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商人정신] 상하이 商人

“가난은 비웃어도 몸 파는 娼妓(창기)는 비웃지 않는다”

  • : 저자없음  
글자 크기 조정
  • 스크랩
  • 본문 음성 듣기
  • 글자 크기 조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상하이 상인은 철저한 자본주의 논리로 무장한 중국의 유대商人이다. 왕안컴퓨터 창립자 왕안(王安), 美 소프트웨어업계의 영웅 왕지아롄(王嘉廉), 월스트리트의 다크호스 차이즈융(蔡志勇), 메이린거그룹 회장 선페이위(沈飛宇), 중궈뎬쯔그룹 회장 첸번웬(錢本源), 홍콩 극장업계 대부 샤오이푸(邵逸夫), 즈장그룹 회장 선원(沈雯)이 대표적인 인물

金德文 자유기고가〈0112500647@hanmail.net〉
상하이(上海)는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과 경제성장의 상징적인 도시다. 21세기 중국의 정치 首都(수도)가 베이징(北京)이라면 경제 수도는 상하이다. 중국의 금융, 정치, 공업생산의 최대 기지이기 때문이다. 또 최첨단 기술과 최신 정보, 최고급 인재가 가장 많은 곳이자, 중국 상품의 수출입 집산지로서 천혜의 조건을 가진 상업 요충지다. 상하이 경제는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과 파급력이 매우 크다.
 
  2007년 상하이市(시)의 GDP는 1조2000억 위안(元)을 돌파했으며, 1인당 GNP는 미화 8000달러가 넘어 중국 최고를 기록했다. 수십층의 초고층 건물들이 솟아있는 난징루(南京路)와 와이탄(外灘)을 보았다면 이곳이 더 이상 중국 경제의 심장이 아니라 세계 경제의 심장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중국을 얘기할 때 상하이를 빼놓고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다. 상하이(上海), 광둥(廣東), 저장(浙江), 푸젠(福建), 장쑤(江蘇) 상인과 장쑤 상인에서 분화해 나온 원저우(溫州) 상인을 지칭하는 현대 중국의 6大(대) 상인집단 중에서 상하이 상인이야말로 단연 으뜸이다.
 
  상하이의 과거는 초라했다. 기원전 춘추시대 때 楚(초)나라 春申君(춘신군)의 봉읍지에 불과했다. 晋(진)나라 시대에는 상하이를 고기 잡는 도구라는 뜻의 扈(후)와 도랑이라는 뜻의 ‘瀆(두)’를 합쳐 ‘후두’라고 불렀다. 지금도 상하이의 약칭을 ‘호’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변해서 된 것이다. 明代(명대)의 뛰어난 학자이며 과학자인 ‘서광계’가 중앙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상하이는 이름없는 변방의 어촌에 불과했다. 13세기까지만 해도 상하이는 작은 어촌마을로 빛을 보지 못한 채 그늘에 감춰져 있었다.
 
  잠자고 있던 상하이가 본격적으로 변화, 발전하기 시작한 시기는 19세기 중반부터다. 1842년 상하이 앞바다에 위용을 드러낸 영국 함대는 해안요새를 무참하게 포격, 중국정부를 굴복시켰다. 중국정부는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하고 5개 항구의 대외개방을 승낙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상하이였다.
 
  1843년 11월 17일, 상하이가 개항되자 서구 열강들은 상하이를 통해 중국의 황금과 은을 약탈해갔다. 그러나 항구 개방이 상하이에 악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서양의 각종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상하이는 변하기 시작했고, 상업도 번창했다. 증기선이 제조되고, 담배와 철광석, 석유의 수출입이 성행했다. 철도가 놓이기 시작하면서 무역이 급속도로 발전했고, 금융업도 덩달아 발전했다. 상하이의 ‘十里洋場(십리양장)’ 시대는 동서양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도시 형태였다.
 
  그때부터 상하이는 중국의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해 ‘창장(長江)과 바다의 연결통로’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중국과 해외 각지의 모험적인 상인들과 노동인력들이 물밀듯이 몰려와 상하이에 정착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40년대 초까지는 영국의 런던, 미국의 뉴욕에 버금가는 세계 3대 도시로 대접 받았다. 20세기 초의 상하이는 ‘기회의 도시’였다. 서방에는 있고 중국에는 없는 물건들이 상하이에는 모두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제1의 비즈니스 거리
 
  오늘날 상하이는 세계 상인과 기업의 각축장이다. 상하이에서도 가장 번화한 난징루는 ‘중국 제1의 비즈니스 거리’로 불린다. 난징루에 사무실이나 가게를 하나 갖는 것은 사업을 하거나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꿈이자 목표이다. 중국 사업가들에게 난징루 진출은 최고의 영예다. 세계 500대 글로벌기업 중 절반 이상이 상하이에 진출해 있으며, 세계적인 금융기관의 숫자가 200여 개에 달한다. 상하이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버전의 국제도시, 세계화의 첨병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그 옛날 중국 관리들이 몰수한 아편을 태우기 위해 배를 타고 건넜던 버려진 땅, 푸둥(浦東) 지역은 정보통신과 생명공학 기업들이 밀집한 첨단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상하이는 중국대륙 1만8000km의 해안선 한가운데 위치한다. 지구에서 가장 큰 대륙인 아시아에서 가장 긴 창장(長江)과 지구 최대의 바다인 태평양이 교차하는 지점에 상하이가 있다. 상하이(上海)의 지명 뜻이 ‘바다로 나가자’인 것도 그런 이유이리라.
 
  중국은 전통적으로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펴왔다. 이런 이유로 상인에게는 ‘간사한 장사치’라는 편견이 씌워졌다. 반면에 근대의 서양은 상업을 중시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와 대외확장정책의 제1 목표는 시장의 확대였다. 서양의 행위방식과 관념의식은 상하이 상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를 통해 상하이 상인은 강력한 실리주의와 경제관념을 갖게 됐고, 상하이만의 깊고 두터운 상업전통을 형성했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서양의 상업 노하우를 받아들인 상하이는 서양문화와 동양문화가 어우러진 대도시다. 중국인은 상하이라는 창문을 통해 서양을 바라보고, 서양인은 상하이를 통해 중국을 체험하고 인식했다. 때문에 상하이 상인들은 경쟁의 개념을 제일 먼저 체득한 상인그룹이며, 다양한 경쟁 테크닉을 구사한다. 그들은 경쟁하지 않으면 정체되는 것이며, 경쟁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국의 저명한 학자인 리중톈(易中天)은 상하이인(上海人)의 특징을 이렇게 말했다.
 
  “자기에게 이롭되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利己不損人). 작은 꾀를 부리되 큰 해악은 없다(小奸無大惡).”
 
  이 말은 상하이 상인(上海商人)의 경제관과 처세관을 압축적으로 설명해 준다. 상하이는 ‘돈 앞에 만인은 평등한’ 도시다. “가난은 비웃어도 몸 파는 娼妓(창기)는 비웃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상하이 사람은 합리적이고, 계산에 철저하며, 실용적인 생활철학을 갖고 있다. 따라서 상하이 상인을 가리켜 ‘중국의 유대상인’이라고 부른다.
 
 
  경쟁개념 가장 먼저 체득
 
왕안컴퓨터의 창립자 왕안.
  중국의 전통적인 상인집단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들은 닝보(寧波) 상인과 안후이(安徽) 상인이다. 개항 초기 중국 각지에서 상하이로 몰려온 상인들의 주축 역시 이들이었다. 상하이가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외국인 거류지가 점차 번화해지자 이들 외지 이주자들은 스스로 상하이 사람임을 자처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상하이 상인으로 자리 잡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상하이는 무역, 금융, 운수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방직, 선박, 기계, 전기, 자전거, 제약 생산 등의 업종에서 중국 내 선두를 차지했다.
 
  개혁개방 이후 상하이는 민영경제가 빠르게 번영했고, 수많은 창업 신화와 성공 신화를 만들어냈다. 상하이의 찬란한 역사와 상업적 전통은 자신감 넘치고, 딱 부러진 상하이 상인의 기질을 키워내는 밑거름이 됐다. 도시의 형성과정처럼 상하이인들도 상업적 개척정신이 강해 이전 시대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획기적인 발상으로 중국 경제발전의 선두대열에서 활약하고 있다.
 
  상하이의 역사는 상하이 상인들에게 자신감이라는 재산과 강한 모험정신을 남겨주었다. 즉, 도시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바탕으로 상하이 상인들은 중국에서든 해외에서든 거침없는 추진력과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실패 속에서도 잽싸게 일어났고, 바닥으로 떨어져도 금방 다시 올라섰다. 상하이 상인들은 겉멋을 중시하기보다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처신했다. 이는 대담함과는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모순’의 조화 속에서 찬란한 성과들을 창조해냈다.
 
  상하이는 예로부터 치열한 경쟁이 거듭되는 격전지였다. 구시대 상인이든 신세대 상인이든 그들은 모두 ‘상하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다.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도 과감한 편이다. 상하이 상인들의 경영 안목은 광범위하고 장기적이면서 주도면밀하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과 긍지가 대단하다. 한번 시작한 일에 대해서는 흐지부지 끝내는 법이 없고, 무슨 일이든 장기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처리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항상 시대를 선도하고, 유행을 창조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돈을 버는 것은 흙 속의 금을 캐내는 것과 같다’
 
美소프트웨어 업체 CA사 창업자 왕지아롄.
  상하이 상인들은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異國(이국)문화에 대한 문화적 포용력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 중국 전통문화에 서구적 요소를 융합하는 시도를 가장 많이 해 왔다. 그들은 서양의 생활방식이나 생산기술, 관리 노하우들을 빠르게 흡수해 새로운 생활환경과 비즈니스 환경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 상하이인들 대부분은 고향을 떠나기 싫어하지만, 역사적인 사건 때문에 인재들이 대량으로 상하이를 빠져나갔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뛰어난 적응력 덕에 그들은 낯선 곳에서 금방 뿌리를 내리고 두각을 나타냈다.
 
  미국 상업계에 터를 잡은 유명한 화교 갑부들 중에서도 상하이 상인들의 활약은 단연 돋보인다. 한때 IBM과 경쟁했던 왕안컴퓨터 창립자 왕안(王安), 미국 소프트웨어업계의 영웅 왕지아롄(王嘉廉)을 비롯해 월스트리트에서 ‘증권계의 다크호스’로 회자되었던 차이즈융(蔡志勇)도 미국인들 사이에 유명한 상하이 출신 화교기업인 중 한 사람이다.
 
  상하이 상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 중에 ‘빠펀(分)’이라는 말이 있다. 돈을 버는 것은 흙 속의 금을 캐내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흙 속에서 금을 캐냈다고 하면 모두들 소문을 듣고 달려와서 흙을 파헤칠 것이다. 상하이 상인의 돈 버는 방식과 태도가 이와 비슷한데, 타고난 장점을 이용해 최대한 이익을 얻기 위해 달려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즉, 돈을 벌기 위해 수단을 중시하는 동시에 속도에 민감하다. 그러지 않으면 다 잡은 듯했던 먹이도 잠시 방심하는 사이 경쟁자들에게 빼앗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기회를 잡으면 그들은 속도와 수단을 앞세워 단숨에 치고 나간다.
 
  상하이 상인들은 모험심이 강하고 업무처리가 과감하다는 평을 듣는다. 20세기 상하이는 각지의 엘리트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황금의 땅으로 변모했다.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는 가운데 조금만 우물쭈물해도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과감한 결단력이 없으면 승세를 장악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쇠뿔도 단김에 빼는’ 과감한 의사결정은 상하이인의 특징으로 굳어져갔다.
 
  메이린거(美林閣)그룹 회장인 선페이위(沈飛宇)도 과감한 행동파 인물 중 하나다. 화가를 꿈꾸었던 선페이위는 우연히 요식업에 뛰어들어 ‘메이린거’라는 상호로 수천㎡가 넘는 초대형 레스토랑을 상하이 곳곳에 열어 모두 성공시켰다. 나중에는 베이징까지 진출해 명성을 얻은 후 호텔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이는 선페이위의 과감함과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이미 대중화된 레스토랑 브랜드를 호텔까지 확장한 그는 관광업으로도 뻗어나갔다. 황푸장(黃浦江) 유람선을 직접 운영함으로써 레스토랑과 관광을 연계하거나 호텔과 관광을 연결했다. 이로써 상하이를 찾은 관광객들을 자신의 호텔로 끌어들이고, 호텔에 숙박하는 손님들에게 레스토랑 이용 혜택을 부여하는 등 시너지 효과를 창출했다.
 
 
  상하이人과 베이징人의 차이
 
1930년대 상하이 공동조계를 순찰하는 외국 군인들.
  융통성이나 민첩성으로 보면 상하이 상인들은 광둥 상인(廣東 商人)들의 명석한 지혜와 두뇌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광둥 상인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상하이 상인들은 일단 기회를 붙잡으면 온갖 전술을 동원해서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도 상하이 상인들의 손에 들어가면 ‘명품 보석’으로 재탄생된다. 이러한 능력은 방직, 일반화학, 정밀기계 등의 부문에서 두드러졌다.
 
  상하이 상인들은 지존의 자리에 오르면 수십년, 심지어 수백년이 지나도 꾸준히 자리를 지켜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개혁개방이라는 변혁의 시대에도 상하이 상인들은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으로 무장하고 현대 중국의 경제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상하이 상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 속에서 상품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사업을 하는 방식, 사업에 대한 포부, 사업에 대한 가치관 등 곳곳에서 상하이 상인들의 상술의 깊이와 상업적 감각이 발견된다. 그들은 광범위한 지식과 획기적인 마인드, 확고한 원칙을 바탕으로 ‘기회’를 포착하여 발전시켜 나간다. 누군가 그랬듯이, 중국에서 상하이 상인들의 행동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으면 상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릴 것이다.
 
  상하이 사람과 베이징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베이징은 명·청 시대의 수도였던 만큼 베이징 사람은 정치적 본능을 갖고 있으며,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차별이 머리에 박혀 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과거급제를 통한 ‘재산’과 ‘권력’의 획득이었다. 당연히 손톱만큼의 이익을 얻기 위해 싸우는 상인은 멸시의 대상이었다.
 
  베이징 사람들은 외지에 가면 공직자는 공직자 무리로, 학자는 학자 무리로 자기 계층의 울타리로 스며든다. 반면 상하이 사람들은 우선 상하이 사람에게 가서 상하이 문화를 함께 전파하며, 그곳을 ‘샤오상하이(小上海)’로 변화시킨다. 상하이 사람에게는 상하이 사람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이들은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왕왕 상대는 아랑곳없이 자신이 상하이 사람이라는 화두로 말머리를 꺼내기 좋아한다. 이런 이유로 중국 어디를 가더라도 ‘샤오상하이(小上海)’는 있지만, ‘샤오베이징(小北京)’은 없다.
 
  상하이는 인적 구성부터가 베이징과 다르다. 100년 이상 상하이에서 살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먹고살 길을 찾아 내륙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외국의 모험가까지 가세했다. 淸朝(청조) 말까지만 해도 부동산과 아편무역을 통해 수백배의 이익을 구가하던 상하이는 외국인의 눈에 매력적인 땅이었고, 이익을 좇아 몰려든 외국인들과 상하이인의 경쟁이 시작됐다. 생존을 위한 경쟁으로 인간의 심성도 바뀌었다. 투자를 위한 선견지명이 생겼는가 하면 ‘모 아니면 도’ ‘이기면 아군, 지면 적군’이라는 투기심리도 커져 갔다. 상하이인이 갖고 있는 흥정 실력과 허영심도 필요가 만든 산물이다.
 
 
  생존을 위해 商규칙 준수
 
상하이 재래시장의 상인들.
  베이징에서 발행되는 〈커쉐토우즈(科學投資)〉라는 잡지는 몇 해 전 중국 각지의 상인들의 성향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상하이 상인들은 중국에서 최고의 비즈니스 자질을 가졌다”고 보도했다. 이 잡지 분석에 따르면, 상하이 상인들은 사업할 때 조그만 문제도 쉽게 넘기지 않는 까다로운 경향을 보인다. 이런 성향 덕택에 손해를 보는 일이 드물다. 상하이 상인들과 사업할 때에는 충분한 인내심이 요구된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상하이 상인들은 자신이 상하이 사람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아라상하이런(阿拉上海人)’이라는 표현이 있다. ‘나는 상하이인이다’라는 뜻의 상하이 현지 사투리다. 상하이 사람들은 돈에 대한 집착도 강하지만 ‘상하이인(上海人)’이라는 ‘자존심’도 강하다. 때문에 이들은 타 지역 사람들에게 잘 양보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중국에서는 法治(법치)보다는 人治(인치)가 앞선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상하이는 중국에서 법치관념이 가장 앞선 곳이다. ‘10년 동란’이라 불리는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사회질서와 경제활동이 비교적 잘 유지되었고,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통치하던 租界時代(조계시대)에도 외국의 지배로 인해 사회질서가 유지되었던 역사 경험의 덕분일 것이다.
 
  상하이는 원래 이민사회다. 외지인이 처음 상하이에 오면 기댈 만한 전통 세력이나 연줄이 없어 자신의 실력으로 먹고 살아야 하기에 생존을 위해서는 규칙을 지켜야 했다. 이 같은 행위방식이 지속되면서 합리성, 평등 및 규범을 추구하는 관념과 관습을 갖게 됐다. 이런 배경에서 상하이는 이성적인 도시로 성장하게 됐다. 상하이 상인과 장사를 할 때는 이런 특징에 따라 법규와 절차를 지켜야 한다.
 
  절대적인 통계는 아니지만 상하이인은 대체로 違法的(위법적)인 사업을 하지 않는다. 준법정신은 상하이 상인들이 갖고 있는 비장의 무기 중 하나다. 그들은 일단 계약에 이르기까지는 양보 없는 전쟁을 하지만 계약을 마치면 계약에 따라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양의 비즈니스 노하우를 체득한 결과 계약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 沿海(연해)지역에서 밀수가 성행했고 암시장(黑市)이 창궐했지만 여기에 참여한 상하이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중국 북방의 여러 지방에서는 위법과 탈법에 의한 돈벌이가 장사의 비결로 통해 가짜 상품을 만들고 탈세하는 것이 일반화됐지만 이에 동참하는 상하이인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상하이인은 장사 세계에서의 ‘君子(군자)’ 또는 ‘양반’이라는 평을 들을 만하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 상하이 상인들이 구사하는 ‘전술’도 두루 쓰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전통적인 중국인은 이익을 경시하고 의리를 중시한다. 대범하고 호탕함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상업계에서는 정밀한 계획에 따라 면밀한 계산과 세세한 것까지 따지는 생활방식이 요구됐다. 상업전통의 연마는 상하이 상인으로 하여금 독자적으로 뚜렷한 계보를 형성하게 했다.
 
 
  “中華라는 자부심 넘어 일종의 오만함 보여”
 
  상하이인을 상대로 돈을 벌기는 쉽지 않다. 상하이 상인은 영악하고 신중하다. 상하이인의 영악함은 일상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작은 야채가게에서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신사와 상인이 단돈 몇 푼 때문에 한동안 옥신각신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상하이 사람들은 상인이든 손님이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쉽게 양보하지 않는다.
 
  상하이 상인은 모두 경제전문가 아닌가 할 정도로 일단 돈이 되는 물건을 보는 눈이 정확하고 이치를 따지는데 능숙하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자세를 견지하고 사전에 거의 모든 사항을 체크한다. 그러다 보니 상하이 상인은 가끔 작은 문제로 너무 시간을 길게 끌어 상대를 지치게 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1985년 미국의 스포츠용품사인 나이키가 상하이에 현지 공장을 짓기 위해 2년에 걸쳐 협상을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상하이를 포기하고 운동화 제조공장을 광저우로 移轉(이전)했다. 한 미국 상인은 “상하이 사람은 중국인이 외국인과 거래할 때 통상적으로 가지는 ‘中華(중화)’ 자부심을 넘어서 일종의 오만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상하이는 외국인 투자가 필요 없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상하이 상인은 너무 치밀하기 때문에 그들과의 합작은 쉽지 않다. 상하이 상인은 협상을 진행하기 전에 대부분 사전에 시장과 상대방의 상황에 대한 자질구레한 것까지 조사하고 분석한 다음 자리에 앉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충분한 준비를 거친 뒤에 담판을 벌인다. 하지만 충분히 인내하여 담판에 성공하고 계약서에 서명하면 그 후의 진행은 순조롭다.
 
  “너무 치밀해서 얄밉다.”
 
  중국의 다른 지역 상인이 상하이 상인에게 내리는 보편적인 평가다. 상하이인들은 지나치게 총명함을 내세우기 때문에 ‘門檻精(먼칸징)’ 또는 ‘門坎精(먼칸징)’이라 불리는데, 문지방을 의미한다. 중국 전통사회에서는 모든 건물의 문지방은 주인의 지위에 따라 높이가 달랐다고 한다. 즉 지위가 높을수록 문지방의 높이가 높았는데, 허장성세를 부리는 사람들은 몰래 규정 이상으로 문지방을 높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과시했다. 영악한 사람들은 서로 다른 높이의 문지방을 준비하여 평소에는 높은 문지방을 사용하고, 고관이 방문하면 낮은 문지방으로 교체했는데, 이를 ‘조립식 문지방(活絡門檻)’이라 한다. 나중에 문지방은 일하는 요령, 솜씨, 비결을 의미하게 됐다.
 
  징(精ㆍjing)은 명사로는 ‘요정’ ‘요물’을 가리키고, 형용사로는 ‘총명하다’ ‘똑똑하다’ ‘영악하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상하이인에 대한 지칭으로서의 ‘먼칸징’은 꾀돌이를 가리킨다고 보면 될 것이다.
 
 
  화바오 에어컨 수출 탈세사건
 
상하이 상인들의 경영전략을 다룬 장쥔링·지아궈씨 著 <商略>.
  고금을 막론하고 상하이 상인들은 영리하고 유연한 면과 성실하고 우직한 두 가지 상반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상하이 본토에서 성장한 상인들은 기업을 경영할 때 다른 지역의 기업가들보다 자신의 기업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생사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기업의 병폐를 정확히 진단하고 이를 치유하는 ‘의사’로 변신한다.
 
  중궈뎬쯔(中國電子)그룹 회장 첸번웬(錢本源)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1996년 첸번웬이 ‘화바오(華寶)에어컨 수출 탈세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의 주범은 외국기업이었다. 그러나 중국 세무국은 첸번웬에게 세금환급 중단조치를 내렸고, 이로 인해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첸번웬은 그 사건을 계기로 기업의 경영상태를 개선하지 못하면 영원히 정상에 다시 올라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첸번웬은 구조조정과 기업의 내실화를 중궈뎬쯔의 발전전략으로 삼았다. 첸번웬은 49개 계열사의 분업경영과 유기적 연합을 지향하며 제품 혹은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자산 재편에 돌입했다. 성장가능성이 있는 부문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전문화 시장을 형성하지 못하는 계열사들은 퇴출했다.
 
  시장경제체제가 본격 실시된 후 사람들은 첸번웬이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누리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빠르게 변화에 적응하며 지역을 초월한 다국적 경영을 선보였다. 연이은 시련과 위기 속에서도 중궈뎬쯔는 더욱 견실하고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거듭났다.
 
  사업 스타일에서도 상하이 상인과 광둥 상인은 여러 면에서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광둥 상인들은 다원화된 경영방식을 선호하는 반면 상하이 상인들은 가장 자신 있는 시장을 튼튼하게 구축한 다음 그것을 구심점 삼아 방사형으로 판도를 확장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발전공간을 확대시키면 기업이 어느 부분에서 손실이 생겼을 때 또 다른 부분의 자원을 끌어다 메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경영마인드를 ‘平衡術(평형술)’이라고 한다.
 
  성공한 상하이 상인들의 가슴 속에는 그들만의 경영전략이 숨어 있다. 이는 계책이나 속임수가 아니라 사업운영 과정에서의 기회포착 능력, 사고방식의 전환, 목표달성을 위한 노력에서 생성되는 상업적 수완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날카로운 사업가적 두뇌와 유연성 있는 행동으로 표출된다.
 
  ‘홍콩 극장업계의 대부’라 불리는 샤오이푸(邵逸夫)는 극장 사업에 이어 쇼브라더스 영화사를 운영하다가 시대적 조류를 간파하고 재빨리 홍콩무선TV를 창립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10억달러에 육박했을 정도였다.
 
 
  상하이 상인과 사업 時 주의할 점
 
  개혁개방이 한창이던 시절 상하이에서는 동종업종 내 치열한 상업전쟁이 빈번히 발생했다. 시장경제의 여건이 덜 성숙한 시기에 상하이인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이고 과감한 상업정신을 발휘했다. 그러나 경쟁수단이 여전히 원시적이고 非(비)이성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물불 가리지 않는 치열한 시장경쟁에서 경쟁자들은 ‘가격’을 무기로 내세우는가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거나, 심지어 제거하려 했다. 그런 출혈경쟁은 결국 ‘상처’만 남기고 끝났다.
 
  상하이 상인은 출혈경쟁의 문제점을 깨달은 후부터는 공격성향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실을 다지고, 自社(자사)의 핵심 경쟁력을 키움으로써 새로운 경쟁국면에 적응하고자 노력했다.
 
  2002년 <포브스>가 선정한 중국 갑부 중 한 사람인 즈장(紫江)그룹 회장 선원(沈雯)은 포장인쇄산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포장재시장에서 깨지거나 타기 쉬운 유리병이 조만간 PET병으로 대체될 것을 예감했다. 중국 맥주시장은 매년 2000여만t이라는 거대한 규모였고, 화장품시장에서도 PE, PET 등의 포장재질을 사용할 수 있는 제품규모가 엄청났다.
 
  선원은 5년에 걸친 연구와 분석을 통해 다중구조 PET병을 제작하는 핵심기술을 터득했다. 그는 양질의 PET 맥주병과 환경친화적인 PET 포장재를 선보였다. 중국 내 포장인쇄업체들이 필사적으로 가격경쟁을 하는 사이, 그는 핵심경쟁력을 제고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서로 물고 뜯는 과당경쟁의 늪에서 벗어나 기술과 차별성으로 시장을 공략한 덕에 즈장그룹은 더욱 강하고 단단해질 수 있었다. 토종 상하이인 선원의 성공신화는 상하이 상인의 성격과 지혜를 보여준 압축판이었다.
 
  오랜 상업전통의 영향으로 상하이인들은 여타 지역의 중국인과 달리 개인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가치관을 갖게 됐다. 그들은 정치에는 무관심하지만 실속을 따지고 개인과 가정생활에 관심이 크다. 실속을 추구하는 상하이인은 아무리 복잡한 상황에서도 최대 이익의 소재를 재빨리 찾아낸다. 상하이인은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체면이나 명성보다는 경제적인 이익을 가장 먼저 고려한다.
 
  상하이 상인에게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장사의 관건은 돈벌이 여부이며, 장사를 위한 담판에서는 이익이 가장 중요하다. 상하이 상인에게 있어 대상이 누구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상하이에서는 상대의 인품과 외모는 그리 큰 작용을 하지 못한다.
 
  상하이 상인과 사업을 할 때는 다음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 상하이 상인의 요구 수준을 개략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높은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지 않으면 거래가 진행되기 힘들다. 둘째, 상하이 상인과 거래를 할 때 폭리를 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셋째, 세상 물정에 뛰어난 상하이 상인들은 지나친 요구는 하지 않으며, 얻어야 할 이익을 얻으려 할 뿐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상하이는 현대 세계의 비즈니스 엘리트를 주조해낸 거대한 용광로다. 이 용광로가 배출한 근현대 중국 비즈니스 엘리트들은 상하이에서 출세하여 전국으로, 세계로 뻗어나갔다. 중국과 사업을 하려는 비즈니스맨이라면 상하이 상인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