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愼鏞碩의 지구촌 이야기] 구라시키의 오하라(大原) 미술관

밀레, 모네, 르누아르, 고갱 등 大家들의 작품 즐비

  • : 신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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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구라시키의 오하라 미술관을 처음 찾은 이후 다섯 차례나 다시 찾게 된 이유는 일본 화가가 선택했고,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서양 미술을 볼 수 있는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

愼鏞碩
⊙ 1941년 인천 출생.
⊙ 서울대 농대 졸업, 서울대 신문대학원 석사.
⊙ 조선일보 駐파리 특파원,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인권재단 이사장 역임.
⊙ 저서: <현장에서 본 프랑스 교육> 등.
⊙ 상훈: 佛 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등.
오하라(大原) 미술관은 일본의 전통과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구라시키(倉敷)에 위치해 있다. 서부 일본의 거점도시 오카야마(岡山)에서 열차편으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구라시키는 幕府(막부) 시대에는 일대의 산물들을 모아 에도(江戶)로 보내는 집산지였다.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구라시키에는 금융, 무역, 방직 산업이 자리 잡게 돼 부유한 사업가들이 생겨났다.
 
  그중의 한 사람인 구라시키 방적(구라보·倉紡)의 창업자 오하라 마고사부로(大原孫三郞·1881~1943)는 일본 미술품을 열심히 사 모은 수집가였다. 일본 미술에 관심이 많은 오하라가 주목한 화가 중에는 오카야마 출신의 고지마 도라지로(兒島虎次郞·1881~1930)가 있었다.
 
  일본 최초의 서양 미술관이자 세계적으로 알려진 오하라 미술관은 화가 고지마와 사업가 오하라의 합작품이다. 두 사람의 眼目(안목)과 財力(재력)과 信賴(신뢰)가 바탕이 돼 세계적인 미술관이 탄생됐기 때문이다.
 
  사업가 오하라는 같은 지방(오카야마) 출신이며 동갑내기인 화가 지망생 고지마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그를 도쿄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도록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1907년 고지마가 26세 때 도쿄박람회 미술전에서 1등상을 수상하자, 오하라는 고지마에게 5년간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일대에서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유럽행을 주선해 주기에 이른다.
 
  당시로서는 거금이 필요했던 5년간의 유럽 유학의 길을 열어 준 오하라는 “유럽에서 유명한 작가들을 만나면 당신의 미적 감각과 안목으로 작품들을 사서 일본으로 보내라”고 부탁했다. 오하라는 1908년 고지마에게 귀중한 유럽 유학뿐만 아니라 작품 구입 과정을 통해 당대 유명 화가들과 만남의 기회까지 제공해 준 셈이다.
 
  고지마는 세 차례에 걸친 유럽 유학 기간 동안 많은 유럽의 유명 화가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작품을 구입해 구라시키로 보냈다. 오하라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작품들은 고지마 스스로가 선별해 일본으로 보냈던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고지마가 직접 구입했던 작품들은 각기 특별한 ‘사연’과 ‘일화’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오하라 미술관 관람은 한결 뜻이 있고 재미있다. 100여 년 전 일본의 화가가 후원자의 도움으로 유럽에서 사들였던 작품들은 일본인들의 美的(미적) 감각 및 정서와도 일맥상통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값 독촉에 쫓기며 구입한 ‘성모대축일’
 
아망 장의 ‘긴 머리카락’.
  1980년대 초 오하라 미술관을 처음 찾은 이후 다섯 차례나 다시 찾게 된 이유도 일본 화가가 선택했고,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서양 미술을 볼 수 있는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40여 년 동안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서 수많은 미술관들을 찾았지만 오하라 미술관 같은 역사적 배경과 소장 작품마다 ‘일화’가 있는 곳은 드물었다. 이 같은 연유 때문에 그동안 오하라 미술관을 자주 찾았던 것 같다.
 
  프랑스 화가 에드몽 프랑수아 밀레와 아망 장(1869~1936)의 ‘긴 머리카락’은 고지마가 파리에서 구입한 첫 작품으로 오하라 컬렉션의 기초가 된 작품이다. 1908년 파리에 도착한 고지마는 아망 장의 아틀리에에서 ‘긴 머리카락’을 보고 감명을 받아 오하라에게 이 작품의 구입을 제안했다.
 
  당시 파리 화단의 주도적 화가였던 아망 장은 일본에서 온 화가를 도와주기 위해 겐트(벨기에) 미술학교장 델빈을 소개해 주고, 이어 모네와 마티스 등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들도 만나게 해 주었다.
 
엘 그레코의 명작으로 꼽히는 ‘성모대축일’.
  ‘긴 머리카락’ 구입 과정에서 싹튼 아망 장과의 인연을 통해 고지마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여러 나라의 대표적인 화가들과 짧은 시간에 우의를 다질 수 있었다.
 
  엘 그레코(1541~1614)의 ‘성모대축일’도 고지마와 오하라가 의기투합하여 사들인 명품이다. 1922년 파리의 화랑가를 거닐던 고지마는 ‘성모대축일’이 賣物(매물)로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오하라에게 즉각 전보를 보내 엘 그레코 작품을 사들이자고 제의했다.
 
  1차대전 후 경제 불황을 겪고 있던 때였지만, 가격은 천문학적이어서 오하라에게도 부담이 되는 값이었다. 일본 역시 불경기였기 때문에 고지마가 송금을 받게 된 것은 그로부터 60일 후였다. 그림값을 독촉하는 畵商(화상)을 달래 가면서 엘 그레코의 작품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애쓴 덕분에 오늘날 오하라 미술관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초기 작품 ‘그레빌 해안절벽’은 고지마가 1922년 파리의 화랑에서 구입한 파스텔 작품이다. 고지마가 유럽에 있을 때 화가 밀레는 일본에서 널리 알려지고 일본인들이 좋아한 화가였다.
 
 
  밀레와도 친교 나눠
 
  노르망디 지방의 구루市(시)에서 태어난 밀레는 셰르부르로 가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후 파리로 옮겨 미술학교에 다니면서 ‘살롱’전에 출품하기도 했던 밀레는 로코코 스타일의 작품에서 점차 농민과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다.
 
  1849년 파리 남쪽 바르비종으로 가족들과 함께 거처를 옮긴 밀레는 ‘만종’ ‘이삭줍기’ 같은 농민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통해 바르비종 화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등장했다. 파리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할 때 간혹 들렀던 바르비종의 밀레 아틀리에에는 오늘날에도 고지마의 사진과 서명이 전시돼 있다.
 
  도쿄 미술학교 시절에도 밀레의 초상화를 그리고, 파리에서도 밀레의 작품을 선호하면서 바르비종의 아틀리에까지 찾았던 고지마가 더 많은 밀레 작품을 사들이지 않은 것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클로드 모네(1840~1926)의 대표작 ‘睡蓮(수련)’은 고지마의 일화가 많이 담긴 작품이다. 파리에서 태어난 모네는 젊은 시절 대서양의 항구도시에서 바다를 소재로 한 수많은 작품을 남긴 화가 유진 부당을 만나 정식 미술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파리로 왔다.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면서 시슬리, 르누아르, 피사로 같은 화가를 만나 인상주의 화파를 형성했던 모네는 ‘살롱’전에 ‘해 뜨는 인상’을 출품해 비평가들로부터 인상파 화가라는 명칭을 부여받기에 이른다.
 
  모네는 일생 동안 자연광(태양)의 변화에 따른 미묘한 색감의 변화를 캔버스에 담았던 작가였다. 그가 남긴 수십 점에 달하는 ‘루앙 성당’ ‘웨스트민스터 사원’ ‘건초더미’ 같은 연작들은 같은 구도의 그림이지만 태양광선의 변화에 따른 색감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1920년 고지마가 파리에서 노르망디 지방 초입에 위치한 외딴 고을 지베르니로 모네를 찾아갔을 때, 79세의 老(노)화가는 백내장으로 시력이 약해진 상태였지만 프랑스 화단의 정상급 화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약화된 시력 때문에 캔버스에 눈을 바짝 대고 작업하던 모네였지만, 화가로서 일생 동안 해오던 ‘자연광에 의한 색감의 변화’를 추구하는 자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베르니의 연못에 연꽃을 심어 놓고 연못에 반사되는 태양광선 및 나무의 그늘과 바람에 따라 요동치는 물결 등을 화폭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모네와 고지마의 특별한 만남
 
오하라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면서 학예관의 설명을 메모하는 초등학교 학생들.
  고지마와 함께 갔던 사이토 씨가 모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화가 모네가 우키요에(浮世繪·근대 목판화)를 좋아했고, 그의 정원 연못에 일본식 다리(橋)를 만들어 놓을 정도로 일본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大家(대가) 모네를 만난 고지마와 사이토는 “직접 그림을 살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이미 화가로서 정상에 올라 있던 모네는 직접 작품을 팔지 않고 파리의 전속 화랑을 통해서만 작품을 내놓고 있을 때였지만 지베르니까지 찾아온 일본인들에게 “지금 대작들을 제작하고 있으니 한 달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말했다.
 
  다시 지베르니로 찾아간 고지마에게 모네는 작품 몇 개를 보여주면서 “마음대로 골라 보라”고 했다. 오늘날 오하라 미술관에 있는 수련 작품은 89년 전 모네와 고지마의 특별한 만남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작품이다.
 
  당시 고지마의 일기를 보면 모네의 친절과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 “일본에 가면 모란 꽃씨를 보내 주겠다”고 했더니 모네가 고마워하더라는 구절이 나온다.
 
  오하라 미술관에 있는 모네의 다른 대표작 ‘건초더미’는 원래 마쓰카타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던 작품이었다. 20세기 초 일본의 대표적인 재벌 기업이었던 가와사키조선(川崎造船) 창업자의 2세였던 마쓰카타는 고지마와 거의 同時代(동시대)에 파리에서 2000점 가까운 그림을 사들였고, 유럽 시장에 나가 있던 8000여 점의 우키요에 작품들을 일본으로 다시 들여왔다.
 
  오하라의 지원을 받고 있던 고지마와 비교해 재력 면에서 월등했지만, 1차대전 후 경기 침체로 가와사키가 파산하면서 작품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건초더미’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978년 오하라미술관에 자리 잡았다.
 
  오하라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피사로, 르누아르, 피카소, 마네, 고갱, 드니스, 코로 같은 화가들의 작품에도 고지마와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다. 1930년에 개관한 이오니아 양식의 그리스 神殿(신전) 모습을 본뜬 오하라 미술관 입구에는 로댕의 조각 작품 2개가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이 작품들도 2차대전 당시 군수용으로 徵發(징발)될 뻔한 위기에 몰렸다가 가까스로 공출을 면한 일화가 있다. 또한 로댕의 제자로서 일생 동안 베토벤의 각기 다른 흉상 45개를 만든 부르델(1861~1929)의 작품 역시 오하라 미술관이 아끼는 조각 작품이다.
 
  청각 장애를 극복하고 창작에 몰두했던 베토벤 정신에 몰입했던 부르델을 통해 작곡가와 조각가의 창조적 만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1960년 개관 3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베토벤 곡이 연주될 때 부르델의 베토벤 흉상을 무대에 전시했던 일화는 아직도 오하라 미술관 학예관들에게는 전설 같은 일로 남아 있다.
 
 
  고지마와 오하라의 안목과 재력, 신뢰가 숨쉬는 곳
 
조각가 부르델의 베토벤 흉상.
  일본 최초의 서양 미술관인 오하라 미술관은 주요 컬렉션들이 전시되어 있는 본관 이외에도 ‘공예관’ ‘아시아 예술관’ ‘고지마 기념관’ 등이 부설돼 있다.
 
  지난달 오하라 미술관을 다시 찾았을 때 본관에서 40여 명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예관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고, 강의실에서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서양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었다.
 
  오하라 미술관을 관람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고지마와 오하라의 안목과 재력과 신뢰가 90년 동안 미술관에서 살아 숨쉬고 있고, 서양과 일본 미술의 각기 다른 기법 속에서도 예술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했던 두 사람의 심미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하라 미술관이야말로 전시된 작품을 관람하는 의미뿐 아니라 오하라와 고지마의 우정, 동서 미술을 통한 예술의 공통점, 작품마다 일화가 가득 찬 그림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세계적인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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