 이용해 병역면탈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미국 유학 가서 자식 낳으면 그 나라 국적을 자동 취득하잖아요. 그럼 병역의무가 면제됩니다. 그러곤 다시 국내로 돌아와 연구원이나 교수 등의 자리에 있다가 장·차관, 국회의원이 되는 식입니다. 그런 병역면탈을 막으려 법을 개정했는데, 국회의원들의 반대가 컸어요. 나중에 보니 자기 손자도 이중국적이더군요. 처음엔 부결됐다가 워낙 여론이 거세니까 억지찬성해서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한국사회 주류들은 마치 선민(選民)의식이 있는 것처럼 ‘군대(軍隊) 안 가도 국가 위해 일한다’고 주장합니다. 부동산투기 해 놓고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부를 축적하고… 한국사회 재벌들도 재벌 되는 과정을 보세요. 정경유착 안 하고 국가 도움이 없었다면 재벌이 됐겠습니까. 정상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한국사회의 리더라는 계층이 변칙적인 방법으로 이쯤 형성했다면(부를 쌓았다면), 이제는 국민과 국가를 위해 뱉어내야 합니다. 심지어 제가 서민정책을 만들겠다고 하면 ‘재벌 때리기’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느낍니다.”
 
 
  비주류가 대세를 점하면 급속도로 주류의 심리코드 취해
 
  ―진보·좌파로 불리던 세력들이 지난 10년간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정권에서 주류가 됐습니다. 그들은 그 이전의 주류와 얼마나 달라졌나요.
 
  “진보·좌파들이 주류가 돼 처음 출발할 때는 자신들이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출발했지만, 진보·좌파 10년간 권력비리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아직도 이들에 대한 해외재산 유출 여부를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어요. IMF 당시 엄청난 국내외 재산 매각과정에서 국부(國富)유출은 없었는지, 혹시 커미션을 받지는 않았는지 제대로 조사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진보·좌파 10년 주류들이 과거 주류들과 전혀 다를 게 없었고, 그 사람들도 부패한 주류들이었으며, 부패공화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은 주류와 대립하는 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는다. 이런 경우, 대세(大勢)의 존재나 확실한 기준에 따른 규범 자체도 부정한다. 여당이 하는 것을 반대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려는 야당의 정치행태는 이런 이유에서 발생한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黃相旻) 교수는 “역설적인 것은 비주류가 대세를 점하면 급속도로 주류의 심리코드를 취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황 교수는 “진보와 좌파를 주창하는 비주류라도 대세가 되면 급속도로 보수성향을 띤다. 심지어 자신들이 사회의 규범이나 질서, 기준이 돼야 한다는 주류의 믿음 체계를 그대로 재현하기도 한다”고 했다. 386 좌파들이 지난 정권에서 부패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한국사회에 진정한 주류가 집단이나 세력으로 존재한다고 봅니까.
 
  “만들어 가야겠죠. 진보 정권 10년간 주류들도 많이 변했다고 봅니다. 또 많은 것을 양보하는 과정에 있다고 봐요. 작년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정사회 구현’을 이념으로 내걸었는데 정부가 제대로 공정사회 지표를 추진해 갔으면 합니다. 제대로 된 주류가 되자는 의미지요.”
 
  ―다시 말해, 한국사회는 주류가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집단 혹은 세력으로 존재하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다섯 번 전학해
 
  홍준표 대표의 ‘비주류 지향성’을 더듬기 위해서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유년과 가족관계 등 야생(野生)의 시절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그는 집안이 망해 경남 창녕 남지의 고향을 떠나 대구 신천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파란만장했던 유년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였다. “신천동 산동네에서 단칸 월세방을 얻어 다섯 식구가 구호물자인 강냉이죽에 의존하며 살았고, 여동생과 나는 큰 고갯마루에 있는 동사무소 앞에 줄을 서서 하루에 한 번씩 강냉이 죽을 타 왔다”고 기억한다.
 
  “부모님은 선학 알루미늄 양은그릇 장사도 하고 팔공산 공산면 주변에서 나무를 해다 팔기도 했어요. 그러나 장사기질이 없던 두 분은 늘 밑지는 장사로 고향에 남아 있는 농토를 매년 한 마지기씩 팔아야 했어요.”
 
  대구에서 보낸 2년간 고향 전답을 다 팔아먹고 다시 낙향하고 만다. 홍 대표의 부모는 대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손수레를 끌고 시골로 돌아다니며 양은그릇 장사를 했다. 그러나 장사 수완이 없었던지 손해만 보고 본업인 농사를 짓기 위해 경남 합천의 한 산골로 또 이사를 했다. 홍 대표는 초등학교 6년 동안 다섯 번이나 전학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대주가(大酒家)였다. 술을 하루라도 마시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밀주를 담가 막걸리를 일 년 열두 달 아버지 밥상에 매일 올리는 것이었어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헌신이지요. 요즘, 여성분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지요.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학급 반장 한 번 못해
 
홍준표 대표는 야당시절 대여(對與) ‘저격수’로 활약했다. 지난 2004년 2월 5일 국회 법사위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축하금의 일부인 100억짜리 CD사본를 제시하며 비리를 주장하고 있다.
  홍 대표는 다시 대구로 전학 가 영남중과 영남고를 졸업하고, 1972년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대구의 일류 학교라면 경북고다. 경북고와 비교하면 영남고는 비주류일 수밖에 없다. 대구·경북, 소위 TK 정치인들은 강재섭(姜在涉) 전 대표와 홍 대표가 서로 다툼이 잦았던 점을 들어 “영남고와 경북고 차이에서 나온 홍 대표의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TK 의원들은 홍 대표가 영남고 출신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한다.
 
  “곰보를 보고 곰보라고 하면 기분 좋을 곰보가 없죠. 제가 다니는 학교가 삼류학교였습니다. 그때는 돈이 없어 장학금 받아 가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전 그 학교 나왔다고 부끄러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러나 일류학교 나온 사람이 삼류학교 나온 사람보고 학교 취급 안 해 주면 그때 분노합니다. 그래서 강 전 대표와 틀어졌던 것이지, 그 이후 다 화해했어요. 지난 4·27 경기 분당 보궐 선거 때 열심히 지원 유세했고, 요즘도 잘 모시고 있습니다. 하하하.”
 
  고교시절 그의 모습은 어땠을까.
 
  “고2 때까지 굉장히 내성적이었어요. 남 앞에 서 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선동연설을 그렇게 잘할 수 있나요. 학급 반장은 몇 번 했나요.
 
  “난 말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또 학창시절 반장 한 번 못했고요. 고2 때 작은누나와 싸워 자취방을 나와 친구 집에서 두 달 정도 뒹굴었는데, 그때 친구들과 담배도 피우고… 어울리면서 외향적으로 성격이 바뀌지 않았나 생각해요. 연설은 청주지검 초임검사 시절, 청소년 담당을 했는데 중·고교생 2000~3000명을 모아놓고 40여 차례 범죄예방 강연을 했어요. 처음 연단에 섰을 때가… 아마 청주여고 학생들이었을 거예요. 어린 여학생들이 저만 빤히 쳐다보니 눈이 캄캄하더군요. 말도 안 나오고…. 그런데 40여 차례 연설을 하고 나니 연설실력이 늘었고 나중엔 원고 없이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게 정치할 때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유신(維新) 반대운동이 시작된 1974년 8월 중순, 대학생 홍준표는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듣고 울산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는 대구, 창녕, 합천 등지를 떠돌다 울산 현대조선소 임시직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울산에서 막장 같은 인생을 사시면서 가장의 책무를 다하고자 무진장 애를 썼으나 그 좋던 건강도 술과 야간경비 일을 견뎌 내지 못했던 겁니다. 합천에 살 때 집에 불이 나 타 버렸을 때 아버지는 ‘집에 불이 나면 그 집은 불꽃처럼 일어난다’고 웃으면서 가족을 위로했지만 우리집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렸던 것이지요.”
 
  홍 대표는 지난 7월 4일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당선된 직후 즉석연설을 통해 “일당 800원을 받던 경비원의 아들, 고리사채에 머리채를 잡혀 길거리를 끌려 다니던 어머니의 아들이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에게 보여줬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었다.
 
  ―결과적으로 ‘불꽃처럼 인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사실로 증명된 셈이네요?
 
  “그런 셈이지요.”
 
  ―두 누님과 여동생도 다 잘사나요.
 
  “요즘은 다 잘삽니다. 손자 손녀 보고 다 잘살고 있어요.”
 
  ―대학시절 몸무게가 몇 kg이었나요.
 
  “48kg이었어요. 어릴 때 못 먹어서 그랬는지 나이 들어 먹어도 살이 안 쪄요.”
 
  ―대학시절, 노동자 계급에 의한 혁명이나 자본주의 내부 모순에 대해 공부하거나 고민한 적은 없나요.
 
  “그 시절, 제게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던 친구가 있었어요. 바로 삼성의 장충기(張忠基·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입니다. 서울 상대에 다니던 천재였어요. 저녁에 아르바이트하고 자취방에 들어가면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겠다고 설치던 친구예요. 대학 다니고 어렵던 시절, 세상이 한번 뒤집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죠.”
 
 
  졸업 6년 만에 司試 합격… 현실은 녹록지 않아
 
  홍준표 대표는 1977년 졸업했지만, 사법시험은 1982년에 합격했다. 회사에 입사했다가 고시병이 도져 몇 번이나 사표를 쓰고 도전했다.
 
  그리고 검사가 된 날, 그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고대(高大) 정신인 억강부약(抑强扶弱)의 각오로 세상을 평정해 보겠다고 호기롭게 출발한 검사의 길은 막상 시작해 보니 내부 제약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부장, 차장, 검사장의 결재 과정에서 자신의 소신과 다른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저는 법무장관의 사돈도 구속해 버렸고 현직 도지사의 비리를 내사하는 용기도 내보였습니다. 보안대의 위용이 하늘을 찌르던 그 시절 보안대 간부를 내사해 인사조치도 취했고 안기부 간부의 비리도 조사하는 바람에 정보기관에서는 저를 ‘통제 불능 검사’로 취급하기 시작했어요.”
 
  ―홍준표 대표 하면 ‘모래시계 검사’로 기억하는 이가 많아요. 그런데 최근 이미지는 ‘돌출’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왜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고 보나요.
 
  “아마 ‘돌출’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은 1993년 일일 겁니다. 슬롯머신 수사를 하면서 당시로서는 생각지 못한 인물들을 평검사인 제가 수사를 했어요. 해방 이후 평검사가 검찰 최고위 간부들을 처단한 일이 없고, 하리라고 생각도 못했을 겁니다. 그때 모 신문에서는 저를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라고 썼습니다. 되지도 않을 수사를 한다는 것이지요. 정계와 검찰 내 실력자, 정보기관 실력자, 청와대까지 수사했으니까요. 그런데 두 달 반 수사하면서 사실을 밝혔습니다.”
 
  홍 대표의 주장에 따르면, 슬롯머신 수사 이후 검찰 내 별종 취급을 받으면서 철저한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억울하게 ‘돌출행동을 했다’, ‘돈키호테다’ 하는 누명을 뒤집어썼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옳고 바른 일인데도 불구하고 기존의 사회관념, 그러니까 주류의 생각은 ‘저 엉뚱한 놈이 나와서 세상에 평지풍파를 일으킨다’는 식이었어요. 그 부정한 주류들이 말입니다.
 
  정치판 들어와 국적법 내놓았을 때도 언론에서 기사와 사설로 저를 폐쇄적 국수주의자로 비난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신문사 사설을 쓴 분 아들이 이중국적자더군요. 그런 사람 눈에는 ‘왜 평온하게 잘사는데 세상을 뒤집나’ 이거예요. ‘반값 아파트 법’을 처음 만들 당시 어떤 경제지는 신문 4쪽에 걸쳐 엉터리 같은 법이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결국 법을 만들었잖아요. 제가 사회를 개혁하고 바로잡아 가고, 정직한 사회로 가자고 할 때는 다 돌출로 몰았습니다. 고정관념으로 보면 돌출행동이지요. 나는 그 얘기에 전혀 괘념치 않습니다.“
 
  ―앞으로도 돌출행동을 계속하겠다는 것이지요?
 
  “돌출행동이 아니라 사회변혁 운동을 한 것이지요. 그것을 두고 (주류들은) 자기 것을 빼앗기는 줄 착각합니다. 양보할 생각을 해야지, 절 돌출로 몰고, 돈키호테로 몰아요. 그때마다 참, 도둑놈들아!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전 제 생각 틀리면 즉각 사과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 옳을 때는 그 누가 이야기해도 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슬롯머신 수사 당시 YS 비자금 나온 사실) 대답하지 않겠다”
 
한나라당 대학생 유니폼 행사장에서 모델로 등장한 홍준표 대표.
  ―‘돌출’이란 닉네임은 DJ 정부 시절, 저격수로 활약하며 얻은 표현 아닌가요.
 
  “아뇨. 슬롯머신 수사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그 이전에도 1988년 5공비리 사건으로 꼽히던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을 수사하면서 평검사가 법원장급 판사, 서울시장, 감사원 사무총장, 청와대 민정수석에다 칼을 들이댔다고 ‘돌출’이고 ‘독불’이란 말이 붙었고, 1993년 오버랩돼 또다시 그 별명이 생겨서 그런 이미지가 형성된 것입니다.”
 
  ―슬롯머신 비리 수사를 할 때, 은진수(전 감사원 감사위원)씨와 같이 수사를 했다고 하던데요?
 
  은 전 위원은 감사 무마를 대가로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7000만원을 건네 받은 혐의(알선수재)로 구속기소된 인물이다.
 
  “은 전 위원은 당시 초임 검사로 저와 같이 수사를 맡았는데, 공인회계사 출신이어서 자금추적 흐름을 잘 알겠다 싶어 데리고 와서 추적 전담을 시키고 조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맡겼지요.”
 
  ―당시 그는 정의감이 있었나요.
 
  “이 자리에서 은진수씨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겠습니다.”
 
  ―당시 수사과정에서 YS의 비자금이 나와 덮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그것은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씀은 사실상 시인한다는 뜻이지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검사 11년 동안 남은 것은 모래시계 드라마 한 편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홍 대표는 검찰조직에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검찰조직이 (홍 대표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보나요.
 
  “검찰이 제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합니다. 검찰조직의 부정한 사람을 도려냈는데, 도리어 제가 조직에 상처를 줬다고 얘기하니까요. 상처는 제가 받았지요. 제가 돈을 받았나요, 무슨 스캔들로 (조직에서) 나왔습니까. 검찰 위계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나가달라? … 제가 검찰조직에 상처 준 것 없어요. 당시 검찰간부가 저더러 나가 달라고 상처를 줬습니다.”
 
  ―정치검사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 대목에서 홍 대표는 목소리가 무척 격앙되게,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제가 정치검사 안 하려고 검찰 내부 수사도 한 겁니다. 만약 박철언씨도 끊어 버렸으면(박철언씨에 대한 수사를 중단했다면), 제가 검찰에서 승승장구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YS의 용병이 된다’는 생각에 검찰 내부를 수사한 겁니다. 내부 수사를 하면서 이것이 끝나면 옷 벗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했습니다.”
 
  ―검사 하면서 정치 뜻은 없었나요.
 
  “정치할 생각은 안 했어요.”
 
  ―검사복을 벗었을 때와 지금의 대한민국 검찰은 얼마나 달라졌나요.
 
  “지금 검사는 샐러리맨화(化)해서 지나치게 몸을 사리고 정의감이 부족하며 패기가 부족하고, 그래서 자꾸 몰락하고 있어요.”
 
  ―당시는 안 그랬나요. 조직 내 주류 검사들이 자꾸 수사를 막았다면서요.
 
  “… 검사들이 좀 그래요, 허허….”
 
 
  술과 여자를 멀리한 이유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아들과 아내 이순삼씨와 함께한 홍준표 대표.
  그는 “술과 돈과 여자를 멀리하며 정치를 한 것이 가장 큰 자산”이라거나 “여자, 병역, 재산, 세금 등 어느 한 부분도 공격당할 여지가 없는 사람”이란 점을 입버릇처럼 말한다. 심지어 “검사 시절, 밤샘 수사를 하지 않으면 무조건 밤 11시 전까지 집에 들어갔다. 아내가 정한 통금 시간이었다”고도 했다.
 
  ―한국정치에서 술과 돈, 여자의 늪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던데, 비결이라도 있나요. 아내에 대한 사랑인지, 종교적 신념인지, 어머니의 ‘헌신’을 지켜보며 가지게 됐는지, 아니면 말 못할 사정이라도?
 
  “초임검사 때 정보부 간부를 내사한 일이 있었어요. 그걸 알고 바로 반격이 들어오더군요. 어느 날 정보부 관계자가 사진 한 장을 디밀어요. 제가 룸살롱 가서 철 모르고 술 마시는 장면이더군요. 20대 후반이었으니 선배들 따라다니며 ‘월화수목금’을 술 먹고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요즘은 4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당시만 해도 청주지검 검사가 3명뿐이었으니 얼마나 대접이 좋았겠어요? 공교롭게도 찍힌 사진에는, 제가 두 여자 사이에 앉아 있는 겁니다. 검사 셋이서 남녀 쌍으로 앉았는데, 제가 중간에 앉아서인지 여자 사이에 제가 앉았던 겁니다.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검사를 제대로 하려면 술과 돈과 여자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깨달았지요. 그때부터 조심하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집사람이 좀 엄합니다. 늦어도 밤 11시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요즘도요?
 
  “요즘엔 자유를 줬어요. 요즘엔 일찍 들어가면 야단칩니다. 정치 하고부터는 자유를 줍니다만, 그땐 밤 11시까지 들어가야 했어요. 그리고 ‘남의 살(여자)’을 탐하지 마라, 그 약속을 지켜 주는 대신 나머지 제 일에 대해 간섭을 안 합니다. 저는 뭐 남자가 아닙니까. 전 그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하지만 그때 그런 일을 당해 보고 저부터 떳떳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정보부 간부 내사사건은 덮었나요.
 
  “그 사진이랑 같이 덮었지요. 그 사진, 집사람 봤으면 큰일 났을 겁니다.”
 
  ―그냥 술 마신 것뿐이라고, 아예 공개하라고 그러지 그랬어요.
 
  “(아내가) 술집 가는 것을 싫어했어요. 집사람이 볼까, 그땐 겁이 났어요. 결혼 초기였는데. 겁이 나서 정보부 내사 서류를 넘기고, 그 사진 받고 필름까지 넘겨 달라고 했어요. 하하.”
 
 
  “노무현·제정구를 따라갔다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
 
서재에서 법전을 읽고 있는 젊은 시절 홍준표 대표.
  검사복을 벗은 뒤 홍 대표는 “검사를 왜 그만둬야 했는지 억울했고, 처단자의 입장에 섰던 내가 돈을 받고 범죄자를 변호해야 하는 현실이 마뜩찮았다”고 한다. 1995년 11월 초 후배 변호사 사무실 반쪽을 얻어 새 출발을 했으나 사건 수임이 쉽지 않았다. 검찰과의 불화로 변호사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모래시계 검사’ 이미지를 살려 정치판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1996년 1월 26일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입당할 생각을 굳힌 날, ‘꼬마 민주당’ 소속 노무현·제정구·이철·유인태·김홍신 등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는 “민주당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노무현 전 의원은 30분간 훈계한 뒤 가 버리고 제정구(諸廷坵) 의원 등은 새벽 2시반까지 설득하고 질책도 했다”고 했다.
 
  ―당시 노무현·제정구를 따라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제 정치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신한국당 입당은 어떻게 된 겁니까. YS의 아들 김현철(金賢哲·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김기섭(金己燮) 당시 안기부 기조실장과의 친분관계가 작용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홍준표 검사의 슬롯머신 수사로 영어(囹圄)의 몸이 됐던 박철언(朴哲彦) 전 의원에 따르면, “김기섭 안기부 기조실장은 YS의 차남 김현철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고, 홍준표는 김기섭의 영남고 후배로서 잘 아는 사이였다”며 “홍준표가 돈키호테 소리를 들어 가면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힘의 배경이 바로 김현철, 김기섭에게 있었다”고 주장했었다.
 
  이에 대해 홍 대표는 “김기섭은 영남고 12년 선배다. 제가 안기부에 파견근무할 때 알게 됐는데, 김현철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다. 그때는 아예 김현철을 몰랐고…”라고 부인했다.
 
  ―그래도 정치입문 과정에서 김기섭씨가 영향을 미쳤지요?
 
  “제가 입당할 때만 해도 거창하게 들어갔어요. 저와 이회창, 박찬종(朴燦鍾), 안상수(安商守) 등 법조인 네 명이 한꺼번에 들어갔어요. (김기섭씨가 입당과정에서) 막후 역할을 했을 수도 있지만 저는 내용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땐 (모래시계 검사로) 인기가 있었어요. 무소속 나가도 됐을 겁니다.”
 
 
  “DJ 정권이 ‘한나라당 탈당하면 살려 주겠다’고 제의”
 
   그는 김대중 정권 시절, DJ의 저격수로 한껏 주가를 올렸다. 마치 검사 시절로 되돌아간 듯 공격에 앞장섰다.
 
  ―저격수로 나선 이유가 뭡니까.
 
  “당의 요구에 의해 한 것이지 전들 하고 싶었겠어요? 저도 하기 싫어요. 검사로 (범죄자를) 잡아넣고 처단하고 권력자와 싸운 것도 직업상 그랬지만, 정치판에서조차 하고 싶겠어요? 저도 누구처럼 이미지나 가꾸고 스타일리스트처럼 행동했다면, 지금쯤 대통령 후보가 됐을 겁니다. 조직에서 요구하니 할 수 없이 한 것이에요. 10년간 저격수로 나서면서 단 한 번도 고소당한 일이 없습니다. 제가 예뻐서 고소 안 당했겠습니까. 정확하게 거니까, 고소 못한 거지요. 아직도 제가 한 것 중에 미완의 부정사건이 그대로 있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그러나 15대 당시 홍 대표는 1998년 무혐의 처리됐던 선거법 위반 사건이 재정신청으로 회부되어 고등법원에서 5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결국 정계를 떠나게 된다.
 
  ―김대중 정권에 반감은 없었습니까.
 
  “업보(業報)라고 얘기하고 떠났습니다. 제가 (저격수로) 공격했으니까, 덮어씌우는 것도 업보다 하고 떠났습니다. 반감은 없습니다.”
 
  ―당시 한나라당에서 탈당하라는 제의를 받았다고 하던데요.
 
  “탈당하면 살려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1997년 대선 후 총풍·세풍·안풍 사건 등으로 한나라당을 압박해 38명이나 탈당시켰습니다.”
 
  ―누가 탈당을 제의했나요.
 
  “말할 수 없습니다. 고려대 선배이자 당시 실세였어요. (탈당 제의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고맙게 생각한다고요?
 
  “네. 그분은 현재 정계를 은퇴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탈당해서 무죄를 받아 본들, 국민이 믿어 주겠나 싶었고, 재판받는 것 자체에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1999년 대법원 판결 하루 전 의원직을 사퇴했지요.”
 
  그해 5월 홍 대표는 미국 워싱턴으로 무작정 떠났다. ‘워싱턴 인터내셔널 센터’ 객원 연구원 자리를 얻어 놓고서다. 미국 덜레스 공항에 도착한 홍 대표 눈앞에 이명박 대통령이 서 있었다. 그도 3개월여 전 선거법 위반 재판 도중 의원직을 사퇴하고 조지워싱턴대 객원교수로 와 있었다. 손학규(孫鶴圭) 대표도 경기지사 선거에서 실패하고 워싱턴에 있었다.
 
  미국에서 이 대통령, 손 대표와 교분을 쌓았던 그는 “이 대통령과는 시간이 나면 주로 골프를 했고, 골프를 못하는 손 대표와는 세상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고 회고했다.
 
  이후 홍 대표는 2001년 서울 동대문을 보궐선거에서 재기하며 정치판에 화려하게 재입성했다.
 
 
  “MB 정권 성공하려면, 새로운 일에 욕심부리지 말라”
 
대학시절, 하숙집 마루에 걸터앉아 기타치는 자신의 사진을 홍대표가 들고 있다. 검정고무신이 인상적이다.
  ―요즘도 이명박 대통령을 ‘형님’으로 부르나요.
 
  “아뇨. 절대 그런 말 안 합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 한 얘기죠.”
 
  ―그럼, ‘대통령님’이라고 합니까.
 
  “이 자리에서 호칭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는 전부 공적(公的)인 자리입니다. 사적으로는 만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나면 편하게 만납니다. 마치 과거 대통령이 되기 전에 그랬듯 각종 현안에 대해서도 비교적 편안하게 얘기를 주고받아요.”
 
  ―이 대통령이 귀를 열어 둡디까.
 
  “그렇습니다. 저는 할 얘기 다 합니다.”
 
  ―대통령도요?
 
  “하실 말씀 다 하죠.”
 
  ―속 얘기도요?
 
  “다 합니다. 둘이 앉아 못할 얘기가 어디 있나요. 예의를 갖추긴 하지만 어떤 얘기라도 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실패한 정권인가요, 아니면 실패하고 있나요.
 
  “성공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홍 대표도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지 않았나요.
 
  “아니, 세상에 비판한다는 사람이… 예수님도 당대엔 비판을 당했어요. 생전에 비판을 안 당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습니까.”
 
  ―MB 정부가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나요.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다고 봅니다.”
 
  ―성공의 전제조건은 뭡니까.
 
  “권력 비리, 친인척 비리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임기 말 새로운 일을 하기보다 여태 하던 일을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일에 욕심부려선 안 됩니다. 또 당과 제대로 소통절차를 이뤄 준다면 이 대통령도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당도 정권 재창출이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부자에게 자유를, 서민에게 기회를”
 
   ―요즘 여야 당사에 민원인이 없다고 합니다. 최소한 낭만은 아니더라도, 정치판에 감동이 사라진 이유는 뭘까요.
 
  “15~16대 국회 시절에는 정치판에 낭만이 있었어요. 여야가 정쟁하고 상임위에서 격렬 논쟁 하더라도 끝나고 나면 국회 앞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으로 털고, 이튿날 다시 만나 논쟁을 하던 낭만이 있었죠. 그런데 17대 국회에 386세대가 들어오면서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선후배가 없어졌어요. 386 정치인들은 선배를 전혀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배척해야 하는 세대, 배제해야 하는 상대로 규정하고 정치를 해 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국회의원 수가 불과 299명밖에 되지 않지만, 국회 목욕탕에서 만나도 민숭민숭하고 ‘저 사람 누구더라’, 가물가물해요. 선후배 의원이 만나도 인사 안 하는 풍조가 17대 때부터 생겼어요. 그때부터 정치판이 삭막해졌습니다.
 
  또 삭막한 이유는 인터넷 언론의 등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언론이 실수도 봐주곤 했는데, 지금 와서는 리얼하게 나와 버리니까 정치인이 서로 조심하고 말을 안 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용인되던 실수가 지금은 정계 은퇴까지 몰려가는 상황이 연출됐어요.”
 
  ―선배 정치인들이 존경받을 일을 못했기 때문은 아닌가요.
 
  “그런 측면도 있겠지요. 그러나 정치판도 사람 사는 곳 아닙니까. 어느 정도 실수도 과오도 덮어주고 용납하는 그런 풍토가 있었는데, 386세대가 국회에 들어서며 정치가 실용주의로 변하고 현실주의로 변하고 낭만이 없어지고 완벽주의를 추구하니까 점점 정치판이 삭막해지고 힘들어진 것이죠.”
 
  ―요즘 한나라당을 두고 ‘좌(左) 클릭한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제가 기준을 두는 것은 ‘헌법 제119조 2항’입니다. 부(富)가 편재됐을 때는 국가가 조정과 통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사실상 사회적 시장경제원리를 천명한 조항입니다. 물론 헌법상 경제질서의 기본이념은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마냥 그것만 추구하면 부가 한쪽으로 몰립니다. 그럴 경우 119조 2항에 따라, 그리고 헌법 정신에 따라 ‘친서민 정책’을 강화하자는 것입니다.”
 
  홍 대표는 “부자에게 자유를, 서민에게 기회를”이라는 말을 쓰며 ‘좌 클릭’ 행보를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부자에게는 기업경영의 자유, 돈 쓸 자유, 사치할 자유를 다 주겠다는 겁니다. 대신 사회적 책임을 다해 달라는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키며 세금 제대로 내는데, 호화주택 산다고 문제가 되겠습니까. 매일 골프하고 해외여행 간들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다만 서민에게 기회를 줘야 합니다. 서민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가난할 자유밖에 없어요. 끊임없이 기회를 줘야 해요. 넘어지면 다시 일으키는 것이 국가의 의무죠. 계속 부자가 되고 희망을 줄 기회를 줘야 해요. 그렇다고 친서민 정책 강화를 반기업 정서로 봐서는 옳지 않습니다.”
 
 
  “20·30대 희망 만들기 프로젝트 추진”
 
  ―《주간조선》 (8월 1일자)에 실린 안철수(安哲秀) 교수 인터뷰를 봤습니까. 안 교수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분노한 20~30대들이 대거 투표장에 몰릴 것’으로 전망하더군요. 결국 20~30대의 정치참여가 여당에 불리할 수 있는데, 내년 총선을 어떻게 전망하나요. 자신 있습니까.
 
  “자신이 있다 없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20~30대가 분노하는 이유는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 부모들이 어렵게 살면서도,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내 ‘우골탑’(牛骨塔)이란 말까지 생겨났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힘들게 살아도 자식만큼은 잘살고, 당당하게 살게 하겠다’는 희망이 있었어요. 그러나 요즘 20~30대는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안됩니다. 과거엔 경제성장률이 1% 오르면 일자리가 34만개가 생긴다고 했는데 요즘은 8만개밖에 안 생긴다고 해요. 그러니 사회불만 계층만 늘어납니다. 대학은 아무 경쟁력이 없고 부정·비리가 만연한데, 이런 대학에 등록금을 많이 주고 뼈 빠지게 졸업해 본들 취직이 안돼요. 사회에 나가 활동할 공간이 없어요.”
 
  홍 대표는 “20~30대를 위한 희망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일자리를 만들거나 자영업, 벤처창업펀드 조성 등 젊은이들이 일어설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하려 준비 중입니다. 또 대학 안 가도 취업할 수 있게 ‘고졸은행원 제도’를 다시 부활시키려 합니다.”
 
  ―20~30대도 문제지만 40~50대도 걱정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젊은이들이야 그래도 젊으니까 희망이 있는데, 직장에서 쫓겨난 40~50대 가장들은 진짜 갈 곳이 없습니다. 안정희구 세력인 40~50대가 좌파로 돌아서는 상황도 예상할 수 있지요.
 
  “미국 사회보장제도 잘돼 있어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많고, 그분들은 대개 보수화된 성향을 가집니다. 그러나 한국은 사회보장제도가 미국 북유럽처럼 충분치 못하지요. 게다가 자녀를 결혼시키고 직장에서 은퇴해야 하는 시기가 되면 상황이 더 심각해지지요. 직장에서 은퇴하고 70세까지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직장을 만들고 그런 사회구조도 만들어야 합니다.”
 
  ―내년 총선 공천을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저는 개혁 공천, 상향식 공천, 이기는 공천을 얘기했는데 그중에서도 이기는 공천을 할 생각입니다. 또 ‘극좌(極左)’가 아니라면 좌우를 품는 것도 나라의 큰 방향이 될 것입니다. 세대갈등을 넘어 지역갈등을 넘어서야 하고, 보수와 진보, 좌·우파의 대립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사실, 좌우대립은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아요. 그래서 극좌가 아닌 분이라면, 어느 분이라도 한나라당에서 일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극우(極右)’도 배제대상인가요.
 
  “그렇습니다.”
 
  ―안철수 교수가 자신을 ‘십고초려(十顧草廬)’한다면 정치입문을 고려해 보겠다고 하던데, 그분도 영입대상이죠?
 
  “특정인 대상으로 얘기하지 않겠지만, 외부인사를 영입해 실패한 사례가 굉장히 많아요. 정치권 밖에선 명망가일지 모르지만 들어오는 순간 망가집니다. 그것보다 한나라당은 밑바닥에서 묵묵히 일해 온 사람을 더 원합니다.”
 
  ―눈여겨본 사람이 있나요.
 
  “있습니다.”
 
  ―이동관(李東官) 대통령 특보가 《월간조선》에서 “박근혜 대세론은 독”이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지요. ‘박근혜 대세론’이 한나라당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보나요.
 
  “정권 재창출의 희망을 주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가장 크고,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가장 커요. 제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 지표입니다. 경쟁하는 당내 후보들이 좀 더 분발해야 하는데 경선게임이 익사이팅(exciting)하면, 저희로서는 그만큼 좋은 일이 어딨겠어요. 저는 늘 이야기해요. 경쟁후보들이 좀 더 익사이팅하게 움직여 지지율을 높이라고요. 당내 경선이 불가예측으로 간다면 국민관심이 높아질 것 아닙니까.
 
  어쨌든 이동관 특보의 말은 적절치 않았다고 봅니다. 사실 그의 말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요. 다만, 특보가 이야기하니까 청와대 의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적절치 못하고, 청와대는 당내 경선에 엄정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1992년 YS 경선 때나 1997년 DJ 경선 당시를 연구할 생각”
 
  ―지금 이대로라면 당내 대선후보 경선이 밋밋할 것 같은데 대비책이라도 있습니까.
 
  “정말로 밋밋한 경선으로 흐릴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1992년 YS 경선 때나 1997년 DJ 경선 당시를 연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1992·97년 경선은 싱거운 경선이었다. 치열한 이벤트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경선을 치렀을 경우 집권플랜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당시의 모델을 연구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투구였던 7·4 전당대회를 지켜보면서 한나라당이 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극히 단견입니다. 선거란 게 점잖은 선거도 있나요? 정치 선진국이라는 미국도 폭로전이 있어요. 지난번 경선을 보고 구태라고 하는데, 그 이전 경선보다 훨씬 점잖았어요. 그걸 두고 구태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경선에 나섰던 원희룡(元喜龍) 의원과 화해를 했나요.
 
  “경선이 끝나면 당시 일은 잊어야지 끝나고 자꾸 생각하면 정치인 자격이 없습니다. 난 돌아서면 잊습니다.”
 
  ―저쪽에선 상처가 되는데요?
 
  “저도 심하게 공격당했지요.”
 
  ―원희룡 의원이 내년 총선 불출마 뜻을 밝혔는데, 홍 대표는 그런 생각 없나요.
 
  “당 대표가 출마조차 안 하면 무슨 명분이 있나요. 전 출마합니다.”
 
  ―대선 후보로 나설 의향은 없나요.
 
  “대통령은 자기가 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IMF가 있었기에 대통령이 됐고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염증이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지요. 자기가 의도하든 안 하든 자기시대가 와야 합니다. 대통령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 자기시대를 맞아야 하는 것이지, 무리하게 하면 자기 자신을 망칩니다.”
 
  ―기자가 과거 홍 대표에게 직접 들은 얘기인데요, ‘내 고향은 경남에서, 학교는 대구에서, 아내는 호남(전북 부안)으로 (대선에 나온다면) 전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한 적이 있지요?
 
  “그렇죠? 하하. 아마 한나라당에서 영남을 통틀어 PK와 TK가 동시에 걸치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 하하.”
 
  ―끝으로 한나라당을 어떻게 이끌 생각입니까.
 
  “제가 당을 맡은 1년은 참으로 중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이승만(李承晩)의 건국시대, 박정희(朴正熙)의 산업화 시대,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의 민주화 시대를 넘어 이명박 시대를 열었잖습니까. 우리가 소득수준이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로 넘어서는데 1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선진국은 고작 3~4년 만에 넘어서는 고개를 10년이 걸렸어요. 내년 총선에 참패하면 그 여파로 대선까지 밀린다고 봅니다. 총선에서 이겨야 하는 역사적 책무를 지고 있다고 느껴요. 초식공룡 이미지, 부패의 이미지를 일소시켜, 총선에서 이겨 대선으로 가는 튼튼한 다리를 놔 주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다시 리얼리티 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황상민 교수는 “리얼리티 쇼의 소재는 현실의 ‘주류’가 제공하지만, 그것을 완전한 리얼리티 쇼로 변신시키는 것은 ‘비주류’”라고 했다. 사실 정치만한 리얼리티 쇼도 없다. 한국의 모든 논쟁거리가 정치와 국회에서 시작된다. 그 속에서 ‘비주류’ 홍준표 대표는 7·4 전당대회를 통해 ‘리얼리티 쇼’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가 대결하는 ‘리얼리티 쇼’에는 각본이 없다. 그의 닉네임(nickname)이 그렇듯,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비주류의 검사정신을 지향하는 그가, ‘사이비 주류’가 판치는 여의도 정치판과 한나라당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흥미롭게 지켜보자. 채널고정!⊙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