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교통사고를 이겨낸 사람들 이야기

사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불가능한 몸으로 세상과 맞섰다.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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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기적은, 예외 없이 한 개인을 위해 이뤄진다. 바로 당신을 위해”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는 사람은 한해 평균 3만여 명에 이른다. 2008년 한 해 동안 34만 명이라는 교통사고 부상자와 6000명의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그들 중 일부는 손과 발을 잃고 장기가 부서지고, 어떤 이는 대소변을 못 가리는 사지마비(四肢痲痺)로 살고 있다.

⊙ 병상 수가 턱없이 모자라고, 대기자가 많아 한 병원에서 6개월 이상 머물 수 없다
⊙ “사고 이후 제 곁을 지켜준 아내와 가족의 정성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동기가 되었다”(김락환)
⊙ “재활만 고집하는 사람을 보면 바보스러워요. 그것만 쫓아다니며 시간을 보내요. 그럴 시간에
    사회에 부딪쳐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김인호)
교통장애인들이 정지선 지키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교통사고 사망지점’이란 표지판 밑을 자동차가 지나간다. 무심히 핸들을 쥐다 멈칫 브레이크에 발을 올린다. 죽음의 지점을 통과한 차는 다시 속도를 올린다.
 
  문득 죽는 일은 무섭지만 죽음과 구분되지 않는 일상의 삶이 더욱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아직 횡사(橫死)하지 않은 자신의 삶에 안도한다.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1위의 나라에서 도로는 죽음과 뒤섞인 일상성이 된다.
 
  그러나 어떤 이는 교통사고의 무시무시한 죽음에서 살아나기도 했다. 병원에서 눈을 뜬 순간, 사지(四肢)가 부서지고 신경이 마비된 몸을 발견한다. 설명되지 않는 ‘몸의 현실’에 절망한다. 장애의 삶은 애처롭고 기댈 곳이 없어 보인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세상 누구도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부서진 잔해의 몸으로 세상을 딛고 일어선다. 그들에게 몸은 기적이자 위대한 신(神)의 형상이다. 두 발로 걸을 수 없고 두 손으로 물컵을 쥘 수 없으나 망가진 몸으로 가혹한 일상과 맞선다. 일상이 전쟁터다. 아픈 몸은 말이 없지만, 그 몸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그들에게 삶과 죽음을 설명하기란 인문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운명 앞의 경건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는 사람은 한 해 평균 3만명이 넘는다. 2008년 한 해만 해도 34만명이라는 교통사고 부상자와 6000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가 발생했다. 손과 발을 잃고 장기가 훼손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대소변을 못 가리는 사지마비로, 제 기능의 10%도 안되는 몸짓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의 무서움조차 밀어내며 휠체어 바퀴를 돌리고 젖은 목발을 옮긴다.
 
 
  성동구의 수퍼맨 김인호
 
  서울 성동구 ‘장애인 생활 클린센터’ 김인호(金仁浩·35) 실장은 성동구의 수퍼맨으로 통한다. 교통사고로 경추 6번을 다쳐 명치 아래 감각이 없다. 이 ‘하반신 마비’ 수퍼맨은 엎드려 운전할 수 있는 전동 휠체어를 직접 만들어 타고서 동료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를 제작하고 있다.
 
  동료 장애인의 휠체어를 수리하느라 그의 두꺼운 손은 기름이 가득하다. 한때는 두 손에 눈물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땀과 기름이 배어 있다. 그의 꿈은 ‘보조공학 전문센터’를 만드는 것이다. 현재는 휠체어 수리업무가 대부분이지만, 각종 장애인 보조기구를 들여와 많은 사람에게 직접 체험해 보게 하고 다양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꿈이다.
 
  그의 악몽 같은 기억은 23세 무렵 시작됐다. 1998년 11월 7일 밤 10시쯤 전북 군산에서 나주로 향하던 호남고속도로에서 자신의 차량이 전복됐다. 1시간 이상 도로에 방치되다 지나던 순찰차에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당시의 기억은 백지상태다.
 
  “재활치료가 뭔지 몰랐습니다. 편하게 푹 쉬다 퇴원하면 낫는다고 생각했어요. 첫 조카가 태어났을 때, 그 애가 걷기 전 제가 먼저 걷는다고 생각했어요. 그 애가 자라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 걷지 못했습니다. 둘째 조카가 태어났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조카가 6명이 될 때까지 결국 못 걸었습니다.”
 
  사고가 난 뒤 3년간 전남 나주의 집에서만 지냈다. 밥 주면 먹고, 자세 잡아주면 그대로 유지하며 하루를 보냈다. 스스로 대소변을 못 가려 가족의 손길에 의지했다. 손위 형이 “남들은 혼자 처리하는데 넌 왜 못하느냐”고 말할 때는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형이 너무 고맙다. 형 말대로 못해서 안 한 것이 아니라 하기 싫어 안 했던 것”이란다.
 
  그러다 2001년 무렵, 국립재활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재활원 관계자가 “왜 이제 왔느냐”고 하더란다. “초기에 재활치료를 받았다면 혼자서 ‘날아다닐’ 정도는 됐을 텐데… 당신보다 더 심한 이도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많이 울었다.
 
  “재활원에서 3개월 동안 머무르며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이전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그냥 가축이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고 마음먹은 대로 도전해 보는 것, 스스로 삶의 결정권을 갖게 됐다고 할까요.”
 
 
  상경하다
 
서울 성동구 ‘장애인 생활 클린센터’ 김인호 실장.
  2002년 3월. 무작정 보따리 하나 달랑 싸서 상경했다. 마침 친구가 서울로 간다기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사흘을 못 버티고 귀향했다. 어머니가 “집 떠나면 고생이지?” 했다. 절치부심하고서 한 달 뒤 다시 상경했다.
 
  농협에서 신용대출 500만원을 받아 서울 왕십리 근처에다 보증금 300만원, 월세 25만원 하는 방을 구했다. 누나가 근처에 살았지만 스스로 밥 짓고 샤워도 혼자 했다. 혼자 생활하며 사고 직후의 ‘나’를 떠올려 보았다.
 
  “아버지는 장애 아들을 위한 집수리를 하지 않았어요. 휠체어가 시골집 문지방을 넘기가 벅찼죠. 그때 아버지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를 위해 집수리를 안 한다. 할 수는 있지만 대문의 높은 턱은 없앨 수 없다. 스스로 문턱을 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직접 휠체어를 제작했다. 손으로 일일이 설계하고 용접해 휠체어를 만든 것이다. 국립재활원에서도 수제(手製) 휠체어를 탔다. 손재주를 눈여겨본 어느 분이 “휠체어 수리 선교단체에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당시 그는 국민기초수급자로 지내고 있었다. 월 65만원이 나오지만 선교단체에 들어가면 월 70만원이 나온다. 5만원 더 벌려고 땀 흘릴 가치가 있을까 생각했다. 좀 덜 쓰면 된다 싶어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다. 1년이 지나고 다시 연락이 왔다.
 
  “당시 구청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어요. 남모르는 사람에게 받은 고마움을 되돌려줄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다시 제안이 왔던 거죠. ‘좋다.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저금통장을 털어 자동차부터 샀어요.”
 
  기동력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주위에서 월 70만원 받고 차부터 사니 ‘미친 짓’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한 분이라도 더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기동력이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그 말 들을 때마다 즐거웠어요. 왜냐고요? 제 나름 땀 흘린 보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어느 아주머니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어요. 다짜고짜 ‘살려 달라’고 해요. 휠체어가 망가져 약을 타러 못 간다는 얘기였어요. 휠체어 바퀴가 터져 수리업체에 연락했는데 차일피일 미룬다는 겁니다. 그분을 찾아갔더니 엎드려 휠체어를 타는 저를 보고 기가 막혀 했어요. ‘누가 누굴 고치느냐’며 ‘그냥 가라’고 했어요. 간신히 설득해 휠체어를 수리하니 어둡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아이처럼 바뀌었습니다.”
 
 
  할 수 있다는 것 보여줘야
 
  김인호씨는 장애로 사라진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전문대 사회복지과에 진학,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대학 학장이 그를 위해 강의실마다 카메라를 달아 ‘원격수강’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장구 수리사’ 자격증을 땄고 주경야독하며 11개 과목을 공부해 ‘보조공학사 2급’ 자격증도 지난 1월에 취득했다. 장애를 입기 전 땄던 자동차 정비 기능사, 농기계 정비 기능사, 굴착기 운전, 지게차 운전 면허증 등을 합치면 각종 자격증이 10개 가까이 된다. 또 자신처럼 어려운 동료 장애인을 도와주기 위해 ‘동료 상담가(Peer Counseling)’ 과정도 이수했다.
 
  “한번은 친구가 놀러 오라고 해서 간 일이 있어요. 건물 3층에서 근무하고 있다기에 당연히 엘리베이터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죠. 웬걸, 계단뿐이었어요. 끙끙대며 기어올라갔죠. 그 친구가 고마웠습니다. 사실 친구들이 저를 장애인으로 대하면 그때부터 거리감이 생깁니다. 다른 친구와 똑같이 대해 주면 장애인이라 생각하지 않게 돼요. ‘너는 안 돼. 너는 느려 못해’라고 말하는데, 그래선 안 돼요. 장애인도 시간을 주면 누구나 합니다. 단지 느리다는 것뿐이죠. 제가 아는 어느 분은 말도 못하고 그저 눈 깜박이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게 전부예요. 그런데 그 사람 직업이 프로게이머입니다. 또 어느 구청 자립센터 소장 중엔 입만 살아 있는 사람도 있어요. 밥도 남이 떠먹여 줘야 하지만 소장직을 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방향만 잡아 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남한테 보여줘야 합니다.”
 
  그가 접한 국내 재활병원의 현실은 어떨까. 입원을 희망하는 장애인 수는 많은 데 비해 병상 수가 턱없이 모자란다고 한다. 재활병원 입원을 희망할 경우 먼저 신청부터 해야 하고 병원에 따라 수개월씩 대기해야만 겨우 자리가 난다. 규모가 큰 재활 전문병원인 신촌 세브란스나 국립재활원 등에 입원하고 싶어도 대기자가 워낙 많아 한곳에서 6개월 이상 머물 수 없다. 할 수 없이 개인 재활병원으로 옮겨 다닌다. 의료비만 눈덩이처럼 분다.
 
  손해보험협회에 따르면, 교통사고 후유(後遺) 환자들은 평균 2~3년씩 입원한다. 사지가 마비되는 척수 장애를 입은 경우, 평균 입원 기간이 32개월이 넘는다는 통계자료도 있다. 반면 미국은 길어야 3개월 정도다. 뇌를 다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경우에도 6개월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의료수준이 외국보다 떨어져서일까?
 
  “나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고 사실 좋아진 분들도 있고, 또한 가족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재활치료를 강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활만 고집하는 사람만 보면 바보스러워요. 그것만 쫓아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럴 시간에 사회에 부딪쳐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스스로 몸으로 부딪쳐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현 재활시스템에 문제는 없나요? 재활치료 비용은 보험이 되나요? 왜 그리 비싼가요?
 
  “현재 재활치료는 환자만 교육하는 방식입니다. 가족도 함께 받는다면 더 효과가 좋을 텐데 아직 우리나라는 재활치료가 걸음마 단계라 좀 더 노력해야 합니다. 보험은 됩니다. 하지만 재활이란 게 단순히 한 가지 치료만 해선 안되고 여러 치료를 함께하다 보니 비용이 많이 나와요. 예를 들어 작업치료, 운동치료, 전기 자극치료, 물리치료, 언어치료, 감각치료 등등 여러 치료를 하루에 몇 가지씩 받다 보니 치료비가 많이 드는 겁니다.”
 
교통사고 발생건수 및 현황.
 
  또 다른 기적
 
  김 실장은 ‘황우석 줄기세포 연구’가 알려지면서 큰 희망을 가졌다. 당장 줄기세포 연구가 재개되진 않겠지만 언젠가는 성공하리라 확신한다. 그는 “장애를 받아들이되 희망을 버려서 안 된다”고 했다.
 
  “재활해서 두 발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은 신경이 살아 있을 때고, 완전마비라면 불가능하다고 해요. 그렇지만 기적과 희망을 버려선 곤란하죠. 지금 저의 기적은 좋은 여자 만나 장가가서 애를 낳는 일입니다. 시험관 수술을 하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것이 지금 꿈꾸는 제 삶의 기적이죠.”
 
  ―잠잘 때 걷는 꿈을 꾸나요?
 
  “지금 생각해 보면 걸어 다니는 제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줄기세포 연구로 기적이 생긴다면 발로 하는 운동은 다 해 보고 싶어요.”
 
  ―장애가 가져다준 ‘선물’이 있나요? 교통사고를 당해 아파하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나요?
 
  “장애를 통해 자신을 버리는 법을 알게 됐어요. 과거의 저는 남의 얘기를 잘 안 듣고 제 얘기만 했었습니다. 이젠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알게 됐지요. 사람들은 흔히 교통사고 장애를 한순간에 찾아온 불행이라 생각하고 많은 것을 포기해 버립니다. 하지만 불행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알게 해 주는 동기라 생각해 보세요. 자신도 소중하고 가족도, 친구도 소중하며 주변 모든 이가 소중하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정리가 되지 않을까요? 가족과 주변을 먼저 생각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10가지를 꼽아 도전해 보세요.”
 
 
  꽃다운 은남씨 이야기
 
이소나 간호사(왼쪽)와 현은남씨.
  ‘만일 당신이, 가슴 아래쪽이 마비된 채 심한 욕창에 시달리며 7년간 누워만 지내 온 교통사고 장애인이라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충북 옥천에 사는 현은남(玄恩南·32)씨는 네 살 무렵 마을 앞 도로에서 큰 사고를 당했다. 평소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동네를 산책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등에 업힌 그녀는 도로 건너편 친구들을 보게 된다. 친구와 놀겠다고 할아버지를 조른다. 할아버지는 길을 건너 그녀를 내려주고 다시 돌아왔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 때문인지 다시 할아버지에게 뛰어갔다. 그 순간 내리막길을 달리던 택시가 은남씨를 덮쳤다. 그녀는 공중 높이 떠올랐다가 땅으로 떨어졌다.
 
  은남씨를 덮친 차는 보유차량이 10대가량밖에 되지 않는 영세한 택시회사의 차였다. 사업 초기라 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보상은커녕 운전기사들이 한 푼 두 푼 모아 가져오는 몇십만 원으로는 병원비를 대기조차 어려웠다. 그녀의 어머니는 “소송을 걸 형편도 못 되고 보상만 잘 받으면 뭐하나” 하는 무기력한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가슴 아래가 마비된 중증 장애로 이 병원 저 병원 옮겨다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몸으로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어요. 학교에 다닌 시간은 입학식을 포함해 4일에 불과했어요. 입학식을 빼면 사흘이지요.”
 
  아버지는 벌목작업, 어머니는 식당일과 농사일, 그리고 여섯이나 되는 자녀, 특히 은남씨 밑으로 세 명이나 되는 어린 동생을 키우는 등 그녀의 부모는 너무나 바빴다. 그녀를 돌봐주는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뿐이었다.
 
  “몇 해 지나 할아버지,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제 장애는 급속도로 악화됐어요. 18세 무렵에는 척추에 심한 손상이 왔고 결국 일어날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는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그녀는 어머니가 언제든지 그녀를 돌볼 수 있도록 식당의 주방과 연결된 작은 방안에 누워 지내야 했다. 심한 욕창 탓에 더욱 안으로 문을 걸어 잠갔다.
 
  그 소식을 옥천보건소 이소나(李少娜) 간호사가 듣고 찾아간 것은 1999년 1월이었다. 이 간호사가 방문을 열었을 때 은남씨는 맨바닥에 뉘어 있었다. “왜 맨바닥에 누워 있느냐”는 간호사의 말에 그녀의 어머니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간호사의 도움으로 욕창을 치료하며 그녀는 넓은 세상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공부를 결심한다. 비록 독학이었지만 똑똑하고 야무진 그녀는 매트리스 위에 누운 채 꾸준히 초등과정을 섭렵, 2002년과 2003년 독학으로 중학 입학과 고입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그러나 장애 후유증이 다시 도져 그렇게나 목말라했던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집과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다가 서울 아산병원에 오래 입원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강한 집념으로 최근 건강을 회복했다.
 
  “다시 몸이 좋아져 공부를 시작했어요. 지난 대입 검정고시에서 과락(科落)을 하는 바람에 주춤한 상태입니다. 1주일에 닷새는 공부하는데, 다른 학생들처럼 저 역시 영어와 수학이 어려워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한다 해도 대학등록금 마련이 솔직히 버겁다. 하지만 마음속으론 대학생이 될 준비를 마친 상태다. 현씨는 “1차 목표는 검정고시 합격이고 여건이 마련되면 대학입시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사지마비 국회의원 정하균
 
사지마비 국회의원 정하균.
  ‘사지마비 국회의원’ 정하균(鄭河均·53·미래희망연대 소속이었으나 7월 14일 합당 의결로 소속이 한나라당으로 바뀜) 의원은 장애를 당한 지 25년이 됐다. 스스로 대소변을 못 가리며 휠체어에 의지하는 삶이지만 누구보다 의정(議政) 활동에 열심이다. 지난해에는 시민단체로부터 ‘베스트 국정감사 의원’에 선정됐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목판에 칼끝으로 새겨넣은 역참로(驛站路)가 그렇듯, 장애인으로 그가 낸 길은 강인하고 겸손하다. 남들은 미친 짓이라 하지만, 장애인의 권익과 ‘이동 자유권’을 보장받으려 10차선 대로(大路)와 지하철 선로(線路)에 기꺼이 드러누웠다. 문경새재의 옛길을 굽이굽이 걷듯 불편한 몸으로 고된 길을 걸었다.
 
  현재 18대 국회의원 중 장애인이 모두 8명이지만 그만큼 ‘중증(重症)’은 없다. 대소변뿐만 아니라 배가 고픈지도, 아픈지도 못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25년을 살아왔다. 그 절반은 절망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정 의원은 다들 열심히 살았던 1980년대, 중소기업에서 무역 업무를 보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남들보다 일찍 결혼해 아들 하나를 얻었다. 하지만 ‘평범한 삶’은 28세 무렵인 1985년 1월 31일까지였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2월 1일, 경기 부천에서 서울로 출근하던 경인 국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에 받힌 것이다. 그의 차는 ‘포니 승용차’. 포니에는 목 받침대가 없었다.
 
  “목뼈가 부러지고 척수가 손상당했어요. 당시엔 119구급차가 없었습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그를 택시에 앉혀 병원으로 후송했어요. 목뼈 부러진 사람을 택시에 앉히는 바람에 2차 손상이 왔던 것이지요. 날카로운 뼛조각이 신경을 긁었습니다. 결국 경추 5번과 6번을 다쳐 사지에 마비가 왔어요. 그 후유증 탓에 지금도 말이 어눌합니다.”
 
  사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움직이는 것은 사치였다. 고대 구로병원 중환자실에서 목에 추를 달고 3개월을 지냈다.
 
  “입원한 지 6개월쯤 됐을 때였어요.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는데, 팔로 노 젓는 기구를 보고 ‘무얼 하는 기구냐’고 물리치료사에게 물었더니 ‘당신은 평생 쓸 일 없으니 몰라도 돼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얼마나 화가 나던지 ‘뭐라고 그랬어! 못 쓰다니’하고 따졌지요. 그러자 ‘아직도 모르세요? 평생 일어설 수 없어요’라는 겁니다. 화가 나 의사한테 따지러 갔더니 가족한테 이미 설명을 했다는 거예요. 죽어 버리려 했지요. 그런데 사지마비자는 죽는 것도 혼자 못해요”
 
 
  좌절의 시기
 
교통사고가 나기 전 정하균 의원과 부인 최효섭씨.
  정 의원처럼 척수 손상 장애인들은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지체 장애인’에 속한다. 장애유형 분류마저 애매해 척수 손상에 대한 역학조사나 의료재활, 사회재활 현황에 대한 통계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보건사회연구원이 1995년 실시한 ‘장애인 실태조사’를 근거로 전국 지체장애인 728만여 명 중 척수 장애인을 약 13.7%인 10만여 명으로 추산한다. 2000년 보건복지가족부 및 한국보건복지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국내 전체 장애인 144만여 명 중 63만여 명이 지체 장애인이며 이 중 마비장애가 28.3%로 보고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하면 척수 장애인은 약 13만명으로 추산된다.
 
  “장애유형이 다양하다 보니 지체 장애인 중 자신이 척수 장애인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척수 장애인 중 55%가 교통사고, 23%는 산업재해, 나머지 20%는 스포츠·레포츠 활동을 하다 사고를 당했어요.”
 
  세계적으로도 척수 장애인 발생률은 인구 100만명당 미국의 경우 매년 30~32명에 달하고, 일본의 경우는 39.4명, 우리나라는 40여 명으로 연간 1600명 이상이 척수 손상을 입는다고 학회에 보고되고 있다.
 
  “처음엔 퇴원해 1년 정도 집에 틀어박혀 지냈어요. 답답하고 많이 힘들었지만 ‘그냥 살아 보지’ 하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어요. 그러다 서울대 임산가공학과를 나온 동생과 강원도 치악산 부근에서 옻나무 가공사업을 시작했어요. 직접 옻칠한 목기나 나전칠기, 장롱을 만들어 팔았는데 마케팅을 잘못해 3년 만에 사업을 말아먹었지요.”
 
  사업에 실패하니 또다시 좌절이 찾아왔다. 속으로 ‘장애만 아니었으면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로부터 1998년까지 9년 가까이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을까만 연구했지요. 몸이 이러니 자해도 할 수 없었어요. 한 달에 10만원으로 살았습니다. 김장을 11월에 하면 이듬해 4~5월까지 김치, 비지찌개 하나로 버텼어요.”
 
  정 의원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한의학에 대한 책을 읽다가 뜸의 효능에 깊이 매료됐다. 뜸을 잘 이용하면 멈춘 기능이 회복될 것 같았다. 한의과 대학교 교재를 구해 읽어 내려갔다.
 
  그 무렵 서울 화곡동 빌라 5층으로 이사했다. ‘지금은 아내에게 업혀 올라가지만 언젠가 걸어서 내려오리라’ 다짐했다. 3개월 뜸을 뜨면 3개월은 쉬는 방식으로 7년 동안 꾸준히 뜸을 떴다. 뜸이란 게 기(氣)의 흐름을 빠르게 하고 죽은 것을 살리고 나쁜 것을 없애는 효능이 있다고 믿었다.
 
  “두 발로 걸어 5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겠다는 꿈은 깨졌지요. 하지만 뜸을 통해 얻은 것도 많아요. 휠체어에 오래 앉아도 거뜬한 것은 그 당시 뜸을 통해 장기가 튼튼해졌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또 무엇보다도 뜸을 통해 인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재활은 극복이 아닌 적응
 
  척수 장애는 한창 활동이 왕성한 시기인 20~30대의 청·장년층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다. 손상의 영구성과 독립성의 상실로 신체적 장애가 심리적 부적응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 척수 손상 재활치료는 간단히 말해 별다른 치료법이 없다고 한다. 재활병원 치료는 한 달이면 모두 끝난다. 사회적응 훈련이나 휠체어 조작법 숙달은 서너 달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환자들은 병원 문을 나서기가 두렵다.
 
  중요한 것은 ‘치료적 재활’이 아니라 ‘심리적 재활’이다. 정 의원의 말이다.
 
  “선진국, 그중에서도 영국은 다치자마자 심리상담가를 환자에게 붙입니다. 또 동료 장애 상담자와 사회복지사 등 6명이 한 환자를 에워쌉니다. 환자의 생활과 심리적 안정을 지속적으로 체크하죠.”
 
  의료적으로 주사를 놓고 약을 처방하는 게 재활치료의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다. 또 아직 ‘남아 있는’ 신체기능을 활성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부부간의 성(性)재활도 극복해야 할 문제다. 다시 그의 말이다.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장애에 적응하는 것, 장애를 인정하며 신체 기능의 99%가 사라지고 단 1%만 남는다 해도, 그 1%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단계, 그것을 극복이라 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적응이란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부터 장애인 운동 시작
 
한 장애인이 지하철 리프트를 이용하고 있다. ‘이동자유권’은 장애인의 중요한 권익 중 하나다.
  1998년, 그는 휠체어를 타고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다가 노래방을 인수했다. 그러나 주변에 신설 노래방이 생기면서 영업이 신통치 않았다. 결국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그 무렵, PC통신을 접하면서 장애인들의 모임이나 토론회 등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장애인 자립생활 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마흔여섯 되던 2004년 지금의 ‘사단법인 한국척수장애인협회’를 설립했다. 어느덧 장애인 운동가가 되어 갔다. 장애인법을 만들기 위해 2004년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 4년 뒤 졸업장을 거머쥐었다.
 
  “매일 협회 사무실로 전동 휠체어를 타고 출근했습니다. 엘리베이터는커녕 리프트조차 없는 수많은 지하철 역사에서 지나가는 시민과 공익요원에게 도움을 청하며 계단을 올랐어요. 지금 제 휴대폰에는 제가 주로 이용하는 지하철역 전화번호와 역무원 이름이 저장돼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줄기세포 연구에 기대를 걸고 있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그는 벅찬 희망에 부풀었다. 그 희망은 여전히 그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황우석 교수가 도의적으로 옳다 그르다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환자 입장에서 보면, 그분이 다시 연구할 길을 터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간 닦아 놓은 노하우가 아깝지 않은가요?”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장애인이 많지만 희귀 난치병 환자도 많아요. 현재 국내에 58만명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삶과 죽음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나라는 103종(種)의 희귀난치병만을 인정하는데, 폭을 넓히고 난치 환자가 1명밖에 없어도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정 의원은 지난해 ‘희귀질환 관리 및 희귀질환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가족의 심리
 
  장애인 가족이 겪는 고통이나 심리적 갈등도 환자 못지않다. 환자가 아프면 가족도 아프다. 환자가 웃으면 철야 간병을 해도 가족은 즐겁다.
 
  소정(가명·10)양은 초등학교 2학년 때인 2008년 11월 경기도 부천의 한 주택가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뇌를 다쳐 신경이 손상됐고 3개월 동안 무의식 상태로 병상에 누워 지내야만 했다.
 
  소정양의 어머니 김혜정(金惠貞·38)씨는 “교통사고 환자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불편은 병원을 옮겨다니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정이가 아직 의식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로 누워 있는데 다른 병원으로 옮겨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말은 큰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지만 빨리 퇴원시키는 것이 병원 실적과 관련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조금 버티다가 다른 병원으로 옮겼고, 한 달 있다가 다시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한숨도 못 자고 뜬 눈으로 3개월 동안 아이가 깨어나길 바랐어요. 밤낮으로 아이의 손과 팔을 주물렀습니다. 아이가 깨어났을 때 엄마가 안 주무르고 있으면 원망할까 봐 하루도 안 쉬었어요. 아이의 귀에다 소곤소곤 쉬지 않고 이야기를 전했고 헤드폰으로 좋은 음악을 들려줬어요.”
 
  소정양 부모는 병원 간이의자에 누워 지내며 밤낮을 지새웠고 결국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의식이 돌아왔다.
 
  “아이가 의식을 찾기까지 마음을 졸였어요. 깨어나도 못 걸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무너졌지요. 그래도 희망이 없었다면 하루도 못 버텼을 거예요.”
 
  현재 소정이는 걷는 것이 불편하다. 오른손, 오른다리 편마비 증상이 남아 있다. 왼손은 떨림 때문에 컵조차 쥘 수 없다. 뇌를 다쳐서인지 한 가지를 일주일 동안 가르쳐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호소한다. 말도 어눌하다. 목소리도 바뀌어 비음처럼 들린다.
 
  1년 반 가까이 병원에서 지내다 얼마 전부터 학교에 갔다. 같은 반 철없는 친구들은 소정이가 어눌하게 말하는 것을 인내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어머니 김씨는 아이를 특수학급에 보낼까 고민하고 있다.
 
  “선생님을 찾아가 속내를 털어놓았더니 ‘먼저 말씀해 주셔서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나 소정이를 특수반에 보내는 것이 옳은지 주저하고 있어요. 아이가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어떤 아이들이 가는 곳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죠. 아이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지금 아이의 꿈은 무엇인가요?
 
  “재활의학자라고 해요. 처음에는 물리치료사가 되겠다고 했다가 바꿨어요. 과거에는 고고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지요. 설사 꿈을 못 이루더라도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었으면, 오빠한테 의지 안 하고 살았으면 해요.”
 
  ―기적이나 믿음보다 장애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던데요.
 
  “의사선생님이 ‘예전의 개똥이를 기억에서 지워라’고 했어요. 희망을 가져야겠지만 아이한테서 예전 모습을 기대한다면 아이나 엄마 모두에게 스트레스라는 것이죠.”
 
 
  “키 156㎝, 몸무게 56㎏인 아내가 180㎝, 78㎏인 저를 업고 다녔어요”
 
가슴 아래로 감각이 없는 한국교통장애인협회 김락환 전 회장.
  장애인 운동 1세대로 통하는 한국교통장애인협회 김락환(金洛煥·59) 전 회장은 하지마비 장애로 만 28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사고 당시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는 어머니가 고향(경북 구미 해평면 낙산리) 앞산 바위에서 100일간 새벽 불공을 드려 낳았을 정도로 ‘귀한 아들’이었다. 위로 누나가 다섯이다. 어머니는 산골학교에 다니던 그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배출한 구미초등학교에 전학을 시킬 정도로 극성이었다. 아쉬운 것도, 겁도 없이 자랐다. 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서울에서 중장비 기사로 일했다. 남들보다 먼저 직장을 잡았고 26세에 장가를 들어 두 아이를 뒀다.
 
  1982년 8월 7일 고향인 구미에 잠시 들렀다가 사고가 났다. 그날 밤 11시30분쯤 모기향을 사러 오토바이를 타고 집을 나섰다. 마을 앞 컴컴한 급커브 길에서 사람을 피하려다 3m 언덕 아래로 추락, 흉추 5번과 6번을 크게 다쳤다. 사고 당시 키가 180cm, 몸무게가 78kg인 거구를 누구도 둘러업을 수 없었다. 지나가던 택시가 그를 태워 구미의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니 의사가 “곧 죽게 되니 집에 가라”고 했다. 부랴부랴 경북대병원 응급실에 도착할 무렵, 의식이 돌아왔다.
 
  넉 달 치료를 받는 데 4500만원이 들었다. 1980년대에 그 돈은 집 몇 채 값이다. 6번에 걸친 대수술(흉추 교환수술, 욕창으로 인한 피부 이식수술, 근육이동수술 2회, 척추 꼬리뼈 절단수술, 항문 절개수술)을 받았고 결국 돈이 없어 퇴원했다.
 
  “젖꼭지 밑으로 감각이 전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두 손은 쓸 수 있었지만, 새끼손가락은 지금도 감각이 없어요. 퇴원 무렵 병원에서 ‘앞으로 3년밖에 못 산다’고 했어요. 키 156㎝, 몸무게 56㎏인 아내가 180㎝, 78㎏인 저를 업고 다녔어요.”
 
  퇴원을 하니 갈 곳이 없었다. 사회적 소외감 때문에 5번이나 자살소동을 일으켰다.
 
  “이 몸으로 어딜 가서 독약을 살 수도 없었어요. 지나가는 택시에 뛰어든 적도 있었습니다. 급정거한 택시기사 말이 ‘다음 달 개인면허 받는데, 죽는 것도 골라서 죽지 왜 남의 신세 조지려 하느냐’고 하더군요. 혓바닥을 깨물기도 했어요. 한번 억세게 깨물었더니 피가 팍 터지는데 두 번째는 아파서 못 깨물겠더라고요. ‘마라치온’이란 살충제를 막걸리에 타서 마신 적도 있습니다.”
 
  한 모금 마시니 두 모금째는 안 넘어가더란다. 입 안이 헐어 6개월간 죽을 고생 했다. 굶어 죽으려고 보름 동안 곡기를 끊은 적도 있다.
 
 
  私費 털어 만든 구미시청 휠체어 경사로(傾斜路)
 
  직장과 집이 있던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고향인 구미에 정착했다. 자립하려고 부모님 도움도 받지 않았다. 당시 다섯 살 난 딸과 갓 돌을 지난 아들이 있었다. 아내는 ‘마누라 잘못 얻어 서방이 사고를 당했다’는 시선을 견뎌야 했다. 당시 보리쌀 두 포대와 쌀 한 포대, 거기다 월 7800원을 받는 국민 기초수급자로 2년간 살았다.
 
  한번은 세 들어 살던 집 주인이 방을 빼라고 했다. 할 수 없이 공단 화학공장 옆에다 전세 350만원 하는 집을 구했다. 이삿짐을 풀며 병원용 침대를 옮기는데 집주인이 “내 집에 병신을 못 들인다”고 막아섰다. 눈물을 삼켰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전기도, 수도도 없는 집에 세를 구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휠체어를 끌고 아내, 아이들과 함께 식당에 밥 먹으러 갔다가 ‘소금 벼락’을 맞은 적도 있다. “재수 없다”는 말과 함께.
 
  언젠가 도로교통법 위반하여 벌금 7만원을 안 냈다고 경찰이 아내를 잡아갔다. 그를 반신불수로 만든 오토바이 사고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너무 속이 상해 경찰서로 찾아가 휠체어에서 떼어낸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항의한 일도 있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장애인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저 세상에 약자로 순응하기보다 세상과 부딪치며 저항하는 법을 택했다. 언젠가 상식 밖의 세금이 나와 구미시청을 찾은 일이 있다. 청사 입구에 휠체어 경사로가 없어 청사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너무 화가 나 “300만원을 낼 테니 경사로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구미시청 경사로는 그렇게 해서 사비(私費)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비장한 각오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라면, 장애인도 인간이라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느 것 하나 양보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오기로 세상을 산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는 ‘장애인 당사자 단체’(現 한국지체장애인협회의 전신)를 꾸리며 장애인 운동에 앞장섰다. 1995년에는 이의근(李義根) 경북도지사에게 부탁해 구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경북장애인기능경기대회를 열었다. 지금은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로 전환됐다.
 
  “솔직히 사람 대접받는 데 쫓아다니고 싶습니다. 학창시절, 가장 목소리가 컸고 인기가 많아서인지, 졸업 후 동기회 회장이 되는 데 이견이 없었습니다. 다만 제 장애를 빼면 말입니다. 여러 친구가 저를 회장후보로 추천했지요. 그런데 막상 개표를 하자, 한 표도 받지 못했습니다. 저를 추천했던 친구가 여러 명이었는데 아무도 절 찍지 않은 겁니다. 그때의 아픔을 잊을 수 없어요. 그러나 장애인 운동을 하며 좋은 사회 친구를 많이 사귀었어요.”
 
1988년 9월 30일 경북 구미 원남동에 위치한 지체장애자 자립복지회관 착공식 모습.
 
  아내는 천사였다
 
  다행히 교통사고 초기에 겪은 경제적 곤궁은 건설업으로 성공한 부모님의 유산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사업을 시작할 무렵 ‘주택 200만호 건설’ 붐이 일었고 IMF가 터지기 전 건설업을 정리해 재산을 건졌다.
 
  1986년에는 양송이를 재배하던 슬레이트 건물 두 동을 빌려 옷의 실밥 떼어내는 일을 시작으로 장애인 60여 명이 일할 수 있는 ‘장애인 자립공장’을 경북에서 처음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건물이 신설 도로에 편입되는 바람에 뜯길 처지가 됐다. 구미 원평성당 신부님과 함께 “장애인 자립회관을 세워 달라”며 궐기대회를 열었다.
 
  결국 구미시가 원남동 하천부지 땅을 내놓았다. 그는 사비 1억6000만원을 내놓아 건평 515.7㎡(156평) 2층짜리 건물을 지어 구미시에 기부채납했다. 1989년에 세운 건물이 지금의 ‘경북 장애인 재활자립 복지회관’이 되었다.
 
  “2010년 1월 현재 28명의 임직원 중 18명이 장애인입니다. 그들 중 16명이 중증 장애인이에요. 장애인이 본래 가정이나 학교, 직장으로 돌아가려면 가정·학교·직장생활 등 여러 장벽을 제거해야 합니다. 장애를 갖고 취업하기 위해 직업재활훈련의 기회도 제공하고 사회적응을 위한 다양한 사회심리재활 프로그램도 제공해야 해요.”
 
  그는 1997년 경북에서 처음으로 장애인 복지공장(일선사)을 세웠고 쓰레기 종량제 규격봉투공장을 운영해 장애인의 재활에 앞장섰다.
 
  “아내는 제가 자살할까 봐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아내가 천사였어요. 하지만 다치고 난 뒤 지금까지 저는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의지하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요. 대신 제 양심을 믿습니다. 사고 이후 제 곁을 지켜준 아내의 정성이 세상을 향해 한번 해보자는 동기가 되었답니다.”⊙
 
▣ 2014년 국내 최초 교통재활 전문병원이 건립된다
 
가톨릭대 부천 성모병원 박주현 주임교수.
  교통사고 후유(後遺)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국내 최초의 교통사고 재활 전문병원이 2014년 경기도 양평에 문을 연다.
 
  국토해양부는 자동차 사고 후유 장애인의 재활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 추진 중인 ‘교통재활전문병원’의 위탁 운영자로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병원장 홍영선)을 선정했다고 지난 6월 30일 밝혔다. 가톨릭대 병원은 서울대병원, 연세의료원 등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고 한다.
 
  정진석(鄭鎭奭) 추기경은 “사랑과 봉사, 생명존중의 정신을 토대로 교통사고 후유 장애인들이 보다 빨리 정상생활로 복귀하는 데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재활전문병원을 운영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정부, 서울성모병원이 합심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총 사업비 1630억원을 들여 경기도 양평 도곡리 소재 90,643㎡ 부지에 300병상 규모로 건립된다. 오는 2011년 상반기까지 재활전문병원 설계를 마친 뒤 곧바로 착공에 들어가 2014년 상반기에 문을 연다는 계획이다.
 
  이번 교통재활병원 설립 작업을 주도한 가톨릭대 부천 성모병원 재활의학과 박주현(朴珠賢·51) 주임교수는 “국내 최고 수준의 교통재활 진료기관이 될 것”이라며 “성체 줄기세포 치료와 유비쿼터스 진료 등 차세대 진료를 계획하고 있다”고 포부를 밝혔다.
 
  재활치료는 뇌손상, 척수손상, 근골격 질환 및 절단, 소아재활 등 4가지 분야에 집중한다. 기존 재활치료와 차별화된 ‘진료 표준지침’을 통해 하루 8시간씩 2~4주 간격으로 집중치료와 기능평가를 병행, 적극적인 피드백을 주고받는 ‘집중재활치료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특히 ‘퇴원평가위원회’를 통해 후유장애 환자가 가급적 석 달(12주) 이상 병원에 머물지 않도록 할 방침이다. 박 교수는 “척수 손상 환자의 경우 우리나라는 거의 15개월 이상 입원치료를 받지만, 미국은 두 달 이상 병원에 머물지 않는다”며 “뇌손상 환자도 한국은 2년 이상, 미국은 한국의 1/4도 안된다. 환자가 재활병원을 전전하지 않게끔 집중 치료로 입원기간을 단축하되 중증 장애를 가진 분을 위한 직업재활, 가정간호와 연계토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병원 퇴원평가위원회에서 환자에게 직업재활이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병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직업재활을 받게 됩니다. 또 전국 8개 가톨릭 병원과의 협력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복귀까지 환자의 회복경과를 추적하고, 중증 환자에게 장기요양시설과 가정간호 서비스도 제공할 계획입니다.”
 
  또 교통사고로 겪게 되는 충격과 심리적 스트레스를 다독이는 ‘전인치료(사회심리재활)’에 중점을 둘 방침이다. 박 교수는 “환자와 보호자가 겪는 내외적 문제, 심리적 정서적 갈등 및 소외감, 무력감에 대해 정서적 지지활동을 통해 치료 효과를 증대시킬 생각”이라고 했다.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일 때 사회복귀가 시작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정상인의 삶을 살다 장애인으로 전락해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은 쉽게 설명이 안되지요. 환자들이 사회복귀 과정을 거치며 필요한 것이 ‘사회심리재활’입니다. 후유 장애인의 17%가 우울증을 겪고, 우울증에 빠질 가능성이 남자환자는 33%, 여자환자는 44%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는 이도 많아요. 이는 심리적 회복에 초점을 둔 재활치료가 필요하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그러나 300병상 규모의 교통재활병원만으로 급증하는 재활치료의 수요를 충족시킬지는 의문이다. 또 재활치료의 경우 수가가 낮기 때문에 현재의 건강보험 수가체계로는 재활병원 운영의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장 재활적 접근이 필요한 척수 손상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 건립도 필요하다. 스위스의 패러플레직 센터(Swiss Paraplegic Center), 영국의 미들랜드 척수센터(Midlands Centre For Spinal Injuries)나 국립 스톡멘디빌레 척수센터(National Spinal Injuries Centre, Stoke Mandeville) 등이 대표적인 재활센터다. 이들 센터는 입원 초기부터 ‘지역사회 코디네이터’가 개입해 퇴원 후 환자들의 사회복귀를 적극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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