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善姬 자유기고가〈giongia@hanmail.net〉

- 피맛골 거리모습.
“아마 내년 1월까지는 있게 될 거예요.”
“어이구, 그럼 얼마 안 남았네? 아니 피맛골을 도대체 왜 없애는 거야? 개발도 좋지만 이런 데는 다시 만들기도 어려운데 말이야. 그나저나 없어지기 전에 한 번 더 와야 할 텐데. 갈 데는 정했수?”
“아직이요. 갈 만한 데가 없네요. 새 건물은 임대료가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나고. 마땅한 자리가 없어 가게 문을 닫을까도 생각 중이에요.”
막걸리와 빈대떡, 해장국으로 대표되는 서울의 대표적인 선술집 거리인 피맛골에서는 요즘 손님과 주인이 나누는 이런 대화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이 일대를 빌딩촌으로 만드는 정비계획안이 확정돼 이미 개발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보존이냐, 개발이냐를 놓고 논란이 많았던 피맛골은 새롭게 변형(?)해 보존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청진구역 정비사업 시행을 맡은 업체들이 서울시 도시·건축공동위원회에 제출한 계획에 따르면 기존 피맛길 자리에 폭 5m 가량의 도로가 만들어지고 양쪽으로 상가가 지어진다. 대로와 인접한 쪽은 건물 높이가 3층을 넘지 않고, 피맛길 양쪽 1, 2층 상가 점포들은 전통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도록 디자인된다.
이는 지난 2004년 서울시가 내놓은 ‘건축유도지침’에 따라 만들어진 청진동 르메이에르 종로타워의 피맛길보다는 조금 발전된 형태. 르메이에르 종로타워는 ‘최소 4m 폭으로 길을 남기고, 채광과 환기가 가능하도록 한다’는 건축유도지침에 의거해 건물 한가운데를 회랑 형식으로 비워 두고 ‘피맛골’이라는 입간판을 내걸었다. 하지만 대리석이 깔리고, 베이커리 카페가 들어선 길에서 피맛길 특유의 정취를 찾기란 쉽지 않다.
피맛길은 교보문고 앞에서부터 종로3가에 이르는 좁은 뒷골목. 원래는 동대문까지 이어진 긴 골목이었지만 지금은 종로3가까지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六矣廛(육의전)이 있었던 종로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로 늘 붐볐다.
궁이 가까워 임금이나 양반들의 행차도 잦았다. 그때마다 백성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해야만 했다. 그게 싫었던 사람들은 뒷골목으로 피해 들었다. 그러고는 높으신 분들의 행차가 끝날 때까지 주막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거나 국밥을 먹었다. ‘말을 피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의 ‘避馬(피마)길’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골목이 개발 바람에 밀려 사라지게 되면서 이 길에 자리 잡고 있던 음식점들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한때 500여 개에 달하던 음식점들은 이미 절반 이상 자리를 옮겼거나 문을 닫았다. 일부는 르메이에르 종로타워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지만 피맛골의 오랜 단골들은 “옛날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맛이 변했다”며 서운해한다. 반면 “바뀔 때가 되었다”, “쾌적한 환경이 되니 한결 낫다”는 평도 들린다.
어찌 됐든 수백년간 서민들의 해방구 역할을 톡톡히 했던 피맛골은 이제 추억의 이름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 길을 50년 이상 지키며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5개 음식점을 찾아 옛 이야기를 들었다.
해장국의 원조 ‘청진옥’
![]() |
| 해장국의 원조 ‘청진옥’ |
워낙 오랫동안 한자리에 있었던 탓에 移轉(이전) 사실을 모르고 찾아오는 고객들이 많아 처음에는 옛 건물 터에 24시간 직원을 배치, 고객들을 새 가게로 안내했다. 지금은 어지간히 알려져 밤 시간에만 안내직원을 두고 있다. 청진옥 崔俊容(최준용·40) 사장은 “새 건물로 들어오기까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이쪽은 다 개발이 예정되어 있어 갈 만한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낙원동 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희 집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 ‘청진옥이라는 상호가 청진동을 의미하는 건데 다른 곳으로 가면 되겠느냐’고 걱정들을 하시더라고요. 그렇다고 여기로 들어오기에는 건물이 너무 현대적인 분위기여서 해장국과는 맞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다들 ‘깨끗해서 좋다’고들 하시네요. 지금은 오히려 ‘잘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 사장은 “최대한 해장국집의 분위기가 나도록 인테리어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출입문으로 옛날 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미닫이 유리문을 단 것도, 유리창마다 다소 촌스러운 필체로 ‘막걸리’, ‘해장국’ 글씨를 붙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의자와 테이블도 새로 맞추기는 했지만 등받이와 좌석이 일체형으로 만들어진 옛날식이고, 주방 집기들은 예전 청진옥에서 쓰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의 말대로 옛 정취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현재 청진옥을 운영하고 있는 최 사장은 청진옥 창업주인 최동선(84년 작고)씨의 손자로 아버지 최창익(2005년 작고)씨의 뒤를 이어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가 청진옥의 문을 연 것은 1937년. 당시 종로구청 앞에는 나무시장이 열려 아침이면 나무를 팔기 위해 무악재를 넘어온 일꾼들로 항상 북적였다고 한다.
![]() |
| 최준용 사장. |
“30여 년 전 신문 중에 할아버지 인터뷰 기사가 난 게 있어요. 그걸 읽어보니 ‘원조’라는 것과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든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정말 대단하셨더라고요. 다른 가게에서 원조 간판을 붙이면 곧바로 달려가 떼어내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밤 11시에 문을 닫으면 밤새 끓여 또다시 새벽 3시에 문을 열었을 정도로 부지런하기도 하셨고요. 통금이 있을 때는 새벽 4시부터 문을 열었는데 1분이라도 더 빨리 문을 열려고 가게마다 경쟁을 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 후 가게는 아들에게 대물림되었고, 다시 그 아들에게로 이어졌다. 3형제 중 둘째인 최 사장은 부친이 직접 후계자로 낙점한 인물. CJ그룹 홍보실에서 근무하던 그는 ‘네가 한번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제안에 직장생활을 접고 4년 전,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가게 일을 하셨던 어머니도 아직 계시고, 주방이나 홀에 계신 분들이 보통 30년 넘게 일한 분들이라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또, 작은 아버지도 저쪽에서 같은 해장국집인 ‘청일옥’을 하고 계시고요. 어릴 때부터 늘 보고 자란 풍경이고, 익숙한 얼굴들이라 새로운 분야지만 힘들지는 않아요.”
그가 기억하는 피맛골은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이미 오래 전부터 청진동 일대는 지구단위계획이 수립되어 건물 개·보수를 건물주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해 변화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었다는 것. 그는 ‘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새 건물로 옮기는 것을 아주 못마땅해하셨을 것 같다’며 웃었다.
“이곳으로 온 뒤 음식 맛이 달라졌다는 고객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게 감정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장소만 바뀌었을 뿐, 몇십 년 동안 일한 주방장도 그대로이고, 양념도 그대로거든요. 매일 아침 어머니가 시장에 직접 나가셔서 재료를 구입하는 것도 바뀌지 않았고요.
물론 변화가 없는 건 아닙니다. 여기로 오면서 국이 좀 뜨거워지긴 했어요. 해장국은 너무 뜨겁지 않게 먹는 게 제일 맛있는데 요즘은 펄펄 끓는 걸 좋아하는 추세라 거기에 맞추었죠. 국밥도 전에는 무조건 국에 밥을 말아 내는 형태였는데 요즘은 밥과 국을 따로 떠요. 오래 다닌 분들은 다 알지만 처음 오신 분들은 밥이 말아져 나온 것에 거부감을 갖더라고요. 또, 찬밥을 뜨거운 국물에 토렴하는 과정을 거치다 밥알이 한두 알 들어가면 ‘먹던 국을 준 것 아니냐’는 오해도 하고요. 그래서 아예 ‘따로국밥’이라는 메뉴를 만들었습니다. 젊은 고객들의 반응은 확실히 좋아요.”
젊은 사장이 이끄는 새로운 청진옥은 이처럼 전통을 잃지 않는 가운데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올 여름 그의 형이 청진옥 양재점을 낸 것을 시작으로 동생에게도 분점을 맡길 계획을 세웠다. 최 사장은 “일반적인 프랜차이즈 형태와는 다른 개념”이라며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는 청진옥을 물려주시고, 작은 아버지에게는 청일옥을 내 분가시킨 것처럼 우리 삼형제도 각각 다른 장소에서 같은 맛을 내는 3개의 청진옥을 운영할 것”이라고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56년 전통의 메밀국수 전문점 ‘미진’
![]() |
| 56년 전통의 메밀국수 전문점 ‘미진’ |
미진이 문을 연 것은 1954년. 창업주는 안평순(1978년 작고)씨로, 지금의 이영주(69) 사장이 맡아 운영한 지는 31년째다. 새 매장에서 손님을 맞고 있는 이 사장은 “새 가게도 아주 마음에 든다”며 웃었다.
“정든 걸로 따지면 옛날 건물이 훨씬 낫지요. 그 자리에서만 29년을 있었으니까요. 이 지역에 개발 얘기가 나온 지 워낙 오래 돼서 언젠가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사를 가게 되니까 참 아쉬웠어요. 지금은 그래도 양쪽을 모두 하고 있어서 덜한데 내년 1월에 완전히 본점 문을 닫게 되면 정말 서운할 것 같아요. 처음엔 가게를 접을까도 생각했는데 일단 옮겨서 해 본 뒤에 결정하기로 하고 새 가게로 온 거예요. 4월 말에 이사를 해서 5월에 문을 열었는데 문 열자마자 손님들이 얼마나 밀려들던지…. ‘매장이 넓어져서 줄 서는 일은 이제 없어지겠다’했는데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더라고요.”
이처럼 메밀국수를 먹기 위해 줄을 서는 풍경은 새 가게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진은 예약을 받지 않는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오는 순서대로 입장한다는 것이 미진의 원칙. 한 번은 모 장관 비서실에서 예약을 하고 싶다는 전화를 걸어 왔지만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그 장관도 10분 동안 줄을 선 뒤에야 메밀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고.
![]() |
| 이영주 사장 |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저희 집으로 곧바로 오는 분도 있어요. 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 귀국하는 분들 중에는 공항에서 곧장 여기로 오기도 하고요. 그런 분들은 특별한 맛 때문이라기보다 그 안에 담긴 향수가 그리웠던 것 아닐까 싶어요.”
이제는 미국에까지 입 소문이 나 LA에 분점을 내고 싶다며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국내에서도 프랜차이즈 요청이 많았다. 하지만 이사장은 모두 거절한다. 초창기에 몇 번 시도한 분점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제는 프랜차이즈 사업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가게에서도 거의 손을 떼 본점은 딸과 사위가, 새 가게는 직원들이 운영을 맡고 있다.
“미진을 창업하셨던 분이 저한테 가게를 물려주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돈하고 나하고 바꾸어야 장사를 할 수 있다’고.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그게 참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를 생각할 겨를이 없이 평생을 가게에서 다 보냈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아주 편안하게 쉬고 있어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미진을 기억해주고, 오랜 세월 변함없이 맛있게 우리 음식을 드신다는 데서 보람을 느끼죠.”
손님들에게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이영주 사장. “음식을 정성껏 잘 만드는 게 내가 손님들에게 할 수 있는 감사의 표시”라는 그는 “최고급 재료만 고집하고, 매장에서 직접 만든다는 원칙을 앞으로도 계속 지켜나가겠다”고 밝혔다.
50년 전통의 족발집 ‘장원’
![]() |
| 50년 전통의 족발집 ‘장원’ |
“테이블, 의자도 모두 바꾸었고 집기들도 다 새로 장만했어요. 아무래도 새 건물에 맞추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임대료를 생각하면 음식 값을 올려야 하는데, 전형적인 서민음식을 그렇게 비싸게 팔 수도 없고 메뉴를 다양화하는 쪽으로 방법을 찾았어요. 저쪽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 주변에 젊은 직장인들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그래서 전에는 없던 점심 백반메뉴들을 추가했지요. 술안주로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닭볶음탕도 새로 만들었어요.”
전형적인 선술집 분위기였던 장원은 이처럼 새 건물로 옮기며 대대적인 변신을 꾀했다. 젊은 직장인들뿐만 아니라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깨끗한 화장실, 쾌적한 식당 내부는 오랜 단골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가게를 옮긴 사실을 모르는 고객들도 있어 원래 매장도 문을 열고 있다. 김씨는 아침 일찍 피맛골 본점으로 출근해 족발을 삶은 뒤 새 건물로 건너와 점심손님 준비를 한다. 오후 3시부터는 다시 본점으로 가 단골손님들을 맞는다.
![]() |
| 김민자 사장. |
김민자 사장 역시 “여기는 시골동네 같은 곳”이라며 “사람도 가게도 오랜 세월 동안 바뀌지 않고 그대로이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그렇다”고 한다.
“이웃 간의 정도 많고, 인심도 후하고, 참 따뜻한 동네예요. 새 건물은 깨끗해서 좋기는 한데 푸근한 맛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만드는 건 똑같은데 예전 맛이 아니라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저도 알 것 같아요.”
“피맛골을 떠나는 것이 너무 아쉬워 모든 가게가 다 함께 옮겼으면 했는데 몇 집만 오게 되어 안타깝다”는 김민자 사장. 영업이 끝나면 피맛골 상인들이 오순도순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곳으로도 유명했던 장원은 이제 시대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
빈대떡의 명가 ‘열차집’
![]() |
| 빈대떡의 명가 ‘열차집’ |
“문을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항상 손님이 많았어요. 저희 집만 그런 게 아니라 피맛골 전체가 다 그랬죠. 이 근방에 신문사들이 다 모여 있어서 언론인도 많았고, 문화방송이 있을 때는 방송국 사람들도 정말 많이 왔어요. 중앙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학교 선생님, 대학생, 정치인 등 직업도, 나이도 참 다양했죠. 지금은 낮 시간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많고, 저녁에는 퇴근길 직장인들이 많아요. 10년, 20년 만에 다시 와서 보고는 ‘아직도 그대로 있다’고 반가워하는 분들을 보면 저도 가슴이 뭉클해져요. 그러고 보니 세월이 참 많이 흘렀네요.”
고객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단골들 이야기로 흘렀고, 우 사장은 천천히 세월을 더듬었다. 처음 장사할 때 막걸리 값이 200원이었다는 이야기, 지금처럼 병 막걸리가 아니라 커다란 독을 묻어두고 그 안에 술을 받아 한 주전자씩 팔던 이야기, 대학생들이 술값이 없어 맡기고 간 시계가 나중에 바구니로 하나였다는 이야기 등 이제는 추억이 된 사연들을 술술 풀어낸다.
![]() |
| 우제은 사장. |
열차집의 명성은 멀리 외국에까지 알려져 일본, 중국, 대만 등지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많다. 몇 년 전에는 일본 오사카의 대형 음식점에서 우 사장을 초빙, 20일 간 현지에 머무르며 빈대떡 기술을 전수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피맛골을 떠나게 되면서 가장 아쉬운 게 바로 이 점이에요. 음식도 하나의 문화거든요. 피맛골은 외국 관광객들 사이에서 우리 음식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아주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져 있어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이 오는지 외국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그런데 이제 여기가 없어지면 서울의 중요한 관광지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잖아요. 장사를 더 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런 장소가 아무 대안도 없이 한순간에 없어진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워요.”
“새 건물로 가자니 임대료가 세 배 가까이 되고, 분양 받는 것도 엄두를 못 내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는 우 사장. “열차집이 없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며 아쉬워하는 고객들에게 속시원한 답을 해 줄 수 없는 현실이 그저 답답할 뿐이다.
종로에서만 5대째 살고 있는 토박이음식점 ‘함흥집’
![]() |
| 종로에서만 5대째 살고 있는 토박이음식점‘함흥집’ |
50여 년 전, 어머니가 창업한 가게를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는 金龍助(김용조·66) 사장은 종로 토박이로 5대째 이곳에 살고 있다. 피맛골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지난 1994년, 종로구청이 피맛골 활성화 계획을 세워 추진할 때 자문에 응해 준 적도 있다.
“저기 광화문우체국에서부터 사간동, 팔판동을 지나 삼청공원까지가 다 개천이었어요. 그 개천을 끼고 녹두빈대떡집이 많이 생겼지요. 물도 깨끗하고, 샘터도 있어서 그 주변에서 먹는 빈대떡 맛은 정말 일품이었어요. 그런데 개천이 없어진 것 말고는 피맛골은 몇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해요. 이 주변에 요정이 많았는데 그런 것들이 다 없어지고, 주로 한옥이랑 적산가옥들이던 집이 음식점으로 개조된 게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요.”
![]() |
| 김용조 사장. |
“물론 세월이 흐르며 고객층은 좀 달라졌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데를 별로 안 좋아하지만 1960~1970년대에는 이곳에 대학생들이 참 많았어요. 서울대도 혜화동에 있을 때였고, 대학가 주변에 지금처럼 유흥업소들이 많지 않던 때라 여러 학교 학생들이 모여 들었죠. 주머니가 가벼우니까 주로 먹는 건 막걸리에 빈대떡이었어요. 외상도 많이 했죠. 시계도 맡기고 가고, 학생증도 맡기고. 그래도 다 받아 주었어요. 그때는 그런 게 통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떼인 것도 많아요. 카드가 생기면서 그런 문제는 없어졌지요.”
“이제는 다 옛날 얘기가 되었다”며 쓸쓸하게 웃는 정씨에게 이주계획을 물었다. 그는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라며 말을 아꼈다.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마침 옆 테이블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70대 노신사가 “이런 방식으로 없애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피맛골을 다녔다는 그는 “외국은 도시미관계획을 세워도 옛것을 살려가면서 하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깡그리 다 없애버리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함흥집을 나서는 길,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해진다”던 그녀의 말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