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지개혁 둘러싼 서방과의 갈등으로 경제 붕괴, 年 12억%의 인플레 경험
⊙ 2008년 美달러화 등을 공용통화로 사용하면서 연 9%대로 인플레 진정
⊙ 야당의 창기라이 총리와 연정 구성, 개헌 논의는 지지부진
⊙ 세슘(세계 2위), 크롬(3위), 리튬(7위), 니켈(16위) 등 200여 가지 광물자원 풍부
吳在學
⊙ 1954년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佛국제행정대 국제경제학 석사.
⊙ 외교통상부 구주국 심의관, 駐싱가포르공사 역임. 現 주짐바브웨대사.
⊙ 2008년 美달러화 등을 공용통화로 사용하면서 연 9%대로 인플레 진정
⊙ 야당의 창기라이 총리와 연정 구성, 개헌 논의는 지지부진
⊙ 세슘(세계 2위), 크롬(3위), 리튬(7위), 니켈(16위) 등 200여 가지 광물자원 풍부
吳在學
⊙ 1954년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佛국제행정대 국제경제학 석사.
⊙ 외교통상부 구주국 심의관, 駐싱가포르공사 역임. 現 주짐바브웨대사.

- 민속춤을 추는 짐바브웨인들.
연(年) 10억 퍼센트를 넘나드는 하이퍼인플레이션, 45세의 세계 최하위권 기대수명, 콜레라 창궐로 4000명 이상 사망자 발생…. 믿기 어렵지만, 지금도 인터넷을 찾아보면 가장 쉽게 검색되는 짐바브웨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다른 한편, 빅토리아 폭포에서 시원스런 번지점프를 즐기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사진을 보면, 이게 과연 같은 나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곳이 짐바브웨이다. 짐바브웨는 아직 대다수 우리 국민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아프리카의 후진국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나마 짐바브웨를 좀 안다고 하는 이들에게도 미국 및 서구(西歐) 유럽 국가들의 경제제재,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 대통령의 장기 독재 및 피폐한 경제 정도가 현재의 주된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상당 부분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짐바브웨 주재 대사로서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현지 생활을 체험해 본 필자로서는 그러한 부정적 이미지 하나로 짐바브웨가 덧칠되는 것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높은 가치를 지닌 희소광물을 포함하여 무려 200가지가 넘는 다양한 광물자원을 보유한 나라로서, 우수하고 저렴한 노동력, 온화한 기후와 관광자원까지 갖춘 이 나라의 잠재력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짧게 보면 에너지 협력 파트너로서의 가치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보다 길게는 10억의 인구를 가진 미래 소비시장으로서 아프리카의 잠재력은 짐바브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나라가 짐바브웨를 그저 가난하고 독재에 신음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한 국가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디지아에서 짐바브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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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바브웨의 독립을 가져온 랭커스터 평화협정 조인식. |
남로디지아는 1923년 영국 자치령(自治領)으로 승격됐다. 이후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많은 국가가 독립을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영국도 남로디지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그러나 이안 스미스(Ian Smith)가 주도하는 소수 백인 지배 정권은 이러한 영국 정부의 방침에 반발하여 1963년 ‘일방적 독립(UDI·Unilateral 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선언했다. 이는 영국 정부의 제재를 불러온 동시에 무가베 현 대통령을 비롯한 흑인 민족주의 세력의 무장 독립투쟁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백인들로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못지않은 차별과 멸시를 겪은 짐바브웨 흑인들은 치열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백인 정권도 이에 굴복, 영국 및 국제사회의 중재에 따라 양측은 1979년 12월 1일 신헌법 및 자유총선 실시를 골자로 하는 랭커스터 평화협정(Lancaster House Agreement)에 합의했다.
무가베는 랭커스터 평화협정에 따라 실시된 1980년 총선에서 승리, 신생국 짐바브웨의 초대(初代) 수상으로 취임했다. 그는 1987년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제를 도입하면서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현재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해 오고 있다.
무가베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후 흑백 간 화합을 내세우며 의회 내에 일정 수의 백인 의석을 보장하는 등 과거 경제권을 장악해 온 백인 사회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내각에 상당수의 백인 인사를 임명하면서 사회 통합 및 안정에 주력했다. 짐바브웨는 이러한 사회 안정을 토대로 전통적인 경쟁력을 갖춘 농업을 위주로 하여 198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곡물창고(Bread Basket of Africa)’라 불릴 정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유혈사태 속에 진행된 강압적 토지개혁의 진상
덕분에 집권 초기 무가베 대통령은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사회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확보했다. 필자가 그간 만나 본 백인 중장년층도 스스럼없이 “당시 무가베를 지지했었다”고 회고하곤 한다. 지금 흑인이나 백인을 막론하고 무가베 대통령의 인기는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 모두 무가베 대통령이 왜 갑작스럽게 돌변했는지, 그리고 어떡하다가 이 나라가 지금 상황에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이들에게서는 과거의 무가베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현재의 무가베 대통령에 대한 연민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대중의 감정이 30년 넘게 무가베가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한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짐바브웨 경제의 몰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2000년 ‘토지개혁’이다. 전(全) 인구의 1%에 불과한 백인이 전체 상업 경작지의 7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토지분배 문제 해결은 1980년 독립 이후부터 짐바브웨 정부의 최우선 정책과제였다. 이러한 불균형을 초래한 식민지배의 원죄(原罪)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정권도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자임했다. 이에 따라 짐바브웨는 ‘자유 매입, 자유 매각(Willing-to-buy, willing-to-sell)’ 원칙에 따른 토지 재(再)분배를 추진했다. 영국이 랭커스터 평화협정 합의 당시 향후 토지 재분배 과정에서 토지를 매각하는 백인 농장주들에 대해 보상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하면서, 토지 재분배 문제는 쉽게 추진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97년 정권을 잡은 토니 블레어 정부는 짐바브웨 토지 재분배 자금 지원 약속을 부인했다. 이에 따라 토지개혁 문제는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이에 더해 짐바브웨 국내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맞물리게 되자, 무가베 대통령이 강압적인 토지개혁을 밀어붙이게 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여성 언론인 하이디 홀란드(Heidi Holland)는 <무가베와의 저녁식사>라는 책에서 1997년 노동당 정부의 클레어 쇼트(Clare Short) 국제개발장관이 무가베 대통령에게 보낸 도발적 내용의 편지가 무가베 대통령과 영국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계기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쇼트 장관은 편지에서 “영국은 짐바브웨의 백인 토지 구매자금을 지원해야 한다는 특별한 책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언했으며, 무가베 대통령은 이 편지에 대로(大怒)했다고 한다.
쇼트 장관의 편지 이후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결국 2000년 2월 과거 짐바브웨 독립투쟁 참전군인을 중심으로 한 재향군인들이 백인농장을 습격, 불법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백인 농장주 12명이 살해됐다. 많은 백인 농장주들이 해외로 탈출했다. 많은 분석가들은 당시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경제사정 및 식량난으로 말미암아 정권유지에 위협을 느낀 무가베 대통령이 총선에서 토지개혁 문제를 쟁점화하고, 지방 표를 확보하기 위하여 이러한 사태를 방관 내지 조장했다고 보고 있다.
그 원인과 배경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문제이고,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1997년 영국 노동당 정부가 과거의 약속을 그대로 이행했다면, 아니 적어도 국가 간 합의를 존중하는 신뢰감 있는 태도를 보여주었다면 지금의 짐바브웨는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물론, 영국 정부가 돌연 약속을 저버린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무가베 대통령이 이후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던 토지개혁의 내용이나 절차상 문제점들을 정당화하긴 힘들 것이다.
돈을 자루째 들고 가 빵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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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면가 1000억 짐바브웨달러 지폐. 달걀 세 개 값이다. |
1998년 32% 수준으로 이미 좋지 않은 조짐을 보였던 인플레이션은 2008년 6월에는 12억%(짐바브웨 중앙통계청)라는 믿기 어려운 지경까지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언론의 국제뉴스 가십난을 장식했던 사진들을 보면, 빵 하나를 사기 위해서 돈을 자루째 들고 가거나, 도저히 돈을 셀 수 없어서 저울로 돈의 무게를 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신기한 웃음거리였지만, 당시 짐바브웨에서는 일상적인 모습들이었다. 2009년에는 100조 짐바브웨달러(이하 ‘짐달러’) 지폐까지 나올 정도였다. 짐달러 출범 당시, 영국 파운드화와의 교환비율이 1:1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짐달러의 가치 하락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어려웠던 생활은 필자를 포함한 대사관 직원들뿐만 아니라, 이곳 교민사회에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매일 새벽 은행 앞에는 그 전날 번 짐달러화를 미(美)달러화로 바꾸기 위해 사람들이 장사진(長蛇陣)을 쳤으며, 기다리는 동안에도 짐달러화의 가치는 계속 떨어져서 막상 은행 창구에서는 전혀 엉뚱한 환율이 기다리고 있었다. 줄을 서 있다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바람에 자기 순서를 놓치면, 그 잠깐 사이에 환율 손해를 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다반사였다. 외국으로부터 물자 수입도 거의 중단되어, 상점에 가 보면 진열대는 텅 비어 있기 일쑤였다. 결국 생필품을 실은 컨테이너를 한국으로부터 특별 수송하여 교민사회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조달해서 썼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토지개혁 이후 기근 닥쳐
하이퍼인플레이션은 식량난과 겹치면서 서민들에게 더욱 극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사실, 짐바브웨는 국토 대부분이 비옥한 농토이고, 과거 구축된 우수한 관개(灌漑) 인프라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의 주요 식량수출국이었다. 그러나 1992년 및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최악의 가뭄을 겪으면서 식량 사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농업생산성이 다소 향상됐지만, 어려운 식량 사정을 반전(反轉)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토지개혁 이후 백인 농장주들로부터 농장을 넘겨받은 흑인들에게는 농장경영 및 농업기술 노하우가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서방국가들의 경제제재로 말미암아 비료, 농업기자재 등 수입이 원천적으로 봉쇄됨에 따라 ‘아프리카 곡물창고’ 짐바브웨는 쇠락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지금도 수도 하라레를 벗어나 지방으로 나가 보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버려져 있는 광활한 토지를 쉽게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를 볼 때마다 우리나라의 발전된 농업기술과 저 비옥한 토지를 결합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곤 한다. 한반도 2배에 달하는 면적이지만, 인구는 1200만명에 불과한 이 나라에 우리나라의 숙련된 농업기술 인력이 진출할 경우, 짐바브웨 농업이 180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최근(2010년 5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창기라이 짐바브웨 총리가 우리나라의 농촌진흥청을 방문하고, 발전된 농업기술에 깊은 감명을 받아 한국과의 농업협력에 의지를 보이고 있다. 비록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차근차근 준비해 가면 항상 상상 속에서만 그려 왔던, 우리 농업인들이 짐바브웨 농장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조만간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긴다.
외국 통화 도입으로 인플레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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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바브웨에서는 2008~2009년 콜레라로 500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 |
당시 콜레라는 이곳에 주재하고 있는 대사들 사이에서도 단연 화젯거리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당시 러시아 대사가 필자에게 해 준 말이다. 예전에 근무했던 말리에서도 콜레라가 유행한 적이 있어 자칭 콜레라 전문가라는 크뤼코프 대사에 따르면, 콜레라는 열(heat)과 산(acid)에 약하며, 그렇기 때문에 음식물을 씹을 때 나오는 ‘펩신’ 등 산성 물질이 콜레라균을 죽인다는 것이다. 식량이 풍족하면 콜레라에 걸릴 염려가 적다는 것인데, 짐바브웨 콜레라 유행도 결국 서방 경제제재가 그 원인의 일부를 제공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짐바브웨 농촌 지역에는 ‘물을 끓여 먹으면 물속의 생명력이 죽는다’는 일종의 정령신앙(애니미즘)이 있어 물을 끓여 먹지 않는 사람이 많다”면서, “서방 언론이 이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고 콜레라 발생을 무조건 무가베 대통령의 장기 독재 때문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상대적으로 무가베 대통령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 대사의 말이기 때문에 적절히 가감해서 들어야 하지만, 순수한 의료 사안을 두고도 다양한 정치적 해석을 내리는 것을 보면서 짐바브웨와 서방 국가들 간 화해가 쉽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도 받았다.
짐바브웨 경제는 1999년 이래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다가(2008년은 -12.6%), 2009년 들어 처음으로 플러스 성장(5%)으로 돌아섰다. 무엇보다도 2008년 말부터 짐달러화를 포기하고, 미달러화 및 남아공(南阿共) 란드화 등 외국 화폐를 공용 통화(通貨)로 허용함으로써 천정부지로 치솟던 인플레이션을 잡았다(2009년 9%: IMF). 이에 따라 외국물자 수입에도 숨통이 트여 그간 비어 있었던 상점 진열칸이 다양한 상품들로 가득한 상황이다.
대통령 경쟁자 2명이 연립정부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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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기라이 짐바브웨 총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농촌진흥청을 방문, 한국의 농업기술을 살펴보고 있다.(농촌진흥청 제공) |
결국 주마 남아공 대통령의 중재 아래 여야 간 연립정부 구성이 합의되어, 현재와 같이 무가베 대통령-창기라이 총리 간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당초 연립정부는 조속히 신헌법을 제정하고, 대선을 실시한다는 전제조건 아래 출범했으나, 현재 주마 남아공 대통령 및 SADC(남부아프리카개발공동체) 등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야 간 협상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경제회복을 바탕으로 한 변화의 바람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경제제재가 풀린 것도, 여야 간 통합정부가 완벽히 조화로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지만, 생필품으로 가득 찬 수퍼와 활기찬 하라레 시민의 모습,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외국인 등을 보면, 불과 2년 전 하이퍼인플레이션 앞에서 무기력하기만 하던 분위기를 완전히 벗어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다. 짐바브웨 정부가 내세우는 2010년 12.5%, 2010~15년 연평균 15% 성장률 예측치는 비현실적이라고 평가되지만, IMF 및 <이코노미스트>지(誌) 등 경제 전문매체도 짐바브웨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섰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짐바브웨가 앞으로도 이러한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는 결국 연립정부가 현재의 안정적인 정국을 유지하고, 아울러 연립정부 출범 시 여야가 합의한 정치 일정에서 진전을 이룰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지난 6월 미국의 외교잡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는 세계 최악의 지도자 23명을 선정, 발표했다. 무가베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金正日)의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탄 쉐이 미얀마 국가원수,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 베르디무하메도프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지방에서는 아직도 무가베에 대해 ‘독립투쟁의 영웅’이자 ‘건국의 아버지’라는 이미지가 일부 남아 있지만, 수도 하라레를 비롯한 대도시 지역에서는 그의 인기가 많이 추락한 것이 사실이다.
뇌락장렬(磊落壯烈)
백규학린(白圭壑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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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자의 상징인 창과 도끼를 들고 있는 무가베 대통령. |
무가베 대통령을 ‘뇌락장렬’이라고 한 것은, 필자가 무가베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항상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독립투쟁을 이끌었으며, 특히 백인 정권에 의해 수감된 와중에 아들을 질병으로 잃었지만 그 장례식 참석도 허락받지 못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은 사람에게 있을 법한 무거운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무가베 대통령은 1924년생으로 현재 86세이지만, 실제 나이는 90세 이상이라는 설도 있다. 무가베 대통령은 지금도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는데, 그의 부모도 모두 100세를 넘어 장수했다고 한다. 그가 “백 살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겠다”고 호언한 것도 과장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는 영국식 교육을 받아서인지 대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농담을 주고받는 등 유럽 사람의 여유가 느껴진다.
그런 사람이 왜 지금처럼 서방 국가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국민들을 어려움에 빠뜨리는 상황까지 왔을까? 무가베 대통령은 요즘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말을 빌리면 ‘엄친아’라고 할 수 있다. 하라레 북서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무가베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간 후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소년 무가베는 뛰어난 학업성적과 착실한 성품으로 어머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며, 영국 신부(神父)의 도움으로 영국, 남아공 등지에서 유학을 마치고, 교사 생활을 하는 등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혹자는 이런 어머니의 과잉 기대와 엘리트 경험이 무가베 대통령의 자기중심적 사고, 즉 자기 소신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어붙이는 성격으로 나타났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일견 그럴듯한 해석이기도 하다. 이것이 그를 표현하는 말로 ‘백규학린’을 고른 이유다. 두 가지 사자성어 모두 무가베 대통령의 진짜 모습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지만,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짐바브웨 토지개혁 정책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을 갖고 있는 서방 언론의 프리즘 하나로 무가베 대통령을 투영해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북한 월드컵 대표팀, 훈련 캠프 차리려다 주민 반대로 포기
사실 우리나라와 짐바브웨 간 교류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독립 이후 비동맹 그룹의 주도적 역할을 자임해 오던 짐바브웨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무가베 대통령 자신이 8차례나 북한을 방문했을 정도로 김일성(金日成)과 개인적 친분을 쌓아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은 짐바브웨 독립 초기 군사고문단을 파견, 짐바브웨 군대를 훈련시켜 반(反)정부 활동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무가베 대통령의 정권 안정에 기여했으며, 이후에도 긴밀한 정치·군사적 교류를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1981~82년 북한 군사고문단은 짐바브웨 신설 제5여단 5000여 명을 훈련시켰다. 당시 제5여단은 짐바브웨 남부 마타벨레랜드(Matabeleland) 지역의 반정부 활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2만명이 넘는 인명을 살상하는 악명(惡名)을 떨쳤다. 지금도 남부 지방에서는 이러한 만행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어 북한에 대한 반감이 매우 크다. 실례로, 최근 북한 월드컵 대표팀이 짐바브웨 남부 중심도시 불라와요(Bulawayo)에 훈련 캠프를 차리려고 하다가, 지역 여론의 반대로 불발에 그친 적이 있다. 북한은 1998년 대사관을 철수하고, 지금은 소규모 무역대표부만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짐바브웨와 국교(國交)를 수립하고, 1995년 대사관을 개설했으니, 양국 간에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된 것은 이제 15년에 불과하다. 교역은 2008년의 경우 4700만 달러, 2009년에는 1900만 달러(수출 1400만 달러, 수입 5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상대적으로 교역규모도 작고 편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앞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잠재력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우리 기업 제품들의 짐바브웨 시장 진출도 활발하여, 휴대폰, 가전제품, 자동차 등에서 삼성, LG, 현대 등 로고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짐바브웨 사람들도 아시아의 발전된 나라 한국에 대해 동경과 선망을 품고 있으며, 한국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도 매우 높다. 우리 정부도 이에 부응코자 짐바브웨 공무원 교육훈련, 한국 유학 확대 외에도 지역 보건, 농업, 재생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발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특히, 금년 5월 말 양국 수교 이래 최고위급 인사인 창기라이 총리가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 것은 의미가 깊다. 창기라이 총리는 3박4일이라는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제조업, IT, 농업, 에너지산업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관련 인사들을 면담하는 등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경험을 전수받는 데 강한 의욕을 보였다. 무가베 대통령도 서방국가들의 경제제재 속에서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동방정책(Look East Policy)’을 내세우고 있다.
짐바브웨에서 ‘한국’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는 한류(韓流)에 힘입은 바 컸다. 2007년 3월 남부 아프리카 최초로 짐바브웨 국영방송(ZBC)을 통해 <슬픈 연가>가 방송된 이후, 12월에는 <대장금>이 방영됐다. 특히 <대장금>의 경우 TV를 보유한 거의 모든 가정에서 시청했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우리 대사관은 <대장금> 시청 에세이를 공모한 적이 있는데, 2000편이 넘는 글들이 쏟아져 들어와 대사관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이후 <태극기 휘날리며>, <올드보이> 등의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최근에 만난 현지인이 이번 월드컵에서 대다수 짐바브웨 사람들은 한국팀을 응원할 것이라고 해서 의아했는데, 그 이유가 너무 간단했다. “한국 드라마 때문에 일반 사람들에게 한국이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한류의 위력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200여 가지 광물자원 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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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바브웨의 쇼나조각은 현대 조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최근 들어서는 우리 광물자원공사 외에 민간기업들도 짐바브웨 광물자원 개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금년 6월에는 정준양 포스코 회장이 하라레를 방문하여 무가베 대통령을 면담하고 자원탐사 및 개발 협력을 협의했다. 앞으로 짐바브웨에 대한 경제제재가 풀리고, 본격적인 경제도약을 꾀한다면, 그 견인차는 광물자원 개발이 될 것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광물자원 개발 외에도 짐바브웨가 우리나라에 투자를 희망하는 분야는 많다. 특히, 철도·도로·주택 건설 등 공공 인프라 건설, 그리고 전력개발에 앞선 기술과 풍부한 경험을 가진 많은 한국 기업이 참여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짐바브웨 국내 도로는 대부분 백인 지배 시절 건설된 것이라서 이미 많이 노후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제재 이후 적절한 관리와 투자가 거의 중단된 상황이라서 매우 열악한 여건에 처해 있다. 버려진 땅은 많지만, 신규 주택 건설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서민용 주택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극심한 전력(電力)부족으로 말미암아 수도 하라레조차 제한 송전(送電)이 이루어지고 있어, 전력개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쉬운 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짐바브웨의 잠재력을 주목하고 공을 들여온 중국에 선수를 빼앗겼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창기라이 총리뿐만 아니라, 필자가 그간 만나 온 각 부처 장관들도 한국 기업의 투자를 적극 원하고 있어, 전력 분야는 앞으로 우리 기업의 진출이 가장 기대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빅토리아 폭포 등 관광자원 풍부
글머리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 국민에게 아직은 생소하기 그지없는 짐바브웨가 그나마 알려지게 된 것은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인 빅토리아 폭포라는 천혜의 관광자원 덕분이다. 빅토리아 폭포는 너비가 1.7km로 남미 이과수 폭포의 4km보다는 작지만, 108m의 높이는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근래 들어 우리나라에 아프리카 여행 붐이 일고, 아프리카대륙 종단을 감행하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빅토리아 폭포, 그리고 짐바브웨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상에 많이 떠다니고 있다. 1999년에는 150만에 달하는 외국 관광객이 짐바브웨를 찾았을 정도로 과거 짐바브웨의 주요한 외화 수입원은 관광산업이었다. 빅토리아 폭포 외에도, 세계에서 2번째로 큰 인공호인 카리바 호수, 황게 사파리국립공원, 동부 고원지대, 그리고 그레이트짐바브웨를 비롯한 고대(古代) 아프리카 유적지 등이 전 국토에 산재해 있다. 2000년 토지 개혁 및 서방국가들의 경제제재 이후 관광객들이 급감하여 관광산업이 많이 침체되었지만, 짐바브웨 정부는 앞으로 광물자원 개발 못지않게 짐바브웨 경제를 부흥시킬 잠재력을 가진 분야로 주저 없이 관광산업을 꼽고 있다.
짐바브웨는 예전부터 ‘아프리카의 스위스’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곤 했다. 전혀 다를 것만 같은 두 나라가 가진 공통점은 내륙국(內陸國)이라는 지리적 특성, 살기좋은 기후, 그리고 천혜의 관광자원이다. 짐바브웨는 남아공, 잠비아, 모잠비크, 나미비아, 보츠와나 등 5개국과 국경을 맞댄 내륙국이라는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일 년 내내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온화한 날씨를 갖고 있다.
필자는 짐바브웨의 장점으로 온순하고 손재주 있는 사람들을 하나 더 꼽고 싶다. 바로 이웃 국가인 남아공의 극심한 범죄 및 치안 불안과는 대조적으로, 짐바브웨 사람들은 그야말로 온순하기 그지없고, 항상 웃는 얼굴이다. 길을 묻는 외국인들에게 반드시 답을 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지, 자기가 모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불러 모아 서로 갑론을박을 하는 바람에 시간이 더 지체되는 경우도 종종 경험하곤 한다. 손재주가 좋은 짐바브웨 사람들이 망치 하나로 세공한 돌조각은 우리나라에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다. 좀 과장한 것인지는 몰라도, 스위스가 우수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오늘날 강소국(强小國)의 대열에 올랐다면, 짐바브웨도 앞으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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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m의 높이를 자랑하는 빅토리아 폭포. |
‘아프리카의 스위스’를 꿈꾸는 짐바브웨
지금도 짐바브웨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가수로 자메이카 레게음악의 전설적인 거장 밥 말리(Bob Marley)가 있다. 밥 말리는 1979년 ‘짐바브웨’라는 노래를 발표, 당시까지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던 짐바브웨 국민들에게 희망과 힘을 주었다. 마침내 1980년 4월에는 짐바브웨 독립 축하행사에 특별 초청되어 ‘짐바브웨’라는 노래를 열정적으로 부르고, 이듬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간 인터넷과 국제뉴스 가십난을 달구었던 하이퍼인플레이션, 낮은 기대수명, 콜레라, 독재와 빈곤 등은 분명 밥 말리가 꿈꾸었던 짐바브웨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요소 중 상당수는 이미 옛이야기가 되었거나, 그 영향이 미미해졌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밥 말리가 희망했던 짐바브웨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 요원하겠지만, 이제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있는 짐바브웨를 우리가 새롭게 보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