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토목 걸작선 ②

11월 完成되는 경부고속철도

20년간 無知와 싸워 40년 건설기술 앞당겼다

  • 글 : 서철인 월간조선 기자  iron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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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처음부터 고속철도 건설이 다가 아니었다. 독자기술을 갖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기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기술이전을 받기 위해 끝없이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 총 공사기간 20여 년, 총 사업비 20조7282억원 투입
⊙ 朴正熙 대통령, 서해안 지역의 로켓기지 근무자들 위해 고속철도 구상
⊙ ‘고속철도’는 ‘고철 덩어리’ 부실공사 파문으로 실추된 신뢰도 높이기
⊙ 대구-부산 구간 선로는 자갈 대신 시멘트 깔아
경부고속철도(KTX) 2단계 사업인 대구-부산 구간(128.6km)이 완공돼 10월 28일 개통식을 갖고 11월 1일부터 운행에 들어간다. 1단계 사업인 서울-대구 구간이 2004년 1월에 개통된 이래 6년4개월 만이다. 그동안 대구-부산 구간은 기존선을 전철화해 운행해 왔다. 경부고속철도 전 구간(서울-광명 간 17.5km, 대전ㆍ대구 도심 구간 연장 40.9km 제외)이 전용선화됨에 따라 서울-부산 간 소요시간도 2시간40분에서 2시간18분으로 단축된다. 현재 공사 진행 중인 대전ㆍ대구 도심 구간까지 2014년 완공되면 2시간10분 만에 주파하게 된다. 서울과 부산이 그야말로 반나절 생활권이 되는 것이다.
 
  경부고속철도 사업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총연장 417.5km에 이르는 구간에 시속 300km로 달리는 초고속 열차의 구조물과 시설물 및 시스템을 건설하는 작업이다. 그 규모 때문에 단군 이래 최대의 국책사업으로 일컬어져 왔다. 완공하기까지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걸렸으며, 총 사업비 20조7282억원이 투입됐다.
 
  경부고속철도는 노선ㆍ설계 변경 논란, 차량 선정 의혹, 부실시공 파문 등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고속철도 건설 경험이 전무한 까닭에 수없는 시행착오와 그로 인한 혼선이 잦았다. 건설기간 동안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IMF(외환위기)가 닥치는 등 악재도 많았다. 급기야 김영삼(金泳三) 정권에서 김대중(金大中) 정권으로 교체되는 시기에는 백지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난관을 한국인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극복했다. 그 결과 일본(신칸센 1964년), 프랑스(테제베 1981년), 독일(이체 1991년), 스페인(아베 1992년)에 이어 세계 5번째 고속철도 보유국이 됐고, 이제는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독자개발기술을 보유한 선진국과 어깨를 견주는 철도 수출국이 됐다. 또한 현장에서 탄생한 토목공법과 건설기술은 대한민국 토목ㆍ건설 역사의 새 장(場)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부고속철도 전 구간 개통을 기념해 건설주역들을 만났다. 경부고속철도 건설에는 수많은 시공사와 협력업체가 참여했다. 토목 관계자들은 1단계 구간만 250여 개 시공사와 650여 개의 협력업체가 참여했고, 현장에 투입된 연인원이 1200여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했다. 기자는 좀 더 정확한 통계를 알기 위해 한국철도시설공단에 자료를 요청했으나 “참여한 업체와 인원이 셀 수 없이 많은데다 조직과 담당자가 여러 번 바뀌는 바람에 가지고 있는 기록이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1970년대 초부터 구상
 
경부고속철도의 서울 기점인 광명역.
  ‘땅 위를 달리는 비행기’ 고속철도 건설은 고도의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 시속 300km에서 발생하는 풍압과 고주파 진동에도 끄떡없는 차량과 운행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까닭이다.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는 일본의 신칸센이다. 도쿄와 오사카를 잇는 신칸센은 당시 세계 최고 속도인 210km를 자랑하며 도쿄올림픽 개막을 10일 앞둔 1964년 10월에 개통,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은 이보다 40년이 뒤진 2004년에야 고속철도를 개통했지만, 사실 건설 논의는 이보다 훨씬 앞선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 국가 물류망의 기본 축인 경부고속도로의 수송력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고속철도 건설이 추진됐다. 당시 철도청 시설국 건설과에 재직하며 노선을 검토했던 신종서(申鐘瑞) KRTC(구 한국철도기술공사) 회장의 말이다. “당시에는 노선이 서울-부산 간이 아니라 서울-대전 간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해안 지역에 있는 로켓기지 근무자들이 서울을 쉽게 왕래할 수 있도록 서울-대전 간 고속철도를 구상했습니다.”
 
  고속철도 건설이 좀 더 구체화된 것은 서울올림픽이 5년여 앞으로 다가온 1983년 3월, 신 회장이 철도청 시설국 건설과장으로 있을 때다. 당시 철도청은 일본과 프랑스의 교통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 도입 타당성 조사를 실시했다. 정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신칸센을 개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일본을 상기시키며 고속철도 건설에 의욕을 보였으나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고속철도 건설이 재개된 것은 1987년 12월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사업 추진을 대선공약으로 내걸면서부터다. 노태우 정권은 1989년 7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본 계획을 발표했다. 철도청과 교통개발연구원이 주관 기관으로 선정됐고, 미국의 기술개발 회사인 루이스버저(Louis Berger)에 기술조사 및 기본 설계 용역을 주었다.
 
 
  한 철도인의 先見之明
 
  이 무렵 철도청 안에 고속철도건설기획실(후에 고속철도건설기획단으로 조직 변경)이 생겼고, 신종수 회장은 건설계획 담당관을 거쳐 건설국장을 지냈다. 고속철도 건설이 본격화된 1992년부터는 사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설립된 고속철도건설공단에서 건설 본부장으로 근무했다. 신 회장은 고속철도 건설의 기틀을 다진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루이스버저에 기술조사와 기본 설계 용역을 준 것은 잘못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기술조사 및 기본 설계는 교통개발연구원이 맡았어요. 그런데 교통개발연구원은 그 일을 우리와 상의도 없이 미국의 루이스버저에 용역을 줬습니다. 국내업체에 주면 말들이 많은데다 객관적 검토가 필요해 일부러 해외업체를 끌어들인 것인데, 문제는 루이스버저가 고속철도를 운행하고 있는 독일이나 프랑스, 일본 회사가 아니라 고속철도가 없는 미국 회사라는 데 있었어요. 뭔가 자료가 나오고 배울 것이 있는 곳에 줘야 하는데 전혀 엉뚱한 회사에 일을 맡긴 것이죠. 이 때문에 교통개발연구원은 물론 루이스버저와도 마찰이 많았습니다.”
 
  이미 발주가 끝난 뒤라 업체를 교체할 방법이 없었다. 기술조사와 기본 설계를 공단 건설본부와 루이스버저가 각자 따로 진행한 뒤 양쪽의 결과물을 조정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공단 측은 과거에 검토했던 서울-대전 간 자료를 토대로 기본 노선을 그려 나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로와 교차되는 지점이 대략 400개였고, 지나야 하는 하천도 그만큼 됐다. 1km마다 장애물이 하나씩 나타나는 셈이었다. 신 회장은 안전운행을 위해서는 선로를 일본처럼 고가(高架) 형태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국 지형의 특징을 모르는 루이스버저는 고가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니 평면으로 가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맞섰다. 루이스버저는 자신들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언론 플레이에 집중하는 한편 정치권까지 끌어들였다. 신 회장을 포함한 공단 측 입장이 난처해졌다. 교통개발연구원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고속철도는 후대의 안전이 담보된 생명선인데, 이대로 물러설 것인가. 그는 옷 벗을 각오를 하고 공단 이사장을 찾아갔다. 당시 공단 이사장은 대통령 경제비서관 출신의 김종구(金鍾球)씨가 맡고 있었다. 김 이사장은 실무진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김 이사장님은 저에게 늘 ‘정치적인 것은 내가 막을 테니 실무진은 최선을 다해 후손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을 강조하곤 했어요. 그런 이사장님께 찾아가 ‘제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도 좋으니 어느 쪽 판단이 옳은지 판가름할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세대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 사업이니 소신대로 하라’고 격려해 주더군요.”
 
  그는 그 길로 루이스버저와 이들의 파트너인 국내업체 실무진을 찾아가 담판을 지었다. 그들이 조사한 자료와 공단이 조사한 자료를 비교 검토해 가며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 지금부터 내가 한 말이 틀리면 틀리다, 맞으면 맞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답하시오. 그리고 두 달 정도 검토한 후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거든 당신들 사장 설득하고, 루이스버저 설득해서 다시는 이런 억지가 나오지 않도록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소.”
 
  그들은 논리적인 근거를 들어 문제점을 지적하는 신 회장의 말에 수긍했고, 이후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시인했다.
 
  경부고속철도의 최고속도는 300km지만 전용선은 시속 350km를 달리도록 설계돼 있다. 이 역시 신 회장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세계적으로 시속 500km가 넘는 고속철도가 개발되는 요즘이고 보니 50km의 여유를 두고 건설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지만 시공 당시에는 말들이 많았다. 속도에 비례하는 것이 선로 시스템 비용이기 때문이다. 신 회장은 “일제시대 건설된 철로를 아직도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도는 적어도 100년 앞을 내다보고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유를 두고 설계한 것”이라고 말했다.
 
 
  용산역과 서울역은 하나로 통합했어야
 
경부고속철도의 종점인 부산역.
  기본 설계 당시 미국의 루이스버저에 자문한 국내 설계ㆍ감리 업체는 유신코퍼레이션(이하 유신)이다. 전긍렬(全兢烈) 회장은 “평지에 익숙한 루이스버저와 산악에 익숙한 우리의 기본 콘셉트가 달라 마찰이 많았다”고 말했다.
 
  유신은 기본 설계 후 13, 14공구 실시 설계도 했다. 뜻밖에도 전 회장은 “경부고속철도는 실패했다”며 이런 얘기를 했다.
 
  “1980년대 철도청이 서울-대전 간 고속철도 노선안을 검토할 때 일본의 신칸센 건설 당시 기사장(技師長)을 지낸 다키야마 마모루 박사를 초청해 고속철도 건설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신칸센 건설과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두 가지 당부 사항을 되풀이 강조했죠. 그 하나가 중간역의 수는 많을수록 유리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간역은 반드시 기존역세권을 통과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중간역을 역세권 내에 둬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유신은 1989년 정부가 주도하는 경부고속전철 기술조사 용역단에 참여해 다키야마 마모루 씨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충고를 반영하려 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일본은 도쿄-오사카 간 신칸센 중간역을 애초 4개에서 11개로 증설했다. 그러면서 수송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흑자 운행이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기존 역세권을 통과하지 않는 중간역의 경우 환승객들에게는 여전히 불편하다. 이로 인해 여객 수요가 감소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전 회장의 말이다.
 
  “1990년 정부가 공식 발표한 최종 노선 통과 지역의 중간역은 천안, 대전, 대구, 경주였습니다. 이 4개 중간역이 기존의 역세권을 통과하고 있는지,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중간역의 선형이 정거장 설계 조건에 부합할지 궁금하네요.”
 
  철도 전문가들은 “고속철도는 일반 철도는 물론 지하철이나 버스 등 다른 교통편으로 쉽게 갈아탈 수 있는 교통 센터에 역사를 건설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말한다. 현재 운행 중인 고속철도 역사는 이 정석에서 어긋나는 곳이 많다. 당장 서울만 해도 경부선은 서울역에서, 호남선은 용산역에서 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에 대해 신종서 회장은 “도심 깊숙이 있는 서울역을 서울의 교통 센터로 만들고자 했으나 서울시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 어디나 친환경 교통수단인 철도를 중심으로 도시가 계획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도로를 중심으로 계획돼요. 철도가 들어오면 부동산값이 떨어지는 반면 도로가 들어오면 그 반대 효과가 나기 때문이죠. 서울시의 경우 ‘그렇지 않아도 서울역이 붐비는데 영호남 고속철도까지 들어오면 남대문 일대 교통이 마비된다’는 이유까지 덧씌워 역사 건설을 반대했죠. 용산역 이남이나 서울 밖에 건설하라며 도시계획과 교수들까지 나서서 반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광명역을 서울의 기점역으로 만든 겁니다. 이 점은 지금도 아쉬워요.”
 
 
  1000명의 기술진이 프랑스로
 
노선 문제를 놓고 회의하고 있는 고속철도건설공단 임원들.
  기술 조사와 실시 설계 작업이 이뤄지고 있던 1991년 8월, 정부는 고속철도 차량 선정을 위한 제의 요청서를 일본의 신칸센, 프랑스의 테제베, 독일의 이체에 발송했다. 이때부터 3년여 동안 3사(社)의 치열한 수주 경쟁이 전개됐다. 모두 6차례에 걸쳐 차량 제조사로부터 수정 제의서를 받았을 정도였다.
 
  이 시기 한국기계연구원에 근무하고 있던 최강윤(崔康潤) 박사는 이들 3사가 제출한 제안서 중 기술이전에 해당하는 부분을 연구 평가하고 있었다. 이 과제는 과학기술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로 연구원에 위탁한 것이었다. 그의 동료들, 특히 전기 분야 연구원들은 독일 지멘스사의 이체를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이체가 가장 최신의 차였고, 유도 전동기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제베나 신칸센은 동기 전동기 방식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도 전동기 방식은 유지 보수가 간편할 뿐만 아니라 효율면에서도 우수하고 최첨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그의 얘기다.
 
  “솔직히 제 개인적으로는 3사 모두 장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회사를 딱 꼬집어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그냥 각사가 보유하고 있는 기술의 장단점을 분석하는 것이 제 역할이어서 그럴 필요도 없었고요.”
 
  신칸센은 한국의 지형이나 인구 밀도가 일본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로 유리했으나 민족 감정이 최대 단점으로 꼽혔고, 이를 상쇄할 만큼의 파격적인 조건도 없었다. 이 때문에 신칸센이 가장 먼저 탈락했다.
 
  결국 독일 지멘스사의 이체와 프랑스 알스톰사의 테제베가 최종 후보로 남았고, 엎치락뒤치락 피 말리는 경합을 벌이다 마지막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테제베가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차량 평가에는 교통개발연구원 외에 한국전기연구소, 한국기업평가, 세종합동법률사무소, 미국의 벡텔사 등이 참여했다.
 
  최강윤 박사는 “테제베가 최종 선정된 것은 전체 평가 요소 중 비중이 30%나 되는 운영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일본의 신칸센이나 독일의 이체는 시속 300km 고속열차를 운영해 본 경험이 없는 반면, 프랑스의 테제베는 시속 300km를 안전하게 운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최강윤 박사는 이 위탁 과제에 참여한 것이 인연이 돼 1992년 7월 고속철도공단으로 자리를 옮겼고, 1997년 12월까지 5년여 동안 근무하다 현재의 한국철도기술연구원으로 왔다고 한다. 이 연구원은 철도 분야의 기술개발 및 정책연구를 통해 철도교통의 발달과 철도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1996년 설립된 정부출연 연구기관이다.
 
  고속철도 차량이 테제베로 결정된 후 제조사인 알스톰사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아 국내 제조사인 현대로템과 함께 KTX2인 ‘산천’ 개발을 주도했다. 최 박사는 “1995년 6월부터 1996년 2월까지 9개월 동안 프랑스 파리 알스톰사 사무실에서 휴일도 없이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교육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저희 연구원을 비롯해 시설공단과 코레일, 차량 제조회사 등에서 1000명이 넘는 기술진이 프랑스에서 차량, 전차 제어, 열차 제어에 관련된 기술이전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압니다.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었죠. 기술이전은 알스톰사와 프랑스철도청(SNCF)에서 20년 이상 근무한 엔지니어들이 강사로 와서 각자 자기가 알고 있는 내용을 우리 기술진에게 알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총 1만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자가 교재였고, 모두 영어로 돼 있었습니다. 강좌도 50개가 넘었어요. 강사들은 모두 성심성의껏 강의했지만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렇듯 아는 범위 안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100% 소화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귀국 후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며 스스로 깨쳐 가는 방법밖에 없었지요.”
 
  기술이전 당시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프랑스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모든 기술을 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알스톰사에서는 당시 대서양선에 들어갈 신형 테제베를 개발해 시험 운행하고 있었음에도 구형 테제베에 대한 기술만 이전해 줬다. 그것도 기술을 분야별로 쪼개서 전수해 준 관계로 전체를 아우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대한 시각은 “알맹이는 빼고 껍데기만 준 것 아니냐”는 것에서부터 “사운(社運)이 걸린 일급 정보까지 달라는 건 무리 아니냐”, “프랑스 시스템상 전체를 하나로 묶어 전수시키기는 어렵다” 등 여러 가지였다. 최 박사는 “구형 기술이든 신형 기술이든 프랑스 연수는 철도 전반에 대해 알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현재 최강윤 박사는 철도기술연구원 시험인증센터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시험선 구간의 부실시공 파문
 
  1992년 4월 고속철도건설공단이 출범하고, 그해 6월 착공식을 가진 후 대역사가 시작됐다. 첫 공사 구역은 천안-대전 간 시험선 구간(34.4km) 4개 공구였다. 4000만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삽을 뜬 이는 대우건설의 현장소장으로 투입된 황낙연(黃洛淵) 부장(현 한화건설 토목환경사업본부장 겸 영업부장)이었다. 1980년부터 철도 건설에 참여해 온 그는 서울 홍대입구역, 안국역과 의왕 철도 기지 등을 건설한 철도 베테랑이었다. 그는 인천지하철 부평역 건설 현장 소장으로 있다가 긴급 투입됐다. 나름 철도 전문가임을 자부해 온 그였지만 고속철도 건설은 처음이었다. 재료 품질의 기준과 시공 방법 등을 적은 시방서(示方書)를 보고 험난하고 혹독한 일정이 되리라 예감했다고 한다.
 
  “솔직히 철도 구조물은 비슷하리라는 생각으로 현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시방서를 보니 머리가 아프더군요. 그동안 접해 보지 못한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기준만 모아 놓은 것 같았습니다. 1000명에 가까운 승객을 싣고 시속 300km 이상으로 달리는 고속열차의 구조물과 시설물을 만들어야 하는 일이니 그 어떤 기준보다 엄격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솔직히 시방서대로 하자면 시공이 불가능한 것이 많았어요.”
 
  현장 감리 감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외국업체가 맡았다. 하나에서 열까지 이들의 사인 없이는 시공이 불가능해 해외 건설 현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감리단과 상의해 가며 공사를 진행했다. 현장의 그 누구도 이전에 해본 일이 없는 작업이라 적지 않은 시행착오 역시 예견돼 있었다. 완벽해 보이는 시방 기준과 설계 도면이라도 시공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 이럴 경우 문제점을 파악하고 설계 도면을 수정하거나 변경해서라도 시공성을 높여야 한다.
 
  충남 천안의 풍세교 건설현장에서 이런 상황과 맞닥뜨렸다. 풍세교는 천안시 풍세면 일대 논과 밭을 가로지르는 높이 40m에 길이 6644m의 교량이다. 작업은 교각을 세우고 상판을 철근 콘크리트 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문제는 도면상 철근이 너무 촘촘해 콘크리트가 철근 사이로 스며들기도 어렵거니와 스며든다 해도 다지기가 어렵다는 데 있었다. 황낙연 본부장의 설명이다.
 
  “교량 상판은 말구유 모양의 철근을 조립해 거푸집으로 감싼 후 콘크리트를 부어 굳히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이 과정에서 콘크리트가 상판 바닥까지 잘 스며들고, 콘크리트를 형성하는 자갈과 모래와 시멘트가 잘 섞이도록 다져주는 공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콘크리트가 철근을 빈틈없이 감싸게 되고, 상판 표면 또한 곰보 자국 없이 매끈하게 처리가 되거든요. 그런데 철근이 너무 촘촘해 콘크리트도 잘 스며들지 않는데다 다짐기를 넣기도 힘들어 작업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그 바람에 콘크리트 속 자갈이 따로 놀고, 표면에 곰보가 생겼지요.”
 
  그는 현장의 관리 감독자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논했고, 보완할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예고 없이 공단 측에서 용역을 준 미국의 안전 진단 회사인 WJE팀이 진단을 나왔다. 그러곤 현장 책임자의 허락도 없이 문제의 부분들을 뾰족한 망치로 깨뜨려 철근을 노출시키는가 하면 머리카락 굵기의 크랙(crack·금)까지 하나하나 표시하며 부실공사 낙인을 찍었다. 이것이 1997년 일파만파로 퍼진 고속철도 부실공사 사건의 시발점이다.
 
  “WJE팀은 현장 책임자인 저나 외국인 관리 감독자를 무시하고 하자(瑕疵) 보수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부분들을 망치로 마구 깨뜨린 후 촬영해 언론에 유포했어요. 현장으로 달려온 언론사 기자들은 그 부분만 클로즈업해 풍세교가 곧 무너질 것처럼 보도했고요. WJE팀은 1000여 군데에 이런 하자가 있다고 확대 보고해 여론이 들끓었고, 정치권에서는 고속철도 건설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사건이 비화됐습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WJE가 부실공사로 지적한 1000여 군데 중 90% 이상은 콘크리트라면 생기게 마련인 헤어 크랙인 것으로 밝혀졌고, 나머지는 현장에 있는 저희가 알고 체크해 놓은 곳들이었습니다.”
 
 
  자갈은 물로 씻고, 모래는 체로 걸러
 
1997년 천안-대전 간 시험선 구간의 풍세교 상판 타설 현장.
  사실 부실시공 문제가 터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남기명(南基明) 한국철도시설공단 강원 본부장은 “고속철도가 부실시공 문제로 처음 언론에 얻어맞은 것은 착공 1년 후인 1993년 6월이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모 방송사 고발 프로그램의 카메라에 포착된 부실사례 1호는 시험선 구간인 충북 청원에 있는 궁현터널이었어요. 굴착 후 너무 많이 판 부분을 콘크리트로 메워야 하는데 나뭇가지로 메운 것이 문제였지요. 당시 방송사는 현장인부의 제보를 받고 달려갔는데, 그 제보자가 바로 부실공사를 한 당사자였어요. 손쉽게 작업하기 위해 나뭇가지로 메워 놓고 나중에 작업반장과 트러블이 생기니까 불만을 품고 고발을 해버린 거예요.”
 
  궁현터널 시공사는 한국중공업이었고, 굴착업체는 강원도 삼척에서 탄광일을 많이 한 ‘경동’이라는 곳이었다. 굴착 후 콘크리트를 치는 숏크리트(shot creet) 업체는 또 다른 곳이었다. 부실공사의 근본적 원인은 굴착과 숏크리트 업체가 다른 데서 발생한 것으로 파악했다. 굴착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숏크리트 업체가 미처 따라가지 못해 대충대충 하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 일로 공단은 굴착과 숏크리트는 한 팀이 돼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건은 이것으로 종료되지 않았다. 품질관리에 철두철미한 김한종(金漢鍾) 이사장이 “이번 기회에 세계적인 안전진단 업체를 불러 두드려 보고 가야 한다”며 그동안 시공된 구간 전체를 조사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남기명 본부장의 이야기다.
 
  “김 이사장님은 품질안전에 강한 소신이 있던 분이었어요. 콘크리트용 모래 자갈 보관소를 불시에 방문해 두 손으로 떠서 상태가 좋으면 하사하듯 관리자 손에 내려주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확 뿌리며 화를 낼 정도로 무서운 분이었죠.”
 
  경기도 화성 부근에 있는 상리터널도 김 이사장 때문에 이미 공정률 30%나 됐는데도 노선을 변경, 공사를 새로 했다. 시공사는 그곳에 설계 당시부터 폐광이 하나 있었고, 보강하면 안전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진행했다. 그런데 김 이사장이 기술조사를 시킨 후 100% 안전하지 않으면 다른 대안을 찾도록 지시했다. 이 때문에 1년 이상 공사가 지연됐다. 남 본부장의 말이다.
 
  “25m 정도 되는 교량 하나를 규정 강도가 안 나온다는 이유로 상판을 몽땅 걷어낸 적도 있어요. 시험선 구간 안전진단은 이런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강도 높게 진행했죠.”
 
  김한종 이사장의 강력한 부실 진단 드라이브로 “고속철도는 ‘고철 덩어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국민들의 대정부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온 나라가 부실공사 파문으로 시끄러워지자 정부는 김 이사장을 경질했다. 또한 문제가 있는 설계도면을 수정 변경하도록 하는 한편, 현장 감리 감독을 더욱 강화했다.
 
  파문이 인 6~7개월 동안 황낙연 부장은 9시 뉴스의 주인공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하루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고 한다. 들끓는 여론은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모아 놓고 가진 공청회가 끝난 후에야 좀 잠잠해졌다. 비로소 한숨을 돌린 그는 ‘토목 전문가들 사이에는 별것 아닌 작은 실금이 국민들에게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느껴지는 까닭이 뭘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홍보 부족’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이때부터 언론사 기자들과 전국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을 현장으로 초청해 설명회를 갖는 견학 프로그램을 만들어 토목과 건설의 특징을 알리고, 공사 진행 사항을 체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사건 이후 각 현장의 품질관리는 더욱 철저해졌다. 콘크리트용 시멘트와 자갈을 물로 깨끗이 세척해서 사용했고, 모래는 체로 곱게 쳐서 썼다. 또한 자갈과 모래의 온도가 일정하도록 보관창고를 만드는 등 자재관리에 온 정성과 신경을 쏟았다. 또한 하자가 발견되면 보수하기보다는 때려 부수고 새로 만들었다. 그렇게 완공된 풍세교는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큰 하자보수 한 번 없이 KTX의 튼튼하고 듬직한 등판이 되어 주고 있다.
 
 
  콘크리트 치는 로봇 개발
 
숏크리트 공정에 로봇을 활용했던 운주터널.
  황낙연 본부장에게는 운주터널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공사 현장이다. 총 길이 4030m의 이 터널 굴착 당시 그는 숏크리트 과정에 세계 최초로 로봇을 사용했다. 숏크리트는 터널 굴착 후 천장의 암석이나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철근을 대고 그 위에 물을 뿌리듯 콘크리트를 공기압으로 뿜어 붙이는 것을 말한다. 다이너마이트 발파 직후 먼지 가득한 막장에서 콘크리트를 뿌려야 하는 작업이라 굉장히 위험하고 건강에도 나쁘다. 뿐만 아니라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속도도 늦고 품질도 균일하지 않다.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던 중 우연히 TV에 나오는 자동차 조립공장 풍경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자동차 조립 라인에 보면 로봇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 대신 로봇이 뿌린다면 품질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탈리아와 독일 기술진과 밤낮으로 연구해 결국 숏크리트용 로봇을 개발했습니다. 레미콘 공장에서 배합한 콘크리트를 로봇에 연결해 뿜을 수 있도록 했죠. 사람이 할 때보다 훨씬 품질이 우수해 당시 다른 공구의 터널 공사에도 사용했습니다. 프랑스 테제베 건설 현장에서도 이미 벤치마킹해 갔죠.”
 
  숏크리트 작업 후 내부 터널 작업에 사용하는 거푸집도 자동화하는 데 성공했다. 반원형의 거푸집을 3단으로 접을 수 있도록 제작해 터널 바닥에 레일을 깔아 밀면서 작업하는 시스템이다. 이 역시 상용화됐다.
 
  고속철도 대전-동대구 간에 있는 모함 아치교도 그의 아이디어가 숨어 있는 작품이다. 이 교량은 국내 최초로 회전거치공법을 적용, 경부고속도로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건설됐다.
 
  “원래 설계상으로는 고속도로를 차단하고 건설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임시 터널을 만들어 고속도로가 땅 속으로 통과하게 해야 하는데 그 공사만 7개월 이상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물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를 차단함으로써 손해 보는 비용은 무려 700억~800억원이었고요.”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여러 달 고민하다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옆에 임시 철근 구조물을 세워 아치교를 그 위로 회전시키는 방법이다. 아치교 길이는 125m, 무게 2500톤이었다. 회전시키다 떨어지면 회사가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13시간에 걸친 회전에 성공, 모암 고가를 우아한 아치교로 이었다. 그는 “쇠와 쇠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노하우”라며 “이 노하우는 특허는 물론 유럽학회에도 발표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고 말했다.
 
 
  다리 상판을 공장에서 찍다
 
경부고속철도와 경부고속도로 교차 지점의 모함아치교.
  신공법 개발에 관한 한 윤철수(尹喆洙) 현대건설 인천공항철도건설단장 역시 누구 못지않다. 그는 1단계 수원(봉담)-평택 구간(20km)을, 2단계 사업 천성산 터널 전체 13.2km 중 5.3km 구간을 담당했다. 이를 위해 1993년부터 2000년까지 8년 동안 고속철도 건설 현장에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크고 작은 건설 신공법들을 도입해 성공했고, 상용화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이 PSM공법(상판일괄가설공법). 고가나 교량의 상판을 공장에서 미리 찍어 차로 운반한 뒤 대형 크레인으로 교각 위에 설치하는 방식이다. 윤철수 단장(당시 현장 소장)이 이 공법을 도입한 것은 장비와 인력 부족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속철도 1단계 사업 때 현대건설이 수주한 곳은 수원-평택 구간으로 교량이 6.5km나 됐어요. 당시 교량은 우리 공구뿐만 아니라 다른 시공사 공구에도 많았습니다. 150km에 이르는 교량이 전국 각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공되고 있었죠. 고속철도를 건설할 정도의 고급 장비와 숙련공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먼저 선점한 업체가 임자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다른 업체가 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야 시공이 가능한 상황이었어요.”
 
  PSM공법은 상판을 한꺼번에 여러 개 만들 수 있어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품질관리도 된다. 이 공법의 원천기술은 프랑스철도청에서 운영하는 설계회사 SOF가 보유하고 있다. 그는 국내 최초로 이 공법을 도입해 우리 식으로 소화 설계했다. SOF의 경우 독립된 여러 개의 상판을 이어붙이는 구조였다. 그는 상판 제조 시 양쪽으로 길게 구멍을 내 강선으로 연결하는 구조로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연결 부위는 적어지면서 더욱 강력해진다.
 
  간단한 작업인 것 같지만 상당히 정밀한 기술이다. 게다가 이전까지 시도하지 않은 신공법이라 절차도 복잡했다. 시공 설치하기까지 2년 반이 걸렸다고 한다. 현대건설은 이 공법을 신기술로 인정, 등록했으며 그는 3년 동안 기술료를 받았다. 또한 이 공법은 국내 고속철도 전 구간은 물론 대만과 중국의 고속철도 건설 현장에서도 상용하고 있다. 그는 “고속철도 건설 와중에 이 공법을 고안해 낸 것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李明博 사장 덕분에
 
1999년 시험선 완공 후 궤도 안전 검사를 실시하고 있는 모습.
  경부고속철도 건설은 환경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느 한 가지 수월한 곳이 없었다. 험난한 여정의 연속이었다. 윤철수 단장은 “2단계 사업구간인 원효터널의 경우 노선 재검토로 9개월 지연되면서 더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원효터널은 전체 13.28km로 단일 터널(산악)로는 최장이다. 이 터널은 원효산, 천성산, 정족산 등 3개의 산을 관통한다. 주봉은 원효산이다. 천성산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당나라 승려 1000명을 성인으로 만든 곳으로 전해지는 곳.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승려 지율의 단식 투쟁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그 명성 때문에 원효터널을 천성산 터널로 일컫는 사람이 많으나 공식 명칭은 원효터널이다.
 
  “지율 스님의 환경운동 문제로 공사가 중단된 것도 힘들었지만 현장에서 부딪힌 크고 작은 난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토목하는 사람들은 처음 현장에 갔을 때 ‘어떻게 완성할 것인지’ 첫인상이라는 것이 떠오르는데, 천성산은 전혀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발주처도 똑같이 느꼈을 겁니다.”
 
  원효터널은 사람들이 사는 곳보다 130m 정도 높은 산속을 굴착해야 하는 구간이었다. 13.6km를 양쪽에서 뚫는다 해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였다. 2003년 공사를 수주했을 때 윤철수 단장은 중간 허리에 사갱(斜坑)을 뚫기로 판단, 진입로까지 물색해 놓았다. 그런데 노선 재검토 문제로 공사가 9개월이나 중단돼 그 사이에 사갱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에 공장이 들어서 버렸다. 당시 용지를 매입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공사가 재개된 후 새로운 길을 확보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해야 했다.
 
  “터널 종점 부근에는 대규모의 청소년 수련원이 있었어요. 터널 공사를 하려면 버럭(공사장에서 나오는 잡돌)을 치울 터가 필요한데, 수련원에서 부지를 제공해 주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고속철도 건설로 인해 어차피 수련원 운영은 힘들 것이라 판단해 개발업체를 불러 수련원을 매입하도록 했죠. 앞에 저수지도 있고 경관이 좋아 개발 가치가 있는 곳이었거든요. 운이 좋았는지 개발업체가 수련원을 매입해 버럭 부지를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1997년, 미국 안전진단 기관 WJE社가 부실시공 진단을 내린 부분.
  사갱 진입로 확충 문제로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사갱으로 오르는 길이 직선이 아니라 뱀이 똬리를 틀 듯 곡선이어야 해서 주민들이 땅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자투리땅이 많이 생기기 때문. 특히 설득에 애를 먹은 곳이 그 지역 일대에 수백만 평의 수목원을 조성해 놓은 효성가(家)였다. 소유주는 조양래(趙洋來) 한국타이어 회장 아들이었다. 그곳에 진입로를 낼 경우 수목원이 둘로 나뉘는 까닭에 관리인은 말도 못 붙이게 했다.
 
  “그 지역 외에는 길을 낼 만한 곳이 없어서 6개월 동안 죽자 사자 매달렸습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국책사업이니 협조해 달라고 했죠. 수목원 소장으로 있는 분이 많이 이해해 주셨습니다. 결국 승인을 받았는데, ‘이명박(李明博)씨 사장할 때 신세진 일이 있어 그거 갚는다 치고 땅을 내주기로 했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현지 주민들과 효성그룹 직원들 덕분에 진입로 문제가 생각보다 빨리 해결됐고, 장비를 대거 투입해 터널 공기도 단축했다. 고속철도공단은 “현대건설이 터널 공사를 빨리 완료해 주어 전체 공기를 앞당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과 대만의 차이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의 최강윤, 박춘수, 김용규 박사(오른쪽부터).
  새로 개통되는 대구-부산 구간은 선로에 자갈이 아닌 시멘트를 깔았다. 자갈은 초기 투자비용이 적은 반면 유지 보수비용이 높고, 시멘트는 그 반대라고 한다. 앞으로 건설할 호남고속철도에도 자갈 대신 시멘트를 시공한다. 지난 6년여 동안의 운행으로 얻은 노하우와 기술이 새로 건설되는 철도에 투입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술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수출되고 있다. 고속철도 추진 초기부터 기술이전을 통한 독자기술로 철도를 건설해야 한다고 정부가 강력하게 드라이브한 덕분이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고속철도를 추진한 대만은 정부 주도에서 민자로 바꾸면서 고속철도 건설이 늦어졌다. 또한 기술이전 없이 전체 12개 공구 중 6개 공구를 해외 업체에 발주해 아직도 독자기술을 갖고 있지 못하다. 대만이 해외에 발주한 6개 공구 중 3개 공구는 삼성물산, 현대건설, 대우건설 등 우리 업체들이 국내 경험을 바탕으로 건설했다.
 
  강기동(康基東) 삼성물산 고문은 철도청과 고속철도사업기획단을 거쳐 고속철도공단에서 건설본부장, 설계실장, 품질안전실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대만은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고속철도를 추진했지만 사회 시스템이 우리만 못한데다 외국 기술력에 의존해 기술은 없고 철도만 남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만에 친분이 있는 교수 한 분이 있는데, 그는 한국의 고속철도 기술을 몹시 부러워합니다. 한 번은 ‘한국은 어떻게 해서 독자적인 고속철도 기술을 갖게 되었느냐’고 자문을 구하기에 이렇게 답해 줬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고속철도 건설이 다가 아니었다. 독자기술을 갖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기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기술이전을 받기 위해 끝없이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우리는 우리를 믿었고, 대만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요.”
 
  대만대 교수이면서 일리노이대 초빙교수로 가 있는 그 교수는 한 달 전 일리노이대 학장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 그 교수는 학생들에게 “한국을 본받으라”고 가르치고 있노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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