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下)

화려한 영광 뒤의 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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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전설적인 모사드, 계속되는 공작 실패,
퇴직 요원의 비밀 폭로 등으로 세대교체기의 진통 겪어


⊙ 에티오피아의 흑인 유대인 팔라샤 구출 작전 수행
⊙ 이집트와 비밀접촉 통해 캠프 데이비드 회담 길 닦기도
⊙ 리브니 외무장관은 모사드 특수공작국 여성 요원 출신

朴宰善 홍익대 초빙교수
⊙ 1946년 충남 공주 출생.
⊙ 경기고·한양대 상학과 졸업. 프랑스 국제행정대학원 졸업.
⊙ 駐佛공사, 駐세네갈 대사, 외교통상부 구주국장, 駐보스턴 총영사, 駐모로코 대사,
    美브랜다이스大 중동·유대연구소 객원교수 역임.
⊙ 저서: <세계사의 주역: 유대인> <제2의 가나안: 유대인의 미국>.
⊙ 상훈: 근정포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기사장, 프랑스 공로훈장 등.
모사드는 에티오피아에 거주하는 ‘검은 유대인’팔라샤 구출작전을 수행했다. 사진은 ‘솔로몬 작전’으로 이스라엘로 공수된 팔라샤들.
유대인은 오랫동안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유랑생활을 한 관계로 다른 어느 민족보다 피붙이 의식이 강하다. 고통 받는 유대인들을 이스라엘에 이주시켜 모두 함께 ‘약속의 땅’에서 산다는 것은 이스라엘 유대인의 사명이다.
 
  이러한 노력 중의 하나가 모사드가 주축이 되어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 사이에 수행한 ‘모세-여호수아-솔로몬 작전’이다. 에티오피아에 살고 있던 검은 유대인 팔라샤(혹은 ‘베타 이스라엘’이라고도 부른다)를 이스라엘로 귀환시키기 위한 이 작전에는 美(미) CIA와 당시 조지 H 부시 미 부통령, 駐(주)수단 미국대사관, 수단 군부 등이 협력했다.
 
  에티오피아 유대인 팔라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역사적 考證(고증)이 거의 없고 몇 가지 假說(가설)만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 아래 이집트를 탈출할 때 일부가 아비시니아(오늘날의 에티오피아를 말함)에 殘留(잔류)했다는 說(설)이다.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성전의 1차 파괴와 기원 후 70년에 있은 두 번째의 파괴 때 일부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거쳐 아비시니아에 정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솔로몬과 시바 여왕의 아들인 메네릭이 어머니의 나라인 에티오피아로 돌아올 때 유대인 武士(무사)들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이 현지 여인들과 결혼하여 낳은 후손들이 팔라샤의 先祖(선조)라는 주장도 있다.
 
  팔라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중엽 에티오피아에서 선교 사업을 하던 영국인들에 의해서다. 이 선교사들은 팔라샤를 기독교도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팔라샤들이 모세 5經(경)에 근거한 ‘토라’(유대교 경전 중 하나)를 읽고, 安息日(안식일) 사바트와 코셔(유대교 계율에 의한 식단) 등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들은 全(전) 세계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아브라함의 땅’으로 돌아간다는 확신을 갖고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세작전
 
모사드 부장 이차크 호피. 에티오피아의 팔리샤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작전을 지휘했다.
  유대인들에 대해 남다른 혈연의식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 이들을 외면할 리 없었다. 1977년 총리 자리에 막 오른 메나헴 베긴은 모사드 부장 이차크 호피를 총리실로 호출했다. 호피는 1927년 텔아비브에서 출생한 ‘사브라’(‘선인장’이란 뜻으로 팔레스타인 땅에서 출생한 유대인을 의미)로 합참의장을 거쳐 1974~ 1982년 모사드 부장으로 재직했다.
 
  베긴은 호피에게 에티오피아에서 천대와 박해를 받고 있는 팔라샤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인의 正體性(정체성)을 판별하는 권한을 갖고 있던 유대 성직자 중 일부 세파라드系(계) 랍비를 제외하고는 팔라샤가 유대인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많지 않았다.
 
  이 무렵 에티오피아의 실권자는 1974년 쿠데타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실각시킨 하일레 마리암 멩기스투였다. 멩기스투는 집권 후 소련에 밀착, 에티오피아를 공산국가로 만들고 국제사회에서 고립시켰다.
 
  팔라샤들은 거의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산간오지에 몰려 살면서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모사드는 이들을 일단 이웃 이슬람 국가인 수단의 중간 집결지로 끌어낸 다음, 그곳에서 이들을 비행기편으로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방안을 마련했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가파르 니메이리 수단 대통령은 미국 참모학교에서 장교 연수를 한 적이 있는 親美的(친미적)인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측은 니메이리에게 비밀원조 형식으로 수천만 달러를 주고 팔라샤 공수작전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이후 1984년 1월부터 1985년 1월까지 1년 동안 ‘모세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약 1만8000명의 팔라샤가 수단을 거쳐 이스라엘로 공수됐다. 벨기에의 巨富(거부) 유대인 조르지 귀텔만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항공사인 트랜스 유로피안 에어라인의 항공기들을 총동원해 이 작전을 도왔다.
 
  모세작전이 세상에 알려지자 아랍국가들은 니메이리에게 더 이상 이스라엘을 도와주지 말라고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모사드는 더 이상 팔라샤 송환작전을 계속하기 어려워졌다. 이때에 이스라엘을 도운 사람이 당시 미국 부통령이던 조지 H 부시(제41대 미국 대통령)와 CIA였다. 부시는 니메이리에게 원조중단 압력을 통해 두 번째 팔라샤 송환을 이끌어냈다.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 작전’이다. 1985년 800명의 팔라샤가 이스라엘 땅을 밟았다.
 
 
  모사드가 팔라샤 구출작전을 수행한 이유
 
‘솔로몬 작전’ 당시 비행기에 오르는 팔라샤들.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 정권은 팔라샤의 國外(국외) 탈출을 막기 위해 남아 있는 팔라샤들을 격리시켜 감시했다. 1980년대 말 에티오피아의 기근사태가 심각해지면서 멩기스투의 정치적 입지도 흔들리기 시작하자 멩기스투는 팔라샤의 이스라엘 송환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1991년 5월 이스라엘 軍(군)과 모사드는 34대의 군 수송기와 민간 항공기를 동원하여 36시간 만에 약 1만4500명의 팔라샤를 이스라엘로 공수했다. 이것이 ‘솔로몬 작전’이다. 이 송환 작전 중 이스라엘 엘 알 항공사는 보잉 747화물기 한 대에 1112명의 팔라샤를 태우는 신기록을 세웠다. 에티오피아에서 기근으로 시달리던 팔라샤들의 평균 체중이 일반 성인 몸무게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운항이 가능했다고 한다.
 
  팔라샤의 공수작전을 모사드가 수행한 이유는 모사드의 모체인 샤이가 이스라엘 건국 전 해외 유대인의 안전과 이들의 이스라엘 귀환(히브리어로 ‘알리아’라고 부름)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암살과 파괴, 準(준)군사작전으로 얼룩졌던 모사드의 부정적 이미지는 팔라샤 송환이라는 인도적 사업으로 많이 개선됐다.
 
  이스라엘은 뿌리조차 불분명한 흑인系(계) 팔라샤 유대인도 피붙이로 여겨 3차에 걸친 공수작전을 통해 이들 모두를 ‘약속의 땅’으로 데려와 유대인의 결속을 과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나 언론은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잘나가는 교민에게만 관심을 보일 뿐, 중국과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이나 탈북자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팔라샤의 이스라엘 정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캠프 데이비드 회담의 길을 닦은 모사드]
 
카터 美 대통령(가운데)의 주선으로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난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왼쪽)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오른쪽).
  이스라엘과 미국 유대인 사회는 미국 대통령이 중동평화 문제에 손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 이유는 역대 中東(중동) 평화회담의 기본 틀이 과거 4차에 걸친 中東戰(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의 일부분을 양보하는 것을 전제로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미국 대통령들은 재임기간 중 외교적 업적을 남기기 위해 중동 평화회담을 주선했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모두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리처드 닉슨은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스라엘이 꺼리는 중동문제의 포괄적 타결을 규정한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와 338호 작성을 주도하고 이를 지지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닉슨은 유대계 일간지 워싱턴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사건 폭로로 사임했다.
 
  지미 카터는 캠프 데이비드 회담을 열어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화해를 주선하면서 이스라엘에 많은 양보를 요구했다. 이 때문에 미국 유대계의 불만을 사게 된 그는 할리우드 유대인 로비단체가 지원하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했다.
 
  제1차 걸프전 승리 이후 再選(재선)이 당연시됐던 조지 H 부시는 1991년 가을 유대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과 함께 마드리드 중동 평화회담을 주선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유연한 자세를 촉구하다가 유대계의 미움을 받았고, 결국 無名(무명) 정객이던 빌 클린턴에게 패했다. 부시가 패한 데는 경제난 등 다른 문제들도 있었으나, 미국 유대인 대부분이 부시의 재선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유대인과 가장 가까웠다는 빌 클린턴도 두 번째 임기 중 오슬로 회담이라는 중동 평화회담을 이끌다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지저분한 스캔들로 망신을 당하고 탄핵 문턱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났다. 공교롭게도 르윈스키는 러시아계 유대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조지 W 부시(제43대 대통령)는 두 번에 걸친 임기 중 중동 평화문제는 거의 건드리지 않고 유대계가 중심이 된 네오콘의 건의대로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에 몰두했다. 그의 재임기간 중 유대계의 불만은 거의 없었다.
 
 
  이스라엘-이집트 비밀접촉
 
  그런데 모사드가 중동 평화회담과 관련한 비밀 외교공작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1977년 9월 이차크 호피 모사드 부장은 모로코 국왕 하산 2세의 중재로 이집트 부총리 가말 알 토하미를 하산 2세의 여름 별장이 있는 모로코 이프란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모로코는 아랍 국가이지만 이스라엘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이스라엘 건국 당시 아랍 지역 최대의 유대인 공동체이던 모로코 유대인 30만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이들과 그 후손들이 오늘날 이스라엘 세파라드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호피와 알 토하미는 당시 아랍권이 최대의 禁忌(금기)로 여기던 중동분쟁의 ‘분리타결’문제, 이스라엘과 이집트 양자 간의 평화문제를 협의했다. 이후 이스라엘의 모세 다얀 외무장관이 알 토하미와 2차회담을 가지면서 양자 간 평화협상이 더욱 구체화됐다.
 
  이들의 비밀접촉은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과 캠프 데이비드 회담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사다트는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이슬람근본주의 행동단체 무슬림형제단에 의해 암살됐다.
 
 
  [모사드 출신 여성 정치인 치피 리브니]
 
모사드 특수요원 출신인 치피 리브니 이스라엘 외무장관.
  치피(치포라) 리브니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총리 물망에 오른 거물 여성 정치인이다. 폴란드계 유대인 에이탄 리브니의 딸인 그는 1958년 텔아비브에서 출생했다.
 
  에이탄 리브니는 독립 전 영국 위임통치 당국과 싸우던 비밀지하군인 이르군의 행동대장이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이르군은 우리의 독립군과 같은 애국단체지만 영국 입장에서 보면 테러단체였다. 영국 통치당국이 거액의 현상금까지 붙였던 이르군 지도자 메나헴 베긴은 후일 총리가 됐으며, 캠프 데이비드 회담 이후 사다트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치피의 어머니인 사라 로젠버그도 이르군의 정예 여성대원 출신이었다.
 
  치피 리브니는 대학 졸업 후 1976년부터 3년간 군 장교로 복무했다. 중위 시절 초급장교 훈련교관으로 근무했던 그녀는 1980년부터 4년간 모사드에서 근무했다. 프랑스어에 능통한 리브니는 모사드 시절 특수공작국 소속 키돈課(과: 키돈은 히브리어로 총검이라는 뜻)에 배속되어 파리 거점에서 지상요원(공개요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브니가 키돈의 특수공작에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 정보분석 등의 업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모사드에서 나온 후 리브니는 변호사로 활동하다 1996년 國營(국영)기업을 관장하는 정부기관에서 民營化(민영화)작업을 주도하면서 官界(관계)에 발을 디뎠다. 그는 1999년부터 右派(우파) 리쿠드당 의원으로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7차에 걸쳐 각료직을 역임하면서 重鎭(중진)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2005년 아리엘 샤론 총리가 만든 카디마당으로 黨籍(당적)을 바꾼 리브니는 작년 9월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가 비리사건으로 당수직을 사임한 후 당수로 선출됐다.
 
  리브니가 근무한 적이 있는 키돈은 1970년경에 만들어졌는데, 주로 이스라엘의 敵(적)을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키돈의 인원은 48명인데, 보통 4人(인) 1組(조)의 특공대를 편성해 암살·납치 임무를 수행했다. 작전 대상자는 모사드가 법률가와 함께 법적인 검토를 통해 선정했다.
 
  키돈이 수행한 주요 공작으로는 1972년 뮌헨올림픽 당시 ‘검은 9월단’의 이스라엘 선수단 살해 보복 작전인 ‘神(신)의 분노’ 작전과 1988년 PLO의 2인자인 아부 지하드 암살작전 등을 들 수 있다. 키돈은 1990년 3월 ‘수퍼 건’으로 알려진 이라크의 신형 대포 개발사업에 참여한 캐나다 과학자 제럴드 불을 벨기에 브뤼셀에서 암살했고, 작년 2월 12일에는 이슬람 강경세력인 헤즈볼라의 상징적 지도자 이마드 무그니에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사드의 작전 실패 사례]
 
  할리드 마셜 암살 미수 사건
 
하마드 정치부장 할리드 마셜.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모사드 요원에게 암살당할 뻔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無敵(무적)의 정보기관으로 알려진 모사드도 간혹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7년 모사드는 하마스의 정치부장 할리드 마셜을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공작은 추리작가 존 르 카레의 소설만큼이나 모든 것이 완벽했다. 불가리아製(제) 소형 망원경과 초미니 주사기 등 최신 장비들이 동원됐다. 그저 할리드 마셜의 옆을 지나치면서 그의 귀에 슬쩍 독극물을 주입시키기만 하면, 마셜은 본인도 모르게 서서히 죽어 가게 되어 있었다.
 
  공작 당일인 9월 24일의 실제 상황은 예상을 어긋났다. 공작원이 마셜을 스치고 독극물을 분사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마셜이 소리를 지르며 요동치자 하마스 경호원은 약 2km를 추적하여 도주하는 모사드 요원 두 명을 붙잡아 요르단 경찰에 인계했다. 군중 속에 섞여 공작 진행을 감독하던 요원은 현장을 버리고 황급히 피신했다.
 
  체포된 두 명의 공작원은 배리 비즈와 숀 켄달이라는 假名(가명)으로 위조된 캐나다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요르단 경찰의 요청을 받고 달려온 요르단 주재 캐나다 대사관 직원은 이들과 인터뷰한 지 10분도 채 안 돼 이들이 캐나다인이 아님을 밝혀냈다.
 
  이는 모사드로서는 커다란 수치였다. 모사드는 요원들의 훈련 과정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위장의 완벽성을 확인했으며, 만약 체포되어도 최소한 하루 정도는 버티도록 교육했기 때문이다.
 
  이 엉성한 공작으로 이스라엘은 요르단은 물론 캐나다와도 관계가 악화됐다. 이스라엘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취해 왔던 후세인 요르단 국왕마저 이스라엘에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요르단은 체포된 모사드 요원들의 석방 조건으로 마셜을 살릴 해독제 제공과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된 하마스 창시자 아흐메드 야신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야신은 그해 10월 1일 석방됐다. 캐나다는 불만의 표시로 이스라엘 주재 대사를 일시 소환했다.
 
  이 사건 이후 일부 공작전문가들은 “모사드가 암만 공작을 직접 수행한 것은 적절치 않았으며, 금품으로 포섭이 가능한 제3국 요원(예를 들면 실직한 舊 소련 등 공산권 정보원)을 활용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공작에 가급적 모사드 요원을 참여시키는 것이 창설 이래 모사드의 전통이었다. 이는 보안문제 등을 고려한 것으로, 모사드 요원 중심의 공작 방침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공작 자체의 기술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공작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투철한 애국심과 사명감, 그리고 이스라엘의 경우 확고한 시온주의로 무장되어야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예후다 길의 허위보고 사건
 
  예후다 길은 1970년부터 모사드의 정예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랍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던 길은 1974년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과 가까운 시리아군 고위 장교 한 명을 협조자로 포섭했다. 길은 이 시리아 장교와 로마·파리 등지에서 오랜 기간 접촉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중요한 ‘시리아 커넥션’이 돌연 증발했다. 공명심에 불타던 모사드 요원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당황한 길은 이후 10여 년 동안 작문성 허위보고서를 수차 올렸다. 길은 1992년부터 이스라엘 극우파인 몰레뎃당에도 붙어 불안한 자신의 개인적인 입지를 타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다가 길은 큰일을 저질렀다. 즉 ‘시리아군의 골란 침공설’을 1996년 8월 보고서에 포함시킨 것이다. 1967년 6일전쟁 때 이스라엘이 시리아로부터 빼앗은 골란고원 문제는 이스라엘이 가장 중요시하는 안보사항이었다.
 
  길의 보고서에 대한 다각적인 확인작업이 따랐다. 모사드와 경쟁관계에 있던 국내 정보기관 신베트나 군사정보기관 아만은 정밀 검증 끝에 시리아는 침공을 계획하기는커녕 오히려 평화 교섭을 원했다는 것을 밝혀낸다. 아만과 신베트는 이 모든 것이 길의 날조라는 것과 함께 공작금 횡령 등 길의 餘罪(여죄)도 밝혀냈다. 길은 결국 1997년 11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모사드에게 마셜 암살 실패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모사드는 창설 이래 요원들로부터 허위 보고서를 받은 적이 없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 사건은 그간 이스라엘의 다른 국내 정보기관에 비해 상대적 우위를 지켜 오던 모사드의 위상에 타격을 주었다.
 
 
  계속되는 모사드의 굴욕
 
모사드의 잇단 공작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 대니 야톰 모사드 부장.
  1998년이 되자 모사드는 또 다른 사건으로 곤경에 처했다. 1998년 2월 19일 새벽 3시경 스위스의 수도 베른 교외의 주택가 바베르사커에 사는 한 할머니가 인근 경찰서에 긴급신고를 했다. “정체불명의 건장한 남자 5명이 얼마 전부터 동네 건물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수상한 거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을 덮쳤다. 경찰은 이 건물에 사는 헤즈볼라 소속 레바논인을 감시하기 위해 건물 지하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모사드 요원들을 체포했다. 이들이 버젓이 정식 이스라엘 여권을 소지하고 이스라엘 엘 알 항공편으로 이틀 전 스위스에 도착했다는 증거가 드러나자 모사드는 다시 한번 망신을 당했다.
 
  사건이 터지자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스위스 정부는 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려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한 방송이 이 사건을 터뜨리는 바람에 스위스 정부는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스위스 정부는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사과를 요구하고, 주요 인사의 이스라엘 공식방문 일정도 취소했다.
 
  이스라엘 언론은 암만공작 실패, 길의 허위보고, 베른 사건 등을 싸잡아 비난했다. 결국 당시 모사드 부장이던 대니 야톰 장군이 부장직을 사임했다. 야톰은 네탄야후 전 총리와 함께 1972년 텔아비브 공항에서 납치된 벨기에 사베나 항공 구출작전에 참가했다.
 
  그는 30여 년간의 군 지휘관 경력과 네탄야후 총리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1996년 6월 모사드 부장이 됐으나, 1998년 2월 14일 21개월 만에 자리를 내놓았다. 후임에는 영국 태생 유대인으로 골수 모사드 맨인 에프라임 할레비가 임명됐다. 사임한 야톰은 이후 총리 안보특보를 거처 2003~2006년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의원을 지냈다.
 
  2004년 7월 모사드는 뉴질랜드에서 사고를 쳤다. 모사드 요원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인 두 명이 불법으로 뉴질랜드 여권을 입수하려 한 혐의로 기소되어 고등법원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이들은 장애인 환자의 명의를 도용해 여권을 신청한 뒤, 이를 受領(수령)하려 했으나, 이를 미리 알고 주시하고 있던 뉴질랜드 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이다.
 
  이 사건이 나자 헨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는 이스라엘의 해명과 사과를 요구했다. 하마스도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알듯 모를 듯한 성명을 한 차례 발표하고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모사드 실패의 원인은 세대교체
 
정통 모사드맨으로 모사드 부장에 임명된 에프라임 할레비.
  모사드의 거듭된 실패 원인은 무엇일까? 정보 전문가들은 모사드 요원의 세대교체를 첫 번째 이유로 꼽는다. 초기 모사드 요원들은 독립 전 對英(대영) 항쟁 때부터 현장에서 生死(생사)를 넘으면서 단련된 정예인력이었으나, 1980년대 이후 이들 대부분이 은퇴하고 새로운 요원이 충원되면서 정신력에서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독립과 4차에 걸친 중동전쟁을 겪은 1세대 요원들은 다분히 밀폐된 환경에서 공작을 수행했고, 중동 평화회담으로 인한 개방적 분위기나 언론 노출 등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에는 군 당국의 언론검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첩보활동에는 실패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모사드의 공작이 그간 언론에 노출되지 않아 공작의 성패를 일반인들이 몰랐기 때문에 언론에 드러난 일부 사례가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모사드가 과거의 소소한 실패를 감출 수 있었던 것도 이 기관의 우수성과 효율성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언론은 오랫동안 모사드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으나 검열 때문에 모사드에 관한 보도를 자제해야 했다. 그래서 일부 이스라엘 언론은 서방 언론에 모사드 관련 특종을 슬쩍 흘려주고 서방 언론이 이를 다루면 외신을 인용하는 식의 ‘逆(역)수입 보도’를 해 왔다.
 
  모사드에 대한 기사는 실명 대신 이니셜로만 기재하는 관행도 있었다. 한동안 모사드 부장의 이름이 대외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러다 야톰 장군이 모사드 부장에 임명되면서부터 부장의 실명이 언론에 보도됐다. 이는 과거의 오랜 전통을 깨는 획기적인 조치로 평가됐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에서는 모든 문제에 대해 금기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이스라엘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우연히 언론이 모사드의 공작실패를 중점적으로 부각시킨 이후부터, 이스라엘 일반인이 그간 갖고 있던 ‘완벽한 모사드’라는 이미지가 적지 않게 손상됐다.
 
 
  언론과 모사드
 
  이 현상이 전적으로 언론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신진 모사드 요원의 정신상태가 온갖 고난 속에서 닦인 선배 정예요원의 투철한 국가관과 희생정신, 불굴의 투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많이 지적되고 있다.
 
  모사드는 네 차례의 중동전과 두 차례의 팔레스타인 봉기(인티파다) 등 긴장이 계속되던 상황에서는 세계 최고의 공작수행 능력을 자랑했다. 그러다 제1의 主敵(주적)이었던 이집트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면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세대교체로 들어온 새 요원들은 과거 선배들에 비해 ‘부르주아’적인 면이 두드러진다는 비판도 있다. 모사드의 내부에도 관료주의와 행정권위주의가 스며들어 정보기관의 생명인 창의성과 유연성을 위축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과거 요르단 주재 모사드 거점장을 지낸 슐로모 가지트는 이렇게 반박했다.
 
  “모사드의 몇 가지 자질구레한 공작실패는 그간 모사드의 성공적인 활동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다소의 공작실패는 지난 수십 년간 항상 있어 온 일이다. 정보기관은 민간기업과는 달리 매사에 一喜一悲(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공작은 성공과 실패의 양면을 갖고 있다. 완벽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운이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언론이 무책임하게 실패상만 부각시켜 모사드의 명성이 많이 훼손됐으나 알려지지 않은 성공사례가 더욱 많다.”
 
  이스라엘 국내 방첩기관 신베트의 책임자를 지낸 카르미 길론은 공작과 언론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스라엘은 민주개방 사회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언론이 정보기관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과거 언론에 침묵이 강요되던 시대에는 모사드나 신베트의 책임자 역할을 하기가 쉬웠다. 최근의 언론과 정보기관의 갈등은 양측이 모두 한 차례 겪어야 할 공동의 과도기적 적응과정으로 볼 수 있다. 어느 나라고 안보와 개방, 인권은 조화와 조정을 필요로 한다. 정보기관의 활동 중 간혹 인권이 침해 받을 소지도 있다. 가령 자살테러단 첩보가 있을 때 불가피하게 수많은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한 명 한 명씩 강압식 수사를 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모사드의 개혁작업
 
  모사드는 총리 직속기관이다. 따라서 전략적인 결정을 필요로 하는 공작은 총리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기타 통상적·기술적 사업은 자체 판단으로 시행할 수 있다. 이스라엘 의회는 정보기관에 대한 감독권을 갖고 있으므로 현 체제를 전면 개편할 필요는 없다.
 
  혹자는 정보기관 간의 조정을 위한 미국식 안보협의체의 도입을 주장한다. 이는 보안 측면에서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자국 안보 위주로 움직이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체계와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미국 정보체계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모사드는 2008년 7월 일간지에 요원공채 광고를 내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를 통해 모사드는 국민과의 간격을 줄이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또 기술적 측면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줄이고, 자체 인력을 집중 양성하는 등 일련의 개혁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퇴직과 배신]
 
  이스라엘 핵무기 시설 폭로한 바누누
 
이스라엘의 핵개발을 폭로한 모르데카이 바누누.
  세계 모든 정보기관에 공통적인 두통거리가 있다면 요원의 배신과 은퇴 요원에 대한 관리다. 퇴직한 요원이 현직에 있을 때 知得(지득)한 기밀을 떠들고 다니거나 책자 발간 등을 통해 폭로하는 일이 종종 있으므로, 정보기관은 평소 요원의 동태에 대한 감찰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모르데카이 바누누는 1954년 모로코 마라케시 출생의 세파라드 유대인이다. 유년 시절 가족과 함께 이스라엘에 정착한 바누누는 군에서 공병으로 복무하다 제대한 후, 1977년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 있는 디모나 原電(원전)에 취직했다. 손재주가 있는 바누누는 짧은 시일 내에 상사의 신임을 얻었다. 얼마 후 바누누는 돌연 좌익운동에 합류했다. 원전 측은 1985년 보안에 문제가 생길 것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바누누를 면직시켰다.
 
  바누누는 퇴직 전에 이스라엘 핵무기 개발 시설에 대한 사진 60장을 찍어 두었다. 퇴직 후 호주로 여행을 떠난 바누누는 그곳에서 기독교도로 개종했다. 호주에서 콜롬비아 프리랜서 기자인 오스카 게레로를 만난 바누누는 게레로의 주선으로 영국 <선데이 타임스>와 접촉했다. 1986년 9월 12일 런던으로 간 바누누는 5만 달러를 받고 이스라엘의 핵무기 시설에 관한 사진을 <선데이 타임스>에 넘겼다. 그는 <선데이 타임스>로부터 이에 관한 책자를 발간하기로 약속도 받았다. <선데이 타임스>는 전문가를 동원해 검증작업을 벌인 후 사진이 진본임을 확인했다.
 
  바누누의 행각은 즉각 모사드에 포착됐다. 보고를 받은 시몬 페레즈 이스라엘 총리는 모사드에 바누누 납치를 지시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국제도시 런던에서 납치공작을 벌이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모사드는 ‘꿀단지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바누누를 로마로 유인했다. 여성 모사드 요원 체릴 벤토브가 美人計(미인계)를 써서 바누누를 로마로 꼬여낸 것이다.
 
  1986년 9월 30일 로마의 한 호텔에서 대기 중이던 모사드 요원은 바누누를 납치해 선박 편으로 이스라엘로 압송했다. 갑자기 바누누와 연락이 끊기자 <선데이 타임스>는 바누누가 제공한 이스라엘 핵무기 시설 사진을 이해 10월 15일 독점 공개했다.
 
 
  아시케나지와 세파라드의 갈등
 
모사드의 내막을 폭로한 빅터 오스트로브스키와 그의 저서 <기만에 의한>.
  바누누는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됐다. 그는 1988년 3월 24일 18년 형(이 중 11년은 금고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2004년 4월 21일 出所(출소)했다. 그는 2005년 3월 석방조건인 외국인과의 접촉금지를 어겼다는 이유로 다시 기소됐다가 2007년 6개월 집행유예로 재차 석방됐다. 그는 지금도 당국의 감시하에 있다. 많은 국제 인권단체들은 바누누를 양심수로 간주, 이스라엘 정부에 바누누에게 자유를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바누누 사건은 몇 가지 추측을 불러왔다. 우선 바누누의 배신행위에는 이스라엘의 아시케나지(유럽계 유대인)와 세파라드(스페인, 북아프리카, 아랍계 유대인) 간의 갈등이 작용했다는 주장이다. 이스라엘 내의 유대인 인구분포를 보면 아시케나지와 세파라드의 수는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건국 단계부터 국가 요직은 아시케나지가 독차지하고, 세파라드는 차별을 받아 왔다. 이에 격분한 바누누가 배신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분석인지는 모르지만 이스라엘 내 아시케나지와 세파라드 간에 알력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둘째, 바누누의 행위를 모사드의 의도된 공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용의주도한 모사드가 원전과 같이 지극히 민감한 보안부서에서 일하던 직원의 근무 중 행태나 퇴직 후 동정을 몰랐을 리 없으므로, 이는 의도된 공작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자국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 NCND(긍정도 부인도 않는)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바누누의 폭로를 통해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이 간접적으로 기정사실화하면서 아랍권에 대한 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빅터 오스트로브스키는 194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 후 오스트로브스키는 어머니와 함께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헌병 초급장교로 이스라엘군 복무를 마친 그는 캐나다로 돌아갔으나, 안정된 생활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해군 문관으로 취직했다.
 
  1984년 모사드는 공작원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고 있던 오스트로브스키를 요원으로 채용, 2년간 기초훈련과 함께 각 부서를 순회하는 견습직원으로 배치했다. 그는 견습직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능력이나 근무태도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1986년 해직됐다. 이에 앙심을 품은 오스트로브스키는 캐나다 토론토로 돌아가 1990년 모사드의 내부 사정을 폭로하는 <기만에 의한>(By Way of Deception)이란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이 발간되자 이스라엘 측이 미국과 캐나다에 책의 판매금지와 전량 수거를 요청하는 바람에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덕분에 사람들은 일부 신빙성이 없어 보이던 책의 내용에 대해서도 신뢰감을 갖게 됐다.
 
 
  퇴직 요원들의 폭로
 
  1995년에는 프랑스에서 <모사드 秘史(비사)>라는 책이 나왔다. 저자인 가드 심론은 전직 모사드 요원이라고 하는데, 책의 내용은 어느 정도 공개된 사항 위주로 되어 있었다. 그 후에도 많지는 않지만 간간이 모사드 관련 서적이나 시사지의 특집이 영어판 또는 불어판으로 나오곤 했는데, 깜짝 놀랄 만한 폭로성 내용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정보기관과의 사전 양해하에 출간된 것이 아닌가 싶다.
 
  잭 로스는 캐나다 태생으로 원래 개신교 신자였다. 그는 1980년대 초 이스라엘로 이주해 유대교도로 개종한 후 이스라엘 군에 자원 입대했다. 군복무 중 모사드 요원으로 발탁된 로스는 1988년부터 모사드 특수공작국에 배속돼 릭이라는 가명으로 미국·시리아·아제르바이잔·이란·남아공 등지에서 활동했다.
 
  로스는 1996년부터 2년간 모사드와 외국 정보기관 간의 협력업무를 담당하면서 주로 美(미) CIA나 FBI와의 연락업무를 맡았다. 그는 1998년부터 3년간 세계 유대인의 이스라엘 귀환업무도 담당했다. 그는 2000년 짐바브웨에서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유대인의 탈출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해 모사드 지도부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로스는 2007년 자서전 형식의 <자원자>라는 영문책자를 발간해 모사드 관련 사항 일부를 공개했다. 이 책은 영어권인 영국·미국·캐나다·호주 등지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후 히브리어로 번역되어 이스라엘에서도 출간됐다.
 
  모사드는 퇴직 요원을 위해 가급적 일자리를 주선해 주지만 수많은 퇴직 요원 모두에게 그런 혜택을 주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일부는 아프리카 용병단에 합류하거나 아프리카나 중남미 국가원수의 경호대에 들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모사드 퇴직자들이 새로운 생계를 찾는 과정에서 대가를 받고 모사드 재직 시의 비밀을 공개할 수 있는 여지는 항상 남아 있기 때문에 모사드는 계속 이들의 동태를 주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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