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벡텔에 파견된 원자력 기술자들, 밤새워 정리한 자료를 LA총영사관 외교행낭에 넣어 한국으로
⊙ 韓電의 ‘표준원전 설계사업 추진안(案)’… 대만式 부분 표준화 아닌 전면 표준화라는 혁명적 조치
…매년 1기씩 6기를 반복건설해 기술습득
⊙ 金泳三 정부, APR-1400 원전의 연구개발을 위해 G7 과제로 선정하고 2000억원 투자
⊙ 원전설계핵심코드, 원자로 냉각재 펌프(CSBR), 원전 제어계측장치(MMIS) 등 원전 핵심기술
100% 자립 달성
취재지원 : 朴熙錫 月刊朝鮮 인턴기자
⊙ 韓電의 ‘표준원전 설계사업 추진안(案)’… 대만式 부분 표준화 아닌 전면 표준화라는 혁명적 조치
…매년 1기씩 6기를 반복건설해 기술습득
⊙ 金泳三 정부, APR-1400 원전의 연구개발을 위해 G7 과제로 선정하고 2000억원 투자
⊙ 원전설계핵심코드, 원자로 냉각재 펌프(CSBR), 원전 제어계측장치(MMIS) 등 원전 핵심기술
100% 자립 달성
취재지원 : 朴熙錫 月刊朝鮮 인턴기자

- 신고리 3·4호기 공사 현장. UAE에 수출하는 APR-1400은 현재 건설 중인 신고리 3ㆍ4호기(2013ㆍ2014년 완공 예정)에서 처음 상용화된다.
출장지는 로스앤젤레스 근교 노워크시(市). 출장목적은 세계 최고수준의 원전 설계회사 벡텔(Bechtel)에서 원전(原電) 설계 엔지니어링 기술을 공동설계 참여방식(OJP·On the Job Participation)을 통해 배우고 오라는 것이었다. OJP는 한기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원자력 기술이전 방식으로, 실제 설계업무를 벡텔과 수행하면서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1971년 착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원전인 고리 1호기가 1978년 준공된 이후, 1983년 월성 1호기와 고리 2호기가 차례로 상업운전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원자력 시대를 열고 있었다. 미국 웨스팅하우스사의 고리 1호기와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의 월성 1호기는 모두 턴키(설계시공 일괄입찰) 도입방식으로 들여오는 바람에 국내 기술진이 기술전수를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한국원자력연구소(KAERI·현 한국원자력연구원)는 1975년 원자력 발전소 설계 엔지니어링을 국산화할 목적으로 ‘한국원자력기술(KNE)’을 설립했다. 한기의 전신으로 원자력연구소에서 한국전력으로 주인이 바뀐 KNE는 잇단 원전 도입과정에서 원전 설계 엔지니어링 관련 기술을 축적, 원자력 기술의 국산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1978년 무렵 정부는 고리 3·4호기 건설을 계기로 원전기술 자립 쪽으로 서서히 방향을 선회했다. 한국전력은 고리 3·4호기 원전 건설을 넌 턴키(Non-Turnkey) 방식으로 입찰해 원자로 가압기 냉각재 펌프 등 1차계통 설계를 웨스팅하우스, 터빈·발전기·급수펌프 등 2차계통(BOP) 설계를 벡텔에 맡겼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1차계통 설계는 자동차 엔진을 설계하는 것이고, 2차계통 설계는 동력전달장치·전기장치·구조물 등을 설계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계약조건으로 웨스팅하우스와 벡텔의 기술 전수를 내걸었다. 그러나 원자력연구소는 그해 내부사정으로 웨스팅하우스로 가지 않았고, 한기만 24명의 연구원을 캘리포니아주 노워크로 보냈던 것이다.
허영석 전 한기 전무는 “당시 미국으로 건너간 기술자들은 원자력연구소 소속으로 원전 엔지니어링 분야는 무지(無知)한 상태였다”고 했다. 허 전무의 말이다.
한국원자력 기술 축적의 ‘일등공신’
![]() |
| 신재인 전 국가핵융합연구소장. |
미국 여행이 흔치 않던 시절, 벡텔사가 있는 노워크에 도착한 한기 기술자들은 인근 애너하임에 숙소를 마련했다. 허영석 전 전무는 “현지에 도착하니 막막하기만 했다”면서 “벡텔사의 방대한 원전 설계 자료들을 보자 신천지(新天地)를 만난 것처럼 행복했지만, 한편으로 어떻게 하면 우리 것으로 만들까를 고민했다”고 했다.
그들은 원전 설계를 위해 2~3년간 벡텔의 과거 원전 건설 자료들을 보고, 밤낮없이 자료들을 머리에 담았고 일부는 메모를 통해 정리해 나갔다.
허 전무는 “벡텔사는 마치 빌딩 전체가 하나의 서고(書庫) 같았다”면서 “본사(한기)와의 정보공유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트에 정리한 자료들을 본국으로 보내기 위해 아파트에 들여놓은 고속복사기로 카피했다”고 했다.
한국과 미국의 항공편이 뜸했던 때라 그들은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의 협조를 받아 외교행낭을 통해 한기로 신속하게 복사한 메모들을 보냈다. 허 전무는 “벡텔은 우리 측의 움직임을 눈치챘겠지만, 장기적 마케팅 전략 차원에서 파트너로 생각해 아량을 베푼 것 같다”고 했다.
“초기 복사기가 한국 원자력 기술 축적에 일등공신 역할을 한 셈이죠. 그때 노력이 결실을 거둬 기술자립을 이뤘고, 향후 4세대 원전 설계를 위한 인력을 양성하게 됩니다. UAE 원전을 수주하면서 향후 60년 동안 UAE의 맨파워를 육성하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그동안 배우던 ‘학생’에서 가르치는 ‘선생’으로 입장이 바뀐 것이니 감개무량할 수밖에요.”
그는 “한전 김영준(金榮俊) 사장은 원전 국산화에 큰 기여를 하신 분”이라면서 “벡텔로 기술을 배우러 갔던 대만 기술자들이 현지의 석사학위를 취득하느라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고, ‘기술도 배우면서 돈도 벌자’(Learning by doing)를 캐치프레이즈로 걸고 단순한 현장 훈련(OJT)이 아닌 실제 설계사업에 참여하는 방식(OJP)을 최초로 만들었다”고 했다.
영광 3·4호기, ‘기술자립’ 계약과 ‘사업계약’ 따로 맺어
![]() |
| 두산중공업이 제작한 한국형 표준원전 OPR-1000 원자로. KEDO 사업을 위해 북한에 제공키로 했던 모델이다. |
허영석 전 전무는 “고리 3·4호기 때 웨스팅하우스, 벡텔과 보조를 맞췄던 한전은 기술자료를 이용하는 데 한계를 절감하고, 기술이전료를 내고 한국 기술자들이 기술자료를 마음껏 볼 수 있도록 별도 계약을 했다”고 했다.
영광 3·4호기를 발주한 한전은 1차계통 엔지니어링을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이하 CE), 2차계통(BOP) 엔지니어링을 서전 앤드 런디(이하 S&L)에 맡겼다. 한전은 두 회사에 기술 전수를 조건으로 걸었다.
1987년 5월, 한전은 영광 3·4호기 공동설계를 위해 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을 CE사(社)가 있는 코네티컷주 윈저에 파견했다. 한기의 직원들은 S&L사가 있는 시카고로 보냈다.
허영석 전 전무는 “S&L은 원자력·기계·전기·배관·계측·건축·공정 등 각 설계분야 책임자(EGS·engineering group supervisor)들이 1대1로 우리를 카운터파트로 삼아 전수받도록 했다”면서 “벡텔에서는 자료를 정리해 복사해 온 것처럼 S&L에서는 ‘사람 카피’를 하기로 했다”고 했다. 이를 위해 한기는 벡텔에서 기술을 익힌 인원들을 다시 S&L에 대거 투입(投入)했다고 한다.
“사수격(格)인 와인홀드(Weinhold)는 인간적으로 친해지니까 제가 업무파악을 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도와주었습니다. 첫 미팅에서 와인홀드가 ‘방사선 차폐 계산서를 만들라’고 해 무슨 소리인 줄 몰라 ‘OK’했다가 보름 후에 묻기에 ‘들은 적이 없다’고 했더니 황당해 하더군요. 그 다음부터 그들은 중요한 내용은 쪽지에 써 주었습니다.”
허 전무는 “S&L에 간 우리 팀은 기술전수와 별개로 영광 3·4호기 건설을 위한 엔지니어링 일도 별도로 해야 했다”면서 “벡텔사는 일이 끝난 뒤 전문 분야별로 별도로 교육을 시켜주었으나 S&L은 실무와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애로가 많았다”고 했다.
그는 “영광 3·4호기 기술자립뿐만 아니라 영광 3·4호기 준공일을 동시에 맞춰야 하는 입장이어서 애로가 많았다”면서 “두 가지 일을 연인원 70~80명이 해냈다”고 했다.
S&L과 한기의 사무실 이름은 ‘워룸’
![]() |
| 1979년 3월 28일 미국 스리마일섬 원전 2호기 용융사고로 미국 원자력 산업은 된서리를 맞고 졸지에 원자력 선두대열에서 탈락했다. 단 한 명의 피폭자도 발생하지 않았지만 발콕 앤드 윌콕스사는 이로 인해 한 건의 원전공사도 수주하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다. |
웨스팅하우스와 벡텔은 고리 1·2호기 등 우리의 원자력 전문가들과 장기간 호흡을 맞춰 왔으나, 영광 3·4호기 원전건립을 위한 기술전수에 소극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한전은 계약자를 CE로 교체해 버렸던 것이다.
그는 “기술자립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던 우리나라는 기술 전수를 하겠다고 나선 CE, S&L 등 소위 ‘2위 업체’와 ‘짝짓기’를 한 것”이라며 “자동차도 초기 모델링이 중요하듯 새로 구성된 외국 파트너인 CE·S&L과의 처음 6개월이 중요했다”고 했다.
“중매로 만나 엉겁결에 결혼한 신혼부부가 성격차이로 매일 싸우듯, 엔지니어링 방식을 놓고 매일 싸웠습니다. 오죽하면 S&L 사람들이 S&L사 빌딩의 2개층을 사용했던 영광 3·4호기 설계팀을 눈만 뜨면 싸운다고 해서 ‘워룸(war room)’이라고 불렀겠습니까. 사업을 총괄하는 한전의 박영택 프로젝트매니저(PM)는 그럴 때마다 술자리를 마련해 이질적 요소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해 주었고, S&L도 축구경기를 열어 팀워크를 다지도록 했습니다.”
벡텔이 만드는 원전 설계 방식과 S&L이 설계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1986년 12월, 한전은 영광 3·4호기 건설을 위해 원자력연구소 인력을 코네티컷주 윈저의 CE로 보냈다. 이병령(李炳?) 박사(전 유성구청장), 박성호 처장(기계설계), 한규성 처장(유체역학), 하영준 처장(핵설계), 고 한재복 처장(전기계측) 등 4명이 도미(渡美)했다.
당시 한필순(韓弼淳·76) 원자력연구소장은 ‘필(必) 핵증기 공급계통 설계기술 자립’이란 액자를 써 이병령 박사에게 전달하며 “기술자립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몸을 던지라”고 말하며 만세삼창을 불렀다고 한다.
당시 설계품질 보증체계 책임자로 미국에 갔던 조광희(趙光熙) 한기 원자로설계개발단 연구원은 “현지에서 우리 기술자들이 공동설계 작업에 참여하려면 설계기술자 자격을 부여받아야 하기 때문에 설계 코드 교육, 원자로 설계 부문 교육을 먼저 받았다”면서 “원자로 등과 같은 압력용기를 설계하는 기준인 미국기계학회(ASME) 코드, 전기 관련 기술 코드인 ‘아이이트리플’(IEEE)코드도 사전에 숙지(熟知)해야 했다”고 했다.
CE, 막상 자료요청하자 ‘찜찜’
원자로 기계설계에 참여했던 박성호(朴聖浩·58) 처장은 “미국 원자력계는 애리조나주 팔로버드 지역에 120만kW급 원전 공급 후 일이 없는 상태여서 영광 3·4호기를 위해 사전 스터디를 해 놓고 있었다”면서 “그런데 기계설계로 참여한 우리 측 인원은 총 6명에 불과해 CE 측 기계설계팀 38명을 상대로 기술을 익히는 것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고리 3·4호기 때 나름 설계공부를 했으나, 막상 현장에서 130만kW급 ‘시스템 80’ 원자로를 보니 우리가 초보수준이란 것을 금방 깨달았다”면서 “우리가 세부적인 설계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큰 그림을 그리는 데는 부족했다”고 했다.
―큰 그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나.
“기계설계, 원자로, 증기발생기 등의 구조설계도 있지만, 이것들을 한데 묶어 계통(系統)을 만드는 일, 기기(器機) 간의 연관관계 등과 같은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큰 그림이다. 우리는 이 부분이 부족했다. 내가 맡은 기계설계도 상세설계는 자신이 있었으나, 흐름을 만드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그는 “원자로 설계 기술을 배우려면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기관이 새로운 모델을 설계할 때 참여해야 한다”면서 “모델을 설계하려면 그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비밀자료인 ‘소스코드(source code)’를 사용할 때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기술전수에 대해 CE 측은 협조적이었나.
“CE도 처음엔 기술전수를 약속했지만 우리 측의 자료요청이 쇄도하자 거부감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한두 달이 지나면서 서로 친해지니까 그들이 호의적으로 변했다. 영광 3·4호기는 이른바 ‘공동설계(joint system design)’이다. CE는 우리와 기술전수 계약을 했지만, 기술습득 95%라는 목표를 책임져 주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열심히 해서 습득할 도리밖에 없었다.”
―2년 후 돌아올 때, 기술습득은 목표치의 어느 정도까지 달성했나.
“원자로의 핵심설계 기술인 NSSSD(핵증기 발생장치 계통설계)를 비롯해 많은 부분을 배우고 왔지만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귀국해 우리의 기술자립 프로그램에 따라 반복설계를 통해 다시 ‘복습’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울진 3·4호기에 한국표준형원전(KSNP)을 만들 때 95%의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규성(韓奎成·57) 처장은 유체역학 설계를 담당했다. 유체역학은 ‘보일러’에 해당하는 원자로의 열(熱)이 증기를 일으키면, 증기로 터빈을 돌리고, 다시 터빈과 연결된 발전기가 돌아 전기를 생산할 수 있도록 냉각수와 증기의 역학관계를 다루는 분야다.
‘절반씩 나눠서 일하자’고 CE 측에 요구
![]() |
| 2009년 12월 27일 UAE로부터 원전 수출계약 서명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 ‘워룸(war room)’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한전 직원들이 서로 얼싸안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고 있다. |
그는 “그러나 미국이 1979년 3월 28일 스리마일(TMI) 원전사고가 나면서 원전시장이 직격탄을 맞자 CE가 한국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라며 “얼마만큼의 연료가 들어가야 얼마만큼의 증기가 생산되고, 이것이 전기로 나오는가 하는 것을 각종 컴퓨터 코드(기준)로 디자인해 놓는 작업이었다”고 했다.
“컴퓨터 코드는 사고시 안전여부를 시뮬레이션으로 해 보는 것이다. 즉 온도가 몇 도 이상 올라가면 노심(爐心)이 녹아내리니까 이것을 막기 위해 어떻게 설계를 하라는, 다시 말하면 안전해석 기준이다.”
계약서에 따르면, 설계 책임자인 CE는 모든 책임을 지고, 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은 CE 측에 일을 절반씩 나누어 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일을 배우려면 설명만 들어서는 되지 않잖아요? CE가 처음에는 주는 일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너희는 핵심적인 일만 하고, 우리는 뒤치다꺼리 일만 하면 어떻게 기술습득이 되겠느냐’고 항의했어요. 그 다음부터 무조건 반반씩 일을 나눠 한 다음, CE가 우리가 한 일을 체크하고 가르쳐주기로 했습니다. CE의 속내는 영광 3·4호기 프로젝트 데드라인을 맞추려고 우리 연구원들에게 가르쳐줄 시간이 빡빡했던 겁니다.”
그는 “설계를 할 때, 우리 측에 줘야 하는 문서들이 계약서에 지정돼 있었지만, 몇 달이 지나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해서 애를 먹었다”면서 “우리가 생각 외로 어려운 문제도 쉽사리 해내니까 CE직원들도 상당히 놀라는 것 같았다”고 했다.
“CE의 각 부서회의에 우리 측 대표자를 보내 기술적인 문제점이 나오면 토론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배운 것들은 설계 결과물로 다 나오게 돼 있죠. 그것을 근거로 한국형표준원전인 울진 3·4호기를 짓는 데 밑거름이 된 ‘카피 플랜트(영광 3·4호기)’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겁니다. 단, 문서 복사에 대한 것은 서로 협조하기로 했기 때문에 일을 해나가는 데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한국형 표준원전 개척자들
![]() |
| 김세종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장. |
1978년 고리에 1호 원전을 가동하고 나서 만 31년 동안 1건의 사고도 내지 않았다. 발전소 운용효율을 나타내는 지표인 ‘원전이용률(1년 전체 가운데 실제 가동시간 비율)’을 보면 우리나라는 93.3%로 세계 평균보다 14%포인트 높다.
우리나라는 원자력 발전량에서 세계 5위로 원전 설계와 건설 등 기술면에서도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주도국으로 올라섰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프랑스로부터 기술을 도입하던 한국이 UAE 원전 수주(受注)에서 프랑스를 너끈히 제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UAE 원전 수주 경쟁에서 드러났듯 APR-1400 노형(爐型)을 생산하는 한국은 프랑스, 일본과 더불어 3세대 원자로 개발에 성공한 국가다.
우리나라는 1986년부터 영광 3·4호기 원자로 계통설계를 CE사와 공동수행해 발전로 설계분야의 경험과 기술자료를 확보했다. 이때의 공동설계와 시운전 경험을 토대로 1995년 한국표준형원전(KSNP·OPR-1000으로 불림)인 100만kW급 가압경수형 원전을 독자 설계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어 2002년에는 OPR-1000보다 안전성·경제성이 향상된 한국 신형원전(APR-1400) 기술을 개발했다.
최초의 한국형 표준원전은 1998년과 1999년 차례로 완공된 울진 3·4호기로 기술도입 모델이 된 미국의 원전보다 안전성, 신뢰성을 크게 개선해 한국의 대표적 원전으로 자리를 굳혔다.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북한 신포에 건설 중이던 것도 바로 한국형 표준원전이었다.
![]() |
| 강창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명예교수. |
1984년 정부가 원전표준화를 할 때, 김세종 원장은 동력자원부 전력국장, 심창생 전 한전 전무는 한전 원전건설처장, 신재인 소장은 한기 원자력사업단장, 강창순 교수는 한전자문위원으로 정부와 한전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수행했다.
심창생 전 전무는 “고리 1호기를 준공하고 나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그때 이미 기술독립을 생각했었다”면서 “당시 농수산부 장관을 하던 김영준(金榮俊) 사장이 부임하면서 기술독립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고 했다.
부분 표준화냐 전면 표준화냐
![]() |
| ‘원자력발전의 경제성 제고방안’이란 1984년 7월 28일자 보고서. 동력자원부가 기술자립과 한국형 표준원전을 건설하기 위해 한국전력기술의 초안을 토대로 마련했다. |
문건은 정부가 1984년 10월 20일 원자력발전소 표준화계획을 발표한 것이었다. 그는 “1985년 정부는 고리 3·4호기가 준공되는 것에 맞춰 한국형 표준원전을 건설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동력자원부는 원전의 경제성을 높이는 방안으로 ‘건설기술 자립’, ‘원전 표준화’를 내세웠다. ‘건설기술 자립’을 위해 1990년대 초반까지 설계용역·기자재 생산 90%, 건설시공·핵연료생산(성형가공) 100%까지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목표를 세웠다.
발전소 건설 계약방식을 국내업체를 주계약자로 하되, 설계용역은 한기, 기자재공급은 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이 맡는 것으로 했다.
특히 이 보고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최대한 기술이전을 받는 쪽으로 외자(外資)를 도입하고, 표준설계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최소한 6기를 동일설계를 통한 반복생산을 해 기술력을 높인다는 것이다.
신재인 박사는 “매년 1기씩 원전을 건설한다는 것은 원자력 기술자들이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는 물량”이라면서 “천문학적 비용 때문에 정부의 강력한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정책”이라고 했다.
보고서는 ‘원전표준화’를 위한 혁명적 내용을 담고 있다. 원전표준화는 기존 원전을 건설하고 운용한 경험을 집대성해 한국형 표준원전을 설계하고, 꼭 같은 원전을 반복해 건설함으로써 경제성과 기술숙련도를 향상시킨다는 개념이다.
신재인 박사는 “한국형 표준원전은 원전 전체를 표준화하는 것으로 돼 있다”면서 “핵증기공급설비(NSSS), 터빈발전기를 포함한 발전소 전 계통과 발전설비 건물에 대한 설계 및 배치를 범위로 정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설계 모형 원전으로 울진 3·4호기(원전 11, 12호기), 원전 13호기부터 최소한 6기를 표준설계를 적용해 제작한다고 했다”면서 “1976년 대만이 통제실·안전설비 등 부분 표준화를 시도하다 실패한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金泳三 정부, APR-1400 연구개발비로 2000억원 지원
김 전 원장은 “신재인 한기 원자력사업단장이 올린 ‘표준원전 설계사업 계획’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강력하게 밀었고, 기술자립 수준을 95%로 결정해 추진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기술자립 95%를 달성한 것은 영광 3·4호기가 끝난 1995년이었다”고 했다.
김세종 전 원장은 “영광 3·4호기 입찰을 할 때 기술자립, 표준화를 외쳤고, 그것을 계획으로 만든 것”이라며 “한전 산하기관에 전파하고 지금부터 각자 맡은 역할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 역할 분담이 지금까지 이어져 UAE 입찰 때도 그 조직들이 컨소시엄을 이뤄 해냈던 것”이라고 했다.
심창생 전 한전 전무는 “고리 1호기를 지을 때 가압경수로형(PWR)으로 선택했고, 고리 3·4호기 지을 때 한전의 관리능력을 자립하는 것으로 정했으며, 영광 3·4호기 때 한국형표준원전을 위한 기술전수 조건으로 갔다”면서 “한전은 우리의 기술자립을 전부 발전소 건설과 직결시켰다”고 했다.
심 전 전무는 “영광 3·4호기를 통해 기술자립 95%를 달성하고, 우리의 순수기술로 우리의 원자로를 개발하자고 한 것이 한국형차세대원자로 KNGR(APR-1400으로 개칭)”이라며 “처음으로 순수하게 우리 힘으로 연구개발을 거쳐 만든 것”이라고 했다.
강창순 교수의 말이다. “김영삼 정부하 과학기술부는 G7국가의 과학기술을 확보할 목적으로 ‘G7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김영삼 정부 요로(要路)를 통해 G7프로젝트에 신형원자로 설계가 원천기반기술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로비’를 했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그것을 받아들여 당시 APR-1400을 개발하는 데 연구개발비로 2000억원을 투입해 주었습니다.”
심창생 전 한전 전무는 “APR-1400은 당초 한전이 개발비용을 대고 과기부 산하 규제기관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이 인허가를 담당했던 것에서 탈피, 정부에서 예산을 대고 규제기관과 함께 개발해 개발시기를 엄청나게 앞당긴 초유의 일”이라며 “APR-1400은 1995년 개발을 시작, 정부의 디자인 인증(DC)을 일사천리로 받고, 현재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USNRC)에 인증을 신청 중”이라고 했다. 심 전 전무의 말이다.
신재인 박사는 원자력연구소장이던 1993년, 국회의원들을 설득해 엔지니어링 실험시설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 박사는 “원자로 연구를 할 때 실증(實證)을 위해 원자로만 한 크기의 시설을 만들어 할 수 없으니까, 절반 크기 정도로 줄여 실험을 한다”며 “그 시설을 아틀라스(ATLAS)라고 했는데, KINS가 인정하는 APR-1400의 안전성 검증은 그곳에서 했다”고 했다.
‘전력그룹협력회’로 친목 다져
![]() |
|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사장 시절부터 원전과 인연이 깊다. 2009년 12월 27일 원전 수주를 위해 UAE를 방문 중인 이명박 대통령이 아부다비에서 할리파 빈 자이드 알 나하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
“우리나라의 기술자립을 두 가지 단계로 봐야 합니다. 영광 3·4호기를 건설하면서 기술자립을 선언하고, 정부에서 전체 산업체에 역할분담을 시켰습니다. 정부는 영광 3·4호기 원전 발주를 할 때, 기술 전수조건을 내걸어 미국의 업체들로부터 기술을 받았고, 사람들을 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국형표준원전이 완성됐고, 그것을 OPR-1000으로 이름을 바꿔 6기를 짓습니다.” 계속해서 그의 말이 이어진다.
“다음 2단계는 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자며 김영삼 정부 들어서면서 한국형 차세대원전(KNGR)을 G7 과제에 포함시켰습니다. APR-1400이 탄생한 겁니다. 영광 3·4호기 건설 때 기술자립과 원전 표준화를 들고 나왔습니다. 표준화에 대한 개념이나 아우트라인은 신재인 박사가 연구를 통해 보고서를 내주었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원자력연구소, 한전, 한기가 서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습니다. 한전은 한기를 하인 취급했고, 연구소와 한전은 서로 이질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하나로 얽어맨 것이 ‘전력그룹협력회’였어요.”
김 전 원장은 “한 달에 두 차례씩 만나 친목을 다지면서 자신이 맡고 있는 일들을 설명하게 했다”면서 “경영진은 경영진끼리, 실무진은 워크숍이라는 형식으로 만났다”고 했다. 전력그룹협력회를 주관했던 김 전 원장은 1993년 5월 전력그룹 워크숍 30회를 맞이해 격려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원자력기술을 자립하겠다고 덤벼든 것이 1984년의 일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 유명한 벡텔 사건에 휘말려 국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원전 5·6호기 설계감리용역을 맡은 벡텔사의 용역비가 관리목표 금액을 초과했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사건은 잘 수습되었습니다만, 그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기술을 가져야 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게 됐습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원전의 경제성 제고방안이었습니다.
‘원전’이 5공 비리 조사 대상이 돼
발전소의 설계를 표준화하여 같은 설계의 발전소를 반복 건설하고, 발전소 건설공사 관리방식을 개선해 건설공사비를 줄이고, 발전소의 이용률을 높여 운전유지비를 절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당시의 격려사를 읽었다. “1988년 국정감사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하마터면 우리나라의 원전사업이 실종돼 버릴 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워크숍을 통해 다진 우리의 신념과 의지와 단합된 힘으로 우리의 원전사업을 지켰습니다.”
김세종 원장이 말하는 1988년 국정감사의 내막은 이렇다. 1987년 한국은 6·10민주화운동을 통한 민주화 과정을 겪고, 이듬해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해 4월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의석 획득에 실패함으로써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이 만들어졌다.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전두환 정권의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5공비리 청문회를 열었다. 원자력발전 부문도 5공비리의 소재가 되고 만 것이다. 미국이 스리마일섬 사고로 원전 건설을 중단했을 때 CE는 애리조나주 팔로버드에 120만kW급 원전 공사를 하고 있었다.
국회의원들은 “CE는 120만kW급 원전을 생산하는 회사인데, 왜 한국은 이 회사가 건설한 적도 없는 100만kW급 원자로를 건설하려 하느냐”며 “안전성과 기술력이 떨어지는 원전을 왜 ‘짜깁기’해서 도입하느냐”고 따졌다.
이종훈(李宗勳·75) 당시 한전사장(한전 이사회장)은 “우리는 CE와 100만kW급 원전을 처음으로 짓는 데 참여했기 때문에 그 덕분에 원자로 설계의 원천기술인 ‘소스코드’를 배울 수 있었다”며 “우리로서는 완벽하게 원자로 설계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국회의 공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국회에서는 CE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주고 영광 3·4호기를 수주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CE가 전두환 정권에 정치자금을 주었다는 근거로 영광 3·4호기를 계약할 때 한전사장이 전 대통령의 측근인 박정기(朴正基·74)씨라는 것이 거론됐다.
鄭相明 당시 검사, “200명 진술이 일치하는 수사는 처음”
![]() |
| 이종훈 전 한전사장. |
당시 훗날 검찰총장을 지낸 정상명(鄭相明) 서울지검 검사의 지휘로 검찰까지 조사에 나섰으나 아무런 혐의점을 못 찾고 사건은 종결됐다. 심창생 전 한전 전무의 말이다.
“현대건설 사장으로 원전 건설에 줄곳 참여한 이명박 대통령도 국감장에 서야 했습니다. 실상은 웨스팅하우스와 벡텔이 기술이전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기술자립을 위해 2위업체로 간 것 아니겠어요?
200명이 넘는 실무자가 서울 중구 서소문에 있는 검찰청사에 출두해서 한 달간 조사를 받았습니다. 정상명 검사는 ‘200여 명을 불러다 조사를 하면 누군가 한두 사람은 진실을 불게 돼 있는데, 200명의 말이 한결같았다’면서 ‘이런 수사는 처음’이라고 사적인 자리에서 말하더군요.”
김세종 전 원장은 “웨스팅하우스는 우리가 영광 3·4호기를 CE로 결정하고 나자, 내게 찾아와 ‘처녀총각이 약혼했는데 고질병이 걸렸다면 어떡할 거냐’고 묻더라”며 “(100만kW급 AP-1000을 가진) 웨스팅하우스는 기술전수를 소홀히 하다 한국이 등을 돌려 CE로 낙찰이 되자 마타도어를 청와대, 국회 등지에 퍼트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당시 CE의 140만kW급 원자로를 축소해 영광 3·4호기에 100만kW급으로 넣는 것에 대해 원자력 전문가들도 논의가 많았다고 한다.
신재인 박사는 “이종훈 전 한전사장은 140만kW급을 원했고, 원자력연구소 이창건(李昌健) 박사 등은 당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권장하던 60만kW급의 중소형(中小型) 사이즈의 원전을 지어야 안전하다고 했었다”면서 “당시 한국중공업과 원전 현장의 목소리는 기존의 100만kW급으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고 말했다. 신 박사의 말이다.
“140만kW급을 원하는 목소리가 있어 140만kW급 두 기를 한꺼번에 셧다운(원자로의 비상폐쇄)시켜 가며 안정성을 조사하니, 갑자기 블랙아웃(갑자기 전력이 나가 캄캄해지는 현상)이 되더라고요. 그 결과를 이종훈 사장께 ‘140만kW급은 너무 큰 것 같다’고 보고했고 결국 100만kW급으로 가게 된 겁니다.
즉 CE가 개발한 것은 ‘에쿠스’ 엔진인데, 우리 영광 3·4호기에 들어간 것은 더 사이즈가 작은 ‘쏘나타’ 엔진인 셈입니다. CE가 에쿠스 엔진을 준다고 하니까 국산화를 위해 크기를 줄여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때 그런 선택이 없었다면 한국의 원전 기술은 영원히 자립하지 못했을 겁니다.”
趙喜澈 의원, 金大中 총재 원전 반대 당론 채택 저지
![]() |
| 조희철 전 평민당 의원. |
1986년 5월 12일, 정부는 원자력법을 개정, 방사성폐기물을 한국에너지연구소(전두환 대통령 시절의 원자력연구소 명칭)에 맡겼다. 이에 따라 1990년대 들어 야당인 평민당을 중심으로 격렬한 반(反)원전 투쟁이 벌어진다.
원전 개발정책에 대해 평민당 김대중(金大中) 총재는 1989년까지 묵시적으로 반대입장에 서 있었고, 이 노선을 지지하는 추종자들은 원전 건설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특히 야당은 영광 원전 3·4호기를 건설하려는 CE와의 계약을 무효화하기 위해 대(對)정부 공세를 강화하고, 본계약을 5공비리로 지목하고 국정조사와 검찰수사까지 의뢰했다.
김대중 총재는 13대 국회에서 상공위에 원자력 정책을 철저히 규명하기 위해 조희철(曺喜澈·81) 의원을 반핵의 선봉으로 배치했다. 조희철 전 의원은 “1년여 조사를 해 보니 전력수요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대안은 없어 원자력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김대중 총재가 당무회의에서 원전 건설 반대를 당론(黨論)으로 정하려 의사봉을 두드리려는 것을 빼앗은 적도 있었고, 당내에서는 ‘한전의 앞잡이, 배신자’로 불릴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평민당 원내총무이던 김원기(金元基) 전 국회의장에게 떠밀리다시피 상임위(委)를 바꿔야 했다. “일본 사회당 간부인 후쿠마(福間)는 저처럼 원전반대를 애국(愛國)인 줄 알고 반대하다 찬성으로 돌아선 사람입니다. 그가 지은 <원자력은 악마의 앞잡이인가?>라는 책에 감명을 받아 번역까지 했습니다.”
그는 꾸준히 김대중 총재를 설득했고 홍기훈 의원도 같은 정책대안을 냈다. 그러던 중 1989년 11월 28일 김대중 총재가 목포를 방문했다. 지역주민들은 영광원전 건설에 대한 김 총재의 입장을 물었다. 김 총재는 “자원 빈국(貧國)인 우리나라는 원전을 건설할 수밖에 없으나 주민과 충분한 홍보와 협의를 통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종훈 전 한전사장은 “원자력계는 김대중 총재의 ‘목포선언’이라 하고 있다”면서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원전 건설이 순조롭게 될 수 있었던 것도, 국제 에너지가격 폭등에도 전력요금을 인상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목포선언’의 효과가 컸다”고 말했다.
조희철 전 의원은 “김대중 총재도 처음에는 나의 행동을 돌출행동으로 보고 언짢게 생각했으나, 미국을 방문해 국무성 에너지담당 차관보와 담판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격려를 해 주었다”면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시민단체들은 반원전을 반핵(反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국가가 原電의 안전을 책임
강창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번 UAE원전 수주는 우리의 원전기술 향상과 때를 맞춰 여러 가지 조건이 무르익은 결과”라며 “원전 건설기업이 아닌 정부가 안전교육을 보장한 것은 원자력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이번 UAE 원전 건설에서도 원전설계핵심코드, 원자로 냉각재 펌프(CSBR), 원전 제어계측장치(MMIS) 등 3대 핵심기술을 독자개발하지 못하고 모두 미국 웨스팅하우스로부터 빌려쓰고 있다고 합니다.
심창생 전 전무: “한국수력원자력 간부들조차도 공개석상에서 ‘5% 기술자립이 안됐다’고 합디다. 글로벌 시대에 100% 국산화를 할 필요가 뭐가 있나요? 우리가 국산화를 못한 것과 기술자립을 못한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냉각펌프를 생산하는 독일 KSV의 제품을 웨스팅하우스를 통해 공급받습니다. 이번에 웨스팅하우스를 파트너로 넣었기 때문에 선정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3대 핵심 기술은 우리가 처음부터 기술자립 품목에서 제외했습니다. 예컨대 냉각재 펌프 등은 원전을 수출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개발비만 많이 들지 실제로 경제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거론되는 3대 장치들에 대한 개발은 이미 다 끝났습니다.”
―원전설계 핵심코드를 우리가 개발할 수 있습니까.
신재인 박사:“할 수 있습니다. 코드라는 것은 핵연료를 계산하는 계산코드(기준), 안전성을 분석하는 코드 등이 있습니다. 실험시설을 통해 우리가 개발한 코드(기준)가 맞다고 증명을 받으면 한국원자력안전연구원(KINS)에서 인증을 해 줍니다. APR-1400의 다음단계가 APR+(160만kW급)인데, 조만간 APR+가 KINS에 설계 인증을 받습니다. 우리가 자체 개발한 원전코드로 설계 인증을 받는 겁니다.”
강창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전이 UAE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KEDO에서 OPR-1000을 입찰했던 경험이 컸다”면서 “KEDO가 중단돼 우리에게 손해만 끼치고 있지만 UAE에 좋은 약(藥)이 됐다”고 했다.
김세종 전 KINS 원장은 “북한의 안전규제 요원 교육을 위해 대전 원자력안전연구원에 30여 명을 불러 사택을 지어주고 숙식을 시켜가며 교육을 시킨 적이 있다”면서 “이번 UAE가 높이 평가한 부분이 바로 ‘안전규제에 대한 요원교육 및 체제정립’이란 항목이었다”고 했다.
실제 UAE 입찰과정에서 KEDO 입찰 당시와 유사한 질문이 쏟아져 신속하게 답변한 반면, 프랑스의 아레바는 답변 연기를 요청하는 등 부족한 구석을 노출시켰다는 것이다.
강창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중국이나 인도사람들은 우리가 스스로 짧은 시간에 세계 원자력 강대국으로 급성장한 것에 대해 궁금해 하고 부러워한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