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근대를 만든 사람들] 캉유웨이(康有爲)

戊戌變法으로 입헌군주정 꿈꾼 실패한 개혁가

  • : 신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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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聖人도, 聖賢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개혁가이자 이상주의자였던 그가 중국의 근대 지성사에 기여한 공은 지대하다.”

申東埈
⊙ 1956년 충남 천안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同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조선일보·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교수신문 편집국장 역임.
⊙ 저서: <논어론> <순자론>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공자와 천하를 논하다> 등 20여 권.
캉유웨이.
중국 산둥성(山東省)의 칭다오(靑島)는 ‘칭다오맥주’의 산지로 유명하다. 원래 이곳은 작은 어촌이었으나 光緖(광서) 23년(1897)에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침공한 독일이 租界地(조계지)로 조성하면서 商港(상항) 및 軍港(군항)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한국 굴지의 기업을 비롯해 수많은 해외기업들이 들어와 산둥성 최대의 무역항으로 각광받고 있다.
 
  칭다오를 관광할 경우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이 청대 말기에 일세를 풍미했던 캉유웨이(康有爲)의 저택인 ‘天游園(천유원)’이다. 바다와 면한 후치엔완(泉灣) 부근 푸산즈루(福山支路) 5호에 위치한 ‘천유원’은 광서 25년(1899)에 지어진 3층 건물로, 원래는 칭다오 주재 프랑스총독 요원이 살던 저택이다. 만년에 서예에 전념했던 캉유웨이는 죽기 4년 전인 1923년에 이 저택을 구입해 문화계 인사를 만나는 접견장소 겸 자신의 전용 서예실로 활용했다.
 
  400평 규모의 ‘천유원’은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다가 지난 1987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현재 ‘천유원’은 제2대 恭親王(공친왕)인 푸웨이(溥偉)가 선사한 전통가구로 장식된 3개의 전시실로 이뤄져 있다. 여기에는 캉유웨이의 며느리인 팡렌(龐蓮)이 기증한 캉유웨이의 遺墨(유묵)을 비롯해 그가 생전에 출간한 여러 저서와 각종 논고를 실은 신문과 잡지 등이 빠짐없이 전시돼 있다. ‘천유원’은 캉유웨이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관이다.
 
 
  <瀛環志略> 읽고 세계정세에 눈뜨기 시작
 
  캉유웨이는 咸豊(함풍) 8년(1858)에 광둥성 광저우부(廣州府) 난하이현(南海縣) 일대에서 명망 높은 紳士(신사: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인 캉후이(康輝)가 嘉慶(가경) 연간에 鄕試(향시)에 합격해 擧人(거인)이 되면서 명문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부 캉짠슈(康贊修)가 거인이 되어 명성을 이어나갔다. 부친 캉다추(康達初)는 캉유웨이가 태어날 당시 태평천국의 난 평정에 종군한 공을 인정받아 장시성(江西省)의 補用知縣(보용지현: 지현후보)이 되었으나 캉유웨이가 11세 되던 해에 病死(병사)했다.
 
  당시 그의 큰할아버지 캉궈시(康國熹)는 1만 권의 장서를 자랑했고, 작은할아버지 캉궈치(康國器)는 태평군과의 전투에서 대공을 세워 광시성(廣西省)의 巡撫(순무)대리까지 승진했다. 캉궈치는 만년에 대규모 宗祠(종사: 종족 사당)를 건립한 뒤 園亭(원정)을 짓고 자신이 소장한 책과 친형인 캉궈시가 소장한 책을 합쳐 ‘二萬卷書樓(이만권서루)’를 세웠다. 이 일을 계기로 그의 집안은 광둥성 내에서 손꼽히는 名族(명족)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캉유웨이는 어렸을 때 이 도서관에서 일족의 동년배와 함께 공부하면서 수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캉유웨이는 어렸을 때부터 唐詩(당시) 수백 수를 암송할 정도로 총명했다. 그의 제자 량치차오(梁啓超)의 <南海康先生傳(남해강선생전)>에 따르면 그는 어릴 때부터 聖賢(성현)의 道(도)에 뜻을 두고 말끝마다 ‘聖人(성인)’을 언급했다고 한다.
 
  캉유웨이는 12세가 되는 同治(동치) 8년(1869)에 광저우(廣州)로 나가 八股文(팔고문)을 익히기 시작했다. ‘팔고문’은 明(명)나라 때 확립된 문체로 주어진 형식에 맞춰 답안을 작성하지 않으면 과거시험 합격이 불가능했다. 그는 ‘팔고문’의 무미건조한 문체를 싫어해 諸子百家書(제자백가서)를 즐겨 읽었다.
 
  캉유웨이는 17세가 되는 동치 13년(1874)에 처음으로 쉬지유(徐繼)의 <瀛環志略(영환지략)>을 읽고 세계정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팔고문’을 더욱 싫어하게 된 그는 19세가 되는 光緖(광서) 2년(1876)에 조부의 강권에 마지못해 鄕試(향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당시 조부는 손자에게 사물을 종합적으로 보는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생장에는 조부 못지않게 모친의 영향도 컸다. 그는 1913년에 펴낸 모친의 행장기인 <哀烈錄(애열록)>에서 모친을 이같이 기렸다.
 
 
  홍콩 방문 후 충격 받아
 
캉유웨이가 말년을 보낸 칭다오의 天游園.
  “나는 50세에 이르도록 모친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청년시절에는 ‘진사합격을 갈망하는 조부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질책을 받았으나 막상 합격했을 때는 ‘관직은 유혹이 많으니 관직에 들어가지 말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는 향시에 낙방한 이해에 3세 위의 장윈주(張雲珠)와 결혼을 계기로 성인이 되고자 하는 행보를 가속화했다. 유가의 성인은 종교에서 말하는 ‘세인트’와 달리 學德(학덕)을 연마한 君子(군자)의 최고 경지를 말한다.
 
  당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종조부의 막역지우인 주츠치(朱次琦)였다. 九江先生(구강선생)으로 잘 알려진 그는 강남 일대에 명성을 떨친 당대의 석학이었다. 구강선생은 고증을 중시하는 漢學(한학: 고증학)과 思辨(사변)을 중시하는 宋學(송학: 주자학)을 종합한 新(신)유학파에 속한다. 신유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經世致用(경세치용)을 중시했다. 훗날 캉유웨이는 <자평연보>에서 스승인 구강선생을 이같이 평했다.
 
  “재주는 송대의 司馬光(사마광)이나 呂祖謙(여조겸), 청대의 顧炎武(고염무)나 王夫之(왕부지)에 필적한다. 그러나 德器(덕기)는 그 이상이다.”
 
  캉유웨이는 구강선생 밑에서 고루한 주자학을 벗어나 孔學(공학: 원래의 유학)을 새롭게 바라보는 전기를 맞았다. 그후 캉유웨이는 구강선생의 곁을 떠나 광저우 西樵山(서초산)의 白雲洞(백운동)으로 들어갔다. 전래의 성리학으로는 결코 구세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경에서 道家(도가)와 佛家(불가)의 서적 등을 탐독하며 救世(구세) 방안을 찾는데 골몰했다.
 
  캉유웨이는 22세 때인 광서 5년(1879) 말에 홍콩을 방문하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장려한 건축물과 청결한 도로, 엄정한 경찰행정 등은 청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후 그는 2년 동안 웨이위안(魏源)의 <海國圖誌(해국도지)> 등을 애독하며 서양사정을 알기 위해 애썼다.
 
 
  기존의 유학 사상에 도전
 
캉유웨이의 제자 량치차오.
  캉유웨이는 광서 8년(1882)에 上京(상경)해 順天鄕試(순천향시)를 치렀으나, 여기서도 낙방했다. 그는 귀향하는 길에 장강 하구의 양저우(揚州)와 전장(鎭江), 상하이(上海)에 들러 江南製造局(강남제조국) 부설 출판사 등에서 번역한 서양서적을 대량 구입해 西學(서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27세가 되는 광서 10년(1884) 가을, 淸佛(청불)전쟁으로 인한 계엄이 펼쳐진 와중에 대규모 배외운동이 일어나 광둥 전역이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문중에서 세운 ‘담여루’에 칩거하며 독서와 사색으로 소일했다. <자편연보>에 따르면 그해 말에 大悟(대오)해 ‘大同(대동)사상’의 萌芽(맹아)를 찾아냈다고 한다.
 
  원래 <禮記(예기)>에서 말하는 ‘大同’ 개념은 前漢(전한)의 儒者(유자)들이 상상 속의 理想鄕(이상향)을 미화해 놓은 것이다. 현실론에서 출발한 공자사상이 추상적인 이상론으로 치우치게 된 데에는 <예기>의 영향이 컸다. 캉유웨이는 ‘대동’의 이상론에 道家(도가)와 墨家(묵가), 佛家(불가), 기독교의 천당과 극락 개념 등을 뒤섞어 ‘대동사상’을 만들어냈다. ‘대동사상’이 힘을 곧 정의로 간주하던 제국주의 시절에 극도로 비현실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캉유웨이는 광서 17년(1891)에 광저우의 장싱리(長興里)에 ‘萬木草堂(만목초당)’을 열었다. 그의 ‘만목초당’ 강의는 그가 會試(회시)에 합격하기 전까지 4년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는 ‘만목초당’을 연 해에 <新學僞經考(신학위경고)>를 펴냈다 (여기의 ‘신학’은 前漢(전한)의 제위를 찬탈해 新나라를 세웠던 王莽(왕망)이 채택한 소위 古文經學(고문경학)을 말한다).
 
  전한 말기에 발견된 고문경서는 공자의 경전이 아니라 왕망의 찬탈을 합리화한 劉歆(유흠)이 위조한 것이라는 게 이 책의 요지였다. 중국의 유학은 유흠이 고전을 정리한 이래 소위 今文經學(금문경학)이 주류를 이뤄왔다. 캉유웨이는 당시의 통론에 반기를 든 셈이다.
 
  당시 <신학위경고>가 던진 파문은 엄청났다. 給事中(급사중) 유렌위안(余聯沅) 등이 상소를 올려 이 책을 불태울 것을 청한 것이 그 증거다. 이를 계기로 캉유웨이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훗날 변법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량치차오와 천첸추(陳千秋) 등이 그를 찾아와 문하생이 된 것도 바로 이해였다.
 
  이후 캉유웨이는 량치차오 등의 도움을 받아 變法(변법: 개혁)의 취지를 뒷받침하는 일련의 논문을 잇달아 발표했다. 광서 20년(1994) 유진산(餘晉珊)이 상소를 올려 <신학위경고>가 “성인을 함부로 비난하고 惑世誣民(혹세무민)했다”는 이유로 그를 탄핵하고 나섰다. 이에 현지조사에 나선 리훙장은 覆奏(복주: 회답 상주)에서 캉유웨이가 스스로 저서를 소각해 사태를 마무리 짓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사건은 학계와 정계에서 그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公車上書 주도
 
  淸日(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 서태후의 회갑을 축하하는 恩科(은과) 會試(회시)가 치러졌다. 그 전해에 광둥의 향시에 합격한 캉유웨이는 은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팔고문’의 문체는 ‘춘추공양학’을 탐구하며 고금동서를 관통하는 원리를 찾고자 한 그의 宏大(굉대)한 氣宇(기우)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과거시험에 대한 집념은 집요했다. 쑨원(孫文)이 애초부터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서양의술을 배우며 혁명의 길로 나간 것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캉유웨이는 이듬해인 광서 21년(1895) 초에 실시된 정과에 응시했다. 이때 그의 애제자인 량치차오도 함께 응시했다. 스승인 캉유웨이는 37세, 제자인 량치차오는 22세였다.
 
  당시 베이징은 가마솥처럼 들끓고 있었다. 리훙장이 이토 히로부미와 체결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랴오둥(遼東)과 타이완을 할양하고 2억 냥의 배상금을 물기로 약정한 사실이 밝혀진 탓이다. 장차 대관이 될 꿈을 품고 있던 거인들은 대제국인 청조가 한낱 섬나라 오랑캐에 불과한 小國(소국) 일본에 패한 사실을 인정키 어려웠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해 3월 두 사람은 조약거부와 시안(西安)으로의 천도를 통한 對日(대일)항쟁, 전면적인 국정개혁 등을 골자로 하는 상소문을 작성한 뒤 과거 응시를 위해 상경한 거인들에게 서명을 촉구했다. 약 1200명의 거인이 서명했다. 이것이 維新變法(유신변법)의 단초가 된 소위 ‘公車上書(공거상서)’다. ‘공거’는 회시를 보기 위해 상경하는 거인들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공거상서’는 선비들의 정치참여를 금지한 관행을 깨뜨린 점에서 일대 파문을 불렀다.
 
  당시 상서를 담당한 都察院(도찰원: 감사원)은 “서명자 대부분이 수험생으로 아직 관직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거상서의 수리를 거부했다. 관직과는 거리가 멀었던 재야의 士林(사림)까지 상소 등을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조선조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공거상서’는 수리가 거부되기는 했으나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캉유웨이는 그때 ‘공거상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그는 지면이 있는 환관으로부터 합격 소식을 전해 듣고는 자신의 합격이 취소될까 우려한 나머지 마지막 순간에 서명에 동참치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자편연보>의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인데, 그렇더라도 ‘공거상서’가 그의 주도하에 이뤄진 것은 확실하다. 당시 ‘공거상서’를 성사시키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닌 애제자 량치차오는 낙방했다.
 
 
  <만국공보> 창간, 언론활동에 나서
 
무술변법을 추진했던 주역들. 왼쪽부터 량치차오, 광서제, 캉유웨이.
  캉유웨이는 순위를 가리기 위한 최종시험인 殿試(전시)에서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해 工部主事(공부주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름만 걸어둔 채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하급관원에서 출발하느니 그간의 명성을 토대로 언론활동을 전개해 자신의 뜻을 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공산이 크다.
 
  그는 그해 4월 富國(부국)과 練兵(연병) 등의 自强策(자강책)을 담은 상소문을 단독으로 올렸다. 두 달 뒤 그는 국회 설치를 골자로 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도찰원은 帝政(제정)을 유지하고 있는 청조의 ‘國體(국체)’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했다.
 
  자신이 구상했던 상서운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캉유웨이는 王公大臣(왕공대신)과 紳士(신사)층을 계몽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는 제자인 량치차오 등과 함께 베이징과 톈진, 상하이 등지에서 신문을 창간하고 학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해 7월 베이징에서 <萬國公報(만국공보)>를 창간한 것이 본격적인 언론활동의 효시다. <만국공보>는 관원들과 신사층의 계몽에 크게 이바지했다. 훗날 리훙장의 탄핵에 앞장섰던 한림원 편수 원팅스(文廷式)와 갑오년 은과 회시에서 장원을 차지한 장젠(張騫) 등이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것이 그 증거이다.
 
  그는 언론활동 못지않게 학회창립에도 발 벗고 나섰다. 그해 8월에 설립된 强學會(강학회)가 그 실례다. 그는 강학회 부설 ‘强學書局(강학서국)’을 통해 국내외 서적을 번역 출간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강학회는 10일마다 한 번씩 모임을 가졌다. 많은 지사와 관원들이 열정적으로 참가했다. 그 속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같은 실력자도 있었다.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열강도 강학회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듬해인 광서 22년(1896)에 그는 홍콩 등지를 여행하며 변법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서양을 배우기 위해서는 일본의 번역서를 참고하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한 그는 일본 서적을 대량 구입한 뒤 메이지(明治)유신을 추적한 <日本變政考(일본변정고)>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이때 각지에서 강학회의 취지에 호응하는 여러 학회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창사(長沙)의 湘學會(상학회)와 우창(武昌)의 質學會(질학회), 상하이의 務農會(무농회), 베이징의 知恥學會(지치학회) 등이 그것이다.
 
  이에 고무된 그는 광서 23년(1897)에 다시 상소를 올리면서 탈고한 <일본변정고>를 함께 바쳤다. 곧이어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정치개혁을 다룬 <俄彼得變政記(아피득변정기)>를 바쳤다.
 
 
  원로대신들 앞에서 變法 주장
 
  당시 성년에 달한 광서제는 養母(양모)인 서태후의 독단적인 행보에 적잖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캉유웨이의 상소와 저서를 받았다.
 
  얼마 후 호부상서 웡퉁허(翁同?)가 캉유웨이의 저서 등을 읽고 그를 칭송하면서 직접 召對(소대)할 것을 건의했다. 웡퉁허는 소년황제인 동치제와 광서제를 연이어 가르친 당대의 ‘帝師(제사)’였다. 이때 恭親王(공친왕) 이신(奕)이 서태후의 반발을 우려해 대신들이 먼저 접견한 뒤 친견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서태후도 이에 동의했다. 이에 總理衙門(외무부)에서 여러 대신들이 먼저 그를 접견했다.
 
  이듬해인 광서 24년(1898) 1월에 캉유웨이는 광서제의 명에 따라 총리아문이 있는 자금성의 西花廳(서화청)으로 갔다. 웡퉁허를 비롯해 태후의 조카인 룽루(榮祿)와 軍機(군기)대신 랴오수항(寥壽恒) 등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실각한 리훙장도 참석했다. 먼저 캉유웨이가 변법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룽루가 목소리를 높였다.
 
  “조상의 법을 바꾸어서는 안 되오.”
 
  캉유웨이가 대꾸했다.
 
  “조상의 법은 조상의 땅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조상의 땅도 지키지 못하는 터에 조상의 법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곳 총리아문도 조상의 법에는 없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는 게 옳습니다.”
 
  랴오수항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변법한단 말인가.”
 
  “법률과 관제를 바꾸는 것이 우선입니다.”
 
  리훙장이 물었다.
 
  “그렇다면 6부는 모두 폐지하고 법칙과 규례도 모두 버려야 한단 말인가.”
 
  캉유웨이가 대답했다.
 
  “지금은 列國(열국)의 각축시대로 더 이상 통일시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법제는 모두 통일시대의 것입니다. 중국이 허약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니 응당 폐지해야 합니다. 한꺼번에 없애지 못할지라도 상의해 개정해야 新政(신정)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웡퉁허가 물었다.
 
  “자금은 어찌 마련할 생각이오.”
 
  캉유웨이가 대답했다.
 
  “일본은 은행에서 지폐를 발행하고, 프랑스는 수입인지를 발행하고, 인도는 토지세를 부과합니다. 우리나라의 크기로 볼 때 제도를 바꾸기만 하면 지금의 10배는 족히 마련할 수 있습니다.”
 
 
  “캉유웨이의 상서는 즉시 올리도록 하라”
 
戊戌變法을 추진했던 光緖帝.
  이어 그는 법률과 재정, 학교, 상공업, 철도, 해군, 육군 등 자신이 평소 생각해 온 변법구상을 상세히 설명했다. 토론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어졌다. 웡퉁허는 그의 주장에 큰 공감을 표시했다. <자편연보>에 따르면 다음날 웡퉁허의 보고를 받은 광서제가 이런 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후 캉유웨이의 상서는 중간에서 누구도 차단하지 말고 그날 즉시 올리도록 하라.”
 
  이에 고무된 캉유웨이는 이해 4월 베이징의 ?東會館(월동회관)에서 ‘保國會(보국회)’를 결성했다. 이는 일종의 정당을 결성해 변법을 뒷받침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보국회의 서문과 章程(장정)은 그가 직접 작성했다. 장정은 保國(보국: 영토보존)과 保種(보종: 민족보존), 保敎(보교: 유학보존) 등 三保(3보)를 기치로 내걸었다.
 
  이때 어사 반칭란(藩慶瀾)이 상소를 통해 “보국회가 백성들을 모아 不道(부도)를 꾀하고 있다”며 그를 탄핵했다. 이해 5월 중간다리 역할을 했던 공친왕이 사망하자 상황이 더욱 불리해졌다.
 
  캉유웨이는 광서제를 직접 움직이기 위해 변법선언을 촉구하는 글을 작성한 뒤 어사 양선슈(楊深秀)를 통해 상서했다. 광서제는 6월 11일에 이에 응하는 형식으로 <明定國是(명정국시)>의 조서를 발표했다.
 
  ‘명정국시’ 선언으로 시작된 變法政局(변법정국)은 9월 21일에 서태후가 정변을 일으켜 訓政(훈정: 成人황제에 대한 섭정)을 선포하기까지 모두 103일간 지속되었다. 이를 흔히 ‘百日維新(백일유신)’ 또는 ‘戊戌變法(무술변법)’이라고 한다.
 
  당시 서태후는 ‘명정국시’에 동의했으나 이는 변법을 촉구하는 조야의 여론을 감안한 일보후퇴에 불과했다. 그녀는 젊은 황제가 변법파에게 휘둘려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메이지 천황과 러시아의 표트르대제를 닮고자 한 광서제의 변법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변법은 자금성 내에서 조서 형태로 진행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이를 집행하는 당사자는 직례총독 이하 전국의 總督(총독)과 巡撫(순무) 같은 각 省(성)의 지방장관들이었다. 하지만 변법에 비판적인 서태후가 존재하는 한, 이들이 ‘유신정국’ 하의 변법방안을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리훙장과 장즈둥을 위시한 대다수 督撫(독무)들은 변법정국의 진행과정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말만 ‘무술변법’일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실행되는 것이 없었다. 지방의 독무 중 공개적으로 지지의사를 나타낸 사람은 호남순무 천바오전(陳寶箴) 정도에 불과했다.
 
  이때 캉유웨이는 상하이에서 <신학위경고>의 주장을 다듬은 <孔子改制考(공자개제고)>를 출간했다. <공자개제고>는 그가 제자들과 함께 6년 동안 자료를 보완한 끝에 내놓은 역저였다. 이 책은 공자를 유학의 祖述者(조술자)가 아닌 創始者(창시자)로 간주함으로써 개혁가 내지 혁명가로 규정한 것이 특징이다.
 
 
  <孔子改制考> 통해 변법 필요성 강조
 
  그는 이 책에서 동서양의 역사발전 단계를 據亂世(거란세: 危亂)와 升平世(승평세: 小康), 太平世(태평세: 大同)의 3단계로 나눴다. 거란세는 군주전제시대, 승평세는 군주입헌시대, 태평세는 민주공화시대에 해당한다. 이는 변법의 불가피성을 증명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커다란 논란에 휩싸였다.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 대신들은 캉유웨이의 저의를 의심했다. <공자개제고>의 논지에 따를 경우 대대적인 변법을 획책하는 캉유웨이는 곧 공자와 동일한 ‘성인’에 해당된다.
 
  캉유웨이는 변법의 요체에 해당하는 제도국이 개설되지 않자 이를 촉구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흔들리는 광서제를 다잡기 위해 패망한 폴란드의 예를 들며 亡國(망국)의 공포감을 불어넣었다. 광서제는 마침내 8월 말에 ‘改圖百度(개도백도)’의 조서를 내리면서 개혁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는 예부주사 왕자오(王照)가 견문을 넓히기 위해 광서제의 외국방문을 상주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당시 만주족 예부상서 후이다푸(懷塔布) 등이 ‘선조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광서제에게 상주문을 전달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왕자오는 “대신이 言路(언로)를 가로막는 등 新政(신정)에 맞서고 있다”며 탄핵하고 나섰다.
 
  광서제는 후이다푸 등 6명의 당상관을 무더기 파면하고, 왕자오를 4품직의 京堂候補(경당후보)에 제수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 사건을 ‘예부6당관 파면사건’이라고 한다.
 
  광서제는 사건 다음날 內閣候補侍讀(내각후보시독) 양루이(楊銳), 刑部候補主事(형부후보주사) 류광디(劉光弟), 內閣候補中道(내각후보중도) 린쉬(林旭), 江蘇候補道(강소후보도) 탄스퉁(譚嗣同) 등을 차례로 접견한 뒤 4품의 軍機章京(군기장경: 군기대신 보좌관)에 임명했다. 이들을 ‘4장경’이라고 한다.
 
 
  위안스카이의 上京
 
무술정변을 일으켜 개혁을 좌절시킨 서태후.
  당시 총리아문에는 실각한 리훙장을 비롯해 10명 가까운 대신들이 있었으나 신정과 관련된 詔勅(조칙)은 이들 ‘4장경’의 손에서 나왔다. 이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이는 보수파 대신들에 대한 정면대결 의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태후는 ‘예부6당관 파면사건’의 보고를 받고 마침내 칼을 뽑아 들었다. 그것은 이해 가을 톈진에서 열리는 열병식을 계기로 광서제를 폐위하는 극약처방이었다.
 
  이 무렵 캉유웨이는 제도개혁을 총괄할 懋勤殿(무근전) 개설에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무근전 개설이 거의 확정될 무렵 캉유웨이는 황제 친위군 창설의 필요성을 상주하면서 新軍制(신군제)의 책임자로 위안스카이를 천거했다.
 
  위안스카이가 룽루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 캉유웨이는 심복인 쉬런루(徐仁祿)를 보내 의중을 탐색케 했다. 위안스카이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그를 대접하면서 캉유웨이를 ‘天下之才(천하지재)’로 칭송했다.
 
  광서제는 톈진에 있는 룽루에게 위안스카이를 상경하라고 명했다.
 
  권력의 향배에 동물적인 후각을 지니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왜 자신을 부르는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죽마고우인 쉬스창(徐世昌)에게 부탁해 베이징의 정황을 살펴보게 했다. 몸값을 최대한 올린 뒤 최후의 순간에 유리한 쪽에 서려는 속셈이었다. 당시 쉬스창은 변법파의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위안스카이가 베이징으로 올라와 法華寺(법화사)에 머무는 사이 광서제는 9월 14일에 ‘4장경’의 일원인 양루이에게 변법을 지속하면서도 서태후 측의 불만을 사지 않는 방법을 강구할 것을 당부하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
 
  광서제는 곧 이화원으로 가 서태후를 만나 변법의 취지를 설득했다. 그러나 서태후는 변법파가 추진하는 개혁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얼마 후 궁중에서는 서태후가 황제를 폐위하고 개혁파를 체포하려 한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져 나갔다.
 
  광서제는 9월 16일부터 이틀 연속 위안스카이와 독대했다. 두 사람간의 독대 내용은 지금까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여러 정황에 비춰 광서제가 위안스카이로부터 충성서약을 다짐 받은 것만은 확실하다. 위안스카이가 독대 후 정3품인 直隷按察使(직례안찰사)에서 정2품인 兵部侍郞(병부시랑) 후보로 승진해 계속 군사훈련을 맡은 사실이 그 증거다.
 
 
  보수파의 반격
 
  종2품을 생략한 파격적인 발탁은 보수파 대신들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위안스카이는 보수파 대신을 찾아다니며 사직의사를 밝히는 식으로 곤경을 모면코자 했으나 곧 보수파 대신들의 권유로 이를 철회했다. 당시 보수파 대신들은 이미 반격의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마침내 9월 17일 한림원 대학사 楊崇伊(양숭이)가 상서를 올려 서태후에게 訓政(훈정)을 건의했다. 황제가 변법파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으니 속히 복귀하여 정치를 돌보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변법파에 휘둘리는 황제를 끌어내려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100일 간 지속된 변법정국을 일거에 뒤집는 ‘戊戌政變(무술정변)’의 신호탄이 여기서 점화되었다.
 
  당시 위안스카이는 쉬스창과 함께 며칠 동안 정황을 검토했다. 결론은 변법파는 결코 보수파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룽루가 통제하고 있는 둥푸샹(董福祥)의 甘軍(감군)과 네스청(?士成)의 武毅軍(무의군)은 각각 4000~5000명이나 되고 베이징에 있는 八旗兵(팔기병)은 수만 명에 달했다. 위안스카이가 지휘하는 新建陸軍(신건육군)은 7000명밖에 안 되었다. 도무지 승산이 없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광서제는 9월 18일 캉유웨이에게 명하여 베이징을 속히 떠나 상하이의 관보 督辦(독판)으로 부임토록 했다. 광서제는 변법을 둘러싼 양파의 갈등이 곧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뇌관에 해당하는 캉유웨이를 멀리 보내고자 한 것이다.
 
  일이 틀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캉유웨이는 최후의 도박을 시도했다. 그것은 자신과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위안스카이를 끌어들여 서태후를 제거하는 방안이었다.
 
  캉유웨이는 탄스퉁에게 위안스카이를 만나 “결사대 수백 명을 이끌고 황제를 자금성의 정문에 오르도록 하여 황권을 회복한 뒤 룽루를 죽이고 보수파 대신을 척결할 것”을 제안하도록 했다.
 
  평소 위안스카이를 불신한 탄스퉁은 그를 거사에 끌어들이는 것 자체를 반대해 왔다. 린쉬도 “위안스카이는 교활한 인물이므로 믿을 수 없고, 일이 성사되더라도 향후 제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위안스카이의 <戊戌日記(무술일기)>는 자신을 찾아온 탄스퉁을 이같이 묘사해 놓았다.
 
  “기세가 흉포하고 거칠어 마치 광인과 같았다.”
 
 
  위안스카이 포섭해 궁정쿠데타 시도
 
위안스카이.
  <무술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밤 탄스퉁은 홀로 법화사로 가서 위안스카이의 의중을 떠보았다.
 
  “당신은 폐하의 特恩(특은)을 입었으니 성은에 보답해야 하오. 폐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군대밖에 없소. 당신이라면 능히 할 수 있소. 만일 그럴 생각이 없다면 우선 나부터 죽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부귀영화를 누릴 것입니다.”
 
  위안스카이가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 것이오. 폐하는 우리의 군주요. 폐하를 구하는 책임은 군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오.”
 
  탄스퉁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지금 룽루가 군을 끼고 반란을 꾀하고 있소. 지금 천하에 온전한 군대는 그대의 ‘신건육군’뿐이오. 만일 반란이 일어나면 그대의 군대로 나머지 두 군을 대적할 수 있소. 그대가 황제를 보호하고 대권을 회복해 황제 주변과 조정을 정리하면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이루는 것이오.”
 
  이어 궁정쿠데타 계획을 적은 문서를 위안스카이에게 건넸다. 룽루 일당을 제거한 뒤 베이징으로 진군한 ‘신건육군’ 중 절반은 이화원을 포위하고 절반은 황궁을 지키는 내용이었다. 위안스카이가 크게 놀라 물었다.
 
  “이화원을 포위해 어찌하려는 것이오.”
 
  “老朽(노후: 서태후를 지칭)를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를 구할 수 없소.”
 
  위안스카이가 말했다.
 
  “태후는 정무를 살핀 30여 년 동안 여러 번 큰 난을 평정해 민심을 얻었소. 나는 늘 부하들에게 충의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쳐 왔는데, 이는 반란을 명하는 것이니 부하들이 듣지 않을 것이오.”
 
  탄스퉁이 말했다.
 
  “그 ‘노후’를 처단하는 일은 내가 할 터이니 걱정 마시오. 그 대신 두 가지 일만 처리해 주시오. 룽루를 죽이는 것과 이화원을 포위하는 일이오.”
 
  위안스카이가 대답했다.
 
  “폐하가 奸賊(간적)을 죽이라고 명하면 사력을 다해 따르겠소.”
 
  탄스퉁이 다짐을 주었다.
 
  “룽루는 曹操(조조)와 王莽(왕망)의 재주를 갖춘 시대의 간웅이니 처단키가 쉽지 않을 것이오.”
 
  위안스카이가 말했다.
 
  “만일 폐하가 나의 진영에 있으면 그를 죽이는 것은 개 한 마리 죽이는 것과 같소.”
 
 
  개혁의 좌절
 
위안스카이와 함께 서태후의 궁정쿠데타에 가담한 룽루.
  탄스퉁이 다시 한 번 다짐 받고자 했다.
 
  “황은에 보답하고 황제 폐하를 불구덩이에서 구해내 나라를 구하는 것이 당신에게 달려 있소. 부귀영화를 탐내 우리를 고발하면 폐하를 해치게 되니 이 또한 당신에게 달려 있소.”
 
  위안스카이가 화를 냈다.
 
  “우리 집안은 3대가 나라의 은혜를 입었소. 어찌 양심을 버리고 대사를 그르치겠소. 황제 폐하와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목숨을 바치겠소.”
 
  당시 탄스퉁은 위안스카이를 ‘호걸’이라고 칭송하며 자신이 마지막으로 내던진 승부수에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와의 회동은 무술변법의 종언을 알리는 弔鐘(조종)에 지나지 않았다.
 
  9월 19일 위안스카이는 룽루와 함께 톈진에서 비밀리에 상경했다. 서태후는 이들을 접견한 즉시 이화원을 떠나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다음날인 9월 20일에 광서제가 위안스카이를 불러 들였다. 위안스카이가 말했다.
 
  “예로부터 개혁은 모두 쉽게 이뤄진 적이 없습니다. 참을성 있게 시기를 기다려 한 걸음 진척시켜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면 필시 폐단이 생깁니다.”
 
  무조건적인 충성을 다짐했던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어조였다. 그는 황제를 알현하고 나온 뒤 주변사람에게 보다 분명한 어조로 이같이 말했다.
 
  “폐하가 직접 군사동원을 명하면 거역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일은 내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날 오후 3시 위안스카이는 톈진에 가서 유신파의 계획을 룽루에게 밀고했다. 다음날인 9월 21일에 사태를 보고받은 서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를 중난하이(中南海)의 瀛臺(영대)에 구금한 뒤 훈정을 선포했다. 이로써 103일 동안 전개된 무술변법은 수포로 돌아갔다.
 
  서태후는 이어 유신파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다. 유신파의 핵심인물인 탄스퉁 등 ‘4장경’을 포함해 캉유웨이의 동생인 캉광런(康廣仁)과 어사 양선쉬(楊深秀) 등이 모두 붙잡혀 베이징의 채소시장에서 참수당했다. 이들을 통상 ‘戊戌六君子(무술6군자)’라고 한다. 무술6군자의 대표자는 당시 34세의 탄스퉁이었다.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자신의 심경을 시로 읊었다.
 
  〈도적들을 죽이고자 결심했으나(有心殺賊)
  국면을 전환시킬 힘이 부족하네(無力回天)
  이제 죽음이 제자리를 얻었으니(死得其所)
  더할 바 없이 통쾌하고 통쾌하네(快哉快哉)〉
 
 
  쑨원에 맞서 입헌군주제 주장
 
변법을 추진하다 처형된 탄스퉁.
  탄스퉁의 장렬한 죽음은 당시 영국 공사관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갔다가 영국군함을 타고 홍콩으로 도주한 캉유웨이의 행보와 대비된다. 무술변법을 주도한 캉유웨이는 왜 이런 옹색한 모습을 보인 것일까.
 
  캉유웨이가 망명생활 중 화교와 유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변조된 ‘의대조’를 적극 활용한 사실을 보면 그 배경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광서 31년(1905) 이후 도쿄에서는 쑨원을 중심으로 한 혁명파와 캉유웨이를 중심으로 한 변법파가 ‘혁명’ 문제를 놓고 치열한 논전을 전개한 바 있다. 이때 ‘의대조’ 변조 의혹이 불거져 나왔다. 당시는 ‘무술6군자’가 모두 처형당한 까닭이 상세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광서 34년(1908)에 서태후가 죽은 후 ‘의대조’ 원본이 드러나면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캉유웨이는 명성에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이를 통상 ‘의대조 변조사건’이라고 한다.
 
  무술정변 당시의 옹색한 도주와 ‘의대조 변조사건’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캉유웨이가 후대에 일신의 揚名(양명)을 위해 변법유신을 이용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캉유웨이는 망명기간 중 立憲(입헌)군주제를 지지하며 공화혁명을 주장하는 쑨원과 치열한 논쟁을 전개한 까닭에 신해혁명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1913년 모친상을 구실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공자를 敎主(교주)로 하는 ‘孔敎會(공교회)’를 만든 뒤 공자교를 國敎(국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죽을 때까지 이 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1923년에 추종자들의 도움으로 칭다오의 天游園(천유원)을 구입해 접견장소로 활용했다. 3년 뒤인 1926년 봄에 상하이의 유궈로(愚國路)에 ‘天游學院(천유학원)’을 창설했다. 그는 장제스(張介石)의 북벌이 한창 진행 중인 1927년 2월 말 천유원에서 생을 마쳤다. 향년 70세였다. 마지막 저서인 <諸天講(제천강)>을 발표한 지 채 1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그는 죽을 때 무일푼이었다. 장례를 치를 돈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제자인 량치차오가 겨우 몇 백 원을 송금해 간신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캉유웨이 연구의 권위자인 샤오궁추안은 <중국정치사상사>에서 그의 삶을 이같이 총평한 바 있다.
 
  “그는 성인도, 성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개혁가이자 이상주의자였던 그가 중국근대의 지성사에 기여한 공은 지대하다.”
 
 
  자만과 조급함 때문에 실패한 개혁
 
  캉유웨이가 주도한 변법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종언을 고한 洋務(양무)운동에 뒤이어 등장한 대표적인 근대화운동이다. 이는 全(전)부문에 걸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데 따른 것이었다. 서구의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과 체제도 배워야 한다는 朝野(조야)의 거센 요구가 변법운동의 동력이었다.
 
  청조 말기의 혼란 상황에 비춰 당시 서구식 민주공화제의 도입은 현명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삼권분립에 의한 민주공화체제를 채택한 신해혁명이 두 차례의 혁명 끝에 실패로 돌아가고 초대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가 황제를 꿈꾸다 엄청난 혼란을 초래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 의미에서 입헌군주제를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코자 한 변법파의 접근방식은 나름대로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방법론에 적잖은 문제가 있었다.
 
  당시 양무운동을 지휘했던 리훙장과 그를 뒤에서 후원했던 공친왕 등은 변법에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다만 성급한 방법론에 이의를 제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변법이 본격화하자 리훙장은 총리아문의 行走(행주: 고문직)에서 면직됐다. 이는 변법파가 그를 변법시행의 걸림돌로 간주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것이 큰 실수였다.
 
  본래 양무운동과 변법유신은 부국강병을 추구한 점에서 차이가 없었다. 방법론상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리훙장을 신임했던 서태후 역시 결코 守舊反動(수구반동)이 아니었다. 광서 26년(1900) 의화단사건 이후 무술변법보다 더 강도 높은 新政(신정)을 주도한 게 그 증거다. 만일 서태후와 말이 통하는 공친왕과 리훙장 등을 적극 끌어들였다면 변법은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무술변법의 실패는 캉유웨이를 비롯한 변법파의 자만심과 조급성이 초래한 自業自得(자업자득)의 성격이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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