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안중근의 직계후손은 미국에, 동생 정근의 직계는 남한과 미국에, 공근의 직계는 북한과 파나마에 흩어져 있다. 남과 북, 해외로 흩어진 그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은 안중근의 유해 발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 장남 분도는 日帝 밀정에 의해 독살당해
⊙ 차남 준생은 日帝의 연출에 의해 1939년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잘못 사죄
⊙ 동생 정근·공근은 독립운동 투신, 공근은 2차 대전 중 충칭(重慶)에서 의문死
⊙ 조카딸 안미생은 金九의 며느리 돼, 金九 암살 후 미국으로 건너가 소식 끊겨
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
⊙ 1959년 경북 청도 출생.
⊙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 문학박사.
⊙ <월간 말> 편집위원, 한국사연구회 <역사와 현실> 편집위원, 참여연대 운영위원,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자문위원, 美하버드대 객원교수 역임.
⊙ 現 창원대 사학과 교수.
⊙ 저서 : <백범일지 (주해)>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ㆍ김구 시대의 정치사>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 <백범어록>.
⊙ 장남 분도는 日帝 밀정에 의해 독살당해
⊙ 차남 준생은 日帝의 연출에 의해 1939년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잘못 사죄
⊙ 동생 정근·공근은 독립운동 투신, 공근은 2차 대전 중 충칭(重慶)에서 의문死
⊙ 조카딸 안미생은 金九의 며느리 돼, 金九 암살 후 미국으로 건너가 소식 끊겨
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
⊙ 1959년 경북 청도 출생.
⊙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 문학박사.
⊙ <월간 말> 편집위원, 한국사연구회 <역사와 현실> 편집위원, 참여연대 운영위원,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 자문위원, 美하버드대 객원교수 역임.
⊙ 現 창원대 사학과 교수.
⊙ 저서 : <백범일지 (주해)>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이승만ㆍ김구 시대의 정치사>
<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 <백범어록>.

- 안중근의 직계유족. 오른쪽부터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 손자 웅호, 아들 준생, 손녀 연호와 선호, 안준생의 부인 정옥녀.
과연, 의거 100주년이 되는 올해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성대한 기념식이 있었고, 뮤지컬 <영웅>이 성황리에 공연되고 있으며, 10월 26일 의거일을 전후하여 많은 행사가 있었다.
안중근의 의거는 그의 가문 후예들에게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독립·통일·평화운동에 매진케 하는 동력이 됐다. 그러나 동시에 안중근의 의거는 그의 가문에 인내하기 힘든 日帝(일제)의 감시와 탄압, 회유와 협박의 시련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가문은 많은 독립유공자와 더불어 한반도의 남북은 물론, 중국과 러시아, 멀리는 미국과 파나마로 흩어졌다. 안중근의 빛이 萬邦(만방)에 떨친 만큼 그의 가문은 세계로 離散(이산)됐던 것이다. 그의 일족이 유민처럼 떠돈 이 공간의 크기는 안중근의 빛이 지닌 위력의 크기와 대체로 비례한다고 생각된다.
안중근 일족의 흔적 중에서 독립운동의 경력은 상당 부분 발굴되어 건국훈장 서훈자가 유달리 많은 ‘名門(명문)’으로 칭송함에도 불구하고, 그 裏面(이면)에서 보통 이하의 삶을 감내해야 했던 유족들의 피해와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거의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안중근의 빛이 100년이나 이어지는 동안에도 일족의 상당수가 여전히 망각지대의 어둠 속에 남아 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상태로 안중근과 그의 가문을 기념하면 할수록, 안중근과 그의 가문이 받은 피해와 트라우마는 더 깊은 망각지대로 사라질 수 있다.
[독립운동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안중근은 일찍이 16세의 나이로 아버지 安泰勳(안태훈)과 같이 동학군에 맞서고 난 이후, 중요한 家事(가사)와 國事(국사)를 아버지와 더불어 도모했다. 즉 그는 안태훈의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동지적 후계자와 비슷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난 이후 안중근 가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다. 여사는 의거 후 뤼순(旅順)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고 했으며, 안중근은 어머니가 보낸 한복을 입고 순국했다. <대한매일신보>(1910년 1월 29일)에서 “그 어머니에 그 아들(是母是子)”이라는 기사를 실을 정도로 조마리아 여사에 대한 존경의 평판은 안중근의 순국 이전부터 있어 왔다.
광복 직후 기자가 안중근의 조카딸 安美生(안미생)에게 “(안중근이) 어디서 그처럼 끓어오르는 애국심과 놀라운 희생 정신을 받으셨을까요?”라고 묻자, 그녀는 즉각 “우리 할머니가 조마리아신데 女中君子(여중군자)라는 평을 들었던 분으로서 그 사상이 퍽 훌륭하셨답니다. 그 교육의 영향이 크리라고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조마리아에 대한 이런 평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 진영에 두루 알려진 것이었다.
안중근의 의거와 순국 이후 가문과 독립운동가들이 북만주, 연해주, 상하이(上海)를 전전할 때, 조마리아는 독립운동 진영의 상징적 어머니였으며, 안중근 가문이 독립운동의 전선에 계속 나서게 하는 정신적 지주였다.
1927년 7월 안중근의 모친 조마리아가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나자, <조선일보> <중외일보>(1927년 7월 19일) 등 국내의 신문들도 그 소식을 전하며 애도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조마리아 여사의 묘를 찾지 않고 있다.
[안중근의 유일한 여동생 안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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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 교회묘지에 있는 안중근의 누이동생 안성녀(누시아)의 묘소. |
지난 10월 17일 필자가 찾아갔을 때 묘지는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었지만, 2평이나 될까 좁은 묘지에는 절을 올릴 공간마저 없었다.
이 비의 주인공은 안중근 의사의 유일한 여동생 安姓女(안성녀, 누시아)다. 그녀의 묘가 국내에 있는 것은 시댁 權(권)씨 후손 극소수만 알고 있을 뿐 안중근 가문의 유족 대부분이나 국가보훈처에서도 알지 못했다. <국제신문>이 발굴한 안 여사의 외아들 權憲(권헌·1980년 사망)의 제적등본과 안 여사 후손들의 편지와 증언 등을 기초로 안성녀의 일생을 대강이나마 추적할 수 있다.
안성녀에 대해 가장 많은 증언을 남긴 사람은 여성 항일애국지사로 동지들과 함께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한 바 있는 며느리 吳恒善(오항선·1910~ 2006) 여사다. 그녀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소속 독립군 兪昌德(유창덕)과 결혼했으나, 남편 유창덕이 일본군에게 사살되고 난 이후 1935년 안성녀의 아들 권헌과 재혼했다. 오항선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으며, 2006년 사망했다.
그간 안중근 가문에 밝은 이들이나 인근 유족들에게도 안중근 의사에게 定根(정근)·恭根(공근)의 두 남동생 아래 누이동생이 하나 있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며느리 오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안 여사는 1954년 4월 8일 향년 74세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것을 역산하면 안 여사의 출생연도는 1881년이 되는데, 이것은 “안 의사보다 두 살 어리다”는 평소 안 여사의 발언과도 일치한다. 즉 안성녀는 그간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안중근 의사의 바로 다음, 즉 정근·공근의 누님인 것이다.
안성녀는 부친 안태훈이 사망하는 1905년 이전 청계동 시절에 결혼했다. 남편은 權承福(권승복)인데, 안 여사가 “같은 고을(황해도 신천)에서 진사 집안끼리 자연스럽게 혼담이 오가 시집갔다”고 말했다고 한다. 1910년 오빠 안중근이 순국하고 난 뒤, 안성녀 집안은 어머니 조마리아와 동생 정근·공근 등 친정 일가와 같이 망명했다.
일본 경찰에 끌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
망명 이후 10년 정도 남편과 같이 살았으나, 1920년 남편 권승복이 사망했고, 그 이후 아들 권헌과 어렵게 살았다. 아들 권헌은 인쇄소와 정미소를 운영하며 독립군에 군량미를 조달했으며, 1935년 오항선과 결혼했다.
오항선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군인과 경찰들이 안성녀 집안을 ‘잠시도 편히 놔두질 않아’ 탄압을 피해 안성녀는 ‘이사를 밥 먹듯이 했으며’, 그 와중에도 몰래 독립운동을 하여 “시어머니(안성녀)가 일본놈들에게 잡혀 9일 동안 감금돼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장시(牧丹江市)에서 살았던 안 여사의 외손녀 이정순(2003년 사망)이 안 여사 후손들에게 쓴 편지에는 안성녀 여사가 “일본 경찰에 두 번이나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결코 독립군들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으며, 安椿生(안춘생·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의 아들) 前(전) 독립기념관장도 “안성녀 여사가 재봉틀 10여 대를 갖춰놓고 독립군복을 제작했다”는 증언을 남긴 바 있다.
일제 시기 중국의 동북3성을 전전하던 안성녀 일가는 1945년 광복 당시 허베이성(河北省)의 省都(성도) 스자좡(石家庄)에 있었다. 여기서 안 여사는 며느리 오항선 등 가족과 같이 귀국했으며, 광복 직후 李承晩(이승만) 金九(김구) 등의 도움으로 서울 을지로 6가의 敵産(적산)가옥, 청파동, 쌍림동 등을 전전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피란하여, 부산시장이 마련해 준 영도 봉래동의 두 칸짜리 가옥에서 생활하다 다시 영도 신선동 2가 2번지 산비탈로 거처를 옮겼고, 1954년 이곳에서 사망했다.
안성녀의 후손들은 독립운동과 집안 관련 자료와 사진을 대부분 유실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여러 번 이사하는 와중에 서류를 많이 유실했으며, 부산 시절 불이나 남은 서류마저 소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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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 안준생의 영정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정옥녀(안준생 부인), 안성녀, 이정서(안정근의 부인), 여류비행사 권기옥. 영정 오른쪽으로 안웅호(안준생의 아들), 안춘생, 손원일. |
“살기가 빠듯해 묘지 관리 못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성녀는 귀중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그것은 1952년 11월 16일 사망한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장례식 사진이다. 사진 가운데 영정이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며, 이를 중심으로 왼쪽에 검은 상복의 부인 정옥녀, 그 옆에 안중근의 누이동생 안성녀(원 안 인물), 안중근의 동생 정근의 부인 이정서 여사, 한국 최초의 여성조종사 權基玉(권기옥) 여사 등 여인들이 서 있다.
영정 오른쪽으로는 남자들이 도열했는데, 안준생의 아들 웅호, 안준생의 6촌 동생 춘생, 초대 해군참모총장 孫元一(손원일) 제독이 순서대로 서 있으며, 맨 오른쪽이 안 여사의 외아들 권헌이다.
안중근의 유일한 손자인 안웅호는 지난 1991년 귀국해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고모할머니(안성녀)를 통해 자주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1954년 사망 당시 안 여사의 묘는 부산 영도구 청학동에 있었지만, 1974년 묘지 자리에 부산체육고등학교가 들어서는 바람에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 교회묘지로 이장됐다. 그녀가 사망할 당시는 국가보훈사업이 시작되기도 전이었으며, 1974년 移葬(이장) 당시 유족들은 부산지방보훈청에 관리를 요구했지만, “독립유공자 敍勳(서훈)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안 여사의 아들 권헌은 “대가를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떠들지 마라”는 유언을 남기고 1980년 사망했다. 그녀의 長孫(장손) 권혁우는 “살기가 빠듯해 묘지 관리를 제대로 못해 왔다”고 죄송스러워 했다.
권혁우는 2005년 <국제신문>의 특종으로 안성녀 여사의 묘가 세상에 알려지고 난 이후 국가보훈처 부산시 등에서 관심을 표한 적이 있지만, 근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별 변화가 없다면서 허탈해 했다. 안성녀 여사의 독립운동가 서훈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묘를 이장할 경우 또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하고 있었다.
안중근의 동생 정근은 상하이에서 사망했지만 아직 묘를 확인하지 못했고, 막내 동생 공근은 1939년 실종되어 유해도 없다. 안중근의 형제자매 중 국내에 있는 유일한 안성녀의 삶과 죽음은 건국 60여 년이 지나도록 방치되어 있다. 묘의 소재가 알려진 지도 이미 5년이 되어가지만, 상황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청산리전투 참가한 동생 안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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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정러시아 장교복 차림의 안정근. |
이듬해 형이 순국한 지 한 달여 지나 정근·공근 형제는 가족을 이끌고 북간도와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이미 망명해 있던 형 안중근의 직계가족과 합류했다.
이후 안정근은 아우 공근과 함께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투사로, 한편으로는 안중근 가족의 가장으로서, 또한 자신의 지병인 뇌병과의 투병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그는 연해주 시절 제정러시아 장교로 종군했고, 상하이에서 대한적십자회 부회장을 했으며, 임시정부의 북간도 특파원으로 청산리전투에도 참여했다. 뇌병이 발병하여 산둥성(山東省) 웨이하이(威海)로 가서 요양하기도 했다.
그의 딸 안미생에 의하면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안정근은 중대사명을 띠고 조선에 잠입하려고 베이징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게 됐다고 한다. 광복 직후 그는 잠입하려던 조선이 아니라 상하이로 돌아갔다. 환갑이 된 그는 상하이로 가서 대한적십자회의 후신인 한국적십자회 회장과 한국구제총회 회장을 겸임하며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왜 광복 이후 귀국하지 않고 상하이로 간 것일까. 그 이유는 안중근 가문의 가장으로서 책임과 역할이 가장 큰 동기라 생각된다. 하얼빈에서 형이 순국하고, 충칭(重慶)에서 동생 공근이 행방불명되어 3형제 중 그만 홀로 남았다.
그는 당시까지 안중근의 유언대로 형의 잘린 손가락을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독립이 되면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형의 또 다른 유언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으며, 충칭에서 실종된 동생 공근의 생사 여부와 유해도 확인해야 할 것이다. 또 상하이에서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형수(안중근의 아내)와 조카들(안중근의 아들 준생과 딸 현생)도 챙겨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그가 맡고 있던 한국적십자회나 한국구제총회의 회장직은 이러한 가문의 임무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형과 아우의 유해를 가져오지 못한 채 자신의 유해마저 중국에 묻어야 했다. 1949년 3월 17일, 그는 뇌병이 재발하여 65세의 나이로 망명 39년, 이사 50번의 고단한 삶을 상하이에서 마쳤다. 당시 그의 죽음은 중국 신문에 “한국 혁명 원로 안정근 어제 逝去(서거)”라고 보도됐다.
장례식 직후 상하이 萬國公墓(만국공묘, 현 宋慶齡陵園·송경령능원)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선 부인 이정서 여사와 딸 안미생의 사진이 유족에게 남아 있다.
안정근에게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지만, 우리는 그의 묘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모른다. 그가 서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49년 5월 27일 상하이가 중공군에 함락됐고, 그 후 우리는 그의 묘를 확인한 바 없기 때문이다.
[金九의 큰며느리 된 조카딸 안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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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3월 상하이 만국공묘에 있는 안정근의 묘 앞에서 오열하는 부인 이정서 여사와 딸 미생(오른쪽). |
안미생(수산나)은 중국 서남연합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김구의 맏아들 金仁(김인)과 결혼했다. 두 사람의 혼담이 오가자 백범은 “훌륭한 집안의 자제이니 물어볼 것도 없다”며 안미생을 흔쾌히 며느리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로써 김구와 안중근의 가문은 사돈지간이 됐다. 그러나 그의 남편 김인은 광복 5개월 전 충칭에서 폐병으로 사망했다.
광복 이후 안미생은 임정 요인 제1진 15명에 포함된 유일한 여성인사로, 1945년 11월 23일 시아버지 김구와 함께 꿈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 강산을 다시 밟게 됐다. 즉 그녀는 임정요인 중에서, 또 안중근 가문에서 제일 먼저 귀국하여 딸 효자와 함께 경교장에 거주했다. 김구는 아들 김인이 약 한 첩 제대로 못 써보고 목숨을 잃은 데 대해 가슴 아파하고 미안해했으며, 남편 없는 며느리 안미생과 손녀 효자를 특별히 아꼈다고 한다.
안미생은 1947년 9월 초, 부산으로 가서 홍콩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갔다. 그녀가 홍콩을 경유할 당시 아버지 안정근이 상하이에 있었지만, 이들이 만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녀가 망명하다시피 미국으로 향한 이유는 더욱 불투명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남편 없는 나라에 살기 싫다”고 했다지만, 이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당파싸움’이라는 정치적 동기도 거론되지만, 6세의 어린 딸 효자(1942년생)를 두고 미국으로 간 이유는 앞으로 조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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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교장의 백범 김구와 손녀 효자. 오른쪽은 김구의 차남 김신(전 교통부 장관). |
김구는 일찍 아비를 잃은 손녀 효자를 끔찍이 아꼈으며, 이름도 손수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김구가 효자를 안고 경교장 앞마당에서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은 아마 백범의 사진 중에서 가장 밝은 표정일 것이다. 효자는 엄마가 미국으로 간 뒤에도 홀로 경교장에 남아, 9세 때 할아버지 김구의 암살과 장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한 후 엄마가 있는 미국으로 갔다.
안미생의 남편 김인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받았고, 그의 묘소는 현재 대전현충원으로 이전됐다. 그러나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부인 안미생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그의 딸 효자가 아직 살아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김인의 직계가족 가운데 김인의 연금을 수령하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정근 가문과 관련하여 안정근의 유해를 찾아오는 것, 안미생의 묘를 확인하는 것, 효자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 등이 첫 번째 할 일이다. 더욱이 金揚(김양) 현 보훈처장(백범 김구의 손자)에게 안미생은 큰어머니이며, 김효자는 사촌 누님이다.
[막내 안공근, 金九 측근으로 활동하다 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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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을 하다가 충칭에서 의문사한 안공근. |
그는 상하이에서 김구를 “형님”이라 부를 정도로 최측근이 됐으며, 李奉昌(이봉창)과 尹奉吉(윤봉길)이 모두 안공근의 집에서 선서식을 가질 정도로 두 의거에 핵심 역할을 했다. 1932년 김구와 臨政(임정)요인들이 상하이를 탈출하여 자싱(嘉興)과 난징(南京)으로 전전할 때에도 그는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1933년 5월 난징에서 김구가 장제스(蔣介石) 장군을 면담할 때 그도 동행했으며, 이 회담의 성과로 중국 낙양에 중앙군관학교 분교를 설립하는 일,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는 데 적극 관여했다.
1937년 7월 中日(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이 중국 내륙 깊숙이 미치자, 김구와 임시정부의 대식구는 난징을 떠나 창사(長沙) 광저우(廣州)를 거쳐 충칭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 김구는 안공근을 상하이로 파견하여 자기 가족과 더불어 안중근 의사의 부인인 “큰형수를 기어이 모셔오라”고 거듭 부탁했다. 그러나 공근은 자기 집에 기거하던 김구의 어머니 郭樂園(곽낙원)과 자기 가족만 데리고 왔을 뿐, 큰형수 가족을 데려오지 못했다. 김구는 안공근을 강하게 질책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神主(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란하면서 국가를 위해 殺身成仁(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倭寇(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족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 후 안공근은 형님 안중근의 유족을 구출하기 위해 다시 상하이에 잠입했으나, 안중근 의사의 직계유족 구출에는 실패했다. 이것은 이후 안중근 가문에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주게 됐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안공근은 김구와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으며, 1939년 충칭에서 돌연 실종됐다. 1995년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지만,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최근 중국의 한 신문이 ‘안공근 실종사건의 전모’를 비교적 자세하게 보도했다. 이에 의하면 뤄젠베이(羅劍北)라는 중국인이 일본간첩과 접선하던 중 안공근에게 발각되자 안공근을 살해, 시신을 충칭의 한 폐광 갱도에 유기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안공근의 유해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안중근의 큰 아들 분도, 일본 밀정에게 독살당해]
아버지 안태훈이 돌아가신 이후, 안중근은 가문의 가장으로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사에 나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의거 직전 자신의 직계가족을 해외로 망명시키는 것과, 의거 이후 친족들에게 유언과 유서를 남기는 것이었다.
안중근은 의거 전 동료에게 자신의 가족을 국외로 불러오도록 부탁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부인과 자식들은 하얼빈 의거 전에 조선을 떠났고, 안중근의 의거가 단행된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은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안중근이 처음으로 해외, 즉 중국 상하이 산둥(山東)반도를 둘러보고 돌아오는 1905년, 그의 장남 분도(芬道·베네딕토, 본명 祐生·우생)가 출생했다.
안중근은 1910년 순국 당시 여섯 살이었던 장남이 신부가 되길 희망했다. 그는 ‘어머님께 드린 유서’에서 “분도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라고 당부했고, 아내에게 남긴 유서에도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라고 당부했다.
안중근 일가는 하얼빈에서 연해주로 돌아가 크라스키노에 잠시 머문 다음, 1911년 4월 안창호의 주선과 李甲(이갑)의 지원으로 북만주 헤이룽장성 목릉현(穆陵縣)에 정착했다. 안중근 가족에 대한 일제의 추적은 이 마을에까지 이르렀다. 분도는 1911년 여름 목릉(穆陵) 강가에서 일제 밀정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남 분도의 죽음으로 안중근의 아들은 둘째 俊生(준생·마태오)만 남았다. 안준생의 묘지명에 의하면, 1907년 봄 부친 안중근이 해외 망명을 위해 집을 나갈 때 그는 胎中(태중) 6개월로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평생 아버지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1910년 3월 아버지가 32세로 순국할 때 그는 32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안중근 가문의 연해주와 북만주 망명 이후, 그는 치타소학교(1910~11), 목릉현 한인소학교(1911~12), 니콜리스크공립소학교(1912), 한인대동소학교(1914) 등을 전전했다.
1919년 10월 안중근 일가는 상하이 프랑스 租界地(조계지)인 南永吉里(남영길리)로 이주했다. 13세가 된 안준생이 청소년기를 보낸 곳도 이곳이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대학을 다녔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안준생에게 비극이 찾아온 것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이었다. 그해 11월 상하이는 국민당 군대가 철수하고 일본군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섬(孤島)’이 됐다. 안중근의 직계유족들은 일본 천지가 되어가는 상하이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안준생은 1938년 鄭玉女(정옥녀)와 결혼했다. 비극은 바로 결혼 다음해인 1939년에 찾아왔다. 1931년 만주사변을 전후하여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조선의 경성(서울)에서는 ‘만주 개척의 선구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업이 추진됐다. 1932년 10월 26일 이토의 忌日(기일)에 맞춰 남산 동쪽 기슭 장충단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博文寺(박문사)가 낙성됐다.
[이토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죄를 사과한 안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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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10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안중근 아들 안준생(왼쪽)이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 이토 분기치(오른쪽 첫 번째 앞줄)를 만나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고 말했다. 뒤에 선 사람은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마자와 다쓰오(중앙)와 아이바 기요시 촉탁(오른쪽)이다. |
그는 10월 7일 ‘상하이조선인민선시찰단’에 포함되어 경성을 방문,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과 면회했다. 15일에는 박문사를 방문해 이토의 靈前(영전)에 향을 피우고, 주지가 준비한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고 追善供養(추선공양)을 거행했으며,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경성일보> 1939년 10월 16일자).
다음날인 16일 안준생은 총독부 외사과장의 알선으로 조선호텔에서 이토의 차남인 이토 분기치와 만났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안준생과 이토 분기치가 같이 박문사를 찾아가 이토 히로부미의 영전에서 화해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안준생은 분기치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립니다”라고 했고, 분기치는 “나의 아버지도, 너의 아버지도, 지금은 부처가 되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사과의 말이 필요없다”고 했다(<오사카매일신문> 조선판 1939년 10월 19일).
이런 연출극은 조선과 일본의 신문에 연일 대서특필됐다. 경성의 신문들은 “실로 조선통치의 위대한 變轉史(변전사)이고, 內鮮一體(내선일체)도 여기에서 완전히 정신적·사상적으로 하나가 된 것” 또는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 “遺兒(유아) 눈물의 진심, 이제 이토공의 영령도 미소지을 것이다”, “역사는 구른다! 30년 전 하얼빈 역두의 악몽을 초월하여” 등으로 크게 보도했다(<경성일보> 1939년 10월 16일, 10월 19일, <조선일보> 1939년 10월 17일).
일본의 신문들도 “원수를 넘어 따뜻한 악수, 하얼빈 역에서의 비극은 지금 먼 꿈, 30년 후 이토 공과 安(안)의 遺兒(유아) 대면” 등으로 보도했다.
이 화해극(?)은 이토 분기치와 안준생이 각각 일본과 중국에서 우연히 같은 시기에 경성을 방문하여 만난 것처럼 가장했지만, 총독부에 의해 준비되고 연출된 것이었다.
이 박문사 이벤트로 인해 안준생은 아버지를 부인한 패륜아로 낙인 찍혀 정신적 사망선고를 받게 됐다. 부인 정옥녀의 증언에 의하면 안준생은 이 이벤트 후 상하이로 돌아갈 때 바다에 투신하지 못한 것을 평생 한스러워 했다고 한다.
이에 격노한 백범 김구는 1945년 11월 5일 귀국길에 오르면서 중국 관헌에게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부탁했다(<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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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해 건립한 박문사. |
상하이에 남아 있던 안준생이 1949년 3월 삼촌 안정근의 장례식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안준생은 그해 5월 상하이에 공산군이 들어오기 직전 홍콩으로 피란했다. 안준생이 언제 어떻게 귀국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6·25전쟁 중인 1951년 1월 부산으로 피란 중 폐결핵이 발병, 부산항에 정박중인 덴마크 병원선 안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1952년 11월 18일 46세로 사망했다.
병든 안준생이 병원선을 이용할 수 있게 주선해 준 사람은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었다.
손원일의 부친은 민족운동가 孫貞道(손정도)로,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을 이어 상하이에서 대한적십자회를 맡은 인연이 있다. 또한 상하이 시절 손정도의 집에서는 민족운동가들의 자녀들이 자주 모였는데, 손원일은 안준생보다 두 살 아래로 동년배다. 여류 비행사 권기옥도 손원일과 자주 어울렸으며,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다.
안준생의 유해는 부산시 초량4동 뒷산에 안장됐다가 1971년 경기도 포천군 이동 교리의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로 이장됐다(묘 번호 1549호).
이후 그의 부인과 아들은 미국으로 갔다. 1987년 부인 정옥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1991년 사망했으며 남편의 묘에 합장됐다. 아들 웅호는 아직 미국에 있다. 올해 손자 토니 안(한국명 안보영·세례명 요셉·46)이 귀국하여 鄭鎭奭(정진석) 추기경과 최초로 인사를 했다. 안준생의 부인 정옥녀는 정진석 추기경의 5촌 고모(작은할아버지의 딸)이다.
안중근 一家의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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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석 추기경과 만나 인사를 나누는 안준생의 손자 토니 안(오른쪽). |
군사정권 시절 안중근에 대한 기념이 본격화되면서, 武士(무사) 안중근의 독립운동만 선양됐고, 그럴수록 그의 근원적 사상과 희구는 더욱 멀어지고, 유족들이 핍박을 받거나 망각됐다.
全斗煥(전두환) 정권시절인 1987년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나, 朴正熙(박정희) 정권 시절 자이르·콜롬비아·버마(미얀마) 대사 등을 지낸 그의 아들 珍生(진생)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 강제해직됐다. 그는 그 충격으로 뇌경색으로 고생하다 아버지 안정근이 훈장을 받은 이듬해(1988년) 사망했다. 현재 안진생의 부인 박태정 여사와 두 딸 안기수·안기려는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안중근의 막내동생 안공근의 아들 安偶生(안우생·1907~1991)은 안준생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는 김구의 대외담당 비서로 활동했고, 1948년 김구의 北行(북행)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는 김구를 수행해 평양에 다녀왔으나 김구가 암살되고 홍콩으로 건너간 후 종적이 끊겼다.
1986년 4월 19일 북한 노동신문에 그의 이름으로 ‘민족대단합의 위대한 경륜: 남북연석회의와 김구 선생을 회고하며’라는 글이 실렸다. 북한은 1991년 2월 안우생이 사망했으며, 애국열사릉에 그의 묘가 있다고 밝혔다.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경근은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앞서 김구의 특사로 평양에 다녀왔고, 1950년대 말에는 조카 안민생과 함께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 反(반)이승만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1961년에는 안경근을 위원장, 안민생을 총무위원회 기획부장으로 하는 경상북도 민족통일연맹을 만들었다. 안민생은 이 무렵 교원노조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들은 5·16 후 혁신계열 일제검거에 걸려 투옥되어 안경생은 징역 7년, 안민생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독립운동을 하다 만주군에게 붙잡혀 한쪽 다리를 잃은 안민생은 후일 교통사고로 다른 다리마저 잃고 어렵게 살았다.
전 세계로 흩어진 안중근 一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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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간직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족사진. 부인 김아려와 장녀 현생(오른쪽), 차남 준생. |
안중근의 민족운동과 ‘동양평화론’이 더 넓은 보편 세계로 열려 있었듯이, 우리가 떠안아야 하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도 동양은 물론 보편적 세계평화와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과업이 우리 앞에 남아 있기에, 안중근 100주년은 새로운 출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안중근 가문의 인사들을 건국훈장으로 선양하는 일 못지않게, 평균적 삶을 살지 못했던 그의 가문에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한반도의 남과 북은 물론 중국·미국·파나마 등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삶과 죽음이 지닌 사연들이 수습되어야 한다. 현재 안중근의 직계후손은 미국에, 동생 정근의 직계는 남한과 미국에, 공근의 직계는 북한과 파나마에 흩어져 있다. 100주년이 된 이즈음 남과 북 그리고 해외로 흩어진 그의 후손들을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은 안중근의 유해 발굴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또 국내에 있는 안진생의 딸 안기수, 안기려, 안성녀의 후손 권혁우 일가 등에도 유족에 합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유해 발굴도 안중근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내 일등묘지에 안장됐다’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묘나 부인 김아려 여사의 묘, 상하이 만국공묘에 사진까지 남아 있는 동생 정근의 묘, 미국에 있는 조카딸 안미생의 묘, 충칭에서 실종된 공근의 유해는 조사된 바 없다. 형제 자매 중 유일하게 국내에 귀국했던 여동생 성녀의 묘는 부산에 있지만 여전히 방치되어 있는 상태다. 상하이 만국공묘에 남아 있는 不明(불명)의 묘들을 우선 조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안중근 가문의 묘역을 만드는 것도 적극 고려해 볼 일이다.
안중근을 다섯번 죽인 日帝
제국의 폭력은 안중근을 여러 번 죽였다. 대강만 헤아려도, 안중근을 다섯 번 정도 죽였다. 먼저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의 생명을 죽였으며, 둘째 그의 유해가 민족운동으로 부활되는 것을 막고자 유족에게 돌려주지 않아 다시 죽였다.
세 번째로 순국 직후 동갑 사촌형 안중근의 유지를 이어받으려는 안명근을 ‘강도 및 강도미수죄’로 종신징역을 선고하여, 15년의 옥살이 끝에 병을 얻어 출옥한 다음 북만주에서 죽게 했다. 네 번째 1911년 겨우 일곱 살의, 장차 신부가 되어야 할 어린 장남 분도를 독살했다. 마지막으로 1939년에는 안중근의 남은 아들 안준생마저 정신적으로 죽였다.
물론 우리는 안중근의 가문만 특별히 대접해서는 안된다. 더욱이 역사의 주체는 가문이 아니라 개개인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그의 가문에 대해서도 보편적 기준으로 평가하되, 안중근이 지닌 빛의 의의만큼이나 짙은 어둠이 그의 가문에 강요됐음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안중근의 이름이 萬邦(만방)에 떨쳤다는 찬양과 아울러 만방으로 흩어진 그의 가문이 수습되어야 한다. 그의 빛이 千秋(천추)를 기약하기 위해서는 100년간 방치된 가문의 어둠이 역사기억의 장으로 소환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