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世一의 비교 評傳 (86)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美蘇共委 파동 속에 지방 순회

  • 글 : 손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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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1일은 해방되고 처음 맞는 3·1절인데도 불구하고 좌우익 단체들이 별도로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우익단체들은 오전에 종로 普信閣 앞 광장에서 民主議院 주최의 기념식을 가진 데 이어 정오에는 서울운동장에서 10만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좌익단체들은 남산공원 광장과 파고다공원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申翼熙 휘하의 政治工作隊員 5명이 평양으로 밀행하여 3·1절 기념식에서 金日成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식장을 경호하던 소련군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북한은 그것이 金九와 李承晩의 소행이라고 드세게 비난했다.
 
  모스크바 3국외무장관회의의 협정에 따른 제1차 美蘇共同委員會는 3월 20일부터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당이나 단체는 美蘇共委의 협의대상에서 제외해야 된다는 소련대표단의 주장과 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라는 미국대표단의 주장이 맞서 5월 6일에 무기휴회로 들어갔다.
 
  李承晩과 金九는 4월 들어 각각 지방을 여행했다. 李承晩은 경북, 경남, 전남의 도시를 순회하면서 주로 공산당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金九의 여행은 인천과 충남의 마곡사, 尹奉吉 생가 등 연고있는 곳을 찾아가는 ‘센티멘털 저니(sentimental journey·감성여행)’이었다.
 

  1. 3·1節 式典에서 金日成에게 爆彈 던져
 
   1946년 3월 1일은 30대 이상의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27년 전의 그 만세 시위의 감격이 아스라하게 되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귀국한 뒤에 처음으로 3·1절을 맞는 이승만과 김구의 감회는 남달랐다.
 
  민주의원 주최의 기미독립선언 기념식은 3월 1일 상오 9시40분부터 종로 보신각 앞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그 자리는 이승만에게나 김구에게나 평생동안 뇌리에 잠재해 있는 추억의 장소였다. 1898년 3월에 이 나라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독립협회 주최의 만민공동회가 열린 곳이 바로 이곳이었는데, 스물네살의 젊은 이승만은 이 집회의 연사로서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 조차(租借) 요구를 규탄하는 연설을 했고 그 자리에서 대정부 건의서를 작성하여 전달할 총대로 선출되었다(《月刊朝鮮》2002년 4월호,〈거리의 선동가〉참조). 1911년 가을에 귀국하여 1년동안 YMCA의 한국인 총무로 일할 때에는 매일같이 이 거리를 지나다녔다. 김구는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강제될 때에 진남포(鎭南浦)교회 청년회 대표로 서울에 올라와서 조약파기운동의 행동대로 활동했는데,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던 곳이 바로 이 종로거리였다. 김구는 이때에 서른살의 장골이었다(《月刊朝鮮》2003년 1월호,〈‘保護條約’ 파기투쟁과 民衆啓蒙運動〉참조).
 
 
  “3·1運動은 세계최초의 非暴力革命”
 
  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은 기념식 개회사를 통하여 3·1운동은 세계 최초의 비폭력혁명이었다고 역설했다.
 
  “3월 1일은 우리나라 역사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 빛나는 날이다. 27년 전 오늘에 우리나라에서 세계의 처음되는 비폭력혁명이라는 것이 시작된 것이다. 정신적 능력이 물질적 능력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
 
  그것은 3·1운동 직후부터 강조해온 그의 지론이었다. 이승만은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인도의 간디(Mahatma Gandhi)가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3·1운동이 간디의 비폭력운동보다 더 앞선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독립운동도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비폭력으로, 곧 외교와 선전제일주의로 전개해야 된다고 이승만은 줄곧 주장했다. 그 때문에 김구를 포함한 임시정부의 무장투쟁론자들과 대립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했었다(《月刊朝鮮》2007년 1월호,〈武力鬪爭이냐 外交宣傳이냐, 다시 論爭〉참조).
 
  이승만은 군중을 향하여 “국내에서 악전고투하던 당신네와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우리들이 태극기 밑에서 함께 모여 이 자유일을 자유로 경축하기는 27년동안 오늘이 처음”이라 말하고, “이만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연합국이 승전한 결과이니, 1945년에 한국에 주둔한 미군장병의 승리한 사실은 우리가 영구히 기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金九는 東學과 義兵運動의 반항정신 강조
 
  김구 총리의 축사는 뉘앙스가 좀 달랐다. 그는 먼저 “단지 빈주먹밖에 가진 것이 없던 우리 한국민족이 오히려 7, 8개월이나 계속하여 총과 칼에 대하여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인류의 혁명사상에 감히 가장 빛나는 부분이 되리라고 믿는다”고 말하고, 3·1운동의 의의는 통일성에 있다고 강조했다.
 
  “3·1운동의 위대한 의의는 실로 그 통일성에 있다. 지역의 동서가 없었고, 계급의 상하가 없었고, 종교 사상 모든 국한된 입장과 태도를 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겨레의 독립과 자유를 찾자는 불덩어리와 같은 일념에서 이 운동을 일관했다는 점을 우리는 세상에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 1905년에 보호조약으로 왜적이 우리 한국을 실질적으로 점령하기 전부터 우리 민족은 동학당 혹은 의병 등 여러가지 형태로 왜적에게 반항하였으니, 이런 개별적 부분적 운동이 통일된 지도밑에서 세계적으로 한국민족의 생존권을 요구한 것이 이 운동이다.”
 
  일찍이 치하포(鴟河浦)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하면서 개화파가 되었고 3·1운동 이후로는 줄곧 외교선전이 주된 활동이었던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그 자신이 젊어서 참여했던 동학농민봉기와 의병운동 등 무력항일투쟁의 전통이 3·1운동에 계승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어서 흥미롭다.1)
 
  이날 정오에는 서울운동장에서 33인의 생존자들과 유족들,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10만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가 열렸다.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申翼熙)가 개회사를 하고 함태영(咸台永) 목사가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단체들은 남산공원 광장에 5,000여명이 모여 독자적으로 기념식을 가졌고, 파고다공원에서도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로 소규모의 기념식이 열렸다. 좌우익 정파들의 대립은 이처럼 최초의 국경일행사마저 함께 거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내집에 불놓는 자와는 함께 일 못해…”
 
  이승만은 좌익단체들이 별도로 3·1운동기념행사를 개최한 것이 불쾌했다. 그는 정례 기자회견일인 3월 4일에 비서실장 윤치영(尹致暎)을 통하여 공산당을 질타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누구나 공산분자와 합동을 이루지 못하고는 통일이 될 수 없다는 이가 있다면, 이는 곧 내집에 불놓는 자와 함께 일하라는 말과 같으니 될 수 없는 일”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각 정당의 두령들이 합동하여 지난 4, 5개월동안을 두고 노력노심(努力勞心)하며 통일을 이루려고 힘써 보았으나 그 사람들이 백계(百計)로 활동하야 자기들이 전부를 다 통할하기 전에는 합동이 되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번에 국민대표의원을 성립할 때에는 우리는 이들을 성심으로 청하였고, 3·1 경축식장에도 특별히 청하여 세인 이목에 우리가 통일된 전면을 표시하려 하였으나, 그 사람들은 끝끝내 퇴각하고 분열 분쟁의 상태를 드러내려 하니, 그 심장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런즉 이 분자들이 공산주의를 변치 않고 파괴를 일삼을 때까지는 우리와 합할 수 없고 … 지금에도 종시 회개치 못하고 우리 국권회복을 방해하는 자들은 우리 민중이 그 죄상을 기록하여 두었다가 이후 우리 정권을 회복하는 날에는 응당 다른 범죄자들과 같이 국법에 밝힐 것이다.”2)
 
  그것은 공산주의자들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을 다시 한번 공언한 것이었다.
 
 
  平壤驛 광장에서 金日成 암살 企圖
 
金日成의 80회 생일에 초청된 노비첸코(왼쪽에서 두 번째) 일행.
  이 시점에 북한에서 있었던 일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3·1절 기념식장에서 김일성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것은 신익희 휘하의 정치공작대와 염동진(廉東震·일명 廉應澤)의 반공테러단체인 백의사(白衣社)가 밀파한 김정의(金正義·일명 金濟哲), 이성렬(李聖烈), 김형집(金亨集), 최기성(崔基成), 이희두(李希斗)의 다섯 청년들이 감행한 행동이었다. 이들은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1945년 12월 31일에 발표했던 ‘국자(國字)’ 제1, 2호와 함께 ‘임시정부 내무부장(신익희)’ 명의로 된 〈승용차 편의 공여에 관한 의뢰장〉과 신임장을 지니고 2월 중순에 평양으로 갔다.
 
  평양역 광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은 소련군 진주 이후 두 번째의 대규모 집회였다. 3월 5일의 토지개혁 실시에 즈음하여 주민들을 대거 동원한 것이었다. 수류탄과 권총으로 무장한 공작원 5명은 군중속에 섞여 지정된 위치로 산개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열아홉살 난 김형집이 흥분한 나머지 예정된 시각보다 빨리 수류탄을 주머니에서 끄집어 드는 바람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황급히 던진 수류탄은 연단 바로 앞에 떨어졌다. 경비하던 소련군 소위 노비첸코가 덮치는 순간 굉음과 함께 폭발하여 노비첸코의 오른손이 날아가고 가슴팍과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연설을 막 시작하려던 김일성은 재빨리 피신했다.3) 이때에 김일성을 구해 준 보답으로 노비첸코는 1949년 2월 22일에 북한으로부터 제3급 국가훈장을 받았다.4) 김일성은 오랜 세월이 지난 1992년 4월에 노비첸코를 자신의 80회 생일에 평양으로 초청했는데, 이때에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로동신문》제호 밑에 커다랗게 실렸다. 이 사진에도 노비첸코의 오른쪽 팔이 없다.5)
 
  북파 공작대원들은 김일성 암살이 실패한 뒤에도 김일성의 최측근들인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강량욱(康良煜) 세 사람의 폭살을 기도했다. 3월 5일과 7일 두 차례에 걸쳐 수류탄과 다발총 및 권총으로 최용건의 집을 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9일에는 김책의 집을, 11일에는 강량욱의 집을 습격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김정의와 이희두는 체포되고, 최기성은 사살되었으며, 이성렬만 서울로 돌아왔다.6)
 
  이 사건에 대하여 김일성 그룹이 작성한 한 팸플릿은 그것이 김구와 이승만이 보낸 ‘팟쇼’ 무리들의 소행이라고 말하고, “민족반역자 ‘팟쇼’ 반동자 김구, 이승만의 ‘팟쇼테러’ 행위를 철저히 숙청하고 팟쇼 살인방화강도단의 두목 김구, 이승만이를 타도하는 애국운동은 맹화지세(猛火之勢)로 발전하고 있다. 이 민주적 애국운동은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이요 팟쇼 살인방화강도단의 두목 김구, 이승만은 타도될 것이다. 팟쇼 살인방화강도단의 두목 김구, 이승만을 타도하자!”고 드세게 매도했다.7)
 
  이때에 파견된 공작대의 책임자였던 김정의에 대한 구소련 무력정치부 제7국의 심문기록에 따르면, 김정의는 임시정부 정보국의 부국장이었고, 평양으로 갈 때에 지녔던 문건들은 임시정부 정보국장 박문(朴文)이 작성해 주었다. 박문은 정치공작대 중앙본부의 정보반 책임자이기도 했다.8) 김정의는 김구를 대면한 적이 없었고, 자신들의 평양행에 대하여 김구가 알고 있었는지도 자기는 모른다고 했다.9) 그러나 이보다 앞서 1946년 1월초에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윤한구(尹漢九)와 유영배(柳永培),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최중하(崔重夏: 일명 崔書勉) 등 반탁전국학생 대표들이 ‘대이북 신탁통치반대공작대’를 구성하여 평양으로 밀행할 때에는 김구는 학생대표 세 사람을 경교장으로 불러 저녁을 같이 하면서 격려하고 200원의 활동비도 지급한 것으로 보아 김정의 등의 밀행도 알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중하는 연희전문 동창인 조만식의 친위대원 이성룡(李成龍)의 주선으로 북한인사들의 신탁통치반대 연판장을 받아 가지고 귀환했고, 연금되어 있는 조만식과의 면회를 시도하던 윤한구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2년6개월 뒤에야 귀환했다.10)
 
 
  民族陣營 4개 정당이 합동하기로
 
  비상국민회의의 결성을 계기로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 정파들이 탈퇴함으로써 임시정부가 사실상 해체됨에 따라 김구 그룹과 임시정부 산하에 집결해 있던 우익 정파들은 우익 정당 통합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3월 16일에는 관수동 대환각(大歡閣)에서 김구, 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琓九), 엄항섭(嚴恒燮) 등 한국독립당 간부들과 안재홍(安在鴻) 등 국민당 간부들이 회합하여 합당하기로 의견을 모았다.11) 국민당은 이미 1945년 11월에 “우리 당은 민족통일전선의 전면적 완전 통일 정당의 결성이 적정 타당한 형태에서 진취(進就)된다면 이에 적응하기 위하여 무조건 해소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었다.12)
 
  국민당은 3월 20일에 수표교회(水標敎會)에서 중앙위원회를 열고 한국독립당과의 합당을 위하여 국민당을 해체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합당실행위원으로 안재홍 등 9명을 선정했다.13)
 
  한독당과 국민당의 합당작업은 급전직하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두 당은 이틀 뒤인 3월 22일에 합동선언을 발표했다.
 
  이어 3월 26일에는 우익의 주류세력인 한국민주당의 선전부장 함상훈(咸尙勳)도 “한국독립당과 본당과의 합동문제는 임정 환국 당시에 본당에서 제의한 바요 이승만 김구 양씨 영수를 민족적 지도자로서 추대하자는 것은 본당의 지론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했고, 같은 날 신한민족당도 중앙상무집행위원회를 열어 자당의 노선과 합치되는 정강을 내세우고 간부인원을 각 당의 당원수의 비례에 따라 배분할 것을 조건부로 하여 합당하기로 결의하고, 권태석(權泰錫), 김려식(金麗植), 최익환(崔益煥)을 합당교섭위원으로 선임했다.14)
 
 
  委員長職 수락 교섭하자 脫黨하라고 권유
 
  그러나 우파정당들의 통합은 기대했던 것만큼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한독당의 고자세 때문이었다. 3월 27일에 김구, 조경한(趙警韓), 조완구, 김성수(金性洙), 안재홍, 김려식 등 각 정당 대표들이 경교장에 모여 장시간 합동방안을 협의했는데, 조경한 등은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 15명 가운데 5명만 귀국하고 10명은 외국에 있기 때문에 소수 위원만으로 당명과 당시(黨是) 당칙(黨則)을 고칠 수 없다면서 국내 정당들이 무조건 해체하고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들어오면 위원회의 결의로 당명과 당시를 고칠 수는 있다고 주장했다. 김성수는 이승만과 김구 양 총재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면서 한독당의 ‘아량’을 구했으나 협상은 진척되지 않았다.15)
 
  합당협상은 4월 7일에 이르러 마무리되었다. 한독당의 조완구, 조경한, 조소앙, 국민당의 엄우룡(嚴雨龍), 백홍균(白泓均), 김굉진(金宏鎭), 한민당의 김성수, 김병로(金炳魯), 김약수(金若水), 신한민족당의 김려식, 권태석, 최익환 등은 경교장에 모여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마라톤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1)당명은 한국독립당으로 하고, (2)강령은 한독당의 삼균주의(三均主義)와 국민당의 만민공화(萬民共和), 대중공생(大衆共生)의 이념을 구현하여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평권사회(平權社會) 건설을 표방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다만 토지정책은 국민당의 토지정책대로 국유를 원칙으로 하되 농민의 세습적 소유는 허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3)중앙위원과 부서를 늘리기로 했다.16)
 
  4월 9일 오후에 김구는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하고 우파정당들의 합당문제를 논의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이승만이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장 자리를 맡아 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오늘의 정정으로 보아 정당에 구애되지 않는 거족적, 초당적인 국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김구에게도 오히려 한독당을 탈당하라고 종용했다. 그리하여 김구도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을 사임할 뜻을 표명했다고 한다.17)
 
 
  韓國民主黨은 合黨을 拒否해
 
  이승만과 김구가 회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시간에 열린 한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정부총재로 추대하려던 두 사람이 앞으로 정당과는 일체 관계를 끊을 것으로 보이는 것, 4당합당으로는 우익 진영이 단일하다고 볼 수 없는 것 등을 이유로 백지로 돌아가서 강력한 단일당 실현을 도모하기로 결의하고, 교섭위원으로 김성수, 김병로, 김약수, 백남훈(白南薰)을 다시 선임했다.18)
 
  한민당이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우파정당의 합당 작업은 한독당, 국민당, 신한민족당 3당을 중심으로 추진되었으나, 신한민족당이 합당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어 당론을 결정하지 못함으로써 지지부진했다. 그러다가 4월 18일에 이르러서야 신한민족당은 합당파만 합류한 채 급진자유당, 대한독립협회, 자유동지회, 애국동지회의 4개 군소정파를 흡수하여 합동성명서와 진용을 발표했다.
 
  한독당은 이어 김구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조소앙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상무위원 12명을 선정했는데, 중앙집행위원은 합당 전의 한독당 인사 6명과 국민당의 안재홍 등 다른 정당 인사 6명으로 구성되었다.19)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새로 선출된 김구는 4월 20일에 당원들에게 보내는 격려문을 발표했다.20)
 
  통합 한국독립당이 미군정청에 등록한 당원수는 52만 3,000명으로서 한국민주당의 4배나 되었다. 이 숫자는 물론 과장된 것이었으나, 한독당의 당원수가 급격히 팽창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의 실질적인 조직력과 영향력은 미군정부와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는 한민당보다 취약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시작되는 제1차 미소공위 정국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연합이 주도했다.21)
 
 
  2. 第1次 美蘇共同委員會波動 속에서
 
  1946년 봄은 좌우익 정파의 격심한 대립 속에서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로 출렁였다. 모스크바협정 제4항에 따라 양군 점령지역간의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열린 양군사령부 대표회의는 1월 16일부터 2월 5일까지 15회의 공식회의를 열었으나, 양쪽의 큰 입장차로 말미암아 이렇다 할 성과없이 끝났다. 회의가 끝나기 하루 전인 2월 4일의 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미국과 소련의 각 5명의 대표로 구성하고, 그 소재지는 서울로 하며, 앞으로 한달 이내에 활동을 개시한다고 합의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22)
 
 
  左右 극단주의자 아닌 인사들로 협의대표기구 구성하라고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미국정부의 기본방침은 3부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on Committee : SWNCC)가 1월 28일에 작성한 〈한국에 대한 정치정책(SWNCC 176/18)〉에 표명되어 있다. 이 문서는 2월 11일에 맥아더에게 시달되었다. 이 문서의 지침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공동위원회가 임시한국정부 수립을 위한 제안을 준비하면서 협의할 한국의 대표적인 민주적 지도자 그룹을 선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지도자들의 선정은 전 한국의 모든 민주적 정당 및 사회단체와 충분히 협의하여 실시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선거방법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좌우익의 극단주의자가 아닌 강력하고 유능한 지도자들이 확실한 다수가 되도록 각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23) 이처럼 임시한국정부의 수립 절차에서 협의 대표기구의 매개를 상정했다는 것은 모스크바 외상회의 결정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소공위에 대처할 방안으로 서둘러 이승만과 김구 등의 우익 민족주의 그룹을 중심으로 한 민주의원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던 하지(John R. Hodge)로서는 이러한 훈령을 실행하기는 시기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美 국무부는 李承晩, 金九를 배제토록 訓令
 
  미 국무부는 민주의원이 개원된 직후인 2월 28일에 노골적으로 이승만과 김구 그룹을 배제할 것을 촉구하는 훈령을 맥아더에게 보냈다.
 
  “현재로서는 어려운 것이 사실일 것이나, 김구 그룹과도 관련이 없고 소련의 조종을 받는 그룹과도 관련이 없으면서 한국을 위한 확실한 진보적 강령을 추진할 지도자들을 우리 지역에서 찾아내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들 그룹이 대다수의 한국인들을 설득할 수 있는 4대 자유와 기본적인 토지 및 재정의 개혁을 주창하는 상세한 진보적 강령을 작성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진보적 강령은 지금은 민중이 자신들에게 가장 좋은 희망을 제시한다고 믿는 공산주의 강령을 능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 훈령은 김구와 이승만 그룹에 대해서는 어떠한 호의도 보여서는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들의 망명자로서의 배경, 곧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분명히 지지를 받고 있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이승만과의 여러 해에 걸친 교섭에 따른 국무부의 만족스럽지 못한 경험 때문에, 우리는 김구와 이승만 그룹에 대하여 어떠한 호의도 보여서는 안된다. 만일에 그러한 진보적인 지도자 그룹을 찾아내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 확실하다면, 김구 그룹으로 하여금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진보적 강령을 채택하여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강력한 노력이 필요할지 모른다. 만일에 김구 그룹이 그러한 강령을 채택하지 않겠다면 그들은 더 이상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24)
 
  이러한 훈령은 분명히 이때의 국무부의 중요 정책 결정자들이 소련과의 협조에 집착한 나머지 이승만과 김구 그룹을 미국 정책에 방해되는 극우파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에 대해 하지는 이들이 “나이 들고 오만하고 편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편협은 원칙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것이며, 그들은 남한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반대편에 서게 해서는 안된다”고 반박했다.25)
 
  〈한국에 대한 정치정책〉은 문제의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인들이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능력여하에 따라 실시할 수도 있고 않을 수도 있다고 융통성을 보였다.
 
 
  蘇聯은 呂運亨을 首相으로 內定
 
  미국정부가 임시한국정부 수립의 절차와 방법의 논의에 중점을 둔 것에 비하여 소련정부는 모스크바협정은 한국문제 처리의 최종 결정이며 미소공위의 임무는 모스크바협정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토의를 임시한국정부 수립에 집중하기로 했다. 따라서 미국은 임시한국정부의 각원 선정은 한국인들에게 맡긴다는 입장인데 반하여 소련의 입장에서는 각원들의 선정도 미소공위의 중요한 임무가 아닐 수 없었다.
 
  소련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장[외무장관]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는 미소공위 개회 직전인 3월 16일에 소련대표단에 〈전 한국임시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소미공동위원회 소련군사령부에 보내는 훈령〉제1호를 보내어 내각제의 한국임시정부 수립과 내각 분배 등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을 지시했다. 이 훈령에 따르면 임시한국정부의 내각 구성은 남북에 균등하게 배분하되, 남한 몫의 절반은 좌익이 차지하게 한 것이었다. 소련이 구상한 임시한국정부의 내각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수   상   여운형(呂運亨)(남)
  부수상   박헌영(朴憲永)(남)
  부수상   김규식(金奎植)(남)
  외무상   허   헌(許   憲)(남)
  내무상    최용건(崔庸健)(북)
  국방상   김일성(金日成)(북)
  공업상    김무정(金武亭)(북)
  교육상   김두봉(金枓捧)(북)
  선전상   오기섭(吳淇燮)(북)
  노동상   홍남표(洪南杓)(남)
  계획경제위원장   최창익(崔昌益)(북)
  농림상   미국 추천
  재정상   미국 추천
  교통상   미국 추천
  체신상   미국 추천
  보건상   미국 추천
  상업상   미국 추천
 
  소련은 수상을 비롯한 각료 17명 가운데 북한 6명, 남한 11명을 배정했으나 미국이 추천하도록 한 각료 자리는 6개뿐이었다. 소련이 추천한 11명은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金奎植)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좌익 인사들이었고, 수상, 부수상, 외무상, 내무상, 국방상 등 권력의 핵심 자리는 모두 좌익 인사들에게 배정되었다.26)
 
  소련정부는 임시한국정부의 수립과 함께 신탁통치의 실시도 명확히 했다. 그러나 신탁통치로부터 완전 독립에 이르는 과정은 명시하지 않았다.27)
 
  한편 이승만은 3월 11일의 정례 기자회견에서 미소공위를 위하여 민주의원이 어떤 준비작업을 하고 있는 듯이 비쳤다. 이날의 기자회견은 이승만의 신병을 이유로 서면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먼저 미소공위의 전망에 대해 “나는 낙관도 비관도 아니하나 현재의 형편으로 보면 잘되어 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임시한국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민주의원을 상원으로 하고 따로 하원 격의 기구를 설치한다는 항간의 정보가 있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항간의 말은 믿지 않는 것이 좋다. 민주의원은 상원, 하원이라는 그런 계획이 없고 전민족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하지 장군의 고문 겸 우리 전민족이 원하는 것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미소공위가 물론 우리에게 의논이 있을 것이며, 그 의논에 대하여는 다소간 준비가 되어있다.”
 
 
  미국인에게 雲山광산 넘겨주기로 했다고
 
  이날 기자단의 질문지에는 매우 당돌한 문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선동포들이 발행하는 《독립》지가 1946년 1월 23일자 지상에 보도한 바에 의하면, 이 박사가 재미시에 중경(重慶)에 있는 김구 주석에게 요구하여 미국인 돌베어(Samuel H. Dolbear) 씨를 조선의 광업고문으로 임명케 하여 조선의 광업권에 대한 광범한 권리를 돌베어 씨에게 양여한다는 약속을 하였으며 그 대가로 돌베어 씨는 박사에게 미화로 100만달러의 자금을 공급키로 약정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더욱 1944년 8월 15일에 로스앤젤레스에 전하여진 중경 통신에 의하여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일방적으로 폐기한다는 것을 발표한 중국과 임시정부와의 9개조 밀약이 있었다 하여, 그 내용으로서 조선이 독립된 뒤에 그 외교정책의 지배권을 중국에 부여한다는 약속과 그 대가로 조선이 열강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 중국은 임시정부에 매월 중국화로 3백만원을 지불하기로 협정이 되어 있었다고 보도했는데, 그 진상 여하?”
 
  이 질문에 대하여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김구씨나 나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가 나라를 팔아먹을까 의심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의심할 것이다. 100만달러를 받거나 주거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만사를 허락하겠다. 증거 없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장차 국법이 있어서 이런 것은 징치할 것이다.”28)
 
  《독립》지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에서 발행하는 신문으로서 이 무렵에는 박헌영의 이승만 비판문을 전재하고 하지 사령관의 소환을 촉구하는 등 격렬한 좌익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이 기사의 필자는 이승만의 대표적인 정적으로서 이승만의 활동을 쫓아다니면서 방해했던 한길수(韓吉洙)였다.
 
  돌베어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광산업에 종사했고, 1939년 가을까지 동양 최대의 금광인 평북의 운산광산(雲山鑛山)을 경영하는 동양광업개발회사의 대리인으로 일한 인물이었다.29) 세계대전의 종결이 확실시되던 1945년 3월 5일에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장 자격으로 돌베어를 연봉 1달러의 명목상의 보수로 임시정부의 광산고문으로 임명했다.30) 돌베어는 3월 16일에 미 국무부 차관 그루(Joseph C. Grew)에게 외국정부 에이전트 등록을 신청했고,31) 미 국무부 극동국장 발렌타인(Joseph W. Ballantine)은 3월 28일에 외국정부 에이전트 등록은 국무부가 아니라 법무부의 관할이라고 회신했다.32)
 
  귀국한 뒤에 이승만은 하지 장군에게 돌베어를 미군정부의 고문으로 추천했고 하지도 동의했으나, 돌베어는 1946년 2월초까지 입국허가신청을 하지 않고 있었다.33)
 
  독립 이후의 국가건설에 외국의 자본과 기술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던 이승만으로서 돌베어와 같은 금광전문가는 꼭 필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돌베어로부터 100만달러의 자금지원을 받기로 약속했다는 말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신빙성도 없다.
 
  한길수의 기사는 《독립》지의 영문면에 실린 것인데, 3월 11일의 이승만의 기자회견 때까지도 국내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승만의 반대파인 김원용(金元龍), 안창호(安昌鎬), 정두옥(鄭斗玉) 등 재미한족위원회 하와이연합위원회 대표단이 귀국하면서 그 기사가 난 《독립》지를 가지고 와서 알려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1월 29일에 선편으로 하와이를 출발하여34) 2월 11일에 인천항에 도착했다.35)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가 독립한 뒤의 외교권을 국민당정부에 인도한다는 9개조의 비밀협약을 맺었다는 이야기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九個準繩)〉 내용을 왜곡해서 보도한 것이었다.
 
李承晩의 광산채굴권 양여설을 보도한 《朝鮮人民報》 지면.
 
  《프라우다》와 《뉴욕타임스》가 잇달아 報道
 
  3월 12일자 도하신문들은 모두 이승만의 서면 질의응답을 그대로 보도했다. 논평도 없었고 속보도 없었다. 다만《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만이 한길수의 기사가 난 《독립》지 영문면의 제호부분까지 배경으로 깔고 거의 전면에 걸쳐서 보도했다.36) 배경으로 깐 영문면 기사들은 원래의 지면을 교묘하게 변조한 것이었다. 특이하게도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침묵을 지켰다.
 
  이 뉴스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 즉각 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Pravda)》의 3월 13일자에 스몰렌스키(V. Smolensky)의 기명기사로 게재되었다. 스몰렌스키란 소련 외무인민위원회 제2극동부의 한국담당 3등서기관 페투호프(V. I. Petuhov)의 필명이었다.37) 스몰렌스키는 미국의 기업인들과 정상배들이 한국 정권과 광산개발권을 손에 쥐려는 이승만에게 100만달러의 자금을 주었다고 《독립》지의 보도를 부정확하게 인용하여 주장했다. 스몰렌스키의 기사는 모스크바발 AP통신을 통하여 3월 14일자《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도 소개되었다.38) 또한 이 《프라우다》지 기사는 앞서 본 《팟쇼·반민주분자의 정체》라는 북한 팸플릿에도 전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39) 북한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매도하는 자료로서 널리 소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은 3월 14일에 돈암장으로 찾아온 AP통신 특파원에게 《프라우다》지의 기사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우리는 한국의 독립획득 투쟁을 동정하지 않는 어떤 나라와도 우호적 관계를 보유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40)
 
  이승만은 미소공위가 이틀 앞으로 박두한 3월 18일에 건강악화를 이유로 민주의원에 의장직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민주의원은 그의 사직서는 수리하지 않고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휴직하게 하고, 이승만이 휴직하는 동안은 부의장 김규식이 의장직을 대행하기로 했다.41) 이승만은 3주일 뒤인 4월 11일에 감기가 완쾌되었다면서 복직을 성명했다.42)
 
 
  “韓國이 蘇聯에 대한 공격기지가 되지 않아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3월 20일 오후 2시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막되었다. 5명씩의 양국 대표단과 전문기술요원 및 고문이 참가했다. 대표단장은 양군사령부 대표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아널드 소장, 소련은 슈티코프 중장이었다. 모스크바협정의 제2항과 제3항을 실행하는 것이 회의의 주된 과제였다.
 
  그러나 회의가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조짐은 슈티코프의 개막연설에서 바로 나타났다. 슈티코프는 미소공위의 임무는 “한국인민들이 한국의 민주화와 재건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 임시 한국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일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장래의 임시 한국 민주정부는 모스크바 외무장관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모든 민주적 정당 및 사회단체의 광범한 통일의 기초 위에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티코프는 이어 한반도에 대한 소련정부의 입장을 직설적으로 표명했다.
 
  “소련은 한국이 앞으로 소련을 공격하는 기지가 되지 않도록 참으로 민주적이고 독립된 국가가 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43)
 
  아널드는 슈티코프의 개막연설이 마치 폐막연설처럼 들렸다고 했고, 하지도 이 연설이 한국의 소비에트화와 식민지화를 추구하는 소련의 야심을 잘 나타내었다면서 주한미군사령부의 모든 참모들에게 그것을 숙독할 것을 지시했다.44)
 
  순탄하게 진행되는 듯하던 미소공위는 임시 한국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어떤 정당 및 사회단체를 협의 대상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벽에 부딪혔다. 소련대표단은 모스크바협정에 찬성하는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만을 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하여 미국대표단의 입장은 모든 한국인에게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며 따라서 비록 모스크바협정에 반대를 표명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라 하더라도 협의 자격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45)
 
  4월 5일에 이르러 소련대표단은 지금까지 모스크바협정을 반대해 온 정당과 사회단체라도 앞으로 모스크바협정을 지지하면 협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절충안을 제안했다. 그것은 미소공위에 소극적이었던 하지 사령관과 미국대표단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었다.46)
 
 
  하지가 李承晩에게 地方여행 요청해
 
  하지 사령관은 4월 8일에 맥아더를 만나러 도쿄를 방문했다. 군정장관 러치(Archer L. Learch)는 하지의 도쿄 방문이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으로서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소련대표단의 새로운 제안에 대한 대응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는 급히 도쿄로 떠나기에 앞서 장시간 이승만과 면담했다.47)
 
  하지는 4월 12일에 돌아왔는데, 그가 돌아온 이튿날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은 이승만이 4월 15일부터 3주일 예정으로 남한 지방을 순회한다고 발표했다.48) 하지가 이승만에게 지방여행을 요청한 것은 좌익세력에 눌려 있던 지방의 우익세력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계기로 활기를 띠게 되자 이들 우익세력의 지지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의 정치고문 랭던(William R. Langdon)이 이승만의 지방순회에 대하여 “이승만 박사는 전 도(道)에서 좌익이 강한 영향력 아래 있는 지역에 자기의 추종세력을 강화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행을 한다고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것도 그러한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49) 한편 이승만의 비서 윤석오(尹錫五)는 하지가 이승만에게 지방여행을 요청한 것은 미소공위에 참가한 소련대표들에게 이승만의 대중적인 인기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보다 앞서 이승만은 소련대표단장 슈티코프에게 이기붕(李起鵬) 비서를 보내어 면담을 요청했는데, 슈티코프는 2, 3일 뒤에 회답하겠다고 한 다음 뒤에 정중히 거절하는 전갈을 해 왔다고 한다.50) 이승만은 이때까지 암살의 염려와 또 서울이 정치의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서울을 떠나기를 꺼려 왔다.51)
 
 
  3. 地方巡廻로 지지기반 강화
 
  이승만의 순회강연회는 독촉국민회 지방조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4월 15일 현재의 독촉국민회 지방조직 현황은 38도선 이남의 144개군 가운데 114개군에 지부가 조직되어 있었고, 회원수는 106만 8,479명에 이르고 있었다고 한다.52)
 
  이승만의 지방순회에는 프란체스카도 동행했다. 첫 방문지는 천안(天安)이었다. 4월 16일 오후에 온양(溫陽)온천에서 일박한 이승만은 이튿날 오전에 천안제일국민학교 교정에 모인 3만여명의 군중 앞에서 50분쯤 감격적인 연설을 했다.53) 18일 오전 11시에 대전(大田) 독촉국민회 주최로 본정(本町) 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4만여명의 군중이 모였고, 저녁에는 대덕(大德) 군수 주최로 유성(儒城) 온천호텔에서 간담회가 열렸다.54)
 
 
  굿펠로가 급히 儒城溫泉으로 찾아와
 
  이승만이 대전을 방문하기 직전인 4월 16일과 19일에 이승만 암살을 노린 일당 7명이 대전에서 체포되었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범인들은 일제 수류탄과 권총 등을 가지고 있었다.55) 이때부터 경찰은 이승만의 경호를 강화했다.
 
  21일 아침에 갑자기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 대령이 프란체스카의 비서 프라이 부인(Mrs. Frye)과 함께 비행기편으로 대전에 와서 이승만을 유성온천에서 2시간 동안 만나고 부산(釜山)으로 갔다. 미소공위 제5호성명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56) 교착상태에 빠졌던 미소공위는 4월 18일에 제5호성명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미소공위의 협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는 목적과 방법에서 민주적이어야 하고 모스크바협정의 목적을 지지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협력한다고 서약하는 선언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천명한 것이었다.57) 신탁통치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막연히 인식하고 있던 민주의원으로서는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다. 하지는 22일에 만일 한국인들이 확실히 ‘원조’의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든가 혹은 일정한 기간만 4국의 원조를 받겠다고 하고 여기에 4국이 찬동만 하면 원조를 전혀 안 받을 수도 있다면서 민주의원 참가 정당 및 사회단체들의 선언서 서명을 촉구했다.58) 그러나 이 하지의 성명에 대해서도 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는 연일 합동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회의를 열었으나 결론은 얻지 못하고 이승만의 귀경만 기다렸다.
 
  21일 오후에 이승만의 승용차가 유성온천을 출발하여 경북 김천(金泉)으로 이동할 때에는 연도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열렬히 환영했다. 충북 옥천(沃川)에 도착한 이승만은 옥천국민학교에서 30분 가량 환영 나온 주민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이승만은 영동(永同)과 추풍령(秋風嶺)의 직지사(直持寺)를 거쳐 오후 5시께 김천에 도착했다.59)
 
 
  地方紙 기자회견 통해 5호 聲明 대응책 제시해
 
  22일 오전 11시에 독촉국민회 주최로 김천 동부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강연회에는 남녀 학생들과 각 단체 등 군민 4만여명이 모여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승만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미소공위 진행상황 등 정국 정세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60)
 
  23일 오전 10시에 김천을 출발한 이승만은 오후 1시쯤 대구 신동 가도에 들어섰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는 시민들에게 이승만은 모자를 흔들어 화답했다. 숙소인 경북 내무부장 관사에 도착한 이승만은 도지사를 비롯한 지방유지와 미국인 지사 등 미군장교들을 접견하고, 해방 기념 식수를 했다.
 
  그리고 오후 4시에는 지방지 기자단과 회견했다. 미소공위 제5호성명에 대한 질문을 받은 이승만은 “첫째 반탁과 찬탁을 막론하고 회의에 참가해야 하고, 둘째 미소공위의 남북을 통일한 각 정당과의 협의가 일치되어야 하며, 끝으로 신탁통치 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후에 해결한다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했으니만큼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보며, 어쨌든 우리가 회의에 참가해야만 제반문제를 상의하고 토의하야 의견을 진언하게 될 것이 아닌가” 하고 명쾌하게 답변했다.61) 그것은 미소공위 참가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서울의 우익 민족주의 인사들에게 행동지침을 제시한 것이었다.
 
 
  佛國寺에서는 漢詩도 지어
 
  이튿날 독촉국민회 경북지부 주최로 경북도민 환영대회가 대명동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장에는 10만여명의 군중이 운집했으나 대회도중에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이승만의 연설은 중지되고, 대신에 이날 저녁 7시반부터 대구방송국에서 30분가량 방송연설을 했다. 25일 오전 10시에 이승만은 시민들의 성대한 환송을 받으며 경주(慶州)로 향했다.62) 영천(永川)을 지나 오후 2시에 경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승만을 마중하러 나온 사람들로 옛 도읍 경주거리가 메워졌다. 이승만은 불국사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26일 오전 11시부터 경주중학교에서 열린 경주, 영천, 영일(迎日), 울산(蔚山) 4개군 연합환영회에는 5만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승만은 1시간반에 걸친 정열적인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았다.63) 이승만은 불국사에서 이틀밤을 묵으면서 아름다운 한시 한 수를 지었다.
 
  宿泊佛國寺64)
 
  小少旣聞佛國名
  登臨此日不勝情.
  群山不語前朝事
  流水猶傳故國聲.
 
  半月城中春草合
  瞻星臺下野花明.
  只今四海風塵定
  古壘松陰臥戍兵.
 
  불국사에서 묵다
 
  젊어서 들은 이름 불국사
  오늘에야 올라 감개를 가누지 못해.
  산들은 지난 때 일 말이 없고
  흐르는 물만 옛 왕국 소리 전한다.
 
  반월성 안에는 봄풀이 어우러지고
  첨성대 밑에는 들꽃이 밝다.
  지금은 사해 풍진 다 평정되고
  옛 보루 솔 그늘에 수병(戍兵)은 잠들었다.
 
  27일 오전 9시40분에 불국사를 출발한 이승만은 11시에 울산읍에 도착했다. 울산에서는 울산제일국민학교 교정에 1만여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이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산을 떠나 오후 4시쯤에 동래(東萊)를 통과할 때에는 남녀 학생들과 많은 주민들이 연도에 늘어서서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때에 동래 입구에서 이승만의 암살을 기도한 흉한 1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65) 이승만은 해운대에 도착하여 송도각(松濤閣)호텔에 들었다.
 
  해운대에는 서울에서 민주의원의 백남훈 의원과 윤치영 비서실장이 급히 내려와 있었다. 미소공위 제5호성명과 관련하여 민주의원의 태도를 결정하기 위하여 이승만의 귀경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귀경하지 않고 순회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 대신에 민주의원에는 미소공위 제5호성명에 따른 선서문에 서명하고 미소공위에 참가하라는 ‘친서’를 써서 백남훈에게 주었다. 이승만은 친서에서 신탁통치 문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주의원이 서명하는 것은 신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신탁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토의에 협동한다는 뜻을 표함이니, 그 토의에 참여치 않으면 그 문제가 원만히 타결되기 어려울 것이며 설령 우리가 참가하고도 잘 타협이 못되면 그때에는 우리가 다른 보조를 취하기에 늦지 않을 것이다.”66)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남훈이 가지고 간 ‘이박사 친서’는 신문에도 공개되어 전문이 보도되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서울을 떠나 있으면서도 우익 진영의 최종 정책결정자였다.
 
  같은 날 하지는 선언서에 서명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에는 신탁통치의 찬성 또는 반대의 의견을 발표하는 특전을 보장하되, 선언서에 서명하지 않는 사람은 미소공위의 협의대상에서 제외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여 ‘이박사 친서’를 뒷받침했다.
 
 
  “나를 國父라고 불러주니 …”
 
  부산 방문의 성과는 컸다. 환영연설회는 29일 정오에 구덕산 아래의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되었는데, 운동장 개설 이래 최대 인파인 20만여명이 운집했다. 환영회 회장 김철수(金喆壽)의 개회사, 경남도지사 김병규(金秉圭)의 환영사, 부산기독교연합회 합창단의 ‘환영합창’ 등으로 이어지는 대규모의 환영회 행사를 보면서 이승만은 감개무량했다. 주최쪽은 이승만을 ‘국부(國父)’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소개했다. 1911년에 밀행하다시피 하며 기독교 관계자들을 만나고 간 지 30여년 만의 부산 방문이었다.
 
  마이크 앞에 선 이승만은 먼저 “나를 위해서 성대한 환영과 더불어 국부라는 가슴에 넘치는 경어를 주어 눈물이 흐를 듯하다”고 말하고, “지금에 하신 환영사와 환영합창 중에 특히 동감되는 것은 한덩어리로 뭉쳐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찾자라는 구절이었고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그 요지도 이것이다”라면서 단결을 역설했다.
 
  이승만이 순회강연에서 역점을 두고 강조한 것은 공산당 비판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산강연이었다. 이승만은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그룹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나는 공산주의와 극렬파들이 나와 정치의견이 다르다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공산당과 극렬파가 하고 있는 것은 인민의 복리를 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지연시키고 자주독립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으로 보아서 공산당과 과격파들이 하고 있는 것을 들어 말하자면, 그네들은 자본가 타도를 일삼아 부르짖고 있으나 자본과 노동과 토지가 발을 맞춰 가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상업도 공업도 발전할 수 없고 민생도 발전할 수 없다.”
 
 
  “土地의 無償沒收·無償分配는 반대”
 
  그러면서 이승만은 공산당 그룹이 노동자들에게 동맹파업을 하도록 선동하는 것은 “하루 일 안하면 살아 나가지 못하는 근로대중을 못살게 하는 것이고 국가에 큰 역할을 하는 산업을 파괴시키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국민적인 쟁점이 되어 있는 토지개혁 문제에 대해서도 중론과는 다른 자신의 소신을 분명히 밝혔다.
 
  “일인토지고 조선인토지고 이것을 농민들에게 무상분배한다고 하나 이것은 … 국민의 재산소유권을 무시함이니, 장차 우리가 민주정부를 수립할 때에 국법을 제정하야 국민의 생활을 옹호함이 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또 전날 밤에 있었던 굿펠로와의 통화에 근거하여 미소공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피력했다.
 
  “가까운 장래에 수립될 임시정부의 진용은 아직 확실치는 않으나 북조선 5, 남조선 8 또는 북조선 3, 남조선 5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여하간 인구로 보아서 북조선보다 남조선이 많으니 임시정부의 진용도 남조선이 많을 듯하다.”67)
 
  늦은 오찬장에서도 이승만은 미군정부와의 협조관계를 과시하는 듯한 발언으로 참석자들로 하여금 그의 권위를 실감하게 했다. 부산에 와서 서울에 있는 하지 장군의 고문 굿펠로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미국대통령의 특사인 모씨가 곧 한국을 방문할 것이고 그는 38도선 이북에도 갈 예정이므로 임시정부 수립의 진전도 상상 이외로 급진적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더라고 말하여 좌중을 놀라게 한 것이다. 이승만이 말한 트루먼 대통령 특사는 대일배상조사단장으로 일본을 방문중인 폴리(Edwin W. Pauley)였다. 폴리는 5월 16일에 한국에 왔고, 이어 북한도 방문했다. 이승만은 오후 4시에 도청에서 기념식수를 하고, 숙소인 동래 온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68)
 
 
  晋州는 9개 군민이 몰려 초만원
 
  이승만은 4월 30일에 동래중학교 교정에 모인 1만여명의 청중에게 강연을 한 다음 마산(馬山)으로 떠났다. 대전에 이어 4월 27일에는 동래 입구에서도 암살범 1명이 체포되었기 때문에 경찰은 이승만의 경호를 더욱 강화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이 마산에 도착한 날 저녁에는 경찰 1,000명이 외부에서 투입되었다고 한다.69)
 
  이승만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산시민들은 물론 멀리 남해(南海)와 거제도(巨濟島)에서도 범선을 타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5월 1일 오전 11시에 마산중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4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이승만을 환영했다. 마산부윤 옥기환(玉麒煥)의 개회사, 미군정장관 매리크 프라이디의 축사가 있었고, 미해병대 800여명이 군악행진을 하여 이채를 띠웠다. 이승만은 연설회를 마친 뒤 오후 3시반에는 배편으로 진해(鎭海)를 시찰했다.70)
 
  5월 2일 오전에 마산을 떠난 이승만은 오후 2시20분께 함안(咸安)에 도착했다. 함안의 가야국민학교 교정에는 읍민은 물론 의령(宜寧) 등 먼 곳에서도 흰 옷을 입은 촌로들이며 색색 옷가지의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2만여명이 모여들어 조그마한 함안 촌읍은 무슨 큰 잔치나 벌어진 듯했다.
 
  함안을 출발하여 진주(晋州)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고성(固城), 통영(統營), 하동(河東), 산청(山淸) 등 9개 군민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진주 시민들은 집집마다 친척 손님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다.71)
 
  5월 4일 오전 10시에 진주를 출발하여 전라도로 향하던 이승만은 섬진강을 건너기 전에 하동에서 차를 내려 하동국민학교에 준비되어 있는 환영회에 들러 참석자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순천(順天)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반이었다.72)
 
  이튿날 오전 11시에 순천남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환영연설회에는 3만여명의 청중이 모였다. 1925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기자로 하와이의 태평양회의에 참석했다가 미국에 눌러앉아 이승만의 동지회 일을 도왔던 김양수(金良洙)가 순천군수였고, 1944년에 주미외교위원부 활동에 참가했던 배민수(裵敏洙)는 미군과 같이 귀국하여 순천에서 목사로 사역하고 있었다. 감격적으로 두 사람을 만난 이승만은 이들을 청중에게 소개했다. 오후에 중앙교회에서 열린 이승만환영예배에는 800여명의 신도들이 참가했다. 이승만은 그 자리에서 “3천리강토의 광복을 위하여 생사의 지경이 수십 번이나 있었으나 하나님이 여러분과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까지 이와 같이 건강을 보호하고 우리 동포에게 좋은 독립할 기회를 허락하신 줄 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잃지 말고 자주독립을 힘쓰고 자유신앙에 노력하자”고 말하고, “공산분자는 독재적 정치로 교회를 일정시대보다 더 구속한다”고 비판했다.73)
 
  6일 오전 8시에 순천을 출발한 이승만은 벌교(筏橋), 보성(寶城), 장흥(長興), 영암(靈巖), 영산포(榮山浦)를 거쳐 목포(木浦)로 이동했다. 벌교를 지날 때에는 그곳 부인회에서 이승만 일행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섭섭하다고 하여 꿀물을 풀어 가지고 대접했다. 보성에서는 1만여명이 모여 이승만 환영대회를 열었고, 이승만은 그곳에서 기념식수도 했다. 오전 11시20분께에 보성을 출발하여 장흥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쯤이었다. 장흥에서는 장흥국민학교 교정에서 환영회가 열렸다. 목포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40분.74) 8일 오전에 산수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목포환영강연회에는 3만여명의 청중이 모였다.
 
美蘇共委에 제출한 李承晩과 金九의 宣言書.
 
  美蘇共委休會로 歸京 서둘러
 
  이승만은 귀경을 서둘렀다. 교착상태에 있던 미소공위가 이날 무기연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5월 8일 오후 2시에 목포를 출발하여 광주(光州)로 향했다. 도중에 나주(羅州)에 들러 독촉국민회 주최의 환영대회에 참석했다. 환영대회에는 1만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광주에서는 9일 오전 11시에 서정(西町)국민학교 교정에서 5만여명의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두 시간에 걸쳐서 환영연설회가 열렸다. 연설회에 이어 오후 2시반에 전남도청 응접실에서 광주지역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을 접견하고,75) 오후 4시에는 기자들을 만났다.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된 것과 관련하여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소련을 비판했다.
 
  “소련인들이 세상의 공론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자기네들의 장래 이해가 어찌될 것을 각오하고 미국대표와 협동해서 순리적으로 … 해결할 줄 알았더니, 그 사람들이 그것을 양해 못하고 또 미국대표들이 좋은 기회를 준 것을 이용하지 못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38도선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단호하게 소련을 비난했다.
 
  “38도선 문제도 소련 사람들이 자의로 우리 민의와 세계 공론을 따라 해결치 못하면 결국은 소련에 대해서도 이롭지 못할 것이니, 우리의 관계로만 아니라 소련관계로 보아도 큰 불행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미 우리는 전 국민의 결심으로 공산당의 제안을 접수치 않기로 하였고, 우리 강토를 단 얼마라도 남에게 양여치 않기로 결심한 만큼 이것을 소련 사람들이 하루바삐 각성하기를 바란다.”76)
 
  이승만은 5월 10일 오후 1시에 비행기편으로 귀경하여 오후 4시부터 2시간 동안 하지와 요담하고, 이어 용산 성모병원에 입원중인 김구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9시부터 11시까지 돈암장에서 굿펠로와 요담했다.77)
 
 
  緣故地 찾아 ‘센티멘털 저니’
 
  우파 민족주의 정당들을 통합하여 한독당을 확충하는 작업을 마친 김구도 4월 14일부터 지방나들이를 했다. 이승만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김구의 여행은 주로 자신과 인연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회상의 ‘센티멘털 저니(감성여행)’였다. 맨 먼저 방문한 곳은 인천(仁川)이었다. 4월 14일 오전에 인천으로 향하면서 영등포에 있는 조선피혁공장을 둘러보고 직공들과 이야기도 나누었다. 김구 자신이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표현했듯이, 김구가 20대 초반에 치하포사건으로 1년10개월 동안, 30대 중반에 안악(安岳) 사건으로 4년반 넘어 혹독한 옥살이를 한 곳이 바로 인천감옥이었다. 인천을 방문한 소감을 김구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구속된 몸으로 징역 공사한 곳이 축항공사장이었다. 그 항구를 바라보니 내 피땀이 젖어 있는 듯하고, 면회차 부모님이 내왕하시던 길에는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 49년전 옛날 기억도 새로워 감개무량하였다.”78)
 
  김구는 내리(內里) 예배당에서 간담회를 한 다음 인천 유지 100여명이 동양헌(東洋軒)에서 베푼 연회에 참석하여 산업건설의 시급함을 강조하고, 옥살이하던 옛날 이야기도 했다. 인천 방문의 공식 목적은 공장시찰이었다. 인천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공장을 시찰하고 귀경했다.79)
 
  4월 21일은 부활절이었다. 명동 천주교회당의 부활절 미사에 참석한 김구는 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양주군(楊州郡)의 농촌을 둘러보고 밤 늦게 귀경했다.80)
 
  이튿날 김구는 인천감옥을 탈옥하고 한동안 승려 생활을 했던 충남의 마곡사(麻谷寺)를 가 보기 위하여 공주(公州)로 갔다. 공주에 도착하자 충남경찰부장과 경찰서장이 마중나와 공주군민환영회장으로 안내했다. 환영회장에는 가까운 충남과 충북 일원에서 모여든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李박사에게 투표하자”
 
1946년 4월 22일에 麻谷寺를 찾은 金九.
  이날의 김구의 연설 가운데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공개적으로 이승만 지지를 역설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우리의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내 의견으로는 이승만 박사가 우리의 가장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만일 선거가 실시되면 모든 사람이 이박사에게 투표해 주기 바란다.”
 
  그러면서 김구는 또 이승만이 금광 개발권을 외국인에게 팔았다는 비난을 반박했다.81)
 
  환영회를 마치고 마곡사로 가는 도중에 김구는 한말의 의병장 김복한(金福漢)의 집에 들러서 김복한의 영정에 절하고 준비된 점심을 들었다.
 
  마곡사 승려 수십명이 공주까지 마중나와 있었다. 마곡사로 가는 길에는 각 군의 한독당과 독촉국민회 관계자 350여명이 뒤따랐다. 김구는 불경을 배우던 염화실(拈花室)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마곡사에서는 밤에 김구를 위해 큰 재를 올렸다. 이튿날 아침에 김구는 향나무와 무궁화 한 그루씩을 기념으로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청양(靑陽)쪽으로 나온 김구는 한말 유학자이자 의병장으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의 사당에 들러 준비해 온 제문을 읽고 참배했다.82)
 
  김구는 그 길로 27일에 열릴 윤봉길(尹奉吉) 의거 14주기 추도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예산(禮山)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급히 귀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소공위 제5호성명과 관련하여 민주의원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기 때문이다. 귀경 도중에 천안에서 차를 내려 읍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지방 인사들을 만나 좌담회를 가졌다.83)
 
  윤봉길 추도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김구는 4월 26일에 안재홍, 조경한, 권태석 세 사람과 함께 다시 서울을 출발했다. 도중에 온양온천에 들러 지방 인사들과 의견을 교환하고,84) 오후 늦게 예산 시량리(枾梁里)의 윤봉길의 집에 도착하여 거기서 잤다. 추도제는 이튿날 개천가에서 열렸다. 천막으로 차양을 치고 제단을 만들어 행사를 치렀다.85)
 
  김구 그룹의 주동으로 4월 29일 오후에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윤봉길 의사 의거기념대회가 열렸다. 그것은 각국 영사를 비롯하여 공산당을 포함한 좌우익 정당 대표들이 모처럼 합석한 이채로운 행사였다. 러치 군정장관도 축사를 보내 왔다. 김구는 식사에서 “14년 전 오늘 11시40분 고 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세계를 진동시켰고 우리 조선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우리는 이 윤의사의 뒤를 따름은 물론이요 자자손손까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86)⊙
 

  1) 《東亞日報》1946년 3월2일자,〈울려진 鍾 휘날르는 太極旗〉;《大東新聞》1946년 3월2일자,〈‘인경’鍾소리는 自由를 象徵〉. 2) 《東亞日報》1946년 3월6일자,〈共産主義者의 猛省을 促求〉.
 
  3) I. M. 치스차코프,〈第25軍의 戰鬪行路〉, 蘇聯科學아카데미東洋學硏究所,《朝鮮의 解放》, 國土統一院, 1988, p. 76 ; 韓國統一促進會 編,《北韓反共鬪爭史》, 1970, pp. 167~173 ; 北韓硏究所 編,《北韓民主統一運動史 平安南道篇》, 北韓硏究所, 1990, pp. 286~294 ; 중앙일보 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中央日報社, 1992, pp. 313~324. 4) N. G. 레베데프,〈遂行해야 할 義務를 自覺하며〉,《朝鮮의 解放》, pp. 130~131. 5) 《로동신문》1992년 4월24일자 1면. 6) 《北韓民主統一運動史 平安南道篇》, pp. 294~303. 7) 北朝鮮 ‘五·一’ 紀念共同準備委員會,《팟쇼·反民主分子의 正體》1946, pp. 24~26. 8) 박진희,〈해방 직후 정치공작대의 조직과 활동〉,《역사와 현실》제21호, 역사비평사, 1996, p. 180. 9) 〈김정의 審問調書〉,《세계와 나》, 世界日報, 1994. 8, pp. 179~191. 10) 崔書勉 證言; 李哲承,《全國學聯》, 中央日報, 1976, pp. 160~163.
 
  11) 《自由新聞》1946년 3월17일자,〈右翼政黨合同?〉. 12) 《自由新聞》1945년 11월2일자,〈完全統一政黨되면 無條件解黨을 不辭〉. 13) 《朝鮮日報》1946년 3월22일자,〈國民黨發展的解消〉. 14) 《東亞日報》1946년 3월29일자,〈食糧救急策, 韓民黨에서 强調〉;《서울신문》1946년 3월29일자,〈新韓民族黨의 合同條件決定〉. 15) 《東亞日報》1946년 3월30일자,〈政黨合同에 又一難〉. 16) 《漢城日報》1946년 4월9일자,〈各黨意見一致〉. 17) 《東亞日報》1946년 4월11일자,〈어떤 政黨이나 團體에도 不參加〉;《朝鮮日報》1946년 4월11일자,〈어떤 政黨에나 不參決意〉. 18) 《朝鮮日報》1946년 4월11일자,〈右翼政黨合同挫折〉;《서울신문》1946년 4월11일자,〈四黨合同遂流産〉. 19) 《東亞日報》1946년 4월23일자,〈祖國은 存亡의 岐路〉 20) 《朝鮮日報》1946년 4월11일자,〈韓獨黨의 中央幹部部署決定〉.
 
  21) 도진순,《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 이승만·김구시대의 정치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p. 83~84. 22) 리차드 로빈슨 지음, 정미옥 역,《미국의 배반》, 과학과 사상, 1988, p. 84. 23) SWNCC, “Political Policy for Korea”,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6, vol. Ⅷ,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1, p. 625. 24) Byrnes to MacArthur, 28 Feb. 1946, FRUS 1946, vol. Ⅷ, pp. 645~646. 25) C. Leonard Hoag,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manuscript), Department of Army, 1970, pp. 407~408. 번역문은 C. L. 호그 지음, 신복룡-김원덕 편역,《한국분단보고서(상)》, 풀빛, 1992, p. 300.
 
  26)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p. 213~214 ; 田鉉秀, 〈蘇聯의 美蘇共委대책과 韓國臨時政府 수립 구상》, 《金容燮敎授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3: 韓國近現代의 民族問題와 新國家建設》, 지식산업사, 1997, p. 571. 27) 田鉉秀, 위의 글, pp. 568~572.
 
  28) 《東亞日報》1946년 3월12일자,〈民主議院도 準備는 돼있다〉;《서울신문》1946년 3월12일자,〈美蘇共同委員會 잘될 可能性 있다〉. 29) 정병준,《우남 이승만연구 ─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역사비평사, 2005, pp. 539~541. 30) 미국무부문서 895.01/3-1645 Rhee to Dolbear(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31) 미국무부문서 895.01/3-1645 Dolbear to Grew, 16 Mar. 1945. 32) 미국무부문서 F. W. 895.01/3-1645 Ballantine to Dolbear, 28 Mar. 1945. 33) Rhee to Hasset, 5 Feb. 1946, Young Ick Lew ed, The Syngman Rhee Correspondence in English 1904~1948, vol. Ⅰ, 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2009, p. 562. 34) 《國民報》1946년 1월30일자,〈하와이연합위원회대표단 고국을 향하야 발정〉. 35) 《國民報》1946년 2월20일자,〈대표단입경〉;《自由新聞》1946년 2월14일자,〈在美韓族聯合會側八氏入京〉. 36) 《朝鮮人民報》1946년 3월12일자,〈李博士, 金九氏의 密約〉. 37) 기광서,〈소련의 대한반도 - 북한정책관련 기구 및 인물 분석〉,《현대북한연구》,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1998, p. 120. 38) The New York Times, Mar. 14, 1946, “Accuses Americans in Korea”. 39) 《팟쇼·反民主分子의 正體》, pp. 27~30.
 
  40) 《서울신문》1946년 3월15일자,〈蘇紙論評과 李博士釋明〉. 41) 《朝鮮日報》1946년 3월21일자,〈李博士 民主議院議長辭任〉. 42) 《朝鮮日報》1946년 4월12일자,〈李博士平癒로 다시 議長執務〉. 43) Hodge to Byrnes, Mar. 22, 1946, FRUS 1946, vol. Ⅷ, p. 653. 44) ⅩⅩⅣ Corps Staff Conference, Mar. 22, 1946, Historical Journal WNRC RG 332. 45) Hodge to Byrnes, [undated], FRUS 1946, vol. Ⅷ, pp. 665~667. 46) 도진순, 앞의 책, pp. 80~81. 47) 《東亞日報》1946년 4월9일자,〈하지中將, 멕아더大將을 訪問〉. 48) 《大東新聞》1946년 4월14일자,〈李博士南鮮地方巡廻〉. 49) Langdon to Byrnes, May 14, 1946, FRUS 1946, vol. Ⅷ, p. 678. 50) 尹錫五 證言, 孫世一,《李承晩과 金九》, 一潮閣, 1970, p. 231.
 
  51) G-2 Weekly Summary no. 32, (1946. 4. 24~26). 52) 《大東新聞》1946년 4월24일자,〈獨立促成國民會의 地方組織體〉. 53) 《大東新聞》1946년 4월19일자,〈李博士天安서 大熱辯〉. 54) 《大東新聞》1946년 4월21일자,〈大田全部歡迎一色〉. 55) 《朝鮮日報》1946년 4월24일자,〈李博士暗殺計劃〉;《東亞日報》1946년 4월24일자,〈李承晩博士를 尾行〉. 56) 《大東新聞》1946년 4월23일자,〈꿋펠로-博士 李博士와 要談〉;《朝鮮日報》1946년 4월23일자,〈꾿펠러-儒城李博士訪問〉. 57) 심지연,《미-소공동위원회연구》, 청계연구소, 1990, p. 196. 58) 《朝鮮日報》1946년 4월24일자,〈四國贊同하면 援助不要〉. 59) 《大東新聞》1946년 4월23일자,〈大田-金泉間沿道同胞, 感激의 歡送〉. 60) 《朝鮮日報》1946년 4월24일자,〈李博士, 四萬金泉郡民에 講演〉;《大東新聞》1946년 4월24일자,〈李博士金泉서 大熱辯〉. 61) 《朝鮮日報》1946년 4월26일자,〈五號聲明에 贊意, 李博士大邱에서 言明〉.
 
  62) 《大東新聞》1946년 4월26일자,〈大明原頭에서 十餘萬群衆을 激勵〉. 63) 《大東新聞》1946년 4월30일자,〈國父 맞이한 故都. 感激 깊은 五萬聽衆〉. 64) 《大東新聞》1946년 5월3일자. 뒤에 편집된 詩集에는 제목에서 ‘宿泊’이 없어지고 ‘半月城中’은 ‘半月城邊’으로, ‘古壘松陰’은 ‘古壘松風’으로 고쳐졌다. 65) 《大東新聞》1946년 4월30일자,〈李博士, 蔚山·東萊서 大歡迎〉. 66) 《大東新聞》1946년 5월3일자,〈李博士親書, 信託엔 署名 않으면 고만〉.
 
  67) 《民主衆報》1946년 4월30일자,〈老指導者에 歡呼의 人波〉. 68) 《大東新聞》1946년 5월3일자,〈運動場新設以來처음 四十萬釜山港民慶祝〉. 69) G-2 Periodical Report, no. 229, (1946. 5. 1), p. 2. 70) 《大東新聞》1946년 5월4일자,〈美港馬山에 軍樂行進, 舞鶴山도 춤추라〉. 71) 《大東新聞》1946년 5월5일자,〈九個郡民歡迎裡에 李博士晉州到着〉. 72) 《大東新聞》1946년 5월7일자,〈李博士順天到着〉.
 
  73) 《大東新聞》1946년 5월8일자,〈獨裁者共産派는 宗敎의 自由를 否認〉. 74) 《大東新聞》1946년 5월10일자,〈湖南沿道歡迎盛大〉. 75) 《大東新聞》1946년 5월11일자,〈“大韓사람 大韓으로”〉. 76) 《大東新聞》1946년 5월11일자,〈蘇聯의 無理解는 遺憾〉. 77) 《朝鮮日報》1946년 5월12일자,〈鄭重한 態度를 取하자〉;《서울신문》1946년 5월12일자,〈歸京後李博士奔忙〉.
 
  78) 도진순 주해,《백범일지》, p. 411. 79) 《大東新聞》1946년 4월16일자,〈金九主席仁川視察〉;《東亞日報》1946년 4월17일자,〈民議金九總理港都仁川을 視察〉. 80) 《東亞日報》1946년 4월23일자,〈金九總理農村視察〉. 81) G-2 Periodical Report, no. 229, (1946. 5. 1). 82) 도진순 주해,《백범일지》, p. 411 ;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백범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9, pp. 189~191. 83) 《大東新聞》1946년 4월25일자,〈金九主席〉;《東亞日報》1946년 4월26일자,〈金九總理도 禮山行을 中止코 待期中〉. 84) 《朝鮮日報》1946년 4월27일자,〈金九氏尹義士義擧記念式參席次禮山에〉;《大東新聞》1946년 4월28일자,〈金主席地方人士와 座談會〉. 85)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앞의 책, p. 192. 86) 《朝鮮日報》1946년 4월30일자,〈忠節, 靑史에 燦然〉;《東亞日報》1946년 4월30일자,〈이제 祖國의 무릎에 고이 잠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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