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남자의 물건 ⑤ 李曰鍾화백의 면도기

서귀포의 삶을 가능케 한 김철호에 대한 감사의 기억

  • 글 : 김정운 명지대 교수ㆍ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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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원자 김철호가 선물한 면도기 17년째 사용
⊙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 익숙하고 오래된 면도기 좋아해
17년째 이왈종은 허름한 화장실 한구석에서 오직 한 가지 면도기만 사용해 수염을 깎는다.
도대체 왜 한국남자들은 행복하지 못할까? 왜 다들 이토록 일사불란하게 침울한 표정일까? 나이가 들수록 자꾸 우울해지는 까닭은 또 왜일까?
 
  내 문화심리학적 분석은 아주 단순하다. 끝없이 타인(他人)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획일화의 굴레가 한국남자들의 일상을 지배한다. 그래서 식당에서 혼자 밥도 못 먹는다. 음악회는 물론, 극장에 혼자 가는 것도 쉽지 않다. 남들이 나를 ‘사회부적응자’로 볼까 두려운 탓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아무도 내가 혼자 밥 먹는 것, 혼자 음악 듣는 것에 관심 없다. 그런데도 그들의 눈길을 두려워한다. 정말 희한한 현상 아닌가?
 
  타인의 눈길을 두려워하는 한국남자들의 심리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수염이다. 오늘날 한국남자들이 수염을 기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서워서다. 얼굴에서부터 확연하게 타인과 구별되는 것처럼 두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수염을 기를 수 있는 사람들은 노숙자이거나 연예인이다. 한쪽은 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할 필요가 없어 수염을 기르고, 다른 한쪽은 너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수염을 기른다.
 
 
  수염의 민주화
 
   ‘한국사회의 진정한 민주화는 한국남자들이 제멋대로 수염을 기를 때 이뤄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가 원하는 수염을 다양한 형태로 기르고, 수염에 ‘빨주노초파남보’의 염색도 하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때야말로 한국사회의 진정한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정치제도의 민주화만이 전부가 아니다. 다수(多數)의 억압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내적 민주화가 진정한 민주사회다. 타인의 눈길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란 이야기다. 문화심리학적 관점으로 보자면 남자의 다양한 수염은 민주사회의 필수조건이다.
 
  여자들이 화장을 하고, 남자들은 면도를 한다. 여자들의 화장만큼이나 면도는 남자들의 중요한 일상이다. 그러나 남자의 면도라고 다 같은 면도는 아니다. ‘털을 미는 것’과 ‘수염을 깎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다. 어쩔 수 없이 매일 털을 밀어야 하는 남자들에게 면도는 의무와 책임이다. 이런 종류의 면도는 일회용 면도기나 전기면도기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수염을 기르는 이들에게 면도는 미학(美學)이다.
 
  자기만의 독특한 수염형태를 유지하는 일은 아주 특별한 노력이 동반된다.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없다면 그 귀찮음을 감내하기 힘들다. 이들에게 손에 딱 잡히는 면도기는 필수다. 17년째 똑같은 면도기만 쓰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제주 서귀포의 이왈종(李曰鍾·65) 화백이다.
 
 
  1 이왈종에게 면도기는 무소의 뿔이다. 그렇게 그는 혼자 간다.
 
  ‘숲 속에서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를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의 시(詩)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나오는 내용이다.
 
  서귀포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 작업실에 주저앉아,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슴과 노루, 푸른 바다와 달개비, 동백나무를 그리는 화가가 산다. 이왈종이다. 참 특이한 이름이다. ‘왈(曰)’이란 글자가 이름에 들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름의 뜻은 ‘종(鍾)이 울린다’ 일 테지만, 이름의 음은 아주 고집스럽게 들린다.
 
  그의 이름만큼이나 그의 모습도 고집스럽다. 신선모양의 눈썹과, 허옇고 짧은 수염 때문이다. 자신이 이제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왈종은 수염을 길렀다. 그러나 아주 오래된 수염처럼 자연스럽다.
 
  수염을 길렀지만 이왈종의 첫인상은 내가 기대한 예술가의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아니 많이 차이가 난다. 수염을 폼 나게 기르고, 파이프담배를 문 예술가의 분위기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웃집 아저씨의 인상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동네 수퍼 아저씨 분위기다. 어투나 이야기 방식은 무릎 나온 ‘추리닝’ 차림으로 소주 한잔 걸치고 있는 수퍼 아저씨다.
 
 
  딱 5년만 원 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서귀포 작업실 바닥에 주저앉은 이왈종과 나. 그는 지난 이십년 동안 이 넓고 거친 화실의 마룻바닥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 그림을 그린다.
  그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이고 싶어 서귀포에 내려갔다. 서울서 잘나가던 대학교수가 다 때려치우고 아무 연고도 없는 서귀포에 내려간 것은 1990년도다. 이왈종은 1945년생이다. 그러니까 마흔다섯에 서귀포로 내려간 것이다. 남들은 안정된 생활을 시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즐기기 시작할 때, 그는 그 황당한 결정을 한 것이다. 요즘 교수의 사회적 지위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20년 전만 하더라도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딱 5년만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원 없이 그리고 싶었다. 교수는 그림을 그리는 직업이 아니었다. 수업을 하고, 수업준비를 하고, 보직을 맡아 학교행정에 참여해야 하는 일은 화가의 직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제주도로, 서귀포로 내려갔다. 당시 그가 교수생활을 하며 모은 재산으로 삼청동에 집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면 5년 동안 굶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가족이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 없었다. 그저 그림이 그리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5년만, 딱 5년만 원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롭지 않았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서울생각이 많이 났지. 복잡하고 번잡해서 그렇게 싫어서 내려왔는데도, 그 바쁘게 돌아다니던 생각이 자꾸 나더라고. 전시회 다니고, 술 먹고, 주말이면 결혼식 다니고…, 그런 것들이 그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생활화되어 있으니, 혼자 있으니 그냥 힘든 거야.
 
  그래서 릴리프작업을 했어요. 부조(浮彫)작업이지. 그게 엄청난 노동이에요. 근데 서울생각이 자꾸 나서, 몸을 힘들게 해야 잠에 곯아떨어지고, 서울생각을 잊을 수 있으니…. 부조는 한국화(韓國畵)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근데 그게 전시회를 하는데, 다 팔려버리더라고. 그때 내가 힘을 얻었지. 이건 된다. 그런 확신이 생겼지.”
 
  그때 팔려고 했던 삼청동 집은 아직도 그의 소유로 남아 있다. 서귀포에서의 삶은 그에게 교수와 같은 사회적 지위의 성공과는 질적(質的)으로 다른,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성공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며 먹고살 수 있다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성공한 삶’을 이뤄낸 것이다.
 
  지금도 그는 ‘밥 먹고,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성공한 거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성공이 처음부터, 그리 쉽게,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왈종은 운이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잊을 수 없는, 너무 고마운 이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면도날 두 박스 확보
 
  서귀포에서의 혼자 삶이 익숙해지기까지 그동안 그를 도와준 그 고마운 이는 김철호다. 그는 지금은 사라진 ‘소라의 성’이라는 서귀포 근처, 가장 아름다운 절벽에 있던 식당의 사장이었다(그 식당은 지금 제주올레길의 사무실이 되었다). 김철호는 밥 먹는 것과 같은 일상의 사소한 문제부터, 집 구하는 것과 같이, 현지인이 아니라면 해결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문제들까지 마치 자기 일처럼 기꺼이 도와줬다. 그가 없었다면 이왈종의 홀로서기는 훨씬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서귀포의 소문난 예술애호가였던 김철호는 밥은 먹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아침, 점심, 저녁으로 그를 불러댔다. 둘은 8년간 거의 매일 만났다. 하루에 세 번씩 만날 때도 많았다. 새벽에는 등산길의 친구로 동행했다. 점심때가 되면 손수 밥을 해 놓고, 전화했다. 저녁이 되면 목욕탕에서 만났다. 그의 후원(後援)은 각별하고 친절했다.
 
  지금 이왈종이 사용하는 면도기도 바로 그 김철호가 선물한 것이다. 그가 일본여행을 다녀와 선물한 면도기는 이후 이왈종이 가장 아끼는 애장품이 된다. 1998년, 김철호가 뇌출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더 더욱 그렇다. 가끔씩 면도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으면, 이왈종은 불안해진다. 이곳저곳 찾다 없으면 공연히 아내에게 화를 낸다. 나중에 잘 찾아보면 여행가방에 본인이 잘 챙겨 놓고, 아무 잘못 없는 아내에게 큰소리만 친 것이다.
 
  면도기에 맞는 면도날을 이제 더 이상 구할 수 없다. 도루코 본사에 전화를 했더니 더 이상 생산이 안된다고 한다. 그는 전국에 수배해, 마지막 남은 두 박스를 구해 놓았다. 한 박스에 100개 정도 들었으니, 아껴 쓰면 죽을 때까지 쓸 수 있다며 안도의 표정을 짓는다.
 
 
  면도기는 후원자 김철호에 대한 감사의 기억
 
  이왈종의 면도기는 서귀포의 삶을 가능케 한 김철호에 대한 감사의 기억이다. 그가 죽은 후, 이왈종은 절에 가서 초재부터 49재까지 치러 줬다. 뿐만 아니다. 자신의 방, 한쪽 벽에 그의 사진을 걸어 놓고, 1년 동안 향을 피웠다. 이왈종은 그렇게 각별하게 김철호를 기억했다.
 
  김철호를 기억하는 감사의 절차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향을 피우다 보니 향로가 맘에 안 들었다. 서울 인사동에까지 가 향로를 찾았으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왈종은 직접 향로를 만들기로 맘을 먹는다. 수천만 원 들여 도자기 가마를 작업실에 들여놓고 직접 향로를 제작한다. 그렇게 시작한 향로 만들기가 이제 이왈종의 아주 특별한 작품세계가 되었다.
 
  이왈종은 지금까지 그림으로만 그렸던 서귀포의 새, 물고기, 달개비, 동백꽃 등을 향로의 한 귀퉁이에 새겨 넣는다. 어떤 향로 꼭대기에는 남녀가 사랑하는 모습도 만들어 올린다. 그 사이를 비집고 향이 올라오는 모습은 참 희한하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아주 묘한 에로티시즘이다.
 
 
  2 이왈종은 섬세하다. 그래서 익숙한, 아주 오래된 면도기가 좋다.
 
  이왈종은 자신의 작품에 대부분 ‘제주생활의 중도(中道)’라는 제목을 붙인다. 그가 이야기하는 중도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을 뜻한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돌이키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에 집착하게 된다. 집착은 반드시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상처를 남기게 되어 있다. 그가 서귀포의 삶에서 찾고자 한 것은 상처를 남기는 모든 종류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삶이었다.
 
  “제주에 와서 그림을 그리는데… 처음에는 자주 자전거를 타고 밀감 밭이나 숲 속을 혼자 자주 다녔어요. 가만히 앉아 하릴없이 잡초를 들여다보니, 서로 엉켜 있는 것 같은데, 아무도 서로 다치지 않더라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서로 질서가 있어요. 서로 엉켰는데, 서로 다치지 않게…. 올려다보니 나무도 그래요. 서로 엉키지 않고, 서로 상처 주지 않더라고….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니, 아주 마음이 편해지고, 남한테 의지하거나 기대하지 않게 되고… 아주 좋더라고.”
 
 
  예술적인 면도동작
 
이왈종의 향로: 자신의 서귀포 정착을 도왔던 김철호 사장에 대한 감사의 기억으로 시작된 향로 제작은 이제 이왈종의 아주 중요한 작품세계가 되었다.
  이왈종의 그림에서 꽃과 풀은 서로 다치지 않게 조화롭다. 하늘의 색은 터키색이다. 그 하늘에는 고기가 헤엄친다. 자동차가 굴러다니고, 나무는 하늘을 향해 팔을 아주 편하게 벌리고 있다. 내용이 아주 착한 동요를 듣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렇게 편안한 마음을 얻기까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내면의 평화를 얻기까지의 고통이 내 눈에는 읽힌다(나는 아주 체계적으로 공부한 심리학자다. 이 정도는 읽어낸다).
 
  이왈종은 정(情)이 많다. 또한 아주 섬세하다. 그가 자신의 면도기에 집착하는 이유도 섬세하기 때문이다. 다른 면도기와 달리 이 면도기는, 손잡는 자세가 너무 예술적이다. 검지를 대는 부분에 솟아 오른 곡면이 면도하는 손의 자세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해 준다. 이런 손의 자세로 면도를 하면 털이 잘려 나가는 사각대는 소리가 너무 경쾌하다.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예전의 이발소에는 긴 가죽벨트가 거울 옆에 항상 걸려 있었다. 이발사는 수시로 그 가죽에 면도날을 비벼댔다. 그렇게 날카로워진 면도날이 내 턱과 목의 털을 잘라 나갈 때의 그 ‘사각’거리는 느낌은 이발소에 간 남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오르가슴’이다. ‘퇴폐이발소’가 나온 것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이왈종는 엄지와 검지로 면도기를 잡고 아주 부드러운 동작으로 수염을 깎는다. 이런 종류의 섬세한 차원을 느낄 수 있는 이는 아주 쉽게 상처받게 되어 있다. 유전적으로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는 것은 모든 예술가의 운명이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으로 창조한 작품으로 위로받는다.
 
 
  파격적인 한국화 그려
 
이왈종이 이 면도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엄지와 검지에 이렇게 부드럽게 잡히기 때문이다.
  이왈종은 자신의 그림과 관련해 왜곡과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연한 일이다. 전통적인 한국화에서는 다룰 수 없는 입체적인 부조작업도 하고 돌조각도 하기 때문이다. 2~3m 보자기에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소재도 기존의 한국화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룬다. 그가 그리는 단순한 형태의 새, 물고기는 전통적 한국화에서는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다.
 
  자동차, 배, 전화기, TV도 그의 그림에는 빠지지 않고 나온다. 정사(情事)장면 시리즈를 판화로 찍어 내기도 하고, 50돈이 넘는 금판에 춘화(春畵)를 그려 넣기도 한다. 묘하게 야한 향로를 만들기도 한다. 전통적 한국화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주제들을 이야기하며 “다들 미쳤다고 하지”라는 표현을 아주 자주 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여전히 ‘한국화’라고 이야기한다. 진경산수(眞景山水)만이 한국화가 아니다. 시대가 변하면 내용도 바뀌는 것이다. TV나 자동차가 없을 때 그림을 그렸으니, 산이나 폭포만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사는 모습을 그리면, 바로 그것이 한국화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TV도 보고, 자동차도 타고, 골프도 친다. 이전의 동양화, 서양화의 분류가 재료에 의한 구분이었다면, 이제 그런 식의 분류법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이왈종은 강조한다.
 
 
  “정체된 것은 전통이 될 수 없다”
 
이왈종의 그림은 한 편의 동화다. 아주 착한 동화다. 그가 만들어 낸 터키색 바다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하늘이 되고, 전통적 한국화에는 절대 나오지 않는 자동차도 굴러다닌다.
  “전통이란 게 도대체 뭐예요?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계속 발전시키는 것과 같은 이야기라고…. 정체(停滯)된 것은 절대 전통이 될 수 없어요. 난 학교에서 애들 가르칠 때도 절대 밑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했어요. 그냥 생각나는 것을 바로 그려라. 주제를 가지고 고민할 것도 없다. 시를 읽고 생각나는 대로 그려라…, 그랬다고. 재료도 뭐든지 쓰라고 했지. 그랬더니 팬티나 스타킹을 가지고 한국화를 하겠다는 학생들도 나왔어…. 물론 교수들 사이에서 갈등도 생겼지. 그러나 열려 있지 않으면 발전도 없어요. 난 지금도 그래. 남녀의 체위 그림을 그리면… 너는 자식도 없냐? 또 그런다고. 그럼 난 이렇게 이야기해요. 넌 밤에 이거 안하냐? … 예술가가 두려운 게 많고, 가리는 게 많으면 예술가가 아니에요. 모든 것에 열려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도대체 그런 비난을 뚫고, 그토록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기초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기 색깔을 분명히 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용기는 자신에 대한 신념, 즉 자기 실력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매일 자기 얼굴을 그린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자기 얼굴을 꼭 한 번은 그린다. 이런 기초의 끊임없는 반복에서 자기 확신이 나오고,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도 나오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그의 섬세함은 그의 대범함과 동전의 양면이다. 본래 작은 일에 소심한 사람이 큰일에 과감한 법이다. 주위의 대소사에 큰소리 떵떵 치는 사람치고 큰일 하는 것 본 적 없다. 마치 면도날에 깎여 나간 털이 다시 붙을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섬세한 작업은 아무도 안 간 길을 뚫고 나간다. 이왈종은 섬세해서 용감한 것이다.
 
 
  이왈종 그림교실
 
  이왈종은 이제 서귀포에서 얻은 행복을 서귀포에 다시 돌려주려 애쓴다. 서귀포의 명물이 된 이중섭미술관 설립과정에서 그는 동분서주했다. 가나화랑, 현대화랑에서 이중섭의 그림을 기증받기 위해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매주 서귀포시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가 초등학생들을 모아 그림을 무료로 가르친 지는 벌써 십몇 년이 되었다. 초기에는 그림물감, 스케치북과 같은 재료도 모두 그가 사서 나눠 줬다.
 
  매주 서귀포시 평생교육센터에서 열리는 ‘이왈종 그림교실’에는 제주도 아이들이 들어오고 싶어 난리다. 이 그림교실에 지원하기 위해 엄마들이 밤을 새워 기다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서귀포 한구석에서 초등학교 아이들과 이렇게 씨름하며 지낸다. 그러나 이왈종은 아이들을 가르치며 오히려 배운다고 한다. 그의 그림이 동시처럼 편안한 까닭도 바로 이런 그의 따뜻한 일상 때문이다.
 
 
  3 면도는 에로틱한 행위다. 이왈종은 에로틱한 생각을 많이 한다.
 
  면도기 광고의 전형적인 방식이 있다. 모델은 예외 없이 식스팩의 복근(腹筋)을 한 남자들이다. 배의 근육을 보여줄 하등의 이유가 없는 면도기 선전이다. 그런데도 죄다 딱 벌어진 어깨와 초콜릿 복근을 하고, 상체를 벗고 있다. 조각 같은 턱에 거품을 잔뜩 바르고, 한 손에는 면도기를 들고 있다.
 
  면도기 선전은 남자에게 광고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이 상상하는 에로틱한 남성상을 구체화해 여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평범한 남자들은 여성들이 열광하고, 흥분하는 그 면도기 광고 모델을 흉내 낼 따름이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면도하는 모습에 에로티시즘을 느낀다. 남자들이 자신들에게 없는 여자의 가슴에 열광하듯, 여자들도 자신들에게 결핍된 수염과 그 수염을 정리하는 면도에서 에로티시즘을 느끼는 것이다.
 
 
  골프와 에로티시즘
 
이왈종 화백이 골프공에 그린 체위 시리즈.
  면도기에 집착하는 이왈종은 에로티시즘에도 집착한다. 그의 에로티시즘의 형상화 노력은 아주 오래되었다. 그러나 서귀포에 내려가면서 더욱 구체화된다. 여한 없이 5년 동안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다 죽겠다고 했으니 체면이나 타인의 평가가 두려울 리 없다. 1990년대 중반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이영희의 <노래하는 역사>의 삽화를 그리면서부터 그의 에로티시즘은 더욱 과감하고 노골적이 된다.
 
  이영희의 <노래하는 역사>는 일본 향가집 <만엽집>(萬葉集)에 남아있는 이두문자의 옛 노래를 해석하여 신문에 연재한 것이다. 그 대부분의 내용이 남녀의 은밀한 사랑이야기인 까닭에 삽화 또한 경계를 넘나드는 표현이 대부분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에로틱한 삽화는 신문 역사 최초의 컬러 삽화였다. 그 후, 그의 에로티시즘은 더욱 과격해져, 판화 시리즈로부터, 금판, 골프공, 향로, 부조, 돌조각에 이르기까지 사용 가능한 모든 매체(媒體)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의 에로티시즘의 극치는 골프공에 그린 체위(體位) 시리즈다. 골프의 18홀을 상징하는 18개의 골프공에 표현된 다양한 체위 그림은 1500만원에 팔리기도 했다. 18홀 내내, 작은 구멍에 공을 집어넣어야 하는 골프, 역시 에로틱한 운동이다. 홀 근처에서 사내들은 어김없이 야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여자 캐디들도 그런 종류의 농담은 으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무도 내놓고 골프와 에로티시즘의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왈종의 탁월함은 바로 이런 부분에 있다. 누구나 생각하지만, 감히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을 미술의 형식을 빌려,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툭’ 내놓는 것이다. 보는 사람의 반응은 우선 ‘허걱’이다. 당황 혹은 황당함이다. 그러나 이내 웃는다. 자발적 무장해제다. 이왈종의 그림에는 도덕적 굴레에서 풀려 나는 통쾌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에로티시즘은 음탕하지 않다. 재미있다. 즐겁다.
 
  야한 그림 그리기는 이왈종이 서귀포로 오기 전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정말 참석하기 싫은 교수회의 내내, 그는 담배개비에 다양한 체위를 그렸다. 그 얇은 담배개비에 아주 가늘게 나오는 모나미 펜을 이용해 다양한 체위를 그리고, 옆에 폼 나게 한시(漢詩)도 적었다. 그때 수없이 연습한 실력이 골프공에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자신이 실제 골프장에서 플레이하는 골프공에도 체위를 그려 넣어, 자신만의 표시를 하기도 한다. 그가 제주도의 골프장에서 잃어버린 공이 한 경매사이트에서 100만~200만원에 거래되는 일도 있었다.
 
 
  골프장의 일상을 그리다
 
  골프는 이왈종의 작품세계에 에로티시즘만큼이나 중요한 주제다. 그의 서귀포 그림의 절반 이상은 골프와 관련되어 있다. 그는 당시 제주 핀크스CC 회장을 통해 골프를 배웠다.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핀크스CC 클럽하우스의 벽에는 이왈종의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다. 그 인연으로 시작한 골프에 이왈종은 깊이 빠져든다.
 
  한번 빠져들면, 끝을 모르고 빠져드는 성격 탓에 내기골프도 많이 했다. 지역 타짜들의 내기골프에 말려 적지 않은 돈을 잃기도 했다. 한번은 파3홀에서 그가 17타를 쳤다고 횟수를 세고 있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열을 받을 대로 받은 그는 작업실 바닥에 쌀을 뿌려 놓고, 아이언으로 쳐 올려 북소리가 나게 하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 덕에 현재 이왈종은 싱글 수준의 실력을 유지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거리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젊은 사람들의 드라이버에 밀리지 않는다.
 
  골프에 한없이 빠져들다, 어느 날 갑자기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자식들은 서울서 고생 고생하며 사는데, 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서귀포에 와서 골프나 치고 있나 하는 자괴감(自愧感)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재미있는 골프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왈종은 골프도 치고 싶은 만큼 치면서, 그림도 그리고,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도 없앨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찾아낸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골프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그러나 골프장 전체를 그리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페어웨이에서 그린까지를 그려 보기도 했다. 결론은 그린 주변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린 주변에서 재미있는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가 그린 골프그림에는 해학이 있다. 한 사람은 퍼팅을 놓치고 아쉬워하고, 뒤에서 보던 동반자들은 마주 보며 웃는다. 그린 주변의 워터해저드에 공을 빠뜨려 아이언으로 건지는 사람, 남은 벙커 샷을 하느라 퍼덕대는데, 그린 위에 뒷짐 지고 서 있는 사람, 퍼팅 방향을 본다고 주저앉아 있는 사람 등등. 네 명의 아이언을 양팔 가득히 잡고 오가는 캐디의 모습도 빠지지 않는다.
 
  이왈종의 모든 그림은 ‘아, 우리의 모습이 저렇지!’ 하며 슬그머니 미소 짓게 한다. 예술이라며 거리 두고, 어깨에 힘주며 관람객을 주눅 들게 하는 그런 그림이 아니다. 지금 그에게 전국 골프장에서 주문이 밀려든다.
 
 
  “내 서귀포 생활은 게으름”
 
매주 서귀포시 평생교육센터에서 열리는 ‘이왈종 그림교실’에는 제주도 아이들이 들어오고 싶어 난리다.
  이왈종은 이제 가족들에게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이 골프 치러 다닌다. 골프 나가는 새벽이면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용조용 발꿈치를 들고 나가고, 돌아와서는 가족들 눈치 보느라 자라목이 되는 나 같은 이들에겐 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서귀포에서의 삶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서귀포 생활은 게으름이야. 게으르게 사는 게 중요해요. 게을러야 색 하나를 보더라도 오래 보게 돼.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래야 내 마음에 드는 색이 나와. 색 하나를 찍어 놓고 몇 년을 볼 수 있어야, 내 색깔이 나와. 지금 내 그림에 터키바다색, 나뭇잎 색, 다 그렇게 나온 거야.”
 
  이왈종 자신에게 최고의 찬사는 ‘평생 주색(酒色)에 시달린 사람’이라고 한다. ‘주(酒)’는 물론 술이다. 그는 술을 참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하는 ‘색(色)’은 여자가 아니다. 그림의 색깔을 뜻한다. 자신만의 색을 찾기 위해 서귀포에 왔고, 지금까지 그 색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주색에 시달린’ 얼굴로 거울 앞에 서서 면도를 한다. 서귀포의 삶을 가능케 해 준, 잊지 못할 친구 김철호가 선물해 준, 엄지, 검지에 딱 붙는, 세상에 하나뿐인 그 면도기를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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