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근대를 만든 사람들] 량치차오(梁啓超)

점진적 변혁으로 富國强兵을 꿈꾸었던 經世家

  • : 신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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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높여 부르는 ‘中華’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인물은 량치차오(梁啓超)였다. 마오쩌둥(毛澤東)을 비롯해 20세기를 산 중국의 지식인과 혁명가 중 그에게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申東埈
⊙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同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교수신문 편집국장 역임.
⊙ 저서: <논어론> <순자론>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등 20여 권.
량치차오(梁啓超).
지난 2008년 여름의 베이징(北京) 올림픽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의 국력을 자랑하는 무대였다. 개회식에서 허공을 가르는 기발한 着火(착화)로 깊은 인상을 남긴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이 개·폐회식에 내건 주제어는 ‘强漢盛唐(강한성당)’이었다. 이는 중국의 향후 목표가 강성했던 漢(한)제국과 唐(당)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소위 ‘新中華(신중화)’의 구축에 있다는 수뇌부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언제부터 ‘중화’를 자처한 것일까. 불과 100여 년밖에 안 된다. 辛亥(신해)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漢人(한인) 내지 唐人(당인) 등으로 불렀다.
 
  현재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높여 부르는 ‘중화’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인물은 량치차오였다. 소위 ‘百日維新(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민족문제를 놓고 쑨원(孫文) 등 혁명파와 치열한 論戰(논전)을 전개하면서 ‘중화’를 처음 거론했다. 그는 光緖(광서) 28년(1902)에 발표한 <중국학술사상변천의 대세를 논함>에서 ‘중화’의 의미를 이같이 풀이했다.
 
  “5大洲(대주) 중에서 가장 큰 아시아에 있고, 그중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중화다. 인구가 전 세계의 3분의 1을 점하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중화다. 4000여 년 동안 역사가 중단되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중화다.”
 
  당시 쑨원의 혁명파는 만주족을 洋夷(양이)와 동일한 夷狄(이적)으로 간주한 까닭에 淸朝(청조)를 뒤엎고 한족 중심의 새 나라를 건설하자는 滅滿興漢(멸만흥한)을 기치로 내걸었다. 량치차오는 이를 ‘小(소)민족주의’로 비판하면서 漢(한)·滿(만)·蒙(몽: 몽골족)·藏(장: 티베트족)·回(회: 위그르족) 등 5族(족)을 하나로 묶은 ‘大(대)민족주의’를 주장했다.
 
 
  <朝鮮亡國史略> 저술
 
  훗날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정치고문으로 활약하게 된 양두(楊度)가 광서 33년(1907)에 이 논쟁에 뛰어들어 량치차오의 손을 들어주면서 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양두는 이때 발표한 <金鐵主義論>(금철주의론)에서 “중국 민족은 혼합된 민족으로 일종의 문화공동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쑨원의 혈통주의를 강력 비판했다. 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한족 이외의 여타 민족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쑨원도 이내 五族協和(오족협화)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당시 량치차오가 지나친 이상주의에 치우친 쑨원과 달리 현실적인 변혁방안을 제시했음을 뜻한다. 실제로 그만큼 제국주의의 실체를 통찰하면서 시의적절한 방략을 제시한 인물도 없었다. 이는 그가 復闢(복벽·군주제로 돌아감)에 찬성한 스승 캉유웨이(康有爲)와 다른 노선을 걷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마오쩌둥을 비롯해 20세기를 산 중국의 지식인과 혁명가 중 그에게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량치차오는 조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일찍이 그는 退溪(퇴계)의 聖學十圖(성학십도)를 知人(지인)들에게 나눠주며 스스로를 경계하는 座右銘(좌우명)으로 삼게 했다. 그는 조선이 日帝(일제)에 합병되자 <朝鮮亡國史略>(조선망국사략)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조선인을 세계에서 개인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민족으로 규정하면서 국가의 안녕보다 一族(일족)의 영화만을 추구한 관리 등의 안이한 자세에서 조선 망국의 원인을 찾았다.
 
  “이번 합방조약 발표를 둘러싸고 주변국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조선인들은 흥겨워하고 있고, 高官(고관)들 역시 기뻐하며 날마다 새로운 시대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얻기 위해 분주해하고 있다.”
 
  그의 이런 지적은 그가 망명지인 일본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가 극히 제한된 결과이기는 하나 일면 타당한 면도 있다. 그가 官民(관민)을 막론하고 조선인을 싸잡아 비난한 것은 결코 비하코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는 변혁을 두려워하는 중국인들을 경계할 생각으로 조선인의 안이한 대처를 질타한 것이다.
 
 
  캉유웨이와의 만남
 
량치차오의 스승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는 同治(동치) 12년(1873)에 주장(珠江) 삼각주가 펼쳐지는 광둥성 신후이현(新會縣)의 남쪽 섬마을 차컹춘(茶坑村)에서 태어났다. 량치차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유가경전을 습득하며 과거 합격을 위한 八股文(팔고문)을 익혔다. 그는 10세가 되던 광서 8년(1882)에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광저우(廣州)로 나가 수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 2년 후에 합격해 博士弟子員(박사제자원)이 됐다.
 
  그는 鄕試(향시)에 대비하기 위해 이듬해인 광서 11년(1885)에 광저우의 명문 서원인 學海堂(학해당)에 들어갔다. 4년 뒤인 광서 15년(1889)에 향시에 합격해 擧人(거인)이 됐다. 일단 거인이 되면 會試(회시)에 응시해 고관으로 나갈 수 있고, 설령 낙방할지라도 官員(관원) 후보가 되어 임용서열에 따라 知縣(지현)이 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량치차오는 이듬해 광둥성 일대에서 명성을 떨치던 캉유웨이의 문하로 들어갔다. 당시 캉유웨이는 광저우의 창싱리(長興里)에 있는 추씨(邱氏) 書屋(서옥)을 長興學舍(장흥학사)로 개조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량치차오는 광서 17년(1891)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베이징으로 가 刑部侍郞(형부시랑·법무부 차관) 리두안펀(李端仙)의 누이동생인 리후이샨(李蕙仙)과 결혼했다. 장인은 조정의 高官(고관)을 지낸 京兆公(경조공) 리자오이(李朝儀)였다. 이런 고관대작 집안의 리두안펀이 시골 출신 량치차오에게 자기 누이동생을 시집 보낸 것은, 량치차오의 향시 답안지를 읽고 크게 놀라 자신의 누이를 시집 보내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광서 20년(1894) 여름 淸日(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청국은 일방적으로 밀린 끝에 베이징까지 위험하게 되자 광서 21년(1895) 초부터 강화회담에 목을 매게 됐다. 량치차오는 이해 3월에 스승을 모시고 회시를 치르기 위해 베이징으로 향했다.
 
  얼마 후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상경한 거인들이 크게 흥분했다. 거인들이 연일 都察院(도찰원·감찰기관)으로 몰려가 시모노세키 조약의 폐기를 호소했다.
 
  캉유웨이는 량치차오와 함께 萬言書(만언서)를 작성했다. 얼마 후 거인들이 량치차오의 주선으로 松筠庵(송균암)에 모여 만언서를 통과시킨 뒤 도찰원에 제출했으나, 도찰원은 前例(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했다. 소위 ‘公車上書(공거상서)’로 불린 이 사건은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유신변법을 추진하는 첫걸음에 해당했다.
 
  거인들이 귀향하자 工部主事(공부주사)에 임명된 캉유웨이는 籍(적)만 걸어둔 채 수제자인 량치차오와 향후 대책을 숙의했다. 이들은 신문을 발행해 변법의 중요성을 널리 홍보키로 의견을 모은 뒤 이해 8월에 격일간의 <萬國公報>(만국공보)를 창간했다. 량치차오는 <만국공보>에 매번 한 편 이상의 글을 썼다. 량치차오의 언론인으로서의 삶은 여기서 시작됐다.
 
 
  <시무보> 주필로 활약
 
  이해 가을에 베이징의 宣武門(선무문) 밖에 있는 지금의 허우쑨(後孫)공원 안에서 강학회가 발족했다. 이해 12월 중순에 <만국공보>의 제호를 <中外紀聞>(중외기문)으로 바꿔 강학회의 기관지로 삼았다. 량치차오와 왕다셰(汪大燮)가 주필을 맡았다.
 
  西(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 세력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어사 양충이(楊崇伊) 등이 상소를 올려 캉유웨이 등이 “西學(서학)을 내세워 국가안정을 해치고 있다”고 탄핵하자 광서 22년(1896) 초 <중외기문>의 발행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때 탄스퉁(譚嗣同)이 량치차오를 찾아왔다. 두 사람은 시국을 토론하다가 이내 흉금을 털어놓은 사이가 됐다. 탄스퉁의 變法論(변법론)은 캉유웨이보다 훨씬 진보적이어서 혁명론에 가까웠다. 량치차오는 이해 4월에 상하이로 내려가 ‘時務報館(시무보관: 시무신문사)’을 상하이 강학회의 후신으로 설립한 뒤, 기관지인 <시무보>의 주필로 활약했다.
 
  호광총독 장즈둥의 지원을 받은 <시무보>는 10일마다 발행하는 旬刊(순간)이었다. 량치차오는 매번 4000~5000자에 달하는 논설을 썼다. <시무보>는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부수가 1만 부로 늘어났다. 당시 상하이의 <시무보>는 1897년에 옌푸(嚴復) 등이 톈진에서 발간한 <國聞報>(국문보)와 더불어 南北(남북)의 양대 언론을 형성했다. 당시 영국유학생 출신인 옌푸는 서양의 명저를 잇달아 번역해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었다.
 
  량치차오가 옌푸와 어깨를 겨루는 당대의 언론인으로 우뚝 서게 된 데에는 <조선책략>을 저술했던 황쭌센(黃遵憲)의 도움이 컸다. 오랫동안 일본·미국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황쭌센은 공거상서 당시 만언서를 작성한 량치차오를 눈여겨보았다가 장즈둥에게 주필로 천거했다.
 
  이후 황쭌센이 호남안찰사로 오게 되자 이내 량치차오는 후난성 時務學堂(시무학당)의 中文總敎習(중문총교습)으로 가게 됐다. 량치차오는 학생들에게 <만국공법>과 <기하원본> <일본국지> <만국사기> 등을 필독서로 지정해 주었다. 시무학당은 변법유신을 준비하는 정치학당이나 다름없었다.
 
 
  變法維新에 참여
 
戊戌變法을 추진했던 光緖帝.
  광서 24년(1898) 4월 캉유웨이의 주도하에 200~300명의 지식인들이 베이징의 ?東會館(월동회관)에 모여 ‘保國會(보국회)’를 결성했다. 베이징의 松雲草堂(송운초당)에서 열린 두 번째 집회에서 량치차오는 이후 人口(인구)에 膾炙(회자)된 名(명)연설을 했다.
 
  “지금 중국의 병은 외부의 病因(병인)에 의한 것으로 좋은 약만 있다면 금방 고칠 수 있소.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를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생각해 병을 키우면서 병이 없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소. 우리 4억 인민들이 각자 자신의 총명과 재능을 다하면 능히 구해낼 수 있소. 인민이 모두 나서고도 救亡(구망: 패망의 위기를 구함)치 못했다는 얘기를 나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소.”
 
  광서제가 이해 6월 11일에 ‘明定國是(명정국시)’를 반포하면서 변법유신이 시작됐다. 이해 7월 광서제는 량치차오를 불러 변법을 논의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량치차오의 官話(관화·北京 표준어) 구사능력이 너무 떨어져 광서제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으나 당시 변법이 변칙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소위 戊戌政變(무술정변)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청국 방문에 있었다. 이토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기는 했으나 일본 최고의 실세였다.
 
  당시 보수파의 반격으로 궁지에 몰린 광서제는 양루이에게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를 무마하면서 유신변법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내용의 密詔(밀조)를 衣帶(의대)에 써 주었다. 이에 캉유웨이 등은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여 后黨(후당: 서태후 지지자)을 일거에 제거하는 쿠데타를 추진하면서 이토와의 만남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다. 캉유웨이는 자신을 찾아온 이토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당부했다.
 
  “아직 변법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의 견제 때문이오. 부디 서태후를 만나면 변법의 중요성을 사리에 맞게 설명하고 태도를 바꾸도록 촉구해 주시오.”
 
  광서제와 이토와의 접견일은 9월 20일로 잡혀 있었다. 이보다 하루 전에 서태후는 광서제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이화원에서 자금성으로 돌아왔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이토를 접견하는 당일 병풍 뒤에 앉아서 이들이 하는 얘기를 모두 들었다. 광서제는 ‘兩國(양국)의 우의가 돈독해지기를 바란다’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몇 마디 하고는 접견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실패로 끝난 무술변법
 
戊戌정변 당시 처형된 탄스퉁(譚嗣同).
  이날 서태후 쪽에 가담키로 최종 결심한 위안스카이가 잉루에게 변법파의 쿠데타 계획을 밀고했다. 잉루는 곧바로 베이징으로 올라와 서태후와 밀담을 나눴다. 다음날 아침에 서태후의 命(명)에 의해 광서제는 瀛臺(영대)에 유폐됐고, 유신파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무술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써 ‘백일유신’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량치차오는 탄스퉁과 함께 있었다. 그가 탄스퉁에게 함께 피신할 것을 권하자 탄스퉁은 속히 일본공사관으로 가 이토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했다. 량치차오가 일본공사관으로 달려갔을 때 이토는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대리공사(을사조약 당시 駐韓공사)와 밀담을 나누던 중이었다. 량치차오는 평소 하야시와 官話(관화)로 대화를 나눴으나 혹여 광둥 방언이 섞인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우려해 종이 위에 이같이 썼다.
 
  “나는 3일 내에 형장으로 끌려가 사형을 당할 사람이오. 2가지 일을 부탁 드리려고 하오. 그대가 중국을 형제지국으로 여기고 옛 교분을 잊지 않는다면 이를 들어주기 바라오.”
 
  하야시가 말했다.
 
  “왜 죽으려는 것이오. 곰곰이 생각해 보시오. 만일 마음이 변하면 어느 때든 이곳으로 오시오. 내가 구해 주겠소.”
 
  이날 밤 량치차오는 일본공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인 9월 22일 탄스퉁이 량치차오를 찾아 일본공사관으로 왔다. 두 사람은 친분이 있는 영국인 선교사 리처드 티모시를 찾아가 서태후에게 압력을 가하는 방안을 숙의했다. 이에 티모시는 영국공사, 예일대를 졸업하고 귀국해 있던 룽훙(容?)은 미국공사, 량치차오는 일본공사를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미국공사는 시산(西山), 영국공사는 베이타이허(北戴河)로 요양 차 떠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피하지 않기로 결심한 탄스퉁이 이내 자신의 원고를 량치차오에게 넘기면서 후일을 부탁했다. 량치차오가 거듭 함께 망명할 것을 권하자 탄스퉁이 거절했다.
 
 
  일본 亡命
 
  량치차오는 하야시 대리공사의 주선으로 일본 군함 오시마(大島)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량치차오는 이로부터 14년에 걸친 긴 망명생활에 들어갔다. 그가 일본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영국의 도움으로 홍콩을 거쳐 망명한 캉유웨이가 찾아왔다. 당시 량치차오는 서양문명을 소개한 일본의 譯書(역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광서 25년(1899) 3월 청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일본 정부가 캉유웨이에게 일본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캉유웨이는 그해 7월 캐나다로 건너가 中國保皇會(중국보황회)를 설립했다. 이어 그는 싱가포르에 거처를 마련한 뒤 화교들로부터 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도쿄에 있는 량치차오에게 명해 국내의 탕차이창(唐才常)과 접선하게 했다.
 
  탄스퉁의 절친한 친구였던 탕차이창은 일본에서 쑨원을 만나 혁명단체인 正氣會(정기회)를 설립한 뒤 自立會(자립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자립군을 조직해 폭력혁명을 일으키려 했다. 이해 말 스승의 명을 좇아 보황회 조직차 호놀룰루로 간 량치차오는 다시 자립군의 일로 비밀리에 상하이로 들어갔다.
 
  이듬해인 광서 26년(1900) 봄에 의화단사건이 일어났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양광총독 리훙장과 연계해 무력으로 변법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리훙장이 서태후의 명을 받고 上京(상경)해 연합군과 협상에 나서는 바람에 좌절됐다. 이해 8월 초 일부 자립군이 성급히 일을 추진하다 실패했다. 탕차이창은 동료 20여 명과 함께 체포돼 죽음을 당했다.
 
 
  ‘新民’에 눈을 뜨다
 
량치차오의 글씨.
  량치차오는 자립군의 봉기가 좌절되자 호남시무학당 시절의 제자인 차이어(蔡顎) 등의 권고를 받아들여 在日華僑(재일화교)를 위한 학교건립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해 9월 거주지 인근의 작은 부지를 빌려 大同學校(대동학교)를 개설했고, 이어 <淸議報>(청의보)를 창간했다. <청의보>는 광서 28년(1902)에 <新民叢報>(신민총보)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신민총보> 창간호에서 그 의미를 이같이 풀이했다.
 
  “나라는 민족이 모여 이룬 것이다. 민족이 우매하고 나약한데도 바로 설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나라가 부강하고 영화롭기를 바란다면 新民(신민)의 길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그가 일본으로 망명한 뒤 일본 번역서를 통해 서구사상을 접하면서 먼저 백성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후 그의 모든 변혁운동은 ‘신민’이라는 두 글자에 집약돼 표출됐다.
 
  신민의 대상은 한족을 포함한 모든 민족이었다. 그가 만주족 타도를 전제로 한 쑨원의 ‘三民主義(삼민주의)’를 격렬히 반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량치차오는 광서 29년(1903) 2월에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 밴쿠버에 내린 그는 몬트리올을 거쳐 뉴욕으로 갔다. 사상 처음으로 미국 본토의 땅을 밟은 것이다. 그는 미국의 번영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이 도시의 방대함과 번성을 얘기하자니 보기에 눈이 어지럽고, 듣기에 귀가 따갑고, 연설하기에 힘이 들고, 베껴 쓰기에 손이 아플 지경이다.”
 
  미국에서 그는 차이나타운의 어지러운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들 화교에게는 지방의식만 있고 국가의식이 없었다. 그가 미국을 둘러본 후 중국은 開明君主(개명군주)의 통치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량치차오는 가는 곳마다 화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그해 5월 26일자 <보스턴석간>은 그의 강연행보를 이같이 묘사했다.
 
  “량치차오는 미래의 신중국을 그려냄으로써 잠재적인 애국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동양의 안토니우스’인 그는 중국인들에게 그들이 현재 얼마나 노예적인 처지에 있는지를 잘 알려주었다.”
 
  당초 량치차오는 서구의 민주공화제도에 대해 커다란 동경심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는 미국을 순방하면서 공화제와 결별할 생각을 품었다. 그 이유를 이같이 밝혔다.
 
  “혁명이 일어나면 틀림없이 수백의 혁명군이 일시에 일어나 벌판은 시체로 가득 차고 내와 계곡은 피로 넘칠 것이다. 온 나라는 피폐하고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쑨원의 삼민주의 비판
 
공화제 수립을 주장한 혁명파의 영수 쑨원(孫文).
  당시 그가 공화제와 결별하겠다는 뜻을 선포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가 민주공화제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공화제는 당시 중국의 상황 등에 비춰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국내정세는 혁명파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광서 31년(1905) 8월에 쑨원과 황싱(黃興), 장빙린(張炳麟)이 이끄는 3개 단체가 하나로 통합해 ‘中國同盟會(중국동맹회)’를 결성했다. 동맹회는 쑨원의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내걸고 기관지인 <민보>를 창간했다.
 
  ‘중국동맹회’발족으로 곤경에 처한 청조는 광서 32년(1906) 9월 일정한 단계를 밟아 立憲主義(입헌주의)로 이행하겠다는 ‘豫備立憲(예비입헌)’을 선포했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이 소식을 듣자 곧바로 정당조직에 착수했다. 정당의 명칭은 ‘憲政會(헌정회)’였다. 량치차오는 양두(楊度) 및 슝시링(熊希齡) 등과 손을 잡고 베이징에 신문사를 설립해 ‘헌정회’ 대변인으로 활약하려 했다. 그러나 도쿄에서는 혁명의 구호가 물결치고 있었다. 그는 광서 33년(1907) 11월에 스승에게 서신을 보냈다.
 
  “최근 온 나라가 미쳐 돌아가는 듯합니다. 이제 청조와 싸우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합니다. 혁명당과 결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써 혁명파와의 전면적인 論戰(논전)이 전개됐다. 량치차오가 <신민총보>를 통해 혁명파에 총공세를 가하자 혁명파도 쑨원과 장빙린 등이 차례로 나서 <민보>를 이용해 총반격에 나섰다.
 
  그는 反滿(반만)을 기치로 내건 혁명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가 볼 때 ‘반만’을 기치로 내건 혁명은 한족의 種族革命(종족혁명)에 불과했다. 이는 곧 만주족은 물론 몽골족과 위구르족, 티베트족의 반발을 사 내란을 촉발하고, 열강의 개입으로 인한 국토분할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신해혁명 이후의 역사는 그런 방향으로 진행됐다.
 
  량치차오는 ‘삼민주의’ 여러 내용 중 ‘平均地權(평균지권)’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는 이를 두고 “토지 私有化(사유화)가 현대 문명의 源泉(원천)임을 모르는 無知(무지)의 소치”로 몰아붙였다. 그는 “일체의 자본을 적극 통제해야 한다”는 쑨원의 주장에도 결사 반대했다. 민족자본이 취약한 상황에서 이를 관철할 경우 열강의 침탈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당초 많은 사람들은 혁명파의 필진이 량치차오 한 사람을 당해내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양측이 공방을 벌이자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왕자오밍과 2년간 論戰
 
량치차오와 2년간 論戰을 벌인 왕자오밍.
  이는 혜성처럼 등장한 소장파 왕자오밍(汪兆銘: 字는 精衛. 후일 일본 괴뢰정부인 南京정부의 주석 역임)의 활약 때문이었다. 당시 혁명파는 문재가 뛰어난 젊은이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입헌파 내에서는 량치차오를 대신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캉유웨이밖에 없었다. 캉유웨이는 당시에 터져 나온 소위 ‘衣帶詔(의대조: 곤룡포 허리띠에 은밀히 내린 조명) 변조사건’ 및 화교의 기부금 횡령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있어 영향력이 예전만 못했다. 이로 인해 량치차오 홀로 오늘은 쑨원, 내일은 장빙린, 모레는 왕자오밍과 논전을 전개했다.
 
  양측은 2년 동안 총 100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토론을 벌였다. 왕자오밍은 <민족국가>와 <민주정체를 논함> 등의 글을 통해 청조의 부패상을 통렬히 지적하면서 량치차오의 주장을 반박했다. 부패한 청조에 절망하고 있던 량치차오의 추종자와 <신민총보>의 독자들이 앞 다퉈 쑨원과 <민보> 쪽으로 달려갔다. 량치차오는 광서 32년(1906) 11월에 논전의 중지를 제안했다. 이듬해 그는 <신민총보>를 정간했다.
 
  광서 34년(1908) 초 량치차오는 국회의 조속한 개설을 위한 청원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11월 광서제와 서태후가 하루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광서제의 사망을 두고 독살설이 분분했는데, 최근 중국 국가중점문화공정팀은 광서제의 遺骨(유골)을 분석한 결과, 광서제가 독살됐음을 확인했다.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 재풍의 아들 푸이(溥儀)가 寶位(보위)에 올랐다.
 
 
  위안스카이의 帝制운동 저지
 
신해혁명 당시 만주족의 상징인 변발을 자르는 혁명군.
  宣統(선통) 3년(1911) 10월 10일에 우창(武昌)에서 무장봉기가 발생했다. 이것이 신해혁명이다. 곤경에 처한 청조는 위안스카이를 내각총리로 임명하면서 軍(군)의 지휘권을 위임했다. 위안스카이는 혁명파와 내통해 선통제의 퇴위를 이끌어낸 후 이듬해 쑨원의 양보로 임시대총통이 됐다.
 
  위안스카이는 량치차오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의 귀국을 종용했다. 이해 11월 중순 량치차오는 14년간의 망명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베이징에 머물자 베이징대의 일부 학생들이 청원을 제기하며 그를 총장으로 모시고자 했다.
 
  귀국한 량치차오는 입헌정당 결성에 나섰다. 이해 말에 치러진 선거에서 중국동맹회의 후신인 國民黨(국민당)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국민당이 民權(민권)을 강조하며 급격한 개혁을 역설하자 민주당과 공화당 등은 國權(국권)을 내세우며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당시 량치차오는 민주당의 막후 실력자인 동시에 공화당의 공식 당원이었다.
 
북양군벌 단치루이(段祺瑞).
  국민당의 압승에 위기감을 느낀 위안스카이는 이듬해인 1913년 3월에 측근을 사주해 국민당의 지도자인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했다. 정국이 뒤숭숭한 가운데 이해 5월에 위안스카이가 출자한 20만원을 토대로 야권 3당이 進步黨(진보당)으로 통합됐다. 량치차오는 사실상의 당수인 이사로 추대됐다.
 
  1916년 6월에 위안스카이가 세인들의 지탄 속에 숨을 거두자 정국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北洋軍(북양군) 내 최대 파벌인 펑궈장(馮國章)의 直系(직계)와 단치루이(段祺瑞)의 ?系(완계)가 정면 충돌했다.
 
  쑨원은 ‘護法(호법)’을 기치로 내걸고 ‘비상국회’를 소집한 뒤 軍政府(군정부)를 조직하면서 단치루이를 ‘民國(민국)의 반역자’로 선포했다. 단치루이가 북양군을 동원해 이를 토벌하려 했지만, 펑궈장의 압력에 밀려 사직했다. 단치루이를 돕던 량치차오도 함께 물러났다.
 
  이후 칩거에 들어간 량치차오는 <中國通史>(중국통사) 집필에 들어갔다. 중국의 전 역사를 하나로 꿴 사서의 저술은 그의 필생의 바람이었다.
 
 
  5·4운동을 촉발시키다
 
5·4운동 당시 대학생들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인 군중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때였다. 그는 이해 12월 초에 베이징으로 올라와 외교정책 자문역할을 맡았다. 당시 베이징 정부는 일본 측과 산둥과 만주철도의 특권을 이양키로 밀약을 한 상태였다. 량치차오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이해 12월 28일에 베이징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파리行(행) 요코하마마루(橫濱丸)호에 몸을 실었다.
 
  런던에 1주일 머문 후 파리로 건너와 여장을 풀자마자 량치차오는 곧 베이징 정부가 일본과 밀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크게 노한 그는 곧 외교위원 왕다셰(汪大燮)에게 전보를 띄웠다.
 
  “이 밀약은 윌슨의 14개조에 위배되므로 취소할 수 있다. 다시는 남에게 침탈의 구실을 주지 말 것을 정부에 강력히 요구한다.”
 
  량치차오의 전보내용이 紙上(지상)에 보도되자 朝野(조야)가 들끓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프랑스 등 열강은 일본의 손을 들어 주었다. 베이징 정부가 비밀전보를 보내 서명에 동의할 것을 명했으나 량치차오는 이를 거부했다.
 
  이를 계기로 베이징의 각 대학 학생들이 街頭(가두)시위에 나섰다. 이것이 유명한 5·4운동이다. 결과적으로 량치차오가 5·4운동을 촉발시킨 셈이다. 이듬해인 1920년 3월 귀국한 그는 총통인 쉬스창을 만나 체포된 43명의 학생을 전원 석방할 것을 요청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해 10월에 량치차오의 초청으로 영국의 철학자 버틀란트 러셀이 중국을 방문했다. 러셀의 방문은 전례 없는 러셀 붐을 일으켰다. 당시 러셀은 “중국에는 계급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서구처럼 계급투쟁을 전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량치차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有産(유산)과 無産(무산)을 기본모순으로 간주한 공산당과 달리 有槍(유창: 무력을 지닌 군벌)과 無槍(무창: 무력이 없는 인민대중)을 내세운 이유다.
 
  당시 난카이(南開)대학과 칭화(淸華)대학을 오가며 강의에 열중했던 량치차오는 <先秦(선진)정치사상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儒(유)·墨(묵)·道(도)·法(법)으로 상징되는 諸子百家(제자백가)의 사상 모두 富國强兵(부국강병)을 도모한 사상이라는 게 이 책의 요체다.
 
  량치차오는 이 책을 펴낸 이후 南宋代(남송대)의 대학자인 辛棄疾(신기질)의 연보 작성에 매진하던 중 1928년 11월 하순에 宿患(숙환)인 방광염이 악화돼 쓰러졌다. 이후 두 달 가까이 투병하다가 이듬해 1월 숨을 거두었다.
 
 
  多變인가, 善變인가
 
  량치차오는 변법운동에서 신해혁명, 5·4운동으로 이어지는 중국근대사의 대사건 한 가운데 서서 혁명가이자 사상가, 언론인, 학자로 활약했다. 이 와중에 그는 자주 변신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삶을 두고 ‘多變(다변)’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다변’이라기보다는 그의 주장대로 ‘善變(선변)’으로 보는 게 옳다. 그는 <선변과 호걸>에서 ‘선변’의 의미를 이같이 풀이한 바 있다.
 
  “君子(군자)의 행보는 마치 일식 월식과 같아 모든 사람들이 훤히 보고 있다. 대장부의 일처리가 광명정대해야 하는 이유다. 방법은 수시로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하나 그 기본취지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말한 ‘선변’은 기본적으로 <주역>에서 역설하는 ‘自强不息(자강불식)’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을 제거하는 것을 뜻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뜻한다. 상황이 변하고 있는데도 과거의 것을 墨守(묵수)하는 것은 保守(보수)가 아닌 守舊(수구)일 뿐이다.
 
  실제로 그는 청조의 복벽을 찬성한 자신의 스승 캉유웨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이같이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욱 사랑한다.”
 
  량치차오가 평생 추구한 목표는 열강에 의해 분할될 위기에 처한 중국을 개혁해 富國强兵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후일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마오쩌둥은 량치차오의 ‘신민’ 주장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마오쩌둥은 1918년 학생단체를 조직하면서 ‘신민학회’라고 했고, ‘新民主主義(신민주주의)’를 통치이념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중국의 ‘五星紅旗(오성홍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재 타이완(중화민국)은 쑨원의 혁명노선을 도형화한 ‘靑天白日旗(청천백일기)’를 국기로 삼고 있다. 여기서 白日은 ‘소민족주의’에 입각한 한족을 상징한다. 그러나 신해혁명 당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량치차오의 ‘대민족주의’에 입각한 五族共和(오족공화)를 더 선호했다. ‘오성홍기’의 다섯 개 별은 ‘오족공화’에서 나온 것이다.
 
  최근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중화’의 자부심을 되찾은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을 재조명하면서 량치차오의 변혁노선을 쑨원의 혁명노선보다 높이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중국의 경제발전 노선이 점진적인 변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량치차오의 노선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결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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